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29일 연중 3주간 금요일
<씨를 뿌리고 자는 사이에 씨는 자라는데, 그 사람은 모른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26-34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6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애호박이 살찌우며 커가는 소리가 들리십니까?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날씨에 따라서 희비가 엇갈립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삽을 들고 논이며 밭을 일일이 돌아보고,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면서 그날 해야 할 일을 다시 점검합니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눈이 오거나 한 순간도 쉴 틈이 없습니다. 논두렁에 웅어나 미꾸라지가 구멍을 뚫지 않았는지, 두더지가 밭을 헤매고 돌아다니지 않는지, 벼멸구가 벼 포기를 따라 오르지 않는지, 호박벌이 호박꽃을 파고드는지, 벌이나 나비가 비에 젖어 날개를 접고 있는지, 오이나 수박의 순을 집어 주었는지, 개구리가 고추를 따먹으려고 뛰어오르지 않는지, 돼지풀이랑 토끼풀이 얼마나 컸는지, 옥수수수염은 얼마나 말라 가는지, 달무리가 은은한지, 은하수가 초롱초롱한지, 뜸부기 울음이 기운이 없는지, 우렁이가 언제 알을 까서 볏잎에 붙여놓았는지, 송사리 새끼가 물꼬에 얼마나 모여 있는지, 지렁이나 구더기가 어디에 진을 치고 있는지 별의별 것들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그 작은 변화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농사를 짓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논이나 밭에 풀이 많이 자라면 ‘풀이 짖는다.’고 풀이 크는 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농사를 짓는다고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김매는 시기를 놓치면 그 농사는 망치기 때문입니다. 풀이 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어려서 풀에 귀를 대고 정성을 다하여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풀이 짖는 소리는 어떤지 정말 궁금하였습니다. 풀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풀이 비바람에 아파하는 소리, 풀이 아이들의 낫에 베어져 우는 소리를 듣고 싶었습니다. 바람이 태풍이 되어 부러진 나무 가지가 아파하는 비명 소리와 뽑혀진 미루나무의 신음소리가 듣고 싶었습니다. 비가 내리면 풀이나 나무나 모든 곡식들은 하루가 다르게 커져갔습니다. 어른들은 그 크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들어보려고 해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결혼하고, 아이들을 기르면서도 풀의 소리나 아이들이 크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애들이 ‘쑥쑥 크는 소리가 들린다.’고도 하시고, ‘살이 찌는 소리가 들린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조금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바람결에 들리는 풀이 짖는 소리, 새가 말하고 장난치는 소리, 귀뚜라미가 짝을 부르는 소리, 곡식이 여무는 소리, 아이들이 키 크는 소리, 나무가 서로 속삭이는 소리, 참새가 저를 보고 방정맞다고 뭐라고 한다고 대꾸하는 소리, 애호박이 살찌우며 커가는 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이 밥을 먹으며, 크는 소리도, 저희들이 다 컸다고 우쭐대는 그 모든 것들이 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조금씩 들리는 그런 소리들이 귀가 어두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들리기 시작합니다. 작은 움직임도 크게 들리고, 작은 속삭임도 뇌성처럼 들립니다. 기도하다가 들리는 그 소리 때문에 어떤 때는 심장이 멎는 듯 두근거리고,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의 소리도 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입김처럼 사그라질 듯 들려오는 내면의 양심이 내는 가녀린 소리도 들려옵니다.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아주 정성을 다하여 귀를 기울이면, 큰 소리부터 작은 소리까지 조금씩 크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일상생활에 묻혀서, 시끄러운 소리에 익숙해져서, 떠드는 소리에 둔해져서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던 세상에서 그런 모든 것을 떠나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무시하고, 모두 들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야 겨우 깨닫게 된 것입니다. 모두 들을 수 없는 그 신비의 소리를 큰 확성기로 들으려고 하였고, 내 뜻대로 욕심과 고집대로 내 자신만을 생각하는 아집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겨우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절사; 무의, 무필, 무고, 무아’(子絶四; 毋意, 毋必, 毋固, 毋我)라는 말이 논어의 자한편에 있습니다. <공자께서는 다음 네 가지를 끊으셨다. 자의(恣意)가 없었고, 기필코 하려는 게 없었고, 고집이 없었고, 사아(私我)가 없었다.>라는 말입니다. 내 멋대로 생각하고, 내 멋대로 추측하고, 내 임의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어떤 일도 반드시 이루려고 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까지도 이루려고 하는 황당한 욕심을 부리고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고집을 부리는 아집과 편견과 교만함은 결국 자신을 망치는 것이니 그런 고집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밟고 누르며,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서 떠나지 않으면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천지만물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것을 이제는 겨우 깨닫고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것도 알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지만물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며, 작은 숨소리에도 당신의 섭리가 아니면 아무 것도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으며, 생각할 수도 없고,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풀이 짖는 소리를 들어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헛된 것에서 물러나 아무것도 들으려고 하지 않아야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겨 의지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가만히 눈감고 주님께서 손을 들어 제 손을 잡아주시고, 걸음마를 배우려는 어린 아기처럼 이끌어 주시는 손길을 느낍니다.
<많은 싸움을 견디어 냈으니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0,32-39
형제 여러분, 32 예전에 여러분이 빛을 받은 뒤에
많은 고난의 싸움을 견디어 낸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33 어떤 때에는 공공연히 모욕과 환난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그러한 처지에 빠진 이들에게 동무가 되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34 여러분은 또한 감옥에 갇힌 이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재산을 빼앗기는 일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보다 더 좋고 또 길이 남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5 그러니 여러분의 그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큰 상을 가져다줍니다.
36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약속된 것을 얻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37 “조금만 더 있으면 올 이가 오리라. 지체하지 않으리라.
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나 뒤로 물러서는 자는 내 마음이 기꺼워하지 않는다.”
39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
축일 : 1월 29일 성 술피치오 세베로
San Sulpizio Severo Vescovo di Bourges
St. Sulpicius Severus
+420/425년경
갈리아(Gallia) 지방의 교회사가이자 성인전기 작가인 성 술피키우스 세베루스(또는 술피치오 세베로)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대부분의 이야기는 겐나디우스(Gennadius, +5세기경)의 “명인록”(De viris illustribus)과 그의 친구였던 놀라(Nola)의 성 바울리누스(Paulinus, 6월 22일)의 “서한”을 통해서이다. 그는 360년경 프랑스 남서부 아키텐(Aquitaine)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보르도(Bordeaux)에서 고전과 법학을 공부하였는데, 아마도 이곳에서 성 바울리누스를 만난 것 같다. 공부를 마친 뒤 변호사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부유한 집정관 가문의 여인과 결혼하였으나 부인이 일찍 사망하자 곧 공직 생활을 청산하고 389년경에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394년경에는 모든 재산을 다 청산하고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요인은 부인이 일찍 사망한 것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성 술피키우스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킨 투르(Tours)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 11월 11일)의 권고와 성 바울리누스의 모범에 의한 것이었다.
그 후 성 술피키우스는 엘루소(Eluso)에 머무르다가 자신을 위해 일부 재산을 남겨 두었던 프레물리아쿰(Premuliacum)이라는 마을에 은둔하며 영성생활과 저술활동에 열중하였다. 이 마을은 툴루즈(Toulouse)와 카르카손(Carcassonne) 사이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는 이곳에 성당을 지어 봉헌하였었다. 또 그는 이 은둔 장소에 성 마르티누스가 세운 수도원과 유사한 공동체를 형성하여,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장모인 바술라(Bassula)와 함께 생활하였다. 바술라는 성 술피키우스에게 물질적인 도움은 물론 영성생활로 나아가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성 술피키우스가 순교에 대한 맹목적인 열망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 주었다. 406년 12월 갈리아 지방이 이민족들의 침략을 받았을 때 프레물리아쿰도 황폐화되었는데, 성 술피키우스는 이때 무사히 피신하여 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또 420-425년 사이에 프리밀락(Primillac)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겐나디우스는 성 술피키우스가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의 오류에 빠져 생애 말기에 보속행위로 죽을 때까지 저술을 중단하고 절대 침묵의 삶을 살았고, 그 당시의 저자들이 성 술피키우스가 평신도라고 전하는 것과는 달리 사제직을 받았을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또한 전통적으로 부르주의 주교였다고 전해지나 그 또한 확실하지 않다.(가톨릭홈에서)
술피치오는 '로마의 한 부족'의 이름이었다.
성 술피치오의 생애는 구름에 가리워 있지만, 뚜르의 성 그레고리오가 그를 부르쥬스 주교로 임명했으며, 585년의 마콩 공의회에 참석한 것은 확실하다. "세베로"란 별명은 부르쥬스의 또다른 술피치오와 구분하기 위하여 나중에 붙여진듯 하다.
(성바오로선교네트에서)
오늘 축일을 맞는 술피치오 세베로 형제님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
첫댓글 성 술피치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감사합니다.
성 술피치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감사합니다. 김주원 마르티노 형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