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장례식장
여기는 버려지는 것들의 장례식장이다
플라스틱 비닐 캔 스티로폼 박스
풍상을 겪어 찌그러지고 구겨진
시간의 흔적이 뒤섞여 있는 몰골들,
햇빛이 침묵 속에서 의식을 치룬다
문상을 왔다가 발이 묶였는지
파리와 벌이 소리 없이 부산하다
바람이 성호를 그으며 지나가는 밤이면
허기진 고양이가 찾아와 울기도 한다
여기는 햇빛의 구역,
한때는 나무의 뿌리가 뻗어 온 곳이기도 하다
은빛자작나무가 손님을 맞이하며 서 있었지만
한 번도 애도를 표한 적이 없다
손에 든 것을 마대자루에 던져놓고
문상을 마친 듯 돌아선다
버려진 것들의 일부는 땅에 묻히고
일부는 또 버려지기 위해
다시 돌아오는 수거함 같은 장례식장
분리수거를 하는 시간이 다가오는 초초해지는 오후,
또 한 사람이 버릴 것이 가득한
바구니를 들고 들어선다,
가을비
화양강 휴게소에서
주인을 기다리던 반려견의 눈빛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지난여름, 되돌아보니
칸나로 붉게 뚝뚝 떨어진다
뜨거웠던 것은 한 번씩은 흐느끼며
떠나가나 보다
뚝뚝 떨어져 가나 보다
능소화 핀 집
버스에서 내리면 세븐마트가 보일 거야
거기서 꼭 여름과 1시 방향으로 가야 해
길이 여러 갈래라 헷갈릴 수 있거든
허리의 각도는 살짝 언덕으로 하고
10분의 시간만 건너면 당도할 거야
낮은 집들만 있으니 하늘이 넓어 좋아
그래, 햇빛을 따라가면 되겠지
파란 대문 집을 지날 때는 아마 개 짖는 소리가 들릴거야
만약 조용하다면 낮잠에 빠졌거나
주인을 따라 산책이라도 갔겠지
건넛집 옥상에는 오늘도 빨래가 널려 있을 거야
빨랫줄에 새하얀 옷들이 구름이 지나다
걸린 줄 알았다니까
그곳을 지나면 두 개의 골목이 나타날 거야
거기 서서 가슴을 펴고 크게 호흡을 해봐
꽃향기가 마중 나와 있을 테니까
향기를 따라가다 보면
햇빛 한 조각 머금은
연 선홍 능소화 기다리고 있을 거야
지금도 가면
능소화 담장 너머로
고개 내밀고 기다리겠지
벚꽃사진관
벚꽃이 지고 사진 한 장으로 남은 여자
벚꽃 사진을 찍다 사진관까지 들어섰다
뒤따라 들어온 봄날의 늦은 빛이
사진관 구석구석에 벚꽃을 흩뿌려 놓았다
유리에 얼굴을 갖다 댄 자국에도
오래전 벚나무처럼 꽃망울이 맺혔다
계절이 바꿔도 벚꽃이 지지 않는 사진관
벽에 걸린 여자가 흔들리며 웃고 있었다
벚나무 가지도 흔들리며 유리창을 두드렸다
벚꽃이 지고 봄날의 웃음으로 남은 여자
느리실 마을
홍성쯤에서 만난 느리실 마을
돌에 이름을 새기듯
천천히 지나가라고
바람도 들판을 돌다 멈춘다
조금은 더딘 발길에
어둠이 가장 나중 찾아와
오래도록 동구에 서 있다
어두워진 들길을 느리게 걸어도
아무도 역성내지 않을 사람들
느리실이라고 나직이 부르면
앞천에 흐르는 개울소리로
천천히 답할 것 같아
빠르게 지나칠 수도 없이
자늑자늑 느리게 걸어보는
느리실 마을
맛을 잃어버리다
음식마다 짜다고 하는 엄마
철부지 막내를 먼저 보내고
단 것 좋아하던 아들에게
가진 것 다 내어 주면서부터
엄마의 입은 소금밭이 되었다
음식 타박 한 번 안 하고
엄마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던 막내
짠맛만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며
점점 야위어 가는 엄마
쉽게 비어지지 않는 냉장고
눈물로 절여진 가슴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소금꽃이 웃자랄수록
단맛이 사무치게 그립다는 엄마
엄마가 맛을 잃어버렸다
오래 된다는 것
나이를 먹고 산다
세상 모든 것들은 나이가 들어가는 중이다
오래 묵은 것 익숙해진 것들이
켜켜이 쌓여가는 세월은 그대로 화석이 된다
거울 속의 빛바랜 모습은
한 소절씩 앓는 소리를 내며
덤덤하게 돌아가는 선풍기 같다
내 이름을 다정히 불러주는 벗과
엘피판에 세든 비틀즈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가고 싶은 것은 두고두고
당신에게 할 이야깃거리가 많아서는 아닌지,
오래 된다는 것은 사색하며
점점 고요해지는 것인지도,
마음은 젖어 드는 날이 많고
그때가 좋았다며
지나간 생각에 오후 서쪽 하늘 같은 웃음을
짓게 되는 것은 아닌지,
정미영
전남 무안 출생
2019년 애지 등단
「시마을」 동인
****정미영에게 시론은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내용이고 시작품에서의 시론은 정미영 자신이 크나큰 시론이 된다. 그에게 시는 정미영 너머의 있는 시로서 정미영을 관통하여 표적지에 꽂힌 화살과 다름없는 그 이상의 것이다. 그에게 ‘어떤’은 형식상이나 내용상 모두를 차치하더라도 시로서 ‘어떤’을 아우르는 어떤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정미영의 시는 ‘어떤’의 의미나 강조만으로 이미 대상들을 충분히 따뜻하게 보듬고 자아나 타자를 떳떳하게 드러내 놓았다. 물론 여기에는 그가 받은 상처나 고통, 그리고 빛바랜 기억들이 뒤섞여 혼재하고 있지만 정미영은 여타의 유파나 흐름에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자신만의 시세계를 구축하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