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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제4장 유식사상 6. 삼성중도설
법상종의 교리가 불교의 근본원리인 중도사상에 계합됨을 주장하는 또 하나의 이론으로 삼성설(三性說)이 있습니다. 삼성이란 일체 제법을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의 세 가지로 구분한 것으로, 이것에 바탕하여 법상종에서는 삼성각성중도(三性各性中道)나 삼성대망중도(三性待望中道) 등을 제창하였습니다. 이 삼성설에는 유식파에서 설하는 것과 화엄종에서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삼성설은 원래 해심밀경이나 섭대승론 등 유식 계통의 경론에서 설해진 것이지만, 중국의화엄종에서는 이를 수용한 뒤 약간 보완 발전하여 화엄일승 교리의 기본 이론으로 수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삼성설을 설함에 있어 여기에서는 편의상 화엄종의 현수 법장(賢首法藏)스님이 지은 화엄일승교의분제장(華嚴一乘敎義分齊章)에 기록되어 있는 삼성설을 인용하여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 까닭은 유식 계통의 논서에 있는 삼성설은 화엄종의 저술에서 말하는 삼성설만큼 원융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현수스님이 설하는 삼성설은 유식종의 삼성설을 보다 융통하게 발전시킨 것으로 본래 유식종의 삼성설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원융한 중도의 사상을 밝히는 데 있어서는 이 설이 보다 더 적합하므로 이것을 채택한 것입니다.
삼성에 각각 두 가지 뜻이 있다. 진여 가운데 두 가지 뜻은 첫째는 불변의요, 둘째는 수연의며, 의타의 두 가지 뜻은 첫째는 사유의요, 둘째는 무성의며, 소집 가운데 두 가지 뜻은 첫째는 정유의요, 둘째는 이무의니라.
三性에 各有二義하니 眞中二義者는 一不變義二隨緣義요 依他二義者는 一似有義二無性義요 所執中二義者는 一情有義二理無義니라. [大正藏 45卷, p. 499上]
삼성이란 원성실성(圓成實性), 의타기성(依他起性),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으로 일체 제법의 성질을 세 가지로 분류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삼성의 각각은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합니다. 원성실성은 깨달음의 세계를 나타내는 말로 진여(眞如)라고도 합니다. 여기에서 원문에 ‘진(眞)’이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이 ‘원성실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원성실성은 현장스님의 번역이며, 진제스님은 ‘진실성’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원성실성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변하지 않는다는 뜻인 불변의(不變義)와 연에 따라 변한다는 뜻인 수연의(隨緣義)가 그것입니다. 또 원성실성은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도 표현하는데 진공은 불변의에 해당하고 묘유는 수연의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불변수연이나 진공묘유는 결과적으로 같은 의미가 됩니다. 의타기성은 만법이 연기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도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임시로 존재한다는 뜻인 사유의(似有義)와 실성이 없다는 뜻인 무성의(無性義)가 그것입니다. 일체 만법은 연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성이 없는 것입니다. 변계소집성은 집착과 미망의 세계를 가리키며 여기에도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망정이 있다는 뜻인 정유의(情有義)와 참된 도리가 없다는 뜻인 이무의(理無義)가 그것입니다. 미혹의 망정은 있지만 진실한 이치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 삼성의 이치를 섭대승론(攝大乘論)에서는 뱀[巳]과 새끼줄[繩]과 삼[麻]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삼으로 새끼줄을 만들어 길바닥에 놓아두었는데 어둠침침할 때에 어떤 사람이 이것을 보고 뱀으로 잘못 알아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새끼줄을 착각하여 뱀으로 분별하는 망견을 변계소집성이라고 합니다. 깜짝 놀란 후 자세히 보니 뱀이 아니고 새끼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새끼줄이라는 것도 본래 삼으로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새끼줄을 풀어 보면 새끼줄이 아닙니다. 이 새끼줄은 풀어서 옷도 만들 수 있고 여러 가지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실성(實性)이 없는 것입니다. 즉 새끼줄은 임시로 삼을 꼬아서 만든 것이므로 새끼줄이 있는 듯하지만 분해해서 보면 새끼줄은 없고 삼뿐입니다. 이것을 유식에서는 환(幻)처럼 거짓으로 있는 것이다, 즉 환각상태에서 보는 꽃[幻花]과 같이 거짓으로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새끼줄은 바로 의타기성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나 삼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그대로 있습니다. 그것으로 새끼줄을 만들든 다른 무엇을 만들든 간에 삼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은 원성실성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성실성은 진공묘유로서 그 자성이 공하면서 또한 묘유이기도 합니다. 삼을 진공으로 비유하면 그 삼으로 새끼줄이나 베를 짜는 용(用)은 곧 묘유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원성실성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삼성의 각각에 대한 설명을 들어 보겠습니다.
진여의 불변과 의타의 무성과 소집의 이무, 이 세 가지 뜻으로 말미암아 삼성이 한결같이 동일하여 다름이 없다. 이것은 곧 지말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항상 근본이 되는 것이니 경에 이르기를 중생이 곧 열반이므로 다시 멸할 것이 없다고 하느니라.
由眞中不變과 依他無性과 所執理無 由此三義故로 三性이 一際하여 同無異也라 此則不壞末而常本也니 經云衆生이 即涅槃일새 不復更滅也라 하니라.
원성실성 가운데 자성이 변하지 않는다는 불변(不變)과, 의타기성의 참된 성품이 없다는 무성(無性)과, 변계소집성의 이치가 없다는 이무(理無)는 모두 다 무변(無邊)으로서 서로 통해 있습니다. 즉 불변도 공이고 무성(無性)도 공이며 이무(理無)도 공이기 때문에 삼성의 성질이 한 가지로 통해 있어 결국은 그 의미가 서로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이와 같이 지말을 파괴하지 않고도 항상 근본을 이루므로 아무리 자성이 인연을 따르더라도 불변 그대로인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경전에서 중생 그대로가 열반이라고 하였으니 그 뜻은 중생 외에 별도로 열반이나 부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을 부수어서 열반을 만들고 부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본성을 바로 알면 그것이 바로 부처이고 열반인 것입니다. 이것은 삼성에서 불변과 무성과 이무의 뜻이 서로 통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또 진여의 수연과 의타의 사유와 소집의 정유, 이 세 가지 뜻으로 말미암아 또한 (삼성이) 다름이 없다. 이것은 곧 근본을 움직이지 않으면서 항상 지말이 되는 것이니, 경에 이르기를 법신이 오도(五道)에 유전함을 중생이라고 하기 때문이니라.
又約眞如隨緣과 依他似有와 所執情有一由此三義로 亦無異也라 此則不動本而常末也니 經云法身이 流轉五道를 名衆生故也라 하니라.
진여 즉 원성실성의 연에 따른다는 수연(隨緣)과, 의타기성의 임시로 존재한다는 사유(似有)와, 변계소집성의 망정이 있다는 정유(情有)는 모두 다 유변(有邊)으로서 서로 통해 있어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근본을 움직이지 않고도 항상 지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과는 반대로 앞에서는 지말을 파괴하지 않고 근본이 된다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근본을 움직이지 않고 지말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법신(法身)이 5도(五道), 즉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천상에 유전하는 것이 중생이라고 하였으니 법신을 떠나서 중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는 지말을 허물지 않으면서 항상 근본이 된다 하여 중생 이대로가 열반이고 부처라 하였고 여기서는 그와 반대로 근본을 움직이지 않으면서 항상 지말이 된다 하여 부처 이대로가 중생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그 표현에 역순의 차이는 있을 뿐 그 의미는 동일한 것입니다.
곧 이 세 가지 뜻과 앞의 세 가지 뜻으로 말미암아 이것은 하나이지 않는 부문이다. 그러므로 진여는 망정의 지말을 갖추고 망정은 진여의 근원을 꿰뚫어 성(性)과 상(相)이 융통하여 장애와 막힘이 없느니라.
即由此三義與前三義하여 是不一門也라 是故로 眞該妄末하고 妄徹眞源하여 性相이 融通하여 無障無碍하니라.
이와 같이 앞의 세 가지 뜻, 즉 불변, 무성, 이무와 나중의 세 가지 뜻, 즉 수연, 사유, 정유는 표현을 달리하기 때문에 하나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그 두 갈래의 세 가지의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진원(眞源)인 본질과 망말(妄末)인 현상이 서로 다른 것이기는 하지만 서로 갖추고 철저하게 상통해 있다고 하는 것이며 실상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원과 망말이 서로 갖추고 성(性)과 상(相)은 융통하여 장애가 없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묻기를, 삼성에 각각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어떻게 서로 다르지 아니한가? 답하기를, 이 두 가지 뜻이 다른 성품이 없는 까닭이니라. 어째서 다름이 없는가? 답, 또한 원성과 같은 것은 비록 다시 인연을 따라 더러움[染]과 깨끗함[淨]을 이루지만 항상 자성의 청정함을 잃지 않으니, 다만 자성의 청정함을 잃지 않으므로 능히 인연을 따라 더러움과 깨끗함을 이루느니라.
問 如何三性이 各有二義하니 不相違耶아 答 以此二義無異性故라 何者無異오 且如圓成은 雖復隨緣하여 成於染淨이나 而恒不失自性淸淨하니 祇由不失自性淸淨故로 能隨緣成染淨也니라.
또한 진여인 원성실성은 인연에 따라서 염법(染法)이나 정법(淨法)을 이루지만 항상 그 자성의 청정함을 잃지 않으며, 진여의 그러한 성질 때문에 사실은 인연을 따라 염법이나 정법이 되는 것도 가능한 것입니다. 자성이 청정함을 잃는다면 인연을 따라서 염법이나 정법이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에 대한 적절한 비유로 금과 가락지의 비유가 있습니다. 즉 금으로 가락지를 만들지만 가락지를 제외하고 금이 없고 금을 제외하고 가락지가 없으니 가락지 그대로가 금이고 금 그대로가 가락지입니다. 금으로 가락지 외에 숟가락이나 젓가락 등을 만들 수 있지만 어떤 것을 만들든지 간에 금의 자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작용하는 상태는 달라도 그 밑바탕을 이루는 본성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불변과 수연의 관계도 이와 같아 불변이 곧 수연이고 수연이 곧 불변입니다.
마치 밝은 거울에 더러움과 깨끗함이 나타나듯이 비록 더러움과 깨끗함을 나타내나 항상 거울의 밝고 깨끗함을 잃지 않으며, 다만 거울의 밝고 깨끗함을 잃지 않으므로 바야흐로 능히 더러움과 깨끗함의 상을 나타내느니라. 더러움과 깨끗함을 나타냄으로써 거울의 밝고 깨끗함을 알며, 거울의 밝고 깨끗함으로써 더러움과 깨끗함을 드러냄을 아니 그런 까닭에 두 가지 뜻이 오직 하나의 성품이니라. 비록 깨끗한 법을 나타내어도 거울의 밝음은 증장하지 않으며 비록 더러운 법을 나타내어도 거울의 밝음을 더럽히는 것은 아니니, 바로 염오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로 말미암아 도리어 거울의 밝고 깨끗함이 드러나는 것이니라. 마땅히 알라. 진여 도리도 이러하여 바로 자성청정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더러움과 깨끗함을 이룰 뿐만 아니라 또한 이에 더러움과 깨끗함을 이룸으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자성청정을 나타낸다. 바로 더러움과 깨끗함을 무너뜨리지 않고서 자성청정을 드러낼 뿐 아니라 또한 이에 자성청정으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더러움과 깨끗함을 이루느니라. 그러므로 두 가지 뜻이 전부 서로 거두어서 하나의 성품이며 둘이 아니니 어찌 서로 다르겠는가.
猶如明鏡에 現於染淨하니 雖現染淨而恒不失鏡之明淨이요 衹由不失鏡明淨故로 方能現染淨之相이라 以現染淨일새 知鏡明淨이요 以鏡明淨일새 知現染淨이니 是故로 二義는 唯是一性이니라 雖現淨法이라도 不增鏡明이요 雖現染法이라도 不汚鏡明이니 非直不汚요 亦乃由此하여 反顯鏡之明淨이라 當知하라 眞如道理도 亦爾하여 非直不動性淨하고 成於染淨이요 亦乃由成染淨하여 方顯性淨하며 非直不壞染淨하고 明於性淨이요 亦乃由性淨故로 方成染淨하니라 是故로 二義가 全體相收하여 一性無二니 豈相違耶아.
이것은 원성실성의 성질을 비유하여 밝은 거울에 여러 가지 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즉 밝은 거울은 불변의 진공에 비유한 것이고 더러움과 깨끗함의 갖가지 상은 수연의 묘유에 비유한 것입니다. 밝은 거울이 비록 더러움과 깨끗함을 나타낸다고 해도 거울은 항상 자신의 밝고 깨끗함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깨끗한 것을 비춘다고 해서 거울이 더 깨끗해지는 것도 아니며 더러운 것을 비춘다고 해서 거울이 더 더럽게 되는 것도 아니라서 더러움과 깨끗함에 상관없이 거울은 자신의 성질을 변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비출 뿐입니다. 여기에서 알아야 할 하나의 분명한 사실은 만약에 거울이 탁하다면 어떤 물건도 비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곧 거울에 사물이 비춰질 수 있는 까닭은 거울이 깨끗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불변진공과 수연묘유에 비유할 경우에는 불변진공이기 때문에 수연묘유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수연을 하더라도 불변이 파괴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불변진공이기 때문에 수연이 되고 묘유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거울에 흑백(黑白)과 염정(染淨) 등이 분명히 나타나기 때문에 거울이 깨끗하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수연하기 때문에 진여가 불변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성실성의 수연과 불변은 둘이 아니고 진공과 묘유는 둘이 아닙니다. 거울이 밝지 않으면 더러움과 깨끗함의 상들은 나타나지 않듯이 자성이 청정하지 않으면 수연은 성립할 수가 없으므로 그 둘은 서로 불이(不二)의 관계에서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울이 비록 더러움과 깨끗함의 상을 나타내어도 그 거울의 밝음을 덜하고 더할 수 없듯이 본래의 자성청정은 중생이라고 해도 손상이 없고 부처라 해도 더 증가하지 않습니다. 즉 중생이라고 하여 본래 청정한 자성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며 부처가 되었다고 해서 본래 청정한 자성이 더 깨끗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청정한 자성은 더러워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서 오히려 선과 악 또는 아름다움과 추함 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원성실성의 도리도 이와 같아서 자성청정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더럽고 깨끗한 법을 이루는 것이며, 또한 더럽고 깨끗한 법을 이룸으로 말미암아 자성청정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변이 수연하고 또 수연이 불변하여 이 두 가지 뜻이 서로 거두어들여서 한 성품이며 둘이 아니니 서로 다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의타기성 중에 비록 다시 인연의 사유(似有)가 나타나나 그러나 이 사유는 반드시 자성이 없으니, 모든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은 모두 자성이 없기 때문이니라. 만약 자성이 없지 않으면 연(緣)을 빌지 않으며, 연을 빌지 않으므로 곧 사유(似有)가 아니다. 사유(似有)가 만약에 성립한다면 반드시 뭇 연을 따르기 때문이며 반드시 자성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자성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사유(似有)를 이룰 수 있으며 사유(似有)를 이룸으로 말미암아 자성이 없느니라.
依他中에 雖復因緣似有顯現이나 然이나 此似有必無自性이니 以諸緣生이 皆無自性故라 若非無性이면 即不藉緣故요 不籍緣故로 即非似有라 似有若成이면 必從衆緣이니 故로 必無自性이니라 是故로 由無自性하여 得成似有요 由成似有하여 是故無性이니라.
의타기성이란 일체 연기법을 말합니다. 의타기성은 비록 인연을 따라서 성립된 사유(似有)가 나타나지만 그 사유에는 자성이 없으며 자성이 없기 때문에 인연 따라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 자성이 있어서 실제 있는 것[實有]이 된다면 이는 완전히 고정적인 존재가 되어 버려서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새끼줄의 비유에서 보듯이 만약에 새끼줄이 새끼줄 그대로 영원히 분해할 수 없는 고정된 것이라면 거기에는 어떠한 연기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새끼줄을 분해하여 다른 물건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새끼줄에 자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자성이 없는 무성이 아니면 연기가 성립하지 못하며, 연기가 성립하지 못한다면 사유(似有)가 아닌 실유(實有)입니다. 그러므로 사유가 성립한다면 이는 반드시 여러 인연을 따라 생기는 것이며 그 때문에 또한 자성이 없는 무성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말했다. ‘일체법이 인연을 따라서 생기는 것을 보니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은 곧 자성이 없음이요, 곧 자성이 없으므로 곧 필경공(畢竟空)이며, 필경공이란 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한다.’ 이것은 곧 인연으로 생김으로 말미암아 곧 자성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니라.
故로 智論에 云, 觀一切法從緣生하니 從緣生은 即無自性이요 即無自性故로 即畢竟空이요 畢竟空者는 是名般若波羅蜜이라 하니 此即由緣生故 即顯無性也니라.
일체법은 인연을 따라서 생겨나고 소멸합니다. 이렇게 인연 따라 생겼다가 없어졌다 하는 것은 자성이 없다는 뜻이며, 자성이 없기 때문에 필경에 공인 것이며, 이 필경공을 반야바라밀이라고 부릅니다. 만약에 자성이 없는 것이 아니고 공이 아니라면 절대로 연기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 말은 곧 연기가 무자성(無自性)이고 공이며 무자성이 바로 연기라는 뜻입니다. 즉 사유(似有)가 무성이며 무성이 사유이므로 사유와 무성이 두 뜻이 아닌 것입니다.
중론(中論)에서 말하기를 공의 뜻이 있음으로써 일체법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니, 이것은 곧 자성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곧 연기하여 생김을 밝히는 것이니라.
中論에 云 以有空義로 一切法得成이라 하니 此即由無性故로 即明緣生也니라.
중론에서 공의 뜻이 있기 때문에 일체법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는데, 이는 바로 자성이 없으므로 연기하여 생김을 밝히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연기하므로 무성이라고 했지만 여기에서는 그 반대로 무성이기 때문에 연기한다는 것이니 실로 연기와 무성이 동일한 것임을 밝히고자 하는 것입니다.
열반경(涅槃經)에서 말하기를 인연이기 때문에 유(有)이며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이라 하니, 이는 곧 자성 없음이 인연이요 인연이 곧 자성 없음이니 이것은 둘이 아닌 법문이기 때문이다. 두 뜻의 성품이 서로 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전부 서로 거두어서 마침내 둘이 아니니라.
涅槃經에 云 因緣故有요 無性故空이라 하니 此即無性即因緣이요 因緣即無性이니 是不二法門故也라 非直二義性不相違요 亦乃全体相收하야 畢境無二也니라.
열반경에서 인연이기 때문에 유(有)며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空)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무성(無性)이 인연이며 인연이 무성이라서 둘이 아니라는 불이법문(不二法門)입니다. 이와 같이 의타기성에 두 가지 뜻, 즉 사유와 무성이 있다고 했는데, 이 두 가지 뜻은 이상의 여러 경론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같은 것이며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전체가 서로 거두어들여서 인연이 곧 무성이고 무성이 곧 인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성실성의 불변과 수연이 둘이 아니듯이, 의타기성의 사유와 무성도 둘이 아닙니다.
변계소집성 가운데에 비록 다시 망정을 당하여 집착하여 있음[有]을 나타낸다고 하지만, 도리에 있어서는 필경 이는 없는 것이니 없는 곳에서 공연히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니라. 마치 나무등걸에 공연히 귀신이 있다고 헤아리는 것과 같으나 필경 귀신은 나무에는 없느니라. 그 나무에 귀신이 없는 것이 아니라면 공연히 귀신이 있다고 헤아린다고 할 수 없으니, 나무에 귀신이 있음은 헤아림에 말미암지 않기 때문이니라. 이제 이미 공연한 헤아림이므로 분명히 이치가 없음을 알고, 이치가 없음으로 말미암아 공연히 헤아림을 이루며, 공연히 헤아림을 이루기 때문에 바야흐로 이치가 없음을 아느니라. 그러므로 성품이 둘이 아니며 오직 하나의 성품이다. 마땅히 알라. 변계소집의 도리도 또한 이러하니라.
所執性中에 雖復當情하여 稱執現有나 然於道理에 畢境是無니 以於無處에 橫計有故라 如於木杭에 橫計有鬼나 然鬼於木에 畢境是無라 如於其木에 鬼不無者면 即不得名橫計有鬼니 以於木有요 非有計故라 今旣橫計일새 明知理無요 由理無故로 得成橫計며 得成橫計故로 方知理無라 是故無二性一性也라 當知所執道理도 亦爾니라.
변계소집성의 망정 중에서 정에 집착하여 무엇인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여 놀랐을 때 실은 뱀이 없는데 저 혼자 착각하여 놀란 것과 같습니다. 뱀이라고 생각한 그것은 뱀이 아니라 필경에는 없는 것을 공연히 있다고 생각한 것이기 때문에 착각으로 헤아린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마치 본래부터 귀신이 없는데 나무등걸이 길가에 서 있는 것을 잘못 보고 거기에 귀신이 있다고 공연히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원래는 귀신이 붙어 있지 않은 나무에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귀신이 본래 거기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착각에 불과합니다. 만약에 거기에 정말로 귀신이 있다면 그것은 잘못 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착각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착각이라고 하는 것이며, 잘못된 착각이라는 것도 결국은 이치에 있어 본래 없는 것[理無]이므로 이무(理無)와 착각이라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일체 만법을 착각하여 자아[我]나 법(法), 또는 유(有)나 무(無)라고 헤아림을 비유한 것으로서, 결국 참다운 도리가 없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치에서 볼 때는 귀신이 없다고 말할 수 있지만 망정(妄情) 즉 함부로 헤아린 것에서 볼 때는 있다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은 없음이 있음이요 있음이 없음이 되어 유, 무가 둘이 아닌 것입니다.
삼성이 한결같아 하나를 들면 전체가 거두어지며 진여와 망정이 서로 원융하여 성품에 장애가 없느니라.
三性一際하여 擧一全收하며 眞妄互融하여 性無障碍니라. [大正藏 45卷, p. 501下]
원성실성의 불변과 수연, 의타기성의 사유와 무성, 변계소집성의 정유와 이무인 삼성은 가지런하여 하나로 통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를 들면 전체가 다 따라와서 진여와 망정이 서로 무애하여 장애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결국에는 유(有)가 무(無)이고 무(無)가 유(有)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유가 유가 아니고 무가 무가 아닌, 다시 말하면 비유비무(非有非無)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중도의 뜻이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원성실성의 두 성질인 불변과 수연에서, 불변이란 유가 아니며[非有] 수연이란 현실적으로 있으므로 무가 아니기[非無] 때문에, 원성실성은 비유비무로서 중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진공묘유라고 표현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진공은 비유고 묘유는 비무이므로 비유비무의 중도가 성립합니다. 그러므로 원성실성에서 불변수연이라고 하든 진공묘유라고 하든 이것은 결국 비유비무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성실성 하나만으로도 중도가 성립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의타기성의 사유(似有)와 무성(無性)에서, 사유는 비무가 되고 무성은 비유가 되는데 이를 이유정무(理有情無)라고 표현합니다. 이유(理有)란 비무(非無)가 되고 정무란 비유(非有)가 되기 때문에 비유비무가 되어 의타기성에 있어서도 중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변계소집성의 정유(情有)와 이무(理無)에서, 정유는 비무가 되고 이무는 비유가 되므로 비유비무로서 중도가 성립됩니다. 이와 같이 하여 삼성이 각각 중도를 이루는데, 이러한 중도를 삼성각성중도(三性各性中道)라고 합니다.
또 유식학에서는 변계소집성은 망정뿐이므로 유가 아니고, 의타기성은 임시로 있는 것이고 원성실성은 실로 있는 것이므로 이 둘은 무가 아니라서 결국 삼성이 전체적으로 비유비무로서 중도가 된다고도 합니다. 이렇게 삼성이 서로 합하여 바라보면서 중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삼성대망중도(三性對望中道)라고 이름합니다. 이렇게 삼성이 각각 중도를 이루든 또는 대망중도를 이루든 간에, 삼성설은 전체적인 입장에서 보면 중도를 벗어나서는 성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불교의 최고원리가 중도인데 유식법상종의 중요한 원리인 삼성대망중도나 삼성각성중도가 불교의 중도사상에 계합하므로 유식법상종이 곧 중도종(中道宗)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러한 주장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서로가 상즉(相即)하여 유가 곧 무이고 무가 곧 유라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화엄종에서 말하는 사사무애(事事無碍)와 같은 일즉일체 일체즉일의 융통적 차원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인용하여 해설한 삼성설은 화엄종의 현수스님이 설한 것으로 유식종의 삼성설과는 얼마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특기할 것은 이제까지 해설한 원성실성의 불변과 수연에 대한 것으로 유식종의 주장에 의하면, 그 가운데 불변성이 강하게 대변되어 현수설과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삼성 자체의 융통성도 그만큼 미약합니다. 그리하여 현수스님은 유식을 격하하여, 별교일승(別敎一乘)은 물론 돈교일승(頓敎一乘)에도 들지 못한다고 평하였습니다. 그 뒤로는 화엄경의 원융무애한 사사무애의 도리에 유식사상이 빛을 잃으면서 법상종은 쇠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출처] 백일법문 제4장 유식사상 6. 삼성중도설
[출처] 백일법문 제4장 유식사상 6. 삼성중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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