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은..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무명 천지지시 유명 만물지모
뜻은
'도를 도라 말하면 도가 아니고, 이름으로 말하지만 이름이 아니다.
말이 있기 전에 천지[道]는 시작되었고, 말이 있으니 세상이 분별[名]된다'라고
나는 보지만.. 사람마다 달리 바라본다.
저 말을 만나기 전까지는 기독교의 '태초에 말씀이 있었으니' 하여
태초를 세상의 처음으로 알아.. '꽃이라 말하니 꽃이 되었네' 하듯..
세상은 언어 logos에 의해 시작되고,
언어로 분별된 세상에서 사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노자는 언어가 있기 전에 있는 것을 도(道)라 하고..
도(道)는 언어[名 logos]가 되어, 언어에 의해 세상이 생겨나는 것임을 보여주었으니..
다시 도를 바라보게 한다.
말하자면 세상의 혼란을 가라앉히는 질서는 분별로, 분별은 언어로 시작되는데..
노자는 분별 이전의 도를 보여 주니 다시 혼란으로 가는 것은 아닌지..
하루는 경허 스님이 노친이 된 어머니가 사는 집 앞에 벌거벗은 채 서 외쳤다.
"어머니는 저를 낳으시고 저의 맨몸을 어루만지며 키웠습니다. 그런데 왜 이제는 외면하시는 겁니까?"
경허 어머니는 부끄러워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경허의 말은 과거와 오늘은 다르지 않은 시공이 하나로 되어있다.
그러나 과거에 그리했으니 오늘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한다면 보통 사람들은 혼란을 일으킨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노자보다 공자를 안으로 모셔 공경하고 노자는 길에 버린다.
대학시절 처음 '도가도 비상도.. ' 이 문장을 보았을 때 놀람과 신선함이 얼마나 컸던가..
하지만 그것도 차차 시간이 가면서 무뎌지니..
어느 때부터 무덤덤하게 보고 듣는다.
무덤덤이란 도를 잊고 이름인 존재에 묻혀 세상살이에 함께 하는 것이다.
"태초에 말씀[名 logos]이 있었다"는 기독교는 카오스에서 벗어나 분별된 세상에서 질서의 빛이 되고자 하는 종교라면,
노자는 분별된 세상 이전의 고요로.. 사람들이 혼란이라 여기는 곳으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보인다.
노자를 따르는 이들을 도인이라 부르듯.. 그들은 평범한 삶에서 벗어나 있다.
'도가도 비상도'란 말에 울림을 받은 놀람의 신선함은 시공 속에 조금씩 사라지다..
<금강경>에 나오는 '즉비(卽非), 시명(是名)' 을 만나면서 '도가도 비상도'가 다시 커다란 공명으로 타올랐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은..
'(도를) 도라 하면 그때 도는 이미 도를 벗어난다[즉비], 이름만 도일 뿐이다[시명].' 라는 보인 것이다.
'모든 진리는 하나로 통한다'는 말이 여기에 이르러 통하는 것인가.
금강 불자인 선종은 노장을 어머니로 태어난 자식으로 보는 이유가 보인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도교의 '비상도'와 불교의 '즉비'는 바라보고 있는 곳이 다른 것 같다는 틈이 보인다.
아니, 다른 게 아니다. 이미 같은 것으로 보고 있던 선지식이 있었는데.. 어찌 단칼에 다르다고 할 수 있으랴.
석가는 수행할 때 당시 최고 수행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문난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에게 명상법을 배웠다.
웃다까는 ‘상념(想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관(觀)하는 선정(禪定)’ 즉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를 가르치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곳은 당시뿐 아니라 지금도 사람이 거의 이룰 수 없는 높은 경계가 아닐 수 없다.
즉 존재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계라 할 수 있다.
상념이 있다면 분별 세계요, 상념이 없다면 무분별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따르는 나로서는
웃다까가 도달한 경계가 그냥 이름마저 없어 늙은이일 뿐인 노자(老子)가 서 있는 경계가 아닌가 한다.().
내가 불자가 아니라면 노자나 웃다까나 석가나 다 같은 경계라고 할 것 같다.
그들의 차이를 나는 경험할 수 없으니..
'(도를) 도라 하면 그때 도는 이미 도를 벗어난다[즉비], 이름만 도일 뿐이다[시명].' 라고 이해하면..
<도덕경>이나 <금강경>은 같은 곳을 보며 걸어간다고 하겠다.
그 경계는 어쩌면 석가세존에게 질문하고 있는 수보리 장로 경계가 아닐지..
수보리 장로는 외부에 있는 존재들 무상하게 흐르고 있음을 보고 있으므로.. 이름만 도일뿐이라며..
그것을 보고 있는 자는 무아라고 알고 있지만..
무아로 아는 '자'를 잠재의식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런 수보리에게 부처님은 말한다.
도를 생각하면.. 도를 생각하는 자가 동시에 생기는 것이지..
도를 생각하는 자가 있어
'도가도 비상도'라고 하는 게 아니다.
이 설명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니 구절구절 말하면..
<도덕경>은 있음 [도]을 인식[명]하는데.. 인간 탐욕이 섞인 인식은 완벽하지 않다 하여 본래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강조하는데..
불교는 인식할 때 인식하는 자가 생기는 것이니.. 그런 자는 본래 없음을 관하고 있어야 한다고 하다.
그리되는 방법은 노자와 다르지 않아..
탐욕을 멸을 강조하는데..
노자와 다른 점은
아울러 탐욕이 곧 나임을 관해야 한다는 것.
결국은 그게 그거 아닌가 할 것 같은데..
겉으로 보기엔 같아 보이지만..
도교는 있음인 존재 세계에서 도원경인 유토피아 찾는 것이고,
불교는 탐욕 자체인 나를 멸해 유토피아마저 버리라는 가르침이다.
그 말은..
기독교는 사후 천국을 그리며 존재 세계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가르치고,
도교는 존재 세계에서 벗어난 도원경을 가르치며,
불교는 천국이나 도원경 역시 나에게서 생긴 것[일체유심조]이라고 가르친다.
한편 <금강경>에서는 '즉비'로 중도를 가르치지만, 보시를 강조하여 세상과 연결하니..
보살은 자기 이익인 탐욕을 대신해 베풀고 또 베풀어.. 베풀고 있다는 '나' 마저 멸해야 함을 강조한다.
선종은 간단히 말해 무아가 시작이요 끝인 불교라 할 수 있다. 중간에 보시가 없듯이 도교와 통한다.
'도가도 비상도요, 명가명 비상명' 이듯..
'물은 물이 아니라 이름이 물일 뿐이다'
성철대종사는 말한다. 그래도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로다'
그러면..
성철스님은 산에서 내려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