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을 여는 시] 늙은 사자
출처 부산일보 :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24100117512015067
이달균(1957~ )
죽음 곁에 몸을 누이고 주위를 돌아본다
평원은 한 마리 야수를 키웠지만
먼 하늘 마른번개처럼 눈빛은 덧없다
어깨를 짓누르던 제왕을 버리고 나니
노여운 생애가 한낮의 꿈만 같다
갈기에 나비가 노는 이 평화의 낯설음
태양의 주위를 도는 독수리 한 마리
이제 나를 드릴 고귀한 시간이 왔다
짓무른 발톱사이로 벌써 개미가 찾아왔다
-시집 〈늙은 사자〉(2016) 중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는 늘 ‘죽음 곁에 몸을 누이고’ 살아가고 있다. 죽음이 풍기는 향기에 젖어 죽음이 드리우는 그늘 속에서 팔랑대고 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으로 인해 의식을 갖고 죽음을 들여다보면, 죽음 역시 또렷한 의식으로 나를 들여다보고 있음을 느낀다. 섬칫 두려운 눈길을 감지하게 되었을 때, ‘노여운 생애가 한낮의 꿈만 같’다고 한들 어찌 지나친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으랴!
그런 점에서 죽음을 담백하게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과의 응시 속에서 ‘이제 나를 드릴 고귀한 시간이 왔’음을 알아채고 죽음에 목숨을 순순히 넘길 수 있는 사람은 생의 완성이 어디에 있고 무엇으로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깨우친 존재들이다. 하여 우리의 삶이 ‘먼 하늘 마른번개처럼 덧없’는 것임을 자각하는 일이야말로 삶과 죽음의 양면에 걸쳐 어떤 장애에도 걸림 없이 지고한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는 방편이 된다.
김경복 평론가
빛명상
행복한 죽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선생님, 저는 윤초희입니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사람들과 만나는 선생님께 윤초희라는 이름은 어쩌면 낯선 이름 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얼마 전 선생님게서 이 세상의 미련을 버리고 완전한 저승의 세계, 즉 하늘나라로 보내 주신 한명혜 씨 얘기를 한다면 쉽게 기억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한명혜 씨를 모시고 선생님을 찾아뵈었던 그 분의 딸입니다.
선생님을 찾아 갔을 때 저는 오랜 어머니의 병 간호와 삶의 애착을 버리지 못하는 어머니의 짜증에 지칠 대로 지쳐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요. 그 때, 선생님께서 그윽한 눈빛으로 우선 저를 바라보시며,
“마음을 편하게 가져야 모든 것이 그대로 보여지는 법인데…….”
라고 하셨습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선생님께서는 어머니보다 제 마음의 병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 어머니의 49제를 지내고 돌아오면서 한없이 눈물이 솟았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회한도 회한이려니와 무엇보다 어머니가 평온한 얼굴로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선생님을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나오더군요. 저는 그 와중에도 ‘내 몸 속의 탁기가 정화되어 나오는 것이야…….’ 라고 기뻐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집에 도착하니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솟아올랐지만, 마음은 따뜻해져 갔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이렇게 감사의 편지를 올리기로 한 것입니다. 제 욕심 같아서야 선생님과 마주 앉아 긴 이야기를 나누고도 싶지만, 그것이 쉽게 허락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에 이렇게 펜을 든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삶의 명제 중 하나입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지요. 하지만 그 죽음이 두려운 것은 그 최후의 순간이 도대체 언제 오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조금씩 준비를 하십시오. 여사님은 아주 행복한 분입니다. 그 때를 알 수 있으니 말입니다.”
선생님께서 시들어가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 저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아주 몹쓸 딸이었지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신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때 저는 너무도 지쳐 있었고, 어머니의 삶에 대한 애착을 감당할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참으로 이상한 것은 집이나 병원에서는 그렇게도 포악하시던 어머니께서 선생님 앞에만 앉으면 순한 양으로 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어머니께서는 병원과 집을 오가며 자신이 암에 걸릴 이유가 없다는 것에 집착하셨습니다. 왜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당신이 그런 몹쓸 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아 하느냐는 것이 어머니의 불만이었고, 그 불만은 끝내 강한 삶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니 1년여 동안 해 보지 않았던 것도 없고, 드시지 않았던 것도 없었습니다. 장안의 용하다는 무당 하나는 먼저 작고하신 아버지께서 구천을 떠돌며 어머니를 괴롭힌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망할 놈의 늙은이! 살아생전 호강 한 번 안 시키더니 이제는 저승길을 같이 가자고? 말도 안 될 소리다…….” 시며 굿판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굿이 끝나고 병원을 찾으면 어머니의 병세는 여전 했지요.
기공치료사를 찾았을 때에는 마치 그 기氣로 인해 어머니의 암이 ‘툭’ 소리라도 내면서 떨어질 듯한 표정까지 지으시며 몰입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지요. 어머니는 온작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다인의 몸속에 있는 암덩이를 떨어뜨리려 하셨고, 암덩이는 점점 더 온몸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어디 그 뿐이었겠습니까? 뱀이며 상황버섯이며 암에 좋다고 하는 약재들은 언제나 집 안 구석구석에 자리를 넓혀갔습니다. 식탁에 앉으면 멀쩡한 삶들이 먹어야 할 반찬의 가지 수보다 그런 건강 보조 식품들이 더 많이 차지하고 있었을 정도니까요.
‘요 망할 놈의 계집애! 내가 갓 스물에 그저 책이나 파는 니 애비 한테 시집 와서 안 한 것 없이 다 해 가며 뒷바라지 해 줬더니 이제와서 얼른 에비가 에미 데리고 가길 학수고대하는 게지? 내가 니 눈빛만 봐도 안다. 이 망할 놈의 계집애…….
어머니는 제 머리채를 휘어 잡기도 하셨습니다.
제 나이 서른 둘 , 저도 일찍 결혼 했다면 자식도 남편도 있을 나이였지만, 어머니께서는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제게 푸는 것이었지요.
사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저희 어머니도 참 불쌍한 생을 사신 분이었습니다. 어머니 말씀대로 여겨를 졸업하고 갓 스물에 여섯 살 위의 아버지를 중신으로 만나 결혼하셨습니다.
아버지 집안이야 원래 학자 집안이었기에 부와는 관련이 없으셨지만, 어머니 집안은 달랐습니다. 외조부께서는 월남하시기 전까지도 개성에서 포목점을 하셨던 분이고, 월남 후에도 비슷한 일을 하시는 외조모를 만나 가정을 꾸리셨으니 말입니다. 외가댁은 신기할 정도로 이모며 외삼촌들이 모두 장사를 해서 떠르르하게 사는 집안이었습니다. 외조부 말씀에 장돌뱅이 집안이라 손가락질 안 당하려고 어머니를 학자 집안에 시집 보냈셨다고 하셨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그야말로 공부만 하시는 아버지의 생활 능력이 좋았을 리 만무했었겠지요. 결국 어머니는 당신이 팔을 걷고 일선에 나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린 마음에 늦게까지 장사를 마치고 돌아오시는 어머니를 안쓰럽게 바라보면 늘 어머니께서는,
“장사꾼의 피를 속이겠냐…….”
하시며 반은 자조적으로 반은 자랑삼아 얘기하셨습니다.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자 어머니는 속된 말로 돈놀이를 하셨습니다. 웬만한 장사꾼은 어머니 돈을 빌려 쓰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자신할 만큼 돈놀이도 잘 되었나 봅니다.
아버지는 평생 공부만 하시다가 페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하루에도 서너 갑을 족히 피워 넘기시던 실력을 감안하면 분명 담배가 원인이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하나도 슬퍼하지 않으셨습니다. 신기할 정도 였지요. 하지만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고 있던 저는 어머니보다 아버지께 사랑이 더 깊었습니다.
“이놈의 계집애! 에미 죽었냐? 왜 아침부터 울어? 인명은 제천인거다. 사업하는 집에 아침부터 눈물바람 하면 망하라고 고사 지내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만 못 그쳐? 니 에비가 도대체 너나 나를 위해서 뭘 해 준 것이 있다고 그리 한 달이 되도록 밥상머리에 앉아 눈물을 찔금거리는 것이냐? 돈을 못 벌면 명예라도 걸머지던가. 쥐뿔 학자 자존심 내세운다고 남들 다 가지고 있는 명예도 없었다. 무식한 이 에미랑 살기 싫어 매일 담배만 뻐끔대더니 그 담배 때문에 죽은 것을 어쩌라고 이렇게 에미 속을 뒤집냐? 뒤집길?”
가끔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던 반찬이 식탁에 오르면 목이 메어 하는 나를 보시며 어머니는 언제나 그렇게 소리지르셨습니다. 저로서는 납득이 안가는 일이었지요.
그런데 그런 어머니께서 수저를 놓으면서 바로 소화제를 삼키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하지만 좁은 소견으로 ‘저 소화제로 욕심은 소화 안되나…….’ 하는 생각까지 했었습니다. 참 못된 딸이었지요. 그래도 저를 뱃속에 넣으시고 열 달, 제 나이 서른 다 되도록 그리운 것 없이 길러주신 어머닌데 말입니다.
병원에서 위암 판정을 받자 어머니께서는 다른 대학병원에 특진 신청을 하셨습니다. 믿어지지 않으셨던 것이죠. 그리고 또 다른 병원, 또 다른 병원…….
검사와 진단만도 수 차례를 받으시고도 어머니는 당신의 병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셨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어떻게든 어머니의 생명을 연장하고 고통을 덜어드릴 방법만 생각하다가 어머니의 집착에 질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1년이 넘도록 병원만 찾으면서 저는 박사 코스를 중단해야 했습니다. 자식이라야 저 하나였지만, 제가 동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때를 쓰는 어머니 때문에라도 저는 두분불출 어머니 곁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제가 어머니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도록 선생님의 도움을 찾고자 마음먹었던 계기는 충북 어딘가에 살고 있는 체내림 도사를 만난 다음이었습니다. 그 도사는 다짜고짜 어머니를 엎어 놓고 등을 두르렸습니다. 그리곤 뭔가 이상한 나무 뿌리 같은 것으로 입안을 쑤셔댔지요. 어머니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 당신이 참고 있는 한 저는 그것을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체기가 분명하다. 암은 무슨 암……. 쑤시고 나니까 이렇게 시원한데…….”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며 점점 잦아들고 계셨습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버텨도 힘든 세월이었을 2년을 그렇게 엉뚱한 짓으로 보내고도 아직 암을 인정하지 못하시는 것이 마음 아팠습니다.
그 후 아는 선배 한 분의 소개로 <행복을 나눠주는 남자>라는 책을 읽게 된 저는 그 순간 이제 어머니를 선생님께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뭐야? 암도 고쳐?”
어머니를 선생님께 모시거 가는 제 저의야 솔직히 말씀 드릴 수 없었지요. 선생님께서는 암으로 죽어가는 생명도 살려내고 못 쓰던 다리도 살려 낸다는 거짓말로 어머니를 설득 했습니다. 당신의 암을 고칠 분이라는 것만 믿고 어머니는 저를 따라 나섰던 것이지요.
“우리가 새로이 태어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생각입니다. 그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아주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지요…….”
“그럼, 선생님. 제가 죽는단 말씀이세요? 그래서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라는 건가요?”
“제가 말씀드린 다시 태어나는 것이란 꼭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삶을 아름답게 정리하고 떠나느냐는 것이지요. 무엇이 그렇게 여사님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까? 아직 하지 못하신 일이 아주 많은 모양입니다.”
“못한 것 많지요. 많아요. 아니, 그것보다 왜 내가 이 더러운 병에 걸려 죽어야 한단 말입니까? 저는 죄 지은 적 없고 남에게 신세 진 적도 없고 남 못 되라고 더러 욕은 했으되 진심은 아니었고……. 왜 내가 이 더러운 병으로 죽어야 하는지 그것이 제 발목을 잡지요…….”
“더러 우리의 삶을 한 걸음 물러나 생각하고 바라보면 더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은 앞을 보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지만 어느 날 뒤를 돌아보면 비로소 내가 살아온 인생이라도 이해하기가 쉽지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사님은 잃어버린 것보다 발견하지 못한 것이 훨씬 많을 겁니다. 이제라도 서서히 살아온 인생을 점검하시고 언제 죽을 것인가를 고민하지 마십시오. 죽음만 생각하면 그렇게 억울함이 발목을 부여잡고 여사님은 물론 모든 주변 사람들을 힘겹게 만들기 마련입니다. 더러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것보다 그것들이 사실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행복하답니다. 그것이 더 큰 부자가 되는 방법이지요. 이제라도 인생의 항로를 따라 천천히 가 보십시오. 그러면 마음은 평온해지고 모든 집착에서 놓여나면 모든 것이 달리 보일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그날 그렇게 말씀하시는 동안, 저는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저 자신도 그렇게 내 인생의 뒤안을 돌아보며 새로이 태어나길 거부하던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에고이스트였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날의 선생님의 말씀은 어머니께나 제게 약이 되었습니다. 물론 초광력을 받으면서 오로지 그 말씀만을 생각했지요.
“내가 너한테 제일 잘못한 것은 형제를 만들어 주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니 애비 떠나고 나마저 떠나는 마당에 재산이 많아 전부 네 앞으로 해주면 그게 무슨 소용이냐? 홀홀단신으로 고아가 되어 결혼도 못하고……. 그래도 이제 와서 어쩔 수 없고……. 돈은 니가 죽기 전까지 공부할 만큼은 있으니 공부해라. 기왕지사 좋은 사람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나는 죽어도 너한테 붙어 댕기지 않을게다. 그러니 훨훨 날아다니며 너 하고 싶은 것 다해. 정기적으로 건강 진단 꼭 받고……. 니 애비도 에미도 암으로 죽으니 너도 조심해라…….”
선생님을 찾은 지 한 달이 되면서 어머니는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백미러를 통해 보여진 어머니의 얼굴은 안정되고 평온해 보였습니다. 저는 덜컥 겁이 났습니다. 드디어 돌아가시는 것이 아닐까…….
결국 어머니는 며칠 뒤 눈을 감으셨습니다. 선생님께 받은 광력봉과 씰이 붙여진 수첩을 가슴에 얹은 채로 말입니다. 저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무엇부터 처리해야 할지 몰라 서두르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선생님을 떠올리며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머니가 좋은 곳으로 가실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그래요. 내가 기도 했으니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야. 아무 걱정 말고 꿈에 나타나면 다시 한번 전화 줘……. 힘 내라고……. 우리는 모두 혼자지만 함께라는 것을 잊지마세요.”
전화선을 타고 흘러나오는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설움이 북받쳤습니다. 정말 어머니께서 제 곁을 떠났다는 사실이 절실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장례를 마친 뒤에야 알았지만, 어머니는 선생님께 초광력을 받으러 다니시면서 조금씩 아니, 말끔히 당신의 사후 처리와 당신이 돌아가신 뒤에 제가 황망하게 맞을 재산권 문제까지 처리해 놓으셨습니다.
그렇게도 삶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기던 어머니는 선생님 덕분에 행복한 죽음을 맞으셨습니다. 저는 그 어머니 때문에 선생님을 만나 인생을 돌아보며 살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 한 번쯤 나는 잘 갔노라 제 꿈에 나타나 주시길 간절히 바란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끝내 제 꿈에도 나타나 주시지 않습니다. 철저히 혼자가 된 느낌입니다. 하지만 저는 선생님의 말씀을 맏습니다. 저는 혼자지만 혼자가 아닙니다. 제게는 선생님과 우주의 빛이 함께 하니까요.
길고 긴 제 이 편지를 끝까지 읽어 주셨으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말을 아꼈던 것은 선생님께서 마지막으로 이 편지를 다 읽으시길 간절히 바랐기 때문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저 흔하게 선생님을 찾는 사람들의 넋두리 중 하나라고 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어쩌면 삶의 애착으로 인해 중요한 것을 놓치고 돌아가실 뻔한 한 생명에게 인생을 정리하고 행복한 죽음을 맞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인생을 돌아볼 줄 몰라 많은 것들을 놓칠 뻔한 젊은 인생 하나를 구제 하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좋은 날이 오면 꽃이라도 한 다발 들고 선생님을 찾아뵐 작정입니다. 그 때는 제 얼굴도 많이 맑아져 있겠지요. 안녕히 계십시오 .
방배동에서 윤초희 올림
죽음이란 새로운 통로를 여는 문입니다
초희씨의 초췌하고 모든 것에 대한 끈을 놓을 듯 흔들리던 첫인상을 기억합니다. 가망이 없는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는 자체보다 초희씨는 세상에 너무 지치고 힘들어하는 듯 보였습니다.
어머니의 삶에 대한 집착은 버리게 할 수 있어도 초희씨의 절망 어린 모습은 다시 회복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해 저로서도 초희씨를 대하기가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지식을 쌓는 사람들이, 특히 현대 과학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그러하듯 초희씨 역시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누구의 말보다 굳건히 믿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께서는 저를 만나고 돌아가신뒤, 거의 매일 전화를 걸어 초광력을 받으셨습니다. 삶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는 당신을 질책하며 말입니다. 그리고 홀홀단신으로 남겨질 초희씨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초희씨가 혼자 일어설 수 있도록 기도하겠노라 약속했습니다.
사실 어머니께서는 초희씨를 위해 서울에서 대구까지의 먼 길을 더욱 재촉하여 오셨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초희씨가 알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뒤늦게 전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께서는 아주 좋은 곳으로 가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뵙지는 못했지만 명상으로 떠나시는 길에 빛의 축복을 보내드렸습니다. 그리고 초희씨의 걱정으로 쉽게 발길을 못 떼는 어머니를 떠밀어 서둘러 떠나시도록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초희씨를 만났던 날, 저는 확신했으니까요. 초희씨가 오늘 내게 이렇게 편지를 띄울 만큼 마음의 평온과 정신적인 안정을 찾아 홀로서기에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언제고 힘이 들 때는 우주의 빛, 초광력의 힘을 청하십시오. 결코 초희씨는 혼자가 아닙니다. 항상 우주의 빛이 함께 하고 초희씨를 도와 줄 테니까요. 그리고 정진하시던 공부는 계속 하십시오. 그래서 이 사회에 밝고 맑은 인재들을 많이 키워 주십시오. 초희씨 같은 사람들이 많은 인재들을 키워야 이 사회가 밝고 맑게 진행될 것입니다. 그 또한 초희씨에게나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끝으로 오래 전 제가 읽은 책 가운데 초희씨에게 띄우고 싶은 글이 있어 첨부합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시인이며 교수이자 명상가이고 철학자라 들었습니다. 그가 쓴 저서 <빵장수 야곱>이라는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 참으로 가슴에 와 닿아 이 글을 어머니를 잃고 슬퍼하는 초희씨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길 바라면서 띄웁니다.
두 아이가 야곱이 더 나이가 들어 죽게 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야곱은 이를 눈치채고 아이들을 불렀지요. 그리곤 옛날 어떤 제자가 스승과 행복하게 살았는데, 어느 날 스승이 자신이 죽을 때가 온 것을 알고 제자들에게 죽음을 가르쳤던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스승은 그날 밤 햇불을 들고 제자와 함께 숲속으로 들어갔더랍니다. 그리곤 깊은 숲속에 이르자 스승은 아무 말 없이 햇불을 꺼 버렸답니다. 제자들은 놀라 스승에게 물었지요.
“선생님 웬일이십니까?”
스승은 ‘이 햇불은 꺼졌다’라고 말하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답니다. 제자는 두려움에 떨면서 ‘이 어둠에 저를 남겨두고 가시렵니까?’라고 외쳤지요.
어둠 속에서 스승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니다! 너를 어둠 속에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나는 네가 빛을 찾아가도록 남겨두는 것이란다.”
저는 이글을 읽으며 새로운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주 행복한 죽음에 대해서 말입니다. 자신이 떠날 시간을 준비하며 행복하게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남겨진 사람은 또 다른 빛을 찾아 발걸음을 옮겨 주는 것이 바로 행복한 죽음이라는 것이지요. 만일 떠나는 사람이 아무리 행복하다고 해도 남겨진 사람이 그를 놓지 않으면 결코 그 죽음은 행복한 죽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초희씨, 이제 새로운 빛을 찾아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십시오. 그래서 어머니의 죽음을 행복한 죽음으로 만드십시오. 그리고 가시는 길에 힘겹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언제든 우주의 빛, 초광력을 찾으십시오. 작은 등대가 되어 당신의 앞날에 새로운 빛을 찾을 때까지 영우너히 지켜드릴 것입니다.
초희씨의 말대로 꽃 한 다발 같은 맑은 얼굴로 만나 뵙길 고대하며 좋은 날 정광호가 몇 자 적었습니다.
출처 : 행복을 찾는 사람들에게
2000.07.07. 초판 P. 171~183
첫댓글 감사합니다.
"웰다잉!! "
"죽음이란? 새로운 통로를 여는 문입니다.!!"
행복한 죽음을 맞도록 빛명상을 합니다. 준비된
삶을 살도록 하렵니다. 감사드립니다.
귀한문장 차분하게 살펴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운영진님 빛과함께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웰다잉^
누구나 한번 맞이하는 생의 마지막
어떻게 준비하고 맞이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는 빛,
감사하고 또 감사드립니다.
빛안에서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웰다잉,
마음의 고향으로 간다는 것.
빛명상으로 든든합니다 .
감사합니다 .
행복을 찿는 사람들에게 책을 다시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빛과 함께 행복한 죽음 웰다잉 .
감동의 빛이야기 다시 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빛을 만나서 정말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빛과함께.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도 살아계신 어머니께도 불효를 하고 있으니... 반성합니다. 제게도 기회가 오기를... 감사합니다.
읽는 내내 돌아가신 부모님의 웰다잉을 생각했읍니다.
그래서인지 윤초희씨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읍니다
자신의 주검 앞에서도 결국은 남아있는 자식을 걱정하는......
빛이야기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죽음 앞에서 빛과 함께하며 집착을 비우고 평온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빛으로 돌아가신 그분은 참
행복한 영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빵장수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행복한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빛과 함께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빛안에 있음이 감사합니다.
돌아가신 부모님 빛세상에서
편안한 모습 상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윤초희님의 글 감사합니다.
저도 공감가는 부분이 있어 열심히 읽었습니다. 학회장님의 답글도 너무 감사합니다. 빛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외롭지 않고 잘 지낼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
학회장님을 뵙고 자신의 주변을 잘 정리하시고 초광력봉과 씰이 붙여진 수첩을 가슴에 얹고
편안한 마음으로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신 윤초희님 어머님의 감격스런 소천 이야기~
빛의 세계에 드심에 학회장님께 감사올리며 저희 모두 빛VIIT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음에
우주마음과 학회장님께 무한한 감사와 공경의 마음 가득 올립니다~
삶의 애착을 내려놓고 인생을 정리하고 행복한 죽음을 맞이한 글을 읽으며 빛안에서의 삶에 더욱 감사마음 담게 됩니다.
언제나 우주의 빛, 초광력과 함께함에 감사와 공경의 마음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죽음에 대한 소중한 빛말씀 감사합니다. 우주마음과 학회장님께 공경과 감사의 마음을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초희씨어머님의 죽음으로 새로운 삶을 배우셨군요 ...귀한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는 마음, 빛과 함께 할수있음이 감사합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귀한 빛글 감사합니다. 빛과 함께함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귀한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글 감사드립니다.
초광력 빛과함께 행복한죽음을 맞이 하는 이세상 모든분들을 위하여 감사 합니다.
귀한 빛 의 글 볼수 있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귀한글 감사합니다 빛안에서 건강하고 행복 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제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글입니다.
빛의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