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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머리말
존 키건(John Keegan)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대전은 불필요하며 비극적인 전쟁이었다. 사라예보 사건이 단순한 국제적 분규로 끝날 수 있었다는 데에서 불필요했고, 전쟁으로 말미암아 수백만의 삶이 파괴되었다는 데에서 비극적이었던 것이다. 더불어 1차 세계대전 그 자체가 끔찍한 2차 세계대전의 불씨를 잉태하고 있었다는 점만으로도 대전이 지니는 죄악을 충분히 상기하게 해준다.
대전이 발발한 지 올해로 백 년이나 되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 기원에 대한 논쟁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결국 대전의 원인에 관한 본질적인 논쟁은 ‘대전은 무엇으로 인해 일어났느냐’는 물론이며 ‘대전은 누구로 인해 일어났느냐’에 대해서까지 중점을 두고 있다. 1919년에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의 231조는 전쟁의 발발과 피해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독일에게 강요했다. 60년대에 점화된 피셔논쟁에서부터, 독일 사학자들은 이에 대한 반향으로 개전 이전에 독일이 취했던 방어적인 성향에 주목한 반면, 영미 사학자들은 공격적인 성향에 초점을 맞추며 쟁론의 장을 펼쳤다. 그러나 1950년대에 이미 프랑스와 독일, 양국의 공동 연구는 대전의 원인에 관한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고 있었다. 1914년의 유럽 각국은 서로 간의 불신이 극에 달했고 하나같이 서로가 서로를 침략하리란 두려움을 지니고 있던 상태였으므로 대전의 책임을 어느 한 국가에게만 부과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 논지이며, 현재의 연구 결과도 대체로 이와 완연한 판단을 이끌어 내고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러한 논의에 부합해 전쟁의 책임소재를 주제로 한 소모적인 논쟁 대신, 전쟁 발발에 영향을 끼친 요인들에 대해 보다 객관적이며 근본적으로 분석하려 한다.
다른 전쟁사의 경우에도 비슷한 양상을 띠지만, 1차 세계대전은 특히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그 원인이 복잡하고 다양한 전쟁이다. 대전 직후서부터 전쟁의 원인을 규명하고자 하는 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아직 정론으로 확립된 학설은 존재치 않는다. 유럽의 거미줄처럼 얽힌 동맹 체제로부터 시작해 알자스-로렌을 비롯한 각국의 영토 분쟁에서 민족주의적 갈등까지, 당대의 모든 외교, 정치, 사회적 인자들이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복합적으로 작용했기에 단순히 몇 가지 사항들만으로 개전의 이유를 명쾌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들 중에서도 대전의 원인 규명에 있어 열강의 제국주의적 팽창은 중차대한 부분이다. 크림전쟁에서 러일전쟁, 즉 빈 체제가 성립된 이래부터 20세기 초까지 이념적 근간을 제국주의로 한 각국의 무차별적인 확장은 수많은 국제적 분규와 국가 간의 긴장을 가져왔다.전 세계, 그 중에서도 남아프리카에서 일어난 크뤼거 전보(Kruger Telegram) 사건은 이 시기를 주름잡던 양 제국이 빚었던 대표적인 마찰 중 하나였다. 이 사건은 심지어 식민지 경쟁에 상호가 관계되는 부분이 크게 없었음에도 분규가 발생했다는 데에서 제국주의적 과대팽창이 지니는 위험성을 극명히 드러낸다. 그러므로 연구자는 본 사건을 하나의 예로 두어 확장의 첨예함을 살피려 한다.
1차 세계대전의 원인 규명에 대한 국내 연구 성과는 존재하고 있지만 앞서 진척된 유럽과 미국의 연구 내용을 요약해 소개하는 정도이며,이중에서도 열강의 제국주의적 성격과 크뤼거 전보 사건을 중심으로 다루는 자료는 아쉽게도 존재하지 않는 실정이다. 고로 연구자는 토마스 파켄엄(Thomas Pakenham)의 The Scramble for Africa 와 이아인 R. 스미스(Iain R. Smith)의 The Origins of The South African War 1899-1902 등의 해외 자료를 요체로 이용해 논고를 진행할 것이다. 본 연구를 통해 1차 세계대전의 원인 규명에 있어 열강의 제국주의적 측면을 조명해보려는 움직임이 한층 활발해지기를 기대하며 더불어 국내에서는 2차 세계대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된 위상을 지니고 있는 1차 세계대전 그 자체의 관심 또한 증진되기를 바란다.
II. 근대 제국주의의 발흥과 남아프리카
제국주의(imperialism)는 라틴 어의 지배권(Imperium)에 그 어원을 두는 단어이다. 제국주의를 정의하기 위한 시도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학계 전반의 합의를 구한 규정은 오늘날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서구 제국의 모체라고도 할 수 있는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제국에서 로마 제국, 신성로마제국, 나폴레옹 제국, 소비에트 제국까지 유사 이래로 유럽, 또는 지구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제국들에게 천편일률적으로 ‘제국주의’란 개념을 부여하기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고로 본고에서는 그 범위를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을 비롯한 유럽 열강을 필두로 이루어진 19, 20세기의 근대 제국주의에 한정해 논지를 분명히 하려 한다.
근대적인 의미로서 제국주의가 최초로 사용된 것은 19세기 영국의 디즈레일리와 체임벌린이 대영제국의 확대 및 강화를 주창하면서부터이다. 제국주의는 시대에 따라 형태와 세부 사항에 차이가 존재하기는 하나, 일반적으로 일국이 타국을 정치, 경제, 군사적인 면에서 정복하고 지배하며 종속하는 과정으로 인식된다. 미국의 정치학자, 라인쉬(Paul Samuel Reinsch)가 이를 가리켜 “국가의 힘과 기회가 허락하는 한 지구상의 더 많은 지역을 통제하려는 욕망”으로 규정한 것처럼,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된 이후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서방 국가들은 전 세계로의 확장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신대륙에서 유입된 금과 은은 곧 유럽의 가격혁명을 촉발했고, 이는 서구 자본주의 발전의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이후 산업의 비약적인 발전과 더불어 유럽의 근대적 경제 체제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19세기에 들어, 레닌이 자신의 저서를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Империализм, как высшая стадия капитализма)』라 명명했듯이 식민지를 바탕으로 한 유럽의 자본주의 체계는 정점에 이르렀다. 존 스튜어트 밀은 이러한 체제 하에서 투자자본의 이윤율 하락을 방지하는 효율적 수단으로 식민지와 해외로의 자본수출을 주창하였으며, 열강은 확장을 통해 얻은 이익을 사회 전반에 배분한다는 논리로 계층 간의 협력을 이뤄낼 수 있었다.
1895년, 세실 로즈(Cecil John Rhodes)가 “제국은 결국 빵과 버터의 문제이다. 내전을 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제국주의자가 되어야만 한다.”라 말했듯이 제국주의는 공공연히 옹호되었고, 국가의 생존을 위해 확장이 요구되었다. 더불어 다윈의 진화론이 사회 현상에 적용됨에 따라 키플링(Joseph Rudyard Kipling)의 『백인의 짐(The White Man's Burden)』으로 대변되는 백인우월주의 사상이 대두했는데, 이는 유럽의 팽창을 정당화하는 사상적 근원으로 자리했다. 또한 제국주의는 유럽 내의 분규를 감소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제외한 모든 유럽 열강은 비유럽 지역에 그들의 힘을 발산시킬 수 있는 안전한 배출구를 찾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벨 에포크(La belle epoque)의 유럽은 대전 이전까지 번영을 구가했고, 시대의 분위기는 전쟁은 정도에서 벗어난 것이며 평화야말로 인간의 천부적인 속성이라는 인식을 형성하게 했다. 그러나 침탈할 식민지는 한정되어 있었고, 열강의 지속되는 세계분할은 확장이라는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마찰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남아프리카는 당대에 존재했던 수많은 분쟁의 소용돌이 중 하나였다. 공식적으로 이 지방에 처음 당도한 유럽인은 포르투갈 사람들로,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1488년 희망봉을 ‘발견‘하고 이후 인도 항로가 개척되며 남아프리카는 기항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포르투갈 인들은 이 지역에 정착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으며, 17세기 무렵 얀 판 리비어크(Jan van Riebeeck)를 위시한 네덜란드 인들1이 포르투갈의 지역 패권을 빼앗고 중간 무역항들을 설치했다. 남아프리카에서 백인의 정착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는데, 1707년 케이프 식민지의 백인 인구는 불과 약 2천명 정도였지만 1793년에는 13,830명으로 폭증했다.
18세기 남아프리카의 주도권을 잡은 것은 영국이었다. 1795년, 프랑스 혁명 전쟁으로 네덜란드 본국이 식민지의 통제권을 잃자 영국군은 이 지역을 급습했다. 곧 지역은 아미앵 화약을 토대로 네덜란드 인들에게 반환되었지만, 1806년에 프랑스를 견제한다는 명목으로 재차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1814년에 케이프 식민지는 공식적으로 영국령에 편입되었고, 이 지역은 영국에게 있어 ‘아시아로의 디딤돌(a stepping-stone to Asia)’로 여겨졌다. 하지만 19세기 후반까지 남아프리카는 품질 낮은 와인과 양모만을 생산할 뿐 거의 영국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영국 정부 주도의 계획 하에 이주민들이 늘기 시작했지만, 이들은 기존의 아프리카너(Afrikaner) 사회에 동화되지 못했고 영국을 모국으로 여기며 대영제국의 일부가 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아프리카너와 영국인은 종족적으로 분리되었고, 갈등의 조짐은 19세기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1834년에서 1844년까지의 대이주(Great Trek)에서 약 6천 명의 아프리카너 개척자들이 내륙으로 이동했다. 유럽인들의 내륙 개척은 이전부터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온 일이었지만, 대이주는 대규모이며 조직적이었고, 영국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다시는 그들의 고향인 케이프 식민지로 돌아오지 않으려 했다는 점에서 구분지어질 만하다. 이러한 대이주의 결과로 남아프리카 지방에는 두 개의 보어 인 국가, 트란스발 공화국(Transvaal Republic)과 오렌지 자유국(Orange Free State)이 들어서게 된다. 이들 국가는 샌드 리버 협약(Sand River Convention)2과 블룸폰테인 협약(Bloemfontein Convention)3을 통해 영국 정부에게 자치권을 인정받는다.
영국 당국은 재정적 부담으로 인해 남아프리카에서 더 확장하는 것을 꺼려했지만, 시국은 머지않아 일변하게 된다. 1867년, 다이아몬드가 호프타운 근방에서 발견된 이래로 트란스발 지역의 귀금속 산출량은 급격히 증가했다. 1898년에 이르러 트란스발의 황금은 세계 금 생산의27%를 차지할 정도로 그 위상이 대단했으며 영국의 제국주의자, 식민주의자들은 남아프리카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남아프리카를 둘러싼 영국과 보어 인들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었고, 종국에는 1880년에서 1881년까지 트란스발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제 1차 보어전쟁이 발발했다. 양자의 전쟁은 놀랍게도 세계 최강대국인 영국의 패배로 귀결되었고 1881년에는 프레토리아 협약(Pretoria Convention)4, 1884년에는 런던 협약을 통해 영국의 간섭은 최소화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남아프리카 전체에 대한 제국의 야망을 지워버리지는 못했다.더군다나 독일이 베추아날랜드(Bechuanaland)와 트란스발에 진출하며 영국의 패권을 위협하기 시작했고, 이는 영국인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III. 크뤼거 전보 사건의 배경과 전개
대이주 이전까지 영국은 과거 13식민지의 경우처럼 적정 경계를 넘어서는 행정의 팽창을 부담스러워 했다. 이는 만성적인 재정 적자를 불러 일으켰고 대군의 주둔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영국 정부는 남아프리카 내륙 지방의 지배를 보어 인들에게 맡기며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그러나 영국의 확장 정책이 더욱 공격적으로 변모하게 되며 지역 정세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가시화된 두 세력의 마찰을 상징하는 사건이 바로 '제임슨의 습격(The Jameson Raid)'이었다.
1890년대, 남아프리카의 야심찬 정치가 세실 로즈는 영 제국뿐이 아닌 케이프 식민지 아프리카너들의 지지까지 이끌어내는 데에 성공한다. 이는 종래의 어떠한 식민지 지도자도 해내지 못했던 과업이었으며, 남아프리카 통합을 향한 그의 노력은 순조롭게 이어지는 듯했다. 1895년까지 영국은 남아프리카 상황에 낙관적이었으며 머지않아 갈등이 해소되고 ‘무의식적 거대 연방(The great unconscious federation)'이 결성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남아프리카의 경제적 중심지는 점차 케이프 식민지에서 트란스발로 이동하고 있었으며,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파울 크뤼거(Paul Kruger) 대통령의 트란스발 공화국 정부는 영국과 로즈에게 비협조적이었다. 트란스발의 경제적 독립은 곧 그들이 영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고, 열렬한 亞제국주의자(Sub-Imperialist)였던 로즈는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더군다나 공화국 국무장관 레이드(Willem Johannes Leyds)가 베를린을 방문하는 등 트란스발 정부가 독일과 접촉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우려는 더욱 커져 갔다. 결국 로즈는 자신의 맹우인 제임슨(Leander Starr Jameson)을 통해 영국계 오이틀란데르(Uitlander)5를 준동, 트란스발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 공화국 내에서 폭동을 일으키려는 계획은 이미 고등판무관 로흐(Henry Brougham Loch)에 의해 기획된 바 있었지만 영국 정부의 재가를 얻지 못해 실행되지 못했다. 런던 정부는 유혈 사태를 원치 않았으며 ’또 다른 남아프리카 전쟁‘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본국의 반대에도 로즈는 독단적으로 습격을 실행했다. 그는 영국계 오이틀란데르의 지지를 얻는다면 영 제국이 트란스발을 합병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1895년 12월 29일, 제임슨의 인솔 하에 약 500여 명의 무장된 영국인들이 트란스발을 습격했다. 그들은 폭동을 선동하려 했지만 -로즈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준비되어 있던 요하네스버그’는 봉기하지 않았다. 이듬해 1월 2일, 습격단은 트란스발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고 제임슨은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과정에서 로즈의 음모가 담긴 전보들이 발견되었고, 비난을 받은 그는 케이프 식민지의 총리직을 사임했다. “제임슨의 습격은 영국과 보어 간 분쟁에 있어 실질적인 선전포고였다.”라는 얀 스뮈츠(Jan Christiaan Smuts)의 회고처럼 이 사건은 남아프리카에 병존하던 두 백인 사회의 관계를 극도로 악화시켰다. 이후 로즈는 식민성 장관이었던 조세프 체임벌린도 음모에 연루되어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에 대한 의문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사건이 발생한 뒤 몇 주 동안, 체임벌린이 그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인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제임슨의 습격으로 인해 단편적으로 남아프리카에서의 영 제국주의는 타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체임벌린은 여전히 공직에 있었고, 세실 로즈는 비록 총리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로디지아와 케이프 식민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영국이 사태 수습에 정력적인 의지를 보여주지 않자, 크뤼거와 트란스발 인들로 하여금 공화국의 독립을 위협하는 영 제국의 침략이 임박했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제임슨과 그의 습격단에 동조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영국계 오이틀란데르는 영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공화국의 적들과 공조하려 했다. 실제로 로흐가 1894년 프레토리아를 방문했을 때, 이들은 유니언 잭을 휘날리고 영국 국가를 부르며 기꺼이 그를 환영했다. 열렬한 환대는 로흐에게 쿠데타를 기획하게 했으며, 그와 함께 했던 바우어(Graham John Bower)는 “손을 들어 올리고 입을 여는 것만으로 그가 트란스발을 영국의 식민지로 만들 수 있으리라 느껴졌다.”라 기술했다. 영국의 정치가들도 무력을 사용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채택하지는 않으려 했지만, 지역의 권력을 크뤼거를 중심으로 한 보어 인들로부터 친영국적인 오이틀란데르에게 옮기는 것을 최선책이라 생각했다. 이에 스미스는 이들을 두고 공화국의 잠재적인 ‘트로이 목마’였다고 묘사했다. 즉, 크뤼거 정부는 대영제국이라는 국외의 강력한 적뿐이 아니라, 국내의 신뢰할 수 없는 외국인들로 인해 대내외적인 곤경에 처해 있었다.
1896년 1월 3일, 제임슨과 습격대가 항복한 바로 다음 날, 독일 제국의 카이저 빌헬름 2세는 크뤼거 전보라 기록될 유명한 전보를 남아프리카로 발송한다. 전보의 요지는 “어떠한 우호적인 강국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고, 평화를 재구축했으며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독립을 지켜낸” 트란스발과 크뤼거 대통령을 축하하는 것이었다. 이 내용이 영국 당국과 영국인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트란스발 공화국의 독립성을 언급한 것이 그 첫 번째로, 트란스발 전쟁을 통해 보어 공화국들이 자치권을 인정받기는 했지만 이는 전적으로 당시까지 우세하던 남아프리카에서의 영국 종주권을 무시하는 표현이었다. 두 번째는 ‘우호적인 강국의 도움’이라는 언급으로 여기서 의미하는 우호적인 강국이란 곧 독일을 암시했다. 1890년에 있었던 헬골란트-잔지바르 조약(Heligoland–Zanzibar Treaty)6에서 볼 수 있듯이 기존의 독일은 아프리카 식민 개척에 큰 열의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k)가 제국 수상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비스마르크가 해임되고 그의 현실정책(Realpolitik) 대신 빌헬름 2세의 세계정책(Weltpolitik)이 대두하며 독일은 여타 제국주의 열강, 특히 영국과 식민지에서 갈등을 연출하게 되었고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 크뤼거 전보 사건이었다.
1월 4일, 더타임스에 전보의 내용이 실리자 영국의 여론은 제임슨의 실패로부터 관심을 돌렸고 반독감정의 물결을 형성했다. 체임벌린은 즉각 총리에게 이에 대응할 것을 촉구했다. “상처받은 국가의 긍지를 위로하기 위한 열정적인 조처(a Act of Vigour)가 필요하다. 우리의 수많은 적들 중 누구에 대해 저항하는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저항해야만 한다.” 그는 대영제국은 런던 협약에 대한 어떠한 간섭도 관용치 말아야 하며, 특히 협약의 네 번째 조항7을 무력화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전쟁으로 간주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반응은 독일에 대한 견제 행동이라 여겨지며, 이는 당대 영국이 1894년부터 발전되어온 크뤼거 행정부와 독일 제국간의 우호 관계를 우려하고 있었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크뤼거 정부는 트란스발에 대한 정치, 경제적인 영국의 야망에 대한 균형추로써 강력한 우방을 원했고 독일은 이상적인 상대국이었다. 1895년 1월 27일, 카이저의 생일 축하연에서 크뤼거는 “자연스러운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처럼, 독일과 남아프리카 공화국 간의 긴밀한 유대의 실을 짜낼 시간이 왔습니다.”라 말하며 독일에 대한 호의를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영국 정부의 우려는 트란스발 내의 독일인 인구와 자본 영향력이 증대함에 따라 더욱 커져갔다. 런던에 주재하고 있던 하츠펠트(Paul von Hatzfeldt) 대사는 독일이 트란스발에서 관심을 두는 분야가 무엇이냐는 영국 총리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5억 마르크 이상의 독일 자본과 약 만 오천 명의 독일인.” 그러나 이후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트란스발 광산 회사들의 지분은 영국인이 81%, 대륙의 유럽인들이 19%만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영국이 세실 로즈 등 아제국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선동적인 소문에 휘둘려 트란스발에서의 독일 경제 규모를 과대평가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1897년, 로즈는 제임슨 습격 사건에 대한 조사를 받았고, 여기서 그는 크뤼거 정부의 친독정책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며 자신을 정당화했다. 그는 트란스발의 정책이 이미 정립된 남아프리카 형세에 새로운 해외 강대국을 불러와 지역의 통합을 어렵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크뤼거 전보는 독일 내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았지만 반대로 영국인들은 맹렬히 독일을 비난했다. 하츠펠트는 이 시점에서 영국 정부가 독일에 선전포고하기를 원했다면 영국 국민들이 흔쾌히 그 뒤에 섰을 거라 기술했다. 그러나 전보 사건은 독일의 외교정책이나 정치가들에 의해 기획된 것이 아닌, 성급하고 경솔한 카이저의 우발적인 행동이었다. 당시 독일 정부의 기조는 영국을 견제해 종국에는 ‘영광스러운 고립(Splendid Isolation)’에서 탈피시키고 삼국동맹의 둘레 안에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본래 독일은 최소한 남아프리카에서 영국과 마찰을 일으킬 의향이 없었고, 크뤼거의 공화국을 보호국화하거나 지원하려는 체계적인 계획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 제국 외무장관 비버슈타인(Marschall von Bieberstein)의 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황제 폐하께서는 놀라운 계획들을 내보이셨다. 트란스발을 보호국화하려는 계획에 대해, 나는 폐하를 만류했다. 해병의 동원과 트란스발로의 파병. 이것이 곧 영국과의 전쟁을 의미한다는 수상의 반대에 황제 폐하께서는, “그렇지만 육지에서만이겠지.”라 말씀하셨다. 내 의견에 따라 결국 황제 폐하께서는 크뤼거 대통령에게 축하 전보만을 보내기로 결정하셨다. 영국의 패배를 즐기는 분위기는 보편적이었다.
런던에서는 독일 가게들과 독일인 선원들이 공격받았고, 빅토리아 여왕은 카이저의 행보에 고통스러운 심경을 드러내며 유감을 표했다.영국의 격정적인 여론과 외조모(外祖母)의 반응에 당황한 빌헬름 2세는 전보의 발송은 영 제국을 해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며,오직 평화를 위해서만 트란스발에서 독일이 행동할 것을 천명했다. 사태가 일변하자 크뤼거는 더 이상 독일을 믿음직스러운 맹방으로 생각지 않았으며, 레이드에게 다른 유럽 강국의 지원이 오히려 트란스발에 대한 영국의 압박을 더 강화할 수 있음을 주지시켰다. 그는 제임슨의 습격을 토대로 영국에 대한 비판을 공론화하는 데에 프랑스와 러시아가 협조하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열강도 홀로 트란스발을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독일 정부는 심지어 크뤼거에게 런던 협약의 폐기를 주장하지 말 것을 조언했는데, 트란스발의 보어 인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런던 협약을 공화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하는 다른 조약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결국 트란스발 정부는 단독으로 영국 정부와 협상해야 했다.
IV. 과대팽창(Overextension)의 원인과 한계
피상적인 시각에서 볼 때, 크뤼거 전보 사건은 단지 변덕스러운 빌헬름 2세 한 사람의 조심성 없는 언동으로 발생한 국제적 분규로 인식된다. 그러나 정말 카이저의 전보가 ‘경솔함의 소치’였을까? 비록 국제외교상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표현이었다고 해도, 최소한 도의적인 면에서만큼은 그에게 책임을 부과할 수 없다. 불법적인 반정부행위를 저질렀던 것은 엄연히 남아프리카의 영국인들이었고, 카이저가 축하한 이들의 진압은 공화국의 적법한 주권 행사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더불어 습격을 사주한 로즈는 제국 추밀원의 일원이었으며, 식민성의 체임벌린도 보어 공화국이 장차 영국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게 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는 부분에서 오히려 사건의 본질적인 기원은 영국과 영국인들의 제국주의적 행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남아프리카에서의 팽창을 위한 움직임은 이후 밀러(Alfred Milner)에 의해 심화되었고 결국 이는 1899년, 2차 보어 전쟁의 촉발로 이어진다.
물론 독일의 세계 진출과 티르피츠(Alfred von Tirpitz) 제독의 위험 이론(Risk theory)8에 근거한 해군력 확충 노력이 영국을 위협하고 이로 인해 영국이 특히 독일에 대해 지나칠 정도의 반응을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지구 각지에 식민지를 두고 있던 영국은 비단 독일뿐이 아니라 여타 열강으로부터도 패권을 도전받았다. 1898년의 파쇼다에서 영국은 전통적인 경쟁국인 프랑스와 전쟁 직전까지 이르렀으며, 1813년부터는 페르시아에서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9을 벌였다. 실지 이 두 국가들은 2차 보어 전쟁에서 독일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있던 동안, 보어 공화국의 선전에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향후에 일어난 모로코 위기와 보스니아 위기를 함께 고려해볼 때, 제국주의적 팽창은 영 제국과 다른 열강 사이의 갈등이 아닌, 열강과 열강 사이의 갈등을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테일러(Alan John Percivale Taylor)는 전술했듯이 열강의 팽창이 ‘안전한 배출구’의 역할을 했다 말했고, 르마크(Joachin Remak)는 이에 덧붙여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관심을 발칸이 아닌 해외로 돌릴 수 있었더라면 유럽의 평화는 지켜졌으리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침탈할 식민지는 무한정하지 않았으며, 제국의 주변부에 대한 분할이 종료되었을 시점, 열강은 제국주의 체제 하에서 서로의 식민지를 침탈할 수밖에 없었다. 레닌은 이 상황에서 남은 것은 재분할 밖에 없다고 언급했고, 곧 대전은 재분할 전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만약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해외 식민지 확보에 집중했다면 보스니아 위기는 ‘아프리카 위기’나 ‘아시아 위기’의 형태로 나타났을 것이며, 불화와 불신의 관계는 제한된 테두리 안에 새로운 강대국이 참여함에 따라 오히려 더 악화되었을 것이다.
크뤼거 전보 사건은 상대적으로 당대에 있었던 다른 국제적 분규들에 비해 그 규모와 영향력이 적은 편이다. 그러나 분쟁의 원인이 제국주의를 기반으로 한 식민지 확장에 있었다는 점에서 근본은 크게 다르지 않다. 체임벌린의 요청대로 케이프 식민지에 영국 함대가 파견되었다면 이는 ‘크뤼거 위기’로 확대되었을 것이고, 빌헬름 2세의 바람대로 독일 수병이 남아프리카에 진주했다면 ‘크뤼거 전쟁’이 발발했으리란 사실을 이후 끊임없이 불거진 열강 간의 식민지 분쟁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제국들은 어째서 이러한 자기파괴적인 과대팽창의 태도를 견지했던 것일까? 유럽의 위정자들은 팽창을 통해 자국의 안보를 공고히 할 수 있다 생각했으며, 본토에서의 세력 균형 원칙을 식민지에까지 적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각국의 카르텔화된 정치 세력들, 특히 군부와 식민지 집단은 팽창을 통해 집중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었으며, 선거와 내각 교체를 통해 카르텔의 변동을 가능케 했던 의회제 민주주의 국가들보다 독일과 러시아와 같은 전제적이고 권위적 국가에서 이런 성향이 강했다. 이들 집단은 팽창을 통해 누적된 이득이 국가의 안보를 강화시킬 것이라 주장했고, 이 쌓여진 ‘도미노’들의 유지를 위해 최초에 쌓인 도막을 철저히 방어할 것을 제국에 강요했다. 그로 인해 제국은 획득한 식민지와 제국을 지탱하기 위해 팽창을 이어나갔으며 종국에는 팽창 또는 사멸이라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이 시기의 제국들은 현재에 이익이 되지 않는 지역마저도 미래의 이익을 위해 합병하는 ‘예비합병’까지 자행하며 제국주의의 극단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게르마니아를 포기했듯이, 일정한 시점에 이르면 팽창의 비용이 팽창을 통해 얻는 이득보다 높아지기 시작한다. 가령 영국은 3C(Cape Town, Cairo, Calcutta)의 생명선을 위해 드레드노트(dreadnought)급 전함을 취역하면서까지 독일의 도전에 맞섰고, 1870년에서 1914년까지 가히 2.5배나 군비 지출을 늘렸다. 하지만 식민지에서 얻을 수 있는 수입이 한계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군사 예산의 증대는 사회 타방면으로의 투자를 감소시켰고 이는 국내의 불만을 야기했다. 제국을 위한 팽창이 제국의 존립을 위협하는 아이러니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세력 균형의 원칙은 유럽에 절대적인 강국이 등장하지 않게 하는 것을 기조로 삼으며, 어느 한 세력의 증가는 타국에 대한 충분한 보상과 합의를 통해 중립화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 원칙은 식민지로까지 범주가 넓어지게 되며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원칙적으로 독일과 이탈리아를 비롯한 후발제국주의국가들은 세력의 균형을 위해 식민지를 획득할 필요가 있었고, 프랑스와 영국은 소유물의 일부를 내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립은 심지어 선발제국주의국가들 간에서도 벌어졌는데, 일례로 영국이 1877년 트란스발을 합병했을 때 이에 대한 대가로 포르투갈이 콩고에서의 권리를 인정받자 프랑스는 즉각 반발하며 양국의 협정에 항의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 시대 동안은 1884년의 콩고 회의(Congo Conference)가 반증하듯이 세력 균형을 위한 몸부림이 그리 격렬하지 않았다. 열강은 외교적인 노력으로 권리의 균형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이 빌헬름 2세의 통치기를 맞고 비스마르크라는 최적의 중재자가 사라짐에 따라 유럽 열강은 스스로의 야만성을 드러내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분할의 불균형은 점점 확대되었고 양보에 의한 균형회복은 불가능한 개념이 되었다.
과대팽창으로 인해 결국 적대적인 국제관계가 형성되었고, 각국은 단순한 국지 분쟁으로 끝낼 수 있을 사안을 국제 분규로 무익하게 발전시키기를 주저치 않았다. 계속되는 위기는 역설적으로 그들의 위기의식을 무디게 했으며 전쟁의 발발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했고, 하물며 1914년 개전 당시의 유럽은 전쟁에 대한 낭만에 젖어 있었다. 제국주의적 과대팽창은 이렇듯 유럽의 병세를 악화시켰지만 식민지 확장은 유럽인들에게 일종의 유희로 받아들여졌다.
V.맺음말
19세기는 제국주의의 시대였다. 세계 곳곳에서 유럽 각국의 깃발이 휘날렸고 무주지(無主地)란 단어는 사전 속에서만 찾아볼 수 있었다.백인 제국들의 광휘는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았지만 스스로의 눈을 멀게 해 대전이라는 참혹한 파국을 맞게 하는 데에 기여했다. 마땅히 제국주의적 팽창만이 전쟁을 일으킨 단독 요인이라 할 수는 없지만, 이가 복잡한 동맹 체제와 경제적 이해관계, 도발적인 언론과 전쟁 그 자체에 대한 과소평가 등 여타 요소들과 합쳐서 시너지를 일으키는 데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던 점은 부정할 수 없다. 1차 세계대전이 유럽인들에게 각별히 여겨지는 이유 또한 제국주의에 있다. 종래까지 식민지의 유색인종을 상대로만 침탈과 전쟁을 반복해오던 백인이 1914년부터는 백인의 무기를 사용하며 백인의 문명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즉, 해외 식민지에서의 팽창으로 촉발된 전쟁이 이제는 유럽 본토에 옮겨지며 제국의 중심부와 주변부의 주객이 전도되고만 것이다.
크뤼거 전보 사건은 제국의 팽창 경계가 서로 맞닿았을 때 벌어지는 경과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19세기 후반 남아프리카에서 보여준 영국의 과대팽창은 ‘팽창을 위한 팽창’이란 표현에 매우 적합하다. 남아프리카 식민지의 경제적 가치는 귀금속이 발견되기까지 매우 미약했으며, 발견된 이후에도 남아프리카가 영국 전체 해외 투자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9.8% 밖에 되지 않았고, 트란스발의 금도 이미 캐나다, 캘리포니아, 오스트레일리아의 금광을 확보한 영국에겐 그다지 매력적인 자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영국인들은 안보적인 두려움에 젖어 제임슨 습격 사건을 일으켰고, 두 차례의 보어 전쟁을 일으켰다. 카이저의 전보 발송은 영국의 확장을 꺼림칙하게 여기던 다른 유럽 열강의 분위기를 극적으로 반영한 것이었으며, 일국의 확장으로 말미암은 불균형의 심화가 이성적인 외교를 불가하게 했음을 보여준다. 더군다나 최소한 남아프리카에서만큼은 근동과 북아프리카를 위시한 여타 주변 지역에 비해 영독 사이의 마찰 가능성이 적었음에도, 굳이 국제 문제를 발생시켰다는 점은 제국주의가 지니고 있던 전쟁의 불씨를 충분히 내보인다. 연속된 국제적 분규를 거치며 열강은 결국 스스로의 통제를 상실해버렸고, 유럽은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총 4년간의 전화에 휩싸이게 된다.
1차 세계대전은 식민제국들의 전쟁이었다. 대전의 주체인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은 전 세계의 절반을 점유하고 있었으며, 페르시아와 중국, 오스만 튀르크 등 반식민지로 전락한 지역들을 포함하면 그 비율은 더욱 높아진다. 끝이 없어 보이던 팽창의 결과는 모든 국가에게 부정적으로 나타났다. 영국과 프랑스는 대전을 치루며 국력을 소진했고 이익이 아닌 위신을 위해 하릴없이 식민지를 경영하게 되었다. 제정 러시아는 레닌이 예고한대로 사회주의 혁명을 겪었으며, 독일 제국은 더 이상 ‘제국’이라 불릴 수 없게 되었다. 이들의 사례는 무분별한 과대팽창은 현대 총력전 구도에서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회복하기 힘든 손실만을 안긴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록 대전의 직접적인 원인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 사건이었기는 하나, 그 근간에 깔린 팽창의 논리를 무시해서는 안 되며 이 논리를 뒷받침하는 양식이 바로 제국주의였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현대식 신제국주의의 발흥이 우려되는 이유도 에인절(Norman Angell)이 이미 《대환상(The Great Illusion)》을 통해 경고-물론 수용되지는 못했지만-했던 내용처럼 19세기 유럽과 같이 자국의 이익만을 고집하는 태도가 결과적으로 자국의 손해뿐이 아닌 타국, 그리고 인류 전반의 손해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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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학부생을 갈아만든 소논문이었습니다. 연구 자료가 없다시피한 걸 주제로 잡아 표절이나 짜집기 시비는 당연스레 피할 수 있었지만 자료가 너무 없어서(…) 원서에 심각하게 고통을 받았네요. 심사가 끝났으니 업로드를 해도 딱히 상관은 없을 것 같습니다. 당분간은 알파벳도 보고 싶지 않군요.
첫댓글 존키건이라는 말에 엄청난 분량이겟구나하고 스크롤을 내림ㅠㅠ
잘 읽었습니다. 세실 로즈가 본국과의 협의 없이 멋대로 봉기를 강행한 건 만주사변의 관동군이 떠오르고, 독일이 간섭할 여지가 보이니까 트란스발에의 영국의 종주권을 강조하는 건 조선을 독립국으로 확정시키려는 일본에 대해 청이 반발하는 모양새와 비슷하군요.
좀 지나치게 전형적인 학론만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만, 같은 학부생 입장에서 전형적인 학론들을 정리하는 것도 대단히 피로한 일이라는 공감이...ㅠㅠ
오 말씀하신 부분을 들어보니 정말 그러네요. 고견 감사합니다.
쟁점은 사라예보사건이 없어도 1차 세계대전이라는 사건이 일어났을까 아니면 제국주의 모순때문에 일어날 수 밖에 없었을까인데 사라예보사건이라는 방아쇠가 없었으면 상당히 늦추어지거나 아니면 안 일어났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을것으로 봅니다.
저나 지도교수님 견해는 사실 사라예보 사건이 아니라도 스스로의 통제를 잃어버린 열강이 종국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파괴를 일으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근데 사실 이는 서론에서도 언급해두었듯이 대전의 발발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 굉장히 논의가 있기 때문에 어느 것이 맞다, 틀리다 할 수는 없겠지요. 실제로 787님의 의견도 학계에서 진중히 다뤄지고 있는 부분이긴 합니다. '국제적 위기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대전 이전의 위기들도 그와 같은 종류였다.' 라는 식의 해석으로요.
우발적 세계대전 아닌가요? 1차대전은 말이죠. 마치 핵전쟁 논쟁과 같은... 끔찍한 상상이지만, 핵전쟁이 일어났다면 그 위기또한 언젠가 벌어졌을 일이라고 역사는 말할까요?
그런 관점도 있지만 학계에서는 크게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바라보자면 1920년대부터 진행되어온 대전 발발 원인에 대한 논쟁이 전혀 의미가 없어지게 되니까요. 지도교수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사라예보 사건은 그저 화약고에 튄 하나의 불씨'였고, 르마크의 말을 빌리자면 '1차세계대전은 20세기의 한 외교적 위기이자 실패로 끝난 정치적 도박'이라 봅니다.
조건이 갖춰져 있었느냐가 문제지요. 조건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면 사라예보가 아니라, 쇤부른 궁에 폭탄테러가 나도 대전은 나지 않을테니.
저렇게 확장한 이유가 정치적 세력 균형이라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겠네요. 전통적 제국주의 사관이나 수정주의 사관 말고도 이런 해석도 가능할것 같네요.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다...라고는 하지만 사실 분쟁 또는 전쟁은 그때도 크든작든 거의 해마다 일어나고 있었다는 게 함정...
제국의 위신이라는 것과 동원령이라는 족쇄를 스스로 채워버린 열강들의 자업자득은 아닐까요...
세르비아 청년의 힘!
정확히는 세르비아 정보부의 더러운 짓의 힘이죠.
그런데 세르비아 인구 1/4이 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