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꽃
김충경
어둠이 지배하는 심해에서
백여 년을 견디다 마침내,
햇살 머금은 황수정黃水晶 결정체
서해안 바닷물 모두 끌어안은
장독 속 컴컴한 공간에서
싸그락 싸그락 피어나는 침묵의 꽃이다
오늘은 장 담그는 날
종갓집 3대째 내려온 씨간장 품은 장독에
도란도란 이야기 품은 메주를 띄우고
풋 햇살 한술과 꽃샘추위 한 꼬집, 종부의 매콤한 손맛 한 움큼 얹었다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전해 내려온
불가사의한 묘법妙法의 연대기다
새싹 움트는 소리, 꽃잎 펼치는 소리, 열매 맺는 소리, 장대비 내리는 소리, 낙엽 구르는 소리 들으며 묵묵히 인고의 세월을 기다려야 각인되는 소금素金*의 활자체
함박눈 맞으며 장독대 귀 기울이면
소복소복 씨간장 자라는 소리 들리기도 한다
간장독에 푸르고 둥근 하늘 내려온 날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竈王神도 빙긋 웃는다지
씨간장은 피와 땀의 결정체였으니
어머니 가슴에도 응어리진 씨간장 한 줌
보석처럼 숨겨져 있겠다
* 소금의 가치가 매우 높아 일종의 하얀 금(素金)으로 불리기도 한다
---김충경 시집 {마우스 패드에는 쥐가 살고 있다}에서
첫댓글 부족한 시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