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독서는 어떻게 한국 여성을 ‘위험한 사상가’로 만들었는가
다른 세계를 향해 떠나는 책읽는 여성들의 역사
이 책은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 등장한 소설, 잡지, 기관지, 순정만화 등의 매체를 검토하고, 책읽기가 어떻게 한국 여성들을 ‘위험한 사상가’로 만들었는지, 그 과정을 추적한다. 결국 그것은 “한국 여성들이 읽은 책의 역사”가 될 것이다. 저자는 이를 통해 여성의 교양과 문학에 대한 미학적 기준을 다시 구축함으로써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장르의 계보를 복원하고, 여성이 행하는 책읽기의 정치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문학이론가 루카치는 근대소설을 “지도 없이 여행을 떠나는 ‘성숙한 남성’을 주인공으로 한 장르”라고 정의했다. 이에 따르면 집을 떠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여성들은 그저 소설의 독자가 될 뿐 어떠한 주체적 캐릭터도 되지 못한다. 남성 주인공이 기본값으로 설정된 이러한 세계에서, 여성은 자신의 젠더를 계속 의식하면서 독서 행위를 이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여성의 독서는 필연적으로 감각의 재배치이자 정치적인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위험한 책읽기’의 역사적 국면을 단계적으로 검토한 뒤, 지금 한국 여성의 인식과 현실을 다시 주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한 작품이다.
저자 소개
허윤
남성이 성별화되는 공간에서 성장한 탓에 자연스레 젠더의 수행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보편적인 것을 의심하라고 배운 덕택에 더 많은 질문을 안고 세계를 바라볼 수 있었다. 한국 현대소설을 전공했으며 한국문학/문화/역사를 동아시아 젠더사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남성성의 각본들』, 『1950년대 한국소설의 남성 젠더 수행성 연구』,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공저), 『원본 없는 판타지』(공저) 등이 있고, 우리말로 옮긴 책으로 『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 『일탈』(공역) 등이 있다.
목차
‘문학소녀’에서 페미니스트까지
1960~1970년대 한국에서 의무교육 제도가 정착되자 여성들의 중·고등학교 취학률이 급증했다. 그로 인해 여성들의 평균 문해력이 오르고, 그와 연관해 ‘문학소녀’라는 표상이 대두되었다. 이때 여성의 책읽기는 낭만적 이미지의 교양으로 취급되는 동시에, 지나치게 소녀적인 감상에 빠져서도 안 되고, 너무 현실적이어서도 안 된다는 기묘하고 모순된 비판을 받게 된다.
하지만 문학소녀들은 점차 ‘여고생 작가’, ‘여대생 작가’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고, 이들의 ‘작가 되기’는 현모양처가 되지 않는 방식이었다. 이제 여성 교양을 위해 등장한 책읽기는 점차 세계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넓혀주는 수단이 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높아지면서 여성학 과목 수강도 크게 유행했다. 마침내 한국에서도 페미니즘적 읽기가 확산되는 순간이었다.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2015년 넥슨의 여성 성우 부당해고 사건, 2016년 강남역 추모집회와 탄핵집회의 ‘페미존’, 2018년 연극뮤지컬계 성폭력 추방집회 등 페미니즘 이슈를 공표하면서 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일은 이제 자연스러운 광경이 되었다. 이는 오늘날 여성들이 스스로 경험하는 억압의 근본적인 원인이 젠더에 있음을 자각하고 행동에 나서는 ‘광장의 젠더 정치’와 ‘책읽기’가 유기적으로 접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 읽을거리의 변천사
우선 “한국 여성들이 읽은 책의 역사”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해방 직후 발간된 여러 가지 여성독본들이다. 이만규의 「가정독본」과 「새 시대 가정여성훈」 같은 경우는 ‘가정 내 존재’로서의 여성을 강조했다. 반면에 최화성의 「조선여성독본」은 여성을 ‘해방되어야 할 존재’로 보았다. 해방기 여성독본의 대부분이 여성의 몸이나 출산, 가정 살림 등에 초점을 맞추었던 반면, 최화성은 독특하게도 여성해방운동사의 관점에서 독본을 서술했던 것이다.
1950년대에는 잡지 저널리즘이 사회문화적으로 영향력을 갖는 시대였다. 그중에서도 윤금숙, 최정희 등 여성 소설가들이 편집주간이었던 「주부생활」은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고 읽을거리를 만들어냈다. 재미있는 점은 여성 교양을 표방한 「주부생활」에서 연재된 소설 대부분이 주부의 일탈을 다룬 통속적인 작품이었다는 점이다. 여성 교양과 통속 소설의 공존에서 당시 여성들이 일상과는 전혀 다른 삶으로서의 로맨스를 찾고 있었음을 읽을 수 있다.
뒤이어 문학소녀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은 프랑소와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을 모방한 ‘여대생 소설’들이 등장했다. 새롭게 낭만적 사랑과 섹슈얼리티의 공감장이 마련된 것이다. 일반적인 대중소설에서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경유한 남성의 내면 혹은 성장이 중요한 반면에, 여대생 소설은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내면 그 자체를 중심으로 내세운다. 성적 행위성과 섹슈얼리티의 기쁨을 발견하는 여성들의 욕망이 중요해진 것이다.
이들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1965년 창간된 「여학생」은 교양지로서의 성격과 진학과 진로지도, 고민 상담 등 여러 측면을 종합하여 지면을 구성했다. 특히 권말의 상담실 코너를 통해 독자들의 진로와 심리 상태에 대한 카운슬링을 제공하고, 불량학생들의 수기를 통해 품행을 선도하는 등 계몽의 의도를 강조했다. 그러나 「여학생」은 불량소녀를 과잉 재현함으로써 박정희 체제가 불량청소년의 명랑 담론을 의도적으로 생산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 하기도 했다.
여성 노동자와 국가 페미니즘
박정희 체제의 통치술은 전 국민을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조직했다. 그에 따라 「여학생」은 여학생을 노동자로 명명하면서, 교양 있는 여학생이 취업에도 성공할 수 있음을 강조하는 진로 특집을 지속적으로 실었다. 그러면서 「여학생」은 여학생이라는 존재가 학업을 위해 일시적으로 일하는 노동자라고 호명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임금이나 직급이 아니라 ‘건전한 여학생’이라는 인정 행위다. 이러한 담론은 여성 노동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든다. 노동자이기 전에 여학생이라는, 노동자이기 전에 예비 어머니뿐이라는 점만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런 담론은 한국여성단체협의회 기관지인 「여성(女聲)」이 ‘애국과 봉사의 마음’을 강조하면서 국가 페미니즘의 전략이 되었다. 여협과 「여성」의 주요 목표는 영웅화와 국제화를 위한 ‘신사임당상(賞)’, ‘세계여성의 해’, ‘세계어린이의 해’ 등을 조직하는 대외적 행사였다. 이는 실로 반민주주의적인 발상의 정치적 행사였고, 때로는 반여성적이기도 한 것이었다. 탈역사적이고 초국가적 차원으로 설정된 여성이라는 범주는 텅 빈 실체이자 채워지지 않는 추상적 표상과 다름 아니다.
대안 공동체와 페미니즘의 대중화
1980년대에 등장한 대안 공동체 ‘또 하나의 문화’(이하 또문)는 젠더 규범의 해체를 통한 성평등을 개인의 삶에서 실천하고자 했다. 또문 동인들은 여성억압, 가부장제, 젠더 등의 개념을 탈식민적 방식으로 이론화하고, 양성평등과 자유로운 아이들이라는 대안문화를 목표로 설정했다. 그렇지만 이런 방식은 대중과 만나는 데 한계가 있었고, 대부분 번역에 의존했던 콘텐츠로 말미암아 가장 탈식민적인 방식의 사회운동이 도리어 서구의 근대성 모델에 귀속되고 말았다는 역설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간극은 민중시인 고정희가 또문에 동참함으로써 극적으로 봉합된다. 그는 민중과 여성, 변혁운동과 페미니즘 사이의 갈등에 주목하면서, 여성을 ‘정실부인’으로만 여기는 가부장제의 통제 시스템에 저항하는 여성 간 연대를 주장했다. 중산층 여성의 허위의식을 비판한 「이야기 여성사」는 그가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여성해방을 이야기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고정희는 1980년대의 민족민주운동의 젠더를 심문하는 자였다.
1990년대의 여성 대중은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지 않고 젠더 이해를 중심으로 모였고, 이런 흐름 속에 페미니즘의 대중화를 이끌어 가는 여성주의 잡지 「페미니스트 IF」(이하 「이프」), 「버디」, 「여/성이론」 등이 등장했다. 그중 「이프」는 여성 욕망을 긍정하고 가부장제를 직설적으로 비판함으로써 많은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성적인 것’이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과 남성을 이성애 관계의 성적 대상으로만 반복해서 재현했다. 그로 인해 페미니즘 문화운동이 젠더의 정치경제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사유하지 못한 채 그 비전을 상실하고 말았다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새로운 양식들의 도래
20세기 말에 이르자 새로운 양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재와 주제를 다양화하고 영역을 확장한, 종래의 순정만화 개념에 도전하는 순정만화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순정만화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 최전선에 작가 이은혜가 있었다. 그의 세계관을 완성한 「BLUE」는 근친성애적 욕망을 불온하지 않게 재현함으로써 기존에 순결을 강조해온 한국 순정만화의 아이러니를 잘 드러냈다. 사랑 이야기는 탈정치화된 세계에서 유일하게 실현 가능한 상상력인데, 이은혜가 그 안에서 가족 구조의 근간을 불온하게 되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한국의 대중문화 장은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새로운 시대에 여성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혹은 여성 서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SNS를 중심으로 공론장에서 폭발했다. 이 무렵에 등장한 것이 바로 여성 간 연대와 로맨스를 그린 웹툰 〈그녀의 심청〉이다. 이 작품은 고전소설인 심청전을 뼈대로 삼되 ‘효’와 ‘열’로 표상되는 ‘그녀의 이름’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의심하고 질문한다. 그리고 여기서 효녀나 열녀 등으로 여성에게 주어진 젠더 규범은 모두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결국 〈그녀의 심청〉은 지금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반영하여 다시 쓴 심청전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페미니즘 대중화와 여성 서사에 대한 독자들의 욕망 속에서 탄생한 텍스트다.
그러고는 마침내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이 등장했다. 이 책의 인기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세계를 보는 눈이 달라진 사람들 덕택이라고 해야 한다. 여성 스스로 경험하는 억압의 근본적인 원인이 젠더에 있다는 고민으로부터 페미니스트 독자는 탄생한다. 그리고 그는 이제 텍스트를 해석하는 주체로 거듭난다. ‘김지영 현상’은 결국 ‘치안이 아닌 정치’를 획득하는 분기점이 되었다. 이는 독자들의 욕망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지 텍스트만의 힘이 아닌 것이다. 그런 점에서 「82년생 김지영」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 아니라 매우 영리한 텍스트가 된다. 결국 이 책은 로맨스 대신 페미니즘을 선택한 여성들이 ‘착한 여자’로 남으면서 손에 쥘 수 있는 무기가 되었다. 이처럼 한국 여성들의 ‘위험한 책읽기’는 앞으로도, 계속, 맹렬하게,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