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1-7절
새 번역 성경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와 동침하니, 아내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았다. 하와가 말하였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내가 남자 아이를 얻었다."
하와는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다.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고, 가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다.
세월이 지난 뒤에, 가인은 땅에서 거둔 곡식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바쳤다. 주님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셨으나,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그래서 가인은 몹시 화가 나서, 얼굴빛이 달라졌다.
주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얼굴빛이 달라지는 까닭이 무엇이냐?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느냐?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내일 모레 추석 명절
한국 전통 조상들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미덕으로 지켜 오고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기독교인, 그리스도인이라고 사람들이 부릅니다.
교회 내에서는 성도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한국의 명절에 제사 하는 것은
기독교적 시각(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시각 또는 견해)으로는 제사 대상이 조상이지만
그 실체는 아무도 모릅니다.
사람은 죽으면 그 영이 하나님 나라에 가든지 아니면 지옥에 가든지 할 것이라는 것이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것이며 그 주장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가족들과 언쟁이 생기기도 하고,
그로 인해 관계 단절까지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인간 외에 어떤 영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 땅의 대부분의 인간들이 알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한국의 제사 문화이며 그것을 아름다운 전통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어쨌든 인간 사회에 공존하는 것이 영들의 세계라는 것을 대부분의 국가나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많은 조상들이 기뻐하는 제사가 있을까?
그런 제사는 어떤 제사인가?
참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제사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제사 올려 드려야 할 존재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 뿐이라는 것을 우리 기독교인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수 많은 가정이 제사를 하지만 그로 인해 갈등이나 분열, 다툼이 없길 기도할 뿐입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통해서 살펴 본 바는 죄는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며, 사람들을 악해지게 하는 악이라는 것도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도 성경 말씀을 통해 배웠습니다.
이제 우리는 배운대로 추석을 맞이해서 온 가족이 모이는 기쁜 시간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 것이다.
한국 고유 명절인 추석이 가족 화합과 바쁘게 살아가느라 잊고 있었던 가족 간의 정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는 것을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같은 가족이면서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다 보니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창조주이신 것과 우리 인간이 아무런 지불을 하지 않아도 숨을 쉴 수 있는 공기와 햇빛, 밤 하늘의 별들과 달을 즐길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지 않는 사람과 감사하는 사람들이 섞여 살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로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을 올려 드리고 경배하며 예배를 올려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 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가 있고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을까?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두 형제가 각자가 수고하고 애쓴 예물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고 제사를 드렸는데 한 형제는 것은 받으시고 다른 형제 것은 받지 않으셨을까?
자비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왜 이런 모습을 보일실까?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매우 당황스럽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분석을 해 봐도 참 어렵다는 의견을 내 놓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여러 의견들을 알 수 있습니다.
드디어 아담과 하와가 애기를 낳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 나와 밭 갈고 경작하며 재미있게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후손을 낳았습니다.
첫 아들을 낳았으니 얼마나 기쁘겠어요
아마도 든든했을 것입니다.
이대로 가족 모두 행복하고 화목하게 살갔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이미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죄와 악이 스며 든 인간의 삶은 첫 인간부터 갈등이 시작이 되어 아들 형제 사이에서도 갈등과 시기와 질투가 시작이 됩니다.
그런 시작이 우리 세대에까지 이어지고 우리 후손들에게까지 계속이어진다는 끔찍한 형벌 속에 인간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하늘의 섭리를 전혀 모르거나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아 갑니다.
하늘의 무서움과 두려움을 모르는 것이죠
오늘 두 형제의 제사는 어떤 차이가 있기에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는 안 받으셨을까요???
창세기 본문에서는 그런 이유나 원인을 찾을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증인들이 다수 기록된 히브리서 11장을 찾아 살펴보겠습니다.
히 11:4절입니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은 예배 믿음으로 드려서 의인이라고 기록됩니다.
또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이 드린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신답니다.
히브리서에 의하면 아벨은 하나님께 올려 드려는 첫 소산물이 새끼 양을 믿음으로 드렸다는데 그 믿음이 어떤 것이기에 하나님이 받으시고 증언까지 하신 것인가요?
로마서 1:16 절 처음 부분입니다.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나니
1: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합2:3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선지자의 기록에 의하면 아벨은 믿음으로 살았기에 의인이라 불립니다.
그것을 히브리서 11:4절과 로마서 1:17절에서 증거합니다.
복음은 신약성경을 통해 하늘의 기쁜 소식이고 하늘의 기쁜 소식을 땅에 소개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장 1절의 말씀에 의하면 태초에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고
그 말씀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이 세상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삼위의 하나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에 대해
로마서 1장 16-17절을 통해 유추해 보면 아벨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가인은 복음을 부끄러워 했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내 의견)
아벨은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제사에 대해 열심히 준비를 했고, 가인은 그렇지 못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는데, 레위기 2:14절 말씀을 통해 보면서
“너는 첫 이삭의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거든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네 소제를 삼되
네가 맨 먼저 거둔 것을 나 주에게 곡식제물로 바칠 때에는, 햇곡식을 불에 볶거나 찧은 것으로 곡식제물을 바쳐야 한다. ”
가인이 땅의 첫 소산물을 드리지 않았다는 것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예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가인과 아벨의 차이는 동물과 식물의 차이라기 보다는 창조주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예배자의 진정성에 있다는 평가가 매우 많은 호응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을 통해 하신 말씀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아벨은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 올려 드릴 때가 되었을 때 영과 진리로 제물을 드리고 예배를 드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시대에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제단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예배를 올려 드렸는지 알 수 없지만 정성 껏 제물을 준비하고 예배를 올려 드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진리라는 말의 의미는
명사 알레데이아(Homer 이래)는 어원적으로 '가리워져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보여지거나, 지적되거나 표현된 정도(범위)의 상태나 사태, 그것도 이러한 보임과 지적과 표현에서 나타내지거나 그 자체 사실 그대로 나타낸 정도의 상태나 사태를 지적하며, 물론 그것은 숨겨지거나 위조되거나 왜곡되거나 생략되거나 은폐될 수도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는 의미
입니다.
따라서 아벨은 하나님을 향하여 거리낌이 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예배를 올려 드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아벨의 모습에서 매우 바쁘고 많은 경쟁과 갈등과 혼란 속의 세상의 흐름과는 달리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을 잘 유지하며 올려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되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5절에서 가인은 자신이 올려 드린 제물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니까 안색이 변할 정도로 분노를 합니다.
가인의 보여 준 분노는 창세기 34:7절의 야곱의 형제들이 자신들의 여동생인 디나가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한 그 분노와 같은 의미입니다.
또민수기 11;1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분노하셔서 불 심판을 내리시게 한 분노입니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고 분노한 가인의 모습은 가인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마지못해 제물을 드린 것임을 알 수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 각각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알고 계십니다.
다만 , 그 표현을 즉각적으로 나타내시지 않고 오래 참으신다는 것을 고린도 전서 13장 13절을 통해서 알게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요한일서 4장 8절 후반부에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첫 사람인 아담은 창조주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로 인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그 아담의 첫 아들인 가인은 하나님 얼굴을 피해 하나님 곁에서 스스로 떠납니다.
하나님이 찾으시고 물어 보시는데 순한 양의 모습이 아니고, 불 같은 분노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피조물인 인간이ㅡ창조주 하나님께 보여 드려야 하는 모습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사탄이 아담과 하와에게 죄를 전해 줌으로써 첫 인간의 첫 아들도 그 죄를 물려 받아서 자신을 만들어준 하나님의 사랑을 망각하고 결국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 완전하지 못한 피조물의 삶을 살다가 사탄의 유혹대로 지옥으로 갑니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믿고 싶은대로 살아갑니다.
한국에는 제사 문제로 가족간의 갈등이 살인까지 하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자신의 불 같은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엄청난 비극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은 그러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석 명절은 자신들을 낳아준 육신의 조상들에게 제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이 땅에서만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머물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가 얼마나 복기 가득한 자리이고 기쁨과 감사가 가득한 예배 자리인지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일평생 창조주 하나님을 신실한 믿음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예배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