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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 삼손의 출생과 성장
삿 13:15-25
15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구하옵나니 당신은 우리에게 머물러서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하소서 하니
16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나를 머물게 하나 내가 네 음식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마노아가 알지 못함이었더라
17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귀히 여기리이다 하니
18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
19 이에 마노아가 염소 새끼와 소제물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서 여호와께 드리매 이적이 일어난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본즉
20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간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그것을 보고 그들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21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그제야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22 그의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니
23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
24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25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
삿 13:15-25 / [주께서 친히 보낸 심부름꾼] 마노아는 자기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이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심부름꾼인 줄을 모르고 그에게 간청하였다. `제발 저희를 떠나지 마십시오. 우리가 염소 새끼를 한 마리 잡아 요리하여 바치겠습니다.' `네가 그렇게 간청해도 나는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겠다. 네가 그토록 염소 새끼를 잡아 올릴 마음이 있으면 주께나 번제물을 잡아 올려라' 하고 주님의 심부름꾼이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마노아가 다시 물었다. `어르신네의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쭈어 보아도 될까요? 어르신께서 전에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날 어르신께 고마운 마음을 표하려고 합니다.' 18) 그러나 하나님의 심부름꾼은 `내 이름을 묻지 말아라. 그것은 비밀이라 가르쳐 줄 수가 없다' 하고 대답하였다. 19) 그러자 마노아가 염소 새끼 한 마리와 곡식제물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다 올려놓고 여호와께 제물로 바쳤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지켜 보고 있는데 20) 그 제단 위에서 불꽃이 하늘로 솟아 올라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그 솟아오르는 불꽃을 타고 올라가는게 아닌가!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그것을 보고 땅에 엎드렸다. 21) 마노아는 그제야 자기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 하나님의 심부름꾼인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거기에서 다시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을 찾아볼 수 없었다. 22) 깜짝 놀란 마노아는 `아이구, 우리가 하나님을 뵈었으니 우린 이제 죽은 목숨일세. 큰일이로군' 하고 아내에게 걱정스러운 빛을 보이자 23) 아내가 말을 되받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이실 작정을 하셨다면 우리가 드린 제물을 받으시지도 않으셨을 거예요. 또 그러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바라보지도 못하게 하셨을 거구요. 더구나 하나님께서 점지하신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고 일러주시기까지 하셨을라구요.' 24) 얼마 뒤에 마노아의 아내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는 이름을 삼손이라고 지어 불렀다. 그 아이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복을 받으면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25) 삼손이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에 있는 마하네단에 있을 때 하나님의 기운이 그를 휘감아 그가 강해지기 시작하였다.
마노아는 염소 새끼로 하나님께 번제로 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는 불꽃 가운데로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제서야 마노아 부부는 비로소 하나님의 사자가 곧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경배합니다. 하나님 사자의 말대로 마노아의 아내는 잉태하여 때가 이르자 삼손이 출생합니다. 그리고 삼손이 점점 자라 마침내 이스라엘의 사사로 하나님께 부름을 받습니다.
여호와의 사자에 대한 마노아의 인식(15-23) 마노아는 여호와의 사자를 더 머물게 하기 원하며 음식을 대접하길 원하지만, 그는 자신 아니라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옳다고 알려줍니다. 자신의 무지함을 알게 된 마노아는 그에게 이름을 물어보지만 경이로운 일, 불가사이한 일이라는 뜻인 기묘자라고만 말합니다. 마노아는 염소 새끼와 소제물을 가져다 여호와께 드립니다.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갈 때 여호와의 사자도 그 불꽃에 휩싸여 올라갑니다. 마노아는 그것을 보고 엎드립니다. 마노아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였음을 알고 죽을까 두려워하지만 번제와 소제를 받으시고 모든 일을 보이셨으니 자신들을 죽이지 않으실 것이라는 증거라고 아내의 이야기를 통해 안심하게 됩니다.
삼손의 출생과 성장(24-25) 마노아의 아내가 아들을 낳고 이름을 삼손이라 지었습니다. 그리고 삼손이 점점 자라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삼손은 태중에서부터 준비시키셨고, 준비된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삼손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했고 그를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출생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이 뜻을 깨닫고 살아갈 때에 사람은 행복하고 보람되게 살 수 있습니다. 특별히 부모는 자신의 자녀에게도 이 사실을 기억하고 신앙적으로 잘 키울 뿐 아니라, 본인 스스로도 신앙생활을 신실하게 해나가는 모범을 보여야합니다.
적용: 당신의 삶 가운데 성령충만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나요? 삶 가운데 성령충만함을 위해 어떻게 하고 있는지 나눠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엎드려 기도하실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기도가 많지요. 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주의 종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또 부모님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지만 빼놓을 수 없는 기도 중의 하나는 자녀를 위한 기도인 줄 믿습니다. 자녀를 위해서 늘 감사 예물을 드리면서 기도하는 가정이 있습니다. 그 아이가 유치원 다니는 어린 아이든 장성한 청년이든 자녀들의 이름을 적어서 매주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부모님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관심은 자녀에 대한 기도 제목을 끊임없이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정의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런 자녀들을 하나님이 세상에서 머리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 설 교 >
삼손의 못 말리는 이야기
김명혁목사 / 히11:32, 33 삿13:16
제가 고등학교 학생이었을 때 삼손에 관한 영화를 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두 눈을 뽑힌 삼손이 거대한 다곤의 신전을 두 팔로 기둥을 밀어서 무너뜨리는 신나는 장면이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흥분된 마음으로 박수를 치면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며칠 전 사사기 13장부터 16장까지 기록된 삼손의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서 는 고등학생 때 지녔던 흥분된 감정과는 정 반대의 감정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흥분된 감정이 아닌 서글픈 감정이었습니다. 삼손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속이 상하셨을까? 라는 서글픈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만드신 특제품이었습니다.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 심판을 받게 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사라는 인물로 특별하게 만드신 특제품이었습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이었는데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삼손을 잉태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태아 교육까지 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찌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찌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삿13:3,4). 태어날 때부터 삼손에게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셨습니다. 장성한 다음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셨고 그래서 큰 힘을 지니게 하셨습니다. 삼손은 아주 큰 힘을 가진 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특제품으로 사사로 만들어진 강한 사람 삼손이 어떠한 삶을 살았습니까?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무절제한’ 삶을 살았습니다. ‘천방지축의’ 삶을 살았습니다. ‘못 말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오늘날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삶의 모습을 잠시 그려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특제품으로 만들어 주신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어릴 때부터 장성할 때까지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시고, 특별한 은사까지 부여해주신,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무절제한’ ‘천방지축의’ ‘못 말리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선물로 주신 성령의 은사들만을 믿고, 강한 힘을 자랑하면서, 자신들을 대단한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내세우면서, 고삐 풀린 망아지들 같은 무절제한, 물욕과 정욕과 명예욕에 사로잡힌, 천방지축의, 못 말리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서글픈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서글퍼 하는 대상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은 바로 저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태어날 때부터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여러 가지 은사들을 주시고 그리고 아직까지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알고는, 똥 배짱을 지니고, 제 멋대로 무절제하게 살아가는 서글픈 인간이 삼손이 아니라 바로 저 자신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므로, 저는 삼중적인 서글픔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천방지축의’ ‘못 말리는’ 인간인 삼손을 바라보면서 서글픔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천방지축의’ ‘못 말리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서글픔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모순되는 ‘천방지축의’ ‘못 말리는’ 삶을 살고 있는 저 자신을 바라보면서 가장 슬픈 서글픔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은 “삼손의 못 말리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아침 설교는 은혜로운 설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아침 설교는 서글픈 설교입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을 생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그저 서글픈 마음을 지니게 된다면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삼손의 못 말리는 이야기”를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삼손이 불레셋 여자를 아내로 삼기 위해 딤나로 내려간 이야기 입니다.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딸 중 한 여자를 보고 도로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 중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취하여 내 아내를 삼게 하소서”(삿14:1,2). 삼손의 부모가 삼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취하려 하느냐”(삿14:3a) 그러나 삼손은 이렇게 고집을 부리며 딤나에 내려가서 불레셋 여자를 아내로 취했습니다. “삼손이 아비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를 데려오소서 하니”(삿13:3b)
4절의 말씀이 마치 삼손이 불레셋 여자를 취한 일이 옳은 일이었다고 말하는 듯 합니다.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그러나 이 말씀이 삼손이 불레셋 여자를 취한 일이 옳았다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여기 이른바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 이라고 함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어떤 때에는 율법의 말씀도 무시해가시면서 필요한 일을 성립시킨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 사람인 삼손이 이방 여자를 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함이다. 그가 끝까지 그 여자를 취하겠다고 고집한 것은 그의 잘못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잘못을 계기로 하여 그의 거룩한 뜻을 이루시는 경륜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삼손이 불레셋 여자를 취한 사건도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이다. 나실인 삼손이 불레셋 여자를 취하는 것은 나실인의 법도 범함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를 당장 버리지 않으시고 긍휼로 참으시며 그를 사용하셨다.”(박윤선 목사). 결국 삼손이 딤나로 내려가서 불레셋 여자를 아내로 취한 사건은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천방지축의, 못 말리는, 무절제한 행동을 한 사건이었습니다. 옳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잘못된 방법을 사용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삼손이 부모와 함께 딤나로 내려가서 블레셋 여자를 아내로 삼고 잔치를 베풀었다고 했습니다. 7일 동안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잔치를 베푸는 동안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냈습니다. 수수께끼를 풀면 옷 30별을 그들에게 줄 것이고 풀지 못하면 그들이 삼손에게 옷 30벌을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온 것이 무엇이냐”는 수수께끼를 냈습니다. 억지를 부린 것입니다. 아무도 그 수수께끼를 알아 맞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불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아내를 꼬이고 협박해서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라고 했습니다. 삼손의 아내가 울면서 삼손에게 답을 알려달라고 애걸했고 결국 삼손은 그 답을 알려주었습니다. 제 7일 되는 날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에게 와서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 맞추었습니다. 삼손이 화가 났습니다. 그들이 아내를 협박하고 꼬여서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 맞춘 것을 알고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아스글론이란 곳에 내려가서 그곳 사람 30명을 쳐 죽이고 그들의 옷 30벌을 빼앗아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주고 심히 노하여 아비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천방지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크게 임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방지축의 삼손을 버리시지 않고 자기의 신을 그에게 부어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그저 자만해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화를 내면서, 아내를 버리고 아비 집으로 가 버렸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아내로 준 것을 알고는 다시 화가 나서 여우 삼백을 붙들어서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취하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홰에 불을 켜고 그것을 불레셋 사람의 곡식 밭으로 몰아 들여서 곡식단과 곡식과 감람원을 모두 불 살라버렸다고 했습니다. 후에는 자기를 잡으려고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오는 불레셋 사람들을 나귀의 새 턱뼈를 가지고 그것으로 일천 명을 쳐서 죽였다고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삼손을 불레셋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셨지만, 삼손은 인격도 없고 신앙인의 모습도 지니지 못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천방지축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신을 계속해서 삼손에게 부어주셨고 삼손에게 마실 물까지 솟아나게 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삼손을 바라보시면서 얼마나 속이 상하셨을까 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둘째, 삼손이 가사에 가서 기생에게 들어간 이야기 입니다.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강한 사람 삼손은 정욕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인, 제 멋대로 무절제하게 행동한, 천방지축의 사람이었습니다. 삼손이 기생의 집에 들어가면서 아마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정탐꾼도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갔으니 자기도 얼마든지 기생의 집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정탐꾼이 기생의 집에 들어간 것은 여리고 성을 정탐하기 위한 것이었고, 삼손이 기생 집에 들어간 것은 기생과 하룻 밤을 즐기려고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삼손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무절제하게 행동한 못 말리는 인간이었습니다.
삼손이 가사에 와서 기생의 집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가사의 불레셋 사람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그리고 성문에 사람들을 매복해서 밤새도록 지키다가 새벽에 삼손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밤 중에 일어나서 성 문짝들과 두 설주와 빗장을 빼어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산 꼭대기까지 도망을 갔다고 했습니다. 삼손이 밤중에 일어나 큰 힘을 발휘한 것은 아직까지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 증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못 말리는 삼손을 바라보시면서 속이 많이 상하셨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삼손과 같이 무절제하게 행동하는, 못 말리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욕과 정욕에 사로잡혀 부도덕한 행동을 뻔뻔하게 하고 있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일반 신자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강함을 믿고,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들을 자랑하면서, 제 멋대로 무절제하게 행동하는, 못 말리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일반 신자들도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직까지 버리시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부끄러운 지도자들과 일반 신자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탄식할 일이고 슬퍼할 일입니다.
셋째, 삼손이 소렉 골자기로 가서 들릴라 라는 여인을 사랑한 이야기 입니다.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자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삼손은 육체의 사람이었고 정욕의 사람이었습니다. 들릴라는 여인을 사랑하다가 삼손은 몸도 빼앗기고 마음도 빼앗기고 정신도 빼앗기고 영혼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들리라의 네 번에 걸친 애걸과 애교에 몸과 마음과 정신과 영혼을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삼손의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예쁜 여자를 믿을 수도 없고 힘센 남자를 믿을 수도 없다는 서글픈 사실을 실감합니다. “삼손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았으며 어떻게 하면 삼손을 결박할 수 있는지를 알려달라”고 애걸을 하는 예쁜 여자 들리라에게 삼손은 세 번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 찍어 너머지지 않는 장사가 없다는 말대로 삼손은 네 번째 애걸에 너머지고 말았습니다. 자기의 큰 힘이 자기 머리 털에 있다는 비밀을 들릴라에게 알려주고 말았습니다.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삼손이 들릴라에게 그 비밀을 공개하고 말았습니다.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그리고는 예쁜 여자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단 잠을 자다가 그만 머리 털을 밀리우고 말았습니다. 결국 삼손은 나실인의 신분을 상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가장 슬프고 가장 비극적인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시는 일인데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오래오래 참으시던 하나님께서 결국 삼손을 버리시고 말았습니다. 삼손은 그런 비극도 알지 못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영적으로 마비되었습니다.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비극적인 결말인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저는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슬프고도 비극적인 처지에 이르게 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신자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고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실인의 서약을 이미 어기고서도, 목사와 장로와 권사와 집사의 서약을 이미 어기고서도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와 함께 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면서 살고 있는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과 신자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고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국 삼손은 큰 힘을 잃게 되었고 두 눈이 뽑혔고 놋줄로 매임을 당했고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는 불행과 슬픔과 비극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삼손은 불레셋 사람들의 조롱감이 되었고 조소감이 되었습니다. 불레셋 사람들은 다곤의 신전에 모여서 다곤 신이 자기들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고 말하면서 다곤 신에게 찬송을 부르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리고 삼손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조롱하고 모독했습니다. 삼손은 다곤 신전에 모인 삼천 여명의 불레셋 사람들 앞에서 재주까지 부렸다고 했습니다. “그 집에는 남녀가 가득하니 불레셋 모든 방백도 거기 있고 지붕에 있는 남녀도 삼천명 가량이라 다 삼손의 재주 부리는 것을 보더라”(삿16:27). 얼마나 서글프고 얼마나 비극적인 장면인지 모릅니다. 삼손의 ‘무절제하고’ ‘자유분방한’ ‘천방지축의’ ‘못 말리는’ 행동이 가져온 이스라엘의 비극이었습니다. 사사 “기드온의 이김의 이야기”와 비교할 때 사사 “삼손의 못 말리는 이야기”가 얼마나 서글픈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삼손은 자신은 물론 이스라엘의 불행과 비극의 마지막 정점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었습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불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삿16:28). 하나님께서 삼손의 마지막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사람의 마지막 부르짖음에 항상 귀를 기울이십니다. 삼손에게 다시 한 번 큰 힘을 부어주셨습니다. 집을 버티고 있던 두 기둥을 삼손은 두 손으로 밀어서 무너뜨렸습니다. 결국 다곤의 거대한 신전이 무너져서 그 집안에 있던 삼천 여명의 불레셋 사람들이 모두 무너지는 집에 깔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삼손도 함께 깔려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던 불레셋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고 동시에 정욕에 따라서 무절제하게 제 멋대로 살던 삼손에 대한 심판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삼손의 죽음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그의 타락은 하나님의 벌을 받을만한 것이었다.” 물론 삼손의 영혼은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그의 타락에 대한 벌을 받았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삼손의 못 말리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삼손의 서글픔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삼손은 사사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사사의 사명을 제대로 다하지 못하고 불행하게 죽었습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천방지축의, 못 말리는, 무절제한 삶을 살다가 불행하게 죽었습니다. 불레셋 사람들을 완전히 몰아내지도 못했습니다. 불레셋 사람들을 완전히 몰아낸 사람은 마지막 사사라고 할 수 있는 사무엘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삼손의 못 말리는 이야기”와 “삼손의 서글픔의 이야기”의 주인공은 삼손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고서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들을 받고서도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따라서 무질서하게 제 멋대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바로 오늘의 못 말리는 이야기와 서글픔의 이야기의 주인공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삼손의 타락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라고 생각합니다. 삼손을 바라보시고 슬퍼하시던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들을 바라보시면서도 얼마나 속상해 하시고 얼마나 슬퍼 하실까를 생각해 봅니다. 새벽마다 여러분들과 함께 데살로니가전서를 읽고 있는데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은 사도 바울의 기쁨과 감사와 사랑과 자랑과 보고싶음의 대상이었습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과 자랑과 보고싶음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까? 속상함과 서글픔과 탄식과 심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까? 오늘 아침 너무 서글픈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며칠 전 제가 삼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지니게 된 서글픔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설교가 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당나귀를 통해서도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깨진 질그릇 같은 부족한 죄인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불쌍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서글픔의 대상에서 기쁨의 대상으로 바뀌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탄식의 대상에서 자랑의 대상으로 바뀌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심판의 대상에서 축복의 대상으로 바뀌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위기의 순간에 드러나는 신앙
이대성목사 / 삿 13:22-23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위기의 순간에 드러나는 신앙”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위기의 순간에 드러나는 신앙” 여러분! 얼마 전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전쟁과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책을 다시 한 번 읽고 제 뇌리에 더욱 강하게 각인된 메시지가 있어서 바로 그것을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갑작스레 맞닥뜨린 어렵고도 힘든 위기의 순간에 사사 삼손의 부모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을까요? 사사기 13장 22절과 23절 말씀 다같이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그의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니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
사람의 참된 모습은 위급한 상황 앞에서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 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평온할 때에 별 생각 없이 쏟아낸 약속들이나 생각들로는 그 사람의 참된 모습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로 이런 위험에 대해 여러 번 경고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 말씀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여러분! 가난하고 어려울 때나 위험할 때에 보이는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진정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냅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슬프도록 실망하기도 하고, 환멸을 느끼기도 하며, 의외의 모습에 놀라기도 합니다.
가장 큰소리치던 사람들이 침묵하고, 공공연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던 사람들이 조용히 사라집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역경과 위기가 우리의 믿음과 신앙의 본질을 여실히 검증하고 드러낸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듣는 중에 삼손의 어머니가 단지 강한 성품을 가진 위대한 여성이었음을 알 뿐이라면 이 본문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우리는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가 정말 위대한 것은 그녀의 믿음과 통찰력과 이해력, 그리고 신앙을 확고히 붙드는 자세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녀의 진정한 본모습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을 부끄럽게 하고, 그의 약함과 두려움을 책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 중에는 신앙적인 분위기에게 자라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기독교적인 가르침에 둘러싸여 지낸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이러한 양육을 받으면서 우리는 기독교 교리들에 관해 많은 것을 듣고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교리들을 믿는 것처럼 보이고, 나 자신도 그 교리들을 때때로 반복해서 고백하면서 나 스스로를 신실한 신자라고 간주해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교리들을 시험하는 것을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으며, 그것을 의심하는 것조차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에 관해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았으며, 그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단지 모든 것이 옳고 나 자신 역시 그것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교리적인 진술들에 관해 굳이 이해하려고 애쓰거나 제대로 알아보려고 노력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 가르침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진심으로 애써 본 적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별안간 어려움과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우리는 신앙에 대해 전혀 고백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과 똑같이 반응하고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과 똑같이 무기력해지고 희망을 잃어버립니다. 우리에게 신앙이 있다는 것이 불신자들과 별반 아무런 차이도 만들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회를 하면서 이런 사람들을 만나는 것만큼 슬프고도 비극적인 일은 없습니다. 그들의 신앙이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질병이나 죽음, 재해나 재앙, 분쟁이나 전쟁과 같은 크나 큰 어려움과 위기를 만날 때에 그들의 신앙은 별 볼일 없는 무가치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평소에 그들은 모범적인 신앙인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시험을 받아 그 어느 때보다도 신앙이 필요할 때, 그들의 신앙은 아무런 의미 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위기가 닥치면 마노아와 그의 아내를 시험했듯이 저와 여러분의 신앙을 시험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마노아와 그의 아내의 신앙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요?
첫 번째는 마노아의 신앙은 한 마디로 가라지 신앙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서글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마노아의 아내보다는 마노아의 신앙을 닮았습니다. 우리는 복 얻기를 갈망하고, 종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모든 선물과 축복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마노아처럼 열심히 기도하기도 하고, 겉모습과 행동만으로는 매우 경건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모든 일이 잘될 때,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고 우리의 모든 욕구가 만족되는 것처럼 보일 때에는 마치 마노아가 자기 요청이 받아들여졌을 때 그랬던 것처럼 찬양과 감사가 넘쳐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합니다. 먹구름이 몰려와서 하늘이 어두워지고, 모든 일이 잘못되어져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적잖게 당황하고 난처해합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마노아처럼 행동합니다.
속절없이 무너져서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고는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겁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러한 결론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주어진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최악의 결론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내리는 성급한 결론은 대부분 마노아가 내린 최악의 결론과 동일한 근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우리를 대적하시며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모습은 위기에 직면하는 사람들에게서 쉽사리 발견되곤 합니다. 그들은 하지 말아야 할 질문들을 얼마나 성급하게 던지는지 모릅니다.
그 질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공정하지 않으시다거나 약속에 신실하지 않으시다는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야말로 진정 인류의 가장 큰 대적이자, 기독교 신앙의 가장 끈질긴 원수인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원수 마귀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면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속에 ‘하나님은 우리를 대적할 뿐, 우리의 행복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식의 거짓말을 속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단지 그런 상황에 대해서만 불평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우리의 처지가 그나마 나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우리의 신앙이 힘없고 약하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술 더 떠서 하나님께 대해서도 투덜대며 불평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우리를 향한 그 분의 선하심을 의심하고 있음을 강하게 시사하는 질문과 진술들을 마구 쏟아냅니다.
오늘 이 시간, 그런 실례를 구체적으로 제시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참으로 끔찍한 죄악임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모든 죄악의 가장 주된 원인이요, 모든 죄악 중에 죄인 ‘불신앙의 죄’인 것입니다. 불신앙 즉 하나님과 그 분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것은 연약하여 그 분께 복종하지 못하거나 그 분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악하고 해로운 죄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불신앙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 자신을 살펴볼 때에 변명의 여지가 없게 만듭니다. 마노아는 아내를 돕고 굳게 붙들어 주어야 했으며, 그녀가 남편에게 기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그에게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의 무너짐이 그녀의 더 큰 무너짐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거나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가운데 언제나 먼저 믿은 우리를 지켜보면서 의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도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기대를 가지고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으며, 특히 어렵고 긴박한 시대일수록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실패는 훨씬 더 큰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나 자신의 개인적인 측면을 생각하더라도 마노아처럼 행동하는 것은 정말이지 최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비탄과 절망에 빠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엔 우리 모두가 불행해지고 비참해지며, 동요하여 놀라게 되고, 두려움과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상태와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우리 또한 마노아처럼 말하기 쉽고, 그로 인해 남은 생애동안 두고 두고 후회하며 한탄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리석은 신앙의 소유자 마노아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 신자가 아닌, 말씀과 기도로 더욱 거룩해져서 주님 뜻을 온전히 준행하는 알곡 신자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마노아 아내의 신앙은 한 마디로 알곡 신앙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갑자기 위급한 상황을 만났을 때의 부정적인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긍정적인 모습을 살펴보길 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처럼 어리석게 행동해서는 안 되고, 삼손의 어머니처럼 지혜로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가 이 위기를 과연 어떻게 극복하는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 교훈을 배우게 하심으로 장차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원수 앞에서 당당히 맞설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원수는 위기의 순간에 틀림없이 우리에게 다가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방치하신다거나 우리를 대적하실 것이라는 가증스런 거짓말로 속삭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훈은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첫 번째 교훈은 “생각하고 분별하라.”는 겁니다. “생각하고 분별하라.” 우리는 먼저 이 여인이 어떻게 행했는지를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다소 놀랍고 충격적인 상황 앞에서 그녀는 생각하고 분별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주저앉아 두려워하며 훌쩍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나쁜 일을 예감하고서는 불길한 예언을 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말을 내뱉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처럼 울거나 소리치지 않았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비명을 지르거나 주저앉지도 않았습니다. 불경스런 의문을 제기하거나 하나님에 대해 불평을 쏟아 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생각하고, 사리를 따져 보고, 그 문제를 곰곰이 숙고했습니다. 그리고는 올바른 논리에 따라 참으로 합당한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제가 전하고 있는 말씀이 무척 낯설고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힘들고 어려운 재난과 시련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에 기독교 신앙이 무슨 부적이나 마약처럼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주거나 순식간에 모든 일을 형통하게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신앙은 도리어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아니, 명령합니다. “생각하고 분별하라!” 그렇다면 이 교훈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문제에 대해 숙고해 보기 전에는 말하지 마십시오. 스스로를 특히 자신의 입을 잘 통제하십시오. 깊이 생각해 보기 전에는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야고보서 말씀처럼 말하기를 더디 하십시오.
둘째, 깊이 생각한 다음에는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실제적으로 생각하십시오. 단지 현실만을 숙고하거나 같은 생각만 계속해서 되풀이하지 마십시오. 적극적으로 생각하십시오.
생각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기고, 마치 하나님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일이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생각하십시오. 원수는 우리를 공격하되, 특히 우리의 생각을 공격합니다. 사탄 마귀를 예수 이름으로 대적하고 쫓아내십시오.
셋째, 다음과 같은 확신에서 출발하십시오.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한 가지 확실하고도 분명한 팩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의심하게 만드는 원수의 속삭임은 100% 거짓’이라는 겁니다.
넷째, 한 두 가지 일부 특정한 사실들만이 아닌 모든 사실들을 숙고하리라 결심하십시오. 마노아는 어떤 의미에서는 꽤 논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본 자는 반드시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 만을 염두에 두었을 뿐, 다른 사실들을 생각하지 않고 제쳐둠으로써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단지 이 한 가지 사실에 얽매여서 성급한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마노아의 아내처럼 우리는 생각하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단지 그녀가 생각했다는 것만이 아닌 그녀의 추론과 논리의 결과까지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라.” 여러분! 그녀가 내린 결론이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그녀는 자신과 남편에게 닥쳐온 사건들 앞에서, 사도 바울이 여러 서신들에서 계속 논증했던 바를 그녀 나름의 방식과 언어로 단순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결코 변덕스럽지 않으시다.’는 겁니다. 그녀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이 돌변하셔서 그때까지 행하셨던 일들을 뒤엎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으시던 하나님이 어떤 분명한 이유나 까닭 없이 인상을 쓰며 그들을 파멸시키려고 하시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느낌을 주는 상황이 종종 있습니다. 별안간 모든 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이 보일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시며, 우리에게 신경쓰지 않으신다는 생각이 넌지시 찾아옵니다.
심지어 과거에 베풀어 주신 그 분의 자비와 모든 복들마저 우리를 비웃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가엾은 피해자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척하다가 나중에는 협박과 고문을 가하는 폭군처럼 여겨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신뢰할 수 없고 감정 기복이 심하여 그 행동과 의도를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의 손에 내던져 지는 것만큼 굴욕스럽고 민감한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단 한 순간도 안전하다고 느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행했던 일들을 언제든지 완전 뒤집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혀 평화롭지 않으며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미래를 바라보아도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든지 이 사실 만큼은 매우 분명히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상황이 어떻게 보이더라도, 그것은 옳은 설명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와 관련해서 하나님 그 분이 영원히 변치 않으신다는 사실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 그 분은 영원하시며, 하나님 그 분의 명령도 영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그 분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은 영원무궁합니다. 우리가 늘 듣는 것처럼 하나님의 계획은 ‘창세 전에’ 세워졌습니다. 하나님 그 분은 ‘영원토록’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 그 분은 ‘빛들의 아버지이시며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그 분은 말과 행동이 다른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 그 분은 결코 우리를 속이거나 희롱하지 않으십니다.
23절 중반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랬다 저랬다 하는 변덕스러운 분이 아니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부당하게 대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삼손 어머니의 주장은 완전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녀와 그녀의 남편으로 하여금 어떤 일들을 행하게 하신 후에 그 일을 빌미로 그들을 벌하고 파멸하려 하신다면, 그것은 정말이지 불공정한 처사일 것입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조차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그 일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사건의 의미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녀는 하나님이 결코 부당하거나 불의하지 않으심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문제나 상황의 한쪽 면만을 볼 뿐, 그 사건을 공정하게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영역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왜곡되고 더럽혀 졌습니다. 공정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 자체가 올바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기심이 저와 여러분의 시야를 흐리게 하고, 우리의 이해력을 손상시켰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신에게 무엇이 최선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빛에까지 큰 어둠이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으로 어리석게도 하나님을 부당하다거나 공정하지 못하다거나 불의하시다고 섣불리 비난합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어리석은 일이며 죄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시편 139편 11절과 12절 말씀입니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이는 곧 다윗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족하고 연약한 감각으로 하나님을 판단하지 않기 위해서 늘 항상 하나님 말씀을 꽉 붙잡고 깨어 있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옛 찬송가의 한 작사자처럼 이렇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내 하나님이 무엇을 명하시든 옳습니다. 거룩하신 주의 뜻이 서리니 그 분이 무엇을 행하시든 나는 잠잠할 것이며, 그 분이 어디로 인도하시든 나는 따르겠습니다. 그 분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 가는 길이 어두워도 그 분이 나를 붙드시니 나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무슨 까닭이냐고 묻지 않고 모든 것을 맡기겠습니다.
내 하나님이 무엇을 명하시든 옳습니다. 주는 나를 속이지 않으시니 의의 길로 나를 인도하시며, 주께서 나를 떠나지 않으심을 나는 믿습니다.
그 분이 행하시는 것을 순종하여 받아들이면 그 분의 손으로 내 슬픔을 가져가시리니 나는 인내하며 그 분의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아멘!
셋째,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말씀이나 은혜로운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 여인의 뛰어난 논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정신을 집중해서 23절 말씀 다시 한 번 읽습니다. (시작)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
사실 그녀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자신의 임재와 선하심의 놀라운 증거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죽이려 하신다고 그 어찌 상상할 수 있습니까?
또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고, 우리를 위한 많은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시며,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해서 그것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그 모든 일을 시작하시고 나서 별안간 그것을 끝내려 하신다고 그 어찌 상상할 수 있습니까?
제가 주제넘게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이 모든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느닷없이 그것을 뒤집어엎고 파괴해 버리신다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사도 바울이 자주 웅변적으로 진술했던 바로 이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빌립보서 1장 6절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이 논증은 로마서 8장 32절 말씀에서 더욱 강력하게 나타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여러분! 큰일을 행하신 하나님께서 아니, 모든 일 중에 가장 위대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보다 더 작은 일을 행하실 수 없겠습니까?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사 갈보리 산 십자가 죽음에 내어주실 정도로 그 크신 사랑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행하신 후에 우릴 버리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아직 마노아의 아내처럼 온전한 믿음에 도달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믿음으로 선포하길 원합니다.
“하나님 그 분의 선하심으로 시작하신 일, 하나님 그 분의 능력의 팔로 이루시리니 하나님 그 분의 약속은 ‘예’와 ‘아멘’이 될 줄로 나는 믿습니다.
장래의 일이나 현재의 일도, 땅 아래의 일이나 하늘 위의 일도 하나님 그 분의 목적을 방해하지 못하고, 하나님 그 분의 사랑에서 내 영혼을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줄로 나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위기의 순간에 혹여 우리에게 일어난 일의 의미를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온통 잘못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비록 그러함에도 하나님 그 분을 온전히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스스로 입증할 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 그 분을 끝까지 믿고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시종여일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 어제도 오늘도 아니 내일도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저와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을 영원토록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결단코 흔들릴 수 없음을 믿고서 그 기반 위에서 자신의 상황에 대해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믿음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며,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다 명백해지고 선하게 될 것임을 전혀 의심치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앞으로 다가 올 위기의 순간에 결코 흔들리지 마시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온전히 믿고 신뢰함으로써 늘 항상 주 안에서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복을 받은 자입니까?
삿 13장 24~25절 / 서명성목사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할 때 세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은 누구신가? 본문에 비추어 본 나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이 원칙만 잘 지킨다면 큰 무리 없이 말씀을 대할 수 있고 그 말씀이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 말씀대로 살 때 열매가 있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지난 두 주 동안 기드온, 입다를 살펴보았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뛰어난 일을 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생애 후기의 모습은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합니다. 끝이 별로 아름답지 못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복해서 말씀 드리지만 사사기는 성경의 어느 책보다 우리의 상황을 잘 대변한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사사기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명을 끝까지 아름답게 감당하기 원합니다.
이스라엘의 현 주소
입다가 죽은 후에 소사사로 불리는 입산, 엘론, 압돈이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도무지 하나님께 돌이킬 줄을 모릅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목전에서 다시 악을 행했고,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블레셋의 압제아래 두셨습니다. 지금까지 압제 기간 중에서 가장 깁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악이 가장 심각했음을 보여줍니다. 40년의 기간 중 20년은 삼손이 사사로 있었습니다. 다른 사사들의 경우, 사사가 있던 기간에는 압제가 끝나고 평온했던 반면, 삼손의 경우에는 그가 사사로 있던 때에도 여전히 힘들었습니다. 삼손이 사사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방의 압제를 당하면서도 다른 때와 달리 하나님께 도무지 부르짖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을 아예 기대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처참한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삼손은 복을 받은 자입니다
이스라엘의 어려운 상황을 반영하는 한 가정이 등장합니다. 소라 땅 단 지파 마노아의 가정입니다. 압제 아래서 부르짖지 않았던 이스라엘처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있으면서도 그 부부는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호와의 사자가 여인에게 나타납니다. 우리가 무엇을 했기에 기특해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했기에 언제나 응답하시고 무엇인가 섬겼기에 그것으로 크레딧을 쌓아 반드시 복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하나님의 구원은 회개의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 즉 불쌍히 여기심에서 나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의 아내에게 장차 아들을 낳을 것이라 하면서 그에게 대한 두 가지 약속을 줍니다. ‘아들이 태에서부터 나실인이 될 것이다.’ ‘그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할 것이다.’ ‘나실인’이 되는 것은 특별한 목적으로 일정 기간 자신을 구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구별되었습니다. 부모는 아이의 이름을 삼손이라 지었습니다. 이름의 뜻은 ‘작은 태양’(little sun) 혹은 ‘태양처럼 빛나는’(sunny)입니다. 압제에 빠진 이스라엘에게 자유와 구원을 가져다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지었을 것입니다. 삼손은 여호와의 복과 여호와의 영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구약의 삼손만큼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부모는 삼손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했습니다. 이제 열매를 거두는 것은 삼손에게 달렸습니다. 삼손은 과연 복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과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갑니까? 삼손은 과연 민족을 구원하는 태양처럼 사사의 직분을 감당할까요?
이스라엘은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삼손만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이스라엘이 삼손과 같이 복 받은 민족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와 언약을 맺으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온 세계가 하나님의 것이지만 이스라엘만큼은 가장 보배로운 소유가 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기 위함입니다. 언약 백성을 통하여 세상을 하나님께 이끌기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세상에 믿는 자의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것은 하나님을 축복하는 것이요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아브라함 편이 되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더구나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힘입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은 복덩이일 뿐 아니라 복의 전달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축복합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 33:29)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나실인 민족으로 선택받았고, 하나님의 영이 감동하는 백성이며,하나님의 복을 받은 민족입니다.
우리는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똑같이 해당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갈 3:9) 받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죄인인 우리 대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며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에베소서를 보면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감격에 차서 영광을 돌립니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당신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즉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받도록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하여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인치셨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복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도 삼손처럼 거룩하고 흠이 없는 나실인으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거룩한 백성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언약을 지키면서 세상의 소금과 빛,산위의 도성으로 역할을 잘 감당하라 하셨습니다.
삼손의 스토리에 나오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끝까지 사랑을 베푸시는 분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14:4) 개역성경에 의하면 삼손이 블레셋 여인을 가까이 하는 것은 블레셋 사람들을 치기 위한 의도적인 전략인데 그의 부모가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그 번역은 잘못되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그’라는 대명사가 사용됩니다. 그는 여호와를 가리킵니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그러나 그의 아비와 어미는 이것이 여호와께서 나온 것인 줄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즉 여호와가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기회를 찾고 있었고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않는다고 하였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치유와 회복을 위하여 쉬지 않으셨습니다. 삼손은 틈만 나면 딤나에 내려가 자기 눈에 좋은 여자를 찾고 있는 반면에 여호와께서 틈만 나면 삼손을 통해 블레셋을 칠 기회를 찾고 계셨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도리어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께 부르짖지도 않지만 하나님은 고통을 당하는 당신의 백성을 잊지 않으시고 안타깝게 여기시면서 그들을 구원하려 하십니다.
삼손이 결혼식 잔치자리에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냈습니다. 도저히 그것을 풀 수 없었던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아내를 위협하여 마침내 그 답을 알아냈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의 자기의 아내를 통해 수수께끼를 푼 것에 대해 분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했고 삼손은 아스글론에 내려가 그곳 사람 30명을 쳐 죽이고 노략해 얻은 옷을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주었습니다. 삼손이 아내의 강요에 못 이겨 수수께끼를 알려주는 어리석음을 범했음에도 하나님은 그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뛰어넘어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은 삼손의 승리가 아니라 여호와의 승리입니다. 하나님은 실패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일하시지만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가 아닙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 가운데 모든 것을 이끄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의 성패가 사람에게 달린 것처럼 생각합니다. 돈, 지식, 능력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결정적인 요소라고 생각하여 그것을 갖춘 사람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택한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지금 팔로마한인교회를 섬기게 하신 것을 감사하기 바랍니다. 충성하기 바랍니다. 주님의 상급이 있습니다.
2) 말씀대로 이루시는 분
블레셋이 군대를 이끌고 유다 지파 변경에 나타나 삼손을 붙잡아 넘겨줄 것을 요구하자 유다 자파 사람 3000명이 삼손을 잡으려고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15:11) 하며 도리어 일을 복잡하게 만든다고 삼손을 책망합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백성들의 말이 맞는지 의심할 정도입니다. 블레셋에 대항하여 단 한 명도 일어나지 않던 유다인들이 동족인 삼손을 잡기 위해 3000명이 동원되었다는 것은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잘 보여줍니다. 유다인들은 삼손과 타협한 끝에 새 줄 두 개로 심속을 결박한 채 에담 바위틈에서 끌어내어 레히로 나옵니다. 삼손과 블레셋이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임하시자 삼손을 묶는 줄이 풀립니다. 삼손은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취하고 그것으로 일천 명을 죽인 후에 승전가를 부릅니다. “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15:16). 삼손은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을 자랑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지 않았더라면 삼손이 어떻게 혼자서 천명을 죽였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손은 자기 자랑만 하다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생깁니다. 삼손이 심한 갈증을 느끼며 죽음의 공포를 느낍니다. 이에 삼손은 갈증을 견디다 못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15:18). 우리는 삼손의 기도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삼손의 어리석은 행동을 통해 결국 자신의 두 번째 약속을 성취하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두 번째 약속은 “그가 (하나님의 나실인인 삼손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13:5)라는 것입니다. 삼손의 기도에 등장하는 세 단어 ‘종’, ‘구원, ’ ‘무할례자’는 사사기 13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두 번째 약속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우리는 복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복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1)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성별되었고 태어나서도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그러나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온전히 구별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삼손이 딤나 여인과 결혼하려는 단 한 가지 이유는 ‘내 눈에 좋사오니’입니다. 이스라엘의 특징은“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17:6)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자기 눈에 좋은 대로’입니다. 삼손은 자기가 죽인 사자의 주검을 보았습니다. 그 주검에 벌떼와 꿀이 있었습니다. 삼손을 그 꿀을 떠서 먹고 부모에게도 주었습니다. 시체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는 나실인의 규례를 어겼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삼손을 통해 이스라엘 구원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나귀의 새 턱뼈 하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만져서는 안 되는 짐승의 시체를 다시 한 번 만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삼손을 통해 블레셋을 치기는 하셨지만 그래도 삼손의 행동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패배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유혹해 넘어뜨리는 가장 강력한 적입니다. 사자보다 강한 삼손을 무너뜨린 무기는 블레셋의 철제무기가 아니었습니다. 삼손은 이방 여인들을 집요하게 좇았습니다. 영적으로 이방 풍습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열망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약적인 용어로 말하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행했거나 우리에게 그럴만한 조건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삼손과 마찬가지로 태어나면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나실인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약한 부분을 공격하며 우리를 넘어뜨리게 합니다. 늘 깨어 있으며 하나님이 이미 주신 약속을 믿을 때 사탄의 공격을 이기고 거룩함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약점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정도가 어떠한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성령의 역사와 인도하심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2)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는 부족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실 때 그것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힘과 능력도 함께 주십니다. 자신의 아내를 친구에게 준 장인의 행동에 화가 난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의 밭을 불태웠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은 다시 삼손의 아내와 장인을 죽였고 삼손은 이에 대한 복수를 행하다가 결국에는 블레셋 사람 1000명을 죽이게 됩니다. 삼손은 ‘내가’ 원수를 갚겠다고 말했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영이 임해 나귀의 턱뼈로 1000명을 죽인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가 사자를 맨손을 잡아 죽인 일이나 아스글론 사람 30명을 죽인 일에도 여호와의 영이 강하게 임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을 사사로 부르시고 강한 힘으로 그에게 역사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모든 능력을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기에 우리는 이제 연약한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충만히 부어 주셨습니다. 그것을 믿고 담대하게 주님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맡겨진 일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한 사람은 일의 성패에 상관없이 그 모든 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일의 성패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며 보상을 바라든지 아니면 자책하거나 열등감에 빠져 절망하게 됩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선한 열매를 제대로 맺을 수 없습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령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의 분명한 증거입니다. 오직 성령을 구하며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 가운데 값진 열매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3)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귀턱뼈로 블레셋 사람 천명을 쳐 죽였습니다. 가장 큰 승리를 이룬 순간에 삼손은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도리어 자기가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다고 자랑했습니다.그러다가 목말라 죽을 지경이 되니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합니다. 그제야 삼손은 자신이 거둔 승리를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으로 고백합니다. 이런 고백을 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자기가 블레셋을 물리쳤다는 것을 이미 알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아쉬울 때만 하나님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우리가 도적질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할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가십니다. 우리가 실패할 수 있으나,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무지하며 능력이 없고 연약해 자주 넘어지나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구원 역사에 우리를 동참시키시며 우리에게 승리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더 큰 은혜와 복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엎드려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구할 때 얻으며 찾을 때 찾게 되고 두드릴 때 열릴 것이라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오늘날의 나실인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기 일에만 몰두할 때 하나님이 어떻게 여기시겠습니까? 어쩌다 보니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자들이 아니라 이왕 하나님께 부름 받았으면 자원해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동역자로 주의 일에 참여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하나님은 히브리서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며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우리의 삶 전체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놀라운 이적을 베푸십니다. 우리는 선택받은 자들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백성이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벧전 2:9).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받은 것은 단순히 자신의 구원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죄의 어두움과 그 악한 세력으로부터 영생으로 불러내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찬양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들은 우리가 얼마나 복을 받은 자들인지 압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압니다. 우리가 왜 택함을 받았는지 압니다. 우리가 갈 곳이 어디인지 압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성도들은 세상에 대하여 당당하여 미래에 대하여 확신하며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나실인으로 구별된 삶을 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삶 속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살며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며 때를 잘 활용하는 지혜로운 성도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아는 성도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성도들이 되어 하나님께 기쁨의 찬송이 될 뿐 아니라 이 땅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름진 복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