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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17일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마태 19,16-22)
복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너의 재산을 팔아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그때에 16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18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9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20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21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고통스러운 유배지에서도 희망을 노래했던 에제키엘 예언자!>
언뜻 생각하면 예언자로서의 삶이 무척 멋있어 보입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그릇된 지도자나 악인들의 악행 앞에서 다들 숨죽이며 지내던 시절, 하고 싶은 말 거침없이 하는 것이 참 멋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첫 번째 독서 예제키엘 예언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언자로서의 삶,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항상 고독하고 쓸쓸하며, 혹독하고 신산할 뿐입니다.
어느날 주님의 말씀이 예제키엘 예언자에게 내렸습니다. 죽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타락한 백성 이스라엘을 향해 당신의 말씀을 전하라 하시는데, 그 말씀은 백성을 칭찬하거나 격려하거나 위로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끔찍한 죽음과 멸망을 예고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네 눈의 즐거움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너에게서 앗아 가겠다. 너는 슬퍼하지도 울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마라. 조용히 탄식하며, 죽은 이를 두고 곡을 하지 마라. 머리에 쓰개를 쓰고 발에 신을 신어라. 콧수염을 가리지 말고 사람들이 가져온 빵도 먹지 마라.”(에제 23, 16-17)
에제키엘 예언자 입장에서 그 예언의 말씀을 전하기가 얼마나 난감했을까요? 다들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예고하니, 정말이지 말을 전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애써 용기를 낸 에제키엘 예언자가 백성들이게 그 말씀을 전했는데, 백성들의 반응은? 냉랭했을 것입니다. 뭔 그 따위 악담을 퍼붓느냐는 질타가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냉담한 반응에 우울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왔는데...
놀랍게도 끔찍한 소식이 에제키엘에게 전해집니다. 에언의 말씀을 선포한 바로 그날 저녁에 그의 아내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주님 예언의 말씀이 자신에게 제일 먼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마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하느님께서 주신 예언자로서의 소명에 충실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 아내의 죽음 앞에 세상 사람들은 다들 비웃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예언자로 헌신하고 봉사한다는 사람의 인생이 그게 뭐냐? 엄청 잘난 체 하더니만, 꼴 좋구먼!
백성들의 비아냥으로 순식간에 노리갯감으로 전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에제키엘 예언자는 흔들림이 없습니다. 엄청난 슬픔과 서글픔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또다시 용기를 내어 백성들 앞으로 나아가 또다시 말씀을 선포합니다.
가장 아끼던 아내를 잃고도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에제키엘 예언자의 모습을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마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슬픔이 너무 큰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울 기력조차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광복절을 지내면서 그런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일제 군국주의에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청춘을 바친 애국자들, 조국의 해방이라는 대의를 위해 사랑하는 가족과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타국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순국 선열들의 생애와 예언자들의 생애가 꼭 빼닮았다는 생각 말입니다. 바빌론 유배지 한복판에서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의 '생기'를 예언했던 에제키엘 예언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예언자가 필요합니다. 고통스러운 유배지에서 더 이상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며 좌절하고 있던 백성 앞에 서서 피 끓는 목소리로 임마누엘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 이스라엘의 회복과 부흥을 외치는, 에제키엘을 꼭 빼닮은 예언자!고통스러운 유배지에서도 희망을 노래했던 에제키엘 예언자!
언뜻 생각하면 예언자로서의 삶이 무척 멋있어 보입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그릇된 지도자나 악인들의 악행 앞에서 다들 숨죽이며 지내던 시절, 하고 싶은 말 거침없이 하는 것이 참 멋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첫 번째 독서 예제키엘 예언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언자로서의 삶,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항상 고독하고 쓸쓸하며, 혹독하고 신산할 뿐입니다.
어느날 주님의 말씀이 예제키엘 예언자에게 내렸습니다. 죽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타락한 백성 이스라엘을 향해 당신의 말씀을 전하라 하시는데, 그 말씀은 백성을 칭찬하거나 격려하거나 위로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끔찍한 죽음과 멸망을 예고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네 눈의 즐거움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너에게서 앗아 가겠다. 너는 슬퍼하지도 울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마라. 조용히 탄식하며, 죽은 이를 두고 곡을 하지 마라. 머리에 쓰개를 쓰고 발에 신을 신어라. 콧수염을 가리지 말고 사람들이 가져온 빵도 먹지 마라.”(에제 23, 16-17)
에제키엘 예언자 입장에서 그 예언의 말씀을 전하기가 얼마나 난감했을까요? 다들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예고하니, 정말이지 말을 전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애써 용기를 낸 에제키엘 예언자가 백성들이게 그 말씀을 전했는데, 백성들의 반응은? 냉랭했을 것입니다. 뭔 그 따위 악담을 퍼붓느냐는 질타가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냉담한 반응에 우울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왔는데...
놀랍게도 끔찍한 소식이 에제키엘에게 전해집니다. 에언의 말씀을 선포한 바로 그날 저녁에 그의 아내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주님 예언의 말씀이 자신에게 제일 먼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마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하느님께서 주신 예언자로서의 소명에 충실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 아내의 죽음 앞에 세상 사람들은 다들 비웃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예언자로 헌신하고 봉사한다는 사람의 인생이 그게 뭐냐? 엄청 잘난 체 하더니만, 꼴 좋구먼!
백성들의 비아냥으로 순식간에 노리갯감으로 전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에제키엘 예언자는 흔들림이 없습니다. 엄청난 슬픔과 서글픔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또다시 용기를 내어 백성들 앞으로 나아가 또다시 말씀을 선포합니다.
가장 아끼던 아내를 잃고도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에제키엘 예언자의 모습을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마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슬픔이 너무 큰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울 기력조차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광복절을 지내면서 그런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일제 군국주의에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청춘을 바친 애국자들, 조국의 해방이라는 대의를 위해 사랑하는 가족과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타국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순국 선열들의 생애와 예언자들의 생애가 꼭 빼닮았다는 생각 말입니다. 바빌론 유배지 한복판에서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의 '생기'를 예언했던 에제키엘 예언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예언자가 필요합니다. 고통스러운 유배지에서 더 이상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며 좌절하고 있던 백성 앞에 서서 피 끓는 목소리로 임마누엘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 이스라엘의 회복과 부흥을 외치는, 에제키엘을 꼭 빼닮은 예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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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님]
<‘댐’이 되기보다 ‘폭포’가 되리라!>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한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선한 일일까요? 이것을 묻는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자신이 선하다고 정한다고 선해지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선한 일이라고 여기고 하지만 사실 악한 일을 경우도 많습니다. 만약 자기 생각으로 선한 일이라고 여기는 일들을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다면 굳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석가모니도 선한 일을 말하고, 공자 맹자도 선한 일을 말합니다. 선한 일로만 구원에 이른다면 예수님께서 구원자가 되실 수 없습니다.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어떠한 일을 할 때, 그것이 선해지려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어야 합니다. 개가 죽어가는 주인을 구했다면 이것은 사람 쪽에서 보면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개는 그것이 선한 일인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주인에게 잘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생존본능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라고 하신 말씀은 인간으로서 아무리 선해지려고 노력해봐야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라고 하십니다. 계명은 선한 일입니다. 다시 말해 선한 일을 하되, 주님께서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생각으로만 하는 선행은 선행이 아닙니다. 반드시 주님께서 그 일에 개입하셔야 합니다. 주님만이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냥 선한 일을 하는 사람과 계명에 있기에 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젊은 사람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주님 때문에 선한 일을 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미 구원에 길에 다다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 단계 더 높은 선함을 요구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자기 능력이나 재산으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닌 선함 자체이신 분의 통로가 되라는 뜻입니다.
세계 1위 부자 ‘빌 게이츠’는 어머니의 권유로 2위 부자 ‘워런 버핏’을 처음 만납니다. 처음에 만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별로 이익이 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단 만나고 보니 말이 잘 통했습니다.
‘어떻게 더 많은 돈을 벌 것인가?’만을 생각해오던 빌 게이츠에게 워런 버핏은 ‘어떻게 잘 쓸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선재단을 설립하면 자신도 동참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2010년 설립된 빌 게이츠 재단의 자선단체가 ‘더 기빙 플레지(The Giving Pledge)’입니다.
빌 게이츠는 자기 재산의 95%를 기부하기로 합니다. 워런 버핏도 재산의 99%를 기부하기로 하고 게이츠 재단에는 83%를 내놓기로 합니다. 이후 수많은 재벌의 기부 릴레이가 이어졌습니다.
빌 게이츠는 오늘 예수님을 만난 젊은 부자 청년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부자 청년은 재산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것과 비교하면 빌 게이츠는 그 부자 청년보다는 잘 대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모든 재산을 기부하라고 하면 빌 게이츠라고 할 수 있을까요?
며칠 전에도 빌 게이츠는 빈곤국 코로나 백신 공급을 위해 1억 5000만 달러를 지원하였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선의 영광은 빌 게이츠와 그 재단에 함께 도움을 주고 있는 워런 버핏에게 돌아갑니다. 물론 그 일도 훌륭하고 주님께서 갚아주시겠지만, 더 완전한 선행은 ‘선하신 분은 주님뿐’임을 입증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제가 볼 때 이런 분들은 마치 ‘댐’과 같은 역할인 것 같습니다. 댐은 홍수 조절도 하지만 가뭄 때 품고 있던 물을 공급하여 그 물줄기가 메마르지 않게 합니다.
이 댐의 역할을 하는 이들도 참으로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더 완전해지려면 ‘폭포’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를 통해 하느님의 선함이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아두었다가 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흘려보내며 주님의 자비에 나 자신까지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이태석 신부님이 ‘폭포’와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의사가 되어 돈을 많이 벌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직접 가난한 이들에게로 찾아가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려 노력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분이 돈을 많이 벌어 도왔으면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열매는 그런 도움을 주는 것보다 더 많이 열렸습니다. 그분의 제자들 중 의사가 된 이들이 벌써 40여 명이 넘고 기자, 공무원, 약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이웃을 돕겠다는 제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이태석 신부님을 보며 그분의 능력이나 재산보다는 그분 뒤에서 활동하신 선하신 하느님을 봅니다.
저도 댐과 같은 사람이 될 것인지, 폭포와 같은 사람이 될 것인지에 혼돈이 생길 때가 많습니다. 돈을 모았다가 필요한 때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의 섭리보다는 나의 의지로 선행을 하려는 것이기에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대한 그때그때 흘려보내 주려 노력합니다.
선하신 분은 주님 한 분뿐이십니다.
마더 데레사가 참으로 큰 선행을 했지만, 그분이 남겨주신 더 큰 선행은 청빈을 보여준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섭리에 맡김으로써 그분의 도움을 받으시는 분들이 주님을 찬미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우리가 무언가를 내어놓으며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서는 안 됩니다.
내가 선해지려 할 때, 그분의 선하심이 가려집니다. 따라서 참으로 완전한 선행은 마치 폭포수처럼 나에게 많은 물이 흘러들어오게 하여, 그것을 거침없이 당장 흘려보내 주는 주님 섭리에 맡기는 삶입니다.
출처: 복음말씀의 향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