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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대도덕학』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인간적인 좋음’이며, 이 책은 공동체를 위한 ‘정치적 좋음’을 탐구하고 있다. 그래서 행복에 대한 논의에서 영원하고 신적인 좋음은 배제되며, 인간의 좋음인 덕의 활동과 사용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외적 좋음’ 역시 덕의 좋은 활동을 위한 가능성으로서 설명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래도 좋음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고, 더구나 그것은 무조건적인 좋음이 아니라 우리에게서의 좋음이다. 신들의 좋음에 대해서는 아니니까”(『대도덕학』 1182b3-4). 관조와 같은 지적인 덕으로서의 행복, 그리고 행복을 지적인 덕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신적인 좋음’에 관해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경험 세계에 사는 우리 대중들에게는 무리한 요구일 것이다. 또한 공동체를 위한 우리 모두의 목표는 덕에 맞게 행하는 활동이므로 『대도덕학』에서는 덕의 활동을 도울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외적 좋음이 필수적이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대도덕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음에 관한 여러 분석을 통해 최고의 좋음인 행복이 있다는 점을 긍정한 다음, 그 행복은 여러 좋음들의 구성들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즉 덕의 활동을 위한 가능성으로서 필요한 외적 좋음은 상식의 차원에 있는 것이며, 또 우리 경험 세계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대도덕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 행복론의 핵심은 혼의 좋음(덕)과, 신체의 좋음(건강, 외모 등), 그리고 외적 좋음인 재물이나 권력, 가문 등을 모두 포함한 것으로, 이는 인간적인 좋음인 동시에 경제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즉 ‘좋은 삶’을 살기 위해 국가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목표를 통해 성취된다는 점에 있다.
저자 소개
아리스토텔레스
그리스 북동부 칼키디케 반도 스타게이로스 출생. 별칭으로 ‘스타게이로스의 사람’으로 불렸다. 마케도니아의 왕 아뮨타스 3세의 시의(侍醫)였던 아버지 니코마코스 덕에 어린 시절 펠라의 궁전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17세가 되던 기원전 367년 아테네로 간 그는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 들어가 플라톤이 죽는 기원전 347년경까지 20년 동안 플라톤 문하에서 학문에 정진한다.
플라톤이 죽고 그의 조카 스페우시포스가 아카데미아의 새 원장이 되자 몇몇 동료와 아테네를 떠난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42년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왕에게서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의 교육을 위탁받은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알렉산드로스가 아시아 원정을 준비하던 335년 아테네로 돌아온 그는 아폴론 신전 경내에 뤼케이온이라는 학원을 설립한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고, 아테네에 반마케도니아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떠나 어머니의 고향 칼키스로 갔고, 이듬해에 세상을 떠난다.
그의 저술을 주제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논리학적 저작으로 『범주론』, 『명제론』, 『분석론 전서』, 『분석론 후서』, 『토피카』, 『소피스트적 논박에 대하여』 등이, 이론 철학적 저작으로 『자연학』, 『형이상학』, 『혼에 대하여』 등이, 실천 철학적 저술로 『니코마코스 윤리학』, 『정치학』, 『에우데모스 윤리학』, 『대도덕학』 등이 전해진다. 또한 언어학적 철학 저작인 『수사술』과 예술 이론적 저작인 『시학』이 전승되었고, 생물학 관련 작품으로 『동물 탐구』, 『동물의 부분들에 대하여』, 『동물의 운동에 대하여』 등도 전해진다.
목차
옮긴이의 말 5
일러두기 7
『대도덕학』은 어떤 책인가? 15
1. ‘책의 제목’에 대하여—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적 작품들 15
2. 윤리학 책들의 저작 순서 18
3. 이 책의 논의 구조상의 특징 20
(1) 문체상의 특징 21
(2) 내용상의 특징 25
4. 작품의 진위 문제와 관련해서 29
외적 좋음과 행복에 관하여 39
1. 행복이란 무엇인가? 39
2.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에우데모스 윤리학』에서 전개된 행복론 46
3. 『대도덕학』에서 설명되는 행복과 외적 좋음 54
4. 『대도덕학』이 남겨 준 윤리적 유산 73
제1권 77
I. 좋음의 규정 79
제1장 덕에 관한 선행 철학자들의 견해, 검토, 정치학과 좋음의 규정 79
제2장 좋음의 구분 (1)— 최고선과 행복 90
제3장 좋음의 구분 (2)— 최고선과 행복 95
II. 행복과 덕 98
제4장 행복과 덕 있는 삶 — 혼의 여러 부분 (1) 98
제5장 덕의 정의—혼의 여러 부분 (2) 102
제6장 성격에 관련된 덕과 쾌락, 습관화 106
제7장 성향, 감정, 능력, 성향과 중간임(중용) 107
제8장 감정과 중간임 108
제9장 모자람과 지나침, 덕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가? 109
III. 행위를 둘러싼 여러 요소 114
제10장 시원(원리), 덕은 자발적인가? 114
제11장 행위의 시원 115
제12장 자발성에 대하여 (1)—자발성의 본질, 욕망과 자발성 117
제13장 자발성에 대하여 (2)—바람, 자발성과 비자발성 118
제14장 자발성에 대하여 (3)—힘에 의한 강요와 강제에 대하여 (1) 120
제15장 자발성에 대하여 (4)—힘에 의한 강요와 강제에 대하여 (2) 121
제16장 자발성에 대하여 (5)—자발성과 사고 122
제17장 선택에 대하여 123
제18장 덕의 목적, 선택과 덕, 중간임과 목적 128
제19장 목적 131
IV. 성격과 관련된 여러 가지 덕 133
제20장 용기에 대하여 133
제21장 절제에 대하여 138
제22장 온화에 대하여 140
제23장 자유인다움의 후한 마음에 대하여 (1) 141
제24장 자유인다움의 후한 마음에 대하여 (2) 142
제25장 고매(원대한 마음)에 대하여 143
제26장 통 큼에 대하여 144
제27장 의분에 대하여 146
제28장 존엄에 대하여 147
제29장 궁리에 대하여 148
제30장 재치에 대하여 149
제31장 친애에 대하여 150
제32장 진실에 대하여 150
제33장 정의에 대하여 151
V. 지성에 관한 덕 171
제34장 사려와 혼, 사려와 이성, 사려와 지혜, 사려와 동기 부여, 사려와 행위 171
제2권 185
제1장 공평에 대하여 187
제2장 양식에 대하여 188
제3장 덕과 사려, 정의와 사려, 부정의한 행위와 자발성 189
VI. 자제력과 자제력 없음 196
제4장 자제력과 자제력 없음에 대하여 (1) 196
제5장 자제력과 자제력 없음에 대하여 (2) 197
제6장 자제력과 자제력 없음에 대하여 (3) 198
VII. 쾌락 220
제7장 쾌락에 대하여— 쾌락의 본질, 쾌락의 좋음과
최선에 관련된 논의에 대한 답변 220
VIII. 행복 235
제8장 행운에 대하여 235
IX. 덕의 완성 241
제9장 ‘지극히 훌륭하고 좋음’에 대하여, 완전한 덕 241
X. 올바른 이치 243
제10장 올바른 이치에 근거한 행위 243
XI. 친애 246
제11장 친애에 대하여 (1)—친애의 본질,
동등한 자와 동동하지 않은 자들에서의 친애, 친애의 세 가지 종류 246
제12장 친애에 대하여 (2)—호의, 마음의 일치(‘한마음’), 친애 263
제13장 친애에 대하여 (3)—자기애 (1) 267
제14장 친애에 대하여 (4)—자기애 (2) 269
제15장 친애에 대하여 (5)—자족과 친애 270
제16장 친애에 대하여 (6)—친구의 숫자 273
제17장 친애에 대하여 (7)—친애와 비난 274
참고문헌 277
찾아보기 285
책 속으로
만일 『대도덕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작이라면 시대적 관계를 두고 논의되어 온 것은 『니코마코스 윤리학』, 『에우데모스 윤리학』, 『대도덕학』이다. 문체와 내용적인 측면에서 『대도덕학』을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에우데모스 윤리학』 사이에 위치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에우데모스 윤리학』의 성립 순서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으나 이 두 책을 한 쌍으로 묶어 그 쌍보다 앞인가 뒤인가 하는 가능성을 물어볼 수는 있다. 다시 말하면 윤리학 세 작품들 가운데 『대도덕학』이 가장 먼저 쓰였느냐, 아니면 맨 나중에 쓰였느냐 하는 물음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18~19쪽)
디를마이어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나 『에우데모스 윤리학』에서는 ‘행복’(에우다이모니아)의 개념이 논고의 바탕에 깔려 있는 반면, 『대도덕학』에서는 그보다 오히려 ‘좋음’의 개념이 전면에 내세워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 사실을 바탕으로 이 책이 다른 윤리학 책에서 ‘발췌된 모음집’이 아님을 극구 주장한다. 이는 이 책이 다른 두 윤리학 책의 줄거리를 요약한 것이 아님을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반복이요, ‘요약’이라는 케이스Case의 입장에 대한 비판). 그렇다면 이러한 주장은 이 책이 나중 사람이 쓴 작품이 아니라는 논거가 된다고 생각한다. (33쪽)
내가 말하는 것은 곧 훌륭한 사람의 방식이다. 그런데 훌륭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덕(德)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폴리스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일에서 활동적이고자 한다면, 그는 성격에서 훌륭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아무래도 성격에 대한 고찰은 폴리스적 지식[정치학]의 부분이고, 또 그 단초(시작)인 것 같고, 일반적으로 그 고찰이 그 명칭이라는 점에서 성격과 관련되는 이름이 아니라 폴리스와 관련된 명칭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점도 나에게는 올바르다고 생각된다. (80쪽)
이제 존중받아야 한다고 내가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신적인 것, 혼과 지성과 같이 더 나은 것, 더 원초적인 것, 시원, 이런 종류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 위에 명예가 놓여져 있는 것이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지금 든 것과 같은 모든 것에는 명예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덕 또한 적어도 한 사람이 그것으로부터 훌륭한 것이 되는 한 존중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이미 덕의 특징적인 형태와 기본 형태(schēma)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칭찬받아야 할 것은, 예를 들어 여러 가지 덕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따르는 행위로부터 칭찬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능성이란 지배, 부, 강건함, 아름다움과 같은 그런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훌륭한 사람이 잘 사용할 수도 있고, 못된 사람이 나쁘게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91쪽)
당신이 누군가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그래서 신들조차 두려워하지 않게 한다면, 그 사람은 용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미친 것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면, 그 사람은 겁이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자나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자가 용기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것이 덕을 증대시키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은 [용기의 덕을] 파괴하고 또 어떤 것에 대해서도 두려움이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적당한 공포가 용기를 키우듯 용기는 두려움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같은 것에 의해 용기는 증대되기도 하고 파괴되기도 하는 것이다. (105)
덕의 목적은 아름다움이다. 그러므로 덕은 아름다움이 그것으로부터 성립하는 것보다 오히려 아름다움을 과녁으로 삼는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 또한 덕에 속한다. 이 점이 덕 전체로 넓혀진다면 우습게 보일 것이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그림에서 좋은 모방자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최선의 것들을 모방하는 것을 목표로 세우지 않는다면 칭찬받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 즉 아름다움을 세우는 것은 전적으로 덕에 속한다. (131쪽)
출판사 서평
객관적 덕에서 비롯된 ‘최고선’이야말로
개인과 공동체가 추구해야 하는 궁극적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핵심인 ‘행복론’은 철학뿐 아니라 심리학, 정신의학, 신경의학 등 인간의 심리적 문제 치유(terapia) 영역에도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오늘날의 행복은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면 행복하다’는 긍정적 자신감과 주관적 만족으로 대체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은 주관적 감정이 아닌 객관적인 덕과 관련이 있으며, 일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완전한 삶이자 최고선이다.
행복과 좋은 삶의 추구,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 3부작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에 관한 중요한 저작으로 세 작품을 남겼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포함해서 『에우데모스 윤리학』과 『대도덕학』이 그것이다. 이 세 작품은 『정치학』과 더불어 실천철학적 작품에 속한다. 윤리학의 주된 관심은 인간의 ‘행복’(잘 삶/성공, eudaimonia)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따라 덕(아레테)을 잘 사는 삶(eu prattein)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좋은 삶을 인생의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다. 하지만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좋음’을 파악하기 위해 학문적 훈련이나 형이상학적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지 않는다. 그는 ‘잘 살기’ 위해서는 친애(philia), 쾌락, 명예, 부와 같은 ‘좋음’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적절한 방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윤리학을 공부해야만 하는 것이다.
‘개별적 좋음들’은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다. 개별적 상황을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적절한 교육과 습관을 들임으로써 그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개별적 상황 속에서 특정한 행위를 잘 선택하는 것은 이성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순히 일반적 행위 규칙을 배우는 것만으로는 개별적 경우에 우리의 행위를 선택하게 해주는 실천적 지혜인 프로네시스(phronesis)를 획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행위, 숙고, 감정, 사회적 관계를 아우르는 기술(technē)을 통해 개별적 상황에 적합한 행위를 실천함으로써, ‘잘 삶’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능할 수 있다.
『대도덕학』에서 ‘대’(magna)가 의미하는 것은?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어째서 ‘동일한 내용을 동일한 방식으로’ 다루는 거의 같은 주제의 윤리학 관련 작품을 3종이나 남겼을까? 현존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전집』(Corpus Aristotelicum)에는 윤리학적 저작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에우데모스 윤리학』 이외에 진작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는 『대도덕학』과 짤막한 작품인 『덕과 악덕에 대하여』가 있는데, 마지막 작품은 위서(僞書)로 간주되고 있다. 『대도덕학』은 그중에서 물리적 규모로 따지면 세 번째 크기를 가지며, 전통적으로 『대윤리학』 혹은 『대도덕학』(Ēthika megala, Magna moralia)으로 불려 왔다.
『대도덕학』이라는 제목은 독특하다. ‘대’(magna)라는 말을 덧붙여 불렀기 때문이다. 『대도덕학』을 구성하는 두 권 전체가 포괄하는 영역은 『에우데모스 윤리학』을 구성하는 전체 여덟 권이 포괄하는 영역과 맞먹는다. 제2권이 도중에서 중단된 채로 전해지지만, 『대도덕학』 제1권이 다루는 주제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제1권부터 제6권까지 다루고 있는 주제를 두루 포괄한다. 그 결과 이 책의 ‘각 권’(biblia, 두루마리)은 다른 윤리학 저서의 ‘각 권’보다 큰 공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처럼 『대도덕학』을 구성하는 한 권이 다루는 영역이 다른 윤리학 서적 한 권이 다루는 영역보다 크기 때문에, ‘크다’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해석이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에우데모스 윤리학』의 제목 속 ‘니코마코스’와 ‘에우데모스’는 저자라기보다는 편집자거나 작품을 헌정 받은 사람으로 추정한다. 그래서 ‘대’(大)는 ‘나이가 많은’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니코마코스의’라는 형용사를 가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서적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인데, 『대도덕학』과 구별하기 위해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小 니코마코스 윤리학』으로도 부른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인 ‘니코마코스’에게 헌정되거나 그를 교육하기 위한 책이며, 『대도덕학』은 ‘大 니코마코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 ‘니코마코스’에게 헌정된 윤리학 책이라는 것이다.
『대도덕학』의 논술에는 유감스럽게도 논지의 불분명함과 불철저함, 논리 전개의 서투름, 서술 방식에서 명료함의 결여가 있다. 이 책의 논리적 전개 부족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직 성숙하지 못했던 자신의 젊은 시절에 쓴 윤리학이라는 책의 성격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이외의 누군가에 의해 쓰였다고 하는 책의 성격에 기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저작 중
『대도덕학』만이 이전 철학자들을 철학사적으로 개관!
『대도덕학』이 다른 두 윤리학 저작과 다른 철학적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책의 중심된 주제는 ‘덕(aretē) 이론’ 및 ‘좋은 것’(agathon)들에 대한 고찰이다.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중심 개념인 행복 논의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차지하고 있는 행복 개념만큼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행복이 ‘외적인 좋음’(명예, 건강, 부 등)에 의존한다는 주장을 펼치는데, 이는 이 책이 다른 윤리학 저작보다 행복을 위한 ‘외적 좋음’과 ‘운’의 중요성을 더 강조한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연구 영역에서 그 이전의 사람들이 해당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endoxa(통념)의 형식으로 살피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을 비판한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7권 제1장, 『에우데모스 윤리학』 제7권 제2장). 그렇지만 윤리학 저작 중에서 이전의 철학자들에 대한 ‘철학사적’ 개관은 오직 이 책에서만 이루어지고 있으며, 다른 두 윤리학에서는 그러한 역사적 개관을 찾아볼 수 없다. 또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에우데모스 윤리학』에서는 플라톤의 ‘혼의 삼분설’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으나, 이 책은 덕 이론의 토대가 되는 방법이 아니라 혼의 영양 섭취 기능이 윤리학과 무관하다는 맥락에서 혼의 삼분설을 언급하고 있다(제1권 제4장 1185a21 참조).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덕의 구성요소로서 행위와 감정의 양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이 책의 덕 이론에서는 감정의 측면이 강조되고 있으며, 덕은 감정의 ‘중간임’(중용)으로 파악되고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볼 수 있는, 행위와 감정에 수반하는 즐거움과 고통도 이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또 이 책에서는 감정(파토스)이 칭찬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우리는 감정에 따라서 칭찬받지도, 비난받지도 않는다”라고 분명히 밝힌다. 이 책에서는 감정이 직접적 가치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 밖에도 이 책에는 산술적 비례에 따른 시정적(diorthōtikon) 정의(『니코마코스 윤리학』 제5권 제4장 1131b25-1132b20)에 대한 논의가 나오지 않는다. 또한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2권 제1장에서 언급되는 ‘지성적 덕’(dianoētikē aretē)에 대한 논의도 찾아볼 수 없다. 지성적 덕에 관련해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기술(테크네)과 지식(에피스테메)을 구별하고 있으나 이 책에서는 양자가 구별 없이 사용된다. 특히 『대도덕학』은 ‘자제력 없음’(아크라시아)을 다루는 논의 방법이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기본적으로 다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악한 사람과 자제력 없는 사람이 명확하게 구별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주제인 행복은 잘 살고 잘 행동하는 것이며, 이는 덕에 의해 결정된다. 소크라테스에게서 덕은 지적인 덕에만 한정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덕을 지적인 덕과 성격적 덕으로 나눠서 설명하면서, 지적인 덕을 성격적 덕의 활동보다 더 높이 평가한다. 『에우데모스 윤리학』에서는 행복은 지적인 덕과 성격적 덕의 활동이 결합할 때 가능하다고 설명된다. 그리고 『대도덕학』에서는 지적인 덕에 관한 설명을 성격적 덕의 설명에다 포함시켜 하나의 덕, 즉 성격적 덕의 활동만을 강조하고 있다.
개인과 공동체가 행복할 수 있는
아리스토렐레스 행복론의 정수
『대도덕학』의 주제가 ‘인간적인 좋음’을 다루고 공동체를 위한 ‘정치적 좋음’을 탐구하는 것이기에, 행복에 대한 논의에서 영원하고 신적인 좋음은 배제되며, 인간의 좋음인 덕의 활동과 사용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외적 좋음’ 역시 덕의 좋은 활동을 위한 가능성으로서 설명되고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외적 좋음과 행복을 구분하기 위해, 여러 다양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대도덕학』에서는 외적 좋음의 가능성으로서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0권에서는 쾌락과 행복을 구분하기 위해 애썼다면, 『에우데모스 윤리학』과 『대도덕학』에서는 행복이 최고의 아름다운 쾌락과 동일한 것으로 기술된다. 이는 『대도덕학』이 『에우데모스 윤리학』과 노선을 같이하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며, 특별히 지적인 덕을 생략했다는 사실은 공동체를 위한 ‘대중들에게 행복을 설명하기 위해 계산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런 점이야말로 오히려 플라톤의 색깔을 지우고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대도덕학』은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래도 좋음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고, 더구나 그것은 무조건적인 좋음이 아니라 우리에게서의 좋음이다. 신들의 좋음에 대해서는 아니니까”(『대도덕학』 1182b3-4)라고 말한다. 관조와 같은 지적인 덕으로서의 행복, 그리고 행복을 지적인 덕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신적인 좋음’에 관해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경험 세계에 사는 우리 대중들에게는 무리한 요구일 것이다. 또한 공동체를 위한 우리 모두의 목표는 덕에 맞게 행하는 활동이므로 『대도덕학』에서는 덕의 활동을 도울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외적 좋음이 필수적이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대도덕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음에 관한 여러 분석을 통해 최고의 좋음인 행복이 있다는 점을 긍정한 다음, 그 행복은 여러 좋음들의 구성들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즉 덕의 활동을 위한 가능성으로서 필요한 외적 좋음은 상식의 차원에 있는 것이며, 또 우리 경험 세계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결국 『대도덕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 행복론의 핵심은 혼의 좋음(덕)과 신체의 좋음(건강, 외모 등), 그리고 외적 좋음인 재물이나 권력, 가문 등을 모두 포함한 것으로, 이는 인간적인 좋음인 동시에 경제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즉 ‘좋은 삶’을 살기 위해 국가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목표를 통해 성취된다는 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