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열쇠〉도 자동차 열쇠를 잘못 다루었던 사건 하나를 소재로 글을 쓰면서 의미는 ‘마음의 열쇠’로 이끌고 갔다. 이 작품도 여명처럼 이야기에서, 사건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고 의미를 찾아간다. 〈옷 벗기〉는 의미들이 모여서 향연을 벌인다. 〈차선〉도 〈옷 벗기〉처럼 많은 의미가 쏟아낸다. 〈상식 밖의 시간〉은 상식(관습 또는 습관)이 우리의 생활을 얼마나 강력하게 지배하는가를 이야기하지만. 한편으로는 현대의 전자화, 과학화 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수필집 《행복한 삶 여유로운 삶》 2부의 글을 보자. 비교적 그의 생활 주변에서 경험한 사건을 이야기한다. 일반적으로 경험한 사실을 수필로 쓸 때는 사건을 이야기로 풀어내면서 수필이 만들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일반적으로 이야기 속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훈수〉를 읽어보면, 어떤 훈수가 일어났던 특정의 상황을 이야기로 풀어낸 것이 아니다. 훈수가 일어나는, 또는 일어났을 때의 일반적인 내용을 다양하게 풀어내면서 의미를 만든다. 〈말의 힘〉도 마찬가지이다.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이야기를 만든다. 말하자면 이야기에 의미에 종속시키기보다는 의미에 이야기를 종속시켰다. 이야기에 의미를 담는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야기가 진행할 때는 재미만 느껴지고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끝까지 듣고 나서야 ‘아, 그런 뜻이구나’하고 느낄 때라야 좋은 글이라고 하였다. 그러고 보면 〈스스로 터득한 지혜〉도 다분히 주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가 의미에 종속된다. 이 말은 이야기에 의미를 담기보다 의미를 위해서 이야기를 산발적으로 끌어온다는 것이다. 〈훈수〉나, 〈말의 힘〉이나 같은 양식이라 하겠다.
우리는 수필을 ‘교술 문학’으로 분류하면서, 작가가 독자에게 무엇인가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전상준의 작품은 다분히 그런 면모가 보인다. 그래서 ‘너무 교술적 수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교술 문학에서는 지적 감동이더라도 정서적 표현이 중요하다. 그러나 의미 전달에만 치중하다 보면 정서적 표현이 약해져서 재미가 줄어드는 단점도 생긴다. 그의 수필도 그런 점을 다분히 가지고 있다.
수필집 《행복한 삶 여유로운 삶》 3부에서는 또 다른 수필의 맛이 느껴진다. 〈속진의 무게를 느낀 하루〉는 경주 남산 답사기이다. 경주 남산은 신라의 불교문화가 널려있는 박물관이다. 수많은 답사기가 나와 있다. 소재가 풍부하지만, 나만의 글을 쓰기가 그만큼 어렵다. 경주 남산에는 목이 떨어져 나간 불상이 많다. 주변에서 머리 부분을 찾으면 어설프게나마 두부와 몸체를 접합해두는 것이 많다. 바로 이 부분을 수필로 표현했다.
누군가 복원하면서 목과 턱 부분에 시멘트를 발라 놓았다. 불상의 얼굴 모습이 부자연스럽고 어색하다. 시멘트로 발라 놓은 곳을 종이로 가리니 훨씬 자연스럽게 보인다. 불상이 고증 없이 멋대로 복원해놓은 그 몰상식함을 비웃고 있는 듯하다.
한발 물러서서 바라본다. 목과 턱에 바른 시멘트에서 무식하다는 그 사람의 정성을 보인다. 상당히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행복한 삶 여유로운 삶》, 〈속진의 무게를 느낀 하루〉에서)
남산을 답사 가면 남산에 대해서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해설사의 해설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행기나 답사기에서 해설사 또는 안내자의 말을 그대로 옮겨오는 것을 흔히 본다. 그러나 수필은 그대로 수용하기보다 자기 나름의 생각을 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써야만 수많은 여행기 중에서 자기만의 여행기를 쓸 수 있다. 간혹, ‘불교 미술에 대한 소양이 없어서’라며 꼬리를 내린다. 전상준의 경우는 전문적인 불교 미술이 아니고, 시멘트로 수리한 장인의 정성을 이야기한다. 엄격히 말하면 불상은 경배의 대상이지 미술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미적인 가치보다 종교적인 신앙심이 더 중요하다. 해설사들은 일반적으로 미술의 견지에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해설사와는 달리 비록 시멘트라고 하더라고 신앙심 또는 정성이라는 관점에서 보고, 느끼는 것이 글쓰기의 시선이 아닐까.
이처럼 전상준의 수필에는 자신만의 독특한 읽기를 한 부분이 많다. 수필은 보편적인 가치를 말하기보다는 자신의 의견을 독자에게 설득하는 양식을 더 강조한다. 자신의 독특한 읽기를 한 것은 수필을 쓰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이란 생각이다.
마음의 열쇠
전상준
벌써 두 번째다. 이렇게 정신이 없다니 말도 안 된다. 엔진도 끄지 않은 채 자동차 문을 잠그다니. 아내의 농처럼 치매가 시작된 것일까. 어이가 없다. 시간은 왜 이렇게 느리게 가는지. 보험회사에 전화한 것이 꽤 오래된 것 같은데 시계를 보니 아직 몇 분 지나지 않았다.
열쇠는 잠긴 문을 열기 위해 꼭 있어야 할 도구다. 우리 집 거실 벽엔 나무로 만든 열쇠 모양을 한 커다란 열쇠걸이가 있다. 방을 비롯해 거실, 부엌 등 잠금장치가 되어 있는 곳의 열쇠는 모두가 걸려 있다. 처음엔 몇 개 안 되던 것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 수효가 늘어 지금은 내가 보아도 참 많다는 느낌이 든다.
열쇠가 많다는 것은 잠글 곳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보기에는 자물쇠로 잠글 만큼 중요한 것도 없는데 습관적으로 잠그고 있다. 잠그지 않으면 불안하다. 가슴속에 불신의 싹을 틔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여름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 온 식구가 외출했다 돌아오니 현관, 안방, 장롱, 문갑 등 모든 문이 열려 있다. 믿었던 열쇠에 배신당한 느낌이 들었다.
열쇠는 여러 가지 모양을 하고 있다. 둥근, 네모난, 마름모, 어떻게 생긴 것이라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 등 제각각이다. 작은 자물쇠 구멍에 들어가 어떤 기능을 발휘하는지 알지 못하나, 잠겨 있는 곳으로 들어가거나, 나오려고 할 땐 반드시 이것을 사용해야 한다. 어떤 때는 어느 것이 어디에 맞는 것인지 몰라 헷갈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집에 있는 것을 못 가져가게 하려고 채워 놓은 자물쇠를 도둑들은 잘도 여는데 나는 생활에 불편을 느끼고 있다. 마음 편하게 집에 있는 모든 열쇠를 없애고 살고 싶다. 요즈음 나는 의식적으로 외출할 때 문을 잠그지 않는다. 별로 가진 것도 없으면서 그것을 지키겠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처량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사실 우리 집에서 열어야 할 곳은 잠겨있는 방들이 아니라, 식구들 각자가 가진 마음의 문이다. 젊은 시절 아내의 마음의 문은 쉽게 열렸다. 집안의 작은 일 하나까지도 의논하며 가난한 살림을 꾸려 왔다. 어느 날부터인지 모르나 의견이 서로 맞지 않아 충돌하는 일이 쌓여 가면서 대화가 적어지더니 지금은 그 벽이 제법 높다.
경제적으로 볼 때 젊은 시절보다 열 배, 스무 배나 나아졌다. 그러나 주위의 사람들과 비교할 때 언제나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못하다는 생각이 아내를 지배하고부터 문은 점점 굳게 잠겨 버렸다. 참으로 많은 종류의 열쇠를 가져와 열어 보았으나 번번이 마음의 자물쇠에 맞지 않아 실패만 거듭하고 있다.
아이들도 어릴 때는 마음의 문을 쉽게 열었다. 값싼 인형 하나에도 좋아 못살 듯한 행동을 하고, 빵 한 조각을 먹으면서도 행복해했다. 작은 것에 만족하고 별것 아닌 것에 즐거워할 줄 알더니 머리가 크면서 달라졌다. 웃음이 적어지고, 말수도 줄었다. 매사를 협의나 협력해서 하려고 하지 않고, 알아서 처리한단다. 내 눈에는 아직 어린아이인데 조언을 구하거나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마음의 문을 단단히 닫아걸고 있는 듯하다.
나에게 식구들의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열쇠의 모양이 각각이듯 식구들 마음의 문을 열 방법 또한 다르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견인차가 왔다. 겁이 났다. 지난번에는 작은 트럭을 타고 와서 문을 열어 주었는데, 이번엔 엔진에 시동을 걸어 놓은 채 문이 잠겨 차를 끌고 가려고 하나 보다.
기사가 잠겨있는 차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몇 가지의 공구를 손에 들고 있다. 차의 오른편 앞 유리문을 안쪽으로 힘껏 밀더니 작은 나무쐐기를 박는다. 유리와 문틀의 벌어진 틈으로 끝이 갈퀴처럼 굽은 쇠막대를 넣고 이리저리 돌리기를 반복한다.
잘되지 않는 모양이다. 얼굴에 흐르는 땀을 장갑 낀 손으로 연신 훔친다. 속주머니에서 손전등을 꺼내 비추어 본다. 함 참을 더 신간하더니 열쇠를 나에게 준다. 차는 엔진을 멈추고 있다. 무척이나 고마웠다. 신기하다. 열쇠도 없이 잠겨있는 문을 열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기사가 부럽다. 차에 올라 열쇠를 꽂아 본다. 차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시동이 잘 걸린다.
순간 식구들의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없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열쇠가 없어도 열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작정이다. 기사가 잠긴 차 문을 열기 위해 여러 가지 도구를 사용하듯, 나도 식구들의 닫힌 마음의 문을 열도록 현명한 지혜를 발휘할 생각이다.
아내의 웃는 얼굴이, 아이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이 눈앞을 스쳐 간다.♡
―(《행복한 삶 여유로운 삶》, 〈마음의 열쇠〉 전문)
나는 이 수필 ‘마음의 열쇠’가 전상준 수필의 전형이라고 생각하여 여기에 전문(全文)을 가져왔다. 어떤 소재를 가지고 글을 쓰면서 결미에 도덕적인 의미를 만들어 낸다. 이런 형식의 수필은 그의 첫 수필집에서 다섯 번째 수필까지 일관되게 나타나는 양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