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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공부를 시작한지도 꽤 오랜시간이 되었지만,
나의 일본어 실력은 글쎄,,,,,,,
우리나라와 어순도 같고 발음이 비슷한 단어도 많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외국어 중에 일본어가 가장 쉽다고 하지만,
일본어 또한 외국어라 그런지, 공부를 해도 실력은 늘지는 않고, 어렵게만 느껴진다.
특히, 일본어는 한자를 많이 사용하기에, 일본어를 어렵게 만드는 또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결국, 난 독학의 한계를 드러내며, 한국방송통신대학 일본학과에 입학했다.
그 동안 내가 쓴 공책과 볼펜은 상당한 숫자가 되었다.
단어를 종이에 쓰면서 외우기에, 오른손이 많이 아프다고 할까, 저리다고 할까,
이 어려운 일본어를 난 왜 공부하는 지, 글쎄,,,,,,
이래뵈도 친구들에게도 돈 않쓰기로 유명한 ‘나’인데 말이야,
아까운 시간과 많은 돈을 투자하며, 난 왜 이 어려운 일본어를 공부하는 것일까,
학교 다닐때, 이렇게 공부했으면, 좋은 대학에 진학 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일본어 공부를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전에 다녔던 회사가 일본과 합작회사라 문서라든지 기계와 관련된 용어들이
일본어와 한자가 대분분이었다.
그래서, 어떤일을 처음 시작하거나, 진행할시에 이 일본어는 큰 장벽이 되지만,
이 일본어를 해석하면, 여행가이북같은 안내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초등학교때, 새학년이 시작되면,
매년 담임선생님께서는 학기 초에 부모님의 직업을 묻곤하셨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5살 때 갑자기 돌아가셨기에, 이 질문은 항상 날, 곤욕스럽게 만들었다.
하교 후,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아버지께서는 살아계셨을 때는 어땠는지, 무엇을 하셨는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나의 이런 질문에, 어머니는 아버지께서 살아계셨을 때 사용하시던, 카메라와 시계를 보여주시며,
사우디에 일하려 가셨을 때 사온 물건이라 하셨다.
카메라와 시계의 뒷면에는 'made in japan'이라고 적혀 있었다.
지금의 기억으로, 시계는 약 10년 가까이 고장 한번 나지 않았고,
건전기를 한번도 갈아 넣지 않을 만큼 꽤나 성능이 좋고 값 비싼 물건이었다.
난, 이 시계의 품질과 내구성을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로 단정할 수 밖에 없었다.
마치, 아버지의 영혼이 시계에 있어, 자신의 짧았던 삶을 시계로 한풀이 하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난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일본이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TV와 언론 매체에서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그다지 좋은 나라로 평가를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를 36년간 지배했으며, 옛날부터 우리나라를 끈임없이 괴롭힌 나라,,,,,,,,,,,
난, 일제시대때, 징용갔었던 친 외할아버지께,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물어보았다.
당시, 할아버지께서는 “일본인들은 차별이 없었지, 조선사람, 일본사람 다 똑같이 대했어,
그리고 군대 점오는 상당히 엄격했지”라고 하시며, “東京は いま 六時です”.종이에 적으셨던 할아버지.
상급에 진학하면서, 난, ‘made in japan'이라고 적힌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나와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 가지고 다녔던 워크맨은 거의 ‘made in japan'이었기 때문이었다.
성인이 되어, 난, 우리나라에서 50대 기업에 꼽힐정도로 큰 기업인 모니터를 만드는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주로, 수출을 위주로 하는 회사였다.
물론 일본에도 수출을 했었는데, 일본의 수출품은 다른 나라 수출품에 비해 자재도 고급이었으며,
생산하기도 까다로운 제품이었다.
당시 나의 보직은 포장이었다.
입사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일본 수출품을 생산하였다.
이날에 천개 정도 생산했던 걸로 기억되는데, 이 천개중에 한 개가 문제가 되었다.
문제인즉, 박스에 소비자 불편사항 엽서가 담긴 봉투를 붙이지 않아서, 군산에서 출항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날, 책임자에게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정말, 일본 수출품은 상당히 까다로워서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 제품이었다.
난, 회사에 다니며, 이 곳은 분명 무슨 문제가 있는데, 이 문제가 무엇지는,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었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나면
생산에만 치우친 나머지, 회사가 많이 지겨분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고,
수출을 한 제품이 다시 회사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입사한지 약 1년이 되었을 때, 나의 첫 직장은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친구의 소개로 대기업의 협력사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대기업이라 그런지, 작업장은 상당히 깨끗했다.
신입사원 교육시에 TPM 교육을 받았을 때, 내가 생각했었던 첫 직장의 문제점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다.
TPM은 생산 전원 참가의 활동으로 1978년 처음 일본에서 시작되어 생산 전반에 관한 활동이었다.
TPM은 어떤한 큰 문제가 발생되기 전에 이 문제의 잠재결함(열화불합리, 발생원, 곤란개소, 의문점, 정리정돈)을
사전에 판단하여, 미리 차단하는 것을 말한다.
첫 직장 근무시에 이 TPM이 있었으면 작업환경이 많이 깨끗했으리라,,,
그리고, 이 곳에서 6sigma라는 단어를 접했을때, 난 지금까지 내가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로 밖에 단정지을 수 없었던,
아버지께서 사우디에서 사오 신, 시계의 비밀을 알 수 있었다.
6sigma에 대해 많이 궁금해 하던 중, 마침 휴게실에 6sigma에 관한 책이 있어 읽어보았다.
6sigma는 생산 과정에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원리를 적용하여 생산 과정을 좀더 세분화 시킴으로써 불량의 발생원인과
발생 수량을 줄이고자 만든 품질의 혁명이다. 라고 난 생각하게 되었다.
6sigma의 탄생하게 된 계기는 책의 내묭을 빌려 설명하자면,
세계 2차대전 이후 미국과 통신기기를 비교한 일본은 일제의 통신기기가 품질이 나쁘고 기기간 품질의 차이도 크다는 것을 알고서는
전기통신 공업계의 새로운 품질관리 시스템을 도입하게 되었다.
1946년에 공업표시 조사회를 설치하고 공업표준화법을 만들어 1949년에 시행하는 등의 노력하는
이런 풍토에 일본인 품질관리학자
이시카와(石川)는 품질관리 분임조(Quality Control Circle)활동을 할 것을 주장했다.
품질관리 분임조는 같은 부서의 작업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작업의 효율성을 개선하는 모임인데 이로 인해 일본의 품질관리
운동은 본격화되었고 전사적 품질관리(Total Quality Control)운동도 가능하게 되었다.
일본의 이런 노력 덕분에 1960년대 말이 되자 일본 제품은 국제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으며 1970년대에 들어서서는
여러부분에서 최고의 품질로 인정받게 되었다.
일본 제품은 특히 미국시장을 급격히 잠식해 들어가 미국의 기업가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는데 제 2차 세계대전을 전후에 미국제라는 브랜드 이미지로 수십 년 동안 전 세계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해 온 미국의 기업가들이 안방까지 내 줘야 할 지경이 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국의 선구적인 기업가들은 왜 일본에게 시장을 내 주었는가를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바로 제품의 품질에 있을 발견하고 자사 제품의 질을 높이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찾는데 총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러한 시점에 모토롤라의 정부용 전자 기기 사업부에는 마이클 해리(Mikel Harry)라는 사람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회장의 주도로 진행되고 있는 품질개선 운동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서 회기적으로 품질을 개선할 수 있는 색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통계지식을 활용해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동료인 리처드 슈뢰더와 함께 연구를 거듭한 끝에 1987년에 6시그마라는 새로운 품질개선 기법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6시그마는 6시그마경영이라는 새로운 경영기법을 만들어 냈는데 이는 6시그마가 단순히 생산현장의 품질개선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기업의 모든 활동에 이르기까지 품질개선이 확대 적용되어 자연히 경영의 방식을 바꿔 버렸다.
6sigma를 좀더 쉽게 설명하자면 100만개의 생산품중에 불량을 3~4로 맞춘다는 것이다.
불량의 수치를 3~4로 맞추기 위해서는 기업에서는 여러 가지의 활동이 이루어져야 하는 데, TPM이 없이는 제대로 된 6sigma을 실행할 수 없다.
TPM을 함으로써 생산과정에서 LOSS을 줄이고, 정리정돈, 청결화 함으로써, 불량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TPM과 6sigma의 공통점은 모두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져 시작되었으며,
나의, 첫 직장에서의 문제점들을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를 보면
전통 무도인 사무라이를 유지하고 싶지만, 세계의 여러 열광들을 대적하기 위해서
신식 군대를 받아들여야 하는 일본 천왕의 고민을 엿 볼 수 있다.
이런, 천왕의 고민이,
지금은 아무도 이 들을 건들일 수 없을 만큼의 상상을 초월하는 최첨단 무기를 많이 보유하게 만들어 냈을 것이다.
초음속 전투기라든지, 미사일, 헬기, 함정등,,,,,
TPM과 6sigma을 만들어 낸 이들이기에
난, 일본인들의 습성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일본인들은 올바르다고 생각되면, 그것을 과감히 받아들인다. 즉 모방을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모방하지는 않는다.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면 수정을 하며, 장기적으로 생각하는 안목이 있다.
또한, 남을 많이 배려한다.
그리고, 천왕이 직접 TV에 나와 외국 담배를 피우는 광고를 할 정도로 그들은
자국 상품을 믿는 잘 뭉치는 민족이다.
TPM과 6sigma을 만들어 낸 이 들은,
내가 불가사의로 단정지었던 10년 가까이 고장 한번 나지 않았고, 건전기를 한번도 갈아않아도 되는 시계를 만들어냈으며,
세계 최초로 고속열차 신칸센을 만들어 냈다.
신칸센은 1964년에 개통된 이 후로, 며칠 전, 지진으로 단 한 차례 탈선한 것 외에는
무 사고를 자랑할 만큼 안전의 신화라 불리며 세계 최고의 안전과 1999년 4월에는 유인차량으로 시험주행 최고 속도 552km/h
세계기록 수립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들의 기술력이 세계 최고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대기업이 휴대폰으로 벌어들인 돈 45%를 일본에 지불했다는 뉴스까지 만들어냈다.
얼마전, 우리나라에서 세계 최초 60나노 8기가 반도체 시대를 개막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난 지난 번에 읽었던, 박홍국의 ‘일본이라는 아편’의 책이 생각났다.
이 책의 내용을 인용하자면,
가마우지라는 물새가 있다. ‘목이 길고 부리 끝이 갈고랑이처럼 굽어 있으며 발가락 사이에 물갈퀴가 있다. 물속으로 들어가 물고기를 잡아먹는다’라고 사전에는 적혀 있다.
일본에서는 이 새를 ‘우’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라는 말 속에는 사전 이상의 뜻이 들어있다. 옛날부터 일본 사람들은 이 가마우지를 이용하여 물고기를 잡았기 때문이다.
목을 끈으로 조여맨 다음 가마우지들을 강물 위에 띄어놓는다. 그러면 가마우지들은 열심히 물속으로 들어가 물고기를 잡아먹지만 뱃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모두 목에 걸려버린다.
물론, 이 목에 걸린 물고기들은 그것을 치는 사람들의 몫이 된다. 지금도 ‘기후’라 는 곳에서는 여름만 되면 가마우지의 물고기 잡이로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언젠가 일본의 저명한 평론가 한 사람이 “한국의 붕괴”라는 글에서 가마우지 경제이론을 들고 나왔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한국은 일본의 가마우지라는 것이다. 수출이 늘면 늘수록 일본에서의 수입이 그보다 더 는다. 한국의 수출제품 속에서는 일본의 자본재 부품 그리고 반제품들이 그 알맹이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한국인들이 열심히 일을하고 수출을 해도 자기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없다. 일본에 도로 뱉어놓아야만 한다.
지금 엔고로 한국 수출이 호황을 느린다고 하면서도 기업이 이맛살을 펴지 못하는 까닭도 우리가 목졸린 가마우지 신세인 까닭이다. 반도체 생산에서 한국은 미국, 일본의 뒤를 잇고 있다고 자랑하지만 그 제조 라인은 거의 100퍼센트가 외국제이다. 그래서 일본의 반도체 설비공장에 불이 나면 우리의 생산 라인도 끊어지고 만다. 지금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반도체 산업이 실제로 그런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일본의 자본재의 수입의존도가 3.6퍼센트인데 비해서 한국은 36.7퍼센트나 된다. 가마우지의 목을 졸라매고 있는 이 끈을 푸는 길은 기술혁신과 설비투자밖에는 없다. 그러나 기술이전을 하라는 우리의 주장에 대해 일본 기업들은 한국의 6만 3천 기업이 한 해동안 연구개발비로 투자하고 있는 총액 1,722억원(89년)은 자기네 대기업 한 회사의 투자액과 맞먹는 수준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그에 비하여 한국 기업이 한해 지불하고 있는 교제비 등은 연구비보다 여섯 배나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기 노력부터 하라는 이야기다.
결국 이 치욕적인 산업문화의 결함을 극복하는 길은 정치지향적 한국 풍토를 기술지향적 문화분위기로 바꿔 나가는 수 밖에 없다.
건실한 기업문화가 뿌리를 내릴 때만이 멸시받던 가마우지는 백조가 된다. (동아일보 93년 7월 23일자)
난, 이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국산 샤프연필보다 3배 가량 비싼 일제 샤프연필을 쌌다.
언제부터인가, 이상하게 난 ‘made in japan’이란 글자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난, 심각한 ‘made in japan’제 아편 중독자이다.
내가 지금 일본어를 공부하는 이유,,,,,,,,,
그것은 그들이 만들어낸 , 또 다른 한 차원 업그레이드된
‘made in japan’을 기다리는 기대감에서 일까,,,,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로 꼽혔던 박정희 대통령,
요즘엔 친일파라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다.
일제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기에, 어쩔 수 없었을 거라 생각이 든다.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나라의 경제를 이 만큼 성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내 생각에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으로부터 경제 성장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경제학 박사가 아닌, 군인 출신인 사람이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기란 어려우니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배고픔의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박정희, 그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어도, 우리는 아마, 미국, 일본 이 들 나라만큼 아니,
이 들 보다 더 강대국이 됐을 지도 모른다.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관이 무산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많은 아쉬움이 많았다.
난, 다시, 범 국가적인 차원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관 설립이 추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고 있는 구미가 아닌,
우리나라의 수도인 서울에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관이 설립되었으면 한다.
우리나라 국민의 가슴속에 많은 외국인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
나의 첫 직장이 문을 닫을 무렵,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한국 제품 해외시장에서 사라진지 오래돼”,,,,,,,,
내용인즉, 최첨단 제품은 미국과 일본이 만들어 낸 것 뿐이고, TV나 냉장고 같은 생활가전은 값 싼 중국제품 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 시라도 빨리, 박정희 대통령이 약소국이었던 우리 대한민국을 위해
이휘소 박사와 함께 추진한 그런 백신을 만들어내야 한다.
우리 다음세대, 아니 그 다음 세대에라도 'made in korea'를 물려줘야 한다.
시간이 없다.
역사는 반복된다. 지금 우리의 시국이 옛날의 그때와 전혀 다르지 않다.
'made in korea'를 다시 되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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