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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기라성
조선(朝鮮)국 세종대왕(世宗大王) 즉위 십오 년에 홍회문 밖에 한 재상(宰相)이 있으되, 성은 홍이요, 명은 문이니, 위인이 청렴(淸廉)강직(剛直)하여 덕망(德望)이 거룩하니 당세(當世)의 영웅(英雄)이라. 일찍 용문(龍門)에 올라 벼슬이 한림(翰林)에 처하였더니 명망이 조 정의 으뜸 되매, 전하 그 덕망을 승이 여기사 벼슬을 돋우어 이조판서로 좌의정을 하이시니, 승상이 국은을 감동하여 갈충보국(竭忠報國)하니 사방에 일이 업고 도적이 없으매 시화연풍하여 나라가 태평(太平)하더라. 일일은 승상 난간에 비겨 잠깐 졸더니, 한풍이 길을 인도하여 한 곳에 다다르니, 청산(靑山)은 암암하고 녹수는 양양한데 세류(細柳) 천만 가지 녹음이 파사하고, 황금 같은 꾀꼬리는 춘흥(春興)을 희롱하여 양류간에 왕래(往來)하며 기화요초(琪花瑤草) 만발한데, 청학 백학이며 비취 공작이 춘광을 자랑하거늘, 승상이 경물을 구경하며 점점 들어가니, 만장절벽은 하늘에 닿았고, 굽이굽이 벽계수는 골골이 폭포되어 오운(五雲)이 어리었는데, 길이 끊어져 갈 바를 모르더니, 문득 청룡(靑龍)이 물결을 헤치고 머리를 들어 고함 하니 산학이 무너지는 듯 하더니, 그 용이 입을 벌리고 기운을 토하여 승상의 입으로 들어오거늘, 깨달으니 평생 대몽이라. 내염(內念)에 헤아리되 "필연 군자(君子)를 낳으리라." 하여, 즉시 내당에 들어가 시비를 물리치고 부인을 이끌어 취침코자 하니, 부인이 정색 왈, "승상은 국지재상이라, 체위 존중하시거늘 백주에 정실에 들어와 노류장화(路柳墻花)같이 하시니 재상의 체면이 어디에 있나이까?" 승상이 생각하신 즉, 말씀은 당연하오나 대몽(大夢)을 허송(虛送)할까 하여 몽사(夢事)를 이르지 아니하시고 연하여 간청하시니, 부인이 옷을 떨치고 밖으로 나가시니, 승상이 무료하신 중에 부인의 도도한 고집을 애달아 무수히 차탄하시고 외당으로 나오시니, 마침 시비 춘섬이 상을 드리거늘, 좌우 고요함을 인하여 춘섬을 이끌고 원앙지낙(鴛鴦之樂)을 이루시니 적이 울화를 덜으시나 심내에 못내 한탄하시더라. 춘섬이 비록 천인(賤人)이나 재덕(才德)이 순직한지라, 불의에 승상의 위엄으로 친근(親近)하시니 감이 위령(違令)치 못하여 순종한 후로는 그날부터 중문 밖에 나지 아니하고 행실을 닦으니 그달부터 태기(胎氣)있어 십삭이 당하매 거처하는 방에 오색운무 영롱하며 향내 기이하더니, 혼미중에 해태하니 일개 기남자라. 삼일 후에 승상이 들어와 보시니 일변 기꺼우나 그 천생됨을 아끼시더라. 이름을 길동이라 하니라. 이 아이 점점 자라매 기골이 비상하여 한 말을 들으면 열 말을 알 고, 한 번 보면 모르는 것이 없더라. 일일은 승상이 길동을 데리고 내당에 들어가 부인을 대하여 탄식 왈, "이 아이 비록 영웅이나 천생이라 무엇에 쓰리오. 원통하도다. 부인의 고집이여, 후회막급(後悔莫及)이로소이다." 부인이 그 연고를 묻자오니, 승상이 양미를 빈축하여 왈, "부인이 전일에 내 말을 들으셨던들 이 아이 부인 복중에 낳을 것을 어찌 천생이 되리요." 인하여 몽사를 설화(說話)하시니, 부인이 추연( 然) 왈, "차역 천수오니 어찌 인력으로 하오리까." 세월이 여류하여 길동의 나이 팔세라. 상하(上下) 다 아니 칭찬할 이 없고 대감도 사랑하시나, 길동은 가슴의 원한이 부친(父親)을 부친(父親)이라 못하고 형(兄)을 형(兄)이라 부르지 못하매 스스로 천생(賤生)됨을 자탄(自嘆)하더니, 칠월 망일에 명월을 대하여 정하에 배회하더니 추풍은 삽삽하고 기러기 우는 소리는 사람의 외로운 심사를 돕는지라. 홀로 탄식하여 왈, "대장부 세상에 나매 공맹(孔孟)의 도학(道學)을 배워 출장입상(出將入相)하여 대장인수를 요하(腰下)에 차고 대장단에 높이 앉아 천병만마를 지휘중에 넣어두고, 남으로 초를 치고, 북으로 중원을 정하며, 서로 촉을 쳐 사업을 이룬 후에 얼굴을 기린각에 빛내고, 이름을 후세에 유전함이 대장부의 떳떳한 일이라. 옛 사람이 이르기를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씨없다.' 하였으니 나를 두고 이름인가. 세상 사람이 갈관박이라도 부형을 부형이라 하되 나는 홀로 그렇지 못하니 어떤 인생으로 그러한고." 울울한 마음을 걷잡지 못하여 칼을 잡고 월하(月下)에 춤을 추며 장한 기운 이기지 못하더니, 이때 승상이 명월(明月)을 사랑하여 창을 열고 비겼더니, 길동의 거동을 보시고 놀래 가로되, "밤이 이미 깊었거늘 네 무슨 즐거움이 있어 이러하느냐?" 길동이 칼을 던지고 부복( 伏) 대왈, "소인은 대감의 정기를 타 당당한 남자로 낳사오니 이만 즐거운 일이 없사오되, 평생(平生) 설워하옵기는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옵고, 형을 형이라 못하여 상하 노복(奴僕)이 다 천히 보고, 친척 고두도 손으로 가르쳐 아무의 천생이라 이르오니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에 있사오리까?" 인하여 대성통곡(大聲痛哭)하니, 대감이 마음에 긍측(矜惻)이 여기시나 만일 그 마음을 위로하면 일로조차 방자할까 하여 꾸짖어 왈. "재상의 천비 소생이 너 뿐 아니라. 자못 방자한 마음을 두지 말라. 일후(日後)에 다시 그런 말을 번거이 한 일이 있으면 눈앞에 용납치 못하리라." 하시니, 길동은 한갓 눈물 흘릴 뿐이라. 이윽히 엎드려있더니, 대감이 물러가라 하시거늘, 길동이 돌아와 어미를 붙들고 통곡 왈, "모친(母親)은 소자와 전생연분으로 차생(此生)에 모자 되오니 구로지은( 勞之恩)을 생각하오면 호천망극하오나, 남아(男兒)가 세상에 나서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위로 향화를 받들고, 부모의 양육지은(養育之恩)을 만분의 하나라도 갚을 것이거늘, 이 몸은 팔자 기박하여 천생이 되어 남의 천대를 받으니, 대장부 어찌 구구히 근본을 지키어 후회를 두리요. 이 몸이 당당히 조선국 병조판서 인수를 띠고 상장군이 되지 못할진대, 차라리 몸을 산중에 붙여 세상(世上)영욕(榮辱)을 모르고자 하오니, 복망(伏望) 모친은 자식의 사정을 살피사 아주 버린 듯이 잊고 계시면 후일에 소자 돌아와 오조지정을 이를 날 있사오니 이만 짐작하옵소서." 하고, 언파에 사기 도도하여 도리어 비회 없거늘. 그 모 이 거동을 보고 개유(開諭)하여 왈, "재상가 천생이 너뿐 아니라.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되 어미의 간장을 이다지 상케 하느냐? 어미의 낮을 보아 아직 있으면 내두에 대감이 처결하시는 분부 없지 아니하리라." 길동이 가로되, "부형의 천대는 고사하옵고, 노복이며 동유의 이따금 들리는 말이 골수에 박히는 일이 허다하오며, 근간에 곡산모의 행색을 보오니 승기자를 염지하여 과실없는 우리 모자를 구수같이 보아 살해 해할 뜻을 두오니 불구에 목전(目前)대환(大患)이 있을지라. 그러하오나 소자 나간 후 이라도 모친에게 후환(後患)이 미치지 아니케 하오리다." 그 어미 가로되. "네 말이 자못 그러하나 곡산모는 인후한 사람이라. 어찌 그런 일이 있으리요?" 길동 왈, "세상사를 측량치 못하나이다. 소자의 말을 헛되이 생각지 마시고 장래를 보옵소서." 하더라. 원래 곡산모는 곡산 기생으로 대감의 총첩이 되어 뜻이 방자하기로, 노복이라도 불합한 일이 있으면 한 번 참소(讒訴)에 사생이 관계하여 사람이 못되면 기뻐하고 승하면 시기하더니, 대감이 용몽을 얻고 길동을 낳아 사람마다 일컫고 대감이 사랑하시매, 일후 총을 앗길까 하며, 또한 대감이 이따금 희롱하시는 말씀이 "너도 길동같은 자식을 낳아 나의 모년재미를 도우라." 하시매, 가장 무료하여 하는 중에 길동의 이름이 날로 자자하므로 초낭 더욱 크게 시기하여 길동 모자를 눈의 가시같이 미워하여 해할 마음이 급하매, 흉계를 짜아내어 재물을 흩어 요괴로운 무녀 등을 불러 모의말 말하고 축일왕래하더니, 한 무녀 가로되, "동대문 밖에 관상하는 계집이 있으되, 사랑의 상을 한 번 보면 평생 길흉화복(吉凶禍福)을 판단하오니, 이제 청하여 약속을 정하고 대감전에 천거하여 가중 전후사를 본 듯이 이른 후에 인하여 길동의 상을 보고 여차여차히 아뢰어 대감의 마음을 놀래면 낭자의 소회를 이룰까 하나이다." 초낭이 대희하여, 즉시 관상녀에계 통하여 재물로써 달래고, 대감댁 일을 낱낱이 가르치고, 길동 제거할 약속을 정한 후에 날을 기약하고 보내니라. 일일은 대감이 내당에 들어가 길동을 부른 후에 부인을 대하여 가로되, "이 아이 비록 영웅의 기상이 있으나 어디다 쓰리요." 하시며 희롱하시더니, 문득 한 여자 밖으로부터 들어와 당하에 뵈거늘, 대감이 괴히 여겨 그 연고를 물으신대, 그 여자 복지 주왈. "소녀는 동대문 밖에 사옵더니, 어려서 한 도인을 만나 사람의 상보는 법을 배운 바 두루 다니며 관상차로 만호장안을 편람하옵고, 대감댁 만복을 높이 듣고 천한 재주를 시험코자 왔나이다." 대감이 어찌 요괴로운 무녀를 대하여 문답(問答)이 있으리요마는 길동을 희롱하시던 끝인 고로 웃으시며 왈, "네 아무렇거나 가까이 올라 나의 평생을 확론하라." 하시니, 관상녀 국궁하고 당에 올라 먼저 대감의 상을 살핀 후에 이왕지사를 역역히 아뢰며 내두사를 보는 듯이 논단하니, 호발도 대감의 마음에 위월한 마디 없는지라. 대감이 크게 칭찬하시고 연하여 가중 사람의 상을 의논할새, 낱낱이 본 듯이 평론하여 한 말도 허망한 곳이 없는지라. 대감과 부인이며 좌중제인이 대혹하여 신인이라 일컫터라. 끝으로 길동의 상을 의논할새, 크게 칭찬 왈, "소녀가 열읍에 주류하며 천만인을 보았으되 공자의 상같은 이는 처음이려니와 알지 못게라, 부인의 기출이 아닌가 하나이다." 대감이 속이지 못하여 왈, "그는 그러하거니와 사람마다 길흥영욕이 각각 때있나니 이 아이 상을 각별 논단하라." 하니, 상녀가 이윽히 보다가 거짓 놀라는 체 하거늘, 괴히 여겨 그 연고를 물으신대 함구하고 말이 없거늘, 대감이 가로되, "길흉을 호발도 기이지 말고 보이는 대로 의논하여 나의 의혹(疑惑)이 없게 하라." 관상녀 가로되, "이 말씀을 바로 아뢰면 대감의 마음을 놀래일까 하나이다." 대감 왈, "옛날 곽분양같은 사람도 길한 때 있고 흉한 때있었으니 무슨 여러 말이 있느냐? 상법 보이는 대로 기이 말라." 하시니. 관상터 마지 못하혀 길동을 치운 후에 그윽히 아뢰되, "공자의 내두사는 여러 말씀 버리옵고 성즉 군왕지상이요, 패즉 측량치 못할 환이 있나이다." 한대, 대감이 크계 놀래어 이윽히 진정한 후에 상녀를 후이 상급하시고 가로되, "이같은 말을 삼가 발구치 말라." 엄히 분부하시고, 왈, "제 늙도록 출입치 못하게 하리라." 하시니, 상녀 왈,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디 씨 있으리까?" 대감이 누누당부하시니, 관상녀 공수 수명하고 가니라. 대감이 이 말을 들으신 후로 내념에 크게 근심하사 일념에 생각하시되, "이놈이 본래 범상한 놈이 아니요, 또 천생됨을 자탄하여 만일 범람한 마음을 먹으면 누대 갈충보국(竭忠報國)하던 일이 쓸데없고 대화 일문에 미치리니 미리 저를 없애어 가화를 덜고자 하나 인정에 차마 못할 바라." 생각이 이러한즉 선처할 도리없어 일념이 병이 되어 식불감 침불안하시는지라. 초낭이 기색을 살핀 후에 승간하여 여쭈오되, "길동이 관상년의 말씀같이 왕기 있어 만일 범람한 일이 있사오면 가화 장차 측량치 못할지라. 어리석은 소견은 적은 혐의를 생각지 마시고 큰 일을 생각하여 저를 미리 없이 함만 같지 못할까 하나이다." 대감이 대책 왈, "이 말을 경솥히 할 바가 아니거늘, 네 어찌 입을 지키지 못하느냐? 도시 내 집 가운을 네 알 바가 아니라." 하시니, 초낭이 황공하여 다시 말씀을 못하고, 내당에 들어아 부인과 대감의 장자를 대하여 여쭈오되, "대감이 관상녀의 말씀을 들으신 후로 사념에 선처하실 도리 없사와 침식이 불안하시더니 일념의 병환이 되시기로 소인이 일전에 여차여차한 말씀을 아뢰온즉 꾸중이 났는 고로 다시 여쭙지 못하였거니와, 소인이 대감의 마음을 취택하온즉 대감께서도 저를 미리 없애고자 하시되 차바 거처치 못하오니, 미련한 소견으로는 선처할 모책이 길동을 먼저 없앤 후에 대감께 아뢰면 이미 저질러진 일이라 대감께서도 어찌 할 수 업사와 마음을 아주 잊을까 하옵나이다." 부인이 빈축 왈, "일은 그러하거니와 인정천리에 차마 할 바가 아니라." 하시니, 초낭이 다시 여쭈오되, "이 일이 여러 가지 관계하오니, 하나는 국가를 위함이요, 둘은 대감의 환후를 위함이요, 셋은 홍씨 일문을 위함이오니, 어찌 적은 사정으로 우유부단(優柔不斷)하여 여러 가지 큰 일을 생각지 아니하시다가 후회막급(後悔莫及)이 되오면 어찌 하오리까?" 하며, 만단으로 부인과 대감의 장자를 달래니, 마지 못하여 허락하시거늘, 초낭이 암회하여 나와 특자라 하는 자객을 청하여 수말을 다 전하고 은자를 많이 주어 오늘 밤에 길동을 해하라 약속을 정하고, 다시 내당에 들어가 부인전에 수말을 여쭈오니, 부인이 들으시고 발을 구르시며 못내 차석(嗟惜)하시더라. 이때의 길동은 나이 십일세라. 기골이 장대하고, 총맹이 절륜하며, 시서백가어를 무불통지하나, 대감 분부에 바깥 출입을 막으시매, 홀로 별당에 처하여 손오의 병서를 통리하여 귀신도 측량치 못하는 술법이며 천지조화를 품어 풍운을 임의로 부리며, 육정육갑이 신장을 부려 신출귀몰(神出鬼沒)지술을 통달(通達)하니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더라. 이날 밤 삼경이 된 후에 장차 서안을 물리치고 취침하려 하더니 문득 창 밖에서 까마귀 세 번 울고 서로 날아가거늘, 마음에 놀래 해혹(解惑)하니, "까마귀 세 번 '객자와 객자와' 하고 서로 날아가니 분명 자객이 오는지라. 어떤 사람이 나를 해코자 하는고? 암커나 방신지계를 하니라." 하고, 방중에 팔진을 치고 각각 방위를 바꾸어, 남방의 이허중은 북방의 감중련에 옮기고, 동방 진하련은 서방 태상절에 옮기고, 건방의 건삼련은 손방 손하절에 옮기고, 곤방의 곤삼절은 간방 간상련에 옮겨, 그 가운데 풍운을 넣어 조화무궁페 벌리고 때를 기다리니다. 이때에 특자 비수를 들고 길동 거처하는 별당에 가서 몸을 숨기고 그 잠들기를 기다리더니, 난데없는 까마귀 창 밖에 와 울고 가거늘 마음에 크게 의심하여 왈, "이 짐승이 무슨 앎이 있어 천기를 누설하는고? 길동은 실로 범상한 사람이 아니로다. 필연 타일에 크게 쓰리라." 하고, 돌아가고자 하다가 은자에의 욕심이 몸을 생각치 못하여 이시한후에 몸을 날려 방중에 들어가니, 길동은 간 데 없고, 일진광풍(一陣狂風)이 일어나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천지(天地) 진동(震動)하며 운무 자욱하여 동서(東西)를 분별치 못하며 좌우를 살펴보니 천봉(千峰)만학(萬壑)이 중중(重重)첩첩(疊疊)하고, 대해 창일하여 정신을 수습치 못하는지라. 특자 내념에 헤아리되, "내 아까 분명 방중에 들어왔거늘 산은 어인 산이며, 물은 어인 물인고?" 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더니, 문득 옥적(玉笛)소리 들리거늘, 살펴보니 청의(靑衣)동자(童子) 백학을 타고 공중에 다니며 불러 왈, "너는 어떠한 사람이관대 이 깊은 밤에 비수(匕首)를 들고 누구를 해코자 하느냐?" 특자 대왈, "네 분명 길동이로다. 나는 너의 부형의 명령을 받아 너를 취하러 왔노라." 하고 비수를 들어 던지니, 문득 길동은 간 데 없고, 음풍이 대작하고 벽력이 진동하며, 중천에 살기 뿐이로다. 중심에 대겁하여 칼을 찾으며 왈, "내 남의 재물을 욕심하다가 사지(死地)에 빠졌으니 수원수구(誰怨誰咎)하리요." 하며, 길게 탄식하더니, 문득 이윽고 길동이 비수를 들고 공중에서 외쳐 왈, "필부는 들으라. 네 재물을 탐하여 무죄한 인명을 살해코자 하니 이제 너를 살려두면 일후에 무죄한 사람이 허다히 상할지라. 어찌 살려 보내리요." 한대, 특자 애걸 왈, "과연 소인의 죄 아니오라 공잣댁 초낭자의 소위오니, 바라옵건데 가련한 인명을 구제하셔서 일후에 개과하게 하옵소서." 길동이 더욱 분을 이기지 못하여 왈, "너의 약관이 하늘에 사무쳐 오늘날 나의 손을 빌어 악한 유를 없애게 함이라." 하고, 언파에 특자의 목을 쳐버리고, 신장을 호령하여 동대문 밖의 상녀를 잡아다가 수죄하여 왈, "네 요망한 년으로 재상가에 출입하며 인명을 상해하니 네 죄를 네 아느냐?" 관상녀 제 집에서 자다가 풍운에 쌓이어 호호탕탕이 아무 데로 가는줄 모르더니, 문득 길동의 꾸짖는 소리를 듣고 애걸 왈, "이는 다 소녀의 죄가 아니오라 초낭자의 가르침이오니 바라건대 인후하신 마음에 죄를 관서하옵소서." 하거늘, 길동이 가로되, "초낭자는 나의 의모라 의논치 못하려니와 너같은 악종을 내 어찌 살려 두리요. 후 사람을 징계하리라." 하고. 칼을 들어 머리를 베어 특자외 주검한테 던지고, 분한 마음을 걷잡지 못하여 바로 대감전에 나아가 이 변괴를 아뢰고 초낭을 베려하다가 홀연 생각 왈, "영인부아언정 무아부인이라." 하고, 또 "내 일시 분으로 어찌 인륜(人倫)을 끊으리요." 하고, 바로 대감 침소에 나아가 정하에 엎드리더니, 이때 대감이 잠을 깨어 문 밖에 인적 있음을 괴히 여겨 창을 열고 보시니, 길동이 정하에 엎드렸거늘, 분부 왈, "이제 밤이 이미 깊었거늘 네 어찌 자지 아니하고 무슨 연고로 이러하느냐?" 길동이 체읍(涕泣) 대왈, "가내에 흉한 변이 있사와 목숨을 도망하여 나가오니 대감전에 하직차로 왔나이다." 대감이 상량하시되, "필연 무슨 곡절이 있도다." 하시고 가로되, "무슨 일인지 날이 새면 알려니와 급히 돌아가 자고 분부를 기다리라." 하시기, 길동이 복지 주왈, "소인이 이제로 집을 떠나가오니 대감 체후만복하옵소서. 소인이 다시 뵈올 기약이 망연하오이다." 대감이 헤아리되, 길동은 범류 아니라 만류하여도 듣지 아니 할 줄 짐작하시고 가로되, "네 이제 집을 떠나면 어디로 가느냐?" 길동이 부복 주왈, "목숨을 도망하여 천지로 집을 삼고 나가오니 어찌 정처 있사오리까마는 평생 원한이 가슴에 맺혀 설원(雪 )할 날이 없사오니 더욱 설워하나이다." 하거늘. 대감이 위로 왈, "오늘로부터 네 원을 풀어주는 것이니 네 나가 사방에 주류할지라도 부디 죄를 지어 부형에게 환을 끼치지 말고 쉬이 돌아와 나의 마음을 위로하라. 여러 말 아니하니 부디 겸염하여라." 하시니. 길동이 일어나 다시 절하고 주왈, "부친이 오늘날 적년소원을 풀어 주시니 이제 죽어도 한이 없사올지라. 황공무지오니 복망 아버님은 만수무강하소서." 하며, 인하여 하직을 구하고 나와 바로 그 모친 침실에 들어가 어미를 대하여 가로되, "소자가 이제 목숨을 도망하여 집을 떠나오니 모친은 불효자(不孝子)를 생각지 마시고 계시오면 소자 돌아와 뵈올 날이 있사오니 달리 염려 마옵시고 삼가 조심하여 천금귀체를 보중하옵소서." 하고, 초낭의 작변하던 일을 종두지미하여 낱낱이 설화하니, 그 어미 그 변괴를 자세히 들은 후에 길동을 만류치 못할 줄 알고 인하여 탄식 왈, "네 이제 나가 잠깐 화를 피하고 어미 낯을 보아 쉬이 돌아와 나로 하여금 실망하는 병이 없게 하라." 하며 못내 설워하니, 길동이 무수히 위로하며 눈물을 거두어 하직하고 문 밖에 나서니 광대한 천지간에 한 몸이 용납할 곳이 없는지라. 탄식으로 정처없이 가니라. 이때에 부인이 자객을 길동에게 보낸 줄 아시고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무수히 탄식하시니, 장자 길현이 위로 왈, "소자도 능히 마지 못하온 일이오니 저 죽은 후에라도 어찌 한이 없사오리까? 제 어미를 더욱 후대하여 일생을 편케 하옵고, 제의 시신을 후장하여 야처한 마음을 만분지일이나 덜을까 하나이다." 하고 밤을 지내더, 이튿날 평명에 초낭이 별당에 날이 밝도록 소식 없음을 괴히 여겨 사람을 보내 탐지하니, 길동은 간데 없고 목 없는 주검 둘이 방중에 거꾸러져 있거늘, 자세히 보니 특자와 관상녀라. 초낭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래어 급히 내당에 들외가 이 사연을 부인께 고하니, 부인이 대경(大驚)하여 장자 길현을 볼러 길동을 찾으되 종시 거처를 알지 못하는지라. 대감을 청하여 수말을 아뢰며 죄를 청하니, 대감이 대책왈, "가내에 이런 변고를 지으니 화 장차 무궁할지라. 간밤에 길동이 집을 떠나노라 하고 하직을 고하기로 무슨 일인지 몰랐더니 원래 이일이 있음을 어찌 알았으리요." 하고, 초낭을 대책 왈, "네 앞 순에 괴이한 말을 자아내기로 꾸짖어 물리치고 그같은 말을 다시 내지 말라 하였거늘, 네 종시 마음을 고치지 아니하고 가내에 있어 이렇듯이 변을 지으니 죄를 의논컨대 죽기를 면치 못하리라. 어찌 내 안전에 두고 보리요." 하시고, 노복을 불러 두 주검을 남이 모르게 치우고 마음 둘 곳을 몰라 좌불안석(坐不安席)하시더라. 이때에 길동이 집을 떠나 사방으로 주류하더니, 일일은 한 곳에 이르니 만첩산장이 하늘에 닿은 듯하고, 초목이 무성하여 동서(東西)를 분별치 못하는 중에 햇빛은 세양이 되고 인가(人家) 또한 없으니 진퇴유곡(進退維谷)이라. 바야흐로 주저하더니, 한 곳을 바라보니 괴이한 표자 시냇물을 쫓아 떠오거늘, 인가 있는 줄 짐작하고 시냇물을 쫓아 수리를 들어가니, 산천이 열린 곳에 수백 인가 즐비하거늘. 길동이 그 촌중(村中)에 들어가니, 한 곳에 수백 인이 모여 잔치를 배설하고 배반이 낭자한대 공론이 분운하더라. 원래 차촌은 적굴이라. 이날 마침 장수를 정하려 하고 공론이 분운하더니 길동 이 말을 듣고 내념(內念)에 헤아리되, "내 지처없는 처지로 우연이 이 곳에 당하였으니 이는 나로 하여금 하늘이 지시하심이로다. 몸을 녹림(綠林)에 붙여 남아(男兒)의 지기(志氣)를 펴리라."하고 좌중에 나아가 성명을 통하여 왈, "나는 경성 홍승상의 아자로서 사람을 죽이고 망명도주하여 사방에 주류하옵더니, 오늘날 하늘이 지시하사 우연이 이 곳에 이르렀으니 녹림호걸(綠林豪傑)의 으뜸 장수됨이 어떠하노?" 하며 자청하니. 좌중제인이 이때 술이 취하여 바야흐로 공론 난만하더니, 불의에 난데없는 총각아이 들어와 자청(自請)하매 서로 돌아보며 꾸짖어 왈, "우리 수백 인이 다 절인지력을 가졌으되 지금 두 가지 일을 행할이 없어 유예미결하거니와, 너는 어떠한 아이로서 감히 우리 연석에 돌입하여 언사 이렇듯이 괴망하뇨? 인명(人命)을 생각하여 살려보내니 급히 돌아가라." 하고 등 밀어 내치거늘, 길동이 돌문 밖에 나와 큰 나무를 꺾어 글을 쓰되, "용이 얕은 물에 잠기어 있으니 어별이 침노하며, 범이 깊은 수풀을 잃으매 여우와 토끼의 조롱을 보는도다. 오래지 아니해서 풍운을 얻으면 그 변화 측량키 어려우리로다." 하였더니, 한 군사 그 글을 등서하여 좌중에 드리니, 상좌의 한 사람이 그 글을 보다가 여러 사람에게 청하여 왈, "그 아이 거동이 비범할 뿐 아니라, 더우기 홍승상의 자제라 하니 수자를 청하여 그 재주를 시험한 후에 처치함이 해롭지 아니하다." 하니, 좌중제인이 응락하여 즉시 길동을 청하여 좌상에 앉히고 이르되, "즉금 우리 의논이 두 가지라. 하나는 이 앞의 초부석이라 하는 돌이 있으니 중이 천여근이라 좌중에서는 용이케 들 사람이 없고, 둘은 경상도 합천 해인사에 누거만재이나 수도중이 수천 명이라 그 절을 치고 재물을 앗을 모책이 없는지라. 수자가 이 두 가지를 능히 행하면 오늘부터 장수를 봉하리라." 하거늘, 길동이 이 말을 듣고 웃어 왈, "대장부 세상에 처하매 마땅히 상통천문하고, 부찰지리하고. 중찰인의할지라. 어찌 이만 일을 겁하리요." 하고, 즉시 팔을 걷고 그 곳에 나아가 초부석을 들어 팔 위에 얹고 수 십 보를 행하다가 도로 그 자리에 놓으되 일분 겨워하는 기색이 없으니 모든 사람이 대찬 왈, "실로 장사로다!" 하고, 상좌에 앉히고 술을 권하며 장수라 일컬어 치하 분분하는지라. 길동이 군사를 명하여 백마를 잡아 피를 마셔 맹세할새 제군에게 호령 왈, "우리 수백 인이 오늘부터 사생고락을 한가지로 할지니 만일 약속을 배반하고 영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군법으로 시행하리라." 하니, 제군이 일시에 청령하고 즐기더라. 수일 후에 제군에게 분부 왈, "내 합천 해인사에 가 모책을 정하고 오리라." 하고, 서동복색으로 나귀를 타고 종자 수인을 데리고 가니 완연한 재상의 자제이더라. 해인사에 노문하되, "경성 홍승상댁 자제 공부차로 오신다." 하니 사중 제승 노문을 듣고 의논하되, "재상가 자제 절에 거처하시면 그 힘이 적지 아니하리로다." 하고 일시에 동구 밖에 맞아 문안하니, 길동이 혼연히 사중에 돌아가 좌정 후에 제승을 대하여 왈, "내 들으니 네 절이 경성에 유명하기로 소문을 높이 듣고 먼 데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한 번 구경도 하고 공부도 하려하여 왔으니, 너희도 괴로히 생각지 말 뿐더러 사중에 머무는 잡일을 일체 물리치라. 내 아무 고을 아중에 가 본관을 보고 백미 이십 석을 보낼 것이니 아무날 음식을 장만하라. 내 너회와 더불어 승속지분의를 버리고 동락한 후에 그날부터 공부하리라. " 하니, 제승이 황공 수명하더라. 법당 사면으로 다니며 두루 살핀 후에 돌아와 적군 수십 인에게 백미 이십석을 보내며 왈, "아무 아중에서 보내더라." 이르니라. 제승이 어찌 대적의 흉계를 알리요. 행여 분부를 어길까 염려하여 그 백미로 즉시 음식을 장만하며, 일변 사중에 머무는 잡인을 다 보내니라. 기약한 날에 길동이 제적에게 분부하되, "이제 해인사에 가 제승을 다 결박할 것이니 너희 등이 근처에 매복하였다가 일시에 절에 들어와 재물을 수탐하여 가지고 나의 가르치는 대로 행하되 부디 영을 어기지 말라." 하고, 장대한 하인 십여인을 거느리고 해인사로 향하니라. 이때 제승이 동구 밖에 나와 대후하는지라. 길동이 들어가 분부 왈, "사중 제승이 노소없이 하나도 빠지지 말고 일제히 절 뒤 벽계로 모이라. 오늘은 너희와 함께 종일 포취하고 놀리라." 하니, 중들이 먹기도 위할 뿐떠러 분부를 어기면 행여 죄 있을까 저어하여 일시에 수천 제승이 벽계로 모이니 사중은 통 비었는지라. 길동이 좌상에 앉고 제승을 차례로 앉힌 후에 각각 상을 받아 술도 권하며 즐기다가 이윽하여 식상을 드리거늘, 길동이 소매로부터 모래를 내어 입에 넣고 씹으니 돌깨지는 소리에 제승이 혼불부신하는지라. 길동이 대로 왈, "내 너희로 더불어 승속지분의를 버리고 즐긴 후에 유하여 공부하렸더니 이 완만한 중놈들이 나를 수이 보고 음식의 부정함이 이 같으니 가히 통분한지라." 데리고 갔던 하인을 호령하여, "제승을 일제히 곁박하라." 재촉이 성화같은지라. 하인이 일시에 달려들어 절승을 결박할새 어찌 일분 사정이 있으리요. 이때 제적이 동구 사면에 매복하였다가 이 기미를 탐지하고, 일사에 달려들어 고를 열고 수만금 재물을 제 것 가져가듯이 우마(牛馬)에 싣고 간들 사지를 요동치 못하는 중들이 어찌 금단하리오. 다만 입으로 원통하다 하는 소리 동중이 무너지는 듯 하더라. 이때 사중에 한 목공이 있어 이 중에 참여치 아니하고 절을 지키다가 난데없는 도적이 들어와 고를 열고 제 것 가져가듯이 하매, 급히 도망하여 합천 관가에 가 이 연유를 아뢰니, 합천원이 대경, 일변 관인을 보내며, 또 일변 관군을 조발하여 추종하는지라. 모든 도적이 재물을 싣고 우마를 몰아 나서며 멀리 바라보니 수천 군사 풍우같이 몰려오매 티끌이 하늘에 닿은 듯 하더라. 제적이 대겁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도리어 길동을 원망하는지라. 길동이 소왈, '너회가 어찌 나의 비계를 알리요? 염려말고 남편 대로로 가라. 내 저 오는 관군을 북편 소로로 가게 하리라." 하고, 법당에 들어가 중의 장삼을 입고, 고갈을 쓰고, 높은 봉에 올라 관군을 불러 외쳐 왈, "도적이 북편 소로로 갔사오니 이리로 오지 말고 그리 가 포착하옵소서." 하며, 장삼 소매를 날려 북편 소로를 가리키니, 관군이 오다가 남로를 버리고 노승의 가리키는 대로 북편 소로로 가거늘, 길동이 내려와 축지법을 행하여 제적을 인도하여 동중으로 돌아오니 제적이 치하 분분하더라. 이때에 합천 원이 관군(官軍)을 몰아 도적(盜賊)을 추종하되 자취를 보지 못하고 돌아오매 일읍이 소동하는지라. 이 연유를 감영에 장문하니, 감사(監査) 듣고 놀래어 각 읍에 발포하여 도적을 잡되 종시 형적을 몰라 도로 분주하더라. 일일은 길동이 제적을 불러 의논 왈, "우리, 비록 녹림(綠林)에 몸을 붙였으나 다 나라 백성이라. 세대로 나라 수토를 먹으니 만일 위태한 시절을 당하면 마땅히 시석을 무릅쓰고 민군을 도울지니 어찌 형법을 힘쓰지 아니하리요? 이제 군기를 도모할 모책이 있으니, 아무날 함경감영 남문 밖의 능소 근처에 시초를 수운하였다가 그날밤 삼경에 불을 놓으되 능소에는 범치 못하게 하라. 나는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기다려 감영에 틀어가 군기와 창고를 탈취하리라." 약속을 정한 후에 기약한 날에 군사를 두 초로 나누어 한 초는 시초를 수운하라 하고, 또 한 초는 길동이 거느려 매복하였다가 삼경이 되매 능소 근처에 화광이 등천하였거늘, 길동이 급히 들어가 관문을 두드리며 소리하되, "능소에 불이 났사오니 급히 구원하옵소서." 감사 잠결에 대경하여 나와서 보니 과연 화광(火光)이 창천한지라. 하인을 거느리고 나가며, 일변 군사를 조발하니 성중이 물 끓는 듯 하는지라. 백성들도 다 능소에 가고 성중이 공허하여 노약자만 남았는지라. 길동이 제적을 거느리고 일시에 달려들어 창곡과 군기를 도적하여 가지고 축지법을 행하여 순식에 동중으로 돌아오더라. 이때에 감사 불을 구하조 돌아오니 창곡 지킨 군사 아뢰되, "도적이 들어와 창고를 열고 군기와 곡식을 도적하여 갔나이다." 하거늘, 크게 놀래어 사방으로 군사를 발포하여 수탐하되 형적이 없는지라. 변괴인 줄 알고 이 연유를 나라에 주문하니라. 이날 밤에 길동이 동중에 돌아와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왈, "우리 이제는 백성의 재물(財物)은 추호(秋毫)도 탈취치 말고, 악 읍 수령과 방백의 준민고택하는 재물을 노략하여 혹 불쌍한 백성을 구제할지니, 이 동호를 '활빈당'이라 하리라." 하고, 또 가로되, "함경감영에서 군기와 곡식을 잃고 우리 종적은 알지 못하매 저간에 애매한 사람이 허다히 상할지라. 내 몸의 죄를 지어 애매한 백성에게 돌려보내면 사람은 비록 알지 못하나 천벌이 두렵지 아니하랴?" 하고, 즉시 감영 북문에 써 붙이되, "창곡과 군기 도적하기는 활빈당 당수 홍길동이라." 하였더라, 일일은 길동이 생각하되, "나외 팔자 무상하여 집을 도망하여 몸을 녹림호걸(綠林豪傑)에 붙였으나 본심이 아니라.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위로 임금을 도와 백성을 건지고 부모에게 영화를 뵈일 것이거늘, 남의 천대를 분히 여겨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차라리 이로 인하여 큰 이름을 얻어 후세(後世)에 전하리라." 하고, 초인 일곱을 만들어 각각 군사 오십 명씩 영거하여 팔도에 분발할새, 다 각기 혼백을 붙여 조화(造化)무궁(無窮)하니 군사 서로 의심하여 어느 도로 가는 것이 참 길동인 줄을 모르더라. 각각 팔도에 횡행하며 불의한 사람의 재물을 앗아 불쌍한 사람을 구제하고, 수령의 뇌물을 탈취하고, 창고를 열어 백성을 진휼하니, 각유소동하여 창고지키는 군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지키나, 길동의 수탄이 한 번 움직이면 풍우 대작하며 운무 자욱하여 천지를 분별치 못하니, 수직하는 군사 손을 묶인 듯이 금제치 못하는지라. 팔도에서 작란하되 명백히 외쳐 왈, "활빈당 장수 홍길동이라." 제명하며 횡행하되 뉘 능히 종적을 잡으리요? 팔도 감사 일시에 장문을 올리거늘, 전하 택견하시니 각각 하였으되, "홍길동 대적이 능히 풍운을 부려 각읍에서 작란하여 아무 날은 이리 이리한 고을의 군기를 도적하고, 아무 때는 아무 고을의 창곡을 탈취하였으되 이 도적의 자취를 잡지 못하여 황공한 사연을 앙달하나이다." 하였거늘, 전하보시고 대경하사, 각도 장문 일자를 상고하시니 길동의 작란친 날이 동월 동일이라. 전하 크게 근심하사 일변 열읍에 하교하사, "무론 사서인하고 만일 이 도적을 잡으면 천금상을 하리라." 조하시고, 팔도에 어사를 내리어, 민심을 안돈하고 이 도적을 잡으라 하시니라. 이 후로는 길동이 혹 쌍교를 타고 다니며 수령을 임의로 출척하고, 흑 창고를 통개하여 백성을 진휼하며, 죄인을 잡아 다스리며, 옥문을 열고 무죄한 사람은 방송하며 다니되, 각 읍이 종시 그 종적을 모르고 도리어 분주하여 일국이 흉흉한지라. 전하 진로하사 가라사대, "이 어떠한 놈의 용맹이 한 날에 팔도에 다니며 이같이 작란하는고? 나라를 위하여 이 놈을 잡을 자가 없으니 가히 한심하도다!" 하시니, 계하에 한 사람이 출반 주왈, "신이 비록 재주 없사오나 일지병을 주시면 홍길동 대적을 잡아 전하의 근심을 덜리이다." 하거늘, 모두 보니 이는 곧 포도대장 이업이라. 전하 기특하게 여기사 정병 일천을 추시니, 이업이 즉시 궐하에 숙배하직하고 즉일 발행할새, 과천을 지나서는 각각 군사를 분발하여 약속을 정하되, 너희는 이러 이러한 곳으로 쫓아 아무날 문경으로 모이라." 하고, 미복으로 행하여 수일 후에 한 곳에 이르니, 날이 장차 저물거늘 주점에 들어 쉬더니, 이윽고 어떠한 소년이 나귀를 타고 동자 수인을 거느리고 들어와 좌정 후에 성명과 거지를 통하고 담화하더니, 그 서생이 차탄 왈, "보천지하가 막비왕토요, 솔토지민이 박비왕신이라. 이제 대적 홍길동이 팔도에 작란하여 민심을 요란케 하매 전하 진로하사 팔도에 행관하여 방곡에 지위하여 잡으라 하시되 종시 잡지 못하니 분완한 마음은 일국이 한가지라. 나같은 사람도 약간 용력이 있어 이 도적을 잡아 나라의 근심을 덜고자 하되 힘이 넉넉치 못하고 뒤를 도울 사람이 없으매 개탄이로이다." 이업이 그 서생의 모양을 보고, 말을 들으매 진실로 의기남자라. 심내에 경복하여, 나아가 손을 잡고 왈, "장하다, 이 말이여! 충의를 겸한 사람이로다! 내 비록 영렬하나 죽기로써 그대의 뒤를 도울 것이니 나와 함께 이 도적을 잡음이 어떠하뇨?" 한대, 그 소년이 또한 위사하고 왈, "그대 말씀이 그러할진대 이제 나와 함께 가 재주를 시험하고 홍길동이 거처하는 데를 탐지하리라." 하니, 이업이 응락하고 그 소년을 따라 함께 깊은 산중으로 가더니, 그 소년이 몸을 솟아 층암절벽 위에 올라 앉으며 왈, "그대 힘을 다하여 나를 차면 그 용력을 가히 알리라." 하거늘, 이업이 생전 기력을 다하여 그 소년을 차니, 그 소년이 몸을 돌아앉으며 왈, "장사로다! 이만하면 홍길동 잡기를 염려치 아니하리로다! 그 도적이 지금 이 산중에 있으니 내 먼저 들어가 탐지하고 올 것이니 그대는 이곳에 있어 나의 돌아오기를 기다리라." 하거늘, 이업이 허락하고 그 곳에 앉아 기다리더니, 이윽하여 형용이 기괴한 군사 수십인이 다 황건을 쓰고 오며 외쳐 왈, "네 포도대장 이업이냐? 우리는 지부대왕의 명을 받아 너를 잡으러 왔노라." 하고, 일시에 달려들어 철쇄로 묶어 가니, 이업이 혼불부신하여 지하인 줄, 인간인 줄 모르고 가더니, 경각에 한 곳에 이르니 의회한 와가가 궁궐같은지라. 이업을 잡아 정하에 꿇리니 전상에서 수죄하는 소리나며 꾸짖어 왈, "네 감히 활빈당 장수 홍길동을 수이 보고 잡기를 자당하느냐? 홍장군이 하늘의 명을 받아 팔도에 다니며 탐관오리와 비리로 취하는 놈의 재물을 앗아 불쌍한 백성을 구휼하거늘, 너회 놈이 나라를 속이고 임금에게 무고하여 옳은 사람들 해코자 하매, 지부에서 너같은 간사한 유를 잡아다가 다른 사람을 경계코자 하시니 한치 말라." 하고, 황건역사를 명하여 왈, "이업을 잡아 풍도에 붙여 영불출세케 하라." 하니, 이업이 머리를 땅에 두드리며 사죄 왈, "과연 홍장군이 각 읍에 다니며 작란하여 민심을 소동케 하시매 국왕이 진로하시기로 신자의 도리에 앉아있지 못하여 발포차로 봉명하고 나왔사오니 인간의 무죄한 목숨을 안서하옵소서." 무수히 애걸하니, 좌우 제인이며 전상에서 그 거동을 보고 크게 웃으며, 군사를 명하여 이업을 해박하여 전상에 앉히고 술을 권하며 왈, "그대 머리를 들어 나를 보라. 나는 곧 주점에서 만났던 사람이요, 그 사람은 곧 홍길동이라. 그대같은 이는 수만 명이라도 나를 잡지 못할지라. 그대를 유인하여 이리 오기는 우리 위엄을 보이게 함이요, 일후에 그대와 같이 범람한 사람이 있거든 그대로 하여금 말리게 함이로다." 하고, 또 두어 사람을 잡아들여 정하에 꿇리고 수죄 왈, "너희들 일변 벨 것이로되 이미 이업 살려 돌려보내기로 너희도 방송하나니 돌아가 일후에는 다시 홍장군 잡기를 생의치 맡라." 하니, 이업이 그제야 인간인 줄 아나 부끄러워 아무 말도 못하고 머리를 숙여 잠잠하더니, 이윽히 앉았다가 잠깐 졸더니, 문득 깨달으니 사지를 요동치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지라. 죽도록 벗어나니 가죽 부대에 들어있는지라. 그 앞에 또 가죽 부대 둘이 달렸거늘, 끌러 보니 어젯밤에 함께 잡혀 갔던 사람이요, 문경으로 보낸 군사라. 이업이 어이없어 웃어 왈, "나는 어떠한 소년에게 속아 이러이러 하였거니와 너희는 어떤 연고냐?" 물으니, 그 군사 서로 웃어 왈, "소인 등은 아무 주점에서 자옵더니 어찌하여 이곳에 이른 줄 알지 못하나이다." 하고, 사면을 살펴보니 장안 북악이더라. 이업 왈, "허망한 밀이로다! 삼가 발구치 맡라." 하더라. 이때에 길동의 수단이 신출귀몰하여 팔도에 횡행하되 능히 알 자가 없는지라. 수령의 간상을 적발하여 어사로 출도하여 선참후계하며, 각 읍 진공뇌물을 낱낱이 탈취하니 장안 백관이 구차막심하더라. 혹 초헌을 타고 장안 대로로 왕래하며 작란하니 상하 이민이 서로 의혹하여 괴이한 일이 많아 일국이 소동하는지라. 상이 크게 근심하시더니 우승상이 주왈, "신이 듣자오니 도적 홍길동은 전 승상 홍모의 서자라 하오니, 이제 홍모를 가두시고, 그 형 이조판서 길현으로 경상감사를 보위하셔서 날을 정하여 그 서제 길동을 잡아 바치라 하오면, 제 아무리 불충무도한 놈이나 그 부형의 낯을 보아 스스로 잡힐까 하나이다." 상이 이 말을 들으시고, 즉시 홍문을 금부에 가두라 하시고 길현을 패초하시니라. 이때에 홍승상이 길동이 한 번 떠난 후로 소식이 없어 거처를 모르며 내두에 무슨 일이 있을까 염려하시더니, 천만몽매 밖에 길동이 나라 노럭지 되어 이렇듯 작란하매, 놀랜 마음에 어찌할 줄 모르고 이 사연을 미리 나라에 품하기도 어렵고 모르는 체 앉아있기도 어려워 일념에 병이 되어 침석에 눕고 일어나지 못하는지라. 장자 길현이 이조판서로 있더니 부친의 병세 위중하시매 말미를 청하여 집에 돌아와 띠를 끄르지 아니하고 병측에 모셔 조참에 나아가지 아니한지 이미 달이 넘은지라. 조정 사기를 알지 못하더니, 믄득 법관이 나와 조명을 전하고 승상을 전옥에 내리우고 판서를 패초하시는지라 일가 황황분주하더라. 판서 궐하에 나가 대죄하니, 상이 가라사대, "경의 서제 길동이 나라의 도적이 되어 범람함이 이 같으니 그 죄를 의논하면 마땅히 연좌할 것이로되 고위안서하나니 이제로 경상도에 내려가 길동을 잡아 홍시 일문지화을 면케하라." 하시니, 길현이 복지 주왈, "천한 동생이 일찍 사람을 죽이고 도망하여 나갔사오매 종적을 모르옵더니 이렇듯 중죄를 지으니 신의 죄 마땅히 베임즉하오며, 신의 아비 나이 팔십에 천한 자식이 도적이 되었사오매 이로 병이 되어 사경에 있사오니, 복원 전하는 하해같은 은덕을 내리사 신의 아비로 하여금 집에 돌아가 조병하게 하시면 신이 내려가서 서제 길동을 잡아 전하에게 바치리다." 하니, 상이 그 효성을 감동하여, 홍모는 집으로 보내어 치병하라 하시고, 길현으로 경상감사를 보위하사 날을 정하여 주시니, 판서 황은 을 백배치사하고 경상도에 내려와 각 읍에 행관하여 방방곡곡에 방서를 붙여 길동을 찾으니, 그 방서에 하였으되, "대법 사람이 복재지간에 나매 오륜 있으니 오륜중에 군부가 으뜸이라. 사람되고 오륜을 버리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니, 이제 너는 지혜와 식견이 범 사람보다 더하되 이를 모르니 어찌 애닯지 아니하리요? 우리 세대로 국은을 입어 자자손손이 녹을 받으니 망극한 마음이 갈충보국(竭忠報國)하더니, 우리에게 미쳐서는 너로 말미암아 역명을 장차 어느 곳에 미칠 줄 모르게 되니 어찌 한심하다 뿐이며, 난신과 적자 어느 대에 없으리요마는 우리 문호에서 날 줄은 진실로 뜻하지 못하였도다. 너의 죄목을 전하 진노(震怒)하시니 마땅히 극형을 행하실 것이로되, 갈수록 성은이 망극하사 죄를 더하지 아니하시고 나를 명하사 너를 잡으라 하옵시니 망극한 마음 도리어 황공하며, 팔십 노친이 백수모년에 너로 하여금 주야(晝夜) 우려하시던 중에 네 이렇듯 변괴를 지어 죄를 나라에 얻으니 놀라신 마음에 병이 되어 이제 눕고 장차 일어나지 못하게 되시니, 부친 만일 너로 인하여 세상을 버리시면 네 살아서도 역명을 입고, 죽어 지하에 간들 천추만대에 불충불효지죄를 유전할지라. 또한 그 남은 우리 일문이 원통치 아니하랴? 네 어찌 넉넉한 소견으로 이를 생각지 못하느냐? 네 이 죄명을 가지고 세상에 용납할진대 사람은 비록 안서하나 소소한 천벌이 사정이 있으랴? 이제 마땅히 천명을 순수하여 조정의 처분을 기다릴 뿐이니 또 어찌하리요? 네 일찍 돌아오기를 바라노라." 하였더라. 감사 도임 후에 공사를 폐하고, 전하의 근심과 부친의 병세를 염려하여 수심으로 날을 보내며 행여 길동이 올까 바라더니, 일일은 하인이 아뢰되, "어떠한 소년이 밖에 와 통지한다." 하거늘, 즉시 맞아 들이니, 그 사람이 섬 위에 엎드려 죄를 청하는지라. 감사 괴히 여겨 그 연고를 물으니 대왈, "형장은 어찌 소제 길동을 모르시나이까?" 하거늘, 감사 경희중에 나가서 길동의 손을 잡고 이끌고 방에 들어와 좌우를 치우고 한숨지으며 왈, "이 무상한 아이야. 네 어려서 집을 떠난 후에 이제야 만나니 반가운 마음이 도리어 슬프도다! 네 저러한 풍도와 재주로 어찌 이렇듯 불측한 일을 즐겨하여 부형의 은애를 끊케 하느냐? 향곡의 우미한 백성들도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비에게 효도할 줄 아는지라. 너는 성정이 총명하고 재주 높아 범인과 크게 다르니 마땅히 더욱 충효를 숭상할 사람으로서 몸을 그른 데 버려 충효를 당하여는 범인보다 못하니 어찌 한심치 아니하리요? 그 부형되는 자가 그같은 고명한 자제를 두었다 하여 심독회자부하더니 도리어 부형에게 근심을 끼치느냐? 네 이제 충의를 취하여 사지에 돌아가도 그 부형은 싫어하는 마음이 있을지라. 하물며 역명을 무릅쓰고 죽게 되니 그 부형의 마음이야 다시 어떠하다 하랴! 국법이 사정이 없으니 아무리 구원코자 하여도 어찌 못하고 위하여 서러워한들 무슨 효험이 있으랴? 너는 부형의 낯을 보아 죽기를 감심하고 왔으나 나는 두렵고 비척한 마음이 너 아니 본 때보다 더한지라! 너는 네 지은 죄니 하늘과 사람을 원망치 못하여도, 부친과 나는 목전의 너를 죽이는 줄로 명도를 탓할 뿐이라. 네 어찌 이를 깨닫지 못하고 이렇듯 범람한 죄를 지었느냐? 천추를 역수하여도 생리사별이 오늘밤에 비치 못하리로다!" 하니, 길동이 체읍 주왈, "이 불초한 동생 길동이 본래 부형의 훈계를 듣지 말고자 함이 아니오라, 팔자 기박하여 천생됨을 평생 한일 뿐더러 가중에 시기하는 사람을 피하여 정처없이 다니다가 천망몽매 밖에 몸이 적당에 빠져 잠시 생애를 붙였더니 죄명이 이에 미치었사오니 명일에 소제 잡은 여유를 장계하옵고, 소제를 결박하여 나라에 바치옵소서." 하며, 담화로 날을 새우고 평명에 감사 길동을 철쇄로 결박하여 보낼새 참연히 낯빛을 고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더라. 이때에 팔도에서 다 각기 길동을 잡았노라 장문하고 나라에 올리니 사람마다 의혹하고 도로 분주하여 구경하는 사람이 길이 메여 그 수를 알지 못하더라. 전하 친림하사 여덟 길동을 국문하실새, 여덟 길동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네가 무슨 길동이냐? 내가 참 길동이로다." 하고, 서로 팔을 뽐내며 한데 어우러져 뒹구니 도리어 일장 가관이더라. 만조 제신이며 좌우 나장이 그 진위를 알지 못하는지라. 제신이 주왈, "지자는 막여부오니 이제 홍모를 패초하사 그 서자 길동을 알아들이라 하옵소서." 상이 옳게 여기사 즉시 홍모를 부르시니 승상이 조명을 이어 복지하니, 상이 가라사대, "경이 일찍이 한 길동을 두었다 하더니 이제 여덟이 되었으니 어떠한 여고인지 경이 자세히 가리어 형소를 착란케 말라." 하시니, 승상이 체읍 주왈, "신이 행실을 지키지 못하여 천첩을 가까이 한 죄로 천한 자식을 두어 전하의 근심이 되옵고 조정이 분운하오니, 신의 죄 만 번 죽어도 마땅하오이다." 하며, 백수에 눈물이 이음차 길동을 꾸짖어 왈, "네 아무리 불충불효한 놈이라도 위로 성상이 친림하시고, 버금 아래로 아비 있거늘, 지척 천위하에 군부를 기롱하니 불측한 죄 더욱 큰지라. 빨리 형벌에 나아가 천명을 순수하라.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네 목전에 내 먼저 죽어 성상의 진로하시는 마음을 만분지일이라도 덜으리라." 하며 주왈, "신의 천자 길동은 왼 편 다리에 붉은 점 일곱이 있사오니 이를 증험하여 적발하옵소서." 하니, 여덟 길동이 일시에 다리를 걷고 일곱 점을 서로 자랑하는지라. 승상이. 그 진위(眞僞)를 가리지 못하고 우구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인하여 기절하거늘, 상이 놀래시사 급히 좌우를 명하여 구원하시되 회생할 길이 없더니, 여덟 길동이 자기 낭중에서 대추같은 환약 두 개씩 내어 서로 다투어 승상의 입에 넣으니 이시한 후에 회생하는지라. 여덟 길동이 울며 아뢰되, "신의 팔자 무상하여 홍모의 천비의 배를 빌어 낳사오매, 아비와 형을 임의로 부르지 못하옵고, 겸하여 가중에 시기하는 자가 있사와 보전치 못하오매, 몸을 산림에 붙여 초목과 함께 늙자 하였더니, 하늘이 밉게 여기사 적당에 빠졌사오나, 일찌기 백성의 재물은 추호도 취한 바 없고 수령의 뇌물과 불의한 놈의 재물을 앗아 먹고, 혹간에 나라 곡식을 도적하였사오나 군부가 일체오니 자식이 아비것 먹기로 도적이라 하오리까? 어린 자식이 어미 젖 먹는 일체로소이다. 이는 도무지 조정 소인이 천총을 가리워 무소한 죄요, 신의 죄는 아니로소이다." 상이 진로하사 꾸짖어 가라사대, "네 무고한 재물은 취치 아니했다 하면, 합천사 중을 속이고 그 재물을 도적하고, 또 능소에 불을 놓고 군기를 도적하니, 이만 큰 죄 또 어디 있느냐?" 길동 등이 복주 왈, "불도라 하옵는 것이 세상을 속이고 백성을 혹하게 하여, 갈지 아니하고 백성의 곡식을 취하며, 짜지 아니하고 백성의 의복을 속여 부모의 발부를 상하여 오랑캐 모양을 숭상하며, 군부를 버리고 부세를 도망하오니 이에 더한 불의지사 없사오며, 군기를 가져가옵기는 신 등이 산중에 처하여 병법을 익히다가 만일 난세를 당하옵거든 시석을 무릅써 임금을 도와 태평을 이루고자 함이오며, 불을 놓으되 능소에는 아니 가게 하였사오며, 신의 아비 세대로 국록을 받자와 갈충보국(竭忠報國)하여 성은을 만분지일(萬分之一)이라도 갚지 못할까 하옵거늘 신이 어찌 외람되이 범람한 마음을 두오리까? 죄를 의논하여도 죽기에 가지 아니할 터이로되, 전하께서 조신의 무소를 들으시고 이렇듯이 진노(震怒)하시니 신이 형벌을 기다리지 아니하옵고 먼저 스스로 죽사오니 노를 더옵소서." 하고, 여덟 길동이 한데 어우러져 죽는지라. 좌우 괴히 여겨 자세히 보니 참 길동은 간데없고 초인 일곱 뿐이더라. 상이 길동의 기망한 죄를 더욱 노하사, 경상감사에게 조서를 내리어 길동 잡기를 더욱 재촉하시는지라. 이때에 경상감사 길동을 잡아 올리고 심회 둘 곳이 없어 공사를 전폐하고 경사 소식을 기다리더니, 문득 교지를 내렸거늘, 북귈을 향하여 사배 후에 택견하니, 교지에 가라사대, "길동을 잡지 아니하고 초인을 보내어 형부를 착란케 하니 허망기군지죄를 면치 못할지라. 아직 죄를 의논치 아니하나니 십일 내로 길동을 잡으라." 하시고 사의 엄절한지라. 감사 황공무지하여 사방에 지위하고 길동을 찾더니, 일일은 월야를 당하여 난간에 비겼더니, 선화당 들보 위에서 한 소년이 내려와 복지(伏地)재배(再拜)하거늘, 자세히 보니 이 곧 길동이라. 감사 꾸짖어 왈, "네 갈수록 죄를 키워 구태여 화를 일문에 끼치고자 하느냐? 즉금 나라에서 엄명이 막중하시니 너는 나를 원치 말고 일찍 천명을 순수하라." 길동이 부복 대왈, "형장은 염려치 마시고 명일 소제를 잡아 보내시되, 장교 중에 부모와 처자 없는 자를 가리어 소제를 압영하시면 좋은 모책이 있나이다." 감사 그 연고를 알고자 한대 길동이 대답치 아니하니, 감사 그 소견을 알지 못하나 장차를 제 말과 같이 별택하고 길동을 영솔하여 경사로 올려 보내니라. 조정에서 길동이 잡히어 온다는 말을 듣고 도감포수 수백을 남대문에 매복하여 왈, "길동이 문 안에 들거든 일시에 총을 놓아 잡으라." 분부하니라. 이때에 길동이 풍우같이 잡히어 오더니 어찌 이 기미를 모르리요. 동작리를 건너며 '비우자' 셋을 써 공중에 날리고 오더니, 길동이 남대문 안에 드니 좌우의 포수 일시에 총을 놓으되 총구에 물이 가득하여 할 수 없이 설계치 못하니라. 길동이 궐문 밖에 다달아 영거한 장차를 돌아보아 왈, "너희 나를 영거하여 이곳까지 왔으니 그 죄 죽기는 아니하리라." 하고, 몸을 날려 수레 아래 내려 완완히 걸어 가는지라. 오군문 기병이 말을 달려 길동을 쏘려 하되, 길동은 한양으로 가고 말은 아무리 채쳐 몬들 축지하는 법을 어찌 하리요. 만성 인민이 그 신기한 수단을 측량할 이 없더라. 이날 사문에 글을 써 붙였으되, "흥길동의 평생소원이 병조판서이오니 전하 하해(河海)같은 은택을 드리우사 소신으로 병조판서 유지를 주시면 신이 스스로 잡히오리다." 하였더라. 이 사연을 묘당에서 의논할새, 혹자는 "저의 원을 풀어주어 백성의 마음을 안돈하자." 하고. 혹자는 왈, "제 무도불충한 도적으로 나라에 척촌지공은 새로이 만민을 소동케 하고 성상의 근심을 끼치는 놈을 어찌 일국 대사마를 주리요?" 하여 의논이 분운하여 결단치 못하였더니, 일일은 동대문 밖의 유벽처에 가서 육갑신장을 호령하여, "진세를 이루라." 하니, 이윽고 두 집사 공중에서 내려와 국궁하고 좌우에 서니, 난데없는 천병만마 아무 곳으로부터 오는 줄 모르되, 일시에 진을 이루고 진중에 황금단을 삼층으로 묻고 길동을 단상에 모시니, 군용이 정제하고 위엄이 추상같더라. 황건역사를 호령하여, "조정에서 길동을 참소하는 자의 심복을 잡아 들이라." 하니, 신장이 이 영을 듣고 이윽한 후에 십여 인명을 철쇄로 결박하여 들이니, 비유컨대, 소리개가 병아리 채오는 모양이더라. 단하에 꿇리고 수죄 왈, "너희는 조정의 좀이 되어 나라를 속여 구태여 홍길동 장군을 해코자 하니 그 죄 마땅히 벨 것이로되 인명이 가긍하기로 안서하노라." 하고, 각각 군문 곤장 삼십도씩 쳐 내치니 겨우 죽기를 면한지라. 길동이 또 한 신장을 분부 왈, "내 몸이 조정에 처하여 법을 잡았으면 먼저 불법을 없애어 각도 사찰을 훼패하렸더니, 이제 오래지 아니하여 조선국을 떠날지라. 그러하나 부모국이라 만리타국(萬里他國)에 있어도 잊지 못할지라. 이제로 각 사에 가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중놈을 일제히 잡아가고, 또한 재상가의 자식이 세를 끼고 고잔한 백성을 속여 재물을 취하고, 불의(不義)한 일이 많으며 마음이 교만하되 구중이 깊어 천일이 복분에 비추오지 못하고, 간신이 나라의 좀이 되어 성상의 총명을 가리우니 가히 한심한 일이 허다한지라. 장안의 호당지도를 낱낱이 잡아 들이라." 하니, 산장 이 명을 듣고 공중으로 날아 가더니, 이시한 후에 중놈 백여 명과 경화자재 십여 인을 잡아 들이는지라. 길동이 위엄을 베풀고 호령을 높혀 각각 수죄 왈, "너희는 다시 세상을 보지 못하게 할 터이로되, 내 몸이 나라의 조명을 받아 국법을 잡은 바 아니기로 고위 안서하거니와, 일후에 만일 고치지 아니하면 너희 비록 수만 리 밖에 있어도 잡아다가 베리라." 하고, 엄형 일차에 진문 밖에 내치니라. 길동이 우양을 잡아 군사를 호궤하고, 징용을 정제하여 훤화를 금단하니, 창천만리에 백일이 고요하고, 팔진 풍운에 호령이 엄숙한지라. 길동이 술을 내어 반취한 후에 칼을 잡아 춤을 추니, 검광이 분분하여 햇빛을 희롱하고, 무수는 표표하여 공중에 날리는지라. 일지석의라. 진세를 파하여 신장을 각각 돌려보내고, 몸을 날려 활빈당 처소로 돌아 오니라. 이 후로는 다시 길동을 잡는 영이 급하되 종적을 보지 못하고, 길동은 적군을 보내어 팔도에서 장안으로 가는 뇌물을 앗아 먹으며, 불상한 백성이 있으면 창곡을 내어 진휼하며 신출귀몰하는 재주를 사람은 측량치 못하더라. 전하 근심하사 탄왈, "이 놈의 재주는 인력으로 잡지 못할지라. 민심이 이렇듯 요동하고 그 인재 기특한지라. 차라리 그 재주를 취하여 조정에 두리다." 하시고, 병조판서 직첩을 내어 걸고 길동을 부르시니, 길동이 초헌을 타고 하인 수십 명을 거느리고 동대문으로부터 오거늘, 병조 하인이 옹위하여 궐하에 이르러 숙배하고 가로되, "천은이 망극하여 분외의 은택에 대사마에 오르오니 망극하온 신의 마음이 성은(聖恩)을 만분지일(萬分之一)도 갚지 못할까 황공하나이다." 하고 돌아가더니, 이 후로는 길동이 다시 작란하는 일이 없는지라. 각 도의 길동 잡는 영을 거두시더라. 삼년 후에 상이 월야를 당하사 환자를 거느리시고 월색을 구경하시더니, 하늘로서 한 선관이 오운을 타고 내려와 복지하는지라. 상이 놀라사 가라사대, "귀인이 누지에 임하여 무슨 허물을 이르고자 하나이까?" 하신대, 그 사람이 주왈, "소신은 전 병조판서 홍길동이로소이다." 상이 놀라사 길동의 손을 잡으시고 왈, "그대 그간은 어디를 갔었느냐?" 길동이 주왈, "산중에 있사옵더니, 이제는 조선을 떠나 다시 전하 뵈올 날이 없사오매 하직차로 왔사오며, 전하는 넓으신 덕택에 정조 삼천 석만 주시면 수천 인명이 살아나겠사오니 성은을 바라나이다." 상이 허락하시고 왈, "네 고개를 들라. 얼굴을 보고자 하노라." 길동이 얼굴을 들고 눈은 뜨지 아니하여 왈, "신이 눈을 뜨오면 놀라실까 하여 뜨지 아니하나이다." 하고, 이윽히 모셨다가 구름을 타고 가며 하직 왈, "전하의 덕하에 정조 삼천 석을 주시니 성은이 갈수록 망극하신자라. 정조를 명일 서강으로 수운하여 주옵소서." 하고 가는지라. 상이 공중을 향하여 이윽히 바라보시며 길동의 재주를 못내 차석하시고, 이튿날 대동당상에게 하교하사 "정조 삼천 석을 서강으로 수운하라." 하시니 조신이 연고를 알지 못하더라. 정조를 서강으로 수운할새, 강상으로부터 신척 둘이 떠오더니 정조 삼천 석을 배에 싶고 가며 길동이 대궐을 향하여 사배하직하고 아무 데로 가는 줄 모르더라. 이날 길동 삼천 적군을 거느려 망망대해로 떠나더니, 성도라 하는 도중에 이르러 창고를 지으며, 궁실을 지어 안돈하고, 군사로 하여금 농업을 힘쓰고, 각국에 왕래하여 물화를 통하며, 무예를 숭상하여 병법을 가르치니, 삼년지내에 군기 군량이 산같고, 군사 강하여 당적할 이 없더라. 일일은 길동이 제군에게 분부 왈, "내 망당산에 들어가 살촉에 바를 약을 캐어 오리라." 하고 떠나 낙천현에 이르니, 그 땅에 만석군 부자 있으되 성명은 백용이라. 남자 없고 일찍이 딸을 두었으니, 덕용이 겸전하여 침어낙안지상이요, 폐월수화지태라. 고서를 섭렵하여 이두의 문장을 가졌으며, 색은 장강을 비웃고, 사덕은 태사를 봉받아 일언 일동이 예절이 있으니, 그 부모 극히 사랑하여 아름다운 사위를 구하더니, 나이 십팔에 당하여 일일은 풍우대작하여 지척을 분별치 못하게 하고, 뇌성벽력이 진동하더니, 백소저가 간 곳이 없는지라. 백용의 부처가 경황실색하여 천금을 흩어 사방으로 수탐하되 종적이 없는지라. 백용이 실성한 사람이 되어 거리로 다니며 방을 붙여 이르되, "아무 사람이라도 자식의 거처를 알아 지시하면 인하여 사위를 삼고 가산을 반분하리라." 하더라. 이때에 길동이 망당산에 들어가 약을 캐더니, 날이 저문 후에 방황하며 향할 바를 알지 못하더니, 문득 한 곳을 바라보니 불빛이 비치이며 여러 사람의 두런거리는 소리 나거늘, 반겨 그 곳으로 찾아가니 수백 무리 모여 뛰놀며 즐기는지라. 자세히 보니 사람은 아니요 짐승이로되 모양은 사람같은지라. 심내에 의혹하여 몸을 감추오고 그 거동을 살피니, 원래 이 짐승은 이름이 을동이라. 길동 가만히 활을 잡아 그 상좌에 앉은 장수를 쏘니 정히 가슴에 맞는지라. 을동이 대경하여 크게 소리를 지르고 달아나거늘, 길동이 맞쫓아 잡고자 하다가 밤이 이미 깊었으매 소나무를 의지하여 밤을 지내고, 익일 평명에 살펴보니 그 짐승이 피를 흘렸거늘, 피 흔적을 따라 수리를 들어가니 큰 집이 있으되 가장 웅장한지라. 문을 두드리니 군사 나와 길동을 보고왈 "그대 어떠한 사람이관대 이 곳에 왔느뇨?" 길동이 대왈, "나는 조선국 사람으로 이 산중에 약캐러 왔다가 길을 잃고 이곳에 왔노라." 하니, 그 짐승이 반기는 빛이 있어 가로되, "그대 능히 의술을 아느냐? 우리 대왕이 새로이 미인을 얻고 어젯날 잔치하며 즐기더니, 난데없는 화살이 들어와 우리 대왕의 가슴을 맞혀 지금 사경에 이르렀는지라. 오늘날 다행히 그대를 만났으니 만일 의술을 알거든 우리 대왕의 병세를 회복케 하라." 길동이 대왈, "내 비록 편작의 재주는 없거니와 좀체 병에는 의심치 아니하노라." 하니, 그 군사 크게 기뻐하여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윽하여 청하거늘, 길동이 들어가 좌정 후에 그 장수 신음하여 왈, "복의 명이 조모를 보전치 못하더니 천우신조하사 선생을 만나오니 선약을 가르쳐 잔명을 구제하옵소서." 길동이 그 상처를 살피고 왈, "이는 어렵지 아니한 병이라. 내게 좋은 약이 있으니 한 번 먹으면 비단 상처에 이할 뿐 아니라, 백병이 소제하고 장생불사하리라." 한 대, 을동이 대희 왈, "복이 스스로 몸을 삼가지 못하여 자취지환을 당하여 명이 황천에 돌아가게 되었더니 천우신조하사 명의를 만났사오니, 선생은 급히 선약을 시험하소서." 길동이 금낭을 열고 약 한 봉지를 내어 술에 타 주니 그 짐승이 받아 마시더니, 이윽고 몸을 뒤치며 소리를 크게 질러 왈, "내가 너로 더불어 원수 지은 일이 없거든 무슨 일로 나를 해하여 죽이려 하느냐?" 하며, 제 동생 등을 불러 왈, "천만몽매 외에 흉적을 만나 명을 끊기게 되니 너희 등은 이놈을 놓치지 말고 나의 원수를 갚으라." 하고, 인하여 죽으니, 모든 율동이 일시에 칼을 들고 내달아 꾸짖어 왈, "내 형을 무슨 죄로 죽이느냐? 내 칼을 받아라." 하거늘, 길동이 냉소 왈, "제 명이 그 뿐이라. 내 어찌 죽였으리요?" 한대, 을동이 대로하여 칼을 들어 길동을 치려 하거늘, 길동이 대적코자 하나 손에 척촌지검이 없어 사세 위급하매 몸을 날려 공중으로 달아나니, 을동이 본디 누만년 묵은 요귀라 풍운을 부리고 조화무궁한지라. 무수한 요괴 바람을 타고 올라오니, 길동이 할 수 없어 육정육갑을 부르니, 문득 공중으로부터 무수한 신장이 내려와 모든 을동을 결박하여 땅에 꿇리니, 길동이 그 놈의 잡은 칼을 앗아 무수한 을동을 다 베고, 바로 들어가 여자 삼인을 죽이려 하니, 그 여자 울며 왈, "첩 등은 요귀 아니요, 불행하게 요귀에게 잡혀 와 죽고자 하나 틈을 얻지 못하여 죽지 못하였나이다." 길동이 그 여자의 성명을 물으니, 하나는 낙천현 백용의 여자요, 또 두 여자 정통 양인의 여자라. 길동이 세 여자를 데리고 돌아와 백용을 찾아 이 일을 설화하니, 백용이 평생 사랑하던 여자를 찾으매 만심환희하여 천금으로 대연을 배설하고, 향당을 모아 홍생으로 사위를 삼으니, 인인이 칭찬하는 소리 진동하더라. 또 정통 양인이 홍생을 청하여 왈,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니 각각 여자로 시첩을 허(許)하나이다." 길동이 나이 이십이 되도록 봉황의 쌍유를 모르다가 일조에 삼부인숙녀를 만나 친근하니 은정이 교칠하여 비할 데 없더라. 백용 부처 사랑함을 이기지 못하더라. 인하여 길동이 삼 부인과 백용 부처이며 일가제족을 다 거느리고 제도로 들어가니, 모든 군사 강변에 나와 맞아 원로에 평안히 행차하심을 위로하고, 호위하여 제도중에 들어와 대연을 배설하고 즐기더라. 세월이 여류하여 제도에 들어온 지 거의 삼 년이라. 일일은 길동이 월색을 사랑하여 월하에 배회하더니, 문득 천문을 살피고 그 부친 졸하실 줄 알고 길게 통곡하니, 백씨 문왈, "낭군이 평생 슬퍼하심이 없더니 오늘 무슨 일로 낙루(落淚)하시나이까?" 길동이 탄식 왈, "나는 천지간 불효자라. 나는 본디 이 곳 사람이 아니라, 조선국 홍승상의 천첩소생이라. 집안의 천대 자심하고, 조정에도 참여치 못하매, 장부 울회를 참지 못하여 부모를 하직하고 이곳에 와 은신하였으나 부모의 기후를 사모하더니, 오늘날 천문을 살피니 부친의 유명하신 명이 불구에 세상을 이별하실지라. 내 몸이 만리 외에 있어 미처 득달치 못하게 되니 생전의 부친 안전에 뵙지 못하게 되오매 그것을 슬퍼하노라." 백씨 듣고 내심에 탄복 왈, "그 근본을 감추지 아니하니 장부로다!" 하고, 재삼 위로하더라. 이때에 길동이 군사를 거느리고 일봉산에 들어가 산기를 살펴 명당을 정하고, 날을 가리어 역사를 시작하여 좌우 산곡과 분묘를 능과 같이 하고 돌아와 모든 군사를 불러 왈, "모월 모일 대선 한척을 준비하여 조선 서강에 와 기다리라." 하고, "부모를 모셔 올 것이니 미리 알아 거행하라." 한대, 모든 군사 청령하고 물러가 거행하니라. 이날 길동이 백씨와 정통 양인을 하직하고 소선 일척을 재촉하여 조선으로 향하니라. 각설, 이때에 승상이 연장 구십에 졸연 득병하여 추구월 망일 더욱 중하여 부인과 장자 길현을 불러 가로되, "내 나이 이제 구십이라 이제 죽은들 무슨 한이 있으리요마는, 길동이 비록 천첩소생이나 또한 나의 골육이라. 한 번 문외에 나가매 존망을 알지 못하고 임종에 상면치 못하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요? 나 죽은 후이라도 길동의 모를 대접하여 편케 하며, 부디 후회를 생각하여 만일 길동이 들어오거든 천비소생으로 알지 말고 동복형제같이하여 부모의 유언을 저버리지 말라." 하시고, 길동의 모를 불러 가까이 앉으라 하여 손을 잡고 눈물를 흘려 왈, "내 너를 잊지 못함은 길동이 나간 후에 소식이 돈절하여 사생존망을 모르니 내 마음에 이같이 사념이 간절하거든 네 마음이야 더욱 측량하랴? 길동은 녹녹한 인물이 아니라. 만일 살아있으면 너를 저버릴 바 없으리라. 부디 몸을 가볍게 버리지 말고 안보하여 좋게 지내라. 내 황천에 돌아가도 눈을 감지 못하리로다." 하시고, 인하여 별세하시니, 부인이 기절하시고, 좌우 다 망극하여 곡성이 진동하더라. 길현이 슬픈 마음을 적제치 못하여 눈물이 비오듯하며, 부인을 붙들어 위로하여 진정하신 후에 초상등절을 예로써 극진히 차릴새, 길동의 모는 더욱 망극 애통하니 그 정상이 잔잉하여 차마 보지 못하더라. 인하여 졸곡 후에 명산지지를 구하여 안장하려 하고 각처에 사람을 놓아 여러 지관을 데리고 산지를 사방으로 구하되 마땅한 곳이 없어 근심하더니, 이때에 길동이 서강에 다달아 배에서 내려 승상댁에 이르러 바로 승상 영위전에 들어가 복지(伏地)통곡(痛哭)하니, 상인이 자세히 보니 이 곧 길동이라. 대성통곡(大聲痛哭) 후에 길동을 데리고 바로 내당에 들어가 부인께 고하니, 부인이 대경대희하여 길동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왈, "네 어려서 집을 떠나 이제야 들어오니 석사를 생각하면 도리어 참 괴한지라. 그러나 네 그사이 삼사년은 종적을 아주 끊어 어디로 갔었더나? 대감이 임종시 말씀이 이러이러하시고 너를 잊지 못하며 돌아가시니 어찌 원통치 아니하리요?" 하시고, 그 어미를 부르시니, 그 모 길동 온 줄 알고 급히 들어와 모자(母子) 서로 대하니 흐르는 눈물을 서로 금치 못하더라. 길동이 부인과 그 모친(母親)을 위로한 후 그 형장을 대하여 왈, "소제 그간은 산중(山中)에 은거(隱居)하여 지리를 잠심하여 대감의 말년유택을 정한 곳이 있사옵더니, 알지 못하겠구나! 이미 소점이 있사옵나이까?" 그 형이 이 말을 듣고 더욱 반겨 아직 정하지 못한 말을 설화하고, 제인이 모여 밤이 새도록 정회를 풀고, 이튿날 길동이 그 형을 모시고 한 곳에 이르러 가르켜 왈, "이곳이 소제의 정한 땅이로소이다." 길현이 사면을 살펴보니, 중중한 석각이 험악하고, 누누한 고총이 수없는지라. 심내에 불합하여 왈, "소제의 높은 소견을 알지 못하되 내 마음은 이곳에 모실 생각이 없으니 다른 땅을 점복하라." 길동이 거짓 탄식 왈, "이땅이 비록 이러하오나 누대 장상지지어늘 형장의 소견이 불합하오니 개탄이로다!" 하고, 도끼를 들어 수척을 파하니, 오색 기운이 일며 청학 한쌍이 날아가는지라. 그 형이 이 거동을 보고 크게 뉘우쳐 길동의 손을 잡고 왈, "우형의 소견 절어대지를 잃었으니 어찌 애닯지 아니하니요? 바라나니 다른 땅이 없느냐?" 길동이 가로되, "이에서 한 곳이 있어도 길이 수천 리라 그것을 염려하나이다." 길현이 왈, "이제 수만 리라도 부모의 백골이 평안할 곳이 있으면 그 원근을 취사치 아니하리라." 한대, 길동이 함께 집에 돌아와 그 말씀을 설화하니, 부인이 못내 애달아 하시더라. 날을 가리어 대감 영위를 모시고 도중으로 향할새, 길동이 부인께 여쭈오되, "소자 돌아와 모자지정을 다 펴지 못하옵고, 또 대감 영위에 조석공양이 난처하오니 어미와 함께 이번 길에 함께 하오면 좋을까 하나이다." 부인이 허락하시거늘, 직일 발행하여 서강에 다다르니 제군이 대선 한척을 대후하였는지라. 상구를 배에 모신 후에 복태 노복을 다 물리치고 그 형장과 어미를 모셔 만경창파로 떠나가니 지향을 알지 못하더라. 수일 후에 도중에 이르러 상구를 청상에 모시고, 날을 가리어 일봉산에 올라 장례를 모실새, 산역하는 거동이 능묘같은지라. 그 형장이 너무 참람함을 놀라니, 길동 왈, "형장은 의심치 마옵소서. 이 곳은 조선 사람이 출입하는 곳이 아니며 그 자식되는 자가 부모를 후장하여서 죄될 것이 없나이다." 하더라. 안장 후에 도중에 돌아와 수월 머물더니, 그 형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거늘, 길동을 길을 차릴새, 이별을 고하여 왈, "형장을 다시 볼 날이 막연하온지라. 어미는 이미 이 곳에 왔사오니 모자 정리에 차마 떠나지 못하오며, 형장은 대감을 생전에 모셨사오니 한할 바가 없는지라. 사후 향화는 소제가 받들어 불효지죄를 만불지일이나마 덜까 하나이다." 하고, 함께 산소에 올라 하작하고 내려와 길동의 모와 백씨를 이별할새, 피차에 다시 만남을 당부하고 못내 연연하더라. 소선 일척을 제촉하여 고국으로 향할새, 길동의 손을 잡고 왈, "슬프다! 이별이 오랠지라. 소제는 나의 사정을 살펴 생전에 대감 산소를 다시 보게 하라." 하며 하염없이 눈물이 옷깃을 적시는지라. 길동이 또한 눈물지며 왈, "형장은 고국에 돌아가 부인을 모시고 만세무강하옵소서. 다시 모일 기약을 정치 못하오니, 남북 수천 리에 나뉘어 강금의 이불이 차고, 척령의 나래 고단하매, 속절없이 북으로 가는 기러기를 탄식하며, 등으로 흐르는 물을 바랠 따름이오니, 생리사별을 당하여 그 정회는 피차 한가지라. 아무리 철석간장인들 차마 견디리요?" 하며, 두 줄 눈물이 말소리를 쫓아 떨어지니, 진실로 만고상심 한 마디라. 강수 위하여 소리를 그치고, 행운이 머무는 듯하여 차마 서로 떠나지 못하더라. 강잉하며 서로 위로하고, 배를 띄워 수월 만에 고국에 돌아와 모부인께 뵈옵고, 산처 사연이며 천후수말을 낱낱이 설화할새, 부인도 못내 차석하시더라. 차설, 길동이 그 형을 이별 후에 제군을 권하여 농업을 힘쓰고, 군법을 일삼으며, 그럭저럭 삼년초토를 지내매, 양식이 넉넉하고, 수만 군졸이 무예와 기보하는 법이 천하에 최강하더라. 근처에 한 나라가 있으니 이름은 율도국이라. 중국을 섬기지 아니하고, 수십 대를 전자전손하여 덕화유행하니,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넉넉하거늘, 길동이 제군과 의논 왈, "우리 어찌 이 도중만 지키어 세월을 보내리요? 이제 율도국을 치고자 하니 각각 소견에 어떠하냐?" 제인이 즐겨 원치 아니할 이 없는지라. 즉시 택일하여 출사할새, 삼호걸로 선봉을 삼고, 김인수로 후장군을 삼고, 길동 스스로 대원수되어 중영을 총독하니, 기병이 오천이요, 보졸이 이만이라. 곰고함성은 강상이 진동하고, 기치검극은 일월을 가리웠더라. 군사를 재촉하여 율도국으로 향하니, 이른바 당할 자가 없어 단사호장으로 문을 열어 항복하는지라. 수월지간에 칠십여 성을 정하니 위엄이 일국에 진동하는지라. 도성 오십 리 밖에 진을 치고 율도왕에서 격서를 전하니 그 글에 하였으되, "의병장 홍길동은 삼가 글월을 율도왕 좌하에 드리나니, 나라는 한 사람이 오래 지키지 못하는지라. 시고라 성탕은 하걸을 치고, 무왕은 상주를 내치시니, 다 백성을 위하여 난대를 평정하는 바라. 이제 의병 이십만을 거느려 칠십여성을 항복받고 이에 이르렀으니, 왕은 대세를 당할 듯하거든 자웅을 결단하고, 세궁하거든 일찍 항복하여 천명을 순수하라." 하고, 다시 위로 왈, "백성을 위하여 쉬 항서를 올리면 일방 봉작으로 사직을 망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이때에 율도왕이 불의에 이름없는 도적이 칠십여 주를 항복받으매, 향하는 곳 마다 당적치 못하고, 도성을 범하매 비록 지혜있는 신하라도 위하여 꾀하지 못하더니, 문득 격서를 들이매 만조제신이 아무러할 줄 모르고 장안이 진동하는지라. 제신이 의논 왈, "이제 도적의 대세를 당치 못할지라. 싸우지 말고 도성을 굳게 지키고, 기병을 보내어 기 치중군량 수운하는 길을 막으면 적병이 나아와 싸움을 어찌 못하고, 또 물러갈 길이 없사오면, 수월이 못되어 적장의 머리를 성문에 달리이다." 의논이 분운하더니, 수문장이 급고 왈, "적병이 벌써 도성 십 리 밖에 진을 쳤나이다." 율도왕이 대분하여 정병 십만을 조발하여 친히 대장이 되어 삼군을 재촉하여 호수를 막아 진을 치니라. 이때에 길동이 형지를 수탐한 후에 제장과 의논 왈, "명일 오시면 율도왕을 사로잡을 것이니 군령을 어기지 말라." 하고 제장을 분발할새, 삼호걸을 불러 왈, "그대는 군사 오천을 거느려 양관 남편에 복병하였다가 호령을 기다려 이리이리 하라." 하고, 후군장 김인수를 불러 왈, "그대는 군사 이만을 거느려 이리이리 하라." 하고, 또 좌선봉 맹춘을 불러 왈, "그대는 철기 오천을 거느려 율왕과 싸우다가 거짓 패하여 왕을 인도하여 양관으로 달아나다가 추병이 양관 어귀에 들거든 이리이리 하라." 하고, 대장기치와 백모황월을 주니라. 이튿날 평명에 맹춘이 진문을 크게 열고 대장기치를 진전에 세우고 외쳐 왈, "무도한 율도왕이 감히 천명을 항거하니 나를 당적할 재주 있거든 빨리 나와 자웅을 결단하라." 하며 진문에 치돌하며 재주를 비양하니, 적진 선봉 한석이 응성출마 왈, "너희는 어떠한 도적으로 천위를 모르고 태평시절을 분란케 하느냐? 오늘날 너희를 사로잡아 민심을 안돈하리라." 하고, 언필에 상장이 합전하여 싸우더니, 수합이 못되어 맹춘의 칼이 빛나며 한석의 머리를 베어 들고 좌충우돌하여 왈, "율왕은 무죄한 장졸을 상치 말고 쉬이 나와 항복하여 잔명을 보전하라." 하니, 율왕이 선봉 패함을 보고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녹포운갑에 자금투구를 쓰고, 좌수에 방천극을 들고, 천리대완마를 재촉하여 진전에 나서며 왈, "적장은 잔말 말고 나의 창을 받으라." 하고, 급히 맹춘을 취하여 싸우니, 십여합에 맹춘이 패하여 말머리를 돌려 양관으로 향하니 율도왕이 꾸짖어 왈, "적장은 달아 나지 말고 말에서 내려 항복하라." 말을 재촉하여 맹춘을 따라 양관으로 가더니, 적장이 골 어귀에 들며 군기를 버리고 산곡으로 달아나는지라. 율도왕이 무슨 간계있는가 의심하다가 왈, "네 비록 간사한 꾀가 있으나 내 어찌 겁하리요?" 하고 군사를 호령하여 급히 따르더니, 이때에 길동이 장대에서 보다가 율도왕이 양관 어귀에 듦을 알고, 신병 오천을 호령하여 대군과 합세하여 양관 어귀에 필잔을 쳐 돌아갈 길을 막으니라. 율도왕이 적장을 쫓아 골에 들매 방포소리 나며 사면복병이 합세하여 그 세 풍아같은지라. 율도왕 꾀에 빠진 줄 알고 세궁하여 군사를 돌려 나오더니, 양관 어귀에 미치니 길동의 대병이 길을 막이 진을 치고 항복하라 하는 소리 천지 진동하는지라. 율도왕이 힘을 다하여 진문을 헤치고 들어가니, 문득 풍우대작하고, 뇌성벽력이 진동하며 지척을 분별치 못하여 군사 크게 어지러워 갈 바를 모르더니, 길동이 신병을 호령하여 적장과 군졸을 일시에 결박하였는지라. 율도왕이 아무러 할 줄 모르고 크게 놀래어 급히 헤진들 팔진을 어떻게 벗어나리요? 필마단창으로 동서를 모르고 횡행하더니, 길동이 제장을 호령하여 결박하라 하는 소리 추상같은지라. 율도왕이 사면을 살피니 군사 하나도 따르는 자가 없으매, 스스로 벗아나지 못할 줄 알고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자결(自決)하는지라. 길동이 삼군을 거느려 승전고를 울리며 본진으로 돌아와 군사를 호궤 후에 율도왕을 왕례로 장사하고, 삼군을 재촉하여 도성을 에워싸니, 율도왕의 장자 흉변을 듣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인하여 자결하니, 제신이 하릴없어 율도국 세수를 받들고 항복하는지라. 길동이 대군을 몰아 도성에 들어가 백성을 진무하고, 율도왕의 아들을 또한 왕례로 장사하고, 각 읍에 대사하고, 죄인을 다 방송하며, 창고를 열어 백성을 진휼하니, 일국이 그 덕을 치하 아니할 이 없더라. 날을 가리어 왕위에 직하고, 승상을 추존하여 태조왕이라 하고, 능호를 현덕능이라 하며, 모친을 왕대비로 봉하고, 백용으로 부원군을 봉하고, 백씨로 중전왕비로 봉하고, 정통 양인이로 정숙비를 봉하고, 삼호걸로 대사마 대장군을 봉하며 병마를 총독케 하고, 김인수로 청주절도사를 하시이고, 맹춘으로 부원수를 하시이고, 그 남은 제장은 차례로 상사하니 한 사람도 칭원할 이 없더라. 신왕이 등극 후에 시화연풍하고, 국태민안하여 사방에 일이 없고, 덕화대행하여 도불습유(道不拾遺)하더라. 태평으로 세월을 보내더니, 수십년 후에 대왕대비 승하하시니 시년 칠십삼이라. 왕이 못내 애훼하여 예절로 지내는 효성이 신민을 감동하시더라. 현덕능에 안장하니라. 왕이 장자 이녀를 두시니 장자 앙이 내부의 풍도 있는지라. 신민이 다 산두같이 우러르거늘, 장자로 태자를 봉하시고, 열읍에 대사하사 태평연을 배설하고 즐길새, 왕의 시년이 칠십이라. 술을 내어 반취하신 후에 칼을 잡고 춤추며 노래하시니 왈, 칼을 잡고 우수에 비겨서니 하였더라. 이날 왕위를 태자에게 전하시고 다시 각읍에 대사하니라. 도성 삼십 리 밖에 월영산이 있으되, 예로부터 선인 득도한 자취 왕왕이 머물어, 갈홍의 연단하던 부엌이 있고, 마고의 승천하던 바위 있어 기이한 화훼와 한가한 구름이 항상 머무는지라. 왕이 그 산수를 사랑하고 적송자를 따라 놀고자 하여, 그 산중에 삼간누각을 지어 백씨 중전으로 더불어 처하시며, 곡식을 오직 물리치고 천지정기를 마셔 선도를 배우는지라. 태자 왕위에 직하여 일삭에 세 번 거동하여 부왕과 모비전에 문후하시더라. 일일은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천지진동하며, 오색운무 월영산을 두르더니, 이윽하여 뇌성이 걷고 천지 명랑하며 선학소리 자자하더니, 대왕 모비 간 곳이 없는지라. 왕이 급히 월영산에 거동하여 보니 종적이 막연한지라. 망극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사 공중을 향하여 무수히 호읍하시다라. 대왕이 양외를 현릉에 허장하니 사람이 다 이르기를, "우리 대왕은 선도를 닦아 백일승천하셨다." 하더라. 왕이 백성을 사랑하사 덕화를 힘쓰니 일국이 태평하여 격양가를 일삼으니 성자신손이 계계승승하여 태평으로 지내고, 조선 홍승상댁 대부인이 말년에 졸하시니, 장차 길현이 예절을 극진히 하여 선산여록에 장례하고 삼년초토를 지낸 후, 조정에 집권하여 초입사에 한림학사 대간을 겸하고, 연속 승차하여 병조정랑에서 홍문관 교리 수찬을 겸하고, 연하여 승직하여 승상을 지내니라. 이렇듯이 발복하여 삼태육경을 지내니 영화 일국의 으뜸이나 매일 친산을 생각하고 동생을 보고자 하되 남북에 길이 갈리어 슬퍼함을 마지 아니하더라. 미재라! 길동의 행어사여! 쾌달한 장부로다. 비록 천생이나 적원을 풀어 버리고, 효우를 완전히 하여 신수를 쾌달하니 만고에 희한한 일이기로 후인이 알게한 바이러라. |
요점 정리
작자 : 허균
연대 : 이조 선조
형식 : 국문 소설, 장편 소설, 사회 소설, 영웅 소설. 사회 소설. 도술 소설
성격 : 당대의 사회 문제를 다룬 소설로 현실성이 강함. 도술적 요소. 비판적, 사실적 묘사 미흡
문체 :
① 문장이 길다. 산문체
② 지문은 묘사적이라기보다는 설명적이다.
③ 작자가 자신의 감정을 직접 노출시키고 있다.
④ 국문으로 된 문어체이다.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배경 : 조선 시대, 조선국과 율도국
구성 : 5단 구성(혹은 4단구성으로 보기도 함), 추보식 구성
① 발단(發端) |
길동은 홍 판서의 서자(庶子)로 태어나 천대를 받는다. |
② 전개(展開) |
적서 차별의 사회 제도에 반항하여 이상을 찾아 집을 떠난다. |
③ 위기(危機) |
도적의 무리 활빈당(活貧黨)의 괴수가 되어 빈민을 구제한다. |
④ 절정(絶頂) |
나라에서 길동을 잡으려고 하니 길동이 율도국(律島國)으로 떠난다. |
⑤ 결말(結末) |
율도국에서 이상국(理想國)을 세우고 정치를 행한다. |
4단 구성으로 볼 때
발단 : 서자로 태어나 천대를 받음
전개 : 집을 나와 의적이 됨
절정 : 나라에서도 막지 못함
결말 : 율도국에 이상국을 건설함.
주제 :
적서 차별의 철폐와 인간 평등 사상[봉건적 사회 제도의 개혁].
탐관오리의 부정 부패 일소와 빈민 구제 사상[탐관오리 규탄].
율도국의 정벌·지배[해외 진출과 이상국 건설]
표현상 특징 :
① '~하더라', '~하는구나' 식으로 화자가 개입된 설명식 지문을 사용함
② 진취적이며 현실성이 강함
③ 전기적(傳奇的) 요소가 있음
④ 완전한 성격 묘사에 이르지 못함.
의의 : 최초의 한글 소설로 국문 소설의 효시. 영웅의 일생이라는 서사 전통이 최초로 소설화된 작품. 가전(假傳)·전기(傳奇)에서 탈피(완전히 탈피한 것은 아님), 소설다운 형태를 갖추었다. 사회 제도의 불합리성을 문제 삼은 사회 소설의 선구적 작품. 내용상 저항 정신이 반영된 평민 문학이다.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에 영향을 줌.
최초의 한글 소설 [중국 소설 "수호지" 및 "삼국지연의" 등의 영향을 받았다. 아류 작품으로 "전우치전(田禹治傳)"이 있다] |
내용 |
우리나라가 배경임 |
독자층의 확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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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 우리나라 사람임 | ||
형식 |
한글로 표기됨 | ||
적서차별 철폐과 인간 평등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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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 주인공 홍길동은 조선조 세종 때 서울에 사는 홍판서의 시비 춘섬의 소생인 서자이다. 홍판서가 용꿈을 꾸어 길몽이기에 본부인을 가까이하려 하였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춘섬과 관계해서 낳은 아들이 길동이다.
길동은 어려서부터 도술을 익히고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기상을 보였으나, 천생인 탓으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한을 품는다. 가족들은 길동의 비범한 재주가 장래에 화근이 될까 두려워하여 자객을 시켜 길동을 없애려고 한다. 길동은 위기에서 벗어나자 집을 나서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러다가 도적의 소굴에 들어가 힘을 겨루어 두목이 된다. 먼저 기이한 계책으로 해인사의 보물을 탈취하였으며, 그뒤로 길동은 활빈당 ( 活貧黨 )이라 자처하고 기계(奇計)와 도술로써 팔도지방 수령들의 불의의 재물을 탈취하여 빈민에게 나누어주고 백성의 재물은 추호도 다치지 않는다.
길동은 함경도 감영의 불의의 재물을 탈취해오면서 “ 아무날 전곡을 도적한 자는 활빈당 행수 홍길동이라. ” 는 방을 붙여둔다. 함경감사가 도적을 잡으려다가 잡지 못하자 조정에 장계 ( 狀啓 )를 올려 좌우포청으로 하여금 홍길동이라는 대적을 잡으라고 한다.
팔도가 다같이 장계를 올리는데 도적의 이름이 홍길동이요 도적당한 날짜가 한날 한시였다. 우포장 이흡이 길동을 잡으러 나섰다가 도리어 우롱만 당하고 만다. 국왕이 길동을 잡으라는 체포명령을 전국에 내렸던바 전국에서 잡혀온 길동이 300여 명이나 된다.
그러나 호풍환우(呼風喚雨)하고 둔갑장신(遁甲藏身)하는 초인간적인 길동의 도술을 당해낼 수 없었다. 조정에서는 홍판서를 시켜 회유하고 길동의 형 인형도 가세하여 길동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고 병조판서를 제수하여 회유하기로 한다. 길동은 서울에 올라와 병조판서가 된다.
그 뒤 길동은 고국을 떠나 남경으로 가다가 산수가 수려한 율도국( 琉 島國)을 발견한다. 요괴를 퇴치하여 볼모로 잡혀온 미녀를 건지고 율도국왕이 된다. 마침 아버지가 죽으매 부음을 듣고 고국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치고 다시 율도국으로 돌아가 나라를 잘 다스린다.
짧은 줄거리 :
홍길동은 비범한 재주와 풍모를 타고났으나 서자(庶子)라는 신분 때문에 세상에 나서지 못하고 울분 속에 나날을 보내다 집을 떠난다. 당시 나라는 양반 관리들의 횡포와 흉년 등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에 홍길동은 활빈당을 조직하고 부패한 관리들의 재산을 털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의적 노릇을 한다. 나라에서는 신출귀몰하는 홍길동의 재주를 당하지 못하자, 그를 병조 판서에 임명한다. 그러나 그는 고국을 하직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율도국의 왕이 된다.
교과서 줄거리
1. 망명도생 결심
- 양인을 죽임
- 상공 침실에 가서 하직을 고하고자 함
2. 하직 인사
- 상공께 하직 인사를 드림
3. 호부호형을 허락함
- 상공이 길동의 무사함을 당부함
4. 어머니께 하직 인사
- 길동의 정처없는 떠남
5. 음모의 내막이 밝혀짐
- 초란의 음모 실패
6. 길동의 정처없는 표박(漂迫)
- 도적의 굴혈로 찾아 들어감
7. 길동이 도적의 괴수가 됨
- 길동의 힘에 감탄한 도적들이 우두머리로 모시게 됨
8. 해인사 재물 탈취의 계책
9. 길동이 변장하고 해인사를 염탐함
10. 해인사 재물을 탈취
11. 길동이 관군을 속여 추적을 따돌리고 무사히 재물을 수탐하여 옴
12. 활빈당의 조직과 빈민 구제
인물 : 홍길동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행동하며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끝없이 도전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또한 자신의 신분 때문에 그 자신의 능력을 정상적으로 발휘할 수 없음을 깨닫고 사회에 대한 저항의식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의 저항 의식은 '활빈당'이라는 일정한 방향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홍길동은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계획을 성사시키는 인물로 볼 수 있다.
홍길동전에 나타난 사회상과 비판 의식
천비 소생이라 사람들에게 천대받고 입신양명에 제한을 받음 |
적서 차별과 신분 제도 타파 |
활빈당을 조직하여 탐관오리를 응징함 |
지배층의 부정부패 타파 |
'홍길동전'의 문제해결 방식과 결말 구조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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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상황 |
해결 방식 |
첫 번째 |
서자로 태어나 비복 등에게 천대받고 계모의 계략으로 암살 위기에 처함 |
자신을 죽이려는 자객인 특재를 뛰어난 검술로 죽이고, 어머니께 하직하고 집을 떠남 |
두 번째 |
활빈당을 만들어 활약하던 중 조정에서 병력을 동원하여 길동을 제거하려함 |
신출귀몰하는 도술로 위기를 넘긴 뒤 조정에서 병조 판서를 제수받고 조선을 떠나 율도국을 건설함 |
전기적 방법 사용 + 개혁 의식의 현실화 불가능 인식 |
내용 연구
길동이 점점 자라 팔 세 되매, 총명이 과인(過人)하여[덕망·학식·재주·힘 따위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다.] 하나를 들으면 백을 통하니[문일지십(聞一知十) : 한 가지를 들으면 열을 미루어 앎.] 공이 더욱 애중(愛重)[사랑하고 귀중(貴重)히 여김.]하나 근본 천생(賤生)[자라 온 환경과 경력이 천출 다시 말해서 첩 자식 / 갈등의 근본 원인]이라, 길동이 매양[번번이. 언제든지. 늘] 호부 호형(呼父呼兄)[아버지를 아버지라 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면] 하면 문득 꾸짖어 못 하게 하니[서얼차대 : 조선 때, 서얼을 차별 대우하던 일] 길동이 십 세 넘도록 감히 부형(父兄)을 부르지 못하고 비복(婢僕)[여자 종과 남자 종. 복비. 노비.] 등이 천대[업신여기어 푸대접함]함을 각골통한(刻骨痛恨)[뼈에 사무쳐 맺힌 원한. 각골지통(刻骨之痛)]하여 심사[마음]를 정치 못하더니, 추구월 망간(望間)[음력 보름께]을 당하매 명월(明月)은 조요(照耀)[비쳐서 빛남. 또는 비쳐서 밝음.]하고 청풍(淸風)은 소슬하여[쓸쓸하다, 고요하다, 조용하다] 사람의 심회(心懷)[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나 느낌. 심서(心緖)]를 돕는지라. 길동이 서당에서 글을 읽다가 문득 서안(書案)을 밀치고 탄식하여 가로되,
“대장부 세상에 나매 공맹(孔孟)을 본받지 못하면[벼슬길에 나가지 못함] 차라리 병법(兵法)을 외워 대장인(大將印)[장수가 갖는 인장]을 요하(腰下)[허리]에 비스듬히 차고 동정서벌(東征西伐)[여러 나라를 이리저리 정벌함]하여 국가에 큰 공을 세우고[출장입상(出將入相)] 이름을 만대(萬代)에 빛냄[홍길동의 입신양명에 대한 열망이 드러남 / 유방백세(流芳百世) : 꽃다운 이름이 후세에 길이 전함 ]이 장부의 쾌사(快事)[매우 기쁜 일. 통쾌한 일]라. 나는 어찌하여 한 몸이 적막(寂寞)[쓸쓸하고 고요함]하고 부형이 있으되 호부 호형을 못 하니 심장이 터질지라. 어찌 통한(痛恨)[가슴 아프게 몹시 한탄함]치 아니리요.” - 길동이 적서차별로 괴로워함
<중략>
하루는 길동이 어미 침소에 가 울며 고하되,
“소자(小子) 모친으로 더불어 전생 연분이 중(重)하여 금세(今世)에 모자(母子) 되오니 은혜 망극하온지라[망극지은(罔極之恩) : 한없는 은혜.]. 그러나 소자의 팔자 기박[복이 없음. 팔자가 사나움]하여 천한 몸이 되오니 품은 한[적서차별로 인한 한]이 깊사온지라. 장부가 세상에 처하되 남의 천대받음이 불가하온지라. 소자 자연 기운을 억제치 못하여[홍길동의 가출의 원인은 적서차별로 인한 한] 모친 슬하[무릎의 아래라는 뜻으로, 부모의 곁]를 떠나려 하오니 복망(伏望)[엎드려 바라옴, 웃어른의 처분을 삼가 바람] 모친은 소자를 염려치 마시고 귀체(貴體)를 보중(保重)하소서.”
하니 그 어미 청파(聽罷)[끝까지 들음. 듣기를 마침]에 크게 놀라 가로되,
“재상가 천비[신분이 천한 여자 종] 소생이 너뿐이 아니어든[축첩제도가 일반적이었던 당시의 사회상을 드러냄] 어찌 좁은 마음을 발하여 어미 간장을 사르느냐?”
길동이 대답해 가로되,
“옛날 장충의 아들 길산[장길산]은 천생이로되 십삼 세에 그 어미를 이별하고 운봉산에 들어가 도를 닦아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유전(流轉)하였으니[유방백세(流芳百世) : 꽃다운 이름이 후세에 길이 전함] 소자 그를 효칙(效則)[본받아]하여 세상을 벗어나려 하오니 모친은 안심하시어 후일을 기다리소서. 근간(近間) 곡산모의 행색(行色)을 보니 상공(相公)의 사랑을 잃을까 하여 우리 모자(母子)를 원수같이 아는지라. 큰 화(禍)를 입을까 하옵나니 모친은 소자가 나감을 염려치 마소서.”
하니 그 어미 또한 슬퍼하더라. - 길동이 어머니께 이별을 고함
길동이 그 원통(寃痛)한 일을 생각하매 시각(時刻)을 머물지 못할 일이로되, 상공의 엄명(嚴命)이 지중(至重)하므로 하릴없이[할 수 없이]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더니[전전반측], 차야(此夜)에 촛불을 밝히고 주역(周易)을 잠심(潛心)[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이 생각함]하다가, 문득 들으니 까마귀 세 번 울고 가거늘[불길한 조짐을 암시하는 기능], 길동이 괴이(怪異)히 여겨 혼자말로 이르되,
“이 짐승은 본래(本來) 밤을 꺼리거늘, 이제 울고 가니 심히 불길(不吉)하도다.”
하고, 잠깐 팔괘(八卦)[중국 상고 시대의 복희씨(伏羲氏)가 지었다는 여덟 가지의 괘]
卦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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卦名 |
乾 |
兌 |
離 |
震 |
巽 |
坎 |
艮 |
坤 |
자연 |
天 |
澤 |
火 |
雷 |
風 |
水 |
山 |
地 |
인간 |
父 |
少女 |
中女 |
長男 |
長女 |
中男 |
少男 |
母 |
성질 |
健 |
說 |
麗 |
動 |
人 |
陷 |
止 |
順 |
동물 |
馬 |
羊 |
稚 |
龍 |
鷄 |
豕 |
狗 |
牛 |
신체 |
首 |
口 |
目 |
足 |
股(고) |
耳 |
手 |
腹 |
오행 |
陽金 |
陰金 |
火 |
陽木 |
陰木 |
水 |
陽土 |
陰土 |
]를 벌여 보고 대경하여[크게 놀라], 서안(書案)을 물리치고 둔갑법(遁甲法)[술법을 써서 자기 몸을 감추거나 다른 것으로 바꿈]을 행하여 그 동정(動靜)을 살피더니, 사경(四更)[새벽 1시부터 3시까지]쯤 하여, 한 사람이 비수(匕首)를 들고 완완(緩緩)히[천천히]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지라, 길동이 급히 몸을 감추고 진언(眞言)[주문]을 염(念)하니, 홀연[갑자기] 일진 광풍(一陣狂風)[한 바탕의 미친 바람]이 일어나며, 집은 간데없고 첩첩한 산중에 풍경이 거록한지라[성스럽고 위대하다]. 특재 대경하여[크게 놀라] 길동의 조화(造化)가 신기함을 알고 비수[날이 날카로운 단도]를 감초아 피(避)하고저 하더니, 문득 길이 끊어지고 층암절벽(層巖絶壁)[높고 험한 바위가 겹겹으로 쌓인 낭떠러지]이 가리웠으니 진퇴유곡(進退維谷)[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날 수도 없이, 꼼짝할 수 없는 궁지에 빠짐. 진퇴양난.]이라, 사면(四面)으로 방황하더니, 문득 젓소리[피리소리] 들리거늘 정신을 차려 살펴보니, 일위[한 사람] 소동(一位小童)이 나귀를 타고 오며, 저 불기를 그치고 꾸짖어 가로되,
“네 무슨 일로 나를 죽이려 하느냐? 무죄(無罪)한 사람을 해(害)하면 어찌 천앙(天殃)[하늘에서 벌로 내리는 재앙]이 없으리요?”
하고 진언을 염하더니, 홀연 일진 흑운(一陣黑雲)[바람·구름 따위가 한바탕 일어남]이 일어나며 큰비 붓듯이 오고 사석(沙石)[모래와 돌]이 날리거늘 특재 정신을 수습하여 살펴보니 길동이라. 비록 그 재주를 신기하게 여기나,[신출귀몰 : 자유자재로 출몰하여 그 변화를 헤아릴 수 없음.]
“어찌 나를 대적[적· 세력·힘 등에 서로 맞서서 겨룸. 또는 그 상대]하리요?”[특재의 태도는 당랑거철(螳螂拒轍) : 제 분수도 모르고 강적에게 반항함(‘장자’에 나오는 말로, 중국 제나라의 장공(莊公)이 사냥을 나가는데 사마귀가 앞발을 들고 수레바퀴를 멈추려 했다는 데서 유래함).]
하고 달려들며 크게 호령하여 가로되,
“너는 죽어도 나를 원망치 말라. 초란이 무녀(巫女)와 상자(相者)로 하여금 상공과 의논하고 너를 죽이려 함이니 어찌 나를 원망하리요?”
하고, 칼을 들고 달려들거늘 길동이 분기(憤氣)를 참지 못하여[노기충천 : 잔뜩 성이 나 있다] 요술로 특재의 칼을 빼앗아 들고 크게 꾸짖어 가로되,
“네 재물을 탐하여 사람 죽임을 좋이 여기니 너 같은 무도(無道)[도리에 벗어남]한 놈은 죽여 후환(後患)을 없이 하리라.”
하고 한 번 칼을 드니 특재의 머리 방중에 내려지는지라. 길동이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이 밤에 바로 상녀(相女)를 잡아 특재가 죽은 방에 들이치고 꾸짖어 가로되,
“네 날로 더불어 무슨 원수 있기에 초란과 한가지로 나를 죽이려 하더냐?”
하고 베니 어찌 가련치 아니하리요[서술자의 논평 / 편집자적 논평]. - 길동이 자신을 죽이고자 한 특재와 상녀를 죽임
양인 : 특자와 계집
건상(乾象) : 하늘에 나타나는 현상. 천문(天文)
은하수와 월색 : 홍길동의 심리적 상태를 상징
수회(愁懷) : 근심스러운 회포.
망명도생(亡命圖生) : 죽게 된 목숨을 멀리 도망하여 몸을 피해 삶을 꾀함.
인견(引見) : 맞아들여 대면함. 接見
복지(伏地) : 땅에 엎드림.
참소(讒訴) : 간악한 말로 모함함.
방소(方所) : 방위와 처소. 갈 곳.
쌍루(雙淚)가 종횡(縱橫)하여 : 두 줄기 눈물이 마구 흘러 얼크러져.
개유(開諭)하야 : 깨우쳐 타일러. 다시 생각해 봄.
일편지한(一片至恨) : 한 가닥의 큰 원한.
야야(爺爺) : 아버님. 야(爺)는 아비.
복망(伏望) : 엎드려 바라옵건대.
길동이 복지(伏地)하고 대답하여 가로되, : 한문 직역 투의 문체→ 복지대왈(伏地對曰). 부자 관계에서도 신분의 차이가 엄격함을 알 수 있다.
상공의 버린 자식이 어찌 방소를 두리이까? : 상공의 자식인데도, 자식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자식이, 집을 버리고 정처없이 떠남에 있어 어찌 일정한 목적지인들 있겠습니까? 이 말엔 적서 차별에 대한 길동의 사무치는 한(恨)이 서려 있다.
각설 : 고대 소설에 쓰는 발어사(發語辭). 말머리를 돌릴 때 첫머리에 씀.
길동이 부모를 이별하고 문을 나서매 : 초란을 죽이고 집을 나서는 장면으로 초란은 길동이 비범한 인물임을 알고 그를 죽이려고 흉계를 꾸몄다가 실패하여 죽임을 당한다. 이 대목은 영웅 소설의 일반적 구조인 '영웅의 시련'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경개 절승 : 경치가 매우 아름다움.
즐비하고 : 빽빽이 들어차고.
굴혈 : 도둑의 소굴.
위인이 녹록치 않음을 : 사람의 됨됨이가 만만치 않음을, 즉 홍길동의 비범함을 드러내는 구절로 고전 소설의 상투적인 표현임. 녹록치는 만만하지
홍판서의 - 길동이러니 : 길동의 신분이 정상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길동이 사회에 대해 저항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근본적인 요인이 될 뿐만 아니라 사건에 필연성을 부여하는 요소이다.
용력(勇力) : 용맹스런 힘.
그 돌을 들어 ~ 무게 천 근이라 : 주인공의 영웅성, 초인성, 비범성을 드러낸 대목이다. 고대 소설의 취약점인 전기성이 나타난 대목이기도 하다.
불승감사 : 감사함을 이기지 못함. 너무 고마와서 어찌할 줄을 모름.
아등이 : 우리들이.
정제 : 정리되고 갖추어짐.
거조 : 무엇을 처리하고 꾸미기 위한 조치. 동작과 행동, 어떠한 행동을 하는 것.
발치(發一) : 드러내어 실행하지.
청포 흑대 : 푸른 도포와 검은 띠.
종자 : 시중을 드는 사람. 데리고 다니는 사람.
수승 : 우두머리가 되는 중. 주지승.
“나는 경성 홍 판서의 천첩 소생 길동이니, 가중(家中) 천대[가출의 이유]를 받지 아니 하려 사해 팔방(四海八方 : 온 바다의 여러 방면으로 온 세상이라는 뜻)으로 정처 없이 다니더니[더 이상 집안 사람들로부터 서자(庶子)로 태어난 천대를 받지 안으려고 집을 떠나 정처없이 다니다가. '적서 차별 타파'의 주제에 부합된다.], 우연히 이 곳에 들어와 모든 호걸의 동료됨을 이르시니 불승감사(不勝感謝 : 감사함을 이기지 못함. 너무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모름)하거니와 장부가 어찌 저만한 돌 들기를 근심하리오.”
하고 그 돌을 들어 수십 보를 행하다가 던지니[홍길동의 비범함을 드러냄] 그 돌 무게 천 근이라. 제적(諸賊 : 여러 도적)이 일시의 칭찬하여 가로되,
“과연 장사로다. 우리 수천 명 중에 이 돌 들 자 없더니 오늘날 하늘이 도우사 장군을 주심이로다.” [우리 무리 수천 명 가운데 이 돌을 드는 사람이 없더니 오늘 하늘이 장군을 주심이로다. 길동의 초인적인 힘을 보고 여러 도적들이 칭찬한 말로 천 근이나 되는 돌을 들었다는 것은 고대 소설의 전기성(傳奇性)을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하고 길동을 상좌[윗자리]에 앉히고 술을 차례로 권하고 백마(白馬)를 잡아 맹세하며[옛날 중대한 일을 하고자 할 때 흰 말을 잡아 그 피를 입술에 바르고 혈맹(血盟)을 맺던 맹세를 뜻함. 이것을 삽혈( 血), 또는 혈맹(血盟)이라고 함.] 언약을 굳게 하니 중인(衆人 : 뭇사람)이 일시에 응낙하고 종일 즐기더라. 이후로 길동이 제인(諸人 : 여러 사람)으로 더불어 무예를 연습하여 수월지내(數月之內 : 몇 개월 안에)에 군법(軍法)이 정제(整齊 : 정리되고 갖추어짐)한지라.
일일은 제인(諸人)이 이르되,
“아등(我等 : 우리들)이 벌써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를 쳐 그 재물을 탈취코자 하나, 지략(智略)이 부족하여 거조(擧措 : 무엇을 처리하고 꾸미기 위한 조치. 동작과 행동)를 발치[드러내어 실행하지] 못하였더니, 이제 장군의 의향(意向 : 생각)이 어떠하시니까? [도적의 무리들이 괴수 길동에게 합천 해인사의 재물을 탈취할 의향을 묻는 말로, 이 대화에서 무리들의 성격을 알 수 있다.]
길동이 웃으며 가로되,
“내 장차 발군(發軍 : 전쟁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킴)하리니 그대 등은 지휘대로 하라.” [앞에서 길동은 자신의 힘을 통해 비범함을 입증했지만 그의 지략이 어떠한 지는 미지수이다. 그의 지략이 입증되지 않으면 부하들의 신뢰를 받을 수 없으며 그의 영웅성도 드러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이 장면은 이를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하고, 청포(靑袍) 흑대(黑帶)의 나귀를 타고 종자(從者) 수인[두서너 사람]을 데리고 나가며 가로되,
“내 그 절에 가 동정을 보고 오리라.”
하고 가니 완연한 재상가(宰相家) 자제라. 그 절에 들어가 먼저 수승(首僧 : 우두머리 주지스님)을 불러 이르되,
“나는 경성 홍 판서 댁 자제라. 이 절에 와 글공부하러 왔거니와, 명일[다음날, 내일]에 백미(白米) 이십 석을 보낼 것이니 음식을 정히 차리면 너희들도 한가지로 먹으리라.”
하고 사중(寺中)을 두루 살펴보며 후일을 기약하고[뒷날 재물을 탈취하기 위해 정탐하는 행동] 동구(洞口)를 나오니 제승(諸僧)이 기뻐하더라.
길동이 돌아와 백미 수십 석을 보내고 중인(衆人)을 불러 가로되,
“내 아무 날은 그 절에 가 이리이리 하리니 그대 등은 뒤를 좇아와 이리이리 하라.” [길동이 부하들에게 자신의 계책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앞의 ' 이리이리'는 자신이 일부러 모래를 깨물어 화를 내고 중들을 결박하도록 하겠다는 것이고, 뒤의 '이리이리'는 그 틈에 부하들로 하여금 재물을 빼앗으라는 것을 가리킨다. / 서술자의 작중 개입. 서술자가 임의로 대화 내용을 요약 생략함]
하고, 그 날을 기다려 종자(從者) 수십 인을 데리고 해인사에 이르니 제승(諸僧)이 맞아 들어가니 길동이 노승(老僧)을 불러 물어 가로되,
“내 보낸 쌀로 음식이 부족치 아니하더뇨?”
노승이 가로되,
“어찌 부족하리이까. 너무 황감(惶感 : 황송할만큰 감사함)하여이다.”
길동이 상좌에 앉고 제승을 일제히 청하여 각기 상을 받게 하고 먼저 술을 마시며 차례로 권하니 모든 중이 황감하여 하더라.
길동이 상을 받고 먹더니 문득 모래를 가만히 입에 넣고 깨무니[해인사를 쳐서 재물을 탈취하고자 하는 구실을 잡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 행동이다.] 그 소리 큰지라. 제승이 듣고 놀라 사죄하거늘 길동이 거짓 크게 노하여 꾸짖어 가로되,
“너희들이 음식을 이다지 부정케 하뇨. 이는 반드시 나를 능멸[업신여김]함이라.”
하고 종자에게 분부하여, 제승을 다 한 줄에 결박하여 앉히니 사중(寺中 : 승려들)이 황겁(惶怯 : 당황해서 겁에 질림)하여 어떻게 할 줄을 모르는지라[절의 중들이 두렵고 겁이 나서 어찌할 줄을 모르는 모습이다]. 이윽고 대적(大賊 : 큰 도적 무리) 수백여 명이 일시에 달려들어 모든 재물을 다 제것 가져가듯 하니[아무 거리낌없이,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쉽게 재물을 탈취해 가져 가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길동의 지략이 뛰어남을 보여주고 있다.] 제승이 보고 다만 입으로 소리만 지를 따름이라.
이 때, 불목하니[불목한이. '불목한'은 절에서 나무를 해오거나 밥짓는 일을 맡아하는 사람을 일컬음. / 사건을 확장시키는 이로 주인공의 능력을 부각시킴]가 마침 나갔다가 이런 일을 보고 즉시 관가에 고하니, 합천 원[원님, 사또]이 듣고 관군(官軍)을 조발(調發 : 사람들을 모아 일을 시작함)하여 그 도적을 잡으라 하니 수백 장교(將校) 도적의 뒤를 쫓을 새, 문득 보니 한 중[승려로 위장한 길동]이 송락(松蘿 : 중의 모자. 소나무 겨우살이로 고깔같이 만들어 머리에 쓰는 것, 흔히 여승(女僧)이 착용함. 송라립)을 쓰고 또 장삼(長衫) 입고[길동이 관군을 속이기 위해 중으로 변장한 모습이다. 여기서 길동의 비범한 지혜와 용기를 읽을 수 있다.] 묘에 올라 큰 소리로 말하여 가로되,
“도적이 저 북편 소로(小路)로 가니 빨리 가 잡으소서.” [관군을 속이기 위한 길동의 꾀]
하거늘 관군이 그 절 중이 가리키는 줄을 알고[관군들이 해인사의 중이 가르쳐 주는 것으로 잘못 알고, 길동이 계교로써 관군을 속이는 장면이다. 관군의 어리석음을 통해 상대적으로 길동의 영리함을 부각시킨 대목이다.] 풍우같이 북편 소로로 찾아가다가 날이 저문 후 잡지 못하고 돌아가니라. [관군 혹은 관의 무능함을 드러냄]
길동이 제적(諸賊)을 남편(南便) 대로(大路)로 보내고 제 홀로 중의 복색으로 관군을 속여 무사히 굴혈(掘穴 : 소굴)로 돌아오니 모든 사람이 벌써 재물을 수탐(搜探 : 뒤져서 찾아냄)하여 왔는지라. 일시에 나와 사례하거늘 길동이 웃으며 가로되,
“장부 이만 재주 없으면 어찌 중인의 괴수가 되리오.” [재주가 뛰어나도 사회에 진출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뛰어난 재주임에도 도적의 괴수가 된 길동을 통해 당시의 사회의 문제점을 보여줌]
하더라.
이후로 길동이 자호(自號 : 자신들의 호칭)를 활빈당이라 하여 조선 팔도로 다니며 각 읍 수령이 불의(不義)의 재물이 있으면 탈취하고 혹 지빈무의(至貧無依 : 극도로 가난하여 의지할 곳이 변변히 없음)한 자 있으면 구제하며[각 읍 수령들이 불의로 모은 재물이 있으면 이를 탈취하고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을 구제하며, 길동의 의적으로서의 면모를 보여 준 내용이다.], 백성을 침범치 아니하고 나라에 속한 재물은 추호[가을철에 가늘어진 짐승의 털이라는 말로서, 썩 작거나 적음을 비유. 과장법]도 범치 아니하고[왕권에 대한 신뢰] 이러므로 제적이 그 의취(意趣 : 뜻과 취지)를 탄복하더라.
가중 천대를∼정처없이 다니더니 : 더 이상 집안 사람들로부터 서자(庶子)로 태어난 천대를 받지 안으려고 집을 떠나 정처없이 다니다가. '적서 차별 타파'의 주제에 부합된다.
우리 수천 명 중에∼장군을 주심이로다 : 우리 무리 수천 명 가운데 이 돌을 드는 사람이 없더니 오늘 하늘이 장군을 주심이로다. 길동의 초인적인 힘을 보고 여러 도적들이 칭찬한 말로 천 근이나 되는 돌을 들었다는 것은 고대 소설의 전기성(傳奇性)을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백마(白馬)를 잡아 맹세하며 : 옛날 중대한 일을 하고자 할 때 흰 말을 잡아 그 피를 입술에 바르고 혈맹(血盟)을 맺던 맹세를 뜻함. 이것을 삽혈( 血), 또는 혈맹(血盟)이라고 함.
일일은 제인(諸人)이 이르되,∼어떠하시니이까? : 도적의 무리들이 괴수 길동에게 합천 해인사의 재물을 탈취할 의향을 묻는 말로, 이 대화에서 무리들의 성격을 알 수 있다.
내 장차 발군(發軍)하리니 ~지휘대로 하라 : 앞에서 길동은 자신의 힘을 통해 비범함을 입증했지만 그의 지략이 어떠한 지는 미지수이다. 그의 지략이 입증되지 않으면 부하들의 신뢰를 받을 수 없으며 그의 영웅성도 드러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이 장면은 이를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내 아무 날은 ~ 좇아와 이리이리 하라 : 길동이 부하들에게 자신의 계책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앞의 ' 이리이리'는 자신이 일부러 모래를 깨물어 화를 내고 중들을 결박하도록 하겠다는 것이고, 뒤의 '이리이리'는 그 틈에 부하들로 하여금 재물을 빼앗으라는 것을 가리킨다.
황감 : 황송할만큰 감사함.
문득 모래를 가만히 입에 넣고 깨무니 그 소리 큰지라 : 해인사를 쳐서 재물을 탈취하고자 하는 구실을 잡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 행동이다.
샤중이 황겁하여 - 모르는지라 : 절의 중들이 두렵고 겁이 나서 어찌할 줄을 모르는 모습이다.
능멸 : 업신여김
황겁 : 당황해서 겁에 질림
모든 재물을 다 제것 가져가듯 하니 : 아무 거리낌없이,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쉽게 재물을 탈취해 가져 가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길동의 지략이 뛰어남을 보여주고 있다.
불목하니 : 불목한이. '불목한'은 절에서 나무를 해오거나 밥짓는 일을 맡아하는 사람을 일컬음.
조발 : 사람들을 모아 일을 시작함.
송낙 : 중의 모자. 소나무 겨우살이로 고깔같이 만들어 머리에 쓰는 것, 흔히 여승(女僧)이 착용함. 송라립
한 중이 송낙을 쓰고 또 장삼(長衫) 입고 : 길동이 관군을 속이기 위해 중으로 변장한 모습이다. 여기서 길동의 비범한 지혜와 용기를 읽을 수 있다.
관군이 그 절 중이 가르치는 줄을 알고 : 관군들이 해인사의 중이 가르쳐 주는 것으로 잘못 알고, 길동이 계교로써 관군을 속이는 장면이다. 관군의 어리석음을 통해 상대적으로 길동의 영리함을 부각시킨 대목이다.
수탐 : 뒤져서 찾아냄.
자호 : 자신들의 호칭
각 읍 수령이 - 구제하며 : 각 읍 수령들이 불의로 모은 재물이 있으면 이를 탈취하고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을 구제하며, 길동의 의적으로서의 면모를 보여 준 내용이다.
지빈무의 : 극도로 가난하여 의지할 곳이 변변히 없음.
추호 : 가을철에 가늘어진 짐승의 털이라는 말로서, 썩 작거나 적음을 비유. 과장법
의취 : 뜻과 취지
치돌(馳突) : 매우 세차게 달려들어 부딪침.
비양(飛揚) : ① 잘난 체하고 거드럭거림. ② 높은 지위에 오름.
안돈(安頓) : ① 사물이나 주변 따위가 잘 정돈됨. 또는 정돈을 함. 대가족도 안돈이 되고 미주와 연락도 되었으므로 나는 셋째 사업인 단체 통일에 착수하였다.≪김구, 백범일지≫ ②마음이나 생각 따위를 정리하여 안정되게 함.
잔명(殘命) : 얼마 남지 아니한 쇠잔한 목숨.
흉변(凶變) : 사람의 죽음과 같은 좋지 못한 사건.
진휼(賑恤) : 비슷한 말로 진구(賑救), 진제(賑濟), 구휼(救恤), 빈민구제(貧民救濟)
추존(追尊) : 추숭(追崇) =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던 일.
칭원(稱 ) : 원통함을 들어서 말함.
애훼-골립(哀毁-骨立) :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여 몸이 몹시 여윔.
남명(南冥/南溟) : 남쪽에 있다고 하는 큰 바다.
신왕이 등극 후에 - 도불습유하더라 :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평안하게 됨을 나타낸 말.
도불습유(道不拾遺) :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풍속이 아름다워서 길에 떨어진 물건도 주워 가지 않음을 이르는 말. 《한비자》 외저설(外儲說) 좌상편(左上篇)에서 나온 말이다. ≒노불습유.
우이 동편과 매곡 서편이로다 : 해 뜨는 동쪽과 해 지는 서쪽. 서전에 있는 말.
문후(問候) : 웃어른의 안부를 물음.
허장(虛葬) : ①오랫동안 생사를 모르거나 시체를 찾지 못하는 경우에 시체 없이 그 사람의 옷가지나 유품으로써 장례를 치름. 또는 그 장례.
발복(發福) : 운이 틔어서 복이 닥침.
삼태육경 : 삼공육경(三公六卿) = 조선 시대에, 삼정승과 육조 판서를 통틀어 이르던 말.
갈홍의 연단하던 : 갈홍은 중국 동진 초기의 도가. 연단은 도사가 황금이나 불사의 약을 만들었다고 하는 일종의 연금술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영웅적 인물의 제시와 전기성을 바탕으로 한 사건 전개 등에서 고대 소설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 준다. 그러나 소외된 계층인 서자(庶子)들의 문제와 관리들의 부패상을 비판, 고발하여 주제의 사실성을 높임으로써 고대 소설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고대 소설이 소재와 인물, 배경 등을 중국에서 취해 온 반면, 이 작품은 순수하게 우리 나라를 무대로 삼고 있으며, 작품을 한글로 표기함으로써 한문을 읽지 못하는 서민들에게까지 독자층을 확대시킨 점에서 진정한 한글 소설의 출발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에 수록된 것은 구성상 전개와 결말 부분에 해당한다.
조선 중기에 허균 ( 許筠 )이 지었다고 전하는 고전소설. 1책. 국문 필사본 · 목판본. 최초의 한글소설이다. 허균은 한문소설을 여러 편 지어, 실존한 방외인(方外人)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는데, 그 비슷한 착상을 한글소설로도 구체화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구체적으로 허균이 〈 홍길동전 〉 을 지었다는 말은 허균보다 18세 아래인 이식 ( 李植 )의 ≪ 택당집 澤堂集 ≫ 잡저 중 〈 산록 散錄 〉 부분에 전한다. 이본으로는 경판(京板)이 3종, 완판(完板)이 1종 있으며, 완판에는 토판(土板)에 의한 보각(補刻)의 장도 끼어 있다. 따로 사본에는 〈 김길동전 金吉童傳 〉 이 있다.
주인공 홍길동은 조선조 세종 때 서울에 사는 홍판서의 시비 춘섬의 소생인 서자이다. 홍판서가 용꿈을 꾸어 길몽이기에 본부인을 가까이하려 하였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춘섬과 관계해서 낳은 아들이 길동이다.
길동은 어려서부터 도술을 익히고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기상을 보였으나, 천생인 탓으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한을 품는다. 가족들은 길동의 비범한 재주가 장래에 화근이 될까 두려워하여 자객을 시켜 길동을 없애려고 한다. 길동은 위기에서 벗어나자 집을 나서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러다가 도적의 소굴에 들어가 힘을 겨루어 두목이 된다. 먼저 기이한 계책으로 해인사의 보물을 탈취하였으며, 그뒤로 길동은 활빈당 ( 活貧黨 )이라 자처하고 기계(奇計)와 도술로써 팔도지방 수령들의 불의의 재물을 탈취하여 빈민에게 나누어주고 백성의 재물은 추호도 다치지 않는다.
길동은 함경도 감영의 불의의 재물을 탈취해오면서 “ 아무날 전곡을 도적한 자는 활빈당 행수 홍길동이라. ” 는 방을 붙여둔다. 함경감사가 도적을 잡으려다가 잡지 못하자 조정에 장계 ( 狀啓 )를 올려 좌우포청으로 하여금 홍길동이라는 대적을 잡으라고 한다.
팔도가 다같이 장계를 올리는데 도적의 이름이 홍길동이요 도적당한 날짜가 한날 한시였다. 우포장 이흡이 길동을 잡으러 나섰다가 도리어 우롱만 당하고 만다. 국왕이 길동을 잡으라는 체포명령을 전국에 내렸던바 전국에서 잡혀온 길동이 300여 명이나 된다.
그러나 호풍환우(呼風喚雨)하고 둔갑장신(遁甲藏身)하는 초인간적인 길동의 도술을 당해낼 수 없었다. 조정에서는 홍판서를 시켜 회유하고 길동의 형 인형도 가세하여 길동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고 병조판서를 제수하여 회유하기로 한다. 길동은 서울에 올라와 병조판서가 된다.
그 뒤 길동은 고국을 떠나 남경으로 가다가 산수가 수려한 율도국( 琉 島國)을 발견한다. 요괴를 퇴치하여 볼모로 잡혀온 미녀를 건지고 율도국왕이 된다. 마침 아버지가 죽으매 부음을 듣고 고국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치고 다시 율도국으로 돌아가 나라를 잘 다스린다.
이 작품은 도적을 주인공으로 한 영웅소설, 양반가정의 모순을 척결하고 서얼차별의 불합리에 항거한 사회소설, 이상향을 그리는 낙원사상의 소설, 도교적인 둔갑법 · 축지법(縮地法) · 분신법(分身法) · 승운법(乘雲法) 등을 담은 도술소설 등의 다양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한국소설사에서 특이한 위치를 차지한다.
최초의 한글소설이라는 점에서 중요시될 뿐만 아니라, 후대소설에서 찾기 어려운 다양성을 보이고 있어 더욱 주목된다. 그러나 기본적인 성격은 사회소설이고, 다른 속성은 보조적인 구실을 한다고 보아 마땅하다.
이 소설에 대하여 비교문학적으로 고찰한 이재수 ( 李在秀 )도 〈 홍길동전 〉 을 중국 명대의 〈 수호전 水滸傳 〉 · 〈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 〉 · 〈 서유기 西遊記 〉 의 영향이라 하여, 여기에 담긴 화소(話素)를 중심으로 비교, 연구하였다.
이 중에서 도술에 관한 것은 〈 서유기 〉 와 통하며, 도적의 의적(義賊) 행위에 대한 것은 〈 수호전 〉 과 통하며, 분신법으로 팔도감영에 방을 붙이고 초인(草人)을 만들어 속이는 것은 〈 삼국지연의 〉 제68회의 좌자(左慈)의 분신법에 의하여 조조(曹操)를 회롱하는 것과 상통하고 있다.
이런 수법은 당시 중국의 연의소설의 영향이라고 보는데, 이런 것들은 고대소설의 수법에 관한 것으로 당시의 유행에 따랐다고 보인다.
그러나 허균의 다른 교산소설(蛟山小說), 즉 〈 엄처사전 嚴處士傳 〉 · 〈 손곡산인전 蓀谷山人傳 〉 · 〈 장산인전 長山人傳 〉 · 〈 남궁선생전 南宮先生傳 〉 · 〈 장생전 蔣生傳 〉 과 비교하여보면, 〈 홍길동전 〉 의 국내적 모델이 있는 것 같다.
즉 연산군 6년(1500)에서 7년 초까지 가평 · 홍천을 중심으로 활약한 명화적 ( 明火賊 ) 실명 홍길동(洪吉同), 명종대에 출몰한 양주 백정 임꺽정(林巨正), 선조 29년(1596) 7월에 임진란 와중에 충청도 홍산 ( 鴻山 )을 중심으로 거사한 종실의 서얼 이몽학 ( 李夢鶴 )의 난 등에 흐르고 있는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이상국 건설에 대한 것은 조선 선비들이 가지고 있던 이상향의 동경사상이 일부 노출된 것으로, 허균도 평소 참위설(讖緯說)을 신봉하였다는 것과 표리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보면 〈 홍길동전 〉 이야말로 당시에 있어서는 가장 한국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사회가 점차 경직되어가는 과정에서 서얼문제는 그뒤에도 항상 뜻있는 자의 관심거리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많이 읽혀지고 홍길동에 관하여는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로 많은 호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전라도 영광에는 홍길동 마을에 관한 전설이 있고, 공주 유구에는 홍길동이 쌓았다는 산성 전설이 있다. 아울러 박지원 ( 朴趾源 )의 〈 허생전 〉 도 홍길동전적인 인물의 재현이라는 추측도 가능해진다.
이렇게 독자에 의하여 수용된 것은 그 폭을 설화에서도 검증할 수 있다는 데서 그 영향을 인정할 수 있지만, 〈 홍길동전 〉 그 자체의 문학사적인 위치도 주목할 만하다.
조선 초에 나타난 김시습 ( 金時習 )의 ≪ 금오신화 ≫ 가 명나라 구우(瞿佑)의 ≪ 전등신화 剪燈神話 ≫ 를 이식하여 괴기와 아울러 염정을 주제로 한 여성적 문학의 문을 연 데에 그 뜻이 있다면, 〈 홍길동전 〉 은 한글로 표기되었다는 시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거니와 전체에 흐르고 있는 주제인 서얼문제 · 탐관오리 · 의적 · 이상향 등의 설정이 남성적 문학을 대표할 만한 것이다.
또한 당시 사회의 현실문제를 제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한국소설의 기조면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그러나 허균의 처형이나 조선조사회의 경직화 및 소설의 독자가 규중(閨中)으로 한정되어 점차 이런 현실문제에서 퇴영된 것은 다음의 소설전개에 있어 애석하기 짝이 없다.
소설이 의도하는 현실비판을 불식하고 사랑의 문학으로 퇴화한 것은 여성독자의 기호에 영합하려는 일종의 저속화라고 보여지며 〈 홍길동전 〉 의 전통을 이어나가지 못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서사시나 전기소설적인 전체의 흐름은 영웅의 일대를 기술하는 한국소설의 전통적인 면에서 충분히 교량적 구실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 홍길동전 〉 이 가지고 있는 도술적인 요소는 그 뒤의 군담소설에서 충분히 계승되어 당시 한국인이 가지고 있던 정신적 승리의 문학의 전통을 이어갔다고 볼 수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 한국정신문화연구원과 서울대학교 도서관 · 단국대학교 율곡기념도서관 나손문고(舊 金東旭 소장)에 있다.
≪ 참고문헌 ≫ 洪吉童傳硏究(鄭 泄 東, 文豪社, 1961), 홍길동전(황패강 · 정진영, 시인사, 1984), 洪吉童傳의 國內的遡源(金東旭, 李崇寧博士頌壽紀念論叢, 乙酉文化社, 1968), 洪吉童傳의 比較文學的考察(李在秀, 韓國小說硏究, 宣明文化社, 1969), 洪吉童傳의 比較文學的考察(金東旭, 許筠의 문학과 혁신사상, 새문社, 1981). (자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화 자료
'홍길동전'의 영웅 소설적 구조
'홍길동전'은 우리나라의 고대 건국신화로부터 시작하여 조선 후기의 영웅 소설에까지 이어지는 '영웅의 일생'이라는 유형구조를 소설에까지 이어지는 '영웅의 일생'이라는 유형구조를 소설화한 첫작품으로 볼 수 있다. '영웅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서사적 유형 구조는 아래에서 보듯이 '홍길동전'과 대체로 일치한다.
① 고귀한 혈통의 인물 : 홍 판서의 아들
② 비정상적인 잉태 혹은 태생 : 시비 춘섬을 어머니로 해서 서자로 태어남.
③ 비범한 지혜와 능력 : 특별히 총명하고 도술에 능함.
④ 어려서 위기를 겪거나 기아(棄兒)가 되어 죽을 고비에 이름 : 음모에 의해 생명의 위기를 겪음.
⑤ 구출. 양육자를 만나서 위기를 벗어남 : 자객을 죽이고 위기를 벗어남.
⑥ 자라서 다시 위기에 부딪힘 : 나라에서 길동을 잡아들이려 함.
⑦ 투쟁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승리자가 됨 : 부정한 권력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병조판서를 제수 받고, 마침내 율도국의 왕이됨.
다만 이 가운데서 ②와 ⑤ 는 일반적인 영웅 소설과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영웅 소설의 주인공들이 대개 귀족 가문 출신인 데 비해, 홍길동은 서자라는 불리한 신분이다. 또, 홍길동은 죽음의 위기를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하며, 어느 누구의 양육을 받지 않고도 탁월한 무예와 지략으로 활빈당의 우두머리가 된다. 또한 ⑤의 특징으로는 '홍길동전'이 영웅 신화와 조선 후기 영웅 소설을 연결하는 중간 단계의 특징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홍길동전의 성격과 인간적 특징
홍길동은 적서의 차별에 반발하면서 자신의 신분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집은 나온 후, 도적의 두목이 되어 의적 행세를 하다가 해외에 나가 율도국의 왕이 된다. 이 세 단계를 지나면서, 홍길동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끝없이 도전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즉, 그는 '영원한 반항아'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홍길동은 총명이 과인하여 적서 차별의 모순을 뼈저리게 느끼고, 또한 그의 신분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정상적으로 발휘할 수 없음을 깨달은 후, 사회 제도를 향한 저항 의식을 갖게 된다. 길동은 이 저항 의식을 도적이 된 후 사회 체제에 반항함으로써 드러낸다. 그의 저항 의식은 아무런 방향성을 지니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길동은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계획을 성사시키는 인물인 것이다.
홍길동전과 관련된 논의
1. 수호지와의 관계 : 택당잡저에 '허균작홍길동전以擬水滸'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을 근거로 홍길동전이 수호지의 모작이라 해 왔다. 그러나 이 구절의 '擬'는 모방이 아니고, '견주다'의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또, 구성상으로 보아도 홍길동전이 수호지에서 받은 영향은 극히 부분적인 데 불과하다.
2. 전우치전과의 관계 : 작자 미상의 이 소설은, 전우치의 도술 행각이라든지 부패한 정치상의 폭로, 빈민구제사상 등에 있어 홍길동전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장이 졸렬하고 표현이 엉성하여 홍길동전에는 미치지 못한다.
아류(亞流)작품 전우치전(田禹治傳)
작자가 알려져 있지 않다. 주인공 전우치의 도술 행각을 그린 고대 소설로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초인간적이어서 황당 무계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정치의 부패상과 당쟁(黨爭)을 지적하고, 빈민 구제(貧民救濟)에 헌신하고자하는 주인공의 의협심이나 사상이 '홍길동전'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일종의 사회 소설이다. '홍길동전'의 아류 소설(亞流小說)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 문장과 표현은 '홍길동전'에 미치지 못한다.
홍길동전의 창작 동기
임진왜란 이후 사회가 극도로 문란해지고 양반 토호들의 횡포가 극에 이르자, 이를 개혁하려는 의지(意志)가 나타나게 되었으며, 특히 적서 차별에 의해 서류(庶類) 출신의 천대가 심하므로 이와 같은 사회 제도의 모순을 개혁하고자 했던 것이 창작 동기라 할 수 있다.
'홍길동전'의 문학사적 의미
'홍길동전'은 국문 소설의 효시가 되며, 당시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대담하게 고발하고, 적서 차별 타파, 탐관오리 규탄, 이상국 건설에 대한 작가의 견해를 제시한 작품이다. '금오신화' 이후 비교적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전기적(傳奇的) 성격을 탈피하고 비로소 소설의 형태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국문학사상의 의의를 지닌다. 내용상으로는 저항 정신이 반영된 평민 문학이라 할 수 있다.
역사상의 홍길동과 활빈당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의 모델은 실재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산군 6년(1500년)에 홍길동을 체포하였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양반 집안의 서자인 듯한데, 가정 안의 심한 갈등으로 강상의 변 - 가족을 살해하거나 패륜하는 등 삼강 오륜에 어긋나는 일을 함 - 을 저지르고 도주하여 도적떼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충청도 지방에서 주로 활동한 듯하며, 대낮에 당상관 복장을 하고 무장한 부하를 거느리고 관청에 버젓이 출입하여 무뢰한 행동을 자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20세기 초(1899년경 ~ 1904년경) 금강 북부, 즉 충청남도 서부 연안의 내포 지방을 중심으로 한 '활빈당'의 활동도 있었다. 이는 19세기 말의 의병 운동 이후의 농민군 집단 투쟁의 하나로서, 인간의 평등, 사회적 빈부의 타파, 나라의 혁신을 지향하며 '홍길동전'의 세계를 되살린 것이다.
'홍길동전'의 결말 구조
이 작품의 결말은 길동이 병조 판서를 제수받은 후 해외로 나가 율도국이라는 이상국을 건설하고 그 곳의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당대 사회의 모순을 척결하고 새로운 이상 사회를 세우고자 하는 작가 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사회 개혁에 대한 작가의 좌절을 이상향으로 도피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홍길동전에서 '율도국'의 의미
율도국은 허균이 설정한 이상 사회이다. 조선에서 자신의 이상이 근본적으로 관철되지 못하자 그의 이상은 새로운 국가의 건설, 즉 율도국의 건설로 뻗어나간다. 율도국은 '산무도적하고 도불유습'하는 이상국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이 곳은 중국을 섬기지도 않고 조선사람들이 출입하지 않는 나라이다. 말하자면 중국도 조선도 아닌 새로운 나라이다. 그렇지만 그 곳이 봉건 지배 체제를 탈피한 국가는 아니다. 물론 이것은 허균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그 시대의 한계로 보인다. 그러나 홍길동이 세운 율도국은 박지원의 <허생전>에서의 남방의 섬에 앞서 고전 소설사에서는 처음으로 등장하는 일종의 유토피아라는 점에서 주목되어야 마땅하다. 더구나 이 유토피아는 단순히 무릉도원이 아니라, 사회적 제 모순에 대한 적극적 비판과 저항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이기에 그만큼 역사적인 것이다. '율도국'의 존재로 '홍길동전'은 해외진출의 이상을 작품 속에서 실연한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홍길동전의 주제 해석
'홍길동전'에서 비판하는 적서 차별의 문제는 축첩 제도를 공인하는 국가, 귀천의 신분을 만든 사회, 천인의 진출을 막는 사회 제도 등이 원인이다. 이런 문제를 한 개인이나 가정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사회 국가 전체의 문제로 인식한 것이 이 작품의 본질이다. 길동이 적서 차별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출 후 병조 판서를 제수 받기까지의 과정은, 길동과 도적 집단(도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농민 집단)의 개인적, 사회적 문제의 제기이다. 그것을 주인공이 신분 상승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해결하였다.
허생전과 홍길동전에 나타난 이상향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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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전(무인공도) |
홍길동전(율도국) |
성 격 |
가족을 바탕으로 하는 농경사회 |
추상적인 낙원 |
해외진출 |
구체적인 해외 교역의 대상 |
단순히 현실과 유리된 곳 |
지 향 점 |
완전한 이상향이 아닌 중간 휴식지 |
완전한 이상향, 최종적인 공간 |
홍길동전
조선 중기에 허균(許筠)이 지었다고 전하는 고전소설. 1책. 필사본·목판본. 〔작 자〕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기록은 이식(李植)의 ≪택당집 澤堂集≫ 별집(別集) 권15 〈산록 散錄〉에 전한다. 이를 근거로 하여 허균을 〈홍길동전〉의 작자로 여겨왔다.
그러나 ≪택당집≫의 기록은 이식의 사후(死後) 송시열(宋時烈)이 교정(校正)·편찬(編纂)한 것이어서 그 신빙성이 떨어지며, 허균이 처형될 때의 죄목에 이 작품을 지었다는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홍길동전〉의 작자가 허균이 아닐 것이라는 의문도 계속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허균은 〈엄처사전 嚴處士傳〉·〈손곡산인전 蓀谷山人傳〉·〈장산인전 張山人傳〉·〈남궁선생전 南宮先生傳〉·〈장생전 蔣生傳〉과 같은 한문소설을 여러 편 지어, 실존한 방외인(方外人)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또한 뛰어난 지략을 갖고 있는 인물이 등용되지 못하는 현실을 비판하거나, 백성들을 수탈하는 지방 수령들을 응징하는〈홍길동전〉의 주요한 내용은 허균의 생각이 압축되어 있는 〈유재론 遺才論〉·〈호민론 豪民論〉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택당의 기록을 부정할 수 있는 실증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한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이 본〕
현재 전하는 〈홍길동전〉에는 17세기 말에 실재했던 인물인 장길산(張吉山)이 언급되는 등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그대로의 모습이 아닐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홍길동전〉의 원본은 아직 발견된 바 없고, 세부적인 내용과 표현에서 상호간에 차이가 있는 후대적 이본(異本)이 많이 전해온다. 판각본·필사본·활자본이 다 있다.
판각본에는 경판본과 안성판본, 완판본이 있다. 경판으로는 야동본(30장)·한남서림본(24장)·어청교본(23장)·송동본(21장) 4종이 있으며, 안성판으로는 23장본·19장본 2종이 전한다. 이 외에 완판 36장본이 있다.
필사본으로는 89장본과 86장본, 52장본, 21장본이 있으며, 한문 필사본으로는 〈위도왕전 韋島王傳〉이 유일하다. 활자본으로는 회동서관·덕흥서림 등에서 간행한 것이 다수 전한다.
이들 이본은 다시 경판계열·완판계열·필사본계열로 나눌 수 있다. 경판계열에는 경판본 전부와 안성판본 및 필사 21장본이, 완판계열에는 완판본과 필사 52장본이, 필사본계열에는 한문본과 필사 89장본, 필사 86장본이 각각 속한다.
현전〈홍길동전〉 가운데 가장 오랜 최선본(最先本)은 경판 24장본의 제1장에서부터 제20장까지이며, 원래의 〈홍길동전〉의 전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경판 30장본이다.
완판본은 후대적 부연의 성격이 강한 이본으로, 경판에서 서얼차별(庶孼差別)이라는 신분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것과 달리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고발과 비판의식을 더 부각시키고 있다. 필사 89장본은 내용이 가장 풍부한 이본이며, 한문본은 지금까지 발견된 유일본으로 국문본을 번역한 것이다. 〔형성 배경 및 원천〕 〈홍길동전〉이 형성된 배경으로 〈수호전 水滸傳〉·〈서유기 西遊記〉 등 중국소설과의 영향관계가 거론되어 왔다. 그러나 부분적인 삽화나 인물유형의 공통성은 인정되지만, 두 작품 사이의 전반적이고 직접적인 영향관계를 인정하는 것은 무리이다.
이에 따라 연산군(燕山君)대의 홍길동(洪吉同), 명종(明宗)대의 임꺽정(林巨正), 선조(宣祖)대의 이몽학(李夢鶴), 광해군(光海君)대의 칠서(七庶) 등 국내의 역사 사실에서 〈홍길동전〉의 사건, 인물 형성의 배경을 추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의 국내적 형성배경으로 가장 가능성이 큰 것은 실재 인물 홍길동의 전(傳)이라고 할 수 있다. 〔줄거리〕 주인공 홍길동은 조선조 세종 때 서울에 사는 홍판서의 시비 춘섬의 소생인 서자(庶子)이다. 길동은 어려서부터 도술을 익히고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기상을 보였으나, 천생(賤生)인 탓으로 호부호형(呼父呼兄)하지 못하는 한을 품는다. 가족들은 길동의 비범한 재주가 장래에 화근(禍根)이 될까 두려워하여 자객을 시켜 길동을 없애려고 한다.
길동은 위기에서 벗어나자 집을 나서 방랑의 길을 떠나 도적의 두목이 된다. 길동은 기이한 계책으로 해인사(海印寺)의 보물을 탈취하였으며, 그 뒤로 활빈당(活貧黨)이라 자처하고 기계(奇計)와 도술로써 팔도 수령들의 불의(不義)의 재물을 탈취하여 빈민에게 나누어주고 백성의 재물은 추호(秋毫)도 다치지 않는다.
길동이 함경도 감영의 재물을 탈취해가자 함경 감사가 조정에 장계(狀啓)를 올려 좌·우포청으로 하여금 홍길동이라는 대적(大賊)을 잡게 한다. 이에 우포장 이흡(李洽)이 길동을 잡으러 나섰으나 우롱만 당하고 만다.
국왕이 길동을 잡으라는 체포령을 전국에 내렸으나 호풍환우(呼風喚雨)하고 둔갑장신(遁甲藏身)하는 초인간적인 길동의 도술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조정에서는 홍판서를 시켜 회유하고 길동의 형인 인형도 가세하여 길동의 소원대로 병조판서를 제수한다. 길동은 서울에 올라와 병조판서가 된다.
그 뒤 길동은 고국을 떠나 남경(南京)으로 가다가 산수가 수려한 율도국(琉島國)을 발견한다. 요괴를 퇴치하여 볼모로 잡혀온 미녀를 구하고 율도국왕이 된다. 마침 아버지가 죽자 부음(訃音)을 듣고 고국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치고 다시 율도국으로 돌아가 나라를 잘 다스린다.
〔평가 및 의의〕
〈홍길동전〉은 16세기 이후 빈번해지던 농민봉기와 그것을 주도했던 인간상에 대한 구비전승을 근간으로 하고, 그 현실적 패배와 좌절을 승리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민중의 꿈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후반부가 허구적으로 첨가되었다고 추정된다. 〈홍길동전〉은 문제의식이 아주 강한 작품이다. 사회문제를 다루면서 지배 이념과 지배 질서를 공격하고 비판하는 방향에서 다루었으므로 문제의식이 뚜렷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지배 이념에 맹종하고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면서 무수히 쏟아져 나온 흥미본위의 상업적 소설과는 본질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당대 현실에 실재했던 사회적인 문제점을 왜곡함이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면에서 이 작품은 사실주의적이고 현실주의적인 경향을 지니며, 적서차별 등의 신분적 불평등을 내포한 중세사회는 마땅히 개혁되어야 한다는 주제의식을 지닌다는 점에서 진보적인 역사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홍길동전〉은 작품 경향, 사회의식, 역사의식에 있어서 〈금오신화〉에서 마련된 현실주의적 경향, 강렬한 사회 비판적 성격, 진보적인 역사의식을 이어받아, 후대의 연암소설(燕巖小說)과 판소리계 소설 등의 작품으로 넘겨주는 구실을 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소설사적 의의를 가진다. ≪참고문헌≫ 홍길동전연구(정주동, 문호사, 1961), 완판방각소설의 문헌학적 연구(유탁일, 학문사, 1981), 홍길동전(황패강·정진영, 시인사, 1984), 홍길동전 연구(이윤석, 계명대학교출판부, 1997), 경판방각소설 판본연구(이창헌, 태학사, 2000), 홍길동전의 國內的 遡源(김동욱, 이숭녕박사송수기념논총, 을유문화사, 1968), 홍길동전의 비교문학적 고찰(이재수, 한국소설연구, 선명문화사, 1969), 홍길동전의 비교문학적 고찰(김동욱, 허균의 혁신사상, 새문사, 1981), 홍길동전 異本新考(송성욱, 관악어문연구 13,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1988), 한문본 홍길동전 검토(이종주, 국어국문학 99, 국어국문학회, 1988), 홍길동전의 제문제와 그 해결(이강옥, 한국고전소설 편찬위원회, 한국고전소설론, 새문사, 1990), 홍길동전(이문규, 한국고전소설작품론, 집문당, 1990), 홍길동전의 텍스트문제(정규복, 정신문화연구 14권 3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허균(許筠)
1569(선조 2) ∼ 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 ( 陽川 ).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 학산(鶴山) · 성소(惺所) · 백월거사(白月居士). 아버지는 서경덕 ( 徐敬德 )의 문인으로서 학자 ·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동지중추부사 ( 同知中樞府事 ) 엽(曄)이다. 어머니는 후취인 강릉김씨(江陵金氏)로서 예조판서 광철(光轍)의 딸이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성(筬)이 이복형이다. 봉( 燈 )과 난설헌(蘭雪軒)이 동복형제이다.
허균은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9세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다. 12세 때에 아버지를 잃고 더욱 시공부에 전념하였다. 학문은 유성룡 ( 柳成龍 )에게 나아가 배웠다.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하나인 이달 ( 李達 )에게 배웠다. 이달은 둘째 형의 친구로서 당시 원주의 손곡리(蓀谷里)에 살고 있었다. 그에게 시의 묘체를 깨닫게 해주었다. 인생관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허균은 26세 때인 1594년(선조 27)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 ( 說書 )를 지냈다. 1597년에 문과 중시 ( 重試 )에 장원하였다. 이듬해에 황해도 도사 ( 都事 )가 되었다.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여섯 달만에 파직되었다. 그 뒤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 · 형조정랑을 지냈다. 1602년 사예 ( 司藝 ) ·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였다. 이 해에 원접사 이정구 ( 李廷龜 )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1604년 수안군수(遂安郡守)로 부임하였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나왔다.
허균은 1606년에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다.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었다. 그러나 석 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그 뒤에 공주목사로 기용되어 서류(庶流)들과 가까이 지냈다. 또다시 파직 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다.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교분을 두터웠다.
허균은 1609년(광해군 1)에 명나라 책봉사가 왔을 때에 이상의 ( 李尙毅 )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다. 1610년에 전시 ( 殿試 )의 시관으로 있으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 ( 咸悅 )로 유배되었다. 그 뒤에 몇 년간은 태인 ( 泰仁 )에 은거하였다. 허균은 1613년 계축옥사에 평소 친교가 있던 서류출신의 서양갑 ( 徐羊甲 ) · 심우영 ( 沈友英 )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이첨 ( 李爾瞻 )에게 아부하여 대북(大北)에 참여하였다. 1614년에 천추사 ( 千秋使 )가 되어 중국에 다녀왔다.
그 이듬해에는 동지 겸 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에 ≪ 태평광기 太平廣記 ≫ 를 비롯하여 많은 책을 가지고 왔다.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허균은 1617년 좌참찬이 되었다.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 ( 奇自獻 )과 사이가 벌어지고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 아들 기준격(奇俊格)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렸다. 허균도 상소를 올려 변명하였다.
1618년 8월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다.,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는 것이 탄로났다.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허균에 대한 평가는 당시의 총명하고 영발(英發)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문장과 식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람됨에 대하여서는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여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의 생애를 통해 보면 몇 차례에 걸친 파직의 이유가 대개 그러한 부정적 견해를 대변해 주고 있다.
허균은 국문학사에서는 우리 나라 최초의 소설인 〈 홍길동전 〉 을 지은 작가로 인정되고 있다. 한때 그가 지었다는 것에 대하여 이론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18년 아래인 이식 ( 李植 )이 지은 ≪ 택당집 澤堂集 ≫ 의 기록을 뒤엎을 만한 근거가 없는 이상 그를 〈 홍길동전 〉 의 작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생애와 그의 논설 〈 호민론 豪民論 〉 에 나타난 이상적인 혁명가상을 연결시켜 보면 그 구체적인 형상화가 홍길동으로 나타났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허균의 문집에 실린 〈 관론 官論 〉 · 〈 정론 政論 〉 · 〈 병론 兵論 〉 · 〈 유재론 遺才論 〉 등에서 그는 민본사상과 국방정책과 신분계급의 타파 및 인재등용과 붕당배척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내정개혁을 주장한 그의 이론은 원시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것이다. 백성들의 복리증진을 정치의 최종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허균은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한 유가로서 학문의 기본을 유학에 두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 · 도교에 대하여 사상적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한때 출가하여 중이 되려는 생각도 있었다.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한평생을 헛되이 보낼 뻔하였다는 술회를 하기도 하였다. 불교를 믿는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서도 자기의 신념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음을 시와 편지글에서 밝히고 있다. 허균은 도교사상에 대해서는 주로 그 양생술과 신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은둔사상에도 지극한 동경을 나타내었다. 은둔생활의 방법에 대하여 쓴 〈 한정록 閑情錄 〉 이 있어 그의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
허균 자신이 서학 ( 西學 )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없다. 그러나 몇몇 기록에 의하면 허균이 중국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가지고 온 것을 계기로 하늘을 섬기는 학을 하였다고 하였다. 이 점은 그가 새로운 문물과 서학의 이론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허균은 예교(禮敎)에만 얽매어 있던 당시 선비사회에서 보면 이단시할 만큼 다각문화에 대한 이해를 가졌던 인물이며, 편협한 자기만의 시각에서 벗어나 핍박받는 하층민의 입장에서 정치관과 학문관을 피력해 나간 시대의 선각자였다.
허균은 그의 문집 ≪ 성소부부고 惺所覆 螺 藁 ≫ 를 자신이 편찬하여 죽기 전에 외손에게 전하였다고 한다. 그 부록에 〈 한정록 〉 이 있다. 그가 스물다섯살 때에 쓴 시평론집 ≪ 학산초담 鶴山樵談 ≫ 이 ≪ 성소부부고 ≫ 가운데에 실려 있는 〈 성수시화 惺 馬 詩話 〉 와 함께 그의 시비평 안목을 보여 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반대파에 의해서도 인정받은 그의 시에 대한 감식안은 시선집 ≪ 국조시산 國朝詩刪 ≫ 을 통하여 오늘날까지도 평가받고 있다. 허균의 저서 ≪ 국조시산 ≫ 에 덧붙여 자신의 가문에서 여섯 사람의 시를 뽑아 모은 ≪ 허문세고 許門世藁 ≫ 가 전한다.
이 밖에 ≪ 고시선 古詩選 ≫ · ≪ 당시선 唐詩選 ≫ · ≪ 송오가시초 宋五家詩抄 ≫ · ≪ 명사가시선 明四家詩選 ≫ · ≪ 사체성당 四體盛唐 ≫ 등의 시선집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또, 임진왜란의 모든 사실을 적은 〈 동정록 東征錄 〉 은 ≪ 선조실록 ≫ 편찬에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고 하는데 역시 전하지 않는다. 전하지 않는 저작으로 〈 계축남유초 癸丑南遊草 〉 · 〈 을병조천록 乙丙朝天錄 〉 · 〈 서변비로고 西邊備虜考 〉 · 〈 한년참기 旱年讖記 〉 등이 있다.
≪ 참고문헌 ≫ 惺所覆 螺 藁, 허균의 생각(이이화, 뿌리깊은 나무, 1980), 허균의 문학과 혁신사상(김동욱편, 새문社, 1981), 許筠論(李能雨, 숙대논문집 5, 1965), 許筠硏究(金鎭世, 국문학연구 2, 서울대학교, 1965), 許筠論 再攷(車熔柱, 亞細亞硏究 48, 1972), 許筠(鄭 泄 東, 韓國의 人間像 5, 新丘文化社, 1972), 蛟山許筠(金東旭, 한국의 사상가 12인, 현암사, 1975), 許筠(조동일, 한국문학사상사시론, 지식산업사, 1978). (자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허균의 후인평
허균은 명문 문인 허 엽의 아들로서 경박하다는 평은 들었으나, 시폐를 통탄하던 탁월한 문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수호전을 애독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우리 전래의 이와 비슷한 설화, 이를테면 임꺽정 고사 같은 데에서 추재하여 창작한 것이 곧 홍길동전이었다. - 이병기, '국문학전사(1957)
신분(조선시대의 신분제도)
조선시대의 신분제도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이루어진 사회경제 변화와 성리학적 신분관념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조선왕조가 개국하자마자 직면한 신분 재편성문제는 지배신분의 이원화와 양인신분의 확대로 해결의 방향을 잡게 되었다.즉, 지배층인 양반의 배타적·신분적 우위의 확보, 중인신분의 창출과 고정화, 국역을 부담할 양인층의 확대, 노비신분의 확정을 시급히 시행하여야 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고려 후기 이래 지배층이 비대해졌기 때문에 집권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하여는 비대해진 지배층을 축소, 정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리하여 그들은 그 때까지 실직(實職)이든 산직이든 간에 문무양반의 관직을 받은 바 있는 자들만 상급지배신분으로 인정하였다.
반면에 향리 가운데 여전히 지방에 머물고 있었던 색리층(色吏層)·기관층(記官層)과 같은 하급 향리층을 비롯하여 중앙관청의 서리와 기술관·군교·역리 들은 하급지배신분으로 격하시켰다.또한 양반들은 천인의 피가 섞였거나 첩에게서 난 소생들을 서얼로 과감하게 도태시켰다. 이렇게 형성된 하급지배신분은 중인으로 양반과는 현격히 다른 신분 지위를 감수해야 했고, 신분 상승의 기회는 거의 박탈당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중인들의 임무도 성리학적 관념에 의하여 비하되고 권력과는 거리가 있는 실무행정·기술·업무 보조 등에 국한되고 말았다.국가정책의 결정 및 경제적 부, 사회적 위세 등은 상급지배신분인 양반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며 의무가 되었다. 또한 양반 집권자들은 국가의 공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그 기반이 되는 양인을 늘리는 정책을 시행하였다.이 정책의 중요한 내용으로는 노비변정사업, 승려의 환속, 신량역천층의 설정, 신백정의 양인화 등을 들 수 있다. 정책 수행과정에서 조세와 역의 부담자를 증가시키기 위하여는 천인신분보다는 양인신분의 확대가 중요하였다. 그러므로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일천즉천(一賤則賤)과 같은 전통적인 원칙을 일시적으로 깨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단 규정된 양인과 천인의 신분은 엄하게 준수토록 해서 명분으로 지탱되는 사회질서를 공고히 하고, 나아가 국가와 지배층의 물질적 기초를 확고하게 하려 하였다. 이리하여 조선 초기에는 양인의 수가 대폭 늘어나고, 그 지위도 보다 안정되고 향상되었다.조선왕조의 신분제도의 완성시기와 종류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었지만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 하고 있다. 먼저 신분 완성시기에 관한 여러 학설을 보면, 15세기설·16세기설·17세기설이 있고, 종류에 대하여도 4종·3종·2종을 각각 주장하고 있다.이렇게 서로 다른 학설들이 정리되기 위하여는 신분의 개념과 각 신분의 구체적이며 실증적인 연구가 더욱 축적되어야 한다. 특히 하나의 신분이 범주상으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실제 어떤 속성이 어느 정도 드러나야 하는가 하는 일종의 신분결정 기준이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통설이 나오기 전까지는 심도 있게 연구를 해야 하지만, 일단 조선시대의 신분을 양반·중인·양인·노비로 이해하려고 한다.
양반은 경제적으로 지주층이며, 정치적으로는 관료층으로서 조선왕조를 운영해온 최고의 지배신분이었다. 고려시대의 양반은 단지 관례상의 문반과 무반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양반은 그 가족까지 모두 포함하는 개념의 신분이다.이들은 생산에는 전혀 종사하지 않고, 오직 예비관료 내지는 유학자의 소양과 자질을 닦던 신분이었다. 전통사회의 신분은 법적 제도와 사회 통념으로 결정되므로 양반 자격의 기준도 그 점에서 먼저 찾아야 할 것이다.조선왕조는 양반지주층의 계급 이익을 보장하기 위하여 세워진 국가로서 각종 법률로 양반의 신분적 특권을 규정하였다. 또한 국가체제는 왕을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였기 때문에 관료로서 국가권력에 참여하지 못 하면 일단 지배층에서 탈락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국가권력과 완전히 절연하고 자신의 사적 지배영역을 확보할 수 있는 존재는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지배신분을 획득하고 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하여는 국가의 지배층 충원제도인 과거에 합격하거나 음서를 받는 것이 필요했다.음서는 2·3품 이상의 양반 고급관료의 자제를 간단한 시험을 거쳐 임용하는 특권 관료 충원제도였다.
그러나 고려의 그것과 비교하면 수혜범위가 좁혀졌을 뿐 아니라, 음서출신자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차별을 면하지 못하던 실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서는 여전히 관료 등용의 중요한 통로였고, 중국에도 없는 대가제(代加制)가 마련되어 고급 양반관료의 특권이 보장되었다.그러나 문무 과거는 이와 같은 개인 혈통을 중시하는 신분사회 속성을 가진 음서와는 달리, 개인 능력을 절대 평가기준으로 삼고 있던 제도였다. 또한 과거는 가장 보편적이고 중요한 관료 충원제도이기도 하였다.그리하여 관료로 출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에 합격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도 응시자격과 입격 후 임용에는 신분 차별이 있었다. 향리·범죄자·서얼자손 등은 과거를 볼 수 없었고, 비록 양인에 대한 응시제한이 법제에서 보이지 않지만 양인이 양반과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을 만큼 사회경제적·교육적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고는 보기 어렵다.그리고 과거 합격 자체는 관리후보자 자격 인정에 불과하였으므로 모든 합격자에게 관직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출세가 보장되고 권세가 있던 청요직(淸要職:뒷날 높이 될 자리나 현재 요직)을 얻는 데는 신분 배경이 필요하였다.
예를 들면, 평안도 출신 과거합격자는 다수였으나 실제 임용된 관리와 고급관료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선사회가 고려사회보다 상대적으로 신분을 중시하는 귀족제 성격이 약했다고 해도 양반 신분의 특권은 결코 무시되지 않았다.이와 같은 신분의 차등은 관료 충원제도뿐 아니라 관료체제 자체에도 해당되었다. 관계(官階)에는 당상·당하·참상·참하의 구별이 있어서 이를 바탕으로 각 신분의 한품서용이 있었다.이 한품서용에 해당되지 않고 고급관료인 당상관에 오를 수 있던 신분은 오직 양반밖에 없었다. 또한 무반 우위라든지, 토관계(土官階)와 잡직계(雜職階)의 설치도 문인인 양반의 신분적 우월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양반은 국역체제에서도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국가는 원칙적으로 노비를 제외한 전 신분에 신역(身役)을 부과하고 있었다. 양반의 특권인 관직 취임도 일종의 직역이었다. 성년 남자는 직역이 없으면 군역을 부담해야 했다. 그런데 군역이 양인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양반들은 여기서도 특전을 받고 있었다.양반으로서 면역받는 자는 현직 관리 외에도 성균관·향교·사학(四學)의 유생, 2품 이상 고위관직 경력자 등이 포함되었다.
초기에는 양반들은 수전패(受田牌)·갑사(甲士)·별시위(別侍衛)·오위(五衛) 등 서반특수직(西班特殊職)에 입속하여 서반체아직(西班遞兒職)을 받음으로써 군역과 사환(仕宦)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었고, 특수군 경력은 그대로 인정받아 수령까지 될 수 있었다.이들은 성종 이후에는 아예 군역을 부담하지 않는 특권신분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군역을 진다는 것은 양반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양반과 양인의 명분을 크게 흐리는 것이고, 양반신분을 포기하는 것과 동일하였다.그리고 양반은 본래 지주층으로서 크고 작은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관리로서 국가에 복무할 경우에는 봉록 외에도 품계에 따라 일정한 수조지(收租地)를 받고 있었다. 양반관리가 아닌 서리·향리·일반군인들은 과전법상으로 수조지분급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양반은 경제적 기반을 국가에만 의존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국가 권력을 이용하여 더욱 많은 토지를 겸병(兼倂:한데 합쳐서 소유함)해갔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가가 법적 제도로 관료의 특권을 보장하였으므로 그 특권을 향유하기 위하여는 관료가 되어야 하였고, 지배 엘리트인 고급 문반관료가 될 수 있었던 신분은 양반뿐이었음을 알 수 있다.하지만 관직이 이렇게 양반신분의 유지에 필수불가결한 통로였다고 해도 신분으로서의 양반을 모두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양반신분 속성 중에는 관직 외에도 사회 통념, 즉 일정지역인의 의식상에 설정되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기준에 해당되어야 하는 것이 많이 있었다. 우선 빼놓을 수 없는 조건이 문벌(門閥), 지벌(地閥)이었다.이 두 가지 조건이야말로 사회적 관계가 분화되지 않고 단순한 사회에서는 개인에 대한 평가의 제일차적인 척도이다. 개인이 혈연과 지연에 몰입되어 있었으므로 생소한 개인의 면모는 이미 잘 알려진 혈연과 지연에 의해 우선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동일한 양반신분이더라도 문벌과 지벌의 명성과 사회 인식에 따라 국반(國班)과 향반(鄕班) 등으로 나누어졌다. 어떠한 양반과 사회적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양반신분의 판별기준은 확실하고 철저하게 설정되어 일반 사회 통념으로 굳어갔다. 이러한 양반의 자격요건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 현조(顯祖:이름이 높이 드러난 조상)의 존재이다.직계조상 중에 다른 사람에게 내세울만한 인물이 전혀 없는 양반은 상상할 수 없다. 양반은 양반으로서 필요한 여러 가지 전통과 지위를 유지 또는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 이상의 업적을 이룩하는 데에 성공한 사람들과 그러한 사람들의 후손만이 양반이 될 수 있었다.
여기서 전통과 지위란 관계진출·학행·혼인·가풍 등을 말한다. 그렇다고 현조의 존재가 모든 후손에게 영구히 후광을 비춰 주는 것은 아니다. 그 현조의 역사적 비중에 따라 그리고 혈연 거리에 따라 현조의 유택이 결정되었다.그리고 세거지(世居地:대대로 살아온 땅)가 없는 양반가문은 있을 수가 없다. 여러 대에 걸쳐 일정한 지역에 거주하면서, 특히 동족부락을 형성하고 그곳과 주변의 양반과 혼인·교유 등의 사회적 관계를 맺어야 양반 체모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더라도 자신의 가문을 인정받기 위하여 외가나 처가, 또는 토지와 노비가 있는 곳을 택하였다.이렇게 향촌사회에서 유력한 양반가문으로 인정받게 되면 남원의 둔덕 이씨, 노봉 최씨, 안터 안씨, 뒷내 노씨의 경우처럼 본래의 본관보다는 세거지를 많이 썼다. 서울의 경우 외척세도가였던 안동 김씨들은 장동 김씨로 불렸다. 이러한 개인과 가문을 양반으로 인정해 주는 사회통념상의 조건은 이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으며, 시대에 따라 그 중요성도 변하였다.중앙관리들이 별로 많지 않던 조선 전기에는 재지품관들이 가장 소망하던 혼인대상은 중앙의 고위관리 가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는 유배를 당한 사람이나 그 동족도 선망의 혼인대상이 되기도 하였고, 실제로 그 혼인을 통하여 가문을 세운 예가 많다.그리고 성리학이 점차 영역을 확대해 나가자 양반 조건으로 성리학적 소양과 그 성취도가 중요시되었다.
예를 들면 경상도에서는 이황(李滉)의 자손, 충청도에서는 송시열(宋時烈)·김장생(金長生)·윤증(尹拯)의 자손이 최고의 혼인대상으로 꼽혔을 만큼 사회적 위세가 대단하였다.기타 문집·족보·비석·서원 등도 주요한 과시거리가 되었다. 특이한 것은 경제행위로서 양반이라면 토지와 노비와 같은 재산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지만, 소유재산의 규모보다도 그 재산을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양반신분에는 더욱 중요하였다. 비록, 재산이 엄청나다고 할지라도 손님접대에 소홀하거나 굶주린 마을의 농민을 진휼하지 않으면 양반으로 존경받을 수가 없었다.이러한 사회통념은 전기보다는 후기의 양반상에 더 가까운 것이며, 후기에 더욱 그런 쪽으로 발전되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조선 전기에도 물론 양반이 몸소 가사노동을 하거나 하면 천시받기도 했지만, 양반신분의 결정은 기본적으로 사회통념보다도 국가권력과의 관계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태조에서 세조에 이르는 왕들은 강력한 전제 왕권을 행사하였다. 왕권이란 의인화된 국가권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왕들은 국가권력의 강화를 위하여 신분제도를 좀더 개방적으로 확정하고 운영하려고 하였다.기득권을 독점적으로 누리려는 일부 관료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의 측근으로서 신분이 미천한 사람, 양인·향리 출신으로 뛰어난 능력과 공로를 인정받은 사람이나 공신의 천첩 자손 등은 왕의 결단과 지지로 신분상승에 성공하는 예가 많았다.이것은 개별 사례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국가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것이며, 실제로 국가와 양반의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한 노비종모법과 종부법의 대결과정에서도 국가의 신분결정력을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16세기 전까지는 신분제도의 확정기로서 국가권력과의 관계에 따라 신분의 결정이 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그 후에 정치적으로는 사림파가 중앙정계를 정복하였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향촌사회에서 사족과 향리의 가계가 확연히 분리되고 문중이 형성되었으며, 상속과 제사와 같은 사회구조와 관련된 풍속조차 변하게 되었다.더구나 양반인구의 증가와 당쟁 때문에 관직 획득이 전보다 수월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는 양반신분은 법적 제도 외에도 굳건한 사회적 통념에 의존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특히 정치적으로 몰락하던 경상도지역에서는 재지양반에 의한 향촌지배가 최고 전성기를 맞게 됨에 따라, 재지양반이 중앙권력에 덜 의존하여도 될 사회경제적 기초가 확립되었다.양반신분에 관한 이상의 내용을 줄여 말하면, 양반은 지주계급인 동시에 관료층이며, 국가의 법적 제도에 의하여 신분적 특권을 보장받은 지배신분이었다. 또 이들은 일정한 사회적 여러 조건을 구비하여야 양반신분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다.
양반집권자들은 지배신분의 이원화를 단행하면서 향리를 양반과 구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조처를 취하였다.우선 향리의 과거 응시 자격을 제한하였고, 일정한 기준에 의해 이미 양반관료가 된 자들까지 향리로 환원시켰다. 또한 중앙집권력 강화 정책에 의해서도 향리의 세력과 신분적 지위가 약화되어 갔다. 외역전(外役田)의 혁파, 원악향리처벌법(元惡鄕吏處罰法)의 제정, 유향소(留鄕所)의 설치 등이 그 방법이었다.이에 따라 전 향리의 80% 정도가 토착지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향리는 지방관의 수족과 다름없게 되었고, 심지어는 향리의 역에서 도망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그래도 향리들은 이전 토호의 실력과 실무행정 담당자의 권세로, 비록 양반에게는 제압을 당하였지만 양인과 노비 등 일반 주민에게는 여전히 강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따라서 향촌사회에서의 향리의 사회적 지위는 중간적인 것으로, 서울의 기술관인 중인들과는 관직·혈연·교유·혼인의 면에서는 소원하였지만 양반과 양인의 중간에 있다는 공통점으로 중인신분에 포함될 수 있었다.사실, 중간 신분으로서의 향리와 기술관은 직역의 세습, 신분내혼제, 관청 근접 지역 내 거주, 이기타산적이며 깔끔한 사고방식 등의 면에서 서로 유사한 점을 많이 공유했고, 다른 신분과도 분명히 구별될 수 있었다.
중앙 아전인 서리들도 향리와 마찬가지로 양반과 구별되었다.이들도 고려시대에는 양반으로 상승하는 길이 넓었고, 봉록과 토지까지도 지급받았다. 그러나 조선왕조에서는 심한 차별대우를 받아야 하였다. 과전법상의 과전지급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진급을 하는 데도 양반보다 근무 일수가 더욱 많아야 했고 그나마 체아직(遞兒職:현직을 내놓은 문무관에게 주는 벼슬로 녹봉만 주고 실무는 없음)이었기 때문에 봉록도 형편없었고 승진의 기회도 좁았다.즉, 다른 중인처럼 한품서용(限品敍用:서자나 신분이 낮은 사람, 죄짓고 면죄된 사람을 관원으로 쓸 때 일정한 자리까지 제한하던 일)에 해당되어 승진이 막혔다. 또한 서리와 함께 중앙관서에서 기술을 담당하는 의관·역관·산관·율관·음양관 등도 15세기 후반부터 점차 양반과 다른 신분이 되었다.이들 신분의 특징은 17세기에 이르러 소수의 명문 기술관 가문이 잡과를 석권함으로써 뚜렷하게 나타난다. 서얼자손들도 역시 금고되어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고, 제사·입양·상속에서 적자손에 비하여 많은 차별을 받았다. 이와 같은 제한 규정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만들어졌다.
그러나 일반사회에서 서얼자손을 더욱 차별하게 된 것은 성리학적 관념 때문이었다.서얼은 다른 중인신분과 마찬가지로 자기들끼리의 혼인·교유·학맥·동족부락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서얼은 본래 양반의 자손이라는 점에서 다른 중인신분과는 다른 면도 많았고, 서얼들 사이에도 다양한 분자가 뒤섞여 있었다.예를 들면, 서얼은 군역을 부담하여야 하였는데, 지역과 가문에 따라서는 군역을 면탈하는 자도 있었다. 그리고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다른 양반적손들과 대립하는 서얼가문도 적지 않았다. 반면 한미한 양반의 서얼인 자는 일반 양인보다 못 한 처지에 놓이기도 하였다. 전자의 경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양반과 다름이 없었지만 법적 제도와 사회 통념상 차별을 받고 있었을 뿐이었다.양인은 상인·백성·평민으로 불린 신분이었다. 양인이라는 용어는 삼국시대에는 별로 쓰이지 않던 중국에서 차용한 신분개념의 단어이다. 양인은 노비와 함께 사회 재생산을 담당한 피지배계급이었다.그들은 소농민경영자 또는 전호이거나 각종 수공업자와 상인이었다. 양인의 신분관계도 역시 국가권력과 밀접하다.
양인은 국가의 조세와 공물 외에도 신역을 부담하였다. 양반집권자들은 양민확대정책을 꾸준하고 강력하게 밀고 나갔는데, 양인이야말로 국가의 물질적·무력적 기초이기 때문이었다.따라서 양반의 개인적 계급이익을 위해 약간의 사유지와 노비를 제외한 토지와 인민은 국가권력의 관할로 이양시키는 데 힘을 합쳤다. 그리하여 지배층에 들지 못한 양인은 국가 유지에 필요한 물질과 노동력을 제공하였다.국역체제가 바로 물질과 노동력의 수탈체제인 것이다. 결국 개인에게 부과되는 국역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달라졌다. 자영 소농민이나 전호와 같은 생산인구이면서 무예와 학문이 없는 자는 국역에서 양반처럼 특혜를 받을 수가 없었다. 특히 군역은 국역 중에서도 신분과 관련이 깊었다.법률적으로는 양반과 양인은 똑같이 군역을 부담하여야 했지만, 양반과 양인의 병종은 신분에 따라 분명히 구별되었다. 양인의 병종은 양반이 입속되지 않던 별패(別牌)·시위(侍衛)·영진군(營鎭軍)·수성군(守城軍)·기선군(騎船軍)·수군 등이었으며, 정병(正兵)으로 복무하지 않으면 봉족(奉足)의 의무가 부과되었다.여말선초에는 신분구조가 아직 유동적이었고 고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양인 상층에서는 한량(閑良)에 속하거나 갑사·별시위 등에 선발되어 신분상승의 기회를 얻는 자도 나왔다.
그러나 일단 신분제도가 확정되자 일부 특수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일반 병종은 양인만의 것으로 변하였다.그리하여 양반과 양인의 신분 구별은 군역을 부담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쉽게 알 수 있었다. 양인이 교대로 일정기간 복무를 하는 부병제적 군사제도가 붕괴된 뒤에도 양인의 군역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따라서 신분 규정을 법적 제도에서만 찾으려고 한다면 신분의 역사적 실체를 놓치고 말 것이다.그러므로 조선 전기의 신분제는 양반과 양인을 신분적으로 차별하는 법제가 없으므로 양천제이며, 그 단적인 예는 전기 과거에 급제한 양인 출신이 20여 명이나 된다는 주장은 재고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 20여 명이 모두 양인 출신인가라는 실증적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소수인 그들 존재의 의미는 고려 후기와 말기의 획득적 신분단계의 신진사대부세력이 새 왕조에 들어와 귀속적 신분으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그 고착성이 미진한 상태에서 생긴 부분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양반과 양인의 신분적 차등을 부정하기 위하여는 수군으로 군역을 치른 자 가운데 양반신분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물론, 양인이 양반으로 상승할 수 있는 기회가 완전 두절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양인이 양반신분의 조건을 갖추기가 어렵고, 설사 갖춘다고 하더라도 양반으로 인정받기는 매우 어려웠다. 국가 차원의 법제적 구속보다 주변 사람들의 사회 통념을 극복하기가 더욱 어려웠던 것이다.
양인보다 더 아래 신분이었던 노비는 인격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물적 재산처럼 매매·상속·저당·증여가 가능하던 최하층 계급이었다. 노비는 소유자에 따라 공노비와 사노비로 크게 나누어진다. 그에 따라 공노비와 사노비의 직업·예속도·사회적 지위 등에서 차이가 약간 있었다.공노비는 국가의 기관에 소속되어 번을 나눠 뽑아서 각종 잡역이나 수공업품 제조에 종사하거나 신공(身貢)을 바쳤다. 사노비는 개인에게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강한 예속을 받았고, 주로 가사노동은 가내노비가 농업노동은 외거노비가 담당하였다.그러나 어떤 경우, 특히 주인과 멀리 떨어져 살고 주인의 토지를 경작하지 않던 외거노비는 주인에 대한 의무는 신공밖에 없었으므로 오히려 여타의 노비보다 자유로운 처지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그렇지만 주인이 자신을 매매하면 그에 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다른 가내노비와 같았다. 노비는 소유자가 국가이든 개인이든 간에 소유자의 사회적 권위와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봉사하였다. 공적 기관인 국가의 관서는 노비의 소유관계에서는 마치 사인(私人)과 같이 공노비를 착취하려고 하였고, 양반들은 천한 가사노동과 농업경영을 위하여 노비가 반드시 필요하였다.그렇다고 해서 사노비의 주인 신분이 반드시 양반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양인도 노비를 소유할 수 있었고, 드물고 특별한 경우지만 노비도 다수의 노비를 소유하기도 하였다. 국가의 노비에 관한 법률은 소유주의 소유권 및 처분권보다 더 우위에 있었다.
국가는 노비소유주인 양반의 공동이익 실현기구였으므로 노비신분의 판정·매매·혼인·신공·입역·형벌 및 노비재산의 귀속 등에 관련된 세세한 부분까지 규정하는 법률을 만들었다.그만큼 노비의 신분적 지위는 열악하였고, 상승의 기회는 거의 두절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대노비소유주는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노비를 그곳 관리의 도움을 받아 관리하던 예가 많았는데, 이것은 거의 관행이었던 것 같다. 노비의 법적·신분적 지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형법이었다.예컨대 양반인 노비소유주는 관청의 허가를 얻어 노비를 죽일 수 있었지만, 노비가 양반을 구타하면 강상죄에 적용되어 사형을 면하기 어려웠다. 주인과 노비의 관계는 부자의 관계와 같으며, 노비는 항상 공손하여야 한다고 양반들은 말하였다.양반노비주들은 노비 경영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하여 노비세전법을 만들고 그것을 불변의 원칙으로 전제한 뒤, 노비 신분의 판정과 소유관계를 결정하는 종모법과 종부법을 시행하였다. 국가는 양인을 늘리기 위하여 종부법을, 개인 소유주는 종모법을 소망했다. 따라서 양자의 이해관계와 역학관계에 따라 이 두 법이 빈번히 교체되었다.그렇지만 국가의 통제력이 느슨해지자 개인 소유주들은 양천교혼(良賤交婚)의 법까지 어겨가면서 노비 증식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소생이 확실하게 자신의 소유가 되는 양부(良夫)와 자기 비의 혼인을 아주 적극적으로 장려하였고, 그렇지 않은 양녀(良女)와 자기 노의 혼인은 법 그대로 엄중히 막았다.이와 같은 노비의 법적·현실적 위치 때문에 노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말하는 동물’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노비는 동물처럼 어미만 알고 아비는 모른다는 근거로 종모법이 주장되기도 하였다. 이렇기 때문에 비는 노보다 더욱 열악한 처지를 감수해야 하였다. 또한 비는 비록 도망을 하더라도 생계를 유지할 방법이 별로 없었으므로 구속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비는 중요한 재산 증식 수단이 되었고, 따라서 비 중에는 아버지가 다른 경우가 많았으며, 성 도덕도 이에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친족구조가 모계적인 면도 두드러졌다. 노비는 매매가 되고 경제적으로 빈곤하였기 때문에 족적 기반을 형성한다는 자체도 어려웠다. 그렇지만 후기에 들어서 외거노비의 경우는 그것이 가능하기도 하여 신분 상승의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분적 지위에서 기본적으로 생성된 노비의 생활양식은 유교적 가치에서 보면 비천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으므로 노비는 자연히 혹심한 사회적 천대를 면할 수 없었다.양인 중에 빈곤층은 생존을 위하여 스스로 노비의 신분으로 전락하는 일도 많았지만, 비부(婢夫:계집종의 남편)나 고공(雇工:머슴이나 품팔이꾼)이 되더라도 될 수 있으면 노비가 되지 않으려고 애썼다. 더구나 양반은 당장 아사할 지경에 처했더라도 노비가 될 수는 없었다.생존한다고 해도 자기 자신의 사회적 삶은 끝난 것이며, 조상과 자손에게 커다란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신분제도, 그 중에서도 노비제도가 얼마나 가혹한 것이었는가를 말해 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토피아(utopia)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에 완벽한 조건 아래 있는 이상사회.'이상가'(utopian)와 '유토피아적 이상주의'(utopianism)는 대체로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이 이상적인 개혁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유토피아라는 말은 토머스 모어경이 〈국가의 최선 정체(政體)와 새로운 섬 유토피아에 관하여 Libellus …… de optimo reipublicae statu, deque nova insula Utopia〉(1516)라는 라틴어 제목으로 출판한 〈유토피아 Utopia〉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의 '아니다'(ou)와 '장소'(topos)를 합성해 만든 것으로, '아무 데도 없는'(nowhere)이라는 의미였다. 모어는 1515년 플랑드르에서 대사로 지내는 동안 이성에 의해 정책과 제도가 전적으로 지배받는 이교도의 공산주의 도시국가를 그린 〈유토피아〉 제2권을 썼다. 이 책에 묘사된 국가의 질서와 위엄은 자기이익과 권력 및 부에 대한 탐욕으로 분열된 유럽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비이성적인 정책과는 눈에 띄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 유럽 그리스도교 국가들에 관해서는 1516년 영국에서 쓴 제1권에 묘사되어 있다. 유토피아에 대해서는 신비에 싸인 여행가 라파엘 하이슬러디가 공산주의만이 사적·공적 생활에 만연해 있는 이기심을 없애는 유일한 치유책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유토피아를 언급함으로써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모어는 인간이란 본디 잘못을 저지르기 쉬우므로 악을 치유하기보다는 누그러뜨리는 편이 낫다는 주장을 폈다. 따라서 재치가 넘치는 익살의 어느 부분이 진지하게 의도된 것인지 어디가 역설에 불과한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겨져 있다.
글로 씌어진 유토피아는 사변적일 뿐만 아니라 실제적일 수도, 풍자적일 수도 있다. 유토피아는 이름이 붙여지기 훨씬 전부터 있었다. 플라톤의 〈국가 Politeia〉는 모어에서 H. G. 웰스에 이르는 많은 작가의 작품에 나오는 유토피아의 모델이다. BC 300년경에 활동한 에우헤메로스의 〈신성한 역사 Sacred History〉에는 이상적인 섬이 나오며, 플루타르코스가 쓴 리쿠르고스 전기는 스파르타를 이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틀란티스 전설은 많은 유토피아 신화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나 15세기에 들어와 탐험이 이루어지면서 유토피아는 좀더 현실적인 배경을 갖게 되었고, 모어는 〈유토피아〉를 아메리고 베스푸치와 연결지어 생각했다. 모어의 유토피아와 마찬가지로 인본주의 주제를 다룬 그밖의 유토피아에는 안토니오 프란체스코 도니의 〈여러 사회들 I mondi〉(1552)과 프란체스코 파트리치의 〈행복의 나라 La citta felice〉(1553)가 있다. 현실적인 유토피아의 선구는 톰마소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 La citta del sole〉(1602경 집필)이다. 1627년 출판된 프랜시스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 섬 New Atlantis〉은 과학적인 계획안을 지닌 점에서 실용적이지만 철학과 종교에 관해서는 사변적이다. 그리스도교의 유토피아적 공동사회는 요한 발렌틴 안드라에의 〈크리스티아노폴리스교 도시 Christianopolis〉 (1619), 'I. D. M.'의 〈Antangil〉(1616), 새뮤얼 고트의 〈Novae Solymae libri sex〉(1648)에 나타나 있다. 청교도주의는 문학을 통해 수많은 종교적·세속적 유토피아를 낳았다. 그중에서도 〈자유의 법 The Law of Freedom……〉(1652)에서 제러드 윈스턴리는 '디거스'(Diggers)의 원칙을 지지했다. 제임스 헤링턴이 쓴 〈The Common-Wealth of Oceana〉(1656)는 토지분배를 일반대중의 자립조건으로 내세웠다.
프랑스에서는 가브리엘 드 푸아니의 〈미지의 남쪽세계 Terre australe connue〉(1676) 같은 작품들이 자유를 외쳤다. 프랑수아 페늘롱의 〈텔레마크 Telemaque〉(1699)는 순박한 생활을 찬양하는 유토피아적 일화를 그리고 있으며, 루이 세바스티앙 메르시에가 쓴 〈2440년 L'An 2440〉(1770)은 프랑스 혁명의 원칙을 예견했다. G.A.엘리스의 〈새로운 영국 New Britain〉(1820)과 에티엔 카베트의 〈이카리아 여행 Voyage en Icarie〉(1840)은 순전히 경제계획만으로 시작한 미국의 실험적인 공동체의 한계를 다루었다. 불워 리턴은 〈다가오는 경주 The Comming Race〉(1871)에서 경제를 철저하게 배제한 본질적 요소를 고안해냈고, 윌리엄 모리스는 〈출처 없는 뉴스 News from Nowhere〉(1890)에서 경제를 경멸하는 입장을 드러냈다. 그러나 가장 영향력있는 2개의 유토피아, 즉 에드워드 벨러미의 〈과거를 돌아보다 Looking Backward, 2000~1887〉(1888)와 테오도어 헤르츠카의 〈자유국가 Freiland〉(1890)는 경제적 근거가 있는 것이다. H. G. 웰스는 〈현대의 유토피아 A Modern Utopia〉(1905)에서 사변으로 되돌아갔다.
대개의 유토피아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실제적인 해결책을 제공하기보다 그것을 비웃는 풍자에 불과하다.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1726)와 새뮤얼 버틀러의 〈에러원 Erewhon〉(1872)이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20세기에는 계획사회의 실현이 임박해지자 반(反)유토피아적인 소설들이 쏟아져 나왔다. 잭 런던의 〈강철군화 The Iron Heel〉(1907), 예브게니 자미아틴의 〈나의 My〉(1924),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1932), 조지 오웰의 〈1984년 Nineteen Eighty-four〉(1949)이 대표작이다. 루이스 멈퍼드의 〈유토피아 이야기 The Story of Utopias〉(1922)는 뛰어난 개관서이다.
문학과 함께 종교집단과 정치개혁가들도 이상적인 공동체 건설을 꾀했는데, 이는 특히 미국에서 두드러졌다. 1663년 네덜란드 메노파 교도들이 현재의 델라웨어 주 루이스에 공산주의적 공동사회 거주지를 처음으로 건설했으며 이때부터 1858년 사이의 2세기 동안 약 138개의 공동사회가 북아메리카에 세워졌다. 건설자가 죽은 뒤에도 유지된 최초의 것은 독일의 경건파 교도들이 1732년 펜실베이니아 주에 세운 에프라타 공동체였다. 그밖에도 게오르게 라프가 펜실베이니아와 인디애나 주에 하모니 공동체, 펜실베이니아에 이코너미 공동체를 세웠으며, 아이오와 주의 아마나 그룹은 아이오와, 셰이커교도들은 8개 주에 18개의 마을을 세웠다. 그들 중 일부는 금욕을 추구했으며, 몇몇 공동사회의 종파는 아직까지도 활약하고 있다. 그중 가장 큰 집단은 허터파이며, 미국과 캐나다에 주로 살지만 영국과 파라과이에도 정착촌을 이루고 있다.
비종교적 공동체로서 처음 세워진 것은 영국의 실업가 로버트 오언이 1825년 인디애나 주의 하모니를 라프파로부터 사들여 건설한 뉴하모니였다. 공산사회라기보다 협동체 사회였는데 비록 실패했지만 미국에서 최초로 유치원·상업학교·공립도서관·공립학교를 후원했다. 프랑스의 사회개혁가 샤를 푸리에는 1840년대 미국개혁가들, 특히 매사추세츠 주 브룩 농장의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841~59년 약 28개의 푸리에 방식의 거주지가 미국에 세워졌다. 카베트의 추종자인 이카리아인들은 일리노이·미주리·아이오와·캘리포니아 주에 공동사회를 세웠으나 실패로 끝났다. 존 험프리 노이스가 1841년 버몬트 주 푸트니에 세웠다가 1848년 뉴욕의 오나이다로 옮긴 오나이다 공동체는 독창적인 시도였다. 이 집단은 모든 남편과 아내를 서로 공유하는 '복합결혼'을 실행했다. 노이스는 오나이다가 브룩 농장의 시행착오를 시정해 계승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 없이는 사회주의 실현이 불가능하며, 이 '대가족' 제도가 이기주의를 없애는 동시에 이같은 생활방식의 실용성을 입증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어린이들은 걸을 수 있을 때까지만 어머니와 함께 지내고 그뒤에는 공동탁아소에 맡겨졌다.
남북전쟁 뒤 비종교적 유토피아 실험의 열기는 수그러들었다. 로런스 그론런드의 〈협동사회 The Cooperative Commonwealth〉(1884)와 벨러미의 〈회고 Looking Backward〉 같은 이상주의 책자가 발표된 뒤 1890년대에도 새로운 공동체가 몇 개 더 생겨났으나, 지속되지 못한 채 곧 정치적 사회주의에 흡수되었다. 이상주의적 종교공동체 건설은 20세기에도 계속되었으나, 대개 오래가지 못했다. 종교공동체는 거의 모든 경우 신봉자들이 예언의 능력과 지혜를 가졌다고 받드는 단 1명의 강력한 인물에 의해 건설·유지되었다. 이러한 공동체의 대부분은 원래의 지도자가 살아 있을 동안은 번창했다가 지도자가 죽고 난 뒤에는 서서히 쇠퇴해갔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사라진 지평선 Lost Horizon :
힐턴(James Hilton)의 작품으로〈사라진 지평선〉은 티베트의 샹그리라 계곡에서 낙원을 발견하는 한 영국 남자의 이야기이다. 머나먼 낙원을 뜻하는 샹그리라란 말은 이 소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도화원기(桃花源記)
중국 동진(東晉)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작품으로 동진 태원연간(太元年間 : 376~395)에 무릉(武陵 : 지금의 후난 성[湖南省] 타오위안 현[桃源縣])에 살던 어느 어부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중 복사꽃이 피어 있는 수풀 속으로 잘못 들어갔는데 숲의 끝에 이르러 강물의 수원이 되는 깊은 동굴을 발견했다. 그 동굴을 빠져나오니 평화롭고 아름다운 별천지가 펼쳐졌다. 그곳의 사람들은 진대(秦代)의 전란을 피해 이곳으로 왔는데 그때 이후 수백 년 동안 세상과 단절된 채 지내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노자(老子)의 소국과민(小國寡民) 사상에 기초하여 고대의 자연주의적 유토피아를 묘사한 것으로, 당대(唐代) 전기소설(傳奇小說)의 원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