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15살에 일본행...이제 소원 풀었어요”
미쓰비시 동원 근로정신대 두 할머니 광복 72년 만에 해후
“가시와야 노부코? 그래, 그래! 미나리 농사지었잖아. 알고말고.”(양금덕할머니)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해? 오메, 살아 있었그만. 이게 얼마만이요!”(정신영할머니)
72년 세월의 벽이 일순간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10대 초반 어린 나이에 미쓰비시로 동원된 근로정신대 소녀들이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뜨겁게 상봉했다.
1944년 5월경 당시 나주 초등학교 1년 선후배로 동원된 정신영할머니(88세. 1930.2월생. 나주시 성북동)와 양금덕할머니(1931년생)가 16일 극적으로 상봉했다. 광복 후 고향에 돌아온 지 72년 만이다.
나주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정신영할머니는 최근 광주지방법원 근로정신대 판결 소식을 듣고 이날 시민모임 문을 두드렸다. 정 할머니는 이 자리에서 “나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열 다섯 어린 나이에 미쓰비시로 끌려갔는데, 기회가 있다면 나도 소송에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 할머니는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지진 당시의 공포와 전투기 폭격의 굉음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며 “해방 뒤 집에 보내 달라고 했어도 한동안 보내주지 않았다.”며 미쓰비시에서의 각박했던 당시를 회상했다.
정 할머니는 “해방 후 고향에 돌아왔지만 ‘일본 갖다 왔다고 하면 시집을 가니 못 가니’ 하는 분위기 때문에, 그나마 남아있던 사진도 일부러 찢어버리고 살았다”며 지난 날 심적인 고통을 토로했다.
정 할머니는 “가족한테는 아직까지 근로정신대에 대해 말 한마디 해 본 적 없다”면서, “오늘도 자초지종 설명없이 딸한테 사무실만 데려다 달라고 해서 오게 됐다”고 말했다.
시민모임 주선으로 급하게 양금덕 할머니가 사무실을 찾아왔지만 세월의 간극 때문인지 한동안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다.
실마리가 된 것은 의외였다. 정 할머니가 ‘가시와야 노부코’(柏谷信英)란 창씨개명 된 이름을 말하자, 그때서야 양 할머니가 알아본 것이다. 제 이름 석자조차 마음대로 쓰지 못했던 빼앗긴 시대, 빼앗긴 세월의 아픔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정 할머니는 “평생 호미로 땅만 파고 살다보니 전혀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며 “그때 그 친구들 안 죽고 누가 살고 있을까 늘 소식이 궁금했다. 이제 소원을 풀었다”며 양 할머니를 다시 힘껏 보듬었다.
양 할머니 또한 “어쩌면 동료들 중 누군가는 한번 만나지 않겠는가 했는데, 안 죽고 살다보니 이런 날이 온다”며 “얼굴이 고왔는데 늙었지만 그 얼굴이 아직도 남아있다”며 정 할머니의 손을 꼭 붙들었다.
“이제는 100세 시대라고 하니까 서로 연락하며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삽시다”.
짧은 만남을 뒤로 한 두 할머니는 몸을 돌려 오랫동안 손을 흔들었다.
2017년 8월 17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정신영 할머니가 나주에서 동원된 당시 동료들의 사진 속에서 자신을 찾고 있다.
양금덕할머니가 사진 속에서 정신영 할머니를 가리키고 있는 모습. 아래 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정신영 할머니.
정신영 할머니가 나주에서 동원된 단체 사진 속에서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 아랫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정신영 할머니.
정신영할머니와 양금덕할머니가 서로를 끌어안고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
정신영 할머니와 양금덕할머니가 반가워 서로를 가리키며 옛 추억을 꺼내고 있는 모습
"안 죽고 100세 시대 오래 오래 삽시다" 두 할머니가 머리를 서로 맞대 정을 표시하고 있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