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峰 李明德先生 遺墟碑文
0. 이곳 政生洞은 沙峰 李明德先生 의 遺墟地이다. 政丞이 살았다하여 政丞里가 政生里로 변한 것이다.
0. 世宗 二十六年 甲子, 一四四四年 閏 七月十三日에 判中樞院事 沙峰 李明德先生이 長逝 하시니, 지금부터 五百四十八年前이다. 이 무렵 領議政은 黄喜先生이요 左議政은 申槩先生이였다. 우리
歷史上 聖君이요 明君이신 世宗大王께서 輟朝하시고 弔問케 하셨으며 賻儀를 내리셨다. 또 恭肅이란 諡號도 내렸다. 先生께서 太定太世 등 四祖에 歷仕하시면서 四十九年間 나라와 民族發展에 크게 寄與하신터이다.
九月 十二日에는 다시 世宗大王께서 致祭케 하시고 祭文을 내리셨다. 그 祭文을 통해 우리는 先生께서 天品이 强直하신 일, 風采가 卓越하신 점, 재주는 經綸에 뛰어나고, 各種 典籍에 뛰어나게 該博하셔서 여러 職責을 빈틈없이 完遂하신 것을 알 수 있고, 특히 兵部에서 오랫동안 일하시면서 戎律에 어긋남이 없게 하시고 中央職과 地方職을 맡아 善政을 베풀어 백성들이 同氣間에 사랑하는 노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 先生은 그때나 지금이나 行政의 師表가 되심에 크게 넘침이 있도다!
追念耆耈함에 어찌 변함이 있으리오! 그 致祭文은 이러하다.
惟卿, 天資剛直, 風猷卓𣂈 , 才優經綸, 識該典籍, 早捷巍科
華問日彰, 薇垣栢府, 論思激揚, 遇知昭考, 擢居喉舌
出納明允, 啓沃 深切, 逮予承緖, 裨益弘多, 久長兵部
戎律不差, 異攪范轡, 民歌棠茇, 專對天朝, 所至稱職,
追念耆耈, 傷悼莫置, 爰擧恤典, 俾奠菲儀, 靈其不昧, 庶幾享之,
Q, 先生은 高麗 恭愍王 二十三年 甲寅 一三七四年에 나시고, 太祖 王年 丙子 一三九六年에 文科에 及第하신 이후 官途 에 올라 藝文館, 春秋館, 司憲府, 司諫院同, 議政府, 承政院 等의 各職責을 맡아 所任을 다하시고, 世宗이 즉위하면서 戊戌年
一四一八年 八月 吏曹參判을 始發로 工曹, 禮曹, 刑曹의
各 參判과 大司憲職을, 世宗 四年 壬寅 一四二二年 十一月十六日 江原監司를 맡으신 以後 黄海, 京畿, 慶尚, 全羅道의 監司와
漢城判尹 등 各 職責을 맡으시니 內職과 外職을 두루거치면서 眞實로 國家運營의 中樞職責을 完遂하여 世宗盛代의 基礎를 닦는데 큰 역할을 하셨도다!
先生은 世宗十二 年 庚戌 一四三十年 八月 三十日 工曹判書에 오르고 이어 兵曹判書를 맡아 北方野人政策黄과 南方對倭 政策을 推進하였다. 先生은 吏曺와 禮曹判書를 歷任하시고 藝文館 大提學과 判中樞院事로 生涯를 마치시니,
아! 先生의 一生은 世宗大王의 太平聖代를 이룩하는데 밑거름이 되셨다!
世宗聖君의 北方開拓과 國防政策, 訓民正音 創製와 文化政策 이 어찌 先生과 無關 하리! 訓民正音 創製는 先生逝去 前해에 있었다.
Q, 先生의 學問은 높아서 大提學에 이르렀다. 지금 政生洞에 先生의 書堂골이 傳해 오는 것은 先生이 이 땅에 起居하시면서 틈을 利用하여 글을 읽히시고, 後學을 가리킨 때문일 것이다.
先生은 孝子로도 이름이 나있다. 선생은 셋째 아드님이시지만 兩親奉養을 위해 官途에 올랐고 九十을 지난 老母를 위해 侍藥토록 하라는 御命이 내릴 程度였다.
世宗十四年 壬子 一四三二年 八月二十九日 記錄에 보인다. 이일은 선생이 尙衣院 提調로 있으실 때 일이다.
先生은 牧民官의 道理를 다하셨다.
江原道 監司로 계실 때 飢民을 위해 十七萬石을 中央政府에 特別要請해 주린백성을 保護하였다. 이것은 一例에 불과하다. 先生은 强直하신것으로도 有明하다. 大司憲으로 있을 때 國家紀綱을 크게 論하시면서 上書辭職했다. 世宗 七年 乙巳 一四二五年 正月 五日 記錄에 보인다.
先生은 廉吏로도 이름높다. 反對派에서 산호갓 끈을 가지고 是非한일이 있는데 世宗大王께서 작은 일을 가지고 宰相을 벌할수 있나 하셨다. 이것도 實錄에 적혀있다.
先生은 宣慰使가 되어 地方을 자주돌며 백성들을 慰撫하셨다.
先生은 正朝使가 되어 明나라에 가서 外交 任務를 完遂하셨고 倭의 事情에도 밝아 倭賊處理問題에 관해 홀로 그때 禮曹判書 金宗瑞 先生 등과 의견을 달리한 일이 있다. 倭는 忘生輕死하는 習性이 있다고 主張하였다.
아! 先生은 萬人의 尊敬을 받는 이유를 알 수 있다! 右議政 贈職과 成宗때 公州 鳴灘書院 配享, 以後 鎭安 忠節祠, 和順 七松書院에의 配享은 이때문이리라!
Q,先生은 麗末 典工判書 貞敬公 李 曄의 子 六兄弟中 셋째아들로 태어나셨는데 本貫은 公州이다. 字는 浩然 또는 新之요, 號는 沙峰이시다.
先生은 麗末 巨儒 牧隱 李穡先生에 受學하시니 아! 先生의 學問의 깊은 淵源과 그 까닭을 알수있다! 先生의 業績과 발자취는 너무도 커서 사신곳은 政丞골로, 學問을 익힌곳은 書堂골로 이름나있다. 先生의 號가 된 沙峰은 지금도 이 地方 사람들에 의해 끊임없이 膾炙되고 있으니, 아! 先生의 가르침은 끊일줄 모른다! 五百四十八年이 지난 지금 옛 公州땅인 政生里는 더욱 山紫水明해지고, 사람의 발자취를 더욱 재촉케하고 있다.
아! 先生의 遺訓이 점점 더 커져가기 때문이리라!
大提學을 지낸 先生은 지으신 글이 많겠지만 지금은 王朝實錄에 그 뜻이 一部記錄되어 있고 慶伯때 鳥嶺을 오르면서 지으신 五言詩 一篇이 傳한다.
이곳에 옮겨 永久히 保全코져한다. 其詩에 曰 凌晨登鳥嶺 春意正濛濛 北望君臣隔 南來母子同 蒼茫迷宿霧 迢遞倚蒼空 強欲寄書札 愁邊無北鴻
先生께서 逝去하신지 五百四十八年만에 實錄을 根據로 先生의 遺墟碑文을 지으니 感慨無量하고 先生의 門下生이 된 것 같아 기쁘다. 그러나 一代의 偉人이신 先生의 名聲을 더럽히지 않을까 두렵다. 아! 天庇山 下 이곳을 찾는이 많을것이요, 또 이곳에 先生을 따를 人傑이 많이 輩出되리라!
管內 議員, 委員 住民의 뜻을 모으고, 받을어 이 碑를 세운다.
壬申 一九九二年 十月 三十日
大田直轄市 中區廳長 兪炳夏 謹述
韓國秋史體研究會長 蓮坡 崔正秀 謹書
遺墟碑建立推進委員會 委員
朴熙埈 宋寅明 權日遠 沈豊龍 權信遠 權寧遠 尹昌源 權容珊
李载容, 權钰遠 金永鎬 金相洙 李在元 李炳寬(無順)
대전 중구 청 이수진 이메일 복사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