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일:3월6일(9월4일)
비테르보의 성녀 로사 동정
Saint Rose of Viterbo
Beata Rosa da Viterbo Vergine
Viterbo, 1233/34 - Viterbo, 6 marzo 1251/52
Canonized:1457
Third Order Franciscan
로사(1234 - 1252)는 문자 그대로 영신 생활에서 천재성을 지닌 어린이였다.
이미 9 살 때 성모님의 인도로 3 회(재속프란치스코회) 착복을 원하여 허락받았다.
그녀는 자기 집의 조그만 골방에서 관상생활과 극기 생활을 하였다.
또한 자주 거리에 나가 참회할 것을 비테르보 사람들에게 설교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프레데릭 2 세의 반 교황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제국 당국은 그녀와 부모를 비테르보에서 추방하였다.
로사의 설교. 특히 마니교 이단을 거스려 하는 설교에는 수많은 청중이 몰려들었다.
비테르보로 돌아와 글라라회에 입회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또한 자신이 공동체를 설립하려는 계획도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겸손하게 이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1252 년 18 세라는 꽃다운 나이로 하늘의 정배에게 돌아갔다.
그녀의 썩지 않는 유해는 알렉산델 4 세에 의하여
글라라회 수녀원으로 이장되었으며 갈리스토 3 세에 의하여 1457 년 시성되었다.
그녀의 무덤에서는 지금도 계속하여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작은형제회홈에서)
비떼르보에서 태어난 성녀 로사는 병을 앓던 8세때에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때 성프란치스코의 수도복을 입으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후에도 집에서 그냥 지내면서 평범한 여성으로 자랐다.
병이 회복된 그녀는 평신도의 회개 복장을 하였고, 우리 주님의 고난을 더욱 절실히 체험케 되었으며,
죄인들의 무례함과 배은망덕을 대신 속죄하였다.
그후 12세기경부터 그녀는 타오르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길 수 없어 거리로 뛰쳐 나가서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그당시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무수한 경고를 하였다.
이때문에 그녀가 집에 감금되었고, 이리하여 로사와 그 부모는 추방되어 소리아노로 갔는데,
그녀는 여기서 그당시의 독재자인 프레데릭 황제의 죽음을 예고하였고,그것은 꼭 13개월 후에 일어났다.
이때부터 그녀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고향으로 귀향할 수 있었다.
그후 그녀는 비떼르보에 있던 로사의 성마리아 수녀원 입회를 청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이리하여 그녀의 주임사제가 성당 곁에 수녀원을 만들고 몇몇 동료들과 함께 살도록 주선하였으나,
집으로 돌아와서 곧 운명하니, 그녀의 나이는 17세였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하느님께서는 성인들을 통해 기적을 행하신다.
우리는 모든 성인들의 기적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본다.
그 중에서도 더욱 현저히 나타난 기적은 비테르보의 성녀 로사의 일생에서 볼 수 있다.
그녀는 1235년 이탈리아의 비테르보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가난했으나, 자식으로는 로사 하나 밖에 없었으므로 될 수 있는 데까지 주의를 다해 교육 시켰다.
그러나 그녀의 교육에 많은 역할을 한 것은 부모의 힘보다 오히려 하느님의 은총이었다.
아직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한 어린 로사가
근처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회 성당에 가서 경건한 모습으로
미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본 부모나 사람들은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로사는 강론때에 방울 같은 눈동자를 굴리며 신부의 강론 말씀을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고 돌아와,
부모에게나 혹 다른 아이들에게 그대로 들려주었다.
2,3 년 후부터 로사는 이미 고신 극기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 방에 조그마한 제단을 꾸며놓고 대부분을 그 앞에서 기도하며 지냈다.
잘 때에는 한 장의 판자를 요로 삼았고 하루에 불과 몇 시간밖에 안 되었다.
너무 엄한 단식(斷食)때문에 사람들은 그녀의 건강을 염려하였으나
그래도 항상 그녀의 얼굴은 기쁜 빛이 감돌며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거지들을 반가이 대하며 자기 몫인 음식을 나누어 먹이기도 했다.
그 당시 로사에 대한 몇 가지 기적이 전해져 내려온다.
어떤 가난한 집 아이가 하루는 꽃병을 깨뜨렸다.
로사는 불쌍한 생각으로 그 꽃병 조각을 모아 그 위에다 십자가를 그렸다.
그랬더니 즉시 그 병은 전과 같이 되어 금이 난 흔적도 없었다고 한다.
로사는 열 살 때 중병에 걸렸었다.
임종이 가까웠다고 생각될때 그녀는 묵시를 보았다. 즉 천당, 연옥, 지옥의 모양이었다.
그러자 성모님이 나타나서 그녀에게 예쁜관을 씌워 주시며 성 프란치스코 제3회에 들어갈 것을 권고하시고,
앞으로의 생활 방식과 그녀가 해야 할 일들, 또 그녀가 받을 박해와 고통에 대해서도 친절히 깨우쳐 주셨다.
이리하여 그녀는 완쾌한 후 거치른 옷에다 끈으로 만든 띠를 허리에 둘렀다.
그녀는 탈혼 중에 어린 예수를 보았다. 그 때 예수게서는 이미 가시관을 쓰시고 피가 낭자하게 흘렀다.
그것을 본 로사는 애처로운 생각에 잠겨 자기 몸을 피가 나도록 매질했다고 한다.
그 당시 황제 프리데리코는 교회를 박해하고 그 군대는 이탈리아까지 침입하여 많은 학살을 감행했다.
비테르보와 그 부근의 촌락도 그 마수를 피할 길이 없었다.
바로 이때 로사는 분연(憤然)히 일어나 세상의 불신, 부도덕, 호화와 사치며
기타 부정을 책하는 일 장 연설을 했는데,
그 웅변 태도며 그 말의 구절 마다가 하늘에서 울려나오는 것 같았다.
로사는 네거리와 광장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택하여
누구에게도 보일 수 있는 높은 돌이나 기둥에 서서 연설을 햇다.
불과 12세인 이 소녀의 열변은 대단한 반향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이 그 말에 감탄하여 회개하고 죄의 보속을 했다.
프리데리코의 부하들은 이 소녀를 대단히 불쾌히 생각하여
비테르보 시장으로 하여금 로사의 가족을 즉각 추방하도록 했다.
그 부친은 "지금은 겨울이요, 돈도 없고 정처도 막연하니 잠깐만 여유를 주십시오.
지금 우리를 추방한다면 우리는 뜰에서 굶어 죽을 것입니다."하며 애원했으나 시장은 조금도 동정함이 없이
"너희들은 죽어도 좋다. 어서 빨리 나가라"고 도리어 재촉했다.
이에 부친은 하는 수없이 처자를 거느리고 정든 곳을 떠나 사방을 헤매다가 솔리아노라는 곳에 이르렀다.
이곳 사람들은 불쌍한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곳에 자리를 잡고, 로사는 설교를 시작했는데, 그 반향은 역시 대단했다.
1250년 12월 5일, 로사는 사람들에게 곧 행복할 것을 예언했다.
그러자 그달 13일에 프리데리코 황제가 사망하고, 국내에는 평화가 깃들이게 되었다.
로사의 가족들은 그리운 비테르보 시에 귀환하는 도중 어떤 마을을 통과했는데
그곳은 배교한 어떤 여자의 악한 표양으로 인해 배교자가 많았다.
로사는 그저 묵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 여자의 비행을 질책했으나
상대방도 상대인지라 여러 가지 항변으로써 쉽게 승복하지 않았다.
로사는 "말로써 시비가 결정되지 않으니 기적으로 결정합시다"하고 소경 하나를 데려다 놓고 고치라 하였다.
그런 여자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그 여자는 실패했고 로사는 훌륭히 그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
그런데도 그 여자는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둘이 다 같이 이글이글 타는 불속을 건너가자고 청하였다.
상대는 두려워 승낙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로사는 장작에 불을 지펴놓고 그 가운데에 우뚝 섰다.
그녀는 의복 하나 그을리지 않았고 몸에도 조그마한 화상 하나 없었다.
그때서야 그 여자도 얼굴빛이 변하며 놀랐고
마침내 회개하고 그녀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다시 신앙의 길로 돌아왔다.
성녀의 서거 750주년 기념. 이탈리아. 2001.5.6.
로사의 가족이 비테르보에 들어섰을때 시민의 환영은 대단했다.
15세가 된 로사는 수도원에 들어가기를 원했으나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자기 작은 방에서 전과 같이 홀로 기도와 극기의 생활을 계속했다.
2년 후 그녀는 17세의 꽃 같은 몸으로 그의 깨끗한 영혼을 하느님 손에 맡겼다.
그녀의 유해는 처음 비테르보 교회에 매장했다가 뒤에 다른 교회로 이장했다.
그때는 이미 5년이 경과한 해였지만 아직 얼굴색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 백년이 지났을 무렵 그 교회는 대 화재로 전소되어
성녀 로사의 영구(靈柩)와 의복은 다 소실되었으나 유해만은 무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성 마르치아노(Marcian)
축일 3월 6일
성 마르키아누스(Marcianus, 또는 마르치아노)는
사도 성 바르나바(Barnabas, 6월 11일)의 제자이자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Piemonte) 지방
토르토나의 초대주교였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45년간 주교직을 수행하다가 하드리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토르토나의 성 마르키아누스와
라벤나의 성 마르키아누스(5월 22일)가
동일 인물이라고 본다.
================================
성 빅토르(Victor),
성 빅토리누스(Victorinus),
성 클라우디아누스(Claudianus),
성녀 바사(Bassa)
축일 3월 6일
성 빅토르(Victor), 성 빅토리누스(Victorinus),
성 클라우디아누스(Claudianus), 성녀 바사는
소아시아 북서부 비티니아(Bithynia) 지방 출신으로
니코메디아(Nicomedia)의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성녀 바사는 성 클라우디아누스의 부인이다.
================================
성 바실리오(Basil)
축일 3월 6일
성 바실리우스(Basilius, 또는 바실리오)는
교황 성 실베스테르 1세(Sylvester I, 12월 31일)에
의해 볼로냐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그는 20년 동안 교구를 사목하였다.
================================
성 빌프리도(Bilfrid) 또는 발드레드(Baldred),
발터(Balther),
축일 3월 6일
성 빌프리두스(Bilfridus, 또는 빌프리도)는
영국의 린디스파른(Lindisfarne)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승 사제로서 은수생활을 했고 또한 금세공
전문가로서도 활동하였다.
그는 유명한 성 쿠트베르투스(Cuthbertus)의
린디스파른 성서 사본을 금과 은 그리고 보석으로
장정하여 역사에 그 역작을 남겼다. 그 후 그는
주민들이 바스 록(Bass Rock)이라 부르는
노섬브리아(Northumbria)의 티닝햄에서 은수자로서
살았다. 그런데 그곳에는 위험한 모래톱이 있어서
많은 해난사고를 일으켰다고 한다. 뱃사람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낀 성 빌프리두스는 이 모래톱을
제거해 주기로 작정하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것들이 한데 모여 성 빌프리두스의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그의 유해는 덴마크인의 침략 당시 잃어버렸다가
11세기에 한 수도자가 성인을 꿈에서 본 뒤에
그의 유해를 찾아내어 더럼(Durham)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그는 발드레드(Baldred), 발터(Balther),
발레두스(Balredus)로도 불린다.
================================
성녀 아녜스(Agnes)
축일 3월 6일
성녀 클라라(Clara, 8월 11일)는 보헤미아 혹은
프라하(Praha)의 성녀 아녜스로 불리는 그녀를
'나의 반쪽'이라고 불렀다. 성녀 아녜스는
성 벤체슬라우스(Wenceslaus, 9월 28일)의 후손으로
부친의 이름은 1197년에 보헤미아의 왕좌에 오른
오토카르 1세(Ottokar I)이다. 또 헝가리의 성녀
엘레사벳(Elisabeth, 11월 17일)과는 사촌간이다.
성녀 아녜스는 불과 세살 때에 슐레지엔
(Schlesien, 실레지아)의 공작인 하인리히의 아들인
볼레슬라우스(Boleslaus)와 약혼하고,
약혼자의 어머니가 세운 수도원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6세 때에 약혼자가 죽음으로써
보헤미아로 돌아왔고, 9세 때에는 프레데릭 황제의
아들인 하인리히와 약혼하여 이번에는 오스트리아로
가서 독일어와 그곳의 풍습을 익혀야 했다.
그러나 성녀 아녜스는 늘 하느님께 굳은 신앙을
표현하고자 애썼으며, 자기 혼자서 매우 엄격한
생활을 하며 덕을 닦았다. 그녀는 차츰 나이가 들면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동정생활을 갈구하면서
일이 꼭 그렇게 되도록 기도한 결과, 또다시 파혼이
되어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또다시
잉글랜드(England)의 헨리 3세로부터 청혼을 받았다.
그녀는 더욱 열렬히 기도하고 고행하며 화려한
궁중 의상 밑에 고행복을 입고 지냈다. 그녀는
새벽 일찍 일어나 맨발로 성당을 다녀오기가 일쑤였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28세의 미모의 여성이 되었다.
온갖 청혼을 물리친 그녀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
(Gregorius IX)에게 편지를 보내어 도움을 청하였다.
그 결과 결혼에서 자유롭게 된 그녀는 자신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봉헌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마침내 1236년에 클라라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그녀는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 정신의
올바른 계승자로 살았다. 비록 공주 출신이었지만
수녀원의 하찮은 일까지 자발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놀라운 성덕을 쌓다가 77세의 일기로 선종하였다.
그녀는 1874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9년 11월 1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
성 에바그리오(Evagrius)
축일 3월 6일
370년 콘스탄티노플 교구의 주교좌가
아리우스파에 의해 20년간 점령된 후 가톨릭 교회는
성 에바그리우스(또는 에바그리오)를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선택하였다. 그러나 몇 달 뒤 그는
발렌스 황제에 의해 추방되어 죽을 때까지
유배지에서 살았다.
================================
성 올레가리오(Ollegarius)
축일 3월 6일
성 올레가리우스(또는 올레가리오)의 부모는
서고트족(Visigoth)의 귀족이었다.
1060년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태어난 그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교회 일을 맡게
되었고, 이왕이면 사제직에 올라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회에 입회한 후
프랑스의 여러 수도원의 원장직을 역임하다가
1115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그 해에
바르셀로나의 교구장좌가 공석이 되었을 때
성 올레가리우스가 천거되었으나 그는 자신의 몸을
감추고 숨어버렸다고 한다. 그 후 그는 거의
강제적으로 주교가 되었고 그 얼마 후에는
타라고나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1123년 그는
로마(Rome)로 가서 제1차 라테라노(Laterano)
공의회에 참석했고, 무어인들을 대적하는 십자군을
상대로 설교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
1137년 그는 시노드(Synod) 참석 중에 선종하였다.
그는 올데가르(Oldegar), 올레가리(Olegari)로도 불린다.
================================
성 요르단(Jordan)
축일 3월 6일
요르단은 현대 이탈리아어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단테(Dante)와 동시대인으로서 뛰어난 학덕과
웅변으로 명성을 떨치던 그는 자신의 편지나 설교에서
라틴어 대신에 토스카나(Toscana) 방언을 최초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1280년에 피사에서 도미니코 회원이 되었고
파리 대학교를 마쳤다는 정도이다.
또한 그는 리에티(Rieti) 관구 회의에서
피렌체(Firenze)의 교수로 임명된 후 13년 동안
이 직책을 수행하여 당대 최고의 학자 및 설교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33년에 승인되었고,
이어 1838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시복되었다.
================================
성 치릴로(Cyril)
축일 3월 6일
성 키릴루스(Cyrillus, 또는 치릴로)는
카르멜 회원으로서 콘스탄티노플의 사제였다.
그는 소위 '성자와 함께'(Filioque)로 불리는
신학적인 문제로 발생한 그리스 정교회와의 논쟁을
주도하여 가톨릭 교회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로마 순교록은 그에 대한 자세한 경력을
소개하지 않고, 다만 27년 동안 자기 수도회를
훌륭하게 운영했다고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
성 카드로에(Cadroe)
축일 3월 6일
스코틀랜드에서 어느 왕자의 아들로 태어난
성 카드로에는 아일랜드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모든 시인들이 노래했고 설교자들이 설파했으며
또 철학자들이 사고했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박식한 사람이 되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스코틀랜드에는 교사는 많으나 교부는 없다”고
한탄하면서 순례의 길에 올랐다.
그는 잉글랜드(England)와 웨일스(Wales) 지방을 거쳐
런던(London)에 당도했는데, 그곳에서 헤그프리드란
노인을 만났다. 어느 날 밤 이 이상한 노인이 그를
찾아와서 지금 런던이 불타고 있으니 하느님의 도움을
간청하라고 그에게 요구하였다. 그래서 그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치켜들고 열렬히 기도하니 과연 불길이
즉시 사그라지고 런던은 위기를 넘겼다.
이 기적이 국왕 에드먼드의 귀에까지 들어가서
그는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그 후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티에라크 숲 속에 있는 성 미카엘 수도원에
정착하였다. 성 카드로에는 다시 플뢰리(Fleury)로
가서 베네딕토 회원이 된 후 벨기에의 볼소르트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
성 코논(Conon)
축일 3월 6일
성 코논은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에서 온
그리스도인으로 소아시아 지방 팜필리아(Pamphylia)의
만도나에서 가난한 정원사로서 일했다.
그는 데키우스 황제 치하에서 순교하였다.
================================
성녀 콜레타(Coleta)
축일 3월 6일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Picardy)의
코르비(Corbie)에 사는 목수의 딸인 성녀 콜레타는
1381년 1월 13일에 태어나 니콜레트(Nicolette)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나, 흔히 콜레트(Colette)로
불렀다. 17세 때 천애의 고아가 된 그녀는 자신의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에
작은 형제회 3회원이 되었으며, 코르비에서
독수자로 생활하였다.
21세 때부터 성녀 콜레타는 코르비의 원장이 빌려 준
은둔소에서 홀로 살았는데, 그곳에서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의 환시를 보았다.
이때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부인회'(클라라 수녀회)가
엄격하던 그들의 원 회칙에 따라 살도록 인도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이미 그녀의 성덕과
영적 지혜가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클라라 수녀회의 개혁을 지시하는 환시에
응답하려고 자신의 은둔소를 떠나, 영적 지도자인
앙리 드 바움(Henry de Baume) 신부의 권고에 따라
교황청 책임자인 베드로 드 루나(Petrus de Luna)를
면담하기 위하여 1406년에 니스(Nice)로 갔다.
베드로 드 루나 역시 깊은 감명을 받고,
그녀가 클라라 수녀회에 입회하는 것을 허락하고
기존 수도원의 개혁과 새로운 수도원 설립을 위임하였다.
처음에 그녀는 피카르디와 사부아(Savoie)의
수녀들로부터 심한 반대를 받았으나, 1410년부터
앙리 드 바움 신부의 지지를 얻어서 개혁 사업은
점차 성공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프랑스와
플랑드르(Flandre) 지역 내에 엄격한 규칙을 지키는
수도원을 17개나 세웠고,
르 퓌 앙 블레(Le Puy-en-Velay)의 한 곳을 포함하여
기존의 다른 수도원을 개혁하였다.
성녀 콜레타는 무슨 일을 수행하도록 훈련받거나
준비한 일은 없었지만, 믿음의 힘과 성덕 그리고
아무도 거스르지 못하는 결정에 따라 일을 올바르게
성취하였다. 그녀는 자주 탈혼에 빠졌고 고난에 대한
환시를 보았으며, 벨기에의 겐트(Gent) 수도원에서
자신이 죽으리라는 예언을 하였다.
성녀 콜레타의 개혁 클라라 수녀회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는 세계 도처에 산재해 있다. 그녀는
1604년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에 의해
시복된 후 1807년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시성되었다.
================================
성 크로데강(Chrodegang)
축일 3월 6일
벨기에 남동부 리에주(Liege) 근교 헤스바이예
출신으로 피핀의 친척인 성 크로데강은 아마도
생트롱(Saint-Trond) 수도원에서 교육받은 듯하며
카를마르텔(Karl Martell)의 비서와 청원인이 되었다.
742년 평신도인 그가 프랑스 메스의 주교로 임명되었고,
피핀으로부터 교황 스테파누스 3세(Stephanus III)의
대사로 또 궁중 책임자로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그는 교구 내의 수많은 개혁을 실시하였으며
자기 나름대로 교회법을 만들어 훌륭한 주교로서의
소임을 다 하였다. 그는 성당과 수도원의 재건과
신설에 주력하였으며 로마 전례와 그레고리안 성가를
교구내에 도입하여 훌륭한 업적을 쌓았다.
또한 메스에 음악 학교를 세웠는데, 그 학교는
전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학교 중의 하나가 되었다.
================================
성녀 키네부르가(Kyneburga)또는 시네부르가(Cyneburga)
성녀 키네스비데(Kyneswide)또는 시네스비데(Cyneswide)
성녀 티바(Tibba)
축일 3월 6일
성 베다(Beda)의 기록에 따르면 시네부르가(Cyneburga)로도
불리는 성녀 키네부르가는 머시아(Mercia)의 왕
펜다(Penda)의 딸로서 노섬브리아(Northumbria)
국왕의 아들 알프리드와 결혼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녀의 남편이 부왕에게 대항하여 큰 소동이 빚어졌다.
이때 그녀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녀는 동생들과 함께 노샘프턴(Northampton)과
헌팅던(Huntingdon) 근교에 수도원을 세우고 생활하였다.
이때 성녀 키네부르가 주변에는 하느님만 공경하려는
일단의 부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하나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또한 그녀의 동생으로
시네스비데(Cyneswide)로도 불리는 성녀 키네스비데
(Kyneswide)가 합류하여 열심한 수도생활을 계속하여
훌륭한 덕을 닦았다. 그리고 그들의 공동체에 가입하여
명성을 떨친 성녀로 티바(Tibba)가 있다.
성녀 티바는 수 년 동안을 고독한 독수자처럼 살다가
이 공동체에 들어왔다고 한다. 성녀 키네스비데는
쿠네스비데(Kuneswide) 또는
쿠네스비다(Kuneswida)로도 불린다.
================================
성 프리돌리노(Fridolin)
축일 3월 6일
성 프리돌리누스(Fridolinus, 또는 프리돌리노)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유명한 가문에서 태어나 사제가
되었다. 그는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프랑스, 독일,
스위스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래서 그에게는 '여행자', '순회 설교자'란 별명이
붙었다. 그는 이렇게 다니면서 폐허가 된 성당들을
발견하면 가슴아파하며 이를 수리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에 프랑스 푸아티에(Poitiers)에서
한 수도원을 수리하면서부터 라인(Rhine) 강변에서
은수생활을 시작하였다. 또한 그는 수녀들을 위한
수도원과 학교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