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 드라마 | 존 로스켈리의 단독등반기] 강풍 몰아치는 서릉은 백색정글에서 펼쳐진 베트콩과의 전쟁이었다
글·이창기 전 강릉고 교사
미국의 위대한 산악인 존 로스켈리의 마칼루 알파인스타일 단독등반기
마칼루의 웨스트 리지가 드디어 기나긴 칼날 능선, 남동릉과 만나는 교차 지점이 나타났다. 우리는 91m의 설원을 내려와 넓은 숄더에 도달했다. 이제 높이 152m의 바위와 눈의 정상 피라미드(Summit pyramid)만 돌파하면 마칼루의 정상이 나타날 것이다. 코프친스키가 정상 피라미드를 돌아 북동릉의 설사면으로 선등하겠다고 자청했다. 서쪽의 화강암 벽은 너무 가파르고, 기술 등반을 요해서 탈진 상태의 우리가 돌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10시간 동안 선등 끝에, 그에게 길을 뚫는 임무를 인계했다. 코프친스키는 뼈대가 굵고, 깡마른 모습으로 남동릉을 오르다가 심설의 스노 걸리로 들어서서, 버트레스의 동쪽 설사면으로 트래버스했다. 그는 허리까지 차오르는 눈 고랑을 만들며 서서히 27m를 수평으로 이동했다. 버트레스의 꼭대기와 코프친스키 사이에는 심설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루트 개척, 러셀은 8,321m 지점에서 실패로 돌아갔다. 세계 일류급 레슬링 선수인 그의 근육의 힘도 심설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심설과 씨름하던 그가 소리쳤다.
“심설이 너무 깊어, 나의 노력은 아무 소득이 없어. 나는 되돌아 내려갈게.”
짐과 나는 발길을 되돌려 남동릉의 능선 마루로 올라갔다. 오후 `1시 반이었다. 우리는 12시간째 등반을 계속하고 있었다. 강인한 정신력과 건강한 체력을 지닌 스테이츠 대원도 탈진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모터처럼 재빠른 동작은 동력을 잃은 지 오래되었고, 발음도 분명치 않았다. 나는 위쪽의 화강암 버트레스를 살펴보고, 스테이츠는 정상까지 확보를 받으며 등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되면 등정은 많은 시간을 요하게 되어, 등정 후 어둡기 전에 제5 캠프까지 하산하기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다.
▲ 마칼루 웨스트리지 제5캠프의 로스켈리.
나는 스테이츠에게 말했다.
“자네는 이런 느린 속도로 정상을 밟을 수 없어. 자네의 굼뜬 동작 때문에 우리 모두가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단 말이야.”
스테이츠는 눈물을 글썽이며,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나의 상황 판단을 인정하는 투로 중얼거렸다. 코프친스키의 근육은 황소를 닮아 튼튼했고, 그의 분별심은 고산 루트의 개척자로 적합했다. 그는 마칼루의 초등자 리오넬 테레이처럼 추진력이 강한 산악인이었다. 나는 리오넬 테레이의 친구, 등반 기술이 뛰어난 루이스 라쉬날 쪽을 더 닮은 편이었다. 나는 수직의 세계에 거미처럼 퇴로인 거미줄을 설치하고, 냉정하게 등정 성공률을 예측하며, 때로는 대담한 행동을 취하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등반을 과감하게 추진한다. 나는 곡예사를 닮은 산악인이었고, 코프친스키는 레슬링 선수 출신으로 막강한 체력의 소유자였다.
코프친스키는 버트레스를 살펴본 후, 나에게 질문했다.
“등정 후 어둡기 전에 하산할 가망성은 있어?”
나는 대답했다.
“그럴 가망성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해.”
그가 말했다.
“나도 동감이야. 게다가 우리는 비박 준비도 안 된 상태야. 자네는 어떻게 할 심사인가?”
나는 단호한 어조로 나의 심산(心算)을 피력했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등반을 계속할 작정이야.”
그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말했다.
“나는 마칼루에서 야등하느라 손가락들과 발가락들을 모두 잃고 싶지 않아. 또한 등정을 위해 내 목숨마저 잃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 나는 스테이츠와 제5 캠프로 하산할 테니까, 자네 혼자 등반하면 속도가 빨라서 등정하고 어둡기 전에 캠프로 돌아 올 수 있을 거야.”
내가 마칼루 등정을 무사히 마무리하려면, 코프친스키의 정력과 동행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등반 포기 주장이 옳다고 생각해서 등반을 무리하게 강요하지 않았다. 이제 152m만 돌파하면 정상이니까, 단독 등정도 가능하고 어둠이 찾아들기 전에 제5 캠프로 귀환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었다. 나도 군거본능(群居本能)에 따라 그들과 함께 하산하고 싶었고, 마칼루 정상을 영영 잊고 싶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서 상식에 반항하는 열정이 솟아났고, 나는 그 열정이 정당하다고 받아 들였다. 내가 등반가의 길을 계속하는 한, 나는 잠재적인 재난에서 벗어날 운명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최선을 다해 그 재난에 대비해야 하고, 그 재난을 받아들여 극복하고, 그 재난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 길이 산을 좋아하는 내가 처한 운명의 길이다. 인생사에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때가 있듯이, 나에게는 모험(risks)이 수단을 정당화할 때도 있다. 나는 산에서 위기에 처할 때마다, 내가 비싼 대가를 치르고 목숨을 얻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닌 이상, 내가 모험을 추구하다가 목숨을 잃어도, 손해 볼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 짐 스테이츠가 마칼루 웨스트리지 제3캠프로 짐을 운반하고 있다.
금발 아가씨가 알몸으로 옆에 누워 있어
우리들은 작별했다. 코프친스키는 나에게 살아서 돌아와 가을에 함께 즐거운 사냥을 떠나자고 소리쳤고, 스테이츠는 말없이 손을 흔들었다. 그들은 살아 있는 나를 마지막으로 본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나는 울적한 기분으로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화강암 벽을 쳐다보았다. 뾰족한 얼음 능선 쪽으로 트래버스했다. 거대하고 가파른 마칼루 서벽이 아찔하게 내려다 보였다. 조심스럽게 가파르게 치솟은 15cm 넓이의 람페를 살금살금 기어올랐다. 나는 ‘다흐슈타인’ 벙어리장갑을 이용해 날카롭게 내밀고 있는 홀드(holds)들을 움켜잡으며 람페를 다 오른 후, 좌측의 암벽이 길고 너무 가팔라서 치명적인 추락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암벽 등반을 피하려고, 오른쪽의 내리막 길, 설릉에 도달할 작정이었다.
나는 거대한 홀드를 움켜잡고 바윗덩어리 위로 올라섰다. 나는 몇 번 더 이 동작을 반복하며 우측으로 서서히 옮겨가 설릉에 도달했고, 그 설릉을 가로질러 버트레스 꼭대기에 도달했다. 거기서 낡은 피톤에 카라비너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그곳이 타 등반대가 현수하강했던 장소라고 판단했다. 우측의 동쪽 설사면은 등반하는 데 그다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좌측의 서벽은 3,000여 m 높이의 낭떠러지가 내려다보이는 난코스였다. 그 절벽 밑에 위치한 베이스캠프의 텐트들이 노란 반점들처럼 바라보였다.
나는 무릎까지 차오르는 심설 속으로, 서서히 능선을 올랐다. 두서너 발자국마다 눈이 무너져 내렸다. 내 몸은 탈진으로 인해 인사불성 상태가 일어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설사면이 지속적으로 걷기 힘든 심설 상태라면, 등정을 포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46m쯤 오르니 능선이 넓어지며 강풍에 의해 표면의 눈이 강도가 단단해진 상태였다.
동쪽 방향의 거대한 커니스(cornices, 눈 처마들)를 피하며, 한 발자국 옮길 때마다 네 번 또는 여섯 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전진했다. 나는 전력으로 매진했기 때문에 등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나는 가짜 정상에 오른 후, 여러 개의 능선들이 90여 m 떨어진 앞의 정점에 모여 있는 곳이 진짜 정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내가 사력을 다해 마지막 언덕을 오를 수 있도록 도와준 아드레날린이 허공 속으로 자취 없이 사라졌다. 나는 그냥 그 자리, 눈 위에 주저앉았다가 그대로 드러누웠다.
잠시 후 선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미국의 북서부, 아이다호(Idaho)주의 암벽 침니 록(Chimney Rock) 밑의 초원에 가 있었다. 풀밭으로 굽이쳐 흐르는 도랑 옆에 누워 있었다. 금발이 허리까지 흘러내린 아가씨가 홀딱 벗은 알몸으로 내 옆에 누워 있었지만 그녀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몸을 홱 움직여 잠에서 깨어나 시계를 보았다. 오후 3시였다. 그 고소에서의 숙면(熟眠)은 죽음의 세계로의 초대이고 통로였다. 내가 등정 후 어둡기 전에 살아서 하산하려면 즉시 움직여야했다.
검은색의 정상 피라미드에 당도했다. 몇 초 동안의 휴식을 얻기 위해, 아이스 액스 위에 몸을 구부리고 기대어 섰다. 잠시 후 심설 속으로 대시를 계속했다. 잠시 동안 바위 볼더 위로 난 길을 택할까, 아니면 심설 쪽을 택할까 망설였다. 심설 쪽을 포기하고, 단단한 발판이 있는 바위 볼더 길을 선택했다. 정상에서 5m 떨어진 곳부터는 단단하게 얼어붙은 눈길을 밟았다. 최후의 두 발자국, 그리고 한 발자국, 나는 남아 있는 기운이 없어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곳이 마칼루의 정상, 고도 8,463m 지점이었다. 나는 마칼루를 등정한 최초의 미국인이 되었다.
오후 3시 반이었다. 정상을 향해 3개의 척추처럼 뻗어 오른 능선들 사이를 메웠던 구름이 강풍에 의해 톱니 형태가 되어 티베트와 네팔 쪽으로 사라졌다. 서쪽으로 40km 떨어진 지점에 양탄자처럼 펼쳐진 구름바다 위에 천상(天上)의 산, 에베레스트(8,848m)와 로체(8,516m)가 위용을 자랑하며 솟아 있었다. 나는 완전 탈진 상태로 위험한 난코스 루트의 하산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등정 이후에라도 산악인이 실족으로 추락해 사망한다면, 그 등정은 무위로 끝난다.
우리는 무산소로 마칼루 등정을 일구어 냈다. 나는 8,000m급 봉우리의 여러 루트들 중에서 최대 난코스의 하나인 마칼루 ‘웨스트 필라(West Pillar)’를 선택했다. 등반 대원들은 4명으로 국한했고, 고소 포터는 한 명도 고용하지 않았다. 우리는 3개월 만에 이 영웅적인 업적을 성취해 내가 이룩한 다른 8,000m급 봉우리들의 등정들, 다울라기리(8,167m) 북동릉, K2(8,611m) 북동릉의 무산소 등정들보다 더욱 값진 업적을 일구어 냈다.
나는 이 등정을 실패로 되돌리지 않기 위해, 꼭 살아서 하산해야 된다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다짐했다. 정상에서 미국 국기인 성조기와 스포케인 시기(市旗)를 꺼내 들고 사진 촬영을 했고, 파노라마도 촬영했다. 정상 위에 이전의 등정 팀이 버리고 간 오스트리아 제 빈 산소통 3개와 대나무 막대기 한 개, 그리고 호밀 크래커 한 봉지가 놓여 있었다. 나는 굶주린 상태에서 그 바삭거리는 크래커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 트랑고타워를 등반 중인 모리세이, 데니스 헨넥, 킴 슈미츠 대원.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동료에게 알리고 싶어
옷 속의 끈적끈적한 땀으로 인해 온 몸에 한기가 감돌며, 저체온증이 시작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는 정상아래 5m 지점에서 기념품으로 석영 암맥이 있는 검은 바위 조각 하나를 떼어내 배낭에 넣고 고달픈 하산을 시작했다. 상부 능선의 난코스 구간까지 하산했을 때, 추락의 공포가 엄습해 정신 집중이 불가능했다.
내가 정상에서 느꼈던 의기양양하던 자존심은 공포심 때문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완전 탈진 상태 속에서 계속 추락의 불안감에 떨었다. 등정 길에 올랐던 서쪽의 수직 암벽으로 하산하거나, 아니면 코프친스키가 돌파하지 못했던 동쪽의 가파른 설사면으로 ‘글리사드(glissade, 制動滑降, 피켈로 균형을 잡으며 눈 쌓인 골짜기를 미끄러져 내려 옴)’ 해야 할 처지가 닥쳤다.
그런데 나의 넓적다리와 팔뚝의 근육이 떨려서 맥을 못 추는 바람에, 가파른 암벽으로 하산은 불가능했다. 나는 눈 처마가 없는 암벽에 앉아 내 몸을 밀어 내렸다. 나는 가파른 설사면에 궁둥이를 깔고 앉아 ‘글리사드’를 계속했다. 나는 작은 눈사태와 함께 좁은 걸리를 따라 여러 개의 바위 밴드 위로 미끄러져 내린 다음, 심설이 쌓인 곳에 두 발을 박고 활강을 멈추었다. 나를 밀어 내린 작은 눈사태도 그곳에서 정지했다.
나는 마칼루의 남동릉, 즉 여러 시간 전에 친구들과 헤어졌던 지점으로 되돌아 왔다.
휴식을 취할 때마다 두 눈을 감고 10분씩 얕은 잠을 자거나, 아니면 마땅한 비박 장소를 물색하느라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잠자는 데 혈안이 되어, 열 발자국마다 휴식을 취하려고 눈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러나 깊이 잠들었다가는 그곳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운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때때로 나는 나른한 마비상태에서 벗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날은 저물고 있었고, 나는 탈진 상태로 어둠 속에서 오전에 돌파했던 난코스 구간으로 계속해서 하산할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즉 나는 제5 캠프로 귀환할 가망이 없었다.
오전에 보았던 바위 동굴을 찾기 시작했다. 10분도 채 안 되어 바위 동굴을 찾아내고 그 속에 들어가 큰대자로 누웠다. 고산 지대에서 산악인의 스트레스, 기진맥진, 굶주림, 고소 등에 의한 환청 현상이 발생했다. 나는 아래쪽 짙은 땅거미와 먹구름 속에서 나의 동료 스테이츠가 루트를 묻고, 코프친스키가 대답하는 음성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상쾌하고 맑은 공기 속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능선을 따라 곧장 올라 왔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독한 굶주림 속에서 음식의 갈망보다도, 숨 막히는 희박한 공기 속에서 산소보다도, 탈진 상태에서 쏟아지는 잠보다도, 인간의 음성이 더 절실하게 그리웠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나의 동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고함을 질렀다. 코프친스키가 “존, 자네가 살아 돌아 왔는가?”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싱글벙글 웃다가 갑자기 껄껄 웃었다. 그가 거대한 공간 속에서 어떻게 내 작은 목소리를 식별할 수 있겠는가? 나는 내가 연출하던 모노드라마를 접었다.
해가 넘어가자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나는 혹한 속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득의의 웃음을 잃고, 암굴에서 계속 잠을 자다가는 동사하기 십상이라는 사실을 각성했다.
동굴에서 기어 나와, 어둠 속에서 헤드램프의 희미한 불빛을 따라 하산을 시작했다. 절벽을 마주보고 비틀거리며, 조금씩 움직였다. 만일 이 걸리에서 추락한다면, 나는 순식간에 거대한 공간 속으로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모든 근육과 신경조직이 긴장상태가 되어, 승용차 크기의 볼더를 돌아 제5 캠프로 들어섰을 때, 시간은 오후 8시 반이었다. 아침에 캠프를 떠난 지 18시간 이상이 흘렀다.
스테이츠와 코프친스키와 포옹을 하고, 등정에 관해서라기보다는 살아서 다시 만나게 된 것에 대해 축하 인사를 나누었다. 그날 밤 내가 히말라야 등반에서 마주쳤던 폭풍설 가운데 가장 사나운 폭풍설이 마칼루를 강타했다. 내가 마칼루 서릉의 암굴에서 침낭도 없이 비박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동사했을 것이다. 우리는 스토브가 고장이 나서, 다음날 제2캠프로 하산했는데, 사나운 폭풍설은 다음날 밤도 맹위를 떨쳤다.
▲ 마칼루 웨스트리지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로스켈리.
폐수종 걸려 사경 헤매다 절친 도움으로 생환
마칼루의 북서릉과 웨스트 리지 사이에 최고난도의 절벽, 높이 3,000m의 서벽이 있고, 웨스트 리지와 사우스 버트레스 사이에 같은 높이의 남벽이 위치한다. 1975년 10월 유고슬라비아 대의 슈타네 벨라크(Stane Belak)와 마리얀 만프레다(Marjan Manfreda) 대원이 ‘마칼루의 난공불락의 요새’로 여겨지던 높이 3,000m의 남벽을 등정하여 세계의 산악계를 경악시켰다.
그 다음으로 개척된 유명 루트는 마칼루의 ‘사우스 버트레스(South Buttress)’인데 남동봉(8,010m) 밑의 거대한 필라(Pillar)를 지나, 남서쪽 바룬빙하로 이어지는 험로이다. 1976년 체르빈카(J. Cervinka) 대장이 이끄는 체코 대가 바룬빙하에서 출발했다. 2명의 체코대원들, 밀란 크리싸크(Milan Krissak)와 카렐 슈베르트(Karel Schubert), 그리고 한 명의 스페인 대원은 남동봉 밑에 위치한 필라를 돌파하고, 남동봉을 초등했다. 그들은 계속 등반해서 주봉을 밟았는데, 하산 중에 체코 대원 슈베르트가 탈진으로 사망하고, 나머지 대원들은 심한 동상에 걸린 채 생환했다.
1981년 폴란드의 예지 쿠쿠츠카는 보이테크 쿠르티카, 영국의 유명 산악인 알렉스 매킨타이어와 마칼루의 서벽 7,830m 지점까지 진출하고, 높이 500m의 오버행 바위 절벽을 돌파할 수 없어 실패했다. 1982년 풀란드-브라질 합동등반대에 참가했던 폴란드 유명 산악인 안드르체이 초크(Andrzei Czok, 쿠쿠츠카와 에베레스트의 사우스 버트레스에 신 루트를 개척했고, 후에 캉첸중가 남서벽의 동계 초등에서 기흉증으로 사망)는 마칼루의 악명 높은 제2 요새, 즉 높이 3,000m의 서벽을 단독으로 등반 후 북서릉으로 마칼루의 정상을 밟았다. 1988년 영국의 유명 산악인, 더그 스코트는 마칼루의 서벽에 도전해 7,300m 지점에서 패퇴했다.
로스켈리는 1982년 네팔의 촐라체(Cholatse ·6,745m)를 알파인 스타일로 초등했고, 1984년 아콩카구아(6,959m)를 등정했다. 1989년 그는 제프 로우와 네팔의 타워체(Tawoche·6,564m) 북동벽을 동계 알파인 스타일로 초등했다. 그는 등반에서 알파인 스타일 등반법을 고집하다 보니, 고산에서 쓰라린 실패도 수차례 경험했다.
1978년 그는 네팔의 자누(Jannu) 북벽에서 2인 조 알파인 스타일 등반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83년에는 에베레스트 서릉 등반대에 참가했다. 그는 킴 몸과 제4 캠프 위쪽 7,925m 지점까지 진출했다. 로스켈리는 폐수종에 걸려 킴 몸 대원과 제3 캠프로 급히 하산 중 제3 캠프 위쪽 웨스트 리지의 숄더(Shoulder)에서 쓰러졌다. 킴 몸은 로스켈리의 8자 하강기를 가파른 고정 자일에 연결하고 끌어 내리며 헌신적인 구조 활동을 전개해 로스켈리는 생환할 수 있었다. 로스켈리의 절친(切親), 킴 몸 대원은 그해 가을 미국 에베레스트의 캉슝 벽(동벽) 등반대에 참가해, 유산소로 5명의 등정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986년 킴 몸은 브리티시컬럼비아에서 스키를 타던 도중 판상눈사태에 매몰되어 사망했다.
로스켈리는 1984년 에베레스트 북벽 등반대에 참가했다. 호주의 소규모 등반 팀이 ‘그레이트 쿨와르’로 등반 중이어서 그들은 방해를 하지 않기 위해 노스 콜(7,010m)에 오른 후, 북릉의 7,300m 지점에서 북벽을 트래버스해 ‘그레이트 쿨와르’에 도달하는 등로를 택했다. 그는 등반을 계속해 북벽의 8,534m 지점까지 무산소로 진출하고, 하이포서미아(hypothermia, 저체온증)로 손발이 마비되어 퇴각했고, 어쉴러 대원은 유산소로 등정했다.
1985년 그는 세계 3위 고봉, 캉첸중가 북벽에서 7,925m 지점까지 진출하고 악천후를 만나 퇴각했고, 1990년 티베트의 멘룽체(Menlungtse)에서 알파인 스타일 등정에 실패했다. 그는 1981년에 매킨리(6,194m·데날리)의 남벽 캐신리지에 도전했으나 등정을 눈앞에 두고 악천후로 실패하고, 10년 뒤인 1991년 짐 윅 와이어와 서릉을 통해 매킨리 등정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