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손의 복수
삿 15:1-8
1 얼마 후 밀 거둘 때에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그의 아내에게로 찾아 가서 이르되 내가 방에 들어가 내 아내를 보고자 하노라 하니 장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2 이르되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 알고 그를 네 친구에게 주었노라 그의 동생이 그보다 더 아름답지 아니하냐 청하노니 너는 그를 대신하여 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라 하니
3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하고
4 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어서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가지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5 홰에 불을 붙이고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 밭으로 몰아 들여서 곡식 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포도원과 감람나무들을 사른지라
6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되 누가 이 일을 행하였느냐 하니 사람들이 대답하되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니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빼앗아 그의 친구에게 준 까닭이라 하였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 여인과 그의 아버지를 불사르니라
7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고야 말리라 하고
8 블레셋 사람들의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크게 쳐서 죽이고 내려가서 에담 바위 틈에 머물렀더라
삿 15:1-8 / [블레셋과의 다툼] 그 일이 있은 지 며칠이 지나 밀을 거둘 무렵이었다. 삼손은 자기 아내가 보고 싶어 염소 새끼 한 마리를 가지고 처갓집으로 내려가 자기 아내의 방으로 들어가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장인이 못 들어가게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2) `자네가 내 딸을 보기 싫어하는 것 같아 내가 다른 집으로 시집 보냈네. 전에 잔치에 참석하였던 들러리에게 보냈네. 내 딸아이 중에 그 아이보다 더 예쁜 아우가 있으니 그 딸아이를 아내로 데려가게.' 3) 삼손이 거기에 있던 사람들에게 `내가 이번만은 블레셋 녀석들을 그냥 두지 않겠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너희 블레셋 녀석들은 할 말이 없을거야!' 하고 말하고 4) 여우 300마리를 잡아 꼬리와 꼬리를 서로 붙잡아 매고는 준비해 두었던 홰를 꼬리 사이에 매단 다음 5) 거기에 불을 붙여 블레셋 사람들이 농사짓는 밭에 그 여우들을 풀어 놓았다. 결국 아직 베지도 않은 곡식뿐만 아니라 빼어 놓은 곡식단과 포도덩굴과 올리브나무까지 몽땅 태워 버렸다. 6) 블레셋 사람들이 `아니, 어느 놈이 이런 짓을 하였어?' 하고 아우성을 치자 어떤 사람이 `이것은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 한 짓이다. 자기 아내를 잔치 때 들러리 섰던 사람에게 시집 보냈다고 하여 화가 나서 한 짓이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딤나로 몰려가 삼손의 아내와 장인을 불에 태워 죽였다. 7)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삼손은 `내가 이 원수를 꼭 갚고야 말겠다.' 하고 그 길로 8) 블레셋 사람들에게 쳐들어가 닥치는 대로 쳐죽이고는 에담에 있는 바위 동굴로 들어가 머물러 있었다.
블레셋 여인과 결혼했던 삼손은 장인으로부터 자기 아내가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화가 난 삼손은 300마리의 여우를 잡아 둘씩 꼬리를 묶고 거기에 홰를 달아 곡식밭으로 몰아넣어 곡식단과 베지 않은 곡식들과 과수원을 불살랐습니다.
삼손이 아내를 빼앗기다(1-2) 삼손은 자기를 속였던 아내가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화해하려고 염소 새끼를 가지고 처갓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삼손의 장인은 삼손이 자기 딸을 미워하여 떠났던 줄 알았다고 하면서 그녀를 삼손의 친구에게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서는 그 대신 다른 딸을 취하라고 했습니다. 삼손이 딤나를 찾아간 시기는 밀을 거둘 때였습니다. 삼손의 장인이 자기 딸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으니 그 동생을 아내로 취하라고 한 것을 볼 때 자기 딸의 결혼과 이혼과 재혼 그리고 그 동생과의 결혼과 같은 문제들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는 삼손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삼손이 블레셋의 곡식밭과 과수원을 태우다(3-5) 삼손은 장인의 제안을 거절하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복수할 결심을 굳혔습니다. 복수심에 불타는 삼손은 여우 300마리를 산 채로 잡아 둘씩 꼬리를 묶고, 그 묶은 곳에 홰를 달고 불을 붙여 블레셋 사람의 곡식밭과 과수원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때는 밀을 거두는 시기였습니다. 밀을 거두는 때는 히브리 월력으로는 9월경이고, 태양력으로는 5, 6월경입니다. 이때는 비가 오지 않기 때문에 불이 나면 쉽게 타버립니다. 그 결과 곡식밭과 과수원이 불타고 말았습니다. 이를 통해서 삼손은 점점 블레셋과 대립하는 본연의 사명에 다가가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삼손의 아내와 장인을 불사르다(6-8) 블레셋 사람들은 대형 화재의 원인이 삼손의 아내였던 딤나 여인과 그녀의 아버지가 삼손을 분노하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를 불에 태워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블레셋 사람들의 행동은 삼손의 마음을 더욱 분노하게 했습니다. 삼손은 그들의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쳐서 죽였습니다. 당시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쳤다”라는 말은 상대방을 철저하게 파멸시켰다는 히브리인들의 관용적 표현입니다. 이제 블레셋과 삼손은 서로 원수지간이 되었습니다.
적용: 삼손의 장인은 이미 삼손과 결혼했던 자기 딸을 다른 남자에게 주는 비윤리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혹시 당신의 삶에서도 버려야 할 비윤리적인 것은 없습니까?
살면서 절대로 헷갈리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솔직한 것과 직설적인 것을 헷갈리지 말아야 합니다. 솔직한 것에는 정중함이 배어 있으나 직설적인 것에는 무례함이 묻어 있습니다. 당당한 것과 거만한 것을 헷갈리지 마세요. 당당한 것은 자존감에서 비롯되지만 거만한 것은 자만심에서 비롯됩니다. 똑똑한 것과 교만한 것을 헷갈리지 마세요. 똑똑한 것은 상대를 감탄하게 하지만 교만한 것은 상대를 불편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것과 집착하는 것을 헷갈리지 마세요. 사랑하는 것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품어주지만 집착하는 것은 상대를 내 생각 속에 가둬두려고 합니다.
< 설 교 >
부르심과 명분
양인국목사 / 삿 15:1-20
1. 삼손의 생애를 살필 때 항상 갖게 되는 한 가지 의문이 있다. 그것은 나면서부터 나실인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으로부터 구원할 사사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도 그를 사사로 인정하고 따른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우리는 지난 주 14장을 통하여 이 물음에 대한 대답들 가운데 하나를 들었다. 그것은 경건이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본문을 통하여 경건이 훈련되어 있지 않을 때 삶 가운데 나타나는 일들 가운데 하나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한다. 그것은 명분을 상실한 삶을 산다는 것이다.
2. 언급한 것처럼 경건이 훈련 되지 않은 삼손은 하는 일마다 어리석음을 범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사사로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혀 다곤신전에서 죽기 전에 행한 일 외에 명분 있는 일을 한 적이 없다. 여기 명분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각각의 이름이나 신분에 따라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다. 그러나 성경적 의미로는 부르심에 따라 합당하게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고, 복음을 증거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고,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은사에 따라 섬김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새우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은 부르심에 따라 살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 모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명분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바울을 통해 주신 말씀대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을 말한다.
삼손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으로부터 구원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다. 그러므로 그에게 명분 있는 삶이란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으로부터 구원하는 일을 위해 사는 삶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그렇게 살지 못했다. 오히려 무슨 일을 결정하고 그 일을 해야 할 때에도 옳고 그름을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의 기분이 이끄는 대로 행하였다. 그래서 그가 행하는 일들은 모두 명분이 없는 사사로이 행하는 일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미움의 대상이 되었고 자기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걸림돌이 되었다. 실제로 블레셋은 삼손을 잡기 위하여 군대를 동원했고, 이스라엘도 자신들에게 걸림이 되는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주었다. 만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명분 있는 삶을 살았더라면 이스라엘은 그를 사사로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그와 함께 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명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해 준다.
우리는 삼손을 통하여 명분 없는 삶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이로 인하여 거두게 되는 열매들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삼손은 딤나 여인을 아내로 삼았지만 혼인 잔치에서 벌어진 일로 인하여 분노하고 아내를 버려두고 집으로 올라갔다. 딤나 여인의 부모는 삼손의 이와 같은 행동을 보고, 그가 자기 딸을 버린 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그 딸을 다른 사람의 아내로 주었다. 한편 삼손은 분노가 가라앉았을 때 아내 생각이 나서 염소 새끼를 선물로 취하여 가지고 딤나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그 여자의 부모는 삼손에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말하고 자신의 또 다른 딸을 그의 아내로 내어주겠다고 말했지만 삼손은 오히려 그들에게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15:3)"라고 하였다. 안타깝게도 삼손은 아내 문제와 관련하여 장인으로부터 그럴만한 이유를 충분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유의 타당성을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또한 그런 이유를 있게한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의 분노에 이끌려 블레셋 사람들의 밭에 불을 질러서 추수할 곡식들을 태워버린 것이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이처럼 행한 것은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한 일이 아니고 삼손의 개인적인 일이었다. 물론 삼손은 이와 같은 일을 할 때도 하나님께서 부르심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주신 능력을 사용했다. 공적인 일을 위하여 주신 능력을 사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사유화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이처럼 삼손이 행한 명분 없는 일은 모두에게 해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자신의 분노를 불특정인에게 쏟아 부음으로 어리석음을 범했다. 실제로 삼손은 이 사건과는 무관한 블레셋 사람들의 밭을 불태웠고, 또한 삼손이 행한 일에 대한 블레셋 사람들의 보복으로 한때 신의 아내였던 여인과 그 여인의 아버지가 불태워 죽임을 당했다. 보복은 보복을 가져온다. 블레셋 사람들이l 행한 이와 같은 일에 대한 삼손의 보복으로 인하여 또 다시 블레셋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이 사건은 여기서 중단되지 않았고, 블레셋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블레셋은 큰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치기 위하여 레히에 진을 쳤고(15:9), 유다는 블레셋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찾아가서 어째서 군대를 이끌고 자신들을 치러 왔는지 물었다. 물론 이스라엘이 이렇게 물은 것은 당시 그들은 이미 블레셋의 지배 아래 있었지만 지배자의 요구대로 조공을 바침으로 피지배자로서 누릴 수 있는 불안전한 평화를 누리고 있었는데 이제 이것조차 잃어버리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삼손이 명분 없이 사사로이 행한 일은 자기 동족 유다에게도 걸림이 되었다. 그래서 삼손은 자기 동족 유다의 손에 결박되어 블레셋에 넘김을 당하는 수모를 당하게 된 것이다. 유다가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에게 넘기기 위하여 동원된 사람은 삼천이나 되었다. 만일 삼손이 그들에게 사사로 인정되어 명분 있는 일을 하였더라면 그들 모두는 삼손과 함께 하여 블레셋과 싸웠을 것이다. 이처럼 동일한 환경에서도 명분의 유무에 따라 사람들은 대적이 되기도 하고 함께하는 사람들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명분 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만, 특별히 영적 지도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명분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지도자는 명분 있는 일을 함으로 공동체 구성원들로부터 지도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을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다 사람들은 삼손을 결박한 후 그를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주기 위하여 블레셋이 진(陣)친 곳에 이르렀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잡기 위하여 소리를 지르며 다가오자 그때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임하였고 그 순간 그를 결박했던 밧줄이 끊어졌다. 그래서 삼손은 주변에 있던 나귀턱뼈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블레셋 사람 일천 명을 죽었다. 그러나 이 싸움도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명분 있는 싸움을 아니었고 블레셋과 삼손 개인의 싸움이었다. 삼손은 한 개인으로서 블레셋 사람 일천 명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손으로부터 구원 받지 못했다. 만일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명분을 가지고 이스라엘과 함께 이 싸움에서 승리하였더라면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손으로부터 구원 받았을 것이다. 이처럼 명분 있는 삶은 동일한 일을 할지라도 그 일로 인하여 가져오는 열매가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믿음의 사람들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서 명분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사사로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살았고(삼상12:23),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항상 여호와 앞에 정직히 행하였다. 여기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았다는 의미이고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명분 있는 삶을 살았다는 의미다. 바울 역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명분 있는 삶을 살았다. 우리는 그의 고백을 통하여 명분 있는 그의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명분 있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그들의 삶은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자신과 이웃에게는 세우는 삶이 되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명분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떻게 사는 삶을 삶을 말하는지 그리고 어째서 우리는 명분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 명분의 유무에 따라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거두는 열매가 어떻게 다른지 이 물음들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갖기 원하고 또한 그 대답들을 마음에 새기기 원한다. 그리하면 앞으로 남은 삶을 명분 있게 살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 삶이고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삶인지 생각하며 살게 해 주시고 이로 인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항상 명분 있는 삶을 살게 해 주옵소서. 이와 같은 우리의 삶이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드러나게 해 주옵소서. 아멘
배신감에 젖지 말라
삿 15:1-5 / 이한규목사
< 혈기를 부리지 말라 >
삼손이 수수께끼의 해답을 캐낸 후 동족에게 알려주어 내기에서 지게 한 자기 아내에 대해 순간적인 혈기를 참지 못하고 그녀를 버리고 자기의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혈기가 누그러지자 딤나의 아내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얼마 후 밀 거둘 때 염소 새끼를 들고 아내에게로 찾아가 방에 들어가 아내를 보겠다고 하자 장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1절).
당시 염소는 화해의 예물이나 선물로 곧잘 이용되었다. 즉 삼손은 아내와 화해하고 싶어서 염소를 선물로 가지고 처가를 방문한 것이다. 그처럼 삼손은 아내를 연모했기에 그녀 및 그녀의 동족들이 저지른 잘못을 용서하고 다시 새롭게 살려고 했지만 그의 계획과 호의는 장인에 의해 거절되었다.
그때 삼손의 장인은 삼손이 자기 딸을 미워하는 줄 알고 그녀를 남에게 주었다고 했다(2절). 비록 차분하게 말했지만 왠지 삼손을 거부하는 듯한 어투였다. 아마 삼손의 아내도 처음에는 삼손의 강한 완력과 남성미에 끌렸다가 점차 거듭되는 삼손의 혈기에 질려서 그 만남을 피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처럼 혈기가 심한 사람은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다. 언제 혈기가 터질지 모르는 불안제조기와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가끔 혈기를 부리며 말한다. “생각할수록 화나네.” 그러나 그런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생각할수록 평안을 찾으라. 수시로 혈기를 내면 아무도 환영하지 않고 그런 성품은 인간관계에 결코 유익을 주지 못한다. 함석헌 선생은 민주주의를 위해 치열하게 싸웠지만 늘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분노하며 싸우지 말고 웃으며 싸우십시오.” 혈기를 통제하고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아야 세상과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
< 배신감에 젖지 말라 >
삼손의 장인은 자기 딸이 삼손을 더 이상 만나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나 삼손의 혈기와 완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냥 거부하면 큰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해서 그녀의 여동생이 더 아름답다면서 그녀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아마 삼손으로부터 다시 혼숫감을 받기 위한 탐욕으로 그런 제안을 했을 것이다. 그 일로 인해 삼손은 아내와 장인에 대한 배신감을 가졌고 그 배신감이 블레셋 족속 전체에 대한 증오심을 재차 촉발하게 했다.
결국 삼손의 혈기가 또 발동해서 블레셋 사람을 해할지라도 자기에게는 허물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3절). 그리고 들에 나가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고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홰를 하나 달아 불을 붙이고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밭으로 몰아 곡식 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포도원과 감람나무들을 불살랐다(4-5절). 고대 농경 사회에는 흔히 있던 곡식단과 밭을 불사르는 보복 행위는 그 지역 경제를 송두리째 파괴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무엇이 삼손을 그렇게 치명적인 보복을 하게 했는가? 배신이다.
배신은 배신하는 사람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하고 배신감에 젖은 사람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한다. 살면서 배신당하는 상황을 만나면 배신감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자신을 잘 다스리라. 특히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하면 더욱 큰 충격을 받는다. 그때부터 힘겨운 나날이 시작되면서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고 밤잠을 설칠 때도 많고 삶에 회의를 가지게 된다. 그런 고통스런 상황이 생기면 하나님 앞에 나와 그 감정을 토로하라. 그리고 뒤돌아보지 않기로 다짐하고 꿈과 비전의 정상을 향해 나아가라.
가끔 산을 올라보라. 그때 정상에 오를 때까지는 과거의 아픔을 생각하지 말라. 그리고 정상에 오른 후 먼 곳을 바라보는 기쁨을 만끽하며 탁 트인 가슴을 가지고 또 다른 내일을 기대하면 얼마나 좋은가? 배신당할 때 너무 배신감에 젖지 말고 내일의 찬란한 삶을 기대하고 꿈과 비전을 향해 전진하라. 꽃봉오리의 삶이 찬란한 꽃을 피우는 삶으로 되기까지 인내하며 “내 영혼 평안해!”를 외치며 나가면 반드시 희망찬 미래가 펼쳐질 것이다.
두 번째 약속의 성취
삿 15:1-20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다루는 주제 중의 하나가 복수입니다. 그런데 복수는 복수를 낳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본문에도 보니 삼손과 블레셋 사람들 사이에서 주거니 받거니 복수전이 계속됩니다. 나실인인 삼손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인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힘쓰지 않고 그저 개인적인 복수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이 성경에 기록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나실인인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판단이 과연 주님의 뜻을 반영합니까? 삶에 우선순위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힘쓰는 일들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연관이 있습니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점입니다. 부족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감사하며 이왕이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선한 도구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결산하시는 주님 앞에 섰을 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받습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이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사명자가 되어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많이 거두시기를 바랍니다.
삼손의 첫 번째 복수(1-5절)
얼마 후 밀을 거두는 시기가 되자 삼손이 그의 아내를 찾아갑니다. ‘얼마 후’라고 번역된 표현이 여호수아 23:1에서는 ‘오랜 후’로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삼손의 화가 풀리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딤나를 떠났지만, 혼인 관계를 완전히 정리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염소 새끼’를 가지고 갔는데, 이는 나름 화해의 제스처로 보입니다. “방에 들어가 내 아내를 보고자 하노라”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방으로 내 아내에게 들어가고 싶다’입니다. 아내를 단순히 ‘보고자’한 것이 아니라, 아내와 잠자리 갖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인이 가로막습니다. 결혼식에서 삼손이 보인 반응을 감안할 때 장인은 삼손이 자기 딸을 버렸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결혼식에 함께 있던 블레셋 사람 중 한 명에게 줘 버렸습니다. 그의 잘못된 판단은 훗날 큰 대가를 치르게 합니다. 당황한 장인은 삼손을 달래기 위해 대안을 제시합니다. 삼손 아내의 동생이 더 아름다우니 그녀를 아내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이제 삼손의 분노는 한 집안이 아닌 블레셋 사람 전체에게 향합니다. 이번만큼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해를 끼쳐도 자신에게 허물이 없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허물’로 번역된 명사는‘악’또는 ‘재난’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삼손은 장인의 처사에 복수를 감행합니다.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어 꼬리와 꼬리를 연결했습니다. 두 꼬리 사이에 나무 막대 하나를 매달고 거기에 불을 붙여 여우들을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밭으로 몰았습니다. 이 일로 곡식 단과 아직 베지 않은 곡식, 심지어 포도원과 감람나무들까지 불탔습니다. 삼손이 딤나에 온 때는 밀을 수확하던 기간이었기에 삼손의 행동은 블레셋 지역 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붙들어서, 매고 가지고, 달고, 붙이고, 몰아 들여서’등등 동사를 연속으로 사용해 모든 일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삼손의 행동은 사적인 감정에서 나온 복수이지만 하나님은 블레셋의 압제에서 구원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손을 사용하십니다.
삼손의 두 번째 복수(6-8절)
블레셋 사람들은 누가 자기들의 곡식과 밭과 나무를 태웠는지 수소문했습니다. 사람들은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 벌인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빼앗아 그의 친구에게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장인의 행동에 대한 사사기 저자의 묘사나 자신의 행동을 묘사한 장인의 말에는 ‘주다’라는 동사만 사용되었을 뿐 ‘빼앗다’라는 뜻의 동사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빼앗았다’라며 책임을 장인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블레셋 사람들은 올라가서 그 여인과 그의 아버지를 불살랐습니다. 곡식과 포도원과 나무들이 불타 버린 것에 대한 복수를 삼손이 아닌 그의 장인과 딸에게 한 것입니다. 삼손의 아내는 그녀와 그녀 아버지의 집을 불사르겠다는 블레셋 사람들의 협박에서 벗어나고자(14:15) 삼손을 졸라 수수께끼 답을 알아냈습니다. 그런데 삼손의 아내는 피하고자 했던 운명에 맞닥뜨리는 역설적인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이에 삼손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블레셋의 복수에 맞서 또 다른 복수극을 벌입니다. 그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고야 말리라.”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 대해 첫 번째 복수할 때는 그들의 재산에만 피해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복수 할 때는 블레셋 사람들을 쳤습니다.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쳤다는 표현은 마구잡이로 공격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그 후 삼손은 유다 땅으로 도망쳐 에담의 바위틈에 숨었습니다. 그는 블레셋을 향한 자신의 분노와 복수가 정당하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말했습니다. 아내를 이용해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낸 사람들에 대한 분노,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낸 장인에 대한 분노, 아내와 장인을 죽인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삼손의 판단력을 흐리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삼손의 분노조차 구원의 기회로 사용하셨습니다.
유다 사람들의 손에 결박당한 삼손(9-13절)
삼손이 유다로 올라왔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도 삼손을 따라 유다로 올라와 진을 쳤습니다. 그 수가 많아 레히를 가득 채웠습니다. 여기서 ‘진을 치다’와 ‘가득하다’라는 단어들은 군사행동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삼손의 행동이 개인 간의 갈등을 넘어 민족 간의 전쟁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놀란 유다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유다로 올라온 이유를 묻자, 그들은 삼손을 잡기 위해(문자적으로 ‘묶으려고’) 올라왔다고 대답합니다. 그들이 삼손을 잡으려는 이유는 삼손이 자신들에게 행한 것을 그대로 갚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에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삼손이 숨어 있는 에담의 바위틈으로 내려갑니다. 유다 사람들은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공격한 것에 대해 감사하기는커녕 불만을 드러냅니다.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책망은 그들이 블레셋의 통치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방의 압제에 익숙해지다 보니 삼손의 저항을 쓸데없이 분란을 일으키는 행위로 여깁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에게 행한 대로 갚아 주었을 뿐이라고 대답합니다. 블레셋이 유다 땅을 침략한 일이 이스라엘과 대적의 관계를 깨뜨리기 위해 하나님이 개입하신 사건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삼손 역시 깨닫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주고자 왔다고 합니다. 삼손은 자기 민족과는 충돌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다면 순순히 잡히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들도 삼손을 단단히 결박하여 넘겨주기만 할 뿐 절대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유다 사람들은 삼손과 타협한 끝에 새 줄 두 개로 삼손을 결박한 채 에담 바위틈에서 끌어냅니다.
나귀의 턱뼈로 블레셋을 치는 삼손(14-17절)
삼손이 결박된 채 블레셋 사람들이 진 치고 있는 레히에 도착하자 블레셋 사람들은 크게 소리 지르며 그에게로 마주 나갑니다. ‘소리 지르다’로 번역된 ‘루아’는 주로 전쟁을 시작할 때 소리를 지르거나 적들을 이기고 승리를 했을 때 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들의 재산에 손해를 끼치고 동족을 죽인 삼손이 결박되어 있으니 승리의 함성을 크게 지를 만했습니다. 바로 그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십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외침을 신호로 여호와께서 개입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삼손을 묶은 밧줄이 불탄 삼처럼 쉽게 손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자 집어 듭니다. 여기서 ‘턱뼈’는 히브리어로 ‘레히’인데, 이것은 사건의 장소 이름인 ‘레히’와 언어유희를 이룹니다. 턱뼈를 수식하는 ‘새’라는 형용사는 문자적으로 ‘신선한’이라는 의미입니다. ‘새 턱뼈’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주목할 만합니다. 첫째는 뼈가 아직 마르지 않아 단단하지 않은 상태이기에 무기로서 기능이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나귀의 뼈가 아직 신선하다는 것은 나귀 사체에서 그것을 막 떼어 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삼손이 나실인 서약을 다시 한 번 위반한 셈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번에도 그를 통해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는 약속(14:4)을 성취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이 인간의 잘못된 행동을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역설을 보여 줍니다. 물론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 잘못을 행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삼손이 블레셋을 세 번째로 공격합니다. 나귀 턱뼈로 천명을 죽인 후에 승전가를 부릅니다.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나귀’(하모르)와 ‘더미’(하모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의 자음이 동일합니다. ‘레히’에 이어 또 하나의 언어유희를 이룹니다. 나귀 턱뼈 하나로 대적을 시체 무더기로 만들어 버렸다는 자랑입니다. 그의 노래에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없고 자신에게 모든 공로를 돌립니다. 삼손은 말을 마치고서 턱뼈를 자기 손에서 내던지고 그곳을 ‘라맛 레히’라고 부릅니다. ‘턱뼈의 언덕’이라는 뜻입니다. 삼손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자신의 업적이 잊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보잘 것 없는 턱뼈를 통해 삼손이 블레셋과 싸워 이기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삼손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했습니다.
여호와를 부르는 삼손(18-20절)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생깁니다. 삼손이 몹시 심한 갈등을 느끼며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사자를 찢고 블레셋 군대를 무찌른 삼손이었으나 타는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존재 같아도 인간은 전능자의 손에 붙잡히지 않으면 길거리에 뒹구는 보잘것없는 나귀 턱뼈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제야 삼손은 자신이 거둔 승리를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으로 고백합니다.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기도에 등장하는 세 단어, ‘종’, ‘구원’, ‘할례 받지 못한 자’는 13장에서 나실인인 삼손이, 할례 받지 않은 자인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두 번째 약속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삼손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을 고백합니다.
삼손의 기도 내용은 대적을 물리쳐 이스라엘을 구원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목마름을 해결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따라 살았던 삼손이 자신을 가리켜 ‘주의 종’이라고 부르는 것도 공허해 보입니다. 평소에 주의 종답게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삼손의 기도는 그가 보인 삶의 방식만큼이나 자기중심적입니다. 그가 지금 간절히 구하는 것은 자신이 죽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할례 받은 하나님의 사람임을 내세워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당위성을 주장합니다. 삼손이 단지 개인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을 불렀는데도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이 레히에 있는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옵니다. 삼손이 그 물을 마시고 몸과 정신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그곳을 ‘엔학고레’라고 부르는데 이는 ‘부르짖은 자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이번에도 그 이름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삼손의 경험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잊히지 않길 바란 삼손이 하나님을 잊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딤나에서 펼쳐진 삼손의 이야기는 그가 이스라엘을 20년 동안 다스렸다는 진술로 마무리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블레셋의 압제 아래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고 그 압제를 당연하게 여겼으며, 삼손의 블레셋 공격도 개인적인 복수 차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삼손이 사사로 다스린 기간을 ‘블레셋 사람의 때’라고 표현합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면서, 백성에게 하나님의 법을 가르쳤다거나 그 땅이 평온했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다만 구원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부족한 삼손이라도 들어 쓰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삼손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에서 구원하는 일을 시작한 여호와의 대리인이었습니다.
우리의 자세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인해 빚어진 살육의 결과들조차 블레셋을 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보지만, 삼손이란 한 신앙인의 탈선이 가져다주는 혼돈의 삶은 우리를 씁쓸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어떤 자세로 나아가야 합니까?
- 깨어 있어야 합니다
블레셋이 군대를 거느리고 삼손을 잡기 위해 유다 족속 앞에 진을 치자, 유다 사람들은 삼손을 잡아 블레셋의 환심을 사려했습니다. 한때 블레셋 도시들을 정복했던(삿 1:18) 빛나던 그 용맹과 신앙은 보이지 않습니다. 세속화의 영향이 가장 용맹했던 유다 지파조차 무기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그 땅을 점령하고 대적을 쫓아내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이행하기보다는 오히려 동족인 삼손을 대적의 손에 넘겨주고 계속 그들의 지배를 받으며 살려는 한심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현실과 타협해서 산다면 그 신앙은 시들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당신의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의 역사를 끈질기게 쓰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는 언제나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자신의 아내를 친구에게 준 장인의 행동에 화가 난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의 밭을 태웠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와 장인을 죽였고, 삼손은 이에 대한 복수를 행하다가 블레셋 사람들을 쳤습니다. 삼손은 ‘내가’원수를 갚겠다고 말했지만, 성경은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해 나귀의 턱뼈로 천 명을 죽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사자를 맨손으로 잡아 죽일 때나 아스글론 사람 30명을 죽일 때도 여호와의 영이 강하게 임했습니다(14:6,19). 중요한 것은 성령의 임재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입는다면 날뛰는 사자나 천 명의 사람보다 강할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특정한 사람에게 한시적으로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성도들이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능력을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결박된 것 같고 주어진 것이 나귀 턱뼈밖에 없을지라도 성령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응답에 대한 확신이 없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이며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셨는지 알지 못할 때, 기도하지 않습니다. 삼손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간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이미 큰 승리를 베푸셨고, 삼손 자신이 할례 받은 언약 백성임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삼손이 부르짖자 샘을 터뜨려 마시게 하시며 그가 정신을 회복하고 기운을 차리도록 하셨습니다. 삼손같이 결함 많은 자가 부르짖을 때 응답해 주셨다면,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확실하게 응답해 주시겠습니까? 믿음으로 간절하게 부르짖으며 생수의 샘이 터지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철제 무기로 무장한 블레셋에 대항하기에 나귀 턱뼈는 보잘 것 없었으나, 성령이 임한 자의 손에 잡히니 큰 승리를 거두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귀 턱뼈 같은 삼손을 붙잡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높이는 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에게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면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 4:13). 성도의 진정한 승리는 인간적인 수단이나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존재가 되었다고 자만하거나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나가면서
15장에는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삼손은 아스글론 사람 삼십 명을 죽이고 그들에게 노략한 것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후에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삼손의 장인은 삼손에게 보복이나 하듯이 자신의 딸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삼손은 분함을 참지 못하여 블레셋 사람의 재산을 태우며 보복을 했습니다. 경제적인 피해를 본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에 대한 분노를 삼손의 아내와 장인에게 쏟으며 보복했습니다. 이 일로 삼손은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들 천명을 죽이며 보복했습니다. 원수를 갚는다고 우리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받은 만큼의 상처를 타인에게 되갚아 줄지라도 참된 기쁨은커녕 허전함밖에 남지 않습니다. 원수 갚은 것은 하나님께 있으니 그분께 맡겨야 합니다. 살면서 자신의 생애가 나귀 턱뼈와 같이 쓸모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나귀 턱뼈를 통해서도 블레셋을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교회 공동체에 집중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열악한 상황에서도 구원을 베푸시고 우리가 부르짖을 때 응답하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마치 자기 운명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계획과 행위를 뛰어 넘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섭리 가운데 그분의 뜻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누구의 손에 잡히는 가입니다. 삼손은 심할 갈증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샘이 터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주님의 백성들의 간구를 들으십니다. 사사 시대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시대에 살지만 언제나 깨어 있으며, 성령의 능력을 받으며, 쉬지 말고 기도에 힘쓰며, 범사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기 바랍니다. 그래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능력의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불쌍한 신자들
삿 15장 1~10절 / 채규현목사
2005년 10월 24일 미국에서 로자 팍스라는 한 흑인 여인이 죽었습니다. 많은 신문에서 그 여인의 죽음에 대해 보도를 했습니다. 1955년 미국의 알라바마주 몽고메리시의 시내버스에서 백인의 자리에 앉아 있었던 흑인 여인입니다. 백인들이 올라와서 백인 자리니까 일어나라고 했는데 끝까지 거부해서 경찰에 끌려가 법정에서 벌금형을 선고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381일 동안 버스 안타기 운동이 생겼습니다. 거기에 마틴 루터킹 목사님, 일부 백인들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동참했습니다. 마침내 1960년대 미국에서 흑인의 민권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1963년 3월 달에 미국의 수도인 Washington D. C.에 수없이 많은 민권운동가와 수많은 흑인들이 모였습니다. 바로 그 Washington D. C. 한가운데에 더 몰 (The Mall)이라는 잔디밭이 있습니다. 백악관 앞에서도 보이고 북쪽에는 미국의 국회의사당이 보이고 남쪽에는 링컨 기념관이 있습니다. 그사이가 잔디밭이고 링컨기념관 앞에는 직사각형의 연못으로 되어있습니다. 바로 그 링컨기념관 앞에서 국회의사당을 바라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마틴 루터킹 목사님이 정말 유명한 설교를 합니다. “I have a dream"이라는 제목의 설교. 내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노예소년과 소녀들이 그들 주인의 자녀들과 함께 형제로서 사랑을 나누며 뛰노는 그 날을 꿈꾸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미국전체가 하나가 되어 한 형제가 되어서 자유롭게 사는 그 날을 꿈꾸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유명한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결국 3년 뒤에 암살을 당합니다.
그러나 흑인 민권운동은 끊임없이 일어나 마침내 70년대 중반부터는 흑인들이 완전히 민권운동에 성공하고, 백인들과 대등한 자격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100년 전인 1863년에 이미 흑인들은 해방되었습니다. 1863년 1월에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에 관한 선언을 했습니다. 실제로 그것이 미합중국에 수정법13조로 제정이 되어서 마침내 온 주에서 그 법을 비준을 하고 1866년 12월 달에 완전히 법적효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법적으로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 백 년 동안 백인은 계속해서 주인이고, 흑인은 노예생활을 해왔습니다.민권운동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전에 살던 대로 계속해서 차별을 받아서 버스에도 앞자리 백인들의 자리에는 앉지 못하고, 백인들이 가는 도서관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백인들이 가는 학교도 가지 못하고, 백인들이 가는 식당에도 가지 못하고, 백인들이 가는 화장실에도 가지 못하고, 백인들이 가는 해변에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철저하게 격리 당했고, 차별받았습니다. 백년 뒤에 로자 팍스라는 재봉 일을 하던 그 작은 여인이 너무 피곤해서 앉았다가 백인이 일어나라고 했을 때 일어나지 않은 그 작은 행동으로 말미암아 흑인 전체가 일어났고, 민권운동이 일어났고, 마침내 그들에게 이미 법적으로 보장되었던 그 권리를 실질적으로 누리게 된 것은 100년이 지나서 입니다. 드디어 그 민권운동이 성공한 뒤로 흑인들은 더 이상 차별받는 존재가 아니고 어디서든지 당당하게 백인들과 함께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흑인들이 권리를 찾아가는 이 과정을 많은 목사님들이 종종 인용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 과정이 우리가 사단의 종노릇하던 것, 사망의 종노릇하던 것에서 자유함을 얻게 되는 과정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예수님이 이미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죄가 용서를 받았고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여서 우리의 첫 열매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부활하여 천국 갈 소망이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내가 이 세상을 이겼노라하고 선포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시때때로 마귀의 종노릇을 합니다. 이미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법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마귀의 법, 사망의 법 안에 갇혀서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시요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이요 생명을 주시고, 소망을 주시고, 진정한 천국, 진정한 행복을 주시는 그러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이야기합니다. 사단의 세력이 두렵습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나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삶에서 세상의 법칙대로 사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믿는 백성들이 진정한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고 왜 세상의 법 안에서 마귀의 법대로 거기에 매어서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삼손이야기를 보면 한사람의 모든 삶 속에서도 하나님이 계속해서 이기게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14장 5절부터 보면 삼손이 딤나에서 블레셋 여자 중에 마음에 쏙 드는 여자를 발견하고 결혼을 합니다. 결혼식이 7일 동안 벌어지는데 거기에서 그 블레셋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냅니다. 수수께끼를 못 맞힌 블레셋 사람들이 허둥대다가 결국 삼손의 아내를 궁박해서 비밀을 알아내고 이깁니다. 그런데 내기한 값이 사람 수대로 옷을 주기로 했습니다. 그 당시에 옷은 굉장히 귀한 것이데 삼손이 옷을 30벌을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자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 30명을 죽이고 그들의 옷을 가져다줍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긴 것 같지만 결국은 이를 계기로 블레셋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됩니다. 삼손의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이웃사람에게 시집을 보내버리니까 삼손이 여우를 잡아다가 여우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 꼬리에 불을 붙여서 온 사방에 곡식 다 해치게 만들어 오히려 블레셋 사람들이 또 낭패를 당합니다. 그러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복수를 합니다. 삼손의 장인을 죽이고, 아내를 죽입니다. 삼손이 와서 그것을 보고 또 복수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을 크게 도륙합니다. 그리고는 에담 바위틈에 숨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와서 레히라는 곳에 진을 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니까 자기들이 죽을까봐 겁이 나서 삼천 명을 이끌고 삼손을 잡아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삼손은 결박당합니다. 단단히 결박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불붙은 삼같이 그냥 끊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다시 또 엄청나게 많은 수를 죽입니다. 여기서 천명이라고 나왔는데 꼭 천명은 아니고 그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라맛’이라는 말과 턱뼈라는 말이 일종의 말의 운율에 맞게 되어 있고 16절에 나와 있는 ‘더미’라는 말과 여기서 말하는 천명이라는 말이 운율에 맞게 되어있습니다. 많은 수를 죽여서 마침내 또 승리합니다. 그다음에 16장에서 보면 가사에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 들어가 한밤중에 자고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가 온 것을 보고 새벽이 되어서 삼손이 떠나갈 때 그를 잡기 위해서 진을 쳤습니다. 밤중에 성문이 닫히면 통금이 되기 때문에 그를 잡기 위해 새벽까지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단의 계략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이 완벽하고 그들이 승리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꼭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고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기지가 있는데 삼손이 와서 성문의 나사를 풀고 성문을 들고 가버립니다. 백 명이 들어도 도저히 못 들 무쇠덩어리 성문을 삼손이 들고 가버립니다. 그것을 보고 있는 블레셋 사람들의 얼굴표정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통쾌합니다. 그렇게 또 이깁니다. 나중에는 삼손의 힘의 비밀까지 알아내 머리를 깎아 마침내 힘이 떨어짐을 보고 삼손의 두 눈을 뽑고 묶어 자기들의 신전에 놓고 조롱하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잔치를 하는데 삼손이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신전의 두 기둥을 무너뜨립니다. 삼손이 생전에 죽였던 사람보다 죽을 때 죽였던 블레셋 사람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자기 백성이 죄 중에 있더라도 그 백성을 괴롭히는 모든 적은 마침내 하나님이 멸망시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능력 있는 분이시고 어떤 사람보다 지혜 있는 분이라는 것을 여러분 믿으십니까? 바로 그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이기게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면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히려 하나님이 보내주신 삼손을 세우고 삼손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를 결박해서 대적인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줍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말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11절에 보면 ‘유다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들 우리를 관할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블레셋 사람들이 우리의 주인인줄 알지 못하냐는 말이다. 블레셋 사람들이 주인인 한 그들은 압제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압제당하는 삶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함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셔서 자유를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진정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정말 인간답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생명을 누리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것이 어렵다고 거부합니다. 현재의 편안함, 구속받는 삶속에서의 편안함을 즐깁니다. 이렇게 오히려 구세주를 적으로 여기고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를 배척하는 일이 끊임없이 성경의 역사 가운데 벌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야곱의 가족들이 계속해서 가나안 땅에 살면 가뭄 때문에 멸망할 것 같으니까 애굽으로 보내길 원합니다. 그래서 가게 하는 중간 역할로 요셉을 세웁니다. 요셉이 꿈에서 형들이 언젠가 자기에게 절을 한다고 이야기를 하니까 형들이 요셉을 미워합니다. 그래서 요셉을 팔아버립니다. 모세가 애굽의 왕자로 편안하게 살다가 나이 40이 되어서 자기가 히브리 백성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가 그들이 압제당하는 것을 안 되게 생각해서 해방시키려고 합니다. 그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어 합니다. 그들을 돕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모세를 배척합니다. 어제 애굽 사람을 죽이더니 이제는 우리를 죽이려고 하느냐며 배척합니다. 그래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게 됩니다. 삼손도 온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고 있는데 오히려 거꾸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묶어서 줍니다. 마침내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살게 하시려고 할 때 그 예수님을 묶어서 로마 병정들에게 줍니다. 불쌍한 인간들의 살아가는 방법을 이야기 합니다.
오늘날도 많은 믿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가장 자유로워지는 길을 말씀하시고 그 길대로 가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인간은 거부합니다. 좀 더 돈에 물질에 종노릇 하지 말고 자유로워져야합니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 그 물질을 맡기고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 자유함을 누려야합니다. 그리고 그 인생에서 걱정하는 삶을 살지 말아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부합니다. 자녀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맡기라고 하여도 세상의 법칙대로만 자녀를 키웁니다. 하나님의 법칙대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흔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자유롭고 싶어서 하나님을 설득하고 협상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 말에 순종할수록 넌 더 자유함을 누리고, 더 천국을 누리고, 더 안식을 누리고, 더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살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도 우리 마음에 하나님과 협상하고 줄다리기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자유함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빌립보서 4장에서 바울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합니다. 그 말씀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꼭 하나님이 나를 삼손처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하며 살게 하실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 말을 자세히 보면 내가 이제까지 마귀의 종 되어서 하지 못하는 일까지 전부할 수 있게 하신다는 이야기합니다. 마귀의 종 되어서 할 수 없었던 일들이 무엇입니까? 황금을 돌처럼 여기는 일입니다. 한번은 제자 훈련을 하는데 시험 들었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한분이 백화점에서 옷을 봤는데 너무 예뻐서 자꾸 생각이 나서 잠이 안 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냐고 물었더니 결국 그 옷을 샀다고 했습니다. 그 옷을 산 것으로 시험 든 것을 해결한 것이 아니라 결국은 사단 앞에 넘어진 것입니다. 원수를 미워하는 맘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사단의 종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극복하고 사랑할 수 있는 자유는 하나님이 내게 능력주실 때 할 수 있습니다. 내 물질을 하나님께 맡기면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자유, 내 자존심을 벗어던질 수 있는 자유, 사단이 원하는 대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 자유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요. 우리가 잘못했을 때에도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가장 복된 길로 가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성경에서 계속해서 보여줍니다. 삼손과 같은 사람에게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보여줍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시는 하나님,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사랑으로 주시는 명령,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는 모든 말씀을 있는 대로 지켜보십시오. 처음에는 여러분이 습관적으로 안 될 겁니다. 안되지만 지키려고 노력을 해보면 어느덧 그 말씀 속에 순종하는 내 삶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함이 들어옵니다. 세상 사람들이 누릴 수 없는 자유함, 세상 사람들이 느낄 수 없는 편안함과 안식, 세상 사람들이 전혀 경험할 수 없는 천국을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도 경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은혜가 우리 믿는 백성들에게 이 세상에서도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우리 복된 백성들, 순종하는 백성들,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사는 백성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막의 여우작전
삿 15장 1~20절 / 조상호목사
1998년 12월17일, 빌 클린턴 전(前)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한 사건을 벌였습니다. 그것은 영국과 미국이 연합하여 유엔의 무기사찰을 거부하는 이라크에 미사일로 공격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공격은 1991년 1월17일, 미국주도로 벌인 이라크공격에 이은 두 번째 공격이었습니다. 첫 번째 이라크를 공격했을 때 그 작전의 이름을 <사막의 폭풍작전>이라고 불렀던데 반해, 두 번째 이라크를 공격할 때는 <사막의 여우작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사막의 여우작전>의 공격의 1차 목표는 이라크에서 보유하고 있는 핵과 생화학 무기 등의 대량파괴무기를 완전 제거하는데 있었습니다.2차 목표는 후세인 대통령을 권좌에서 몰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이라크에 새 정부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영국과 미국은 그 <사막의 여우작전>을 통해 7년 전의 1차 걸프전 때보다 두 배 이상 많은, 500여발의 크루즈미사일을 단 4일 동안 발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라크 내 89개 목표물중 완전 파괴되거나 심각한 타격을 받은 곳은 방공시설과 정보본부 등 18개에 불과하고, 오히려 4일 동안의 진행되었던 공습의 피해가 대부분 민간인들에게서 발생하여 이라크와 후세인 대통령의 입지만 더 강화시켜 주는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부족하나마 그 동안 이라크 내 대량 살상무기의 유일한 정보 제공처였던 유엔사찰단까지 들어갈 수 없게 되어, 더 이상 이라크를 감시, 감독할 수단을 잃게 되었습니다. 결국 많은 군사 전문가들은 1998년의 <사막의 여우작전>은 7년 전인 1차 걸프전의 <사막의 폭풍작전>에 이어 두 번째로 실패한 작전이었다고 합니다.
저는 5년 전, 미국과 영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며 붙였던 그 <사막의 여우작전>이라는 작전 이름을 보면서 ‘누가 그 이름을 지었을까’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누가 그 작전 이름을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은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3,000여 전에 이미 성경에 <사막의 여우작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인 사사기 15장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998년에 있었던 <사막의 여우작전>의 주인공이 빌 클린턴 전(前)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라고 한다면, 3,000여 전에 있었던 <사막의 여우작전>의 주인공은 삼손입니다. 1998년에 <사막의 여우작전>을 벌였던 빌 클린턴과 토니 블레어는 실패했지만, 3,000여 전의 삼손은 성공을 했습니다. 저는 오늘 3,000여 전에 삼손이 벌였던 <사막의 여우작전>을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삼손은 구별된 삶을 살기로 결단한 나실인이었지만, 이방출신 딤나 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피로연에서부터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삼손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장점인 힘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지도 않은 머리로 블레셋과 수수께끼로 대결했습니다. 수수께끼를 아무리해도 풀 수 없게 된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과 결혼한 여자를 협박했습니다. 위협을 느낀 여자는 눈물로 남편인 삼손에게 호소하여 결국에는 그 답을 알아내었습니다. 자기 입으로 답을 가르쳐 줌으로써, 블레셋에게 보기 좋게 패배한 것입니다. 수수께끼 내기에서 패배한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줄 옷을 마련하기 위해 아스글론으로 가서 30여명을 쳐죽이고 강도짓을 해서 내기에서 이긴 블레셋 사람들에게 주고난 후, 있는 대로 화를 내며 자기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도 중대한 실수를 했습니다. 사위인 삼손이 분노하며 자기 고향으로 가는 것을 본 장인이 결혼식에 참석한 들러리 중 한 사람에게 딸을 주어버린 것입니다. 14장 20절을 보겠습니다. “삼손의 아내는 삼손의 친구 되었던 그 동무에게 준 바 되었더라.”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블레셋이 저지른 무리수
블레셋 사람들이 무리수를 두었다는 것입니다. 삼손의 장인은 원래부터 삼손과 자기 딸의 결혼에 대해서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삼손을 실컷 이용해 먹고 나중에는 발로 차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결혼식을 이미 마치고 피로연을 하던 도중, 삼손이 화를 내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결혼이 무효가 될 수 있습니까? 이미 결혼식을 올렸기 때문에 아무리 삼손이 화를 내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해도 그 결혼은 아직도 유효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장인은 삼손과 이스라엘 사람들을 우습게 본 나머지, 삼손이 다시는 블레셋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 딸을 다른 남자에게 덜컥 주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집으로 갔던 삼손은 분노를 식히고 아내에게 줄 선물을 가지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얼마 후 밀 거둘 때에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그 아내에게로 찾아가서 가로되 내가 침실에 들어가 아내를 보고자 하노라 장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염소새끼는 그 당시 상황에서 굉장한 선물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10 카렛트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나 벤쯔 자동차 열쇠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삼손은 나름대로 신경을 많이 써서 아내와 장인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왠일입니까? 장인은 딸을 만나게 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재혼시켜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색다른 제안을 합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가로되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로 내가 생각한 고로 그를 네 동무에게 주었노라 그 동생이 그보다 더욱 아름답지 아니하냐 청하노니 너는 그의 대신에 이를 취하라.” 장인은 재혼시킨 아내 대신에, 언니보다 예쁜 동생을 삼손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장인의 이 말은 어떻게 보면 매우 달콤한 제안입니다. 특별히 여자에게 약한 삼손에게 있어서는 정신을 완전히 혼미하게 만들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우리에게도 이러한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달콤한 유혹이나 제안들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어디 어디에 투자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라든지, ‘누구누구와 손잡으면 한몫 잡을 수 있다’라든지, ‘어디 어디로 가면 출세할 수 있다’든지 하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우리는 잘 분별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에게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만, 그 중에 ‘분별력’은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합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 좋고 나쁨을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 가치 있는 것과 무가치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은 매우 우리의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분별력에 문제가 생긴다면 절대로 승리할 수 없고, 또한 성공할 수 없습니다. 분별력에 문제가 생기면 아무리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살아도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게으르고 나태하게 살 때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살아도 망할 수 있습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바르게 분별할 수 있어야 하는데, 분별력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정견(正見)과 선견(先見)입니다. 아무리 바르게 보는 정견(正見)이 있어도 앞을 내다보는 선견(先見)이 없으면 날마다 뒷북만 치며 막차를 타다가,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반대로 앞을 내다보는 선견(先見)은 있는데, 바른 것을 볼 수 있는 정견(正見)이 부족하면 허구헛날 이웃에게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동창으로부터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고, 친구에게 이용만 당하며 살아갑니다. 바둑이나 장기에서 멀리 수를 내다보고, 상대방의 꼼수를 정확히 알아야 이길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바르게 보고 멀리 앞을 내다 볼 수 있어야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장인의 달콤한 제안을 받은 삼손은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일언지하에 장인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한번은 실수했지만, 두 번은 실수하지 않았습니다. 블레셋의 계략을 눈치 채고 더 이상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삼손은 정상적인 결혼관계를 깨뜨린 블레셋에게 보복하기로 마음을 먹고 한 가지 작전을 세웠습니다.
삼손이 세운 사막의 여우작전
그것은 <사막의 여우작전>이었습니다. 부모님의 강력한 반대 속에서 정말 어렵사리 결혼을 했는데, 한마디 말도 없이 사랑하는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준 장인과 블레셋사람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기 위한 작전명은 다름 아닌 사막의 여우작전이었습니다. 지금 블레셋, 영어로 말하면 팔레스타인 땅은 중동의 사막지역입니다. 이 사막지역에서 벌어지는 <사막의 여우작전>이 어떻게 진행되는 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4절과 5절을 보겠습니다. “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을 붙들어서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취하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홰에 불을 켜고 그것을 블레셋 사람의 곡식밭으로 몰아 들여서 곡식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감람원을 사른지라.” 삼손은 여우를 동원하여 자기를 속이고 자기 아내를 딴 남자에게 시집보낸 블레셋 사람들에게 보복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떠한 방법으로 잡았는지 모르지만, 삼손은 여우 300마리를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두 마리씩 꼬리를 잡아매고 그 꼬리에 횃불을 붙였습니다. 자기 꼬리에 불이 붙은 여우들이 어떻게 할까요? 뜨거우니까 사방팔방으로 뛰어 다니지 않겠습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네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블레셋 동네가 개판이 된 것이 아니라, 여우판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꼬리에 불이 붙은 여우들이 놀라서 온 들판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결국에는 오랫동안 힘들게 농사지어 이제 막 밀 거둘 때가 되어 농부들의 추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곡식과 감람원을 다 태워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레셋 사람들은 어떻게 손 한번 쓰지 못했습니다. 그저 앉아서 온 들판이 불바다가 되는 것을 보고만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상 블레셋 사람들을 최초로 공격한 사막의 여우작전입니다. 이 작전에 동원된 것은 다름 아닌 여우입니다. 여우들이 특전부대가 되어 전쟁에 투입되어 적군을 무찌른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꼭 정규군대만 동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들짐승들을 사용하여 당신의 역사를 일으키시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하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무엇으로 바로를 공격했습니까? 이스라엘의 정규군대였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개구리나 황충이나 파리나 이 등과 같은 미물을 동원하여 바로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200만 여명 이상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 내내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셔서 굶어죽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를 동원하여 엘리야에게 먹이셨습니다.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방법을 동원하든지 당신의 백성들을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주위에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낙심을 합니다. 사랑하는 남편도 한국에 있고, 아이들은 너무 어려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고, 그렇다고 부모님이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고, 자기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며 고민합니다. 또 자기에는 변변한 물질도 없고, 안정된 직장도 없고, 확실한 미래가 보장되지 않았다고 걱정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남께서 도와주십니다. 주위에 있는 전혀 생각지도 않던 사람을 통해 도와주십니다. 또는 주변에 그러한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와줄 사람을 보내 주십니다. 주변에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여우나 나귀나 사자와 같은 동물을 보내주시기도 하고, 모세에게 주셨던 지팡이 같은 것도 보내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우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우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 것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믿음으로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돕는 손길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처한 환경에 절망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주위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보내주신 많은 주님의 천사들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천사가 아니라도 여러분들을 돕는 여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사막의 여우작전>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보았습니다. 피해를 본 블레셋 사람들은 화재현장에서 불을 지른 방화범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수백 마리의 여우만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이 보였을 뿐입니다. 그들은 누가 여우작전을 시도했는지 수소문했습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가로되 누가 이 일을 행하였느냐 혹이 대답하되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니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취하여 그 동무 되었던 자에게 준 연고니라. 블레셋 사람이 올라가서 그 여인과 그의 아비를 불사르니라.”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에 대한 보복으로 삼손의 아내와 장인을 불살라서 죽여 버렸습니다. 삼손은 또 다시 블레셋 사람들에게 당한 것입니다. 여우작전으로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또 다시 블레셋 사람들의 역습을 받은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역시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삼손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또 블레셋사람들에게 두 번째 보복을 결심하고 그 결심대로 몇 명인지는 모르지만, 블레셋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삼손은 에담 바위틈에 숨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과의 전투는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레히라는 곳에 대부대를 집결시켜 놓고, 삼손을 잡아서 넘기지 않으면 대대적인 보복을 가할 것처럼, 유다 사람들에 “우리가 올라오기는 삼손을 결박하여 그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려 함이로라(10절하).”고 위협을 가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전에 삼손의 아내를 이용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유다 사람들을 이용하여 삼손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블레셋의 자중지란 작전
이른바 자중지란(自中之亂) 작전입니다. 그러니까 블레셋 사람들은 유다 사람들끼리 스스로 분란을 하게 해서 이기는 기가 막힌 전법을 세운 것입니다. 11절 상반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관할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이 말을 쉽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우리를 관할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지금 어느 때인데, 그렇게 설치고 다니느냐? 조용히 있을 것이지 왜 그렇게 말썽을 피워서 우리를 어려움에 빠지게 하였느냐?”는 것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블레셋과 제대로 싸워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너무나 쉽게 그들의 요구에 굴복해버린 것입니다. 블레셋의 <자중지란 작전>이 보기 좋게 들어맞은 것입니다.
사실 이 <자중지란 작전>은 아군의 피해는 최대한으로 줄이면서 적을 손쉽게 누를 수 있는 유용한 병법입니다. 그래서 지나간 역사를 살펴보면 아군들끼리 자중지란에 빠진 사이에 적들의 공격을 받아 어려움을 겪은 이야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조선에는 노론과 소론, 등의 수많은 당파들이 서로 당파싸움을 하다가 결국에는 일본의 침략을 받아 임진왜란을 겪었습니다. 또 근세에 일어난 일이지만, 40년대 말에는 정치인들끼리 서로 싸우다가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라는 한국전쟁을 겪었습니다. 또 지난 80년대 말에는 야당의 대표적인 두 지도자인 김영삼씨와 김대중씨가 서로 자기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싸우다가, 결국에는 여당 후보인 노태우 여당후보가 어부지리로 대통령에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또 지난 90년대 말에는 야당과 여당이 서로 잘났다고 허구헛날 싸우다가 결국에는 역사이래로 가장 치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는 국제통화기금인 IMF의 제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수년 동안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자중지란 작전은 적군이 손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병법입니다.
미국의 서부 캘리포니아 사막에는 방울뱀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서부 개척 시대에 개척자들에게 가장 큰 적은 방울뱀이었습니다. 방울뱀은 꼬리를 떨면서 방울 소리를 냅니다. 방울뱀은 이름은 예쁘지만 상대를 공격하는 치명적인 송곳니가 있어서, 방울뱀에게 한번 물리면 치명적 독소로 인하여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그러나 특이한 점은 방울뱀이 다른 방울뱀과 싸울 때는 독이 나오는 송곳니를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방울뱀 끼리 물꼬 뜯고 싸움을 해도 방울뱀 독으로 인해서는 결코 죽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또 정글의 왕이라고 하는 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토 내의 주도권쟁탈을 위해서 다른 사자와 싸우기는 하지만, 결코 상대방을 죽이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동물의 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있습니다. 동물의 세계에는 ‘무차별 학살’이라든지, ‘인종 청소’라든지, ‘자살 폭탄 테러’라든지, ‘너 죽고 나 죽자’ 라든지, ‘두고 보자’라든지 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다 인간세계의 이야기입니다. 가까웠던 나라끼리, 친했던 민족끼리, 오랫동안 교제했던 사람끼리 서로 싸우는 일들이 우리 인간들 세계에서 일어납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마귀가 역사해서 그렇습니다. 마귀는 이 <자중지란 작전>의 효과를 너무 잘 압니다. 사람을 넘어뜨리고 성도들을 쓰러뜨릴 때, 이 <자중지란 작전>을 사용합니다. 마귀는 멀리에 있는 사람을 통해 공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까이에 있는 친한 사람을 통해, 오랫동안 교제하였던 사람을 통해, 없어서는 못 살 것 같은 관계에 있는 사람을 통해 공격합니다. 가까운 사람을 서로 다투게 하여 성도를 넘어뜨리는 작전을 구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마귀의 작전을 기억하고 이 마귀의 작전에 넘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만약 가까운 사람이 싸움을 걸어오면 ‘아, 마귀의 자중지란 작전’, ‘마귀야, 너 사람 잘못 보았어’, ‘마귀가 슬슬 장난치는군’ 이렇게 생각하고 마귀 자중지란을 무력화시키기를 바랍니다. 마귀의 작전에 넘어가지 말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유다 사람들은 블레셋의 자중지란 작전에 말려들어 같은 편인 삼손을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줄을 두 겹으로 결박한 후, 그가 숨어있던 바위틈에서 끌어내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의 대부대가 집결해 있는 레히라는 곳으로 삼손을 끌고 갔습니다. 삼손이 줄로 꽁꽁 묶인 채 레히에 도착하자마자,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아직도 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르는 동시에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그 팔위의 줄이 불탄 삼과 같아서 그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삼손이 블레셋에게 넘겨지는 순간, 다시 한번 성령의 능력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를 묶고 있던 포승줄을 실을 끊듯이 끊어버리고 옆에 있던 나귀턱뼈를 집어 들었습니다.
나귀턱뼈로 거둔 삼손의 놀라운 승리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 나귀턱뼈를 가지고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15절과 16절을 보겠습니다.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취하고 그것으로 일천 명을 죽이고 가로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 삼손은 칼이나 창이나 활과 같은 정식 무기가 아닌, 나귀턱뼈 하나로 블레셋 사람들을 상대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개 패듯이 무려 1,000명이나 되는 블레셋 사람을 패 죽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삼손이 어떻게 이러한 엄청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그에게 항상 엄청난 힘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유다 사람들에게 무기력하게 잡혀 포승줄에 묶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졌던 것을 보면, 그에게 항상 천하장사와 같은 괴력이 있었던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귀턱뼈 하나로 1,000명을 쳐 죽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어떻게 해서 그가 이러한 천하장사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신, 다시 말하면 성령의 능력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서 엄청난 힘이 그에게 생긴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 보신탕 먹고 남은 개뼈다귀든지, 사골국물 우려먹고 남은 소 뼈다귀든지,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을 먹고 남은 닭 뼈다귀든지, 능력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 아무리 별 볼일 없는 사람도 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 아무리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믿으십니까? 사도행전 4장을 보면 어릴 때부터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잡이만 하던 베드로가 기탄없이 말하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사도행전 4장 13절과 14절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희(관원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오순절 날 성령의 능력을 경험한 베드로가 학교문턱에는 가보지 못하고 전혀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꿀리지 않고 자유자재로 대답하는 것을 보고 관원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석학들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 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놀라운 역사를 감당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얼리니스트가 그의 놀라운 연주로 청중을 감동시켰습니다. 한 곡이 끝나자마자 그는 그가 연주한 바이올린을 산산조각 나게 부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른 바이올린을 들고 “여러분을 놀랍게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부숴버린 바이올린은 길거리에서 아주 싼 값으로 구입한 이름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세계적인 명구 스트라디바리우스가 만든 바이올린으로 연주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다시 연주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청중들은 그 차이점을 거의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때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은 제가 가지고 있는 바이올린의 가치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음악은 악기에 거의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음악은 연주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계를 의식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조건이 너무 좋지 않다고 합니다. 주위 환경이 너무 어렵다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 삶의 연주자이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아름다운 선율이 가득한 인생으로 바꿔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히기만 하면, 우리가 나귀턱뼈 같은 연약한 존재라 할지라도 우리는 모든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다윗처럼 나이어린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이 임하기만 하면,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골리앗을 누르고 승리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전혀 배우지 못한 베드로와 같이 우리의 배움이 짧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이 임하기만 하면, 우리는 수많은 박사들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하십시오. 성령의 충만을 구하십시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나귀턱뼈 하나로 1,000명이나 되는 블레셋을 물리치고 승리한 삼손처럼, 우리 또한 승리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삼손은 1,000명의 블레셋 사람을 죽이는 승리를 거둔 후, 턱뼈를 집어 던지고 그곳 이름을 ‘라맛 레히’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턱뼈의 언덕>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대승을 거두었던 삼손이 이 <턱뼈의 언덕>에서 심한 탈진상태에 빠졌습니다. 18절과 19절을 보겠습니다.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 정신없이 혼자서 1,000명과 싸워서 이기기는 했지만, 승리하고 나니 힘이 다 빠져버렸습니다. 심히 목이 말랐습니다. 만약 그가 여기에서 쓰러진다면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몰려와서 그를 죽일지도 모르는 위기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하셔서 다시 한번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 앞에 우묵한 곳을 터뜨려서 생수를 솟아나게 하신 것입니다. 삼손은 그 생수를 마시고 다시 용기와 힘을 얻었습니다. 그라고 그는 그곳 이름을 ‘부르짖은 자의 샘’이라는 의미의 ‘엔학고레’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삼손의 부르짖는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다시 한번 성령의 능력으로 그를 재충전시켜 주었습니다. 삼손은 성령의 능력으로 새 힘을 얻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새 힘을 얻은 삼손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하나의 또 다른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삼손이 승리를 거둔 ‘라맛 레히’와 영적인 침체에 빠진 ‘엔학고레’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라맛 레히’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까? 턱뼈의 언덕입니다. 삼손이 성령의 능력으로 승리한 장소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승리한 현장에서 삼손은 목말라 죽겠다고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놀라운 승리를 거둔 자리에서, 바로 침체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승리의 기쁨을 맛본 만큼, 침체의 늪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적으로 침체에 빠진 사람이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봉사입니까? 아니면 성경공부입니까? 아닙니다. 영적침체에 빠진 삼손이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우리가 영적침체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할 때, 성령께서 능력으로 임하셔서 우리에게 새 힘을 공급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 여러분들이 영적침체에 빠졌다면, 아니 앞으로 영적침체에 빠질 경우, 다른 것보다도 가장 우선적으로 삼손처럼 부르짖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제가 목이 마릅니다. 제가 엄청난 승리를 거두고도 깊은 침체에 빠져있습니다.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다시 한번 능력을 공급하여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힘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성령의 샘이 우리 심령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올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은 더 큰 좌절을 부릅니다
삿 15:1-8 /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은 자신의 아내를 블레셋 친구에게 빼앗긴 삼손의 보복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삼손은 자신을 배신한 아내에게 실망하여 그녀를 블레셋에 버려두고 집으로 돌아갔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그의 마음이 안정되자 그녀에 대한 미련이 다시 생겨 1절에 다시 그녀를 데려오기 위해 화해의 표시로 염소 새끼를 준비하여 처가로 갔습니다.
그러나 삼손이 그녀를 다시 찾았을 때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 있었습니다.
삼손은 자신을 배신한 아내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그를 맞이한 현실은 그의 기대와 달리 그를 화나게 하고 슬프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 성도들이 거듭난 자신의 신분을 잊어버리고 다시 세상에 발을 딛게 될 때 맞이하게 될 결과가 어떠한 것일지에 대한 충고를 받게 됩니다.
성경은 이에 대한 교훈을 창세기의 롯의 아내를 통해서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롯의 아내는 하나님의 사자들의 지시하심을 받아 타락한 소돔 성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자들이 주었던 경고는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뒤를 돌아봄으로써 그 결과 소금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롯의 아내는 무엇 때문에 뒤를 돌아 보았습니까?
그녀가 버려야 할 소돔 성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때 미처 가지고 나오지 못한 가재도구나 패물을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또는 육체의 탐닉과 쾌락으로 가득 찬 그 성이 망한다는 것에 미련을 두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같은 미련을 포기하지 못함으로 자기도 소돔과 함께 멸망당하는 처지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삼손의 모습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관심을 두고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삼손이나 롯의 아내처럼 육신의 정욕이나 세상의 자랑에 마음이 집중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 미련을 모두 끊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신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눅 16:13).
오늘, 주신 교훈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오직 성도로서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따라 귀하고도 선한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그리고 2절에 장인은 삼손의 아내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으므로 그녀의 동생을 대신 아내를 삼으라고 말합니다.
장인의 이러한 제의는 어떤 면에서는 삼손이 당한 억울한 마음을 보상해 주겠다는 특별한 배려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사실은 나실인인 삼손이 또한번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삼손이 또다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결과를 낳는 일이었습니다.
만일 이때 삼손이 장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그는 더 깊은 탐욕과 죄악의 수렁에 빠져들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사탄은 삼손의 경우처럼 틈만 나면 우리 성도들의 실수를 통해 더 큰 죄에 빠지도록 미혹합니다.
이러한 사탄의 유혹은 그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의 반석에 서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강하게 유혹합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유명한 이야기가 바로 다윗의 범죄입니다.
순간적인 음욕에 빠져서 유부녀인 밧세바와 간음한 다윗 왕은 밧세바가 임신하자 자신의 간음을 숨기기 위해 그녀의 남편인 충신 우리아를 죽이는 더욱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만일, 그때에 다윗이 조금만 더 현명했더라면 간음한 일을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말하고 용서를 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죄가 밝혀질 경우의 세상의 이목이 두려워 무고한 우리아를 죽이는 악행을 저지르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두려워하다가 더 큰 타락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결국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무서운 징계를 받아야 만 했습니다(삼하 11:1-12:12).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끊임없이 타락으로 이끄는 세상의 유혹을 과감하게 뿌리쳐야 합니다.
세상의 유혹을 한 번 두 번 용납하고 따라가다 보면 삼손과 다윗처럼 끝이 없이 추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러한 유혹들에 의해 우리의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야고보서 4:4에서 “누구든지 죄에 빠진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이 세상이 원하는 일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가를 가려서 행함으로 실족하거나 범죄하여 하나님을 근심시키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3. 이어지는 3절 이하의 말씀에는 삼손은 자기 아내를 블레셋 사람에게 빼앗긴 것에 대하여 보복한 사실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손은 여우 삼백 마리를 잡아 두 마리씩 서로 꼬리를 묶고 그 꼬리에 횃불을 붙여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 밭으로 몰아 들여서 곡식 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포도원과 감람나무들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가 어떻게 300마리의 여우를 잡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은 한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받지 않았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감정적인 복수에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능력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압제에서 구원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으로 자기의 개인적인 복수에 사용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그러한 개인적 복수마저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이루어 가는 방편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삼손의 행위의 근본 동기 자체는 결코 옳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성도들 중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잘못 오용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신 사명에 따라 각 성도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삼손처럼 강한 육체적인 능력을, 어떤 사람에게는 병을 치유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사람들을 다스리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이나 방언이나 축사의 은사를, 또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나 지식의 은사를, 각각 주어진 사명에 따라 다양한 은사를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은사를 받은 성도들은 그 은사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에 합당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성도들이 그러한 하나님의 은사를 개인의 유익과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마치 자기 개인의 것인 것처럼 유용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범죄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은사를 받으셨습니까?
그러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그 주신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더 큰 은사를 받으셔서 이 땅의 빛과 소금을 역할을 더욱 담대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감당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본문의 삼손의 모습을 통해 우리 성도들이 거듭난 자신의 신분을 잊어버리고 다시 세상에 발을 딛게 될 때 맞이하게 될 결과가 어떠한 것일지에 대한 충고를 받았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마치 자기 개인의 것인 양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도 깨닫게 됩니다. 삼손의 삶을 상고하며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고 잘못된 부분을 돌이키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삼손의 복수
삿 15:1-8
"A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집안이 매우 가난해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어릴 적부터 남의 집일을 도와주면서 받은 돈으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A라는 사람은 평소 B라는 같은 또래의 이웃집 아이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A는 장차 돈을 많이 벌어서 B에게 복수를 하기로 다짐합니다. 그리고 결국 A는 성공을 하게 되고 힘있는 자가 됩니다. 그리고 A는 그 힘으로서 B를 몰락을 시킵니다."
위의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드라마와 같은 내용을 간단하게 적어 본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복수극'이라는 것은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고의로 피해를 입히고 또는 자신이 힘이 없을 때 무시하고 천대를 했다거나 한 자에 대한 복수는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상황설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만약 그런 내용의 드라마를 봤다고 할 때 분명 A아니면 B의 편을 들게 될 것입니다. 아주머니들이 서로 모였을 때도 인기 있는 드라마의 내용으로 얘기꽃을 피우면서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다는 자기 판단을 서로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위의 내용으로 전개되는 드라마를 봤다고 할 때 과연 어떤 판단을 하겠습니까? 성공을 해서 B에게 복수를 하는 A가 잘못했다고 여겨집니까 아니면 애초 B가 A를 무시하고 멸시했으니 A의 행동 은 당연하다고 여겨집니까?
하긴 드라마에서 A에 대한 무시와 멸시가 극에 달한 내용을 봤을 때 자연히 A에 대한 동정심이 일어나게 되고 결국 그 동정심은 A의 행동에 대한 정당함을 이끌어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대로 된 판단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동정심이라는 것이 인간의 판단을 어느 한쪽으로 기울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단지 'A라는 사람이 무시를 당했고 결국 복수를 했다'는 글을 통해서 과연 A가 잘못했는가를 물을 때 여러분은 어떤 판단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판단은 참으로 애매합니다. 물론 복수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당초 A에게 복수의 마음을 심어준 것은 B입니다. 결국 B는 인과응보를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A로서는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판단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때로 어떤 일에 있어서 잘잘못을 판단해야 할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는가를 판단한다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 말을 들어보면 그것이 옳은 것 같고, 저 사람 말을 들어 보면 또 그것이 옳은 것 같을 때 과연 누가 잘했고 잘못했는가를 판단한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경우 대개 누가 잘했다는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둘 다 이해가 된다는 말을 함으로서 서로 조금씩 양보해서 화해를 하도록 종용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가 연루된 일이라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이미 마음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그의 편을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이 있는 사람이 연루된 경우에도 자연히 힘있는 자의 편을 들어서 그가 옳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이처럼 제삼자의 입장에서 잘잘못을 판단해야 할 상황에 처할 수가 있고, 아니면 우리 자신이 누군가와 감정의 대립이 생기고 마음 속으로 복수를 다짐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아는 것이 참으로 필요할 것입니다.
앞서 얘기한 A의 경우에도 우리가 만약 그 일에 대한 판단자라면 우리의 생각이나 도덕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세상을 판단하시는 하나님은 어떻게 보시는가를 묻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렇게 보신다"는 것이 문제의 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상에 비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비판할 만큼 정당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비판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문제에서든 우리의 생각으로 판단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이 일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실까?'를 묻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A라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 그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떤 판단을 하실까요? 그에 대한 답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삼손이 블레셋을 친 사건의 내용입니다. 수수께끼의 사건이 있은 후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다시 여인의 집을 찾아가서 아내를 보고자 합니다.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간 것은 삼손이 아내와 화해하고 다시 동거하기를 원하는 마음의 선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삼손은 아내와 함께 살기를 원해서 찾아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인이 삼손을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그리고 "가로되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로 내가 생각한 고로 그를 네 동무에게 주었노라 그 동생이 그보다 더욱 아름답지 아니하냐 청하노니 너는 그의 대신에 이를 취하라"(2절)고 말합니다.
즉 삼손의 장인은 삼손이 아내를 미워하는 줄을 알고 그 아내를 삼손의 동무, 다시 말해서 결혼 잔치에 동무로 소개받았던 30명의 블레셋인 중 한명에게 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의 동생이 더욱 아름다우니 그를 아내 대신 삼손에게 주겠다고 합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블레셋 사람들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자 그들은 삼손의 아내를 이용합니다. 삼손의 아내는 울면서 애원을 하게 되고 결국 삼손은 답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블레셋 사람들이 답을 알게 되고 삼손은 내기에 져서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곳 사람 삼십 명을 죽이고 옷을 노략해서 수수께끼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해서 아비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을 볼 때 삼손이 장인은 삼손은 노해서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다시는 아내를 찾으러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과의 친분을 위해서 삼손의 아내, 즉 자기 딸을 30명 중 하나에게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삼손이 다시 아내를 찾아왔을 때는 이미 그 아내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장인은 대신 아내의 동생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장인에 대해서 화가 난 삼손은 블레셋 사람을 치게 된 것입니다.
삼손은 여우 삼백 마리와 홰를 이용해서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감람원을 모두 불살라 버립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러한 삼손의 행동을 정당한 것으로 보십니까? '삼손이 블레셋을 치게 된 것은 삼손의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줘버렸기 때문이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래서 삼손의 행동은 정당하다고 여겨집니까? 만약 삼손의 행동이 정당하다면 그것은 결국 인간의 복수의 행동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에게 손해를 입힌 자에 대해서 복수하는 것은 극히 당연한 것으로 답이 내려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삼손이 블레셋을 친 것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의 곡식과 감람원을 태워버리자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와 그의 아비, 즉 삼손의 장인을 불살라 버립니다.
"블레셋 사람이 가로되 누가 이 일을 행하였느냐 혹이 대답하되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니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취하여 그 동무 되었던 자에게 준 연고니라 블레셋 사람이 올라가서 그 여인과 그의 아비를 불사르니라"(6절) 이것이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에게 한 복수극입니다. 그렇다면 삼손에게 복수한 블레셋 사람들의 행동은 정당한 것입니까 잘못된 것입니까?
삼손이 블레셋을 친 것이 정당하다면 결국 블레셋이 삼손의 아내와 장인을 죽인 복수 역시 정당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애당초 블레셋이 삼손의 아내를 이용해서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당초 일은 수수께끼를 낸 삼손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수수께끼는 하나님이 강하신 분임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코 삼손의 자존심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수수께끼를 결국 자기 자존심의 문제로 연결짓습니다. 내기에 졌다는 것, 더구나 그들이 자기 아내를 이용해서 답을 알아냈다는 것에 진노한 것입니다. 그 진노를 아스글론의 사람을 쳐서 그 옷을 블레셋인에게 줌으로서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결국 문제는 삼손에게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블레셋의 복수가 정당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삼손인가 블레셋인가? 를 물을 때 누구의 잘못으로 답을 내려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답을 제대로 아는 것이 우리가 신자로서 제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삼손이나 블레셋사람들처럼 손해보지 않으려고 하고 나에게 해를 끼친 자에 대해서는 복수를 마음먹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손이나 블레셋의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삼손과 블레셋 사람들의 대립이 바로 오늘 우리가 서로 대립하고 살아가는 인간관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수는 그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도 우린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7,8절을 보면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은 후에야 말리라 하고 블레셋 사람을 크게 도륙하고 내려가서 에담 바위 틈에 거하니라"고 말합니다. 삼손은 자신의 아내와 장인을 죽인 블레셋 사람에게 또 다시 복수를 합니다. 그리고 9절부터의 말씀에서도 또 다시 삼손에 대해서 복수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볼 때 복수는 그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성을 가지고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이 단순히 '복수하지 말라'는 도덕적인 교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나실인으로 태어난 삼손이 과연 하나님의 사람으로 선택받아 태어난 삼손이 무엇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었기에 본문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하고"라고 말합니다. 삼손은 블레셋을 치기에 앞서서 '내가 블레셋을 쳐도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즉 삼손이 블레셋을 치게 된 이유는 모두 블레셋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블레셋이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에 삼손이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니까 모든 책임은 블레셋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함으로서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린 흔히 '나를 더 이상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말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다시 말해서 원래는 나쁜 사람이 아닌데 너로 인해서 나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악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다른 이에게 전가시킴으로서 자신에게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람의 심리는 어떻게든 자기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자신의 행동이 나쁘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그 모든 원인을 제 삼자에게 전가시킴으로서 행동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심리는 결국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지로밖에 볼 수 없고 자신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인간의 악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악함은 창세기에 잘 나타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하나님은 아담에게 먹지 말라고 명한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담은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실과를 먹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실과를 먹은 것은 잘못이지만 먹게 된 이유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서 함께 하게 한 여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자만 아니었으면 먹지 않았을 것이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와 역시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님이 하와에게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고 물으시자 하와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답합니다. 하와 역시 실과를 먹은 것은 잘못이지만 전적으로 내탓이 아니라 뱀 때문에 먹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자기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제 삼자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잘못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이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아마 하나님이 삼손에게 '왜 블레셋을 쳤느냐?'고 물으신다면 삼손은 블레셋을 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내세울지도 모릅니다. 블레셋이 자신으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하나님에게 이러한 변명을 일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잘못을 범했을 때 자신의 행동을 회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다고 생각함으로서 스스로의 변명 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입장을 우선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삼손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입장과 자존심을 생각하는 가운데 블레셋을 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블레셋을 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삼손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볼 때 어쨌든 삼손이 블레셋을 친 것은 옳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블레셋을 쳤다는 것보다는 블레셋을 치고 있는 삼손의 마음인 것입니다.
삼손의 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힘입니다. 삼손이 포도원에서 만난 사자를 죽일 때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삼손의 힘이 삼손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힘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삼손은 그 힘으로 블레셋을 치기는 했지만 그 본래의 목적은 블레셋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이며 화풀이였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삼손의 힘은 개인적인 소유물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삼손을 선택하신 것이고 부르신 것이고 힘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손은 자신의 힘을 개인적인 분풀이에 허비할 수는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내기 위해서 힘을 쓰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러한 결론을 내려본다면 삼손이 잘못인가 블레셋이 잘못인가라는 물음에서 잘못의 기준을 누구의 행동이 더 심했느냐로 따질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사실 삼손과 블레셋을 비교하면서 누가 잘못인가를 물을 수는 없습니다. 블레셋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으로서 그 자체가 이미 저주받을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멸망이라는 운명에 있는 블레셋을 두고 그들이 잘못했는가 잘했는가를 물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서 일어난 어떤 일을 두고 '누가 잘못했는가?'를 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불신자는 이미 저주 아래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우리가 보기에 옳은 일을 했다고 해도 그들을 두고 '옳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려는 의도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물어야 합니까? 블레셋을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하든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삼손이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삼손은 분명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을 오직 자기 분풀이를 위해서, 자기 자존심을 위해서 쓰고 있습니다. 결국 삼손 역시 블레셋과 같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삼손도 불신자다는 것을 말하자는 것이 아니라 과연 삼손에게 블레셋을 칠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없습니다. 삼손 역시 하나님에게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삼손의 잘못은 하나님 앞에서 현재 자신이 어떻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블레셋을 칠 자격이 없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삼손은 현재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우리 소유로 여기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돈이든 권력이든 무엇이든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즉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을 내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것을 힘으로 과시합니다. 우리의 사사로운 분풀이나 자존심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힘을 허비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것을 내것으로 여기기에 복수가 나오고 화풀이가 나옵니다. 만약 우리가 주어진 것에 대해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일과 뜻을 위해서 주신 것임을 생각한다면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타인을 괴롭히고 복수하는 도구로 사용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린 지금껏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삼손처럼 말입니다. 이런 우리가 누구를 칠 자격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불신자를 칠 자격이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어떤 자인가는 주님이 잘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그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정직한 모습입니다. 누구를 칠 자격이 없이 오히려 저주 아래 죽어 마땅한 자가 저와 여러분입니다.
우리가 뭔가 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 재주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잘한 것을 내세워서 남을 무시하고 자기를 과시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을 아는 자가 바로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 말씀 드렸던 A와 B의 경우에 A를 신자라고 한다면 그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그가 복수를 했다는 것보다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기 개인의 복수를 위해서 스스로 얻은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없는 불신자들의 생각인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신자로서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이점을 항상 상기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그 어떤 것도 우리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린 우리의 소유가 하나님을 보여주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데 도구로 쓰여지기를 소망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산다면 분명 그는 자기의 힘을 가지고 개인적인 복수나 화풀이,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허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도 분명 힘이 있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께서는 힘을 내세워서 자신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희생으로서 스스로를 증명하셨습니다.
우린 우리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삽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많은 것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정당하고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정당하시고 옳으신 분임을 증거 하라고 세워진 것이 우리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