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를 위해 유족도 활발히 나서고 있다. 이 박사의 아들인 이인수 박사를 1일 만나 이 대통령에 대한 국가ㆍ사회적 인식의 현주소에 대해 물었다. 이인수(78) 박사는 정치학자로 명지대학교 법정대학 학장을 역임했으며 현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고문이다. 다음은 인터뷰 요지.
-이승만 박사의 업적을 요약하자면? “그는 대한민국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이 박사는 가장 어려울 때 나라를 맡았지만 65만 명의 군대를 양성했고 인재를 양성했으며 기업도 키웠다. 갈브레이스 등 학자들은 국민 교육이 민주주의나 경제 발전의 기초라고 말한다. 이 박사는 교육에 역점을 두었다. 전쟁 중에서도 대학생들은 징집을 보류했다. 원자력 연구도 그가 지시해 시작됐다. 이런 업적에도 불구하고 이 박사가 60년 하야한 이래 지금까지 반(反)이승만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TVㆍ신문ㆍ학계 등 모두 이 대통령의 부정적인 면만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은 어떤 관계인가. “이 대통령이 닦은 토대 위에 박정희 시대의 경제 성장이 있었다. 박정희가 모두 다 했다고 하는 것, 박정희가 국부라고 하는 것은 ‘너무한’ 거짓말이다. 박정희 정부는 1공화국 문서를 소각해 우리나라 건국초기 재정사를 쓸 수 없을 지경이 됐다. 이 박사는 축재를 전혀 하지 않았다. 이승만을 빼면 건국사가 사라지는 것이다. 일제에 충성한 박정희가 국부가 되는 역사를 만들 것인가. 앞으로 나라를 짊어질 젊은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직하게 되는 것이다.”
-친일파 문제에 대해 이 박사는 어떤 입장이었는지. “이 박사의 입장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 민족이 과거 어두운 역사가 있었다. 우리 민족이 불민(不敏)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나처럼 나이 많은 사람들이 죄가 크다. 죄는 내가 지겠다. 여러분들은 새 나라를 위해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
-건국 후 이 박사의 일본관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당분간은 일본이 들어오지 못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평화선을 쳐놓고 부산에 수용소를 만들었다. 일제시대에 공부한 사람들을 썼으나 왜색은 배척했다. 민족의 정신과 전통을 하나하나 다시 세우고 복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단기(檀紀)를 썼고 동경표준시가 아니라 우리 시간을 썼다. 박정희와 다른 점이다.”
-남한의 농지개혁이 북한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이 있는데. “원래 하시려고 했다. 지주세력인 한민당이 문제였다. 지주는 해방 안 돼도 잘 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해방이 되어서 뭐가 기쁜지 실감할 수 없는 지주도 있었다. 60~70년대까지만 해도 내게 편지를 보내 땅을 빼앗겨 살기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앞으로 이 박사에 대한 재인식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Republic of Korea’라는 말을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해 물으면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바로 이승만 박사다. 그만큼 현대사에서 이 박사는 뺄 수 없는 존재다. 학력ㆍ학식ㆍ경륜에서 그만한 분이 없었다. 역사적 연구도 필요하다. 정권이 바뀐 지금도 반(反)이승만 시대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볼만한 사료가 나오고 있다. 연구가 활성화 될 수 있다. 언론인들도 이승만 박사를 재발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