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장용길 화백
서른, 잔치는 끝났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다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T에게 - 검정위에 밝은 빨강
이제 네 방엔 다른 여자
가슴 큰 그녀의 사진이 웃고 있고
이제 네 꿈속엔 다른 인형
들어와 팔베개하고 자겠지
언젠가 내가 뛰놀았던 초원에
이름 모를 꽃들이 만개해
어쩌다 기억의 해진 갈피를 들추면
흐린 풍경 속으로
울면서 해가 지리니
검은 피로 물든
그 그림에서 액자를 벗겨다오
맹렬한 몇방울로
흘러서 네게 가리니
*「Light Red over Black」.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그림 제목임
가을에는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그 여름의 어느 하루
오랜만에 장을 보았다. 한우 등심 반근, 양파, 송이 버섯, 양상추, 깻잎, 도토리묵, 냉동 대구살, 달걀... 종이 쪽지에
적어간 목록대로 쇼핑 수레에 찬거리를 담노라면 꼭 한두개씩 별외로 추가되는 게 있게 마련이다. 아, 기름이 떨어
졌지. 저기 마요네즈도 있어야 샐러드를 만들겠군. 그렇게 소소한 생활의 품목들을 빠짐없이 챙기는 동안만은 만사
를 잊고 단순해질 수 있다. 불고기를 재고 도토리묵을 무쳐야지. 대구가 적당히 녹았을 때 밀가루를 뿌려야 하니 중
간에 어디 들르지 말고 빨리 집으로 가야지. 샐러드에 참치를 넣을까 말까, 적어도 이것과 저것 중에 하나를 택할
자유가 내 손에 달려 있을 때, 망설임이란 늘 즐거운 법이다.
행복이란 이런 잠깐 순간에 있는 게 아닐까? 양손에 묵직이 매달린 쇼핑 봉지의 무게를 느끼며 나는 왠지 가슴이 뿌
듯했다. 근사하게 한상 차려 그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리라.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크게 틀어놓고 분주 히 싱크대 앞을 왔다 갔다 했다. 달콤하면서도 쓰라린 선율이
폭포처럼 거실 가득히 쏟아졌다. 아, 어쩌면 이렇게 슬픔에서 기쁨으로 빨리 넘어갈 수 있는지.... 미치지 않고서
야.
그날 밤 요리 준비에 몰두해 이마에 송송 맺힌 땀을 닦으며 나는 알았다. 내가 지금 사랑의 신열을 앓고 있다는 것을.
그 달콤한 지옥 속으로 자진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나의 오랜 불면증이 치유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혹 그
증세가 더 도질지도......
꿈의 페달을 밟고
내 마음 저 달처럼 차오르는데
네가 쌓은 돌담을 넘지 못하고
새벽마다 유산되는 꿈을 찾아서
잡을 수 없는 손으로 너를 더듬고
말할 수 없는 혀로 너를 부른다
몰래 사랑을 키워온 밤이 깊어가는데
꿈의 페달을 밟고 너에게 갈 수 있다면
시시한 별들의 유혹은 뿌리쳐도 좋았다.
나의 대학
이제 어쩌면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 떠난 뒤에 더 무성해진 초원에 대해
아니면, 끝날 줄 모르는 계단에 대해
우리 시야를 간단히 유린하던 새떼들에 대해
청유형 어미로 끝나는 동사들, 머뭇거리며 섞이던 목소리에 대해
여름이 끝날 때마다 짧아지는 머리칼, 예정된 사라짐에 대해
혼자만이 아는 배신, 한밤중 스탠드 주위에 엉기던 피냄새에 대해
그대, 내가 사랑했을지도 모를 이름이여
나란히 접은 책상다리들에 대해
벽 없이 기대앉은 등, 세상을 혼자 떠받친 듯 무거운 어깨 위에 내리던 어둠에 대해
가능한 모든 대립항들, 시력을 해치던 최초의 이편과 저편에 대해
그대, 내가 배반했을지도 모를 이름이여
첫번째 긴 고백에 대해
너무 쉽게 무거웠다 가벼워지던 저마다 키워온 비밀에 대해 눈 오는 날 뜨거운 커피에
적신 크래커처럼 쉽게 부서지던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어느날 오후에 대해
아, 그러나, 끝끝내, 누구의 무엇도 아니었던 스무살에 대해
그대, 내가 잊었을지도 모를 이름이여
그렁그렁, 십년 만에 울리던 전화벨에 대해
그 아침, 새싹들의 눈부신 초연함에 대해
이 모든 것들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요
행여 내 노래에 맞춰 춤을 춰줄, 아직 한 사람쯤 있는지요
내 마음의 비무장 지대
커피도 홍차도 아니야
재미없는 소설책을 밤늦도록 붙잡고 있는 건
비 그친 뒤에도 우산을 접지 못하는 건
짐을 쌌다 풀었다 옷만 갈아입는 건
어제의 시를 고쳐쓰게 하는 건
커피도 홍차도 아니야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어
돌아누워도 엎드려도
머리를 헝클어도 묶어보아도
새침 떨어볼까요 청승 부려볼까요
처맨 손 어디 둘 곳 몰라
찻잔을 쥘까요 무릎 위에 단정히 놓을까요
은근히 내리깔까요 슬쩍 훔쳐볼까요
들쑥날쑥 끓는 속 어디 맬 곳 몰라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가슴속 뒤져보면
그래도 어딘가 남아 있을, 잡초 우거진
내 마음의 비무장지대에 그대, 들어오겠나요
어느날 문득 소나기 밑을 젖어보겠나요
잘 달인 추억 한술
취해서 꾸벅이는 밤
너에게로, 너의 정지된 어깨 너머로
잠수해 들어가고픈
비라도 내렸으면
분리수거
너를 향한 나의 애증을 분리수거할 수 있다면
원망은 원망끼리
그리움은 그리움끼리
맥주 깡통 따듯 한꺼번에 터트릴 수 있다면
2주마다 한번씩 콱! 눌러 밟아 버린다면
너를 만난 오월과 너와 헤어진 시월을 기억의 서랍에 따로 모셔둔다면
아름다웠던 날들만 모아 꽃병에 꽂을 수 있다면
차라리, 홀로 자족했던 지난 여름으로 돌아가
네가 준 환희와 고통을 너에게 되돌려줄 수 있다면
여름에 가을을, 네가 없어 끔찍했던 겨울을 미리 앓지 않아도 되리라
늦기 전에, 아주 더 늦기 전에
내 노래가 너를 건드린다면
말라 비틀어진 세상의 가슴들을 흔들어 뛰게 한다면
어느날 문득 우리를 깨우는 봄비처럼
아아 - 우우 - 허공에 메아리칠 수 있다면......
보낸 편지함
내 수첩에서 지워진 이름들, 지워지지 않았으나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
살아 있지만 죽은 이들보다 멀어진,
싸늘해지기 조금 전의 미지근한 애정.
두 번 세 번 고친 형용사들, 정중함이 지나치게 모자라
전문적인 양념을 뿌린 의례적인 인사들.
우정이 끝났는데도 찍지 못한 마침표.
상대를 잘못 고른 문장들.
웃음거리가 되었을 지나친 솔직함.
그녀의 전화기를 뜨겁게 달구고
친구의 친구에게까지 배달되었을 스캔들.
항의하는 편지들, 안녕하십니까로 시작되는
재판 냄새가 나는 문서, 내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그에게 보내지 못한 편지, 밤에 쓰고 아침에 검열한
기다리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잔뜩 계획함 세우고 떠나지 못한 여행들.
어머니 앞으로 보낸 편지는 없다!
한 번뿐이었던 완벽한 하루는 저장되지 않았고
뚜껑이 열리면 걷잡을 수 없어
두 번 열고 싶지 않은 판도라의 상자
아도니스를 위한 연가
너의 인생에도
한번쯤
휑한 바람이 불었겠지
바람에 갈대숲이 누울 때처럼
먹구름에 달무리질 때처럼
남자가 여자를 지나간 자리처럼
시리고 아픈 흔적을 남겼을까
너의 몸 골목골목
너의 뼈 굽이굽이
상처가 호수처럼 괴어 있을까
너의 젊은 이마에도
언젠가
노을이 꽃이처럼 스러지겠지
그러면 그때 그대와 나
골목골목 굽이굽이
상처를 섞고 흔적을 비벼
너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으로
헤엄치고프다, 사랑하고프다
- 최영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 창작과 비평사)
선운사에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다시 선운사에서
옛사랑을 묻은 곳에 새 사랑을 묻으러 왔네
동백은 없고 노래방과 여관들이 나를 맞네
나이트클럽과 식당 사이를 소독차가 누비고
안개처럼 번지는 하얀 가스...... 산의 윤곽이 흐려진다
神이 있던 자리에 커피자판기 들어서고
쩔렁거리는 동전소리가 새 울음과 섞인다
콘크리크 바닥에 으깨진,
버찌의 검은 피를 밟고 나는 걸었네
산사(山寺)의 주름진 기와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어
일기예보
남쪽의 더운 공기와
북쪽의 찬 공기가 부딪쳐서
호우주의보가 내려졌다
너는 차가웠고,
나는 뜨거웠고,
그리고 너를 잊기 위해 만난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남자들.
내 인생의 위험한 태풍은 지나갔다
살아남은 시들이 종이 위에 인쇄되고
느릿느릿 기어가는 차량들.
일은 전국이 흐리고,
나는 샴푸를 사러
나갈 것이다
혼자라는 건
뜨거운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혼자라는 건
실비집 식탁에 둘러앉은 굶주린 사내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식사를 끝내는 것만큼 힘든 노동이라는 걸
고개 숙이고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들키지 않게 고독을 넘기는 법을
소리를 내면 안돼
수저를 떨어뜨려도 안돼
서둘러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허기질수록 달래가며 삼켜야 한다는 걸
체하지 않으려면
안전한 저녁을 보내려면..
.
꿈의 페달을 밟고
내 마음 저 달처럼 차오르는데
네가 쌓은 돌담을 넘지 못하고
새벽마다 유산되는 꿈을 찾아서
잡을 수 없는 손으로 너를 더듬고
말할 수 없는 혀로 너를 부른다
몰래 사랑을 키워온 밤이 깊어가는데
꿈의 페달을 밟고 너에게 갈 수 있다면
시시한 별들의 유혹은 뿌리쳐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