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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주민의 이중과세 시정 청원서와 일본어민의 주권침해에 대한 첩정>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이번 편에는 국운이 기울어가는 대한제국기 1907년과 왕조 말기 1890년에 발생한 청원서(請願書)와 첩정(牒呈)에 관한 2건의 문건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산도 주민들의 미역세(毛藿稅) 관련 청원서는 파견된 세금 징수 관리가 황제의 칙령을 무시하고 미역세(毛藿稅) 500냥을 추가로 부과하면서, 이중과세로 고충이 크다고 행정적으로 호소한 문서이고, 두 번째는 일본 어민들이 저지른 무단 불법 점유와 무력 저항에 대한 보고와 청원을 올린 문건이다.
당시 구한말(19세기 후반~20세기 초)에는 일본 어민들의 조선 진출로 인해 대한제국의 어업권 침탈, 경제적 수탈, 그리고 영토 주권 위협이라는 심각한 피해를 가져왔다. 물론 비단 거제도만의 피해가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주요 피해 내용으로는 어업권 침탈 및 어장 상실, 어업 방식의 변화와 수산 자원 고갈, 영토 및 해양 주권 침해(울릉도, 독도 등), 조선 어민에 대한 폭력과 압박 등이었다. 이러한 일본 어민들의 진출은 단순한 어업 활동이 아니라,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경제적 침략의 일환이었다.
먼저 ①「1907년 6월 한산도 주민들의 미역세(毛藿稅) 관련 청원서(請願書)」는 경남 진남군 한산도 주민들이 세금 징수 파견 관리(派員)가 이중으로 세금을 징수하여 살길이 막막하다고 경리원(經理院)에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이미 균역법에 따른 해세(海稅)를 내고 있었는데, 1901년부터 미역세(毛藿稅) 500냥이 추가로 부과되어(이중과세) 고충이 크게 되었다. 고종 황제가 작년에 "주민들이 미역과 김을 자유롭게 채취하게 하고 세금을 받지 말라"는 칙명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파견된 관리(派員)가 이를 무시하고 500냥 이상의 가혹한 추가 징수를 일삼아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처지에 놓였다. 청원하건대, 부패한 관리를 보내지 말고 주민들이 직접 500냥을 경리원에 납부할 수 있게 하거나 미역세를 500냥으로 영구히 고정(永定稅額)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경리원에선 “부당한 징수는 단속하겠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내놓았다.
다음으로 ②「1890년 윤2월1일 일본 어민들의 불법 점유와 무력 저항에 대한 첩정(牒呈)」는 거제(巨濟)에서 보내온 통첩(來牒)으로, 일본 어민들이 거제도 남부면 도장포에서 머물며 조약을 어기고 횡포를 부린 정황을 상세히 기록한 문서다. 조선말기 일본 어민들이 조선 연안에서 세력을 확장하면서 발생하는 지역 주민들과의 마찰과 주권 침해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일본 어민들이 선박을 정박하여 허가증(執照)도 없이 어로 활동을 하고, 육지에 무단으로 막사(結幕)를 설치했다. 이에 가배량 만호(萬戶)가 이를 제지하고 철거를 요구하자, 총칼과 창을 휘두르며 위협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이들을 어떻게 처분할지 상부의 지시를 기다린다는 내용으로 보고를 마무리하고 있다. 국운이 기우는 시절에 일본인들이 조선의 행정력을 무시하고 일본 영사권만을 내세우는 치외법권적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1) 「1906년 6월 한산도 주민들의 미역세(毛藿稅) 관련 청원서(請願書)」
다음 청원서(請願書)는 1906년(광무 10년) 6월, 경상남도 진남군 한산도(현재의 통영시 한산면 일대) 주민들이 국가 재정을 관리하던 경리원(經理院)에 제출한 청원서와 그에 대한 지령(답변)입니다. 당시 섬 주민들이 겪었던 경제적 고통과 관료들의 부패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료다. 또한 이 문서는 대한제국 말기, 황실 재산을 관리하던 경리원이 어장 등에 세금을 매겨 재원을 확보하려던 과정에서 지방관과 주민 간의 갈등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한산도 내 여러 마을(비진, 용초, 호두, 죽도, 봉암, 추원 등)의 당시 명칭과 주민 대표들의 실명이 기록되어 있어 지역사 연구에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내용인즉, 과도한 세금과 관리의 횡포에 청원한다. 한산도 주민들은 농사지을 땅이 없어 미역(毛藿)과 김(海苔)을 채취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미 균역법에 따른 해세(海稅)를 내고 있었는데, 1901년(신축년)부터 미역세(毛藿稅) 500냥이 추가로 부과되었다(이중과세). 고종 황제가 작년에 "미역을 주민들이 자유롭게 채취하게 하고 세금을 받지 말라"는 칙명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파견된 관리(派員)가 이를 무시하고 500냥 이상의 가혹한 추가 징수를 일삼아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처지에 놓였다.
그래서 주민들이 요구한다. 세금 자체를 안 내겠다는 것이 아니라, "부패한 관리와 엮이기 싫으니 우리 식대로 내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부패한 파원(派員)을 거치지 않고, 주민들이 직접 500냥을 경리원에 납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미역세를 500냥으로 영구히 고정(永定稅額)해달라고 요구했다. 외부 관리를 보내지 말고, 섬 주민 중 신망 있는 사람을 파감(派監)으로 정해 세무 업무를 맡겨달라고 청원했다.
*경리원에서 8월 4일 내려진 답변(지령)의 요지는 "절차상 직납은 안 되지만, 불법 징수는 엄단하겠다"는 원론적인 입장이었다. 세금을 거두는 전담 파원이 이미 있으므로, 주민들이 직접 납부하는 방식은 전례가 없어 허가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다만, 정해진 액수 외에 추가로 뜯어내는 과외남봉(科外濫捧)은 명백한 불법이므로, 이를 엄격히 조사하고 금지하여 주민들이 원통함을 호소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지시했다.
*요약건대, 부패한 세금 관리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한산도 주민들이 "차라리 세금을 우리가 직접 모아서 낼 테니, 제발 부패한 관리가 중간에서 뜯어가지 못하게 해달라"고 국가에 요청하는 절박한 호소문이다. 하지만 국가(경리원)는 세금 제도의 절차를 이유로 직접 납부는 거절하되, 부당한 징수는 단속하겠다는 원론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 덧붙여 이번 「1907년 6월 한산도 주민들의 미역세(毛藿稅) 관련 청원서(請願書)」는 발신자가 진남(鎭南)의 박문삼(朴文三), 최성열(崔性烈), 박화순(朴化順) 등(等)이고 수신자는 경리원경(經理院卿)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경상남북도각군소장(慶尙南北道各郡訴狀)』이다.
*「1907년 6월 한산도 주민들의 미역세(毛藿稅) 관련 청원서(請願書)」*
한산도 주민들의 미역세(毛藿稅) 관련 청원서. 광무 10년(1906년) 6월 일. 청원서. 경상남도 진남군 한산도 주민 일동.
*본 섬은 한 덩어리 외로운 섬으로, 전에는 거제군에 속해 있다가 지금은 신설된 진남군에 소속되었습니다. 백성들은 농사나 누에 치는 일이 전혀 없고, 오직 김(海苔)과 미역(毛藿)을 채취하여 생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일찍이 균역세와 해세(바다 세금)를 바쳐왔으나 형편이 넉넉지 않아 걱정하던 중, 지난 1901년(신축년)부터 미역세(毛藿稅)가 이중으로 설정되어 매년 500냥씩 억지로 내게 되었습니다. 원통함을 호소하며 세금을 면해보려 했으나 작고 약한 처지라 어찌할 도리가 없었고,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져 남은 주민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세금 징수가 너무 가혹하다는 원통한 사정이 황제 폐하께까지 알려져, 작년에는 특별히 "한산도 미역은 백성들이 스스로 채취하게 하고 세금을 거두지 말라"는 칙명(임금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런데 파견된 관리(派員)는 "백성이 스스로 채취하게 하라"는 칙명은 무시한 채, 오히려 예전의 500냥 외에 추가로 더 많은 액수를 억지로 거두려 하니, 백성들이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
*이제 엎드려 바라건대, 이미 시행 중인 세금을 감히 면제해달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올해 납부해야 할 미역세 500냥을 저희가 직접 준비하여 기다리고 있으니, 더 이상 부패한 관리(파원)와 엮여 폐단이 생기지 않도록 특별히 분부하시어 나라에서 직접 받아 주십시오. 또한 이제부터 본 섬 주민들이 내는 세금 중 해세는 본 군(진남군)에서 거두게 하시고, 미역세는 500냥으로 세액을 영구히 고정하여 문서를 만들어 주십시오. 그리고 섬 주민 중에서 풍파를 잘 알고 목숨을 아끼는(책임감 있는) 사람을 뽑아 파감(관리자)으로 정해주시면, 그가 매년 미역세를 직접 관청에 바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처분하시어 이 외로운 섬의 백성들이 각자 삶을 보존할 수 있게 해주실 것을 간절히 호소하오니, 부디 살펴주시어 올해 500냥부터 파견 관리에게 맡기지 말고 직접 받아주시고 영구적인 규정을 내려주시길 천만번 엎드려 비옵니다. 광무 10년(1906년) 병오 6월 일.
*청원인 : 비진동 임원 박문삼, 용초동 임원 최성렬, 호두동 임원 박화순, 죽도동 임원 정원오, 봉암동 임원 김응필, 추원동 임원 이내원 등. 경리원경 각하 처분 앞.
*[경리원의 답변(지령)] 진남군 한산도 주민들이 미역세 500냥을 직접 바치고, 관리자(파감)를 섬 사람으로 정해달라는 건에 대하여.
*[지령] 해당 세금은 이미 전담하는 파견 관리(파원)가 있으니, 규정에 없는 주민 직접 납부(직납) 방식은 허가할 수 없다. 하지만 정해진 액수 외에 함부로 더 거두는 것(과외남봉)은 법 밖의 일이니, 엄격히 조사하여 금지함으로써 다시는 주민들이 원통함을 호소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광무 10년(1906년) 8월 4일. 해당 파견 관리에게 전달함.[光武十年六月 日. 請願書. 慶尙南道鎭南郡閑山島居民等狀. 事實段은 本島가 以一丸孤島로 前以爲巨濟郡境界요 今附鎭南郡之新設이온바 民無農桑之業고 只採海苔毛藿爲資生에 曾有均役海稅之徵納도 惟患不贍, 而又自辛丑年으로 疊設毛藿稅와 每一年以五百兩錢을 責納에 呼冤圖免이 殘弱無奈와 民多渙散고 居民無多온되 徵稅가 太過 冤情이 自然達于天聽시와 昨年分에 特有本島毛藿을 許民自採勿捧之勅命이거, 該派員이依勅命許民自採은 新反이 今以五百兩外加數責納즉 民何聊生의닛가? 今伏願以已行之稅을 幸不欲圖免이오랴 今年條所納在本島毛藿稅五百兩을 矣等擔負來待者此은 更不欲與派員相幹生弊之主訴이온즉 特爲分付捧上이시고, 自今以後로 本島居民所納均海稅은 收納本郡케옵고 毛藿稅은 以五百兩으로 永定稅額成完文, 以本島居民中, 有風力惜身命者로 擇定派監시와 同毛藿稅을 年年直納院下케 處分시와 使此孤島生民으로 各自保存오물 敢此仰訴于愛民矜恤之下살게온, 參燭後, 右項情實을 細細垂察시와 今年條始五百兩을 勿委派員와 特爲捧上시옵고 自今爲始로 本島居民所採毛藿稅을 以本島居民中, 以惜身命者을 擇定派監시와 限年年三月至, 來納之意로 永定完文成下시고 亦以此意로 訓令本郡시와 更無以貳轍生奸之境을 千萬伏祝, 行下向敎是事. 〈光武十年〉丙午六月 日
右請願人比珍洞任朴文三, 龍草洞任崔性烈, 虎頭洞任朴化順, 竹島洞任鄭元五, 蜂巖洞任金應必, 秋原洞任李乃元等, 經理院卿閣下處分.
鎭南郡關山島[閑山島]民等, 本島毛藿稅五百兩捧上派監, 以本島人擇定事.
指令, 該稅가 旣有派員之專管인즉 如是直納은 旣無其規야 不可捧上이나 至於科外濫捧은 係是法外니 嚴査禁斷야 更無至呼冤之弊 事. 光武十年八月四日. 該派員]
2) 「1890년 윤2월1일 일본 어민들의 불법 점유와 무력 저항에 대한 첩정(牒呈)」
다음 첩정(牒呈)은 1890년(고종 27년) 윤2월 1일, 거제부(巨濟府)에서 발생한 일본 어민들의 불법 포교 및 무단 가옥 설치(결막) 사건을 보고한 거제(巨濟) 래첩(來牒, 보내온 통첩)이다. 당시 일본 어민들이 거제도 도장포(陶藏浦)에 머물며 조약을 어기고 횡포를 부린 정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일본 어민들의 불법 점유와 무력 저항에 대한 생생한 보고 내용이다. 당시 거제도는 일본 어민들의 무단 침범과 치외법권 주장으로 몸살을 앓던 지역이었다. 이 문서는 조일통상장정(1883년) 이후 일본 어민들이 조선 연안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발생하는 갈등과 주권 침해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료다. 특히 일본인들이 조선의 행정력을 무시하고 일본 영사권만을 내세우는 치외법권적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내용인즉, 경남 거제부 율포진 관할 도장포(현 거제시 남부면 도장포 마을)에 일본 어민들이 선박을 정박하여 불법행위를 했다. 허가증(執照)도 없이 어로 활동을 하고, 육지에 무단으로 막사(결막, 結幕)를 설치했다. 일본인 평정종일(平井宗一, 히라이 소이치), 죽내밀차랑(竹內蜜次郞, 다케우치 미츠지로) 등이 그들이다. 게다가 평정종일 일행은 허가증도 없이 막사를 쳤다가 가배량 만호(加背梁 萬戶)가 이를 제지하고 철거를 요구하자, 총칼과 창을 휘두르며 위협했다. 이들은 나중에 "말이 안 통하고 쫓겨날 것 같아 겁주려 한 것일 뿐 해칠 마음은 없었다"고 변명했다. 조선 측 순사와 관리가 현장에 가서 이들을 압송하려 했으나, 일본 어민들은 "우리나라(일본) 영사관의 명령이라면 따르겠지만, 조선 관원의 명령으로는 갈 수 없다"며 끝까지 거부하고 버텼다. 일부 선박(죽내댁조, 산하구륙 등)은 풍랑을 만나 잠시 정박한 것이라며 허가증을 받으러 부산항으로 돌아갔다고 주장했다.
거제부에서는 평정종일 등이 조약을 위반하고 흉기를 휘두르며 조선의 관리를 무시한 행위가 매우 가증스럽고 악하며, 법도에 어긋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이들을 어떻게 처분할지 상부의 지시를 기다린다는 내용으로 보고를 마무리하고 있다.
* 덧붙여 이번 「1890년 윤2월1일 일본 어민들의 불법 점유와 무력 저항에 대한 첩정(牒呈)」는 발신자가 거제(巨濟)이고 발신일은 己丑二月二十八日(1889년 02월 28일(음))이며, 수신자는 동래감리서(東萊監理署)이고, 수신일은 庚寅閏二月初一日(1890년 윤02월 01일(음))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동래관첩외안(東萊關牒外案)』이다.
*「1890년 윤2월1일 일본 어민들의 불법 점유와 무력 저항에 대한 첩정(牒呈)」
1890년 윤2월 1일 접수. (음력) 2월 28일 발송. 윤달 길일에 도착함. 거제부에서 온 첩보.
첩보합니다. 방금 접수한 관내의 지시에 따라, 본부(거제부) 경내 율포진 구역인 도장포(陶藏浦)에 머물며 날마다 어업 규정을 어기고 행패를 부리는 일본 어민들을 이번에 새로 온 순사가 본부의 관리와 함께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기한 내에 압송하라는 뜻을 전했습니다. 이에 해당 포구로 관리를 별도로 칙령을 내려 내보냈습니다.
현장에 다녀온 순사와 관리들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당초 허가증(執照)이 없던 평정종일(平井宗一, 히라이 소이치)의 배 7척 중 5척은 이제야 허가증을 받아왔으나, 나머지 2척은 끝내 허가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육지에 내려 막사를 치고 있었습니다.
또한 죽내밀차랑(竹內蜜次郞, 다케우치 미츠지로)이라는 자가 어선 3척을 거느리고 허가증을 지닌 채 막 도착하여 역시 막사 하나를 설치했습니다. 또 죽내댁조(竹內宅造, 다케우치 다쿠조)와 산하구륙(山下久六, 야마시타 규로쿠)이라는 자들은 각기 어선 1척씩을 타고 허가증도 없이 와서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먼저 평정종일을 붙잡아, 허가증도 없이 육지에 내려 막사를 치고 총검과 창을 휘두르며 흉악하게 군 사정을 문책했습니다. 그러자 그 선원 중 삼화중(森和重, 모리 가즈시게)이라는 자가 대신 대답하기를, '지난달 모일에 선주 평정종일이 허가증을 받으러 부산항으로 나간 뒤, 가배량 만호가 와서 허가증 유무를 따지고 금령을 어기고 막사를 친 것을 꾸짖으며 철거하고 쫓아내려 했습니다. 오랫동안 번거롭게 승강이를 벌이는 와중에 말이 통하지 않고 상황이 절박해지자, 과연 총과 칼, 창 같은 물건을 일제히 들어 겨누기만 했을 뿐이지 어찌 흉악한 마음을 품었겠습니까? 거느린 배 중 5척의 허가증은 평정종일이 지금 받아왔고, 허가증 없는 2척은 방금 부산항으로 보냈으니 곧 받아 돌아올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죽내댁조와 산하구륙 등은 2월 20일 나가사키섬에서 부산항으로 향하다가 바람이 불리하여 이곳에 정박한 것이므로 애초에 허가증을 지니지 못했다고 하며, 허가증을 받으러 (부산으로) 사람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친 두 곳의 막사를 즉시 철거하게 하고 기한을 정해 압송하려 하자, 평정종일과 죽내밀차랑 등이 순종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막사는 이미 다 지었으니 갑자기 철거하기 어렵다. 압송되는 절차 또한 우리나라(일본) 영사관의 명령이 있어야 가능하다. 귀국(조선) 순사와 관리의 말만 듣고 압송되어 가는 것은 절대 안 된다'라고 하며 시종일관 강경하게 버티어 끝내 압송해 오지 못했습니다"라고 보고하였습니다.
소위 평정종일이라는 자는 허가증 없이 왕래하여 이미 장정(조약)을 범하였고, 흉기를 휘둘러 위협한 것은 또한 지극히 해괴하고 악합니다. 더구나 순사가 체포하려는데도 감히 '조선과 일본 관리의 명령이 서로 다르다'는 핑계를 대며 제멋대로 떠들고 끝내 순종할 뜻이 없으니, 그 습성이 처벌받아야 마땅합니다. 어찌 처분할지 다시 상의하여 결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죽내밀차랑은 비록 허가증은 있으나 거리낌 없이 막사를 치고 평정종일을 본떠 막사 철거를 거부하니, 조약의 취지에 비추어 볼 때 역시 매우 어긋난 일입니다. 죽내댁조와 산하구륙 등은 방금 도착하여 아직 허가증을 따져 묻기 전인데, 순사가 조사하는 자리에서 스스로 규정 위반임을 알고 이미 떠났으니 그 정황이 어떠한지는 더 논할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보고합니다.
[二月二十八日出. 閏月吉日到. 巨濟來牒. 爲牒報事, 卽到付署關內乙用良, 本府境內栗浦鎭境陶藏浦留泊, 日漁民犯章作梗者, 今來巡査, 眼同本府官吏, 期使押付之意, 另飭出送於該浦矣, 同巡査官吏等回告內, 當初無執照之平井宗一船七隻內, 五隻執照, 今纔受來, 二隻了無執照, 而下陸結幕, 又有竹內蜜次郞, 領漁船三隻, 帶執照而方來, 亦設一幕, 又有竹內宅造爲名者, 與山下久六爲名者, 各騎一隻漁船, 不持執照而來泊故, 先執平井宗一, 責問其曾無執照而下陸結幕, 且持銃鎗肆凶之事情, 則右船人中, 森和重爲名者, 替答以爲, 去月日, 船主平井宗一, 受憑票次, 出往釜港之後, 加背梁萬戶, 來詰憑票有無, 兼責違禁結幕, 仍欲撤逐, 持久煩詰之際, 言未通情, 事近擯迫, 果以銃鎗刀劍之物, 齊擧擬之而已, 何嘗有肆凶之心哉, 所領船中五隻執照, 則平井宗一, 今旣受來, 無執照之二隻, 方爲發往釜港, 邇當受回云云是白遣, 竹內宅造及山下久六等段, 二月二十日, 自長崎島, 向往釜港, 遭風不利, 泊於此處故, 執照初無受持云云, 而受來次, 仍爲發往是白遣, 且其所結兩幕, 卽令撤罷, 期欲押去, 則同平井宗一及竹內蜜次郞等, 不肯聽從曰, 幕已構成, 有難旋撤, 至若押去之節, 有我國領事官令飭則可也, 因貴國巡査官吏之言, 而被押而去, 不可不可, 始終强梗, 不得押來是如爲臥乎所, 所謂平井宗一, 無票往來, 旣犯章程, 凶械肆擬, 又極駭惡, 而至於巡査發捉之下, 猶敢以貴我官飭之有殊, 恣爲口欛, 終無順意, 厥習處辦之道, 更俟參商處分爲乎旀, 竹內蜜次郞段, 雖有執照, 而無難結幕, 效嚬宗一, 不肯撤幕者, 章約所在, 亦甚乖戾是乯遣, 竹內宅造山下久六等段, 方纔來泊, 未及責票, 今於巡査詰探之地, 自知違章, 已卽發往, 這情如何, 別無更論, 緣由牒報云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