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좌파’, ‘캐비어 좌파’들이 꼭 만나 얘기해야 할 사람 1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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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남한이 북한 쳐들어갔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북한이 곧 내려올테니 먼저 가 있으란 얘기를 듣고 남파됐다고 했습니다.
성씨는 머리가 좋고 전술을 잘 써서 국군에게 적잖은 타격을 입혔고, 정전협정이 된 후에도 빨치산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국군에 의한 잔당 소탕작전이 본격화되자, 성씨는 고향 창녕에 내려가 당숙네 집에 숨어있다가 53년 12월 체포됩니다.
그를 잡은 것은 이름도 유명한 김창용 특무부대장입니다.
일제시대 경찰을 지내다 해방 후 또 다시 경찰 수뇌가 된 그를 두고 논란이 많았던 바로
그 김창용은 창녕의 소문난 집안 장손을 알아보고 어찌된 일인지 “이 애 만은 살려주자”고 했답니다.
갑작스런 호의로 목숨을 건진 성씨는 서울로 올라와 단국대 영문과와 성균관대 사학과를 다녔습니다.
“등록금 낼 때가 되면 딱 그만큼씩 (창녕의) 땅을 팔았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남쪽 사람으로 환원됐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모두 맛본 그가 다시 고향땅에 정착한 것은 4년만이었습니다.
한반도 현대사의 압축판인 성일기 가족
성일기씨는 여동생들의 이야기를 할 때 꽤나 담담했습니다.
목이 메여 한다거나, 눈물을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살붙이, 피붙이로서 함께 산 시간보다는 그들을 ‘뉴스’와 ‘정보’ 속 인물로 대한 시간이 너무 길었던 탓일 겁니다.
중학교 때 헤어진 여동생 성혜림을 만난 적이 없고, 그저 통화만 했다네요.
“서울로 가서 살자”는 오라비의 말에 성혜림은 “정남이는 내가 모스크바에 있는 줄 아는데,
그 애가 언젠가 나를 여기로 찾으러 왔는데 내가 여기 없으면 어떡하느냐”며 모스크바를 떠날 수 없다고 얘기했다 합니다.
김정일의 정부(情婦) 성혜림 배우 출신으로 김일성종합대학 연구사인 리평의 아내였으나
어느 날 갑자기 김정일의 눈에 띄어 남편과 헤어져 최고권력자의 정부(情婦)로 살아야 했던 성혜림. 정식 부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아들도 빼앗긴 성혜림을 두고, 성일기 씨는 말합니다
. “그런 지경인데, 정신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겠나.
김정일이 남의 마누라를 빼앗아 취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북한에서는
(마음놓고) 결혼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지금 프랑스 파리에 망명해 살고 있는 동생 성혜랑도 모스크바에서 성혜림과 있을 때 한번 만났을 뿐
, 이후 만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성일기씨는 조카인 이한영과 만났을 때의 이야기도 들려줬습니다
. 성격이 적극적이었던 이한영에게 “너무 까불고 다니지 말라”고 외삼촌이 조언하자,
그는 “메뚜기도 한 철이다”라고 맞받았다는 겁니다.
그가 암살당한 후, 성일기씨는 동생 혜랑을 모스크바에서 만났다고 합니다
동생은 “한국에서 한 짓”이라고 믿고 있었더랍니다.
“이 바보야, 너를 유인하려고 해도 아들이 살아있어야 너를 유인할텐데
, 한국이 왜 그 아이를 죽이겠느냐.” 그제서야 성혜랑은 사태를 짐작했다고 합니다.
“이념? 다 쓰잘데기 없는 것”
그에게 대체 ‘이념’이 무엇이냐 묻자, 그는 “다 쓰잘데기 없는 것.
다 쓰잘데기 없는 것”이라고 두번 말했습니다.
이데올로기가 가족을 분해하고, 삶을 분해하는 경우를 우리는 꽤 여러번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성씨 가족의 경우처럼, 이렇게 3대에 걸쳐 수난이 이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부모의 ‘사상적 허영(虛榮)’은 멀쩡한 아들을 빨치산으로, 어여쁜 딸을 권력자의 정부로 만들었고,
그 자식의 자식들은 유랑하거나 암살을 당하게 했습니다.
그 수난의 가운데서 사건을 목격한 성일기 씨야말로
‘사상의 쓰잘데기 없음’을 실증으로, 온 몸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소원을 물었습니다. 부모의 산소를 가보고 싶다거나,
여동생을 보고 싶다거나, 창녕에서 살던 유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얘기할 줄 알았습니다.
“남자라면 죽음 앞에 떳떳해야 하는데 그건 어려울 것 같다.
이제는 그저 조용히 세상을 떠나는 게 소원이다.”
이 양반,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허무로 덮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녹화를 마치고 성씨에게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가 왼손을 내밀었습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다시 보자”고 하시더군요. 저 역시 그를 더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그에게 더 물을 것이 많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번 더 기회가 생긴다면, 질문자는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었으면 합니다.
이른바 ‘리무진 리버럴’ ‘캐비어 좌파’ ‘강남 좌파’로 불리는 이들이 이 양반과 한번쯤 깊은 얘기를
나눠보면 어떨까 합니다. 그들은 원치 않을까요?
첫댓글 悲運의一家입니다. 그놈의 사상때문에 멀쩡한 집안이 북한에 의해 風飛雹散됐지요.
젊은 세대들은 알아야합니다.공산주의의 상류계층은 남의 부인도 가로채고 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