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문재 (문학평론가, 시인, 안양대 교수) : 전병호 시인의 시세계에서 ‘무심천’은 작품의 토대이자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이상향이다. 시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사회적 존재로서 추구하는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장소인 것이다. (중략)
시인이 무심천에 동화하는 것은 실존의식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서 바람직한 삶의 가치를 인식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세계 인식에 의해 무심천은 단순한 공간(space)에서 친밀한 장소(place)로 전환된다. “공간은 장소보다 추상적이다. 무차별적인 공간에서 출발하여 우리가 공간을 더 잘 알게 되고 공간에 가치를 부여하게 됨에 따라 공간은 장소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의 무심천은 충북 음성군 금왕읍,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충북 음성군 대소면 태생리, 충북 음성군 음성읍 감우리 등으로 확대된다. 강원도 설악산의 대청봉이며 철원의 도피안사, 독도, 전남 장흥의 회령포, 제주도 애월,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적암리 등으로도 확대된다.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장소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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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의 이와 같은 태도는 그동안 무장소(placeless)에서 주체성을 상실하고 소외당해온 자신을 추스르는 것이다. 치열한 경쟁이 요구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먹잇감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느라 뿌리가 잘리고 그림자의 신세로 추락한 자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의 탐욕을 이용한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구성원들은 이기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화자는 무심천에서 그 근본적인 성찰과 극복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화자에게 무심천은 가난과 슬픔과 외로움과 역사의 상흔이 밴 장소이다. 그렇지만 화자는 그곳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자기 존재와 세계 인식의 토대로 삼는다. 장소애와 장소혼을 부여해 고통과 절망과 아픔을 그리움과 기다림과 애정으로 껴안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무심천에서 원초적인 충만감과 안전지대로 삼을 수 있는 주체성을 획득한다. 이원화된 세계에 기울었던 질서를 회복하고 연대의 가치를 자각하며 역사적 존재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꽃이 피었다가 지는/그 시간의 한 점”(「배꽃 마을」)이 되고자 하는 화자의 이상향은 성숙하면서도 숭고하다.
박방희 (동시인) : 『금왕을 찾아가며』를 관통하는 정서는 쓸쓸함과 애잔함이다. 그것은 가족, 이별과 죽음, 그리고 시인의 자의식 같은 것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시인은 북벽의 얼음 같은 준열함으로“ 새 길을 내듯 눈 내린 산을 걸어내려가/덮어도 덮어지지 않는”(「적암리 폭설」) 슬픔과 마주하며 그 모든 것들에 맞선다. 또 시인은“ 세상에 대하여 인생에 대하여 내가/ 목소리를 낼 때는 시를 쓸 때뿐./구원이 되지 못하고 허기를 달래주지 못하지만/나는 열렬히 사랑한다, 시의 그 무능을”.(「버리기 위해 쓴다」)이라며 시를 믿고 시에 기대어 살아왔음을 고백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시의 무한한 가능성과 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