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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욥기 1:1-5
"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2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니라 3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4 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누이 세 명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더라 5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내용분해 : A. 출신 지역과 소생, 소유 신앙 인격 등의 소개(1-3절)
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거주함 (1a절)
2. 그는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 떠난 자임 (1b절)
3. 소생은 아들 일곱과 딸 셋이 있음 (2절)
4. 소유는 양이 철천, 약대가 삼천, 소가 오백 겨리,
암나귀가 오백이며 부리는 종들도 많았음 (3a절)
5. 욥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였음 (3b절)
B. 욥의 경건함을 보여주는 실례 (4-5절)
1. 욥의 아들들은 자신들의 생일 때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누이들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셨음 (4절)
2 .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음 (5a절)
3. 이는 욥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나마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염려했기 때문임 (5b절)
4 .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음 (5c절)
다섯 권으로 된 시가서 가운데 첫번째 책인 욥기는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인생들이 현세상에서 경험하게 되는 실존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우리 인간이 가져야 할 신앙적 자세에 대해 교훈할 목적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즉 욥기는 주인공인 욥이 예기치않게 당하는 처절한 고난에 대한 원인 규명을 놓고, 욥과 당대의 최고 현자들이었던, 욥의 친구들이 벌이는 반복되는 논쟁을 통하여 절대자(總對者)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상대자(相對者) 인간 이해의 한계를 규명하고, 이에 우리 인생은 오직 창조자로서 절대자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절대 순복하며 신뢰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자 기록된 책인 것입니다.
이러한 욥기는 비록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지만, 그 기록 형식에 있어서는 대화체 형식의 고대 극시(劇詩, dramatic poetry) 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에 따라 본서의 내용을 구분하여 보면, 제1. 2장의 발단, 제 3-37장의 전개, 38:1-42:6의 절정, 42:7-17 의 결말로 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서문과 결어라고 할 수 있는 제1. 2장의 발단 부분과 42 :7-17의 결말 부분은 산문(散文)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본론부라고 할 수 있는 3:1-42:6의 전개와 절정 부분은 운문(題文)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욥기의 발단에 해당하는 제1. 2장은 본서 이야기 전개의 핵심 소재이자 배경이 되는 동방의 의인 욥의 고난 곧 천상에서 이루어진 하나님과 사단 간의 두 번의 회의와 그로 말미암아 지상에서 일어난 두 번에 걸친 욥의 재난에 대하여 다루는데, 이러한 본문은 제 3장 이후에서 드러나는 욥의 신학적 고민에 대한 정보를 갖게 해주는 특권을 독자들에게 부여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욥이 역사적으로 실재하였던 인물이었음을 분명하게 해주는 시공간적인 틀을 제시하여 줍니다. 또한 우주 만물에 대한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과 비록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따라서만 활동할 수 있는 사단 사이에 벌어지는 궁극적인 싸움을 보여주기 위해, 가려져 있던 막을 열어주고 있는데, 이러한 발단 부분을 개관하여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1 : 1-5 의 문단은 본서의 주인공인 욥(Job) 의 인적 사항과 신앙 인격에 대하여 보도합니다. 욥은 동방의 우스(Uz) 라는 지역에 살았습니다. 우스의 위치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아라비아의 북부 지역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욥은 열 명의 자녀와 많은 재산을 소유한, 동방사람 중에 가장 큰 자였고, 그는 자기 아들들이 생일을 맞이하여 잔치를 벌인 다음날이 되면, 그들이 잔치 중에 혹 마음으로나마 하나님을 배신하였을까 염려하여 그들을 불러다가 번제를 드려 성결케 할 정도로 경건한 인물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 시대의 선지자 에스겔은 욥을 노아, 다니엘과 함께 구약 시대의 3대 의인으로 꼽고 있는데(겔 14: 14. 20). 그가 신앙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흠이 없었다는 것은 ‘순전하고’ 와 ‘정직하여’ 라는 두 단어를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순전하고’ 라는 말은, 그의 대신 관계를 묘사하는 말로, 뒤이어 나오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 라는 어구에 의해 설명됩니다. 그리고 ‘정직하여’ 라는 말은 그의 대인 관계를 묘사하는 말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두 단어는 이렇게 엄밀하게 구분하는 것보다, 욥의 경건함을 설명하기 위한 중언법적 (重言法的) 표현으로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욥이 가정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것은, 그가 족장 시대의 인물이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여 줍니다. 왜냐하면 모세 이전의 족장 시대에는 가장이 그 가정의 제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창8:20; 12 :7.8). 즉 욥기는 족장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입니다.
1:6-12의 문단은 욥이 극심한 시련과 고난을 당하게 된 직접적인 배경으로서, 욥을 대상으로한 하나님과 사단 간의 첫번째 천상 회의와 욥의 신앙을 꺾어보려는 사단의 책략에 대한 하나님의 부분적 허용에 대하여 보도합니다. 어느 날 천상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 곧 선한 천사들이 배석한 가운데 하나님과 사단 간의 회의가 진행되었습니다. 물론 본문의 천상 회의 장면은 다분히 문학적 표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지상으로 쫓겨난 사단이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는 표현이나, 순수한 영적 존재들이 어느 특정한 자리에 모였음을 시사하는 표현은 다 인간의 관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적 세계의 일을 인간적 사고와 표현을 빌어 묘사한 것일 뿐입니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그의 행적에 대하여 물으실 때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다’고 대답하였는데(7절), 이는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 고 한 벧전5:8을 연상케 하는 표현이자, 왕이 자기 왕국을 순회하는 것을 연상케 하는 표현으로, 타락한 이세상에 대한 사단의 지배권 행사를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합니다(엡 2:2). 그러나 그가 하나님 앞에 나아왔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행동할 수 없다는, 곧 사단 역시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었다는 것을 나타내주며, 이는 욥에 대한 시험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한편 하나님과 사단 간의 회의의 주제는 욥의 신앙의 진정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신앙이 진실된 것으로 세상에 그와 같은 자가 없음을 사단에게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욥의 신앙의 진정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를 보호하신 까닭이라고 하며, 만일 하나님께서 욥에 대한 보호의 손길을 거두시고 그의 소유를 치신다면 욥이 하나님을 욕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게됩니다. 사단의 이러한 주장은 욥의 신앙의 진정성에 대한 부정인 동시에, 하나님의 욥에 대한 신뢰의 신빙성에 대한 도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단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하시려고 기꺼이 사단의 제안을 수용하셨습니다. 이는 욥의 명성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명성까지도 거신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욥의 신앙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것은 물론, 그의 신앙의 단계를 한 차원 이끌어 올리시려는 하나님의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하여 그 이유가 독자들에게는 알려졌지만 욥에게나 그의 친구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혹독한 고난이 욥에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1: 13-22의 문단은 하나님의 허용과 사단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욥이 당하게 되는 두 번의 재난 가운데 첫번째 재난과 믿음의 승리에 대하여 보도합니다. 욥이 당한 첫번째 재난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그의 소유물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재난은 그의 재산 곧 소, 양, 약대, 그리고 종들에 대하여 사슬처럼 연이어 발생했습니다(13-17절). 그리고 그러한 첫번째 재난은 그의 열 자녀들이 한 순간에 몰살을 당하는 것에서 그 절정에 달합니다 (18.19절). 이 사건은 욥을 감정적인 고난의 심연 속으로 빠뜨렸습니다. 하지만 욥은 그러한 고난으로 인하여 사단이 주장한 것처럼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욕하지 않았고, 그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찬송을 드렸습니다 (20-22절). 즉 사단의 주장이 무고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는 결국 욥의 신앙의 참됨을 인정하신 하나님의 영화로운 승리이자 욥의 믿음의 승리였던 것입니다.
2:1 -6의 문단은 욥을 대상으로 한 하나님과 사단 간의 두번째 천상 회의에 대하여 보도합니다. 욥에게 첫번째 재난이 있은지 얼마 후, 하늘에서는 하나님과 사단 간의 두번째 천상 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두번째 천상 회의 장면도 첫번째 천상 회의 장면과 거의 유사한데, 여기서 하나님은 사단을 향하여 재차 당신의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는지를 물으시고 욥의 순전하고 경건한 신앙을 거듭 인정하시는 것은 물론, 그처럼 진실한 신앙의 사람 욥올 사단이 당신을 격동하여 치게 하였음을 책망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자기의 순전함을 지켰음을 칭찬하셨습니다(3절). 하지만 사단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리어 더욱 강력한 시련으로 욥을 시험할 것을 하나님께 요구하였습니다. 즉 사단은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 생명을 바꾸올 지라’고 하며 이번에는 욥에게 육체적 시련을 가할 것을 요구하고, 그리하면 욥이 틀림없이 하나님을 욕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4.5절). 하나님은 사단의 이러한 요구를 다시 한번 수용하십니다. 그러나 다만 욥의 생명에는 손을 대지 못하도록 제한하셨습니다 (6절).
2:7-10의 문단은 욥에게 임한 두번째 재앙과 관련한 사실을 보도하는데, 하나님 앞에서 물러나온 사단은 욥의 육체를 쳐서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악창(惡擔)이 나게 합니다. 욥은 이로 말미암아 재 가운데 앉아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어대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맙니다 (7.8절). 그리고 이러한 두번째 재난은 첫번째 재난을 당할 때까지만 해도 잠잠했던 욥의 처마저도 욥을 향하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탄식하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9절). 이는 욥에게 임한 재앙의 심각성을 짐작게 해주는 것인 동시에,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폐하게 하려는 사단의 부추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욥에 대한 사단의 두번째 공격도 보기 좋게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욥이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한 그의 아내를 책망하며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아야 한다’ 고 말한 것으로 확증됩니다(10절). 이후 사단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사단의 패배와 욥의 승리를 시사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2 : 11-13의 문단은 당대 최고의 현자들로서 장차 욥과 논쟁할 욥의 세 친구들,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의 욥 위로 방문에 대하여 보도합니다. 욥의 세친구는 욥의 소식을 듣고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함께 욥을 찾아왔습니다(11절). 그리고 그들은 욥의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비참한 것을 목도하고, 차마 어떠한 위로의 말도 하지 못하고 다만 칠일 밤낮을 욥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12.13절). 그들의 이러한 행동은 욥에게 어떤 위로의 말보다도 더 강력한 위로가 되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에 욥은 친구들로 인하여 많은 위로를 얻고, 고통으로 인하여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탄식조로 토로하게 되는데(3장), 이것이 결국 욥과 친구들 간의 격렬한 논쟁의 단초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우리는 이상의 본문을 대할 때 다음의 사실에 주목해야 해야 하는데, 첫째는 하나님은 모든 인생을 일일이 감찰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단이 모인 자리에서 사단을 향하여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1:8)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을 일일이 감찰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모든 인생을 감찰하십니다(시11:4;33:13; 잠15:3).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가를 명확하게 제시하여 주는 것으로, 즉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온 우주 만물의 절대 주권자로서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 인생을 일일이 감찰하고 계심을 깨닫고 늘 경건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단이 이 세상에 대한 공중 권세를 잡고, 세상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그의 행적에 대하여 물으셨을 때,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다’ 고 대답하였는데 (7절), 이는 타락한 이 세상에 대한 사단의 지배권 행사를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합니다(엡 2:2), 물론 사단에게 이 세상에 대한 지배권이 있다는 것은 그에게 세상을 좌지우지할 권세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대한 절대 주권은 창조주 하나님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자신의 원대한 구속사적 계획에 따라, 사단에 대한 궁극적인 심판을 세상 종말의 때로 유보하시고, 사단에게 세상에서 활동하며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일시 허용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단의 나라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그의 영향력이 심대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단의 세상에서의 활동과 영향력은 이 땅에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악인이 형통하게 되는 부조리 현상이 발생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어디까지나 이 세상이 유지될 때까지의 일시적인 현상이며, 이제 세상 종말의 때가 이르면, 하나님은 사단과 악인들을 영원한 멸망에 처하시고, 자신을 경외하는 의인들에 대해서는 영생으로 갚으심으로 완전한 공의를 실현하실 것입니다(계 20 :7-15),
셋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이라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이다. 흔히 사람들은 이원론적( =元論的) 사고에 사로잡혀, 이 세상 모든 일을 선과 악, 하나님과 사단의 대립적 구조 차원에서 이해합니다. 하지만 사단이 아무리 강한 능력을 지니고 있고 또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타락한 천사에 불과합니다(겔 28: 14.15 ; 벧후 2:4), 그리하여 그는 비록 우주 만물의 창조주로서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허용 아래, 일시적으로, 이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허용’ 이라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의 활동일 뿐입니다. 이는 사단이 욥을 칠때에 하나님의 허락과 정하신 범위 안에서 만 칠 수 있었던 사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비록 사단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기도 하지만, 결국 최종적인 승리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우리들의 것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줍니다.
넷째는 이 세상 모든 일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의 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욥의 고난은 우연히 임한 것이 아니라, 천상 회의의 결과로 임한 것이었습니다. 천상 회의의 결과로, 이 지상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한 실례는 왕상 22:19 -23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중요한 사실은 이 두 사건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의 일들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사소한 일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법은 없습니다. 주님은 아주 분명하게 하찮은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마 10 :29), 그렇다면 그 어떤 일이 하나님과 무관하게 일어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결정된 일의 실행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것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악한 것으로 여겨지는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는 그것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원대한 작정이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순복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신앙이 진정한 것으로 인정받으려면, 무조건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욥의 순전한 신앙을 칭찬하셨을 때, 사단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반박하였습니다. 사단의 이러한 반박은 인간의 신앙이 다분히 조건적, 기복적인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은 욥의 신앙의 진정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사단의 제안을 수용하여, 욥에게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고의 고난을 허락하셨습니다. 물론 욥은 하나님의 시험을 극복함으로 그의 신앙의 진정성을 입증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 중에는 얼마나가 그 신앙의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무조건적인 신앙의 사람만이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고, 정금같이 나아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라이까’라고 욥을 참소한 사단이, 우리 또한 동일한 말로 참소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그건 성도는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핍박과 미움을 받는 삶을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스 땅이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확인되고 있지 않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우스를 아라비아 사막의 북부 지역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가나안 북동 지역이나 에돔의 한 지역으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대개의 학자들은 욥의 시대적 배경을 아브라함과 같은 족장 시대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욥이 어디 출신이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족장 시대에는 선민도, 선민의 땅도 약속만 되었을 뿐, 아직 정해지지도, 주어지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욥이 매우 경건한 신앙의 인물로 소개되고 있으며, 그에게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재앙이 본서 이야기 전개의 주요 모티프 (motif)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욥의 이름이 지닌 의미입니다. ‘욥’ 이란 ‘핍박받는 자’, ‘미움을 받는 자’ 란 의미가 있습니다. 매우 경건하였던 신앙 인물의 이름이 이처럼 부정적인 의미를 지녔다는 것은 참으로 의외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이름이 왜 이렇게 부정적으로 지어졌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욥의 이름을 그의 고난과 연계시키고 있지만 욥의 부모가 욥의 고난을 미리 예상하고 그러한 이름을 지어주었을 리는 만무합니다. 욥의 이름을 그의 고난과 연계시키는 사람들은 대부분 욥의 이야기를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지 않고 소설과 같은 허구적인 이야기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즉 욥기라는 허구적인 이야기를 쓴 작가가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는 주인공의 고난을 염두에 두고, 그에게 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이 허구적인 인물이 아니라 역사적 실존 인물이라는 것은 ㅂ존문에 그의 신상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있다는 사실 및 에스겔 선지자와 야고보 선생이 그를 실제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겔14:14, 20 ; 약5:11)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 왜 욥이 그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일시적이나마 세상에서 핍박과 미움을 받는 삶을 살았습니까? 그의 고난의 소식을 듣고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방문하였다가 도리어, 그를 정죄하기에 급급하였던, 그의 친구들의 주장처럼 욥이 어떤 알려지지 않은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까? 그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까닭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2절). 이는 물론 욥이 근본 죄인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지만, 그가 삶 가운데서 어떤 불의도 행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욥의 의로움에 대해서는 하나님도 인정하신 일입니다(8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왜 고난능 당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그의 의로움 때문이었습니다. 즉 욥은 그의 의로움을 시기하고 질투한 사단의 참소로 말미암아 죄와 관계없이 고난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천상 회의가 이루어지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사단을 향해 욥의 의로움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단은 욥을 향하여 시기심과 질투심이 발동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욥이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고 참소하였습니다. 즉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신 결과라고 모함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욥의 신앙은 기복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하난딤은 욥의 신앙을 시험하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단에게 욥의 소유와 신체를 칠수 있도록 허용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욥의 진실됨과 사단의 간악함을 몰라서 욥을 치도록 허용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만 이번 기회를 통하여 욥에 대한 자신의 신뢰가 정당함을 입증하여 보이고, 욥을 더욱 굳센 신앙의 소유자로 연단하시기 위하여 사단에게 욥을 칠 수 있도록 부분적으로 허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야 어찌되었든, 욥은 사단의 참소로 말미암아 극심한 고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주의할 것은 사단의 참소는 비단 욥에게만 그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단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성도들을 무고히 참소합니다. 성경은 사단을 가리켜 성도들을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참소하는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계12:10). 실로 사단은 우리를 참소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허락하에 잠시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는 사단의 역사로 인하여 세상에서 핍박과 미움을 받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의로운 삶을 살려고 하는 자들이기에 사단의 시기와 질투를 받아 세상에서 핍박과 미움을 받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한편으로 보면 이는 참으로 불합리해 보입니다. 그래서 성도들 가운데에는 의로운 삶을 살다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떠나는 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단이 일시적이나마 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 자로 활동하는 동안 이러한 일은 끊임없이 지속될 것입니다. 물론 이는 하나님이 사단의 간계를 제지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보다 원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사단의 간계까지도 일시 허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도들이 의로운 삶을 산다고 해서, 세상에서 고난을 완전히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의로운 삶을 살게 되면, 사단의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불의한 자들보다도 더욱 시련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성도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은 자신에게 닥치는 고난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성도이기에 당연히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알고 고난이 올 때에 인내하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함으로 승리하고,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우리 함께 기도드리시겠습니다.
<참고 문헌>
"손에 잡히는 구약개론"IVP
"성경개관 구약편" 부흥과개혁사
"ESV스터디바이블" 부흥과개혁사
"위드바이블" 바이블넷
"옥스퍼드 원어 성경대전" 제자원 바이블네트
"구약개론"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구약총론" 생명의말씀사
"두란노How주석시리즈"두란노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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