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듣는 소식들이 마음을 갑갑하게 한다. 덩달아 더위까지 득세를 하니 몸이 늘어지고 마음조차 지쳐간다. 수시로 날아오는 긴급재난 문자가 깜짝깜짝 놀라게 하고 더 주눅 들게 한다. 에워싼 일상들이 머릿속을 번잡하게 하면 마음에 그렸던 곳을 찾아가 길을 걷는다.
느긋한 것이 죄를 짓는 것처럼 절박하고 아슬아슬한 때가 있었다. 현실은 늘 빠듯해서 자유롭게 떠나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이제는 그럴 시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작년이 다르고 올해가 다르다는 농담처럼 숨만 쉬어도 세월이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나이가 들어간다는 의미일게다.
인적이 드문 약간 경사진 야산 길 초입에 들어선다. 한 발짝씩 걷는 발의 무게가 천근처럼 느껴질 즘이다. 발끝에만 집중하던 시선이 약간 비껴가 예사롭지 않은 모습에 닿는다. 그래도 갈 길이 멀어 한 걸음도 지체할 수 없는 조급한 마음과 달리 더 이상 발길이 앞으로 내디뎌지질 않는다. 뒤에서 뭔가의 힘이 두 다리를 끌어당긴다. 거부할 수 없는 강한 기운에 이끌림이다. 발길을 돌려 몇 걸음 내려가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두 손을 가슴에 모으며, 아~ 부처님,
내가 언제 누구에게 정신없이 끌려 본 적이 있었나 싶다. 간혹 내 취향에 맞는 옷이나 가정에 필요한 제품에 잠깐 눈길이 끌렸던 적은 있었다. 딱 한 번 맞선을 보던 날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서던 그를 보던 순간의 끌림, 지금 주체할 수 없는 또 다른 끌림이 나를 빠져들게 한다.
두 삼층탑을 장군처럼 세운 오색 단층 웅장한 대웅전이어야 했다. 법당 연꽃 대좌에 가부좌하고 계셔야 할 부처님이시다. 황금빛을 발하여 뭇 중생들의 어두운 마음 길을 밝혀 주었을 테다. 각자의 기원을 안고 산사를 찾아와 간절한 마음으로 불공을 드리는 도반들에게 자비롭고 인자한 미소로 이상적인 삶의 길로 인도해야 할 부처님이 아니신가. 산기슭에 나와 계신 석불도 평평한 돌 방석에 정좌하신다. 그런 부처님이,
어쩌다 허름한 모습으로 외진 길옆 질퍽한 자리에 앉아 계실까. 금박이 벗겨진 피부는 얼룩지고 검버섯이 돋은 듯하다. 온몸은 너덜너덜 남루하기 그지없다. 햇살을 쏟아내는 늦여름 대낮인데도 앉은 자리가 음습하고 눅눅하다. 습기 찬 흙 바닥에 앉아 있어도 흐트러진 모습이 아니다. 오래전 부처님을 원망했던 나를 깨우치려 처연한 모습으로 기다렸을까.
삶이란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게으름 피우지 않으며 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정신으로 열심히 목적한 바를 하나하나 이루어 내는 것으로 족했다.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누구의 도움도 바라지 않았다. 정신적인 위로가 된다는 신앙도, 신이 베풀어 준다는 요행도 원하지 않았다. 든든하게 여기는 종교가 없어도 세상살이 별문제 없다는 자신감은 충만했다.
살아오면서 종교를 접한 적이 없지는 않았다. 어릴 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던 교회, 불심이 대단하셨던 큰형님의 명을 따라서 제법 오랫동안 절에 가서 부처님을 뵙기도, 성당 성모마리아 님께 묵주기도도 드리긴 했다. 하지만 종교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았다. 세상살이하다 보면 어디 완벽하게 살아질 수 있을까만은, 그래서 성실한 종교인들에게는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없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도 간혹 종교가 정한 계율이나 율법을 크게 벗어나도, 능청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흔히 보아온 터다.
온 열정을 쏟아부었다. 새로운 기법으로 예술적 가치가 승화되어 가장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이제부터 누리는 삶이라 여겼다. 추상적으로 여겼던 비극이 그에게 다가온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명의의 의술도, 부처님, 예수님이 행한다는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생의 허무함. 신이 있다면 무슨 자격으로 이렇게 혹독한 시련을 줄 수가 있을까. 엎드려 빌며 애원하는 나에게 이렇게 모질게 하는 것은 아니지 싶었다. 사람들이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신마저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그때는 그랬다. 하지만 운명이란 것이 인간의 생을 가지고 장난질할 때면 신도 어떤 능력자도 무력하다.
세월이 약이라 했던가.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듯, 이제는 몸도 마음도 안정되고 편안하다. 그래도 간간이 느껴지는 공허함은 있다. 그럴 때면 유일하게 떠나서 걷던 길이었다. 돌이켜보니 세상 거칠 것 없이 자신만만하게 살았던 내가 상황이 급하다고 막무가내 절과 교회를 찾아가 매달리고 애원했으니 부처님, 예수님도 참 황당했으리라.
애초부터 태어나면 생의 끝은 있게 마련이다. 누구도 그 끝을 피해 천년만년을 살았다고 들은 바도 기록을 읽어 본 적도 없다. 부처님도, 예수님도 피할 수 없었던 사람의 생이 그런 것을.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깨우치고 성찰할 일이다.
“부처님! 무지했던 저를 용서하소서.”
차마 마주 뵙기에 면목이 없다. 푹 수그린 고개를 살그머니 들어 본다. 처음 마주했을 때보다 얼굴에는 더한 부드럽고 너그러운 미소가 가득하시다. 부처님께서 거칠고 꼬이고 탁해진 나를 어루만져 다독인다.
스스로가 만들어 살아온 세상살이가 아니더냐. 누구를 더 이상 원망하며 살겠느냐 물으신다. 생과 사는 뜬구름 같은 것. 누구라도 그럴 것이니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라신다. 오기도 아집도 다 내려놓고 남은 생을 가볍게 살라 한다.
다시 길을 걷는다. 남은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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