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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19 - 시저 암살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필리피 전투 승리로 3자 체제!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개혁을 마친뒤, 종신독재관에 취임하여 자신을
임페라토르 (imperator, 최고사령관) 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는 권세와 절대 권력을 누리게 되니.... 사실상 로마의 제정이 시작된 것 입니다.
3월 15일 카이사르 원로원에서 암살후 주동자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로마를 탈출했고,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 총독으로 부임하니 안토니우스는 "독재를 영원히 금지하는 법" 을 통과시켰고,
자신은 마케도니아 속주를, 동료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는 시리아 속주를 맡기로 합니다.
안토니우스는 새 의원을 임명하고, 속주와 속국에 특권을 부여했으니 카이사르의 공개되지 않았던 명령이라고
주장했지만, 동시대인들은 그가 뇌물을 받는 대가로 가짜 법령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여겼고 키케로는
아티쿠스에게 한탄하는 편지를 보냈으니..... "우리는 그의 노예가 되지 않겠지만, 그의 메모의 노예가 되었다네"
4월 중순, 그리스에서 유학을 하던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자신을 양자로 지명하고 전 재산을 상속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어머니 아티아와 계부 필리푸스는 로마의 정세가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뿌리치고 로마에 가서 카이사르의 상속을 받기로 하고 친구 아그리파 등과 함께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합니다.
4월 19일 키케로를 만나 호의를 얻어냈고, 마르켈루스를 통해 원로원내 인사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는데
카이사르가 자신이 아니라 그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에 내심 불만을 품었던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재산을 양도하는걸 거부하고 입양도 질질 끌었기 때문에 시민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지 못합니다.
유언장을 읽는 집정관 안토니우스의 실망감과 충격은 크니 혈연적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외삼촌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였으며 그는 카이사르 최대 업적으로 로마인에게 평가
받은 갈리아 전쟁을 수행한 장군이고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두각을 나타낸 카이사르파의 핵심 인사였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카이사르의 유산을 옥타비아누스에게 주는 것을
거부했으니 카이사르의 '아들' 이 된 옥타비아누스에게 대한 매몰찬 태도와 무시
전략은 카이사르 군단병들을 등돌리게 했고, 로마 민중들의 비난을 받게끔 만들었습니다.
숨을 죽이고 있던 키케로,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 등 원로원파는 카이사르 '아들' 로 정계에
등장한 18세 소년을 이용해 안토니우스를 몰아내려 했으니... 공화정 체제를 위협한 카이사르와 젊은 귀족들인
카이사르파를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 보여진 카이사르 '아들' 을 분란 소재로 던져 일망타진하고 싶어했습니다.
안토니우스로 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던 키케로가 머물던 나폴리 근교 쿠마이 별장에 4월 20일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조언을 구한 것은 천운과 같으니, 18살에 불과한 미소년이 시골 촌놈 아그리파 같은 볼품
없는 친구 몇명과 소수 호위대를 이끌고 왔으니, 62세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와 친구들을 보고 확신을 가집니다.
따라서 키케로는 이 만남을 가리켜 “그 청년 (옥타비아누스) 은 찬양되고 명예를 얻다가 내동댕이
쳐야할 자였다” 고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했으니.... 오늘날 아니, 십여년 전에 당시
장성택에 의해 조종된다고 생각되었던 북한의 김정은에 대한 초기 평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와 결합했고 안토니우스 탄핵 연설을 했는데 이는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오판 이었으니
키케로는 편지에서 '푸에르(애송이) 정도는 갖고 놀수 있을 것' 이라 이야기했고, 원로원 연설에서도
"이 애송이를 적당하게 이용해먹고 구실을 붙여 내쫓자!" 라 얘기했지만 정작 조종당한 것은 키케로 였습니다.
18세 옥타비아누스는 키케로를 아버지라고 부르기 까지 하며 존중했는데, 그에게도 노회한 정치인 키케로는
안토니우스를 제거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으니 그는 키케로가 선수를 칠 기미가 있기 전에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의 딸 세르빌리아와 약혼하면서 공개적으로 키케로와 정치적 이별을 선언 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정식 입양 절차가 마무리 되기 까지는 몸을 낮추고 키케로를 아버지라 부르면서 전혀 딴
마음을 품고 있지 않은 척 위장하였으나 훗날 정작 카이사르의 아들로 양자 수속이 끝나자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순식간에 배신해 버렸고 아버지라 부른 키케로를 처형하는 데 대해서도 묵인해 버립니다.
안토니우스로 부터 돈을 받아내지 못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이름을 딴 자신의 재산과 토지
소유물을 어머니, 계부와 함께 팔고 마련한 재산을 시민들에게 나눠주어 많은 이의 호의를
얻어냈으며 기원전 44년 초여름, 카이사르의 옛 병사들이 로마로 몰려들면서 치안이 불안정해집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지지자와 클리엔테스들을 규합해 내란 조짐이 감돌자 안토니우스는 6월 3일 속주 교환에
관한 법률을 제시하니 마케도니아를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양도하고 갈리아 키살피나는 자신이 차지하며,
브루투스를 아시아로 카시우스를 시칠리아로 보내 로마에 빵을 공급하게 하니 브루투스는 모욕적이라 여깁니다.
그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집정관 임기 만료가 임박하자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속주
를 양도하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무티나를 포위 공격했으니 원로원은 키케로의 제안에 따라
안토니우스 행위를 규탄하고, 행정관을 역임한 적이 없는 옥타비아누스에게 군대 지휘권을 주기로 결정합니다.
기원전 43년 1월 7일, 옥타비아누스는 병력을 집결시킨후 집정관 아울루스 히르티우스, 가이우스 판사
와 함께 무티나로 진군했는데 , 안토니우스가 패배해 갈리아로 도주했지만 히르티우스와 판사는
전사하자 원로원은 사망한 두 집정관의 군대를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양도하라고 했지만, 병
사들은 카이사르를 암살하는데 관여한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경멸하고.... 카이사르의 양자를 따릅니다.
한편, 아스쿨룸에 있던 안토니우스의 부관인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는 안토니우스가 패해 갈리아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신병을 모집하여 2개 군단을 결성한뒤 아펜니노 산맥을 횡단하여 400마일을
행군한 끝에 바다에서 안토니우스와 합류하니 군대가 와해되었던 안토니우스는 세력을 회복할수 있었습니다.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이던 마르쿠스 레피두스와 합세해 로마로 남하하고자 하니 원로원은 안토니우스
와 레피두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고, 아프리카에서 군단을 소집하고 동방에 가 있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며 옥타비아누스에게 맞서라고 요구했고,
갈리아 코마타 속주 총독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에게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협력하라 권고합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7월에 로마에 대표단을 보내 집정관에 선출해 달라고 요구하니 원로원이 받아
들이지 않자, 옥타비아누스는 8월에 8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니 전투 없이
로마시를 점령했으며 그는 공식적으로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었으며, 8월 19일 집정관으로 선출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를 저지하려고 북상했지만, 두 사람이 거느린
군대가 20개 군단에 이르는 대병력인 것을 보고는 안토니우스와 전쟁을
지속하다는 건 승산이 희박하니 어리석다고 판단해 9월부터 비밀 협상을 시작합니다.
기원전 43년 11월, 보노니아 근처 라비니아강 한 가운데 섬에서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3자가 회동해 이틀간 이어진 회의 끝에, 공화정을 사실상 종식시키는 결정이
내려졌으니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직을 사임했고, 그 대신 세 사람이 로마를 나눠서 통치하기로 합니다.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레피두스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와 히스파니아, 옥타비아누스는 아프리카, 사르데니아,
시칠리아를 접수했고, 이탈리아는 공동으로 관할했으며 해방자를 자처하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에 대한 전쟁 수행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맡기로 했고, 레피두스는 로마를 지키기로
했으며 병사들에 보상으로 이탈리아의 18개 도시에 속한 땅을 분배하기로 결의하니 제2차 삼두정치 입니다.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삼두는 로마로 입성한뒤 본격적인 숙청에
착수했으니 명단의 최상위에 올려진 키케로는 피신하다가 추격대에게 잡혀 살해
되었고 그의 머리와 오른손은 자신을 수없이 비방한 그에게 원한을 품었던 안토니우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삼두는 더 많은 이들을 '관련자' 로 지목해 숙청 명단에 포함시켰으니 이는 해방자파와의 대결을 앞두고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막대한 "재산을 몰수할 필요" 가 있었기 때문이니 또한 부동산
소유자는 연간 소득의 절반을 지불해야 했는데.... 이 금액은 삼두의 마음에 따라 임의로 설정되었습니다.
모든 노예는 세금을 내야 했으며, 유산계층 대표자들은 독신 여성일 지라도 연간 소득에 해당하는 일시금
과 재산 가치의 2/3 을 추가로 지불해야 했으며.... 삼두의 숙청으로 부터 가까스로
빠져나온 인사들은 동방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또는 시칠리아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가담합니다.
로마 정계가 카이사르 암살 후의 혼란에 빠져 있을 무렵, 아프리카 속주는 해방자파의 편에 선 퀸투스
코르니피키우스가 통치했는데 삼두파가 로마를 장악한 뒤, 아프리카를 차지하기로 협의한 바
옥타비아누스는 코르니피키우스에게 누미디아 총독 티투스 섹스티우스에게 통치를 넘기라 요구합니다.
코르니피키우스가 거부하자,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티우스에게 코르니피키우스를 토벌하라고 명령하자,
섹스티우스는 아프리카 속주의 내륙을 장악했지만 코르니피키우스의 부하 벤티디우스에게
포위되었고.... 코르니피키우스의 또다른 부하 랄리우스는 누미디아를 침공하여 키르타를 포위합니다.
섹스티우스는 누미디아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누미디아왕 아라비오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코르니피키우스도
아라비오에게 자신 편에 서라 권유했는데, 아라비오는 폼페이우스의 지지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걸
고려하여 코르니피키우스 편을 들려고 했지만, 나중에 해방자파가 결국 패할거라 여기고 섹스티우스편에 섭니다.
섹스티우스는 누미디아왕 아라비오 도움에 포위망을 돌파하고 벤티디우스를 처단한뒤 코르니피키우스를 상대로
우티카로 진군했으며 랄리우스는 키르타 포위를 해제하고 우티카로 달려왔지만 우티카 성벽 아래서 벌어진
전투에 참패해 코르니피키우스는 전사하고 랄리우스는 자살하니 아프리카 속주는 삼두파 수중에 넘어갑니다.
기원전 44년 4월 해방자파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는 아시아속주 총독에 부임해 도시를 요새화하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돕고자 돈과 군대를 모집했는데, 집정관을 맡았던 푸블리우스 돌라벨라가 12월에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문제가 발생했으니 돌라벨라는 카이사르 암살때 해방자파를 지지했지만 안토니우스와 손 잡습니다.
트레보니우스는 돌라벨라에게 식량을 공급해주긴 했지만 군자금을 달라는 요구는 들어주지 않자 분노한
돌라벨라는 아시아 속주의 여러 요새를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하니 기원전 43년 1월 중순,
최후의 수단으로 야습을 택해 스미르나시(이즈미르?) 를 공략했고, 트레보니우스는 체포된 뒤 피살됩니다.
돌라벨라는 트레보니우스 수급을 총독 관저에 전시한뒤 리키아에서 함대를 모아 기원전 43년 5월 킬리키아에
상륙해 복종을 거부한 안티오키아를 포위 공격했으며, 또한 아울루스 알리에누스를 이집트에 파견해
주둔한 4개 군단을 소집하고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로 부터 함대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냅니다.
그러던중 원로원으로 부터 동 속주 관할권을 넘겨받은 가이우스 카시우스가 12개 군단을 이끌고 접근하고
있으며, 원로원이 자신을 국가의 적으로 선포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리오디케아로 후퇴하여 농성
했으며, 이집트에 주둔하고 있던 아울루스 알리에누스의 군대가 돌라벨라를 구원하고자 진군
했지만... 팔레스타인에서 카시우스의 압도적인 병력에 직면하자 금세 태도를 바꿔 카시우스의 편에 섭니다.
시리아에서 천혜요새 아파메이아에서 기원전 46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사촌 섹스투스 카이사르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 퀸투스 바수스가 장악하고 있었으니 그는 시리아 총독을 자칭하고 섹스투스 휘하 군대 대부분을
인수하고 노예까지 2개 군단을 확보한뒤 파르티아 샤한샤 오로데스의 장남 파코로스 1세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새로 임명된 시리아 총독 가이우스 베투스가 진압을 시도했으나 격파당하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루키우스
무르쿠스를 파견해 아파메이아를 공략하게 했으니, 무르쿠스는 3개 군단을 이끌고 아파메아 포위 공격을
시작했지만, 방비가 강력해서 공략에 실패하자 비티니아 총독 마르키우스 크리스푸스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크리스푸스는 3개 군단을 데려왔고, 로마군은 6개 군단을 이끌고 아파메이아를 포위했는데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무르쿠스는 가이우스 카시우스와
마르쿠스 브루투스 등 '해방자' 편에 섰지만..... 카이사르가 생전에 내린 명령에 따라 포위를 이어갑니다.
카시우스가 시리아에 상륙했을 때, 아파메이아 공성전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으니 무르쿠스와 크리스푸스는
원로원의 지령에 따라 카시우스에게 군대를 넘겼고 바수스의 2개 군단 중 하나도 카시우스 편으로 넘어
갔지만, 바수스 본인은 복종하기를 원하지 않고 1개 군단을 이끌고 아파메이아에서 계속 성을 지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2번째 군단 마저 카시우스에게 가담하니 그는 돌연 종적을 감췄고 카시우스는
돌라벨라가 숨은 라오디케아를 포위 공격하니, 돌라벨라는 클레오파트라 7세
에게 구원 요청을 하였으나.... 클레오파트라가 파견한 함대는 역풍에 의해 저지됩니다.
해방자파 카시우스는 라오디케아를 지속적으로 공격했지만 쉽게 함락되지 않자 성문을 지키는 백인대장
에게 뇌물을 줘서 성문을 열게해 도시가 함락되자, 돌라벨라는 호위병을 시켜 자신을 검으로
찌르게 하는 방식으로 자살했고.... 이리하여 시리아는 카시우스가 이끄는 해방자파의 수중에 넘어갑니다.
한편,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아테네에 도착하여 지지자들을 규합한뒤 마케도니아로 부임했으니....
마케도니아 총독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와 일리리쿰 현지 주둔 병력을 규합하여 3개군단을
확보하고, 16,000 달란트에 달하는 군자금을 속주민들로 부터 강탈해 더 많은 병력을 모집합니다.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가 돌라벨라에게 피살되기 전에 보낸 병력도 확보했는데, 한편 안토니우스는 마케도니아
속주를 동생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에게 넘기려 했지만 그러나 원로원이 무티나 내전을 빌미로
마르쿠스를 국가 적으로 선포하고 마케도니아 속주로 부임할 예정이던 가이우스의 권한 역시 무효화합니다.
가이우스 안토니우스는 이에 맞서 일리리아 산맥에서 병력을 규합한 뒤 브루투스와 맞섰지만 43년 2월 말
아폴로니아에서 브루투스의 군대에게 포위되었고, 3월 중순에 항복하자 브루투스에게 귀한 대접을
받았고, 휘하 부대를 계속 이끌 수 있었으며 키케로가 그를 처형하라고 요구했지만 브루투스는 무시합니다.
그러나 가이우스가 병사들에게 반란을 부추겼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브루투스는 그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감시를
엄하게 했으며, 이후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 3두가 많은 인사를 숙청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브루투스는 마케도니아 총독 퀸투스 호르탈루스에게 가이우스 안토니우스를 처형하라고 명령합니다.
브루투스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아드리아해를 건널 준비를 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자 카시우스에게
구원을 요청하니, 카시우스는 돌라벨라를 무너뜨린뒤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사절을 보내 배상금과 함대를
보내지 않는다면 이집트를 침공하겠다고 위협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사정이 좋지않다는 핑계를 대며
거절했지만 이집트 해군 사령관 세라피오가 클레오파트라의 허락도 받지 않고 카시우스에게 40척을 제공합니다.
카시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자기 말을 듣지 않자 그녀를 응징하고 풍요로운 자원을 가지고 있는 이집트
를 정복하려던 중에 브루투스로 부터 즉각적인 합류를 요구하는 메시지를 받자..... 시리아에
1개 군단을 남겨두고 퀸투스 라비에누스를 파르티아로 보내 우수한 기병대를 제공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카시우스는 북상하면서 시리아 도시들로 부터 군자금을 강제 징수했고, 지불이 지연되는 도시 주민
들을 노예로 팔았는데.... 타르수스는 1,500달란트를 지불해야 했는데, 이를 위해
신성한 성전 물건을 팔아치워야 했지만 그럼에도 돈이 부족해 일부 시민을 노예로 팔아야 했습니다.
한편, 카시우스는 기병대를 파견해 친 카이사르파 인사인 카파도키아 왕 아리오바르자네스 3세를 살해
하고 동생 아리아라테스 10세를 새 군주로 세웠으며, 기원전 42년 초에,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스미르나(이즈미르) 에서 합세했는데, 브루투스는 삼두파가 최대 40개 군단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중에 8개 군단이 이미 건너왔으니 서둘러 발칸 반도로 진격해 적이 거점을 확보하는 걸 막자고 주장했지만
카시우스는 보급로를 위협할수 있는 로도스와 리키아를 공략하여 후방의 안전을 확보하는게 먼저라고
주장하자 브루투스는 카시우스 주장을 수용해서 자신은 리키아를 맡고 카시우스는 로도스를 맡기로 합니다.
카시우스가 로도스 공격을 준비하자, 로도스인들은 방어를 준비하는 한편 카시우스가 일찍이 로도스에서 공부
할때 철학을 가르쳤던 아르켈라오스를 보내 카시우스를 설득하니 아르켈라오스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은
로도스인으로서 나라를 뼈속 깊숙이 사랑하니 자신을 봐서라도 제발 로도스를 파괴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합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카시우스는 스승의 간절한 설득에 얼굴을 붉혔지만, 해방자파를 돕기를 거부하는
로도스인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고 하는데..... 그는 이번 전쟁은 공화정을 수호하는 자와
폭군의 대결이며, 모든 로마 동맹국과 속주들은 공화정을 수호하는데 함께할 의무가 있다고 말합니다.
결국 협상은 실패로 끝났고, 카시우스는 부관 파니우스와 렌툴루스에게 80척의 함대로 도시를
봉쇄하게 하니 로도스 측은 33척의 함대로 맞섰으나 2척이 침몰하고 3척이 노획되는
패배를 당하고 물러섰으며 적이 도시를 봉쇄하자 다시 출격했으나 격퇴되어 2척 배를 잃었습니다.
그후 로마군은 육지와 배 모두에서 도시에 맹공을 퍼부었는데 그러던 중 로도스 내 카시우스 지지자
들은 몰래 성문을 열어줬고, 로마군은 도시로 진입하여 로도스를 순식간에 장악했으며,
카시우스는 50명의 저명한 시민을 처형하고 로도스인들에게 8,000달란트의 배상금을 부과합니다.
리키아를 맡은 브루투스는 산투스시 주민에게 귀순을 귄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공성전을 벌였는데 산투스
주민들은 맹렬히 저항했고, 브루투스는 머리에 돌을 맞아 부상을 입었지만 도시는 함락되었고,
주민은 집단 죽음을 선택했으며... 로마인들은 노예, 소수의 자유인 여성 및 150명의 남성만을 사로잡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다른 리키아 도시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브루투스에 충성을 맹세하고 돈과 함대를 제공했는데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브루투스는 카시우스 보다는 훨씬 더 자비롭게 행동했으며, 리키아
도시에 150달란트만을 요구했는데 로도스가 크고 부유하긴 하지만 설사 그래도 8천 달란트 대 150 달란트라?
카시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를 돕기위해 함대를 파견하려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루키우스 무르쿠스에게 60척 함대를 맡겨 이집트 함대를 차단하게 했는데 무르쿠스는 이집트로
향하던중 여왕 함대가 아프리카 해안에서 폭풍으로 흩어지고 여왕은 귀국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브룬디시움으로 항해해... 발칸 반도에 들어선 적군과 이탈리아 사이를 차단해 식량 보급을 막으려 합니다.
삼두파는 레피두스가 로마를 지키고 옥타비아누스는 시칠리아를 장악하고 있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를 상대하며, 안토니우스는 발칸 반도로 건너가 브루투스를 상대하기로 했지만.....
안토니우스가 보낸 군단이 적 함대 보급 차단으로 곤경에 처하자 옥타비아누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합세해 이탈리아 전 함대를 소집해 20개 군단을 추가로 태워 발칸반도에 건너가
있던 8개 군단과 합세하기로 했고, 카시우스는 무르쿠스를 돕기위해 그나이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함대를
추가로 보냈으니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130척 군함으로 아드리아해로 항해해 적의 식량 보급을 방해합니다.
기원전 42년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리키아와 로도스를 공략한뒤 사르디스에서 합류해 헬레스폰트를 건넜고
카시우스는 병사들을 소집했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따랐던 이들이 많았으니 "너희가 카이사르를 따라
전장에 섰던건 카이사르가 아니라 로마를 위해서였다. 한 사람을 위해 국가의 대의를 저버리지 마라" 밝힙니다.
또 카이사르를 위해 복수하겠다는 삼두파의 위선을 규탄하고 민중이 삼두의 폭정에 치를 떨고있으니 승리는
자신들에게 있다고 호언장담하고는, 이번에 승리를 거두면 로마를 구한 영웅으로 대접하며 후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하니 장병들은 카시우스를 임페라토르라고 부르며 적에 끝까지 맞서겠다고 서약합니다.
한편, 루키우스 삭사와 가이우스 플라쿠스가 이끄는 선봉 8개 군단은 트라키아로 깊숙히 들어가 적이
진군할 길목을 차단했지만 적군이 다른 길로 우회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필리피 서쪽으로
퇴각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주력군이 바다를 건너 일리리아 해안가에 상륙한뒤 합세합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에그나티아 가도의 양쪽에 2개의 잘 요새화된 진영을 세우고는.... 타소스에 있는
후방 보급 기지로 이어지는 보급로를 닦았으니, 두 진영은 1.5km 정도 떨어졌지만 요새로 연결
되었으며 높은 언덕에 자리았는데, 특히 남쪽 진영 주변은 행군이 불가능한 늪지대여서 포위 공격은
불가능한데 옥타비아누스는 브루투스 맞은편에 자리잡았고, 안토니우스는 카시우스 맞은편에 진을 쳤습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80,000명 보병, 20,000명 기병, 속국 왕들이 제공한 대규모 보조병들을 보유했으며,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군대는 28개 군단병과 보조병 100,000명과 13,000명 기병으로 구성됐는데,
안토니우스는 적을 고지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싸움을 걸었으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반응하지않자
안토니우스는 우회로를 뚫기로 하고 병력 일부를 남쪽 늪지대로 파견했는데 토목기술로 행군로를 개척합니다.
기원전 42년 10월 3일, 카시우스는 ‘보급로가 위협받겠다' 라고 판단하고 급습해 파견대가 위험해지자,
안토니우스는 카시우스의 주둔지와 늪지대 사이에 요새화 지대로 병력을 투입하면서 격전이 벌어
졌으니 결국 안토니우스군이 적 진영을 장악했고, 카시우스는 부하들과 함께 인근 언덕으로 도주합니다.
브루투스 군은 옥타비아누스의 진영으로 쳐들어갔는데 옥타비아누스는 아드리아해를 건너는 과정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십여일간 군중에서 치료받고 있던중에 적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치자, 신속한 대응을 하지 못한
옥타비아누스군은 바로 허물어졌고 옥타비아누스는 달아나 늪에 숨은채 아군이 도우러 올때까지 기다립니다.
브루투스는 3개군단을 격파하고 2,000명의 스파르타인을 포로로 잡았고 브루투스군과 안토니우스군은 상대
진영을 파괴하고 불사른뒤 돌아갔는데, 흙먼지가 심한 바람에 지나쳐갈때 아군으로 오인해 충돌을 벌이지
않았다고 하며, 전투에서 카시우스 군대는 8,000명을 잃었고, 옥타비아누스는 16,000명을 잃었다고 합니다.
카시우스는 자신의 부대가 무너지고 브루투스의 군대가 보이지 않자 졌다고 오판했는데, 브루투스가 그를 구하기
위해 기병대를 보냈는데, 카시우스는 적 기병이라 오인하고 하인에게 자신을 죽이라 하니 자기 생일날에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브루투스는 통곡했지만... 아군의 사기가 땅에 떨어질 것을 우려하여 죽음을 숨깁니다.
이때 무르쿠스와 그나이우스 아헤노바르부스 함대는 그나이우스 칼비누스가 이끄는 안토니우스 수송 함대를
포착하고 공격하니 칼비누스는 적 함대가 자기 함대 사이를 뚫는 것을 막기위해 배를 밧줄로 연결하자
무르쿠스는 불 화살을 적 함대에 퍼부어 함대가 화염에 휩쓸려 패하니 수송선들은 노획되거나 파괴
되었고 17척 전투함도 노획되었는데 칼비누스는 쪽배를 타고 빠져나와 전투 5일째 브룬디시움에 돌아옵니다.
카시우스가 자살한뒤, 브루투스가 군대를 단독으로 통솔했으니 그는 병사들에게 2,000 데나리우스
를 주겠다고 약속했고, 승리하면 테살로니카와 스파르타 도시들을 약탈할 권리를 주겠다고
약속했으며 한편 안토니우스는 보급이 끊기면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병사들에게 보상금
으로 5천 데나리를, 군단에 2만 5천 데나리를 추가적으로 지급하기로 약속해 사기를 끌어올립니다.
안토니우스는 병력을 진군시켜 브루투스 진영의 남쪽에 포진하는데 성공히자 브루투스는 측면이 공격당할
것을 우려해 전열을 남쪽과 동쪽으로 길게 늘어뜨려 에그나티아 가도와 평행하게 포진하고 요새를
여럿 건설했는데, 브루투스는 적이 식량 부족을 겪고 있으니 겨울까지만 기다리면 무너질 거라 여겼습니다.
카시우스는 군사적 역량이나 지도력이 없어서, 즉각적인 전투를 요구하는 병사들을 통제하는데 애를 먹었으며,
계속된 지연전술에 불만이 높아져가던 동방에서 고용한 용병들과 모집한 병사들 가운데 일부가 탈영을
하며 상황이 악화되자 군대가 와해되기 전에 전투를 벌이기로 하고 10월 23일 고지에서 내려와 맞붙습니다.
전투는 해방자파의 참패로 뿔뿔이 흩어지자, 옥타비아누스는 점령한 적진을 지키기 위해 남았고 안토니우스는
브루투스가 재집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길을 따라 분견대를 파견하자 브루투스는 4개 군단을 이끌고
산으로 후퇴했으니 병사들에게 전투를 계속해 진영을 탈환하거나 배를 타고 대피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묻습니다.
병사들은 이미 할 만큼 했으며 자신을 돌볼 때라고 답하니 브루투스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친구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요청해 목숨을 끊으니..... 소 카토의 아들 마르쿠스 카토,
유명한 웅변가 호르텐시우스의 아들, 마르쿠스 클라우디아누스 등도 브루투스를 따라 자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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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금 떠나고 싶다.
지루한 일상에 갇힌 나를 꺼내 줄 단 하나의 방법은 여행뿐이다.
지평선 너머 어디쯤, 바람 좋은 그곳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지나가는 계절 속에서, 잠시 나를 찾아 떠나본다.
카이사르 암살 후에 로마는 내전에 들어가
1차 승자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