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손의 수수께끼
삿 14:10-20
10 삼손의 아버지가 여자에게로 내려가매 삼손이 거기서 잔치를 베풀었으니 청년들은 이렇게 행하는 풍속이 있음이더라
11 무리가 삼손을 보고 삼십 명을 데려와서 친구를 삼아 그와 함께 하게 한지라
12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수수께끼를 내리니 잔치하는 이레 동안에 너희가 그것을 풀어 내게 말하면 내가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너희에게 주리라
13 그러나 그것을 능히 내게 말하지 못하면 너희가 내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줄지니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네가 수수께끼를 내면 우리가 그것을 들으리라 하매
14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사흘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더라
15 일곱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이르되 너는 네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려 달라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네 아버지의 집을 불사르리라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빼앗고자 하여 우리를 청한 것이 아니냐 그렇지 아니하냐 하니
16 삼손의 아내가 그의 앞에서 울며 이르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하지 아니하는도다 우리 민족에게 수수께끼를 말하고 그 뜻을 내게 알려 주지 아니하도다 하는지라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보라 내가 그것을 나의 부모에게도 알려 주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그대에게 알게 하리요 하였으나
17 칠 일 동안 그들이 잔치할 때 그의 아내가 그 앞에서 울며 그에게 강요함으로 일곱째 날에는 그가 그의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알려 주매 그의 아내가 그것을 자기 백성들에게 알려 주었더라
18 일곱째 날 해 지기 전에 성읍 사람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한지라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 갈지 아니하였더라면 내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하니라
19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 곳 사람 삼십 명을 쳐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올라갔고
20 삼손의 아내는 삼손의 친구였던 그의 친구에게 준 바 되었더라
삿 14:10-20 / [문제가 된 수수께끼] 삼손의 아버지는 혼인을 성사시키려고 딤나로 내려갔다. 삼손은 이미 그곳에서 잔치를 벌여 놓고 있었다. 당시에는 총각이 장가 들 때 처녀가 사는 동네로 가서 잔치를 벌이는 것이 풍습이었다. 11) 블레셋 사람들이 젊은 청년 30명을 삼손이 벌여 놓은 잔치에 데려와 함께 먹고 마시게 하였다. 12) 잔치를 벌이던 어느 날 삼손이 그곳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자, 이제 내가 여러분께 수수께끼를 하나 내겠습니다. 잔치를 벌이는 이레 동안 여러분이 그 수수께끼를 풀면 내가 여러분께 베옷 서른 벌과 겉옷 서른 벌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13) 그러나 여러분이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여러분이 내게 베옷 서른 벌과 겉옷 서른 벌을 가져오기로 합시다.' `좋소! 그럼, 수수께끼나 들어 보기로 합시다' 하고 사람들이 대답을 하자 14) 삼손이 문제를 내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힘센 자에게서 달콤한 것이 나오는데 그것이 무엇이오?' 잔치에 참석하였던 사람들은 그 수수께끼를 풀어 보려고 사흘 동안 머리를 짜봤지만 풀 수가 없었다. 15) ㄱ) 나흘째 되던 날 잔치에 참석하였던 사람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당신의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의 답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 주시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 친정집을 모두 불태워 버리겠소. 당신 남편이 이런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낸 것은 우리 재산이 탐나서 그런 것이 아니오? 그래서 잔치에 불러들인 게 아니오? 대답해 보시오' 하고 다그쳤다. (ㄱ. 히브리어 성서(마소라 본문)에는 `이레째 되던 날'이라는 뜻으로 되어 있다) 16) 그러자 삼손의 아내는 울면서 삼손에게 매달려 간청하였다. `당신은 나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군요. 당신이 나를 미워하는 것이 분명해요. 당신이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우리 동족에게 그렇게 풀지도 못할 수수께끼를 낼 수 있어요? 그건 그렇다치고 어째서 나에게까지 그 답이 무엇인지 말씀하시지 않는 거예요. 정말 그러실 수 있어요?' 삼손은 `이것 봐요. 난 우리 부모님께도 그 답을 가르쳐 드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당신에게 가르쳐 줄 수 있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17) 잔치가 계속 벌어지는 동안 그 아내는 울면서 그에게 매달려 애원하였다. 그러자 삼손은 하는 수 없이 이레째 되는 날 수수께끼의 답을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삼손의 아내가 그 답을 자기 동족에게 일러주었다. 18) 잔치에 참석하였던 사람들이 이레째 되는 날 막 해가 떨어질 무렵에 삼손에게 말하였다. `그 무엇이 꿀보다 더 달겠으며 또한 그 무엇이 사자보다 더 힘이 세겠소?' `여러분이 우리 집 암소로 밭을 갈았군요. 그렇지 않으면 내 수수께끼를 맞힐 수 없었을 텐데!' 하고 삼손이 말하였다. 19) 하나님의 기운이 삼손을 휘감자 그가 아스글론으로 내려가 그곳 사람 30명을 쳐죽이고 그들이 입고 있던 겉옷 30벌을 빼앗아 가지고 올라와서는 수수께끼를 맞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삼손은 화가 치밀어 올라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되돌아왔다. 20) 그래서 결국 삼손의 아내는 잔치에 참석하였던 들러리 가운데 한 사람에게 시집 가고 말았다.
마침내 삼손은 블레셋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블레셋 풍속에 따라 결혼식 피로연이 진행되었으며, 그 피로연에서 수수께끼를 내고 푸는 과정에서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삼손의 결혼식(10-11) 삼손의 아버지가 삼손의 결혼을 위해 딤나로 내려갔습니다. 이는 삼손의 결혼식이 블레셋 풍습을 따라 신부의 집에서 7일 동안 치러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대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녀의 결혼을 위해 신랑의 부모가 신부의 부모에게 결혼 지참금을 지불하고 신부를 데려와 결혼식을 했습니다(창 24장). 결혼식을 주관하는 무리가 피로연의 기쁨을 더하고, 그 지역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도록 친분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그 지역 젊은이 30명과 함께하게 했습니다.
삼손의 수수께끼(12-18) 삼손은 피로연의 흥을 돋우기 위하여 수수께끼를 냈습니다. 문제를 풀면 삼손이 그들에게 베옷 30벌과 겉옷 30벌을 주고, 반대로 풀지 못하면 삼손이 그들에게 받는 것이 조건이었습니다. 삼손은 자신이 경험했던 사자의 시체에서 꿀을 채취한 일을 근거로 하여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다는 수수께끼를 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흘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에게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의 정답을 알려 달라고 협박했습니다. 그러자 삼손의 아내는 남편 삼손에게 사랑을 빙자하여 울며 그 답을 알아내려고 했습니다. 처음에 완강하게 거절하던 삼손은 아내의 눈물과 강요에 못 이겨 답을 알려 주었습니다.
삼손의 보복(19-20) 일곱째 날 해지기 전 블레셋 사람들은 수수께끼의 정답을 삼손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아내를 협박하여 답을 알아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호와의 영이 갑자기 임하였습니다. 삼손은 수수께끼를 풀면 주겠다고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 블레셋 땅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곳 사람 30명을 죽이고 노략한 것을 그들에게 주고, 화가 나서 자기 집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삼손의 장인은 그녀를 삼손의 친구에게 내주었습니다.
적용: 오늘 본문에 비상식적인 일들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비상식적인 일이었음에도 하나님이 그 가운데 일하셨던 것이 있었으면 그것을 서로 나누어 봅시다.
이소룡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부르스 리(Bruce Lee)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태생의 중국계 미국인 무술 배우이자 영화감독으로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무술가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생전에 절권도(截拳道)를 창시하며 큰 명성을 쌓았는데 한 인터뷰를 통해 “나는 천 가지의 다양한 발차기를 하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한가지의 발차기를 천 번한 사람을 두려워한다.”고 고백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혹시 너무 많은 일로 바쁘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 설 교 >
장점으로 승부를 걸어라
삿 14장 10~19절 / 조상호목사
한 때 ‘코메디 황제’라고 불릴 정도로 한국의 대표적 코미디언이었던 이주일(본명 정주일)씨를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이주일씨는 이미 이 땅을 떠났습니다만, 이주일씨의 인생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교훈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는 오랜 무명 생활 끝에 40살이 되던 1980년 TBC의 한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유명해졌습니다. 특유의 춤으로 팬들을 사로잡으며 수많은 유행어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당시에는 유행어가 별로 없던 시절임에도 그의 입에서 나온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뭔가 보여 드리겠습니다” “일단 한 번 와 보시라니깐요” 등의 말은 당시 태풍처럼 전국을 휩쓸었고 아직도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초특급 유행어입니다. 또 “못생기면 다냐”라는 말도 상당 기간 유명세를 탄 유행어였습니다. 또 당시 정부와 전두환 대통령을 풍자한 코미디를 하다가 방송 출연 정지를 당하면서 “조용히 살고 싶다”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986년 아시안게임 당시에는 성화 봉송주자로 나서기까지 했습니다. 또 그는 ‘뭔가 말되네요’ ‘삐딱한 광대’ 등의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경기 구리에서 출마하여 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1992년부터 96년까지 정치에 발을 들여놓아 코미디 황제에서 금배지를 단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국회에 발을 들여놓은 지 4년 만에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4년간 코미디 잘 배우고 떠납니다.”라는 작별 인사를 하며 국회를 떠나 다시 방송에 복귀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흡연으로 인해 생긴 폐암으로 고생 고생하다가 2003년 8월27일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기 전에 남긴 또 하나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한 20년 남짓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는 스타로 살아왔네요.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몸이 다 낫는다면 뭘 하고 싶냐 구요? 나는 코미디언이에요. 당연히 코미디를 해야죠. 무대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저는 그의 이 말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떠돌이 악극단의 이름 없는 사회자로 출발했지만, 지방의 시골 극장 무대위에서나, 중앙의 화려한 TV 방송국 무대위에서나 그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웃기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그가 받은 천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그가 한 때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아 그가 달았던 금배지는, 사실 그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배지였습니다. 코미디 황제에게는 국회가 너무나 맞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정치인이 아니라 코미디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자기가 가진 재능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의 재능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면 본인도 힘들고 곁에서 지켜보는 가족도 힘들고 오히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 폐만 끼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작년 월드컵 축구의 영웅 이천수선수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들이 뛰고 있는 스페인의 프로축구 리그에 몇 달 전에 진출했습니다. 그런데 겨우 170센티미터를 조금 넘는 이천수 선수가 2미터가 넘는 선수들이 즐비한 농구선수가 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이천수선수도 농구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봐도 그에게 농구선수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또 뉴질랜드의 유명한 럭비선수인 조나 로무(Jona Lomu) 선수는 신장이 거의 2미터에 가깝고 체중은 100킬로그램을 훨씬 넘는 육중한 체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가 지금은 신장(Kidney) 문제로 말미암아 All Black(뉴질랜드 럭비국가대표팀)에서 제외되어 1주일 전에 마친 럭비 월드컵 경기에 나가지는 못했지만, 그를 막으려면 두세 명의 선수들이 힘을 합해도 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힘의 소유자입니다. 그는 어지간한 태클에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럭비 선수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가 승마를 하는 기수가 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말 못하는 말이 다 웃을 것입니다. 말을 타는 기수는 대부분 160센티미터 이하에 체중이 55킬로그램 정도의 작은 몸집의 소유자들입니다. 말을 타는 기수는 말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체격이 작으면 작을수록 유리합니다. 자이언트 조나 로무에게는 말을 타는 기수라는 자리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줄 아십니까? 자기가 가진 재능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들에게 은사와 사명을 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7절 이하를 보면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고전12:17~19, 28~29) 하나님께서 은사의 다양성과 사명의 다양성을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사대로 혹은, 사명대로 일하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에게 현재 주어진 것을 활용하여 일하면 됩니다. 그러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일하려고 하면 어려움이 생깁니다. 자기가 가야할 길에서 일탈하면 문제가 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러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삼손은 딤나 여인과의 결혼식이 한참 절정에 달했을 때, 수수께끼를 하나 냈습니다. 그 당시에는 결혼식과 같은 특별한 잔치 날에 잔치의 흥을 돋우기 위해서 수수께끼를 내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삼손은 수수께끼를 내었던 것입니다(12~13절). 그는 수수께끼를 낸 후, 7일 동안 그것을 풀면 그들에게 베옷 30벌과 겉옷 30벌을 주겠지만, 반대로 그것을 풀지 못하면 그들이 삼손에게 주어야 한다는 내기를 걸었습니다. 삼손은 죽은 사자의 시신에서 벌꿀을 얻은 사건을 가지고 수수께끼를 냈습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14절) 여기에서 ‘강한 자’는 사자를 의미하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다’는 것은 죽은 사자에게서 나온 꿀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경험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맞출 수 없는 수수께끼였습니다.
불순종을 가볍게 여긴 삼손
여기에서 우리가 첫 번째로 주목해야 할 것은 삼손의 경박한 행동입니다. 그는 불순종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이미 말씀드렸지만, 죽은 사자 시체에서 꿀을 꺼내 먹은 것은 나실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긴 일로서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것을 자랑 삼아서 블레셋 사람들과 장난질을 치고 있는 그의 모습은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는 나실인으로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게 살겠다고 한 서원을 깨뜨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불순종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은 더 악한 일입니다.
사실 평신도든지 장로든지 목사든지 우리는 누구나 모르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인 이상 말로도 실수하고, 행동으로도 부지불식간에 실수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또한 알면서도 불순종할 때도 있습니다. 분명히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리로 가면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불순종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빨리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바로 돌아오면 됩니다. 그러나 불순종을 전혀 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한 술 더 떠서 그러한 죄를 가볍게 여기면서 ‘장난을 치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엄청난 죄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하루라도 빨리 깨닫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모르고 실수하였든지, 알면서도 불순종하였든지 그 불순종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바로 돌이키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살 길입니다. 삼손은 참으로 영적 무감각 상태에 빠져서 자기의 실수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실수를 가지고 장난을 하였습니다.
있는 것을 활용하지 못한 삼손
우리가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것은, 있는 것을 활용하지 못한 삼손의 모습입니다. 삼손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가 있습니다. 힘입니다. 어느 누구도 당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 힘으로 승부를 걸었어야지요?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블레셋과 겨루어야지요? 그런데 왜 갑자기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있는 대로 굴려서 어려운 수수께끼를 냅니까? 삼손은 죽은 사자를 가지고 수수께끼를 내는 대신, 힘으로 당당하게 겨루면 됩니다. 예를 들어 “너희들 30명 중에 나와 씨름을 하여 이기는 사람이 있으면 내 옷 다 벗어 줄께. 너희들 중 한명과 내가 닭싸움을 해서 이기는 사람이 있으면 너희들이 하라는 대로 다 해 줄 수 있어.”라고 했다면 그는 블레셋 사람들을 간단히 제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힘으로 싸우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지도 않은 머리로 싸우려고 했습니다. 결국 머리를 믿고 덤볐던 삼손은 그 머리 때문에 망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 나에게 지금 있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전(前)미국의 케네디대통령의 미망인인 재클린 케네디에 대해서 기록한 것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눈에는 광대뼈가 튀어나온 재클린은 그리 미인으로 보이지 않는데 반해, 서양 사람들 눈에는 재클린이 미인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클린은 자신의 장점과 약점을 명확하게 파악해서 약점은 가리고 장점은 잘 드러낼 줄 알았기 때문에 그녀가 미인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설명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다 약점과 장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약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극대화 시키면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사실 저에게는 약점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한 두 가지만 꼽는다면 글씨 모양새가 형편없는 ‘졸필’이 저의 대표적인 단점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단점인 펜으로 편지를 보내는 것을 삼가는 대신, 컴퓨터를 활용하여 편지를 씁니다. 또 저는 가르치는 은사는 받은 것 같은데, 상담의 은사를 별로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도들로부터 과거 수년 전에 ‘가까이 하기엔 먼 당신’이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약점을 시정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저의 약점이 저의 장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약점은 보완하되, 저의 장점인 가르치는 은사를 극대화시켜서 양육과 훈련에 열심을 다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어떠한 약점이 있습니까? 그 약점을 보완하되 여러분들에게 있는 장점을 잘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음식은 잘 만들지를 못하지만, 논리가 탁월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분들은 자신의 단점인 음식으로 봉사하려고 마십시오. 괜히 설익은 밥 내놓았다가 성도들이 그것 먹고 배탈 나서 시험들 수 있습니다. 그러한 분들은 별 볼일 없는 음식 솜씨를 자랑하기 보다는 논리적인 언변을 가지고 전도와 상담을 하는데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반대로 언변이 너무 없어 사람들을 자꾸 시험 들게 하는데 반해, 음식을 잘 만드는 장점이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분들은 그 음식솜씨를 전도대상자나 새가족들을 섬기는데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또 시간이 없어 평소에 봉사하지 못하지만, 한번 기도하면 두세 시간씩 깊이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분들은 봉사하지 못해 미안해하지 말고, 자신의 장점인 기도를 통해 성도들과 교회를 위해 중보하시기 바랍니다. 또 글재주가 전혀 없어 글 한 줄 쓰려면 하루 종일 걸리는데 반해, 찬양은 기가 막히게 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분들은 괜시리 글 쓰려고 골머리 앓지 말고 장점인 노래 실력을 가지고 하나님께 찬양으로 영광 돌리고 공동체의 분위기를 아름답게 만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옆으로는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블레셋과 싸워야합니다. 남의 흉내를 내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삼손은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블레셋과 겨루지 아니하고, 주시지 않은 지혜를 가지고 블레셋과 겨루었습니다.
세상의 유혹에 넘어간 삼손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세 번째로 주목해야 할 것은, 세상의 유혹에 넘어간 삼손의 모습입니다. 삼손의 수수께끼를 아무리 해도 풀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신부를 위협했습니다.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지 못하면 신부와 그 식구들을 불살라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러자 삼손의 아내는 삼손을 붙들고 울면서 사정을 했습니다. 16절을 보겠습니다. “삼손의 아내가 그의 앞에서 울며 가로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치 아니하는도다. 우리 민족에게 수수께끼를 말하고 그 뜻을 내게 풀어 이르지 아니하도다. 삼손이 그에게 대답하되 보라. 내가 그것을 나의 부모에게도 풀어 고하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그대에게 풀어 이르리요 하였으나” 16절을 쉽게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보, 당신이 나를 미워하는군요. 당신, 정말 나를 사랑해요? 나를 정말 사랑하다면 나에게 수수께끼의 답을 말해줘야 하지 않아요?” 아내의 말을 들은 삼손이 “우리 아버지한테도 답을 말하지 않았는데...”라고 말하자, “그러면 날 당신 아버지보다 더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라고 계속해서 울면서 간청을 했습니다. 결국 삼손이 어떻게 했습니까? 17절을 보겠습니다. “칠 일 잔치할 동안에 그 아내가 앞에서 울며 강박함을 인하여 제 칠 일에는 그가 그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풀어 이르매 그 아내가 그것을 그 민족에게 고하였더라.” 하루 이틀도 아니고 7일 동안, 그것도 결혼식을 올린 후 축하파티의 주인공인 신부가 울며불며 매어 달리는데 목석같이 가만히 있을 남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삼손이 어떤 사람입니까? 여자라면 꼼짝 못하는 삼손 아닙니까? 그러니 오죽하겠습니까?
시중에 ‘사랑하면 패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녀가 데이트 할 때 남자가 여자를 더 사랑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남자는 여자에게 끌려갑니다. 사랑하는 여자가 하라는 대로 합니다. 반대로 남자를 덜 사랑하는 여자는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자기 멋대로 합니다. 남자는 설렁탕을 먹고 싶다고 해도 남자는 전혀 배려해주지 않고 자기가 짬뽕 좋아한다고 중국집으로 가자고 우깁니다. 그래서 남녀 두 사람 중에서 주도권을 잡고 상대방을 끌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누가 더 사랑하고 누가 덜 사랑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의 아내가 남편 말에 고분고분하게 순종하며 따른다면, 아내가 여러분들 보다 더 사랑한다고 할 수 있고, 반대로 여러분들의 남편이 아내가 하자는 대로 하며 끌려가는 것은 여러분의 남편이 못나서가 아니라, 여러분들 보다 더 사랑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열왕기상 3장 16절 이하를 보면 한 아기를 두고 서로 자기애라고 우기며 다투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솔로몬왕은 칼로 그 아이를 나누어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가짜 엄마와 진짜 엄마는 어떻게 했습니까? 열왕기상 3장 26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산 아들의 어미 되는 계집이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가로되 청컨대 내 주여 산 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한 계집은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가짜 엄마는 왕의 말대로 아이를 나누어 가지자고 한 반면, 진짜 엄마는 어떻게 했습니까? 아이가 죽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 아이를 포기하고 가짜 엄마에게 내주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솔로몬 왕은 진짜와 가짜를 판결하였습니다. 솔로몬 왕은 사랑이 뭔지 알았습니다. 진짜 사랑하면 진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짜 사랑하면 진다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삼손은 딤나 여인을 진짜로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무어라고 삼손은 사랑하는 여인이 울며불며 매어달리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약해져서 덜컥 답을 알려 주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보기 좋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사자를 염소새끼 찌듯이 찢을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진 삼손이었지만 연약한 여인의 유혹에 굴복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하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넘어뜨리기 위해 어떤 방법을 동원했습니까? 무기를 손에 들고 완전 무장한 채 병거를 앞세우고 쳐들어 왔습니까? 아닙니다. 미인계를 사용했습니다. 여자를 이용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용했습니다. 가까운 사람을 이용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가 잘 사용하는 전략입니다. 그렇게 친하게 믿고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변하여, 거꾸로 나를 공격해올 때가 있는데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닌데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멀리하고 대적할 때가 있는데 왜 그런 줄 아세요? 마귀가 역사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항상 우리와 가까운 사람,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일, 우리가 가장 아끼는 것들을 통해 공격해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를 잘 알아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는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가만히 접근하는 도적과 같이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마귀는 믿었던 친구를 통해서 접근해오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피땀 흘려 번 돈을 통해서 접근해오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좋아하는 취미활동을 통해서, 때로는 내가 목숨과 같이 여기는 자녀를 통해서 접근해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성하여 깨어있으므로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마귀의 유혹과 함정을 분별해야 합니다. 또한 영적으로 무장하여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 보다 훨씬 뛰어나서 우리의 방법 가지고는 능히 이길 수 없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는 필리핀 팀이, 화요일에는 솔로몬팀이 선교를 떠나는데, 솔로몬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솔로몬 선교팀에게 굉장히 필요한 말씀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남태평양 전투의 주도권을 잡는 중요한 전투가 솔로몬 선교팀이 가려고 하는 솔로몬군도의 주도이자, 수도인 호니아라가 있는 과달카날 섬 근방에서 벌어졌습니다. 일본은 본국으로부터 물자를 원활하게 조달받기 위해 과날카날 섬에 비행장을 건설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정보가 미국에 전해지게 되어 미국은 해병대를 투입하여 비행장 건설을 저지하려고 했습니다. 드디어 일본군과 미국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본군은 두 가지 의견으로 나뉘었습니다. 젊은 장교들은 일시 후퇴하였다가 지구전으로 맞서든지, 아니면 화력 중심의 현대전으로 전쟁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다른 한쪽은 이제까지 해 온 것처럼 일본군이 전통적으로 강한 백병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과날카날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은 머리를 박박 밀고 “오직 천왕을 위하여”를 외치며 목숨을 걸고 미국과 싸우다가 전멸당하고 말았습니다. 현대식 무기를 갖춘 미국군대를 대항하여 승리하기 위해서 일본군은 육군을 중심으로 하는 백병전이 아닌, 대포나 함포 등의 현대식 무기를 최대한 동원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기존의 방식대로 백병전을 벌이다가 미국에게 패배하고 만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 교훈입니까? 상대방의 수준에 따라 적절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인 마귀는 엄청난 수준으로 공격해 오는데, 우리의 힘으로 대적하여 승리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힘만으로는 안 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승리한 삼손
성령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 이하를 보면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3~1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진리의 허리 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빙패, 구원의 투구, 이 다섯 가지는 모두 방어용 무기인 반면, 성령의 검은 유일하게 공격용무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귀와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성령의 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 ‘성령의 검’이란 첫째로 ‘성령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성령의 검’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령의 능력이 임할 때, 우리는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의 능력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예배 때마다, 모임 때마다 항상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이미 살펴보았지만, 6절을 보십시오.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같이 찢었으나 그는 그 행한 일을 부모에게도 고하지 아니하였고” 여기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다’는 말을 영어 성경에는 “The Spirit of the Lord came upon him in power”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또 19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크게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 곳 사람 삼십 명을 쳐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아비 집으로 올라갔고.” 여기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크게 임했다’는 말을 영어 성경에는 “The Spirit of the Lord came upon him in power”라고 아까 6절에서 언급한 번역과 똑같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삼손이 통닭 찢듯이 사자를 찢을 수 있었던 이유나 단기필마인 그가 블레셋 사람 30명을 단숨에 쳐 죽일 수 있었던 이유는 여호와의 신, 다시 말하면 성령께서 그에게 능력으로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성령께서 기름 부어주셨기 때문에 그가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성령님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을 날마다의 삶 속에서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을 날마다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힘으로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렵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승리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울대 정운찬(鄭雲燦)총장이라는 분이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주최한 회의에서 발표한 한 가지 주장을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그 분은 “‘나도 주의'가 한국 대학의 병폐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저는 대학 뿐 아니라, 모든 국민이 ‘ME-TOO-ISM' 때문에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ME-TOO-ISM'라는 말을 혹시 집에 가셔서 사전을 찾으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제가 만든 말입니다. 서울대 정운찬 총장이 주창한 나도 주의를 영어로 번역하면 ‘ME-TOO-ISM'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Me too, Me too 하면서 개성 없이 모방만 하고 있습니다. 옷이나 액세사리나 신발, 머리 모양과, 하다못해 성형수술을 해서 얼굴 모양까지 Me too하며 모방하고 있습니다. 다른 가정에서 자녀에게 웅변을 가르치면 아무 생각 없이 똑같이 따라서 웅변을 가르치고, 다른 집에서 발레를 가르치면 자녀의 취미는 생각하지 않고 똑같이 따라서 발레를 가르치고, 다른 집에서 천자문을 가르치면 자녀의 수준은 생각하지 않고 천자문을 가르치는 ‘ME-TOO-ISM'이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판을 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삼손이 어쩌면 ‘ME-TOO-ISM'의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원래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선물로 받아 힘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천하장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힘을 의지하기 보다는 머리를 의지하여 수수께끼를 내어 블레셋과 싸우다가 오히려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뒤늦게 자기의 장점을 가지고 나아가서 블레셋을 무찌르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떠한 장점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어떠한 은사가 있습니까? 아니 여러분들이 자녀를 둔 부모님이라면,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어떠한 장점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있는,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있는 그 장점을 잘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장점으로 인생에서 승부를 거시기 바랍니다. 약점 가지고 고민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장점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약점은 할 수 있다면 보완하여 고치되, 주어진 장점을 활용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여우꼬리·나귀턱뼈
삿 14장 19절 / 류영모목사
I. 삼손의 작전은 실패했으나
한 바보가 손가락으로 태양을 가리키며 저거 뭐야? 라고 물었더니 다른 바보가 대답을 합니다. 손가락이네!
삼손은 태양, 하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나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라는 겁니다. 나의 실패를 통하여 어떻게 승리하시는가?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나의 약점을 통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강하게 역사하시는가?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삼손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자 삼손은 이방이요 원수인 블레셋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영이 임했으면 멋진 일을 해야지 원수의 딸과 이방 족속과 결혼을 하겠다는 겁니다. 이 터무니없는 계획이 바로 여호와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터무니없는 전략 결혼을 통해서 원수의 땅 블레셋을 칠 틈을 얻고자 했다는 것이지요.
삼손은 블레셋 땅으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덤비는 젊은 사자를 맨손으로 찢어 죽입니다. 이 또한 여호와의 영이 강하게 삼손을 도왔기에 이길 수가 있었다는 것이 성경의 해석입니다.
이 경험은 참으로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번 블레셋 딸과 결혼하는 위장 결혼전략을 기뻐하신 다는 보증이었습니다. 삼손이 앞으로 블레셋을 칠 때마다 삼손 혼자 싸우도록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언제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드디어 삼손은 결혼식 잔치를 베풀고 수수께끼 게임을 통해 위험한 도박을 벌입니다. 이 게임을 통해 블레셋 사람들의 폭동을 유도하고 이 합법적인 정당방위를 통해서 블레셋을 지켰다는 게지요. 그러나 삼손은 아내의 눈물어린 애정 투정에 못 이겨 수수께끼 정답을 누설하게 됩니다. 자신이 세운 그토록 치밀했던 전략을 자신이 파괴해 버린 격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삼손의 계획은 비참한 실패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여기까지가 지난 시간까지 대략적인 줄거리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문이 열려지면 삼손의 실패를 멋지게 만회하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수수께끼 게임에서 보기 좋게 진 삼손이 약속했던 속옷과 예복 각 30벌을 준비해야 할 바로 그때 사사기 14장 19절에 보면 여호와의 영이 갑자기 삼손에게 임합니다. 그러자 삼손은 블레셋의 다른 성읍 아스글론으로 내려가서 그곳을 치고 약속했던 옷을 준비해 옵니다. 그리고 첫날밤을 보내지 않은채 심히 노하여 집으로 돌아와 버립니다.
삼손이 블레셋을 칠 기회는 또 주어집니다.
14장 20절에 삼손의 장인 어른은 첫날밤을 치르지 않고 집으로 가버린 삼손에게 앙갚음이라도 하듯 들러리 청년 중 한 명에게 딸을 줘 버리고 맙니다.
보십시요.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삼손은 합법적으로 딤나 도시를 도륙할 수 있게 됩니다. 삼손의 딤나를 치겠다던 계획이 무너지는 순간 하나님은 오히려 아스글론과 딤나를 함께 칠 수 있도록 역사를 합니다. 삼손의 위장 결혼 전략은 실패했으나 블레셋을 공격하기로 작정한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삼손 첫 번째 시간엔 인간의 약점과 실수 그리고 허물과 실패를 뛰어넘는 기묘하신 하나님 - beyond understand 「기묘자」라는 제목으로 두번째 시간에는 「혼인 수수께끼」라는 제목으로, 이 시간에는 삼손 세 번째 시간 「여우꼬리․나귀턱뼈」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다음 시간 「삼손과 들릴라」 절정의 사건으로 이어져갈 것입니다.
II. 장인의 실수가 틈이 되다
앞장에서 삼손의 결혼 전략은 14장 4절 말씀에 의하면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기”위한 나 홀로 일으킨 일종의 거사였습니다. 삼손은 수수께끼 게임이 틈이 되어 주리라 기대했습니다만 오히려 자신이 말려들고 맙니다. 삼손은 블레셋 청년들에게 보기 좋게 깨졌습니다. 삼손은 실패했지만 블레셋 장인의 실수가 큰 틈이 되어 삼손은 블레셋을 강타할 수가 있었습니다. 삼손이 원수의 틈을 타서 어떻게 원수의 땅을 쳐들어 가는가 하는 것이 15장의 내용입니다.
들판에 밀이 무르익어 밀을 거둘 무렵이었습니다. 삼손은 염소 새끼 한 마리를 선물로 준비하여 아내를 만나러 갑니다. 그리고 장인에게 내가 첫날밤을 치르러 왔노라고 말하지요.
15장 1절에 “밀 거둘 때에” 이 말은 잠시 잠깐 후에 황금 벌판에 어떤 중요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복선입니다. “염소 새끼” 선물은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넉넉한 선물이었습니다. 삼손이 수수께끼 게임에서 패하고 돌아간 다음 장인은 이를 일종의 파혼으로 해석하고 딸을 결혼잔치에 왔던 들러리 중 한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버렸습니다.
삼손이 나타나자 상황이 다급해졌습니다. 삼손의 장인은 다시 삼손을 유혹하고 타협안을 내놓습니다. 이미 네 아내는 다른데 시집을 갔으니 동생하고 결혼을 하라는 겁니다. 동생이 더 아름다우니 동생을 삼손의 아내로 주겠다는 겁니다. 당시엔 딸은 아버지의 재산처럼 아버지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을 때였습니다. 만약 이때 삼손이 이 유혹에 넘어갔더라면 하나님이 블레셋을 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모든 기회를 날려버릴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삼손은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3절에서 삼손이 말합니다.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블레셋을 합법적으로 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가 왔습니다. “이번은” 이 말에 엑센트가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는 구나. 쾌재를 부르는 겁니다.
삼손의 장인이 이런 실수를 해 주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속국으로 점점 더 깊이 깊이 빠져들어서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는 대단히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장인이 정상적인 결혼관계를 깨뜨리고 블레셋 청년이 삼손의 아내를 빼앗아 갔기 때문에 얼마든지 보복을 하더라도 할말이 없는 상황이 만들어져 버렸습니다. 원수의 실수가 틈이 되어 주었습니다. 삼손의 계획은 깨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깨어지지 않습니다. 삼손의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삼손의 실패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만회해 가시는가? 보라는 것입니다.
「안소니 형의 버릇을 고쳐 줄 거야」(Judith Viorst 저) 하는 동화책이 있습니다. 늘 형에게 구박과 놀림을 당하던 동생이 내가 크면 형의 버릇을 고쳐놓겠다고 벼르는 얘기입니다. 형은 5살 자기 나이는 3살입니다. 동생은 자신이 6살이 되면 형 안소니보다 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형보다 커서 6살이 되면 넌 죽었다고 생각하고 6살 형의 버릇을 고쳐줄 계획을 치밀하게 계획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자기가 6살이 되니까 형은 8살이 되어 가 있는 걸 이 동생은 몰랐던 것이지요.
내가 실수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더 멋진 승리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자주 보게 되는지요. 내 약점 때문에 내 허물 때문에 속상해 있으면 그것을 덮어주는 하나님의 사랑은 저만큼 가서 나를 기다리고 있고 훨씬 더 큰 은혜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얼마나 우리가 여러번 자주 보게 되는 것입니까? 조그마한 문이 닫혀져서 쩔쩔매고 있으면 저만큼 하나님께서 얼마나 커다란 문을 열고 우리를 기다려 주셨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시고 또 삼손의 하나님은 바로 이런 하나님이심을 본문을 통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III. 여우 특공대
불법적으로 남의 아내를 빼앗아간 사람들을 치는 것은 잘못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타격을 가할까 고민하며 들판을 바라보니 무르익은 황금벌판이 바람에 넘실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저 밀밭에 불을 지르자. 저 평원은 원래 하나님이 우리 단 지파에게 하나님이 주신 땅이 아니던가? 그런데 자신을 도와줄 동력자가 없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들판을 돌아다 보는데 마침 들짐승떼가 눈에 들어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여우라고 기록된 이 짐승은 자칼 즉 승냥이입니다. 여우는 혼자서 다니니까 쉽게 300마리를 잡을 수가 없지만 승냥이는 떼를 지어 몰려다니기 때문에 한번에 여러 마리를 잡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자칼 300마리 기드온의 300명 용사처럼 자칼은 삼손 특공대가 되었습니다. 각자 도망가지 못하도록 두 마리씩 꼬리를 묶습니다. 그 꼬리에 기름 막대기를 매달고 불을 붙혀 밀 타작을 하기 위해서 쌓아놓은 밀밭 더미로 보내기도 하고 아직 타작은 안했지만 밀 밭으로 보내고 포도밭, 감람나무 밭으로 쫓아 보냈습니다.
자칼 특공대는 밀 밭 마다, 포도밭 마다 불을 붙이며 이리저리 뛰어다닙니다. 나름대로는 불이 붙은 곳을 피하여 숨어 보겠다는게 불이 붙지 않은 밭을 골라 다니며 불을 질러 줍니다. 얼마나 통쾌한 장면입니까?
사사기의 이 기록은 성경 안에서나 성경 밖에서 대단히 특이한 사건, 특이한 기록으로 평가됩니다.
삼손의 이 불놀이는 딤나 곡창지대를 놓고 오랜시간 싸웠던 이스라엘과 블레셋 싸움의 절정의 싸움이었습니다. 사사시대는 하나님께서 장애인을 들어 쓰셨습니다. 전쟁터의 사령관으로 여성을 들어 쓰십니다. 첩의 자식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삼손시대 정규군을 모을 수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여우 특공대를 만들어 쓰셨습니다. 자칼 특공대는 그 어떤 특공대보다도 용감했고 효과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들짐승들을 불러모아서라도 당신의 역사를 이루고야 마시는 분이십니다. 출애굽 과정에서 개구리와 파리떼를 동원해서 바로 왕을 굴복시키시는 분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아니셨습니까?
한순간에 추수할 곡창지대를 잃어버린 블레셋 사람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당황했겠지요. 알아보니 삼손이 아내를 빼앗긴 분풀이로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화가 난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에게 이 원인을 제공했던 장인의 집에다 불을 질러버렸습니다. 그리고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장인을 불속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딸을 불속에 던져버렸습니다. 자중지란이 일어난 것이지요. 자기들끼리 싸우고 죽입니다.
삼손에게 또 기회가 생겼습니다. 삼손의 처가와 아내를 죽였으니 이번에 블레셋의 곡식 밭이 아니라 블레셋 사람들을 도륙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이 일로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의 정강이와 넓적 다리를 크게 쳐서 죽였다고 8절은 이상한 기록을 남깁니다.
“정강이와 넓적 다리를 크게 쳤다”는 것은 관용어귀로서 힘쓸만한 젊은이를 다 죽였다는 뜻입니다. 정강이와 넓적다리는 힘의 중심이 기기서 나오지 않습니까? 힘쓸만한 놈들은 다 죽였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불타는 딤나 평원, 불타는 삼손의 처가, 피로 얼룩진 블레셋 마을... 이 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백성을 짓밟은 블레셋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가 불타오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을 빼앗은 이방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내가 내 자녀들을 징계하지만 너희들이 내 자녀를 그렇게 무참히 짓밟은 것은 내가 용서할 수 없다. 부지갱이로 내 자식을 때리지만 자식을 때린 다음에는 부지갱이를 꺾어서 아궁이에 집어넣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내 자녀들 사랑스런 내 백성을 건드린 놈들은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하나님의 단호한 결의를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IV. 마귀편 드는 유다 지파
블레셋은 보복전쟁을 일으키고 싶은데 범법자가 누구입니까? 여우 특공대, 도망간 여우를 잡을 수도 없는게고 그러다가 여우는 대부분 죽었겠지요. 사람이라곤 지휘관 오직 한 사람 삼손 뿐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은 삼손을 체포하기를 원했는데 삼손을 체포할 수 없자 유다 지파 사람들을 이용하기로 합니다. 마귀는 언제나 가까운 사람을 이용해 우리를 묶으려 합니다. 예수님을 체포할 때에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가롯 유다를 들어 쓰는게 가롯 유다의 전략이었습니다.
블레셋을 칠 때는 한 명도 모집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낸 구원자 사사를 체포하기 위해서는 유다 지파에서 무려 3000명이나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11절에 가관입니다.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어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해야지, 블레셋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삼손에게 왜 말썽을 피워 우리를 피곤하게 하느냐는 겁니다. 노예 근성에 사로잡힌 유다지파는 하나님의 사람을 원수에게 내어줍니다.
지금 블레셋은 1천명쯤 되었습니다. 유다 지파는 3천명이 모였습니다. 그렇다면 유다지파는 삼손을 도와 블레셋을 쳐야지요. 삼천명이 하나님이 보낸 구원자를 체포하기 위해서 벌떼처럼 일어날 수 있더라는 말입니까?
유다 지파가 자신을 잡으러 왔을 때에 삼손이 대단히 중요한 결정을 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나의 원리를 여기에서 보여줍니다. 내가 순순히 붙잡혀 줄테니 너희 손으로 나를 치지는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은 내 손으로 동족을 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너희들은 철부지라서 나를 붙잡아 블레셋에 넘기지만 내가 동족과 싸울 수는 없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신앙인이기 때문이다. 그 얘기이지요.
가끔 보면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 가운데서도 교회 밖에서 교회를 욕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라고 사람들이 모인 곳인데 욕 먹을만한 일이 왜 없겠습니까? 교회는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할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이방 땅에다 대고 나팔을 불면 도대체 누구를 이롭게 하자는 것입니까? 그 지나친 공격이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상하게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지요. 그래서 세상이 볼 때 그런 비판을 하는 목회자나 신학자는 거룩해 보일지 모르지만 한국교회는 다 썩어 보입니다. 결국 그것이 선교를 방해하게 되고 몸된 교회를 깨뜨리게 되는 것이지요.
삼손은 유다 지파가 제대로된 교회라서 그들을 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가 아무리 모자라도 못나 보여도 그들을 치지는 않겠다는 것이 삼손의 결정이었습니다.
V. 나귀턱뼈로(하하모르)
삼손은 유다 지파의 손에 순순히 붙잡혀 새 밧줄 둘로 결박된채 블레셋의 손에 넘겨집니다. 힘없이 삼손이 묶인채 붙잡혀 오자 블레셋 사람들은 야호! 환호를 합니다. 바로 그 순간 본문 14절에 의하면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게 됩니다. 삼손이 좌충우돌 천방지축 날 뛰는 듯한 이 돌출 행동을 오히려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전폭적으로 삼손을 지지해 주시고 계신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때 삼손을 묶고 있던 싱싱한 새 밧줄 둘이 불탄 삼처럼 우두둑 떨어졌습니다. 불탄 실오라기처럼 녹아 내렸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면 나를 묶고 있던 온갖 밧줄들이 불탄 삼처럼 끊어집니다. 할렐루야! 성령이 임하면 여러분을 묶고 있던 온갖 질병들이 불탄 삼처럼 끊어지게 될 것이니라. 여러분들의 사업과 계획을 묶고 있는 온갖 방해꾼들이 불탄 삼처럼 끊어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붙들고 있던 악한 영들이 불탄 삼처럼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나귀 턱뼈 한 조각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것을 손에 들고 블레셋 군대 1천명을 그 자리에서 모조리 죽여버립니다. 너희 따위는 정식 무기로 죽일 가치도 없다는 것이지요. 블레셋에 수치를 안겨 줍니다. 하나님에 진노의 칼이 되는 것입니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나귀 턱뼈 한 조각에 성령이 도와 주심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칼이 되었습니다.
이때 삼손의 찬양 같지 않은 찬양 한 토막을 남깁니다. 시 같지 않은 시 한 토막을 남깁니다. 초등학생이 쓴 글 같기도 합니다.
16절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이 찬양을 하고 자기 손에서 나귀 턱뼈를 집어 던집니다. 번역을 할 때에 다른 언어로 시를 번역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운율이 있는 것이고 운율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시를 번역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도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
히브리 랍비들은 이 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이긴 승리를 통쾌하게 웃어 즐기는 삼손의 시라는 겁니다. 운율이 살아있는 탁월한 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귀 턱뼈를 집어 던진 것은 오직 하나님이 이기셨다는 선언입니다. 오고 오는 세대에 나귀턱뼈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귀 턱뼈에 주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게 될 때에 보잘 것 없는 나귀 턱뼈 조차도 하나님의 진노에 불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징계의 도구가 되고 칼이 되었다는 것이지 나귀 턱뼈를 쓰신 하나님을 보라는 것이지 나귀 턱뼈를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집어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히브리어로 읽어보겠습니다.
빌리히 하하모르
하모르 하모라팀
빌리히 하하모르
히케티 엘리프 이쉬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 나귀 턱뼈 “하하 모르” 통쾌하게 웃어주는 장면이지요. 하하 모르 하하 모르. (나귀 턱뼈로 나귀 턱뼈로) 하나님이 너희를 치셨도다. 껄껄대고 웃는 삼손의 웃음소리가 들려지지 않습니까?
삼손은 위장결혼 작전을 세워서 블레셋을 칠 거사를 나 홀로 계획합니다. 그러나 삼손은 자신이 세운 거사 계획을 자신이 무너뜨리고 맙니다. 보기 좋게 실패하는 듯 보였습니다. 바로 이 순간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개입하십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실수를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한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세 번 연속해서 블레셋을 칠 수 있게 됩니다.
나는 실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실패를 통하여 오히려 만회하십니다. 내가 실패했다고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쓸만한 인물이 한 명도 없을 때에 하나님은 여우 떼를 통해서 자칼 특공대를 통해서 마귀 블레셋을 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기가 없습니다. 칼 한 자루가 없는 비참한 시대에 나귀 턱뼈에 성령이 함께 하시어 원수를 도륙하게 합니다. 이는 당신의 자녀를 짓밟는 원수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분노였습니다.
이 나귀 턱뼈는 원수를 물리치고 온 블레셋 땅이 떠나갈 듯한 삼손은 웃어주는 것입니다. 하늘의 천군천사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하하 모르 하하 모르 하고 웃어 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나를 구원하기로 작정한 하나님의 계획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어려움이 있고 고난이 있고 힘든 일이 있다고 해서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계획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당신을 통해 이루어 가기로 한 멋진 승리의 전략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당신은 영광스런 사역자로 쓰임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통한 멋진 승리를 이 땅에 이루어졌을 때에 천성을 향하여 가며 내가 살아왔던 지난날을 뒤돌아 보며 하하 모르 하하 모르 크게 웃고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것을 크게 찬양하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선한 일을 시작하신 우리 주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반드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떠나면 불행이 다가옵니다
삿 14:10-20 / 우인택 목사 사사기 14:10-20
오늘 본문은 삼손과 딤나 여인과 결혼식 잔치 자리에서 있었던 삼손과 블레셋 사람 30명과의 수수께끼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 먼저, 10절에 “삼손의 아버지가 여자에게로 내려가매 삼손이 거기서 잔치를 베풀었으니 청년들은 이렇게 행하는 풍속이 있음이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여자에게로 내려갔다’는 것은 그 여자가 살고 있는 그녀의 집으로 갔음을 의미합니다.
보통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녀의 결혼을 위해 신랑의 부모가 신부의 부모에게 결혼지참금을 지불한 후에 신부를 신랑의 집으로 데려와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창 24장).
그럼에도 삼손의 아버지가 삼손의 결혼을 위해 딤나로 내려간 것은 그의 결혼식이 이스라엘의 풍습에 따른 것이 아니라 블레셋의 풍습을 따른 것임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블레셋 풍습까지 따른 것을 보면 삼손의 부모도 삼손이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부모가 아무리 신실한 믿음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자녀가 부모의 신앙을 꼭 계승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삼손의 부모가 그를 나실인으로 최선을 다해 양육했지만 삼손은 하는 일마다 나실인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거침없이 했습니다.
이방 여인, 그것도 자기 민족을 짓밟는 원수의 나라의 여인을 탐한 것, 죽은 사자의 시체를 만진 것, 그리고 오늘 본문의 살인 행위들은 다 나실인으로서는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삼손이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계속해서 거역하게 된 것은 그가 자라온 환경이 블레셋의 문화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아무리 신앙교육을 잘해도 밖에 나가면 모든 것이 탐욕과 타락의 이방 문화이니 그가 그것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가정이나 교회에서 아무리 신앙교육을 하고 예의범절을 가르친다 할지라도, 우리 자녀들이 세상에서 전혀 다른 문화를 접하게 되면 그 교육이 자녀에게 바르게 정립 될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가정과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와 나라를 위해 더욱 힘써서 기도하고 복음을 부지런히 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중단하면 우리 자녀들은 세상의 문화를 극복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사회에 대한 영향력은 무엇이 있을까 깊이 생각하며, 이 땅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자신의 자리를 책임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12-14절에 삼손은 블레셋 땅에서 사귀게 된 친구 30명에게 자기가 죽인 사자의 일을 가지고 7일을 기한으로 수수께끼를 냅니다.
삼손이 이처럼 수수께끼를 푸는 기간을 7일이나 준 것은 그것을 풀 수 있는 사람은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걸고 그들이 풀면 자신이 그것을 주고 그들이 풀지 못하면 자신에게 줄 것을 제의합니다.
이에 블레셋 친구들은 선듯 삼손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도저히 수수께끼를 풀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일은 삼손만이 경험한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은 15절에 삼손의 아내를 겁박하기 시작합니다.
“너는 네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려 달라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네 아버지의 집을 불사르리라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빼앗고자 하여 우리를 청한 것이 아니냐 그렇지 아니하냐”
여러분 그들은 참으로 악한 친구들이었습니다.
오로지 수수께끼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친구의 아내를 급박하는 매우 비겁하고 간교한 방법까지 동원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협박을 받은 여인은 두려움에 빠져서 모든 가능한 방법을 사용하여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려고 했습니다.
무려 나흘 동안이나 삼손 앞에서 울며 그에게 답을 가르쳐 주기를 강요했습니다.
그녀의 눈물은 삼손을 진정으로 사랑해서 흘린 눈물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삼손을 이용하기 위한 위장의 눈물이었습니다.
만일 그녀가 삼손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블레셋 친구들의 악행을 삼손에게 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그녀의 위장의 눈물에 속아서 자기 부모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을 그녀에게 가르쳐 주고 맙니다.
그리고 결국 삼손의 아내를 통해 정답을 알아낸 블레셋 친구들은 삼손이 낸 수수께끼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여러분, 여기서의 여자의 유혹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을 넘어뜨리려고 하는 세상의 악한 유혹을 상징합니다(계 17:1-5, 18, 18:1-3).
삼손에게 닥쳐왔던 것과 같은 세상의 유혹은 우리 성도들을 향해서도 끊임없이 닥쳐옵니다.
특히 목회자에게는 더욱 집요하게 유혹의 손길을 보냅니다(계 2:20).
실제로 유명한 목사가 돈이나 여성문제에 휩쓸리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게 사회 이슈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본래 악한 사람이었다기보다는 세상의 집요한 유혹에 한순간 넘어감으로 그러한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삼손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었을 때는 맨손으로 사자마저도 이길 정도였지만, 한순간 방심하는 사이에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 패배자로 전락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러한 사탄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썩어질 옛 습관을 멀리하고 말씀과 기도로 중무장을 해야 합니다.
더욱이 성경이 말씀하기를 사람이 세상의 유혹을 받아 시험에 빠지는 것은 어떠한 원인이 있기에 앞서, 먼저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된 결과라고 말씀합니다(약 1:14).
오늘 본문의 삼손을 교훈삼아 세상의 유혹을 항상 이겨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그런데 19절에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 곳 사람 삼십 명을 쳐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올라갔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서 의문이 일어나는 것은 ‘삼손이 과연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만큼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까지 한 행동을 볼 때 그는 결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성령을 힘입어 적을 쳐서 이기게 된 것은 상식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삼손을 사사로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을 치는 일에 있어서는 방관하지 않으시고 직접 개입해 주셨다는 정도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삼손은 결국 자신의 모든 죗값을 치루게 됩니다.
그의 삶은 그가 지은 죄만큼 비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죗값을 찾으심을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삼손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태에서부터 구별된 나실인이었지만, 하는 일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슬렀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악한 이방 여인과 혼인하기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이로부터 계속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부르신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스스로 겸비하지 못하면 그는 무익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음을 오늘 분명하게 깨닫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믿음의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저희들을 이끌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통제 받는 인생
사사기 14:10-20 / 이진수목사삼손은 하나님 택하심을 받은 사사요, 나실인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통제를 받고 순종하는 삶이 아닌 자기 소견에 좋은대로, 내 마음에 드는대로 이방 여인과 결혼하겠다고 고집하며 나아가는 하나님 말씀으로 통제되지 않는 삶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사자를 만나 죽을 위기에서 하나님께서 힘을 주셔서 사자를 죽였지만 정결의식도 하지 않았고 더 나아가 나실인으로 죽은 시체를 만지지 말아야 하는데 다시 딤나로 내려가는 길에 죽은 사자의 시체에 있던 꿀을 먹겠다고 손을 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결국 자기 욕심과 원함대로 하나님께서 금하신 이방 여인, 자신의 눈에 든다는 블레셋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결혼식에서 일어난 사건 속에서 삼손의 불신앙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10절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사돈 될 사람의 집으로 갔다. 삼손은 신랑들이 장가갈 때 하는 풍습을 따라서, 거기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삼손은 신부 측 즉 블레셋 민족의 풍습을 따라 결혼잔치를 일주일간 베풉니다. 잔치에서는 어떤 일이 있을까요? 잔치를 베풀었다고 할 때 ‘잔치’라는 단어의 원어에는 ‘마시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즉 술을 마시는 것입니다. 나실인이었던 삼손은 술을 마실 수 없다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지만 이방여인과 결혼을 하며 잔치를 베푼 삼손을 볼 때 술을 베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이라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신분과는 상관없이 포도원에 들어갔고, 사자의 주검을 만졌고, 죽은 사자의 시체에서 부정하게 된 꿀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을 보면 이방여인과의 결혼식에서 자신도 술을 거절하지 않았었고 술을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삼손은 자신의 신분이나 사명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삼손의 모습이 성도된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에 있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삼손이 잔치가 한창일 때 블레셋 사람들이 데려온 30명의 젊은이들과 잔치가 벌어지는 일주일 동안의 기한을 두고 수수께끼 내기를 해서 이긴 사람에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로 주기로 합니다. 그들이 동의하자 삼손은 14절에 이런 수수께끼를 냅니다. “그래서 삼손이 그들에게 수수께끼를 내놓았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다”삼손은 자신이 죽인 사자에게서 나온 꿀에 대한 수수께끼를 낸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들어보면 이해되지 않는 수수께끼였지만 삼손이 낸 블레셋 사람들은 그 수수께끼에 대해 이상한 것이라고 반박하지 않고 풀어 보겠다고 받아 들입니다. 하지만 삼손이 낸 수수께끼를 영적으로 본다면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음이 있기에 그런 수수께기를 낸 것입니다.
이 시대를 보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죄라고 하시는 것을 행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습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이요, 더럽고 추한 일들을 정당화 하고, 그 일을 행하는 것을 승리라고, 자유함이라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죄라고 하신 계명과 명령, 뜻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안다고 하고 믿는다고 하고,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듣고 안다고 하는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죄라고 하시는 것을 행하면서도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탄스러운 일입니다. 삼손이 그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이 낸 수수께끼를 사흘이 지나도록 풀지 못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삼손의 아내가 된 여인에게 남편을 꾀어서 답을 알아내라고 명령합니다. 수수께끼 답을 알아내지 못하면 너와 너의 아버지 집을 불사르겠다고 협박합니다. 15절입니다. “이레째가 되던 날 그들은 삼손의 아내를 을러대었다. “신랑을 꾀어서 그가 우리에게 낸 그 수수께끼의 해답을 알아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새댁과 새댁의 친정집을 불살라 버리겠소. 우리가 가진 것을 빼앗으려고 우리를 초대한 것은 아니지 않소?”
블레셋 사람들의 협박을 받은 삼손의 아내는 그 협박이 두려워 삼손에게 수수께끼의 답을 알려달라고 울면서 애원을 합니다. 삼손의 아내가 되었지만 삼손의 아내는 자기 집이 더 중요했고 여전히 블레셋 사람들의 말을 따르는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삼손에게 수수께끼의 답을 알려 달라고 요구하는 아내의 부탁에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결국 울며 불며 떼를 쓰는
아내의 눈물을 버티지는 못하고 답을 말해주게 되고 그 답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 삼손이 지게 되고 삼손은 분노합니다.
18절입니다. “삼손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의 암소로 밭을 갈지 않았더라면, 이 수수께끼의 해답을 어찌 찾았으랴”블레셋 사람들의 방법이 정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되었든 삼손은 내기에게 졌기에 약속대로 베옷과 겉옷 30벌을 주어야 했습니다. 삼손은 어떻게 30벌을 그들에게 줍니까? 놀랍게도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옷을 주기 위해 아스글론이라는 딤나에서 30킬로 이상 떨어진 블레셋 성읍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빼앗아서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죽인 첫 번째 싸움입니다. 하지만 삼손이 한 일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나 이스라엘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의 재미를 위해 낸 수수께끼의 보상을 위해서, 더 나아가 아내에게 속은 것에 대한 분노, 아내를 협박하여 답을 얻어낸 블레셋 사람들에 대한 분노함으로 살인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께 받은 힘으로, 해서는 안될 살인과 약탈을 한 것입니다.
삼손은 아내에게도 화가 났기에 아내를 처가에 둔 채 혼자 집으로 돌아갑니다. 삼손이 한 일을 아내와 처가가 알았기에 장인은 삼손이 다시 딸을 찾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자신의 딸을 결혼에 참석했었던 사람 중 한사람에게 아내로 주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놀라운 축복과, 하나님께서 주신 큰 능력을 가지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분노를 해결하는데 사용하고 있는 삼손의 안타깝고, 미련하고, 한탄스러운 모습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 가운데 없도록 영적으로 깨어야 합니다.
삼손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고통 받는 자기 백성들을 구하는 일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능력을 사용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는 낭비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길들여지지 않은 안타까운 인생, 자기 욕심을 위해 받은 은혜를 낭비하는 인생으로 살았습니다. 해 버렸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통제되고, 순종하여 쓰임 받는 인생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하기 원합니다.
삼손과 그의 아내
삿 14:15-20
지난 시간에 삼손의 수수께끼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생각했던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배후에는 강한 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세상은 배후에 존재하는 강한 자의 실체에 대해서 전혀 무지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강한 존재에 대해서 믿지를 않으며 모든 문제를 단순히 인간들만의 문제로 여기고 있습니다. 즉 인간들이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잘하면 세상은 살기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성경의 처음부터 사단이라는 강한 자가 등장을 합니다. 이 강한 자에 의해서 인간은 무너지며 결국 강한 자에 붙들린 채 살아가게 되는 것이 세상의 실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러한 세상의 실체에 대해서 배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의 배후에 존재하는 강한 실체에 대해서 잊어버린 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붙들고 있는 강한 존재와의 싸움을 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기 백성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지키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항상 자신의 삶이 어디에 순종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즉 눈앞의 자신의 생활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모습에서 과연 보여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삶에서 강한 존재로서 세상의 배후에 있는 사단의 사고방식이 보여지는지 아니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시고 자기 백성을 구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함이 보여지는지를 점검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사단이란 존재에 대해서도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사단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은 채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단을 생각하지 않은 채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필시 사단적인 것을 신앙으로 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오인하게 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단이란 존재가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고 무엇으로 시험하는지를 알아야 사단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오인하지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필히 사단이란 존재에 대해서 눈이 밝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단이란 존재에 관심을 가진다고 해서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사단의 존재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요한계시록에서는 사단이 세상을 무엇으로 유혹하고 지배하는가에 대해서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이 무관심하지 않는 사단이라는 강한 실체에 대해서 정작 신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무관심해 버린다면 앞서 말한 대로 우리는 잘못된 신앙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배후에서 세상을 다스리고 붙들고 있는 사단의 실체는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겠습니까? 이점에 대해서 오늘 본문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지난주의 말씀과 계속 이어집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걸고 수수께끼로 내기를 합니다. 결혼 잔치를 하는 칠일 내에 문제를 맞춰야 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의 수수께끼는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문제이기 때문에 누구도 맞출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블레셋 사람들이 수수께끼의 답을 알 수 없는 것은 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삼손의 체험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현실이 무엇이며 세상의 현실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 일이 삼손에 의해서 수수께끼라는 형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수께끼를 알 수 있는 자는 삼손과 같은 이해를 가진 자에 한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지혜와 지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수수께끼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다만 세상의 지혜와 지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블레셋은 수수께끼의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강한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온다는 것이 결국 강한 자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인 줄 그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진실로 강한 자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결국 답을 알 수 없는 블레셋 사람들은 수수께끼에 질 것을 염려해서 답을 알아내기 위해 삼손의 아내를 이용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15절에 보면 "제 칠 일에 이르러 그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이로되 너는 네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리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사르리라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취하고자 하여 우리를 청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냐"라고 말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기 위해서 삼손의 아내더러 삼손을 꾀어서 답을 알아내도록 지시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사르겠다고 합니다. 협박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극히 세상적인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불레셋은 삼손에게 자신들의 것(베옷 삼십 벌, 겉옷 삼십 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삼손과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삼손의 아내를 이용하게 되고, 그를 자신들의 뜻대로 이용하기 위해서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사르겠다'는 협박을 동원을 한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협박에 삼손의 아내는 결국 삼손에게 답을 알아내기 위해서 힘을 쓰게 됩니다. 16,17절에 보면 "삼손의 아내가 그의 앞에서 울며 가로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치 아니하는도다 우리 민족에게 수수께끼를 말하고 그 뜻을 내게 풀어 이르지 아니하도다 삼손이 그에게 대답하되 보라 내가 그것을 나의 부모에게도 풀어 고하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그대에게 풀어 이르리요 하였으나 칠 일 잔치할 동안에 그 아내가 앞에서 울며 강박함을 인하여 제 칠 일에는 그가 그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풀어 이르매 그 아내가 그것을 그 민족에게 고하였더라"고 합니다.
삼손의 아내는 삼손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수수께끼의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면서 울며 삼손을 조릅니다. 결국 삼손은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풀어서 알려주고 삼손의 아내는 그 답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알려주게 되는 것입니다. 삼손이 자기 아내에게 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부모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답을 아내에게 알려주었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떤 시각에서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삼손이 자기 아내가 울고 조른다고 해서 답을 알려주는 실패를 범했으니까 신자된 자는 여자에게 약해지면 안된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창세기에서 여자가 뱀의 꾐에 빠져서 선악과를 먹고 남자에게도 먹게 한 것처럼 여자가 블레셋 사람의 협박에 의해서 삼손에게 답을 알아내고 그것을 블레셋 사람에게 알려줬으니까 역시 언제나 여자가 큰 문제라는 문제점을 이끌어 내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까? 그러나 제가 볼 때 그러한 문제들은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 먼저 생각할 것은 삼손의 아내의 배후에 누가 존재하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블레셋입니다. 블레셋이란 강한 존재가 힘으로 여자를 협박을 합니다. '너와 아비의 집을 불사르겠다'는 것이 여자로 하여금 삼손을 배신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즉 삼손의 아내는 남편인 삼손보다는 자기 혈족을 지키고자 한 열망이 더 강했던 것입니다. 결국 블레셋이 여자를 이용하는 도구로 사용한 것이 혈족이었고, 삼손의 아내는 혈족을 지키기 위해서 남편을 배신했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연 어떤 현실입니까? 삼손의 아내를 신랑을 섬기는 신부라는 입장에서 볼 때 오늘날 신자를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섬기는 신부의 위치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삼손의 아내를 통해서 드러나는 우리의 현실적인 모습은 그리스도를 섬기기보다는 세상의 혈족을 지키기 위해서 오히려 그리스도를 섬기기를 멀리하고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삼손의 아내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삼손이 자기 아내를 대하는 모습입니다.
삼손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울며 매달리는 아내에게 견디지를 못하고 수수께끼의 의미를 알려주게 됩니다. 결국 삼손 역시 자기 부모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답을 아내에게 알려준 것을 통해서 보여준 우리의 모습은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아내에게 마음이 기울어져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의 얘기는 우리에게 '우리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살아가는가?'를 묻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여러분의 혈족조차 뛰어넘어서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아내보다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신랑보다, 하나님보다 자기 혈족과 아내를 사랑함으로 인해서 실패를 가져온 인간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임을 볼 때 사단이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이용하는 도구는 바로 우리 자신과 가까운 관계에 있는 핏줄이며 아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끊어버리기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혈족이며 처자식이라는 관계입니다. 나와 연관이 되어 있는 관계이기 때문에 끊어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그러한 인간관계를 끊기를 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부모 사랑, 형제 사랑, 아내 사랑이 무엇을 바탕으로 한 사랑이어야 하는가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37절에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말씀은 부모를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처자식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그러한 사랑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선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에서 발산되는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되 그 마음은 그리스도에게 치우쳐 있어야 하고, 처자식을 사랑하되 역시 그 마음은 그리스도에게 치우쳐 있어야 하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신자로서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엇엔가 사랑을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이 이미 다른 존재를 향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세상이며 세상 안에서 부모나 처자식이라는 혈족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혈족을 사랑하면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혈족이 요구하는 것과 그리스께서 요구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혈족은 혈족을 위해서 살아줄 것을 원합니다. 즉 부모는 자식에게 부모를 위해서 살아줄 것을 원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자기를 위해 줄 것을 원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자기를 사랑해 줄 것을 원합니다. 어느쪽 하나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갈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기보다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라'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그리스도 때문이라 할지라도 조금이라도 자신에 대해서 소홀해진다면 투덜대면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원망을 해댑니다. 이러한 혈족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필히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외면해야 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혈족에 대한 사랑이 외면되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블레셋은 삼손의 아내에게 아비 집을 불사른다는 말로서 협박을 합니다. 즉 세상에 있는 자신과 연관된 핏줄에 대한 애착심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강한 자가 인간을 어떻게 이용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단이 무엇으로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세상에 있는 것에 대한 애착심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혈족이든 처자식이든 아니면 돈이든 상관없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것에 대한 애착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누구든 자기 것에 대해 애착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것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곧 자신의 상실이기 때문에 자기 것을 보호하고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애착심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보다는 애착심이 더 강하기 때문에 결국 신랑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외면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하고 그리스도를 찾는 것은 결국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이용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삼손의 아내처럼 말입니다.
삼손의 아내는 삼손에게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답을 알아내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이런 모습이 마치 어떤 신자가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하시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과 원망을 쏟아내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줘야 사랑이고 나를 기쁘게 해줘야 사랑인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 곧 그 배경에 강한 자, 사단이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단이란 존재를 의식을 하고 살아간다면 사단이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지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단이 무엇을 위해서 일하겠습니까? 사단이 일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존재를 우리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것을 세움으로서 자연히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증거 됩니다. 그 무엇이 자신에게 득이 되고 편함을 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원하지 않는 것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자기의 유익과 편함을 위해서 그리고 세상 것에 대한 애착심 때문에 말씀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하게 되어진다면 그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증거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너무 강한 애착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세워진 것에 대해서 우리는 애착심을 포기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강한 애착심을 보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는 우선 내 혈족 처자식을 먼저 생각하는 우리들입니다. 자식이 대학을 들어가지 못했을 때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내 자식이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안타까움과 대학에 떨어진 자식에 대한 애착이 우선되어서 나타나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내 것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 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이라는 말을 하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것이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는 우리들의 현재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러한 현실에서 떠나지 못한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18절에 보면 "제 칠 일 해지기 전에 성읍 사람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한지라 삼손이 그들에게 대답하되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갈지 아니하였더면 나의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삼손은 블레셋이 수수께끼의 해답을 알게 된 것은 자기 아내를 통해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수수께끼의 답은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고, 자신이 그 답을 말한 사람은 자기 아내 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의 아내를 이용해서 답을 알아낸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손은 '내 암송아지로 밭갈지 아니하였더면'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삼손은 자신의 아내의 배후에 블레셋이 있었음을 간파합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답이 발설된 뒤입니다. 결국 삼손은 자신의 아내가 울면서 답을 알려달라고 조를 때 그 배후에 누가 있었는가를 발견하지 못한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신자로서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사단의 일입니다. 사단은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가만 두고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십자가에 마음을 두려고 하게 될 때 사단은 신자로 하여금 세상에 애착을 포기하지 않도록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 앞에 혈족이나 처자식 그리고 세상의 많은 것들을 세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신자는 가족들에게 함께 십자가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라고 가르칩니다. 십자가를 믿는 것만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희망이고 멸망에서 벗어나 영생으로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사랑하라고 가르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사단과 싸우는 삶입니다.
누구를 사랑하려거든 여러분의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하지말고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사랑, 즉 인간의 사랑은 애착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 것에 대한 사랑이며 애착입니다. 애착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삶에서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세상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만이 여러분을 생명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세상의 배후에 있는 존재를 잊지 마시고 살아가십시오. 무엇이 사단에 붙들린 모습인가를 생각하시면서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붙들린 자로서의 증거를 보여주는 삶이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길들여진 인생
삿 14:5~20 / 이병권목사
지난 시간에 성인이 된 삼손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삼손의 첫 인상이 어떠했습니까? ‘내 눈에 좋사오니’로 요약됩니다. 삼손은 보는 것으로 결정하고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행동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삼손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삼손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동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야생 동물의 경우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잘 길들여지면 사람에게 유익하며 크게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길들여지지 않으면 오히려 사람에게 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주인이 원하는 것을 하고 주인의 뜻에 따라 행동하고 주인의 말을 잘 듣는 것을 말합니다. 삼손은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아주 큰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잘 길들여지면 주인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삼손은 하나님께 길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자기 멋대로 본능에 따라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살았습니다. 삼손에게 허락된 놀라운 능력은 낭비되었고 가능성은 날아가 버렸습니다. 이러한 삼손의 길들여지지 않은 모습은 우리에게 예시가 되어 줍니다. ‘삼손처럼 저렇게 살면 안 되는구나!’ 하는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삼손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점에서 삼손과는 달리 행동해야 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길들여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본문은 삼손이 원했던 대로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는 장면인데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14장과 15장에 걸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14장과 15장은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고 있고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있었던 일과 결혼 중에 있었던 일, 그리고 결혼 후에 있었던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 세 부분에서 각각 ‘여호와의 영이 임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잠깐 살펴보시면,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14:6)가 나오고,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14:19)가 나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15:14)가 나옵니다. 우리 성경에는 표현이 조금 차이가 나기도 하지만, 원래는 같은 표현입니다. 사사기에서 여호와의 영과 관련해서 삼손에게만 이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했다’는 표현을 기준으로해서 세 사건을 구분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14장의 두 사건을 살펴보고 다음 시간에 15장의 사건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첫 번째 사건입니다(5-9). 삼손은 그의 부모와 함께 두 번에 걸쳐서 딤나로 내려갑니다. 먼저는 블레셋 여인에게 청혼을 하러 딤나로 내려갔고 다음은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 딤나로 내려갑니다. 전에 삼손은 혼자 딤나로 내려갔었지만, 이번에는 부모와 함께 딤나로 내려갑니다. 삼손의 부모는 삼손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결혼을 허락한 것입니다.
삼손은 딤나로 내려가다가 포도원에 이르렀는데 나실인이 포도원에 가는 것은 좋지 않은 일입니다. 나실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나실인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멀리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삼손이 포도원에 가는 것은 유혹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포도원에 갔고 그곳에서 뜻밖에 사자를 만납니다. 그 순간 여호와의 영이 강하게 임했고 삼손은 사자를 맨손으로 찢습니다.
찢었다는 표현은 쪼개서 둘로 나눈다는 의미인데, 삼손이 아무런 도구 없이 맨손으로 사자를 쪼갭니다. 칼도 없이 맨손으로 짐승을 찢는 것은 보통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삼손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할 때마다 나타나는 모습이 이러합니다. 삼손의 육체적인 힘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포도원에 가서 위기를 만난 삼손이 초인적인 힘으로 사자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사자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위태로운 순간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자를 죽이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결과로 삼손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주검을 만지면 그에 따르는 정결예식을 행하는 것이 나실인의 의무였습니다. 나실인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주검을 접하면 그동안 길렀던 머리카락을 자르고 성막을 찾아가 제물을 바치며 8일 동안 정결예식을 치러야 했습니다. 삼손에게 이 일은 참으로 번거롭고 불편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성막을 찾아가서 이런 예식을 치르는 것은 삼손의 방식이 아닌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딤나에 사는 블레셋 여인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일은 그에게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신경 쓰며 고려할 만한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삼손이 어떻게 합니까? 어떠한 다른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혹시 그럼 삼손이 나실인으로서 해야 할 의무나 정결예식을 몰랐던 걸까요? 이어지는 삼손의 행동을 통해서 그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더라”(6) 삼손은 이 사실은 부모에게 알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삼손이 자신의 행동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삼손의 부모가 삼손이 사자를 죽인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것은 이일은 삼손이 혼자서 포도원에 들어갔다가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손은 부모와 함께 포도원을 지나는데 사자가 달려든 것이 아닙니다. 삼손은 부모 몰래 포도원으로 들어가서 사자를 만났던 것입니다. 나실인이 괜히 포도원에 가서 생긴 일입니다. 삼손이 나실인으로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삼손의 이러한 태도는 결혼을 위해 다시 딤나에 갈 때도 반복됩니다. 이 때는 더 분명하게 나실인이 할 수 없는 일을 합니다. “얼마 후에 삼손이 그 여자를 맞이하려고 다시 가다가 돌이켜 그 사자의 주검을 본즉 사자의 몸에 벌 떼와 꿀이 있는지라 손으로 그 꿀을 떠서 걸어가며 먹고 그의 부모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나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떠왔다고는 알리지 아니하였더라”(8-9)
삼손이 사자의 주검을 보는 장면을 원래 본문의 표현대로 하면 ‘그가 보려고 돌이켰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삼손이 전에 자신이 죽인 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의도적으로 보려고 돌이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삼손은 그 주검을 보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주검에서 만들어진 꿀을 손으로 떠서 먹기까지 합니다. 꿀에 정신이 팔려 주검을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 나실인의 규례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손은 주검에 있는 꿀을 떠서 걸어가면서 먹습니다. 삼손의 신중하지 못하고 경솔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한 장면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가 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꿀을 혼자 먹기에는 미안했는지, 그의 부모에게도 꿀을 드려서 먹게 합니다. 삼손은 규례를 어기면서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의 부모까지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14장 시작부터 삼손에 대해서 알 수 있었던 것처럼, 삼손은 자기를 위해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전혀 길들여지지 않았고 그저 본능대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삼손에게 조언을 해줘야 한다면 무슨 말을 해주시겠습니까? 야생마처럼 길들여지지 않은 상태로 날뛰는 삼손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삼손뿐만 아니라 우리도 하나님께 길들여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길들여지기 위해서는 첫째로 말씀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삼손에게 있어서 나실인의 규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율법에 명시된 나실인이 지켜야 할 사항들, 천사가 나타나 전한 하나님의 말씀, 삼손은 어떤 것으로도 자신의 삶을 통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나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따르며 하나님께 길들여져서 그분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말씀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의 통제를 받아 그 말씀 안에서 나의 말과 행동을 통제하고 나의 생각과 나의 삶을 정리할 때, 말씀을 통해서 나의 인생을 정돈할 때, 그 때 우리는 인생을 제대로 즐길 수 있고 참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의 통제를 받을 때, 진짜 자유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아야 할 부분이 있다면, 말씀을 통해서 통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길들여져서 말씀으로 통제받는 인생이 행복한 인생입니다.
하지만 삼손은 말씀으로 통제되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삼손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사사일까요? 이렇게 제멋대로인 삼손이 어떻게 블레셋 사람을 치게 되었을까요? 본문의 두 번째 사건이 그 계기가 됩니다.
두 번째 사건은 결혼 중에 삼손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삼손은 신부 측의 풍습을 따라 딤나에서 잔치를 베풉니다. 그리고 이 결혼 잔치는 일주일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잔치에서는 어떤 일이 있을까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잔치에서 술은 빠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히브리어의 ‘잔치’라는 단어도 ‘마시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그럼 이 잔치에서 삼손은 어떻게 했을까요? 난 나실인이니까 술을 마시면 안된다. 이렇게 생각했을까요? 지금까지 삼손의 모습을 봤을 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삼손은 나실인이라는 자신의 신분과는 상관없이 포도원에 들어갔고, 사자의 주검을 만졌고, 부정하게 된 꿀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나실인이라는 이유로 술을 거절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삼손은 자신의 신분이나 사명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삼손이 심심했는지 블레셋 사람들과 일을 벌입니다. 잔치가 한창일 때 블레셋 사람들이 데려온 30명의 청년들과 내기를 합니다. 삼손이 수수께끼를 내는데 잔치가 벌어지는 일주일 동안의 기한을 두고 내기에서 이긴 사람에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주는 겁니다. 삼손의 수수께끼를 블레셋 사람들이 풀면 삼손이 그들에게 옷을 주고, 못 풀면 그들이 그만큼의 옷을 삼손에게 주기로 합니다.
삼손이 낸 수수께끼입니다.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14) 이 수수께끼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이상한 수수께끼인데, 이 수수께끼를 들은 사람들이 수수께끼 자체를 두고 시비를 걸지 않은 것을 보면 삼손은 괜찮은 문제를 낸 것 같습니다.
삼손의 수수께끼를 블레셋 사람들은 사흘이 지나도록 풀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다른 방법을 씁니다. 삼손의 아내에게 남편을 꾀어서 답을 알아내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와 너의 아버지 집을 불사르겠다고 협박합니다. 명령과 협박을 받은 삼손의 아내는 삼손에게 수수께끼의 답을 알려달라고 울면서 애원을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협박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이 여인의 이중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삼손의 아내라고 기록되었지만, 삼손과 결혼하여 그의 아내가 되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블레셋 사람이었고 블레셋 백성을 위한 사람이었습니다. 삼손에게 솔직하지 못했고 자기 집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녀의 행동은 삼손의 아내라는 호칭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들리게 합니다. 결국 삼손은 이 여인을 혼자 좋아해서 결혼한 것이고, 이 결혼이 얼마나 무모하고 잘못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삼손은 눈물로 애원하며 답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아내의 요구를 처음에는 자신의 부모에게도 알려 주지 않았다며 거절합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여자의 눈물을 버티지는 못합니다. 답을 알려주고 맙니다. 잔치가 끝나가는 마지막 순간에 블레셋 사람들은 수수께끼의 답을 말합니다. 그리고 삼손은 그들이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답을 얻었음을 압니다. 그래서 삼손이 이렇게 말합니다. “일곱째 날 해 지기 전에 성읍 사람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한지라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 갈지 아니하였더라면 내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하니라”(18)
삼손은 아내를 가리켜 암송아지라고 하며 블레셋 사람들이 이 암송아지로 밭을 갈았다고 합니다. 암송아지라는 단어 자체는 평범하지만, 아내에 대해서 이렇게 빗대는 것은 자신을 배신한 것에 대한 분노가 담겨있는 표현입니다. 삼손은 정말 화가 나지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방법이 정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되었든 삼손은 내기에게 지고 말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삼손은 약속대로 베옷과 겉옷 30벌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삼손이 생각한 방법은 다른 사람의 옷을 빼앗는 것입니다. 삼손은 옷을 구하기 위해 아스글론으로 내려가 블레셋 사람 30명을 죽이고 그들의 옷을 빼앗아 옵니다. 아스글론은 딤나에서 30킬로 이상 떨어진 블레셋 성읍입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옷을 주기 위해 블레셋 사람들을 죽인 것입니다. 이것이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죽인 첫 번째 싸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승리가 이스라엘이나 삼손이 속한 단 지파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나 이스라엘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서, 그것도 욕심과 경솔한 행위로 벌어진 상황을 처리하기 위해 블레셋을 공격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이상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삼손이 블레셋 사람을 쳤지만 이스라엘에 구원이 오지는 않습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삼손은 모두 개인적인 이유로 블레셋을 공격합니다.
물론 이러한 삼손의 행동에 여호와의 영이 능력을 주신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삼손의 행동이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삼손의 행동은 사사로서 그의 사명과 관련이 없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러한 삼손의 온전하지 못한 행동을 통해서 그 뜻을 이루어 가고 계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하여서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약속대로 블레셋 사람들에게 옷을 건네준 삼손은 화가 풀리지 않아 아내를 처가에 둔 채 혼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삼손의 장인은 삼손이 다시 딸을 찾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자신의 딸을 결혼에 참석했었던 사람 중 한사람에게 아내로 줍니다.
이렇게 삼손의 국제결혼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딤나 여인의 집안에 엄청난 재앙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기 시작했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져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결혼을 이런 식으로 망쳐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큰 능력을 고작 내기에 진 빚을 갚는데 사용하는 삼손에게 조언을 해줘야 한다면 무슨 말을 해주시겠습니까? 하나님께 길들여진 인생이 되기 위해 삼손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삼손뿐만 아니라 우리도 하나님께 길들여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길들여지기 위해서는 둘째로 자신이 주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그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왜 이러한 능력을 주셨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린 채 내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따르며 하나님께 길들여져서 그분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내가 주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주가 아님을 기억할 때 나에게 있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알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을 내가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기에 나의 힘, 나의 시간, 나의 재능, 나의 물질, 나의 능력, 나의 인생, 나의 생명까지도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주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원래 내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욕심을 이루는 일에 사용하라고 주신 것들이 아닙니다. 나만을 위해서,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쓰라고 주신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로 주신 모든 것들을 주님의 뜻에 따라, 주님이 허락하신 목적에 따라 사용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가 숨을 쉬는 것이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쉽게 내가 주인이 되어서 살아갑니다. 내가 우상이 되어서 나를 섬기며 내 욕심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낭비입니까?
삼손을 생각해보십시오. 삼손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고통 받는 자기 백성들을 구하는 일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나를 통해서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그런 가치 있는 일을 위해 나의 인생이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는 낭비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길들여지지 않은 안타까운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누구보다 큰 가능성과 큰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길들여지지 않아서 그 인생이 말씀에 의해 통제되지 않아서 본능대로 살았습니다. 자신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삶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살았습니다. 자기 욕심을 위해 받은 은혜를 낭비해 버렸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은 하나님께 길들여진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까? 점점 더 시간이 갈수록 나의 인생이 하나님께 길들여지고 있는지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나의 인생이 말씀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지 점검해보십시오. 내가 원하는 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내 욕심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통제를 받으며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님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려고 내 속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안에 그러한 싸움이 있다면 길들여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벌어지는 그 싸움을 계속 하시기 바랍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목자 되시는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그분에게 길들여졌을 때 가장 큰 행복이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만족과 기쁨과 평안은 그 분 안에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찾아 헤매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분의 통제 안에서 그분이 주인 되심을 범사에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길들여진 인생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신 손에 붙들린 길들여진 양이고 싶지 않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