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 정월에 대장군 송길유를 추자도(楸子島)에 귀양 보냈다. 길유는 성품이 탐욕스럽고 혹독하며 최항을 아첨하여 섬겼다. 일찍이 야별초가 되어 죄수를 국문하는데, 두 엄지손가락을 묶어서 들보에 달아매고, 두 엄지발가락을 합하여 묶어서 무거운 돌을 달아서 땅에서 한 자 남짓하게 뜨게 하고, 그 밑에 숯불을 이글이글하게 피워놓고 두 사람을 시켜 허리와 등줄기를 번갈아 치게 하였다. 죄수가 독한 형벌을 이기지 못하여 모두 거짓 항복하였다. 경상주도 수로 방호별감이 되어 각 고을의 인물을 검찰(檢察)하여 섬으로 들여보내는데, 영을 좇지 않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때려 죽이고, 혹은 긴 새끼로 사람의 목을 잇달아 엮은 다음 별초를 시켜 양 끝을 잡고 끌어서 깊은 물 속에 던져 거의 죽게 되면 꺼내고 조금 깨어나면 다시 그와 같이 하였다. 또 남의 토지와 재물을 빼앗아 긁어모으기를 한없이 하였다. 안찰사 송언상(宋彦庠)이 탄핵하여 도병마에게 보고하였다. 그의 도당인 김인준(金仁俊)과 김승준(金承俊) 등이 사사로이 대사성 유경(柳璥)과 대제(待制) 유능(柳能)에게 말하기를, “길유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인데, 들으니 안찰사의 탄핵하는 글이 이미 도당(都堂)에 이르렀다고 한다. 만일 갑자기 발설하면 사세가 구제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내가 장차 틈을 타서 영공(令公 최의(崔竩))께 잘 말씀드리면 면할 수 있을 것이니 공도 알아 하라." 하니, 유경 등이 부득이하여 몰래 도당 아전에게 분부하여 품하는 것을 정지하였다. 의(竩)의 외삼촌 거성원발(巨成元拔)이 그것을 듣고 의에게 고하니, 의가 노하여 길유를 귀양보냈다. 경ㆍ능ㆍ인준 등을 꾸짖기를, “내가 너희들을 심복으로 알고 의심하지 않았더니, 어찌 제 마음대로 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가." 하니, 모두 엎드려 빌었다. 인준의 아비 윤성(允成)은 본래 천한 노예인데, 주인을 배반하고 최충헌에게로 가서 친시(親侍)가 되었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인준과 승준이다. 인준은 상모(相貌)가 헌칠하고 활쏘기에 능하며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여 인심을 얻었다. 날마다 호협한 자제들과 떼를 지어 술마시는 것을 일삼아 집에는 아무 저축도 없었다. 박송비와 송길유 등이 최이에게 칭찬하여 드디어 특별한 신임을 얻어 출입할 때마다 반드시 인준을 시켜서 부축하게 하고 전전승지를 제수하였다. 인준은 이의 총애하는 첩 안심을 간통하다 고성현(固城縣) 섬에 귀양갔다가 수년 뒤에 돌아왔다. 이(怡)가 항(沆)을 불러서 후사를 삼으려 할 때에 인준의 공이 있었다. 항이 정사를 맡자, 별장을 제수하고 아우 승준은 대정을 제수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비로소 의와 서로 의심하고 갈라진 것이다. ○ 최영(崔永)을 참지정사로 삼았다. ○ 최의가 장군 변식(邊軾), 낭장 안홍민(安洪敏), 산원 정한규(鄭漢珪)를 강화 수획사(江華收獲使)로 삼아 백성의 이익을 빼앗으니, 백성이 못 살겠다고 숙덕거렸다. ○ 2월에 섬에 들어가 난리를 피한 고을들에 대하여 일 년간의 조세를 면제하였다. ○ 최의가 가노 이공주(李公柱)를 낭장으로 삼았다. 옛 제도에 노예는 아무리 큰 공이 있어도 돈과 비단으로 상을 주고 관작은 주지 않았는데, 최항이 정치를 잡자 인심을 수습하려 하여 비로소 공주와 최양백(崔良伯)을 제수하여 별장(別將)을 삼고, 섭장수(聶長壽)를 교위로 삼았다. 이때에 와서 종들이 말하기를, “공주가 몸소 최씨의 3대를 섬겨 나이 늙고 공이 있으니, 참직(叅職)을 주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노예에게 참직을 제수한 것이 이때로부터 시작되었다. ○ 몽고병이 의주에 성을 쌓았다. ○ 3월에 유경과 김인준 등이 최의를 죽였다. 의는 나이 젊고 어리석고 약하여 어진 선비를 예우하여 시국 정사를 자문하지 않고, 친하고 믿는 자가 유능(柳能)ㆍ최양백의 무리 같이 모두 가볍고 방정맞고 용렬하고 천한 자들이었다. 그의 외삼촌 거성원발(巨成元拔)은 의가 총애하는 여종 심경(心鏡)과 더불어 밖에서는 세력을 부리고 안으로는 참소를 행하였고, 재물을 탐하는 것이 한이 없었다. 그때에 또 해마다 흉년이 들었는데, 창고를 열어서 진휼하지도 않아 이 때문에 크게 인망을 잃었다. 송길유를 쫓아낸 뒤로는 또 유경ㆍ유능ㆍ인준 형제들과 서로 미워하여 만나보지도 않았다. 신의군(神義軍) 도령(都領) 낭장 박희실(朴希實)과 지유섭낭장(指諭攝郞將) 이연소(李延紹)가 은밀히 경ㆍ인준ㆍ승준ㆍ장군 박송비, 도령 낭장 임연, 섭랑장 공주, 대정 박천식, 별장동정(別將同正) 차송우(車松祐), 낭장 김홍취(金洪就)와 인준의 아들 대재(大材)ㆍ용재(用材)ㆍ식재(式材) 등에게 말하기를, “의가 간사한 소인을 친하고 가깝게 하여 참소를 믿고 꺼리는 것이 많으니,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우리들 또한 면치 못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계책을 정하여 4월 초파일에 관등(觀燈)을 인하여 거사하기로 약속하였다. 중랑장 이주(李柱)가 그 소식을 듣고 견룡행수(牽龍行首) 최문본(崔文本), 산원 유태(庾泰), 교위 박선(朴瑄), 대정 유보(兪甫) 등과 더불어 몰래 편지를 써서 의에게 알려 주었다. 양백은 대재의 장인인데 대재가 그 계획을 양백에게 고하자, 양백이 좇는 체하고는 몰래 의에게 고하였다. 의가 급히 유능을 불러 의논하였는데 그때 이미 날이 저물었다. 유능이 말하기를, “저문 밤에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쪽지편지로 야별초 지유 한종궤(韓宗軌)에게 일러 새벽에 이일휴(李日休) 등을 불러 군사를 정돈하여 인준을 쳐도 늦지 않습니다." 하니, 의가 옳게 여겼다. 대재의 처가 옆에 있다가 듣고 사람을 시켜 대재에게 고하였는데, 대재가 인준에게 고하기를, “일이 급하니 일찍 도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이미 어두워진 뒤에 인준이 자제를 거느리고 신의군에 나가서 희실과 연소를 보고 말하기를, “일이 누설되었으니 잠시도 미룰 수가 없다." 하고, 지난번에 함께 모의한 자와 별장 백영정(白永貞), 대정 서정(徐挺)ㆍ이제(李悌)ㆍ임연(林衍)을 소집하여 연과 지유(指諭) 조문주(趙文柱)ㆍ오수산(吳壽山)으로 하여금 종궤를 잡아서 죽이게 하고, 또 지유 서균한(徐均漢) 등을 불러 삼별초를 사청(射廳)에 모으게 한 다음 사람을 시켜 길에서 외치기를, “영공(令公)이 이미 죽었다." 하니, 듣는 자가 모두 모였다. 경과 송비(松庇) 등이 또한 이르자 인준이 말하기를, “이 같은 큰 일에 주장하는 자가 없을 수 없으니, 대신으로서 위엄과 명망이 있는 자를 추대하여 군중을 통솔하게 하자." 하고, 곧 추밀사 최온(崔昷)을 불렀다. 온이 이르자 또 응양군 상장군 박성재(朴成梓)를 맞아서 의논하였다. 인준이 양백을 불러 미처 당(唐)에 오르기도 전에 별초병이 횃불로 입을 지지고 베었다. 임연이 또 일휴의 집에 이르러 속여 말하기를, “영공이 자네를 부르니 급히 가자." 하니, 일휴가 말하기를, “영공이 어째서 밤에 나를 부르는가?" 하였는데, 연이 드디어 베었다. 인준이 또 의의 문졸(門卒)을 시켜 경주(更籌)를 알리지 않았고, 넓은 마당에 대오(隊伍)를 나누어 세우고 관솔[松明]을 피워 대낮 같으며 여러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었으나, 마침 안개가 매우 끼어 의의 집을 숙위하는 군사는 한 사람도 알지 못했다. 새벽에 야별초가 의의 집 벽을 무너뜨리고 들어갔다. 원발은 장사인데, 의의 집에서 자다가 소동을 듣고 놀라 일어나 칼을 뽑아 들고 작은 문을 막으니, 군사들이 앞으로 달려들지 못하였다. 원발이 스스로 이기지 못할 것을 헤아리고 의를 업고 담을 넘어 달아나려 하였으나, 의가 살찌고 둔중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이에 의를 부축하여 천정 위로 올리고 몸으로 문을 막았는데, 수산이 돌입하여 원발을 쳐서 이마를 맞추었다. 원발이 담을 넘어 달아나자, 별초병이 추격하여 강 언덕에서 베었다. 또 의와 능을 찾아서 모두 베었다. 경과 인준이 온과 더불어 대궐에 나아가자, 백관이 모두 태정문(泰定門) 밖에 모였다. 양부와 경과 인준이 들어가 편전에서 뵙고 왕에게 복정(復政) 하니, 왕이 경과 인준에게 이르기를, “경 등이 과인을 위하여 비상한 공을 세웠도다." 하고, 눈물을 흘렸다. 인준이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의가 백성을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굶어 죽는 것을 앉아서 보기만 하고 진휼하고 빌려주지 않으므로 신 등이 의거(義擧)를 일으켜 베었으니, 청컨대, 곡식을 풀어 주린 백성을 진휼하여 인심을 위로하소서." 하였다. 이날 경을 추밀원 우부승선으로, 송비를 대장군으로, 인준을 장군으로 삼고, 나머지는 모두 차등 있게 벼슬을 주었다. 연의 처음 이름은 승주인데, 벌과 같은 눈매에 늑대와 같은 목소리를 내며, 날래고 힘이 세어 능히 몸을 거꾸로 세워 팔로 걸어 다니며, 혹 이엉을 집 들보에 던지기도 하였다. 대장군 송언상의 말먹이는 하인이 되었다가 뒤에 고향 진주(鎭州)로 돌아갔다. 몽고병이 마침 이르자, 연이 고을 사람과 더불어 쫓아내어 드디어 대정이 되었다. 일찍이 남의 아내를 간통하였으므로 법관이 다스리려 하였는데, 인준이 의에게 극력 청하기를, “연은 쓸 만한 장사(壯士)인데, 지금 의심스러운 죄로 인하여 혹독한 형벌을 받는다면 장차 병신이 되어 쓸 수 없게 되고 말 것입니다." 하니, 의가 석방했다. 또 천거하여 낭장으로 삼았기 때문에 연이 항상 인준을 '아비'라 부르고 승준을 '숙부'라 하였다. ○ 임금이 강안전에 나아가니 백관들이 하례를 드리기를 새로 즉위한 것 같이 하였고, 예가 끝나자 나갔다. 박송비ㆍ김인준이 또 여러 공신과 좌우 별초와 신의군 도방 등을 거느리고 대궐 뜰에 들어가 늘어서서 절하고 만세를 불렀다. 최의의 집 재물을 꺼내어 차등 있게 나누어 주었다. ○ 여름 4월에 육경ㆍ김인준ㆍ박희실ㆍ이연소ㆍ박송비ㆍ김승준ㆍ임연ㆍ이공주 등에게 위사공신(衛社功臣)의 호를 주었다. 그 중에 천예(賤隷)에 속한 자는 자손에 이르기까지 모두 벼슬길에 나오는 것을 허락하고, 일등 공신은 쌀 2백 석과 채단 1백 필을 주고, 그 다음은 쌀 1백 석과 채단 1백 필을 주고, 갑제(甲第)와 전토를 각 차등 있게 주었다. ○ 오군(五軍)ㆍ신기(神騎)들에게 은과 곡식을 차등 있게 주고, 또 심한 병이 든 자와 폐질자에게도 주었다. ○ 유경을 추밀원지주사 좌우위상장군으로 삼자, 경이일 지주사를 극력 사양하고 오직 상장군으로서 그대로 우부승선이 되었다. ○ 흉년이 들었으므로 최의의 창고 곡식을 내어서 태자부(太子府)에 2천 곡(斛)을 주고, 여러 왕씨와 재신과 추신에게 각각 60곡을 주고, 재신과 추신으로 치사한 사람과 현관(顯官) 3품 이상은 30곡을 주고, 3품으로 치사한 사람과 문무 4품은 각각 20곡을 주고, 5, 6품은 각각 10곡을 주고, 9품 이상은 7곡을 주고, 또 양반 과부와 성중의 주민과 군사와 승도(僧徒)와 여러 역사하는 사람들에게 차등 있게 주었다. ○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도방야별초 신의군 서방(書房)이 대궐 앞에서 대가를 옹위하여 나가니, 보는 자가 감동하여 울었다. ○ 따로 야별초와 신의군에게 사람마다 쌀 3곡과 은 1근, 베 3필을 주었다. ○ 몽고병 척후기 1천이 수안 경계에 들어오자, 야별초를 보내어 막았다. ○ 김인준과 유경이 이주ㆍ최문본ㆍ유태ㆍ박선ㆍ유보 등을 베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들이 미치고 미혹하여 오직 눈앞의 이익만 도모하니, 어찌 대의를 알겠는가. 용서하는 것이 가하나 경들이 청하니 귀양을 보내라." 하였다. 경 등이 굳이 청하자, 왕이 이르기를, “반드시 죽이려고 하면 어째서 다시 나한테 알리는가. 경들 마음대로 하라." 하고,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경들이 땅에 엎드려 사죄하고, 드디어 주 등을 섬에 귀양보냈다. ○ 왕이 차라대가 사자를 보내 와서 육지로 나온 상황을 엿본다는 소식을 듣고, 곧 백관을 승천부에 내보내고 저자를 옮기고 궁궐을 수리하였다. ○ 5월에 왕이 승천부 대궐에 나아가, 차라대의 사자 파양(波養) 등 9명을 만나보았다 ○ 제주에서 바친 말과 최의가 기르던 말을 4품 이상에게 나누어 주었다. ○ 박주(博州 평북 박천(博川)) 사람들이 병란을 피하여 위도(葦島)에 들어갔다. 국가에서 도령낭장 최예 등을 보내어, 별초를 거느리고 진무하게 하였는데, 박주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최예와 지유 윤겸(尹謙)과 감창(監倉) 이승진(李承璡)을 죽였다. 예가 거느렸던 군사가 모두 도망하여 갈대 속에 숨었는데 뒤를 쫓아가 모조리 죽이고, 드디어 몽고로 달아났다. 오직 교위(校慰) 신보주(申輔舟)가 작은 배를 타고 도망하여와서 병마사에게 고하였다. 곧 군사를 보내어 추격하여 부녀와 어리고 약한 자를 붙잡아 돌아오고, 장군 박견(朴堅)과 낭장 김군석(金君錫)을 보내어 위도 사람에게 선유(宣諭)하였다. ○ 북계 지병마사 홍희(洪熙)를 파면하고, 판비서 성사 김지대(金之岱)에게 대신시켰다. 희가 여색을 좋아하고 국사를 돌보지 않으니, 그 지방의 인심이 이반하였다. ○ 안북별장 강지준(康之俊)이 위도로부터 와서 항복하니, 은 9근과 쌀 20곡을 주고 섭낭장에 제수하였다. ○ 6월에 몽고의 여수달(余愁達)ㆍ보파대(甫波大) 등이 각각 1천 기를 거느리고 와서, 가주(嘉州)와 곽주(郭州) 두 고을에 주둔하였다. ○ 장한문(張漢文)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북계 여러 성의 호장(戶長)과 낭장에게 각각 은 1근씩과 검은 비단 2필씩을 주었다. ○ 평장사 유소가 졸하였다. 소는 성품이 강하고 오만하며 산업을 일삼지 않았다. 아들 능이 최의가 죽을 때에 처형을 당하자, 근심하고 분하여 병이 나서 죽었다. 사람들이 기롱하기를, “살아서 가르치지 못하였으니 죽어도 소용없다." 하였다. ○ 차라대가 파호지(波乎只) 등 6명을 보내왔다. 왕이 제포관에 나가서 만나보자, 파호지가 차라대의 말을 전하기를, “황제의 칙령에, '고려국이 만일 실제로 강화에서 나와 항복하면 비록 개나 닭이라도 하나도 죽이지 말고, 그렇지 않으면 섬을 쳐서 부수라.' 하셨으니, 지금 국왕과 태자가 서경(西京)에 나와서 항복하면 곧 회군하겠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나는 이미 늙고 병들어 멀리 갈 수 없다." 하고, 영안공(永安公) 희(僖)와 지중추원사 김보정을 차라대가 주둔한 곳에 보냈다. ○ 몽고병의 척후기가 서경을 지나자, 경성에 계엄령을 내렸다. ○ 추밀원사 최온을 흑산도(黑山島)에 귀양보냈다. 온은 뜻이 크고 재주가 뛰어나서 곧은 말을 잘하고 일에 임하여 과감하게 결단하였다. 그러므로 인준이 최의를 벨 때에, 온과 함께 일을 의논하였다. 그 후 인준 등이 최의의 가산을 적몰할 때에 편지 한 통을 얻었는데, 바로 온의 아들 별장 문본(文本)이 인준의 음모를 최의에게 고한 것이었다. 이에 문본을 섬으로 귀양보냈다. 온이 원망하는 말을 하니, 온을 꺼리는 자가 인준에게 말하기를, “온이 공 등을 원망하니 훗날 변이 생길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인준이 드디어 왕에게 아뢰기를, “온이 문벌을 믿고 교만하여, 일찍이 상장군 조성을 조정에서 질책하였고, 이제 또 신 등을 원망하므로 모두 불안해하니, 죄주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인준 등이 극력 청하자 왕이 부득이해서 귀양보냈다. ○ 몽고병의 척후기가 염주(鹽州 황해 연안(延安))ㆍ백주(白州 황해 연백(延白)) 등지에 이르고, 여수달이 평주(平州 황해 평산(平山)) 보산역(寶山驛)에 진을 쳤다. ○ 김보정이 여수달이 보낸 사자 8명과 함께 왔다. 왕이 제포관에 나가니 보정이 아뢰기를, “여수달이 신에게 말하기를, '황제께서 고려의 일을 나와 차라대에게 맡겼으니, 나는 그대 나라가 항복하고 항복하지 않음에 따라 가고 머무르는 것을 결정하겠다. 국왕이 비록 나와 영접하지 않더라도, 만일 태자를 보내어 군사 앞에 나와서 항복하면 그날로 회군하겠고, 그렇지 않으면 군사를 놓아 남방으로 내려가겠다.' 하므로 대답하기를, '태자가 꼭 와서 볼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가을 7월에 다시 보정을 여수달이 주둔한 곳에 보내어, 그에게 몇 기(騎)만 거느리고 백마산에 와서 태자 보기를 청하였다. 여수달이 말하기를, “내가 가서 태자를 보아야 하느냐, 태자가 와서 나를 보아야 하느냐?" 하니, 보정이 말하기를, “감히 대관인의 왕림을 번거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대군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여수달이 말하기를, “태자가 나를 만나보려거든 묘곶 강가로 약속하자." 하였다. 조금 뒤에 통역 강희(康禧)를 보내어 술과 과실을 싸 가지고 가서 위로하면서 사태를 엿보았고, 또 원외랑 이녹유(李祿綏)를 보내어 말하기를, “태자가 병이 났으니, 병이 낫기를 기다려서 가 보겠다." 하였다. 여수달이 사자를 보내어 말하기를, “비록 국왕이 나와서 맞지 않았지만 태자가 와서 본다는 약속이 있어서 내가 회군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자가 왕복하기를 너덧 번이나 하였는데도 태자가 이르지 않으니, 이것은 나를 무시하는 것이다. 이제 한 번 결단하는 것을 보고자 하여 또 사자를 보내는 것이니, 국왕은 살리든지 죽이든지 마음대로 하라." 하였다. 왕이 역시 나가서 맞지 않고 사람을 보내어 사례하니, 여수달이 노하여 군사를 놓아서 약탈하였다. ○ 환자 김인선(金仁宣)은 성품이 온화하고 아담하므로 왕이 매우 아끼고 중하게 여겼다. 위사(衛社)를 한 뒤에 인준이 일을 아뢸 때에, 인선이 출입하며 왕의 말을 전하여 인준과 서로 의뢰하였다. 인선은 나이가 60세이고 벼슬이 남반(南班)의 최고인 7품이므로, 인준이 참직을 제수하기를 극력 청하였고 왕도 또한 주고 싶었으나, 후인이 환관이 참직에 오르는 전례를 삼을까 염려하여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 소경 문황(文璜)이 처형되었다. 과거에 권시(權施)란 자가 있었는데, 최우의 기생첩의 딸에게 장가들어 복야(僕射)가 되어서 치사하였고, 아들 수균(守鈞)은 장군이 되었다. 황이 수균의 사위가 되어 소경에 제수되었는데, 시의 부자가 일로 인하여 파면되고 의가 또 처형을 당하니, 황이 마음으로 항상 불평불만이 있어서 인준을 죽여 의의 원수를 갚으려 하였다. 황의 두 아들 광단(光旦)ㆍ영단(英旦)과 대정 최주(崔注), 중부녹사(中部錄事) 유종식(柳宗植), 경평궁녹사(慶平宮錄事) 이수지(李秀之), 교위 현군수(玄君壽) 등이 서로 결탁하였다. 하루는 황이 주ㆍ수지와 더불어 은밀히 그 뜻을 말하니, 모두 허락하였다. 곧 군수를 불러 의논하니, 군수는 이럴까 저럴까 하고 결정을 짓지 못하였다. 수지가 종식에게 고하니 종식은 허락하였다. 이에 황의 부자가 더불어 밀실에서 좌우를 물리치고 모의하여, 각각 친한 용사와 연락해서 거사하려고 하였다. 종식이 전 별장 김인문(金仁問)의 집에 갔는데, 벽에 활과 칼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가져다가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장부이다. 이때를 당하여 이 물건으로 경상(卿相)의 자리를 취할 수 있는데, 어찌 아녀자와 같은 못난 태도를 취하랴." 하였다. 인문은 그 말을 이상하게 여기어 대답하지 않고, 종식이 간 뒤에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드디어 자기와 친한 우변지유(右邊指諭) 백영정(白永貞)에게 가서 고하니, 영정이 인준에게 전하여 고하였다. 인준이 종식을 체포하여 물으니, 과연 자복하였다. 인준이 생각하기를, 종식은 본래 광인이니 그 말이 희롱일 것이라 하여, 엄하게 꾸짖어 석방하였다. 군수가 종식이 국문당한 것을 듣고, 야별초의 영(營)에 달려가서 황 등의 음모를 고하였다. 인준이 듣고 황ㆍ주ㆍ광단ㆍ영단ㆍ수지 등을 국문하여 죽이고, 수균 부자와 종식을 섬에 귀양보냈으며, 눈먼 중 백량(白良)은 그들에게 길흉을 점쳐 주었기 때문에 바다에 던지고, 황과 수균의 가산을 적몰하여 인문과 군수에게 주고, 또 백량의 가산도 적몰하였다. ○ 몽고가 동경총관 홍복원을 베었다. 과거에 영녕공 준이 볼모로 들어갈 때에 복원에게 붙어 살았는데, 서로 점점 불평이 쌓였다. 교위 이조(李稠)는 도망하여 몽고에 들어가서 준에게 의탁하였다. 하루는 복원이 은밀히 나무허수아비를 만들어서 땅에 묻고 우물에 넣어 저주하였는데, 조가 엿보아 알고 황제께 아뢰니, 황제가 사람을 보내어 수색하였다. 복원이 준에게 말하기를, “공이 나에게 은혜를 입은 지가 오랜데, 어째서 도리어 참소하는 놈을 시켜 나를 어려운 처지에 빠뜨리려 하는가. 이른바 기르는 개가 도리어 주인을 무는 격이로다." 하였다. 준의 아내는 몽고의 황족인데,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황제께 아뢰니, 황제가 사람을 보내어 복원을 차서 죽였는데, 이 때문에 그의 아들 다구(茶丘)가 본국을 모함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다. ○ 도병마사사(都兵馬使司)와 재추소(宰樞所)에서 아뢰기를, “공신 유경ㆍ김인준ㆍ박희실ㆍ 이연소ㆍ김승준ㆍ박송비ㆍ임연ㆍ이공주 등이 충의를 분발하여 거사해서 왕가를 다시 만들고 삼한을 바로잡았으니, 황하와 태산이 숫돌과 띠가 되도록 영원히 그 공을 잊기 어렵습니다. 의당 그 아들을 벼슬시키고 전토와 노비를 주며, 벽에 형상을 그리고 각각 그의 본적 고을 계급을 승격시키소서. 최충헌은 죄악이 쌓였으며, 최이는 권세를 제 맘대로 하였으니, 화상을 깎아 버리고 묘정 배향을 파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좇았다. ○ 이달에 항상 비가 내렸다. ○ 8월에 차라대가 군사를 거느리고 옛 서울에 와서 주둔하고, 유격(遊擊)하는 기병이 승천부(昇天府)ㆍ교하(交河)ㆍ봉성(峯城)ㆍ수안(守安)ㆍ동성(童城)에 흩어져 들어가 인민들을 약탈하고, 양과 말을 놓아먹였다. ○ 계사에 해 가운데 검은 점이 있었다. 크기가 계란만했는데, 이튿날에는 또 사람의 모양과 같았다. ○ 사면하였다. ○ 차라대가 몽고대 등을 보내어 말하기를, “태자가 나오면 군사를 물리겠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태자가 병이 있으니 어떻게 나갈 수 있는가." 하였다. ○ 몽고병이 서해도의 가수굴(嘉殊窟)과 양파혈(陽波穴)을 쳐서 모두 항복시켰다. 양파혈에 상중하의 3구멍이 있는데, 몽고 군사가 산 위로부터 갑옷 입은 군사를 윗 구멍의 입구에 달아서 내려보냈지만 창과 도끼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여, 풀을 불살라 구멍 가운데에 던졌다. 수안 현령(遂安縣令) 박임종은 스스로 목매어 죽고, 방호별감 주윤(周尹)은 별초를 거느리고 나와 싸웠으나 백성들이 달아나고, 윤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으며 가수굴 별감 노극창도 사로잡혔다. ○ 9월에 몽고 군사 3백여 기가 갑곶강 밖에 와서 진을 쳤다. ○ 최의의 가산을 꺼내어, 여러 왕씨와 재신과 추신들로부터 권무(權務)ㆍ대정(隊正)에 이르기까지 베를 차등 있게 주었다. ○ 광복산성(廣福山城)에 피난한 아전과 백성이, 방호별감 유방재(柳邦才)를 죽이고 몽고병에 항복하였다. ○ 몽고병이 착량(窄梁)으로부터 갑곶강 밖에 와서 둔을 쳐서 산과 들을 뒤덮었다. ○ 겨월 10월에 전광재(全光宰)를 보내어 차라대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군사 물리기를 청하였다. ○ 고주(高州)ㆍ화주(和州)ㆍ정주(定州)ㆍ장주(長州)ㆍ의주(宜州)ㆍ문주(文州) 등 15주의 사람들이 저도(猪島)에 옮겨가 사는데, 동북면병마사 신집평이 저도는 성이 크고 사람이 적어서 지키기가 매우 어렵다 하여, 드디어 15주의 사람을 옮기어 죽도(竹島)를 지키게 하였다. 섬이 좁고 우물과 샘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옮기려 하지 않으니, 집평이 강제로 몰아서 들여 보냈다. 사람들이 많이 도망하여 흩어져서, 옮긴 자는 10명 중에서 2, 3명뿐이었다. ○ 충주 별초가 박달현(朴達峴)에 복병을 설치하고 몽고 군사를 기습하여 포로와 우마와 병기를 빼앗았다. ○ 11월에 몽고 천호(千戶) 유어개(劉於介)가 9명을 거느리고 와서 의탁하였다. ○ 최의가 기른 말을 문무 3품에게 나누어 주었다. ○ 김승준ㆍ임연 등 여러 공신이 장군 우득규(禹得圭), 지유 김득룡(金得龍), 별장 양화(梁和)를 베고, 낭장 경원록(慶元祿)을 섬에 귀양보냈다. 과거에 유경이 최의를 베고서 정방(政房)을 편전 옆에 두고, 전주(銓注)를 맡아 모든 국가의 기무를 결재하였다. 김승준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공은 큰데 질(秩)이 낮다." 하여 마음에 항상 불평하였다. 경(璥)이 듣고 승준에게 말하기를, “공(公)의 공(功)은 비록 하루에 9번 벼슬을 승진하더라도 좋으나 품질(品秩)에 따라서 제수하는 것은 국가의 떳떳한 법이다. 그대는 대정(隊正)에서 4등급을 넘어서 중랑장으로 제수되었으니, 계급(階級)을 뛰어 제수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니, 승준이 더욱 원망하였다. 경이 갑제(甲第)를 많이 가지고 권세가 날마다 성해져서 문 앞이 저자와 같으니, 승준ㆍ임연 등 여러 공신들이 꺼리어 김인준에게 참소하였다. 인준이 왕에게 고하니, 왕이 그의 권세를 빼앗고자 경의 승선 벼슬을 파하여 첨서추밀원사를 제수하고, 경이 좋아하는 득규ㆍ득룡ㆍ양화ㆍ원록을 가두었다. 경이 듣고 대궐에 나아가서 인준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처음에 경과 함께 마음을 같이하여 의거를 일으켜서 정권을 왕실에 회복시켰으니, 골육지친과 같아서 비록 참소를 잘하는 자라도 이간할 수 없었는데, 어찌 오늘날 이와 같을 줄을 생각이나 하였으랴." 하였다. 인준은 부끄러워서 사과하고 여러 공신들은 말하지 않고 물러갔으나, 마침내 득규 등을 베었다. ○ 12월에 동진국이 수군을 거느리고 와서 고성현(高城顯) 송도(松島)를 포위하고 전함을 불태웠다. ○ 몽고의 산길대왕(散吉大王)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옛 화주(和州) 지역에 둔을 쳤다. 신집평이 죽도로 들어간 뒤로 식량이 떨어지게 되자, 별초를 나누어 조정에 보내어서 곡식을 청하여 타도(他道)에서 운반을 재촉하느라고 수비를 좀 게을리하였다. 용진현(龍津縣) 사람 조휘(趙暉)와 정주(定州) 사람 탁청(卓靑) 등이 삭방도(朔方道 강원도) 등주와 문주의 여러 성 사람과 꾀를 합하여 몽고병을 이끌고 빈 틈을 타서 집평과 등주부사 박인기(朴仁起)와 화주부사 김선보(金宣甫), 경별초(京別抄) 등을 죽이고, 드디어 고성을 쳐서 집을 불사르고 인민을 죽이고 노략질하여, 마침내 화주 이북의 땅을 몽고에 붙였다. 몽고에서는 이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화주에 설치하여 조휘를 총관으로 삼고, 탁청을 천호로 삼았다. ○ 장군 박희실ㆍ조문주, 산원 박천식(朴天植) 등을 몽고에 보내어 다루가치에게 청하기를, “본국이 대국을 섬기는 정성을 다하지 못한 까닭은 한갓 권신(權臣)이 정사를 제 맘대로 하여 안으로 상국(上國)에 붙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지금 최의(崔竩)가 이미 죽었으니, 곧 바다에서 육지로 나와 상국의 명을 듣고자 합니다. 그러나 천병(天兵)이 지경을 압박하고 있으니, 비유하면 쥐구멍을 고양이가 지키고 있는 것 같아서 감히 나오지 못합니다." 하였다. ○ 달보성(達甫城) 백성들이 방호별감 정기(鄭琪) 등을 잡아서 몽고에 항복하였다. ○ 이해에 여러 도의 벼는 모두 몽고병에게 수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