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왕후와 청암사
인현왕후
청암사 인현왕후 길( 증산면 수도리~ 용추폭포ㆍ5.8㎞ 인현왕후는 이곳 호젓한 산길을 걸으며 아픈 마음을 달랬을 것이다.인현왕후는 시문에도 능해 수도산 곳곳을 다니며 시문을 짓는 것으로 한 많은 삶을 달랬다 한다.
_인현왕후 _
•1681년(숙종7년) 가례(嘉禮)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국모로서 추앙을 받았으나, 왕자를 낳지 못해 왕의 총애를 잃게 되었다. 특히, 장소의(장희빈)에게서 왕자 윤(12대경종)이 출생하자, 숙종의 총애는 장소의에게 쏠리게 되었다.
•기사환국ㆍ1689년
숙종이 왕자 윤을 원자로 봉하고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송시열 등 노론파 인사들이 이에 반대함으로써 숙종과 심하게 대립했다. 숙종은 이들을 면직 또는 사사시키고, 장희빈 집안인 남인이 정권을
(이현기·남치훈 등 )잡았고,
지위가 오른 희빈 장씨의 간계로 폐서인이 되어 안국동 본댁(감고당)으로 나가살았다
(1689~94)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 인현왕후 집안)이 정권을 잡으며 복귀했다
증산면 수도리 마을
'청암사 인현왕후 길'
증산면 수도리~ 용추폭포ㆍ5.8㎞
용추폭포ㆍ무흘계곡
수도산 산책로 9Km
수도리 주차장에서 출발해 쉼터~다리~수도계곡 옛길~용추폭포~출렁다리~다시 수도리 주차장
까지 걸어서 대략 2시간40분 정도
청암사 극락전
조선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가 3년 동안 머무른 곳이다.
극락전
청암사는 조선 말기까지 궁궐에서 상궁들이 내려와 생활을 했다.
1911 대웅전과 보광전 중수 때 시주록 현판 2 곳에 26명의 궁전 상궁 이름과 17 명의 상궁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인현왕후가 (숙종의 정비 正妃
1667년 ~ 1701년 )
장희빈의 간계로 서인으로 강등된 뒤, 3년 동안 극락전에 머무르면서 주변을 산책하고 시문을 지었다.
극락전 자리에 축각(祝閣)을 짓고 복위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 후 인현왕후를 예우하기 위해 별도의 사대부가 한옥을 지어 모셨는데 지금의 극락전이다.
인현왕후는 환궁 후 청암사 주변 수도산 적송삼림을 국가보호림으로 지정함과 동시에 사찰에 전답을 내렸다고 한다. 극락전을 중창할 때 나온 시주록에는 궁중 상궁들의 이름이 26명이 올라 있는데,조선시대말기까지 상궁(尙宮)들이 내려와 불공을 드리고 시주하기도 했다
인현왕후로부터 비롯된 청암사와 왕실과의 인연을 짐작할 수 있다
•
인현왕후가는 훗날 복위된 뒤 감사의 편지를 보냈는데, 백련암에 전해 내려오던 것을 노스님이 발견하여 직지사 성보박물관으로 보내 보관하고 있다. (서찰에는 향, 비녀 등 신물 3가지를 같이 보낸다는 내용이 있다.)
[출처] 꼭 한번은 가봐야 할 사찰 ㆍ김천 불령산 청암사& 인현왕후 이야기|작성자 dangg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