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여 년 전부터 우리 곁 지켜왔다
돼지는 다부진 체격에 몸무게는 70∼500㎏, 곡식·풀·나무뿌리·열매·벌레 등 가리지 않고 먹는 잡식성으로 영리하고 호기심 많은 성격이다. 후각과 촉각이 발달해 넓은 판처럼 생긴 코끝으로 땅을 파면서 먹이를 찾는다. 어떤 기후나 풍토에도 적응을 잘하는 편이라 전 세계 곳곳에 살고 있다. 성장이 빨라 생후 8개월쯤부터 짝짓기를 할 수 있고 한 배에 8~12마리 정도 낳는다. 벽 같은 곳에 기대 있는 걸 좋아하고, 몸에 땀샘이 없어 더위·추위에 약한지라 체온을 조절하기 위해 진흙 목욕을 즐긴다. 사람들은 온몸에 진흙이나 때로는 배설물을 바르고 다니니 더럽다는 오해가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건 침실·거실·화장실 등을 구별해서 사용하는 돼지를 한 몸 누이는 게 고작인 좁은 곳에 가둬 기르는 인간들 탓도 있다.
돼지는 대한민국이 생기기 수천 년 전부터 여기서 인간들과 부대끼며 살아왔다. 한때 야생 멧돼지로 산과 들을 누볐던 조상들 일부가 신석기시대부터 가축인 돼지로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인간과 함께하다 보니 신성한 존재로 역사책에도 등장한다. 2019년을 황금돼지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다.
올해의 띠 동물, 돼지
쥐·소·호랑이·토끼·용·뱀·말·양·원숭이·닭·개·돼지까지 열두 띠 동물이 있다. 이 십이지는 한자로 쓰면 자子·축丑·인寅·묘卯·진辰·사巳·오午·미未·신申·유酉·술戌·해亥로 지지地支라고도 한다. 이와 함께 십간 또는 천간天干이라고 해서 갑甲·을乙·병丙·정丁·무戊·기己·경庚·신辛·임壬·계癸가 있다. 옛날에는 십간과 십이지를 조합해 시간과 날을 표현했다. 10과 12의 최소공배수가 60이라 이를 합쳐 육십간지, 또는 육십갑자라고 부른다.
그중 돼지해는 을해·정해·기해·신해·계해 다섯 번이고, 2019년은 기해년이다. 12년 전에도 돼지띠였고, 그 12년 전에도 돼지띠가 있었는데 왜 올해를 유독 황금돼지띠라고 할까. 그 해답은 십간인 기己에 있다. 전통 색상을 나타내는 오방색은 황黃·청靑·백白·적赤·흑黑의 5가지 색을 말한다. 십간 중 무와 기는 노란색을 뜻한다. 즉 노란 돼지인데, 노란색 중에선 황금이 최고니까 황금돼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만 황금돼지띠가 제일 좋다, 그런 건 없다. 기해년이 다시 오려면 60년이 흘러야 하는 건 맞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게 하나 있다. 2007년이 황금돼지띠라고 했는데, 이를 육십갑자로 따지면 정해년이니 원래대로라면 붉은 돼지다. 근데 2006년이 쌍춘년雙春年이었다. 윤달로 인해 봄이 시작하는 입춘立春이 양력과 음력 두 번 든 거다. 전통적으로 길하고 복이 많다는 쌍춘년에 이어서 다음 해가 돼지해라 600년 만의 황금돼지라고 마케팅을 한 것이다. 쌍춘년에 결혼하면 잘산다는 속설에 결혼도 많이 하고, 황금돼지해라고 아이도 많이 낳았다. 2007년 정해년 신생아 수는 49만 6822명으로 전년보다 10%나 늘어났다. 2019년 돼지띠는 입춘인 2월 4일부터 해당된다. 띠가 변경되는 기준이 입춘이기 때문이다.
돼지가 풍요의 상징이 된 이유는, 앞서 말했듯 돼지는 길들이기도 쉽고, 먹는 것도 안 가리며, 빨리 크고, 새끼도 많이 낳아서다. 키우는 인간 입장에서 보면 고기와 비계, 가죽, 털을 얻어서 배불리 먹고 옷이나 도구도 만들고 팔아서 돈도 버니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돼지 방광으로 만든 공으로 축구를 했다고도 한다. 그야말로 복덩이인 돼지들은 보통 가축 이상의 가치를 가졌다.
신성한 능력 지닌 돼지
돼지는 오래전부터 중요한 일을 했다. 옛날에는 사람이 죽은 뒤 저승에 가서 먹을 수 있게 식량을 넣어줘야 한다고 생각해, 관 위에 돼지를 올리거나 양손에 옥으로 만든 돼지를 쥐여줬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읍루조에는 돼지기름을 몸에 바르고 돼지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추위를 이겨냈다는 기록도 있다. 또 부여조에 보면 나라 관직 이름에 돼지가 사용된다. 마가·우가·저가·구가 중 저가猪加가 돼지(猪)다. 뿐만 아니라 중요한 제물이자, 왕의 후손을 잇는 사람을 점지하고, 수도를 정해주는 등 신통력을 발휘하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 동명성왕 탄생 설화에도 돼지가 등장한다. <삼국유사>를 보면 유화 부인이 큰 알을 낳았는데, 부여의 왕이 이를 버리라고 한다. 버려진 알을 개도 돼지도 먹지 않아 다시 길가에 버리는데 소와 말이 피해 가고, 들에 버렸더니 짐승들이 알을 덮어줬다고 한다. 그 알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주몽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유리왕편을 보면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교시郊豕라고 하는 돼지를 별도 관리를 둬서 키웠다. 교시가 죽거나 상처 나면 관리가 벌을 받을 정도로 중요시했다. 그런데 어느 날 교시가 도망을 가는 일이 일어났다. 국내성 위나암이라는 곳에서 교시를 잡았는데, 살펴보니 살기가 좋아 이듬해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기게 된다. 이게 기원 3년, 그러니까 2016년 전의 일이다. 고구려 10대 산상왕에겐 아들이 없었다. 근심하던 차에 달아나는 교시를 쫓아 주통촌에 이르렀는데, 이곳에 살던 여인이 돼지를 잡아준다. 그 여인이 나중에 낳은 아들이 동천왕이 된다.
고구려에 이어 고려에도 돼지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고려사> 고려세계에 보면 활을 잘 쏘는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이 중국에 가려고 서해를 지나는데 꿈에 용왕이 나타나 여우 때문에 잠을 못 잔다며 잡아달라고 한다. 활 솜씨를 발휘해 여우를 잡은 작제건은 용궁에 초대받고, 용왕의 딸 용녀와 결혼하게 된다. 용녀의 말에 따라 지팡이와 돼지를 선물로 받고 돌아왔는데, 어느 날 돼지가 집에 들어가지 않는 거였다. 작제건이 좋은 곳으로 가보라고 하자 돼지가 안내한 곳이 개성 송악산 만월대였다. 그곳에서 난 그의 손자가 고려를 세우니, 돼지가 왕이 태어날 곳을 가르쳐 준 셈이다.
신성한 동물을 넘어 돼지가 신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불교의 약사여래신앙과 관련해 나타난 해신 비갈라대장亥神 毘乫羅大將이다. 비갈라대장은 가난해 의복이 없는 이들에게 옷을 전하는 착한 신이다. 또 절이나 궁궐 건물에서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의미로 지붕에 장식하는 잡상에도 돼지가 있다. 삼장법사가 불경을 얻으러 서역으로 가는 내용의 <서유기>에서 비롯한 것인데, 서유기의 저팔계가 바로 돼지다. 잡상의 맨 앞은 삼장법사, 그 뒤는 손오공, 저팔계는 세 번째 자리에 선다.
복과 재물 불러오는 돼지
고구려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돼지는 중요한 제물로 쓰이고 있다. 산신제부터 개업식까지 다양한 제의에서 상에 돼지 머리를 올리거나 통째로 사용하는 것은 물론, 돼지가 그려진 부적이나 돼지 그림을 건물 벽에 걸기도 한다. 또 ‘정월 상해일上亥日(첫 돼지날)에 장사를 시작하면 좋다’는 말도 있다. 이런 풍습은 돼지가 새끼를 빠르게 많이 불리는 것처럼 재물이 빨리 늘고 사업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또 한자로 돼지를 돈豚이라고 쓰는데, 이게 돈金과 음이 같아서이기도 하단다. 이런 상징은 돼지저금통에서도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용꿈과 더불어 돼지꿈이 좋다고 대접받는다. 상상의 동물인 용은 왕권의 상징이자 권력을 나타내 태몽으로는 용꿈을 치고, 돼지꿈은 돈 버는 꿈이라고 한다. 돼지를 붙잡거나, 남의 집 돼지를 자기 집으로 끌고 오거나, 새끼를 낳는 것을 보거나, 돼지가 따라오거나, 우리에 몰아넣는 등 돼지를 얻는 꿈을 꾸면 재물이 생긴다는 것이다. 돼지꿈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다. 돼지가 죽거나 병들고 발톱으로 자신의 얼굴을 할퀴거나 하면 나쁜 꿈이다.
돼지를 풍수지리에 이용한 예도 있다. 경남 창원시 성주사에 가면 대웅전 입구에 돼지 석상이 놓였는데,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대략 100년은 됐을 거라고 본다. 성주사는 뱀과 관련이 있는 절인데, 십이지에서 뱀은 음양오행 중 불火을 의미한다. 이와 상극으로 물水을 뜻하는 돼지를 통해 뱀을 제압하려는 의도였다는 설명이다.
돼지에 대한 오해와 진실
돼지가 더럽고 게으르고 우둔하게 그려지는 경우도 많다. 이는 주로 인간들의 오해가 만들어낸 것이다. 특히 ‘돼지는 우리가 더러운 줄도 모른다’ ‘돼지는 흐린 물을 좋아한다’ ‘(집이) 돼지우리 같다’는 등 더럽다는 편견이 많다. 몸에 진흙이나 배설물을 묻히고, 체내의 모든 수분을 소변으로 배설하는 통에 더럽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이는 체온 유지를 위한 돼지의 습성이다.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키우면서 돼지우리 바닥에 축축하게 쌓이는 배설물을 제대로 치워주지 않는 탓이 크다. 공간을 충분히 주면 돼지는 잠자리와 화장실, 휴식 공간을 가려서 사
또 ‘돼지처럼 먹는다’라거나 ‘일에는 굼벵이요, 먹는 데는 돼지다’라는 말이 있다. 종일 게으르게 퍼질러 앉아 끝없이 먹기만 할 것 같은 돼지는 실제로는 일정한 양을 먹고 나면 그 이상 먹지 않는다. 잡식성이라 한 집에서 사람과 함께 살던 시절, 사람이 먹다 남긴 것까지도 가리지 않고 잘 먹긴 했지만. 돼지를 빨리 살찌우기 위해 일부러 많이 먹여놓고 그런 오해를 하면 안 된다. 듣기 싫은 목소리로 노래하거나 시끄러울 때 흔히 쓰는 ‘돼지 멱따는 소리’라는 관용적인 표현 역시 문제가 있다. 멱을 딴다는 것은 목숨을 잃는다는 건데, 그런 상황이라면 그 누구도 조용히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둔해 보이는 체형 탓인지 머리가 나쁠 것 같다는 얘기도 한다. 흔히 돼지 하면 떠오르는 짧은 목과 다리, 타원형의 몸은 인간들이 고기를 얻기 위해 체형을 개량한 결과다. 실제 돼지의 지능은 IQ 75∼85 정도로 3∼4세 아이와 비슷하다. 훈련을 받으면 반려견처럼 몇 가지 동작을 할 수도 있다. 발달한 후각을 이용해 고대부터 귀하게 여긴 송로버섯을 찾는 일을 하기도 한다. 요즘은 반려돼지를 키우는 사람도 있다.
돼지는 오랫동안 우리 역사와 문화에 스며든 동물이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을 먹이고 입힌 가축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신성한 제물로 쓰인 것뿐 아니라, 최근에는 공업원료나 의학 실험에도 사용되고 돼지 똥으로 전기를 생산하는 등 돼지의 잠재력은 지금까지 계속 발산 중이다. 2000년이 넘도록 사람들의 곁을 지키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남김없이 준 돼지야말로 우리들의 친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