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찬미예수님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쓰시겠다고 그러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도구로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를 묵상해야겠습니다.
서울의 어느 본당에서 피정을 시켰을 때인데 점심시간에 어느 형제가 제 앞에 오더니
“신부님 앞에서 같이 밥을 먹어도 되겠습니까?”
“그러십시오. 앉아서 드십시오.”
그 형제는 내 앞에 앉더니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식사하시지요.”
“네”
말만해놓고 여전히 쳐다보기만 하는데 밥 들어가겠습니까?
안 들어가죠?
밥을 아무리 먹으라.... 그래도 밥을 안 먹는 거예요.
처음엔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이 사람 혹시 이게 호모가 아닌가?’
쳐다보는 눈도 끈적끈적한 게~~
“식사 하시라니까요....딴 데 가서 먹던지....식사를 하십시오. ..내가 밥이 입으로 안 들어갑니다.”
그제야 “신부님! 제가 어찌 밥이 입으로 들어가겠습니까?”
“그럼 어디로 들어갑니까? 콧구멍으로 들어갑니까?”
그분이 얘기를 털어놓기 시작하는데 자기는 IMF전에는 돈 잘 벌던 사장 이였데요.
집도 좋고 근사한 차도 타고 다녔고, 주말만 되면 골프 치러 다니느라 비즈니스 때문에....
성당 못나가는 건 기본이었고... 부인 혼자 간신히 신앙생활을 했다는 거예요.
IMF가 터졌습니다.
자기 거라고 생각했던 그 재산이 한순간에 다 날아가 버리고 집안도 풍비박산이 되고...
마누라는 어디로 가버리고... 애들도 다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그야말로 빈털터리가 돼서 인생사는 것이 하도 기가 막혀서 두 번이나 동맥을 끊었대요.
왜 끊었겠습니까?
죽으려고.....나이 사십 초반에....
근데 모진 목숨인지라 죽을만하면 누가 발견해서 병원에 데려가서
살려놓고... 또 살려놓고.... 그 후엔 어떻게 했느냐?
서울에 제일 높은 달동네에 쪽방 하나 얻어놓고 낮에는 등짐지고
일하고 밤에는 술로 살았는데 항상 산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뭘 찾았느냐?
축대가 제일 높은 데를 찾았대요.
떨어져서 한 번에 머리통 터져서 죽을 수 있는 곳을 찾아서~~
그날 밤 죽기로 작정하고 캄캄한 그 축대위에 걸터앉아가지고
소주를 다섯 병을 숨도 안 쉬고 먹었대요.
그리고 휘황찬란한 서울 야경을 쳐다보면서 몸을 그 밑으로 날렸다 그럽니다.
떨어져 죽은 거지요?
근데 눈이 부시더라는 거예요. 그 다음날 아침에....
아, 눈을 떴더니 살아있더라는 거예요.
고개를 쳐들어 위를 보니까 축대꼭대기가 보이고...
내가 분명히 떨어진 것은 확실한데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세상에 그런 일도 있었대요.
그날 오전까지 그 시멘트 바닥이 말짱한 것을 확인했었는데
오후에 누가 이사를 가면서 침대 매트리스를 버리고 간 거야.
두 장이나.... 하필이면 어디로 떨어졌느냐?
침대 매트리스위에 떨어지면서 정신을 잃고 아침까지 간 겁니다.
이렇게 보니 침대 매트리스 버리고 간 쓰레기가 있더래요.
‘엉~~엉~~’ 울면서 세상에 이렇게 죽기가 힘들단 말인가?
고개를 돌려서 쓰레기더미에 쇼핑백이 눈에 띄기에 쇼핑백 안을 이렇게 들여다봤대요.
무슨 테이프 하나가 보이더래요.
꺼내서 보니까 [김웅렬신부님 강론집]
제목은 [돌아온 탕자 이야기]
그 테이프를 들고 다시 쪽방으로 돌아와서 터덕터덕... 거리는 고물 녹음기에다 꽂아가지고
"신부님 저는 삼일동안 밥 한 톨을 안 먹고 방바닥을 벅벅 긁으면서 저는 울었습니다.
나 같은 놈 뭐 써먹을게 있다고 이렇게 살려주시나...나 같은 놈 뭐 사용 할데가 있다고...
침대 매트리스까지 깔아주시나? 멀쩡한 테이프 버리고 가게하고....."
회개의 눈물이 쏟아지는데 삼일동안... 한평생 흘릴 눈물보다 더 많이 흘렸대요.
‘ 그래 이제부터의 삶은 내 꺼가 아니다. 주님이 분명히 나를 쓰시겠다고 살리셨는데
뭘 어떻게 해야 될까? 나를 뭘로 쓰실 건가?’
곰곰이 묵상하다가 한 가지가 떠올랐대요.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혜화동에 있는 카톨릭 교리신학원에 들어가서 등록을 하고 2년 동안 공부를 해서
선교사 자격증을 따가지고 저 강원도 양구에 있는 폐쇄된 공소 하나를 일으켜 세우고 있다고 그랬어요. 서울에 물건 사러 왔다가 서울 교구 주보를 보니까 마침 내가 어디서 피정을 한다......
해서 찾아왔다 이겁니다.
그런데 그 신부님을 테이프로 목소리만 듣다 코앞에 앉아서 바라보고 있는데
신부님, 제가 지금 밥이 넘어가겠습니까?
참 소설 같은 얘기였어요.
어떻게 침대 매트리스위에 떨어져?
그분은 뭐 지금도 쓰러져가는 그 공소 일으켜 세우면서 냉담자들
다 끌어들이고 이제 나머지 삶을 살아가고 있었어요.
그 양반 팔에는 동맥 끊었던 자리가 선명하게 두 군데가 있었어요.
주님께서 “나귀하나 데려와라!”
제자들이 나귀 주인에게 가서 ‘주님께서 쓰시겠답니다.’
주님이 쓰신다고 하는데 버틸 겁니까?
주님께서 니 시간을 쓰시겠다.
주님께서 니 물질을 가지고 역사를 하시겠다.
주님께서 너의 머리를 쓰시겠다.
주님께서 너의 신앙을 쓰시겠다.
할 때 내어드려야 하지만....
우리들은 이제껏 고집 센 당나귀처럼 버팅기고, 도망치려고 하고, 뒷발질하고 ...
하느님에게 삿대질하고.... .
예수님이 올라타니까 버둥버둥 거리던 고집덩어리 나귀도 순한 양처럼 변하여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오늘의 입성은 예수님답질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호들갑떨면서 폼 나게 입성할 분이 아니십니다.
당신은 늘 좋으신 일을 감추시고 겸손하기 그지없는 분이셨는데.....
그분께서 오늘은 마치 왕이나 되듯이 광내면서 폼 내면서 입성을 하십니다.
이것은 반대자들에 대한 선전포고였던 겁니다.
예수님이 전도생활을 하시는데 얼마나 많은 반대자들, 적들이 많았습니까?
반대자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악이 목에까지 찰대로 차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몸을 사리는 것이 상례이지만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삼국지에 나오는 장군처럼
“여포야! 내 들어간다. 문 열어라. 맞짱 한번 떠보자.”
기세도 당당하게 그 예루살렘 굴속으로 기어들어갑니다.
백성들은 아무런 뜻도 모르고 대대적인 환영을 했습니다.
더군다나 그 분이 나귀까지 타고 오시니 이제야말로 이 세상의 메시아, 우리를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주실 메시아,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시켜줄 메시아로 확신을 합니다.
예수님을 현세적인 삶을 구하는 메시아로 기대를 하며 손을 흔들고..
빨마가지를 흔들고 난리를 칩니다.
마치 슈퍼스타를 맞이하는 군중들처럼.....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원하는 그런 식의 메시아 역할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백성들의 꿈은 일순간에 무너집니다.
자기들의 기대에 못 미치자 그들은 분개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알고 보니 쥐뿔도 아니구나...저 놈 죽여라!...저
걸 환영했던 우리가 창피하다..저렇게 맥없이 죽을 놈을 우리들이 메시아로 알았으니
십자가에 못 박아라!”
철저하게 보복을 합니다.
기대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거지요.
세상은 요지경입니다.
어제의 환영자가 오늘은 돌을 던지고 침을 뱉습니다.
그들은 기대에 못 미치자 사정없이 짓밟습니다.
자기들이 하느님을 죽이리라고 하는 것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하느님을 죽여 놓고 2천년이 지났지만, 그 후손들은 뭐라고 그럽니까?
“2천 년 전에 죽인 사람은 메시아가 아니다...그냥 선생 하나 억울하게 죽은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죽인 사람은 메시아가 절대 아니다!”
이렇게 합리화시키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죽였다고 하면... 그 유대족속들이 양심에 걸려서 살아가겠습니까?
그러니까 아니라고 우기는 겁니다.
‘메시아 아직 안 왔다!’
유다인들은 그런 말을 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예수님의 수난사에는 그 분의 죽음에 깊이 관여했던 많은 인간들이 등장합니다.
나귀가 바로 우리이듯이....
예수님의 죽음에 관여했던 수많은 인간들의 모습이 우리들에게도 많은 곳에 배어있을 겁니다.
첫 번째로 대사제들과 원로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 죽이는데 일등 공신입니다.
예수님을 처형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었지요.
예수님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인물로 보였습니다.
성전 정화사건에서 보듯이 성전세와 상인들에게 많은 자릿세를 받고 살았던
대사제들과 원로들에게 예수님은 정면도전을 합니다.
‘저놈 그냥 내버려 두었다간 큰일 나겠구나...네가 니 명을 재촉하는구나!’
아주 위험인물로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큰 가시였기 때문에 죽일 음모를 구체적으로 꾸밉니다.
두 번째 도구가 된 것이 유다스였습니다.
“내가 스승님을 넘기면 얼마나 주겠소!”
유다는 스승을 노예 한사람 값인 은전 30냥에 팔아넘깁니다.
이처럼 돈에 대한 욕심은 사람을 눈멀게 합니다.
어쩌면 돈이 하느님인 사람에게는.... 아니 하느님보다 돈이 늘 앞서 있는 사람에게는
하루에도 수 십 번씩 언제라도 하느님을 버리고 돈을 선택할 겁니다.
그래서 돈 때문에 밀고와 배신과 청부살인은 인류역사상 늘 있어왔습니다.
프랑스의 루르드 성지에는 순례객이 1년에 평균 오십만 명이 다녀갑니다.
그 50만명 때문에 먹고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호텔, 성물집, 식당.....
피레네산맥 그 조그만 마을이 성지가 되면서 커다란 마을로 변했습니다.
거기에 있는 주민들은 100% 순례자들이 뿌리고 가는 돈을 먹고 살아갑니다.
그 곳 신부님 이야기 들어보면 호텔주인, 음식점 주인, 성물가게 주인이
다 세례 받은 천주교신자들인데 성당 나오는 사람 거의 없다고 그럽니다.
예수님 팔아서 지 주머니 챙길 생각 하지....
신앙생활 안 합니다.
저는 우리 감곡성당도 그렇게 될까봐 늘 노심초사합니다.
이 감곡성지가 커져서 수십만 명씩 일 년에 다녀간다면 분명히
그들의 필요에 따라서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성당 앞에 땅 사려고 하는 사람 있지요.
음식점 차리려는 사람 있지요.
모텔 들어설 겁니다.
수많은 장산꾼들이 생길 겁니다.
성지가 장사꾼들의 소굴이 되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가끔 신자들 내 귀에 들릴듯말듯하게
“신부님, 여기 오는 신자들.....전부다 우리 신자들 식당으로 돌려주면 안 되겠습니까?”
저는 안 된다고 그랬습니다.
본당에 식당 운영하는 사람 한둘이 아닙니다.
결국에는 그것 가지고 싸움이 납니다.
“누구네 집은 몇 번 돌리고 왜 우리 집은 한 번 돌리냐!”
루르드 성지에 있는 그 수많은 가게 신자들이 다 냉담자들이라는 사실....
돈이 하느님 보다 위에 있습니다.
순례자들 밥해 먹이느라고 성당에 못 나옵니다.
순례자들 잠재우는 모텔 운영하느라고 성당에 못 나옵니다.
그 귀한 성물을 팔면서 다 냄담자라들이라고 그럽니다.
순례 오는 신자들의 불편을 덜기 위해서 분명히 필요하긴 하지만
균형감각이 깨지면... 정말 제대로 조절을 하지 못하면.....
성지는 순식간에 장사꾼의 소굴이 됩니다.
세 번째로 열두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깊이 관여합니다.
현세적인 출세를 꿈꾸며 예수를 따라 다녔던 제자들은 스승이 체포되자
자기들의 불이익을 피하려고 하나같이 도망칩니다.
신앙 때문에 어떤 불이익이라도 생긴다면 언제라도 도망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단적인 예가 불이익이 아니라 하더라도 살면서 어려움이 생길 때 감실 앞에 와서 예수님께 매달리기 보다는 점집에 찾아다니고, 철학관을 들락거리고, 무당한테 가서 기웃거리는.... 세례 받은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압니까?
그 사람들에게는 신앙이 아니고 취미생활일 겁니다.
옛날 순교자들이 주로 누구에 의해서 밀고를 당했느냐!
하느님을 배반했던 신자들이 대부분 포졸들의 앞잡이가 되어서
천주교신자들이 숨어 있는 교우촌을 다 뒤지게 만들었던 겁니다.
우리나라에도 독재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독재시절에 공직에 있던 교우들 중에 천주교신자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할 때에 어떤 인간들은 인사처에 찾아가 돈을 주어가면서 신상카드에 있는 천주교신자라는 것 지워달라고 그랬습니다.
어떤 이들은 독재시절에 천주교신자라는 것 때문에 많은 불이익을 당하고 진급에도 누락이 되고.......불이익이 왔지만 당당하게 천주교신자임을 밝혔던 교인들은..... 외부 사람들과 밥을 먹으면서 그들 앞에서 십자가를 당당하게 그었던 천주교신자들은.... 비록 세속적으로는 출세는 못했어도 하느님의 축복을 분명히 받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세상출세를 위해 천주교신자임을 숨겼던 인간들은 죽을 때까지 양심의 옥쇄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이밖에도 예수님의 죽음에 관여했던 성난 관중들.....
그리고 자신의 정치생명에 영향을 줄까봐 예수님을 쉽게 내어 주었던
빌라도...등등
한마디로 예수님은 기득권 수호, 비겁함, 정치적 출세를 위해 사지로 내몰렸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우리들에게는 없는가!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죄악의 공모의 작품입니다.
이 성주간에 우리는 죄에 대해 죽고 새로 사는 길을 택합시다.
주님은 바로 너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바로 나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하는 것을 잊지 맙시다.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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