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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저녁 밥 걸고 한번 할래?”
아무말 없이 걷고 있다가 뜬금없는 타이밍에 입을 열자 천하의 감시훈이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몸을 꿈틀거리며 반응해온다. 이것도 꽤나 할만 한 짓인 것 같다. 눈물 한방에 오늘 당신은 나의 노예, 뭐 이런 설정인가.
“뭘 해!”
“왜 흥분하고 그래. 부표 찍고 돌아오기 한번 하자고.”
“뭐? 야, 이 새끼 아직도 그 짓하고 앉아있냐? 내가 준비 운동 안 하면 물에 기어들어가지 말랬…야!!!”
아줌마 같이 잔소리를 늘어놓는 시훈형을 뒤로 하고 난 ‘부표 찍기’의 암묵적인 룰인 ‘침묵의 스타트’를 떼었다. 타다닥거리며 이천원짜리 쪼리를 벗어던지고 사람들이 득시글한 모래사장을 가로지르며 바다를 향해 달려들었다. 발바닥 밑에서 꺼끌거리는 모래가 좋다. 이 맛에 바다 가까이 있는거다. 짭쪼름하고 속이 미식거릴 정도로 차가운 물이라해도 일단은 쏟아지는 햇빛리본을 달고 있지 않는가.
“야!!!! 반칙이야! 반칙!! 너 그러다 진짜 심장마비 걸려서 뒈진다! 야, 이 개!!!! 아우.”
한참을 고래고래 소리지르더니 이내 뒤에서 모래를 가로지르며 날 따라온다. 그러니까 형은 내 손바닥 안이라고. 거참,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으려나. 틱틱 대면서도 함께 달려와 주는 시훈형이 그래도 예뻐보여 뒤를 돌아보며 웃어주었다.
따라올 테면 따라와봐, 난 대한의 싹다패스 김하빈이다.
첨벙 첨벙 바닷물을 가르고 달려가다가 저 앞에 보이는 부표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입술에, 얼굴에, 다리에 차가운 바닷물이 닿는다. 무서운 속도로 시훈형과 나는 부표를 향해, 부표찍기를 얼마나 해댔으면 목표로 정해져있는 부표도 따로 있다, 헤엄쳐 가고 있었다.
“야!!!! 이 새끼야!! 야!! 김하빈!! 아, 시훈형!! 뭐하는거야!!”
높다란 의자 위에서 태양을 피하고 있던 지훈이 녀석이 꽥꽥대며 호루라기를 불어댄다. 남자 녀석이 답잖게 하이톤이다. 시훈형과 난 대답할 틈도 없이 열정적으로 부표를 향해 헤엄쳐갔다. 바닷물이 점점 차가워진다.
이대로 가라앉아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순간의 생각이지만 온몸에 소름이 끼칠정도로 암울한 생각이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생각을 털어내버렸다.
“야!! 부표찍기 하지 말라고! 어우, 진짜 이 개새끼들 말이라곤 듣는 적이 없어요. 아, 시훈형!! 형한테 한말 아녜요!!!”
그 와중에도 시훈형의 헤드락이 무섭긴 무서웠나보다. 박 지훈 놈. 부표를 찍고 대륙으로 올라올때쯤엔 어느새 높다란 의자 위에서 내려와 온갖 인상은 다 쓰고 있는 박지훈이 서 있었다.
부표찍기 룰 넘버 2. 부표를 찍고 돌아오면 그 시간대에 안전요원으로 서 있는 녀석의 두 손 중 한 손을 먼저 잡아야 승리가 인정된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박지훈 네놈도 똘끼 가득한 라이프 가드 소굴에 있는 녀석이란 말이다. 헉헉대며 물가로 기어나온 내가 못마땅한지 인상은 잔뜩 찌푸렸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성의없이 한 손을 내밀었다.
-착
물기 범벅인 내 손이 지훈이의 손과 마주하고 난 웃으며 그대로 박지훈에게 쓰러져버렸다. 야, 형님 힘들어 돌아가시겠다.
깔끔이라곤 병적으로 많이 떨어대는 박지훈은 자기 옷에 바닷물 또 묻었다며 성질에 성질을 내댔고 난 언제나 그렇듯 그 말을 싸그리 무시하며 내 몸을 아예 녀석의 튼튼한 갑빠에 뭉개버렸다. 야, 나 힘들어 죽겠다니까.
라이프 가드를 하면서 정말 좋은 것 중 하나는, 함께 일하는 녀석들 10명 중 아홉명은 갑빠가 튼실하다는 거였다. 그거 하난 좋았다. 내가 푹 하고 쓰러진다해도 코웃음치며 받아낼 수 있는 갑빠들이 많다는게 얼마나 뿌듯한 줄 사람들은 모를거다.
내가 절대 변태라서가 아니다.
“아, 이겼다.”
머리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려 자꾸만 코끝을 간지럽힌다.
“이기니까 좋냐, 이 화상아. 아 존나 하찬은 같은게 어디서 굴러와가지고는.”
거침없이 자기 친구를 인용해 나를 욕하는 박지훈의 목덜미에 무거운 머리를 기대며 낄낄거렸다. 박지훈에게는 하찬은이라는 친구가 있다고 한다. 박지훈의 말을 빌어 설명하자면 ‘미쳐도 곱게 못 미친’ 놈이라는데 여기서 일하는 2주 동안 적어도 세번은 봤었다.
사지 멀쩡, 얼굴 수려, 몸매 끝장. 잘만 생겼더만. 일하고 있는 박지훈을 그 높은 장대 의자에서 떨어뜨리겠다고 악을 쓰며 의자 기둥을 뽑으려한건 조금 미친놈 같았지만 그래도 척 보면 호감이 가는 인상의 녀석이었다. 새카만 머리에 새카만 두 눈까지. 터져나오는 활화산 같은 녀석이었다. 솔직하고, 솔직하고, 그리고 또 솔직해서 다른 사람까지 그 종잡을 수 없는 매력으로 이끄는 놈이었다. 그런 놈이니까 이 까칠까칠한 박지훈도 아직까지 그 녀석 옆에 잡혀있는 것일거고.
“내가 걔보단 좀 더 섹시하지.”
“허이고?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 지껄인다?”
“진실일 뿐이야.”
하찬은 이라는 녀석이 생명력 넘치는 발랄함과 잘남으로 승부하는 캐릭터라면 나는 뭐랄까, 아무리 봐도 섹시 아니겠냐. 섹시. 껄껄껄 웃어대자 박지훈은 내 얼굴이 보기도 싫다며 왼손바닥으로 무자비하게 내 얼굴을 밀어 모랫바닥에 쳐박아 버렸다.
야…. 나 힘들다니까.
조금 늦게 바다에서 발을 질질 끌며 나오는 시훈형을 모랫바닥에 드러누워 바라보며 깐죽거렸다.
“형, 좀 늙었나봐?”
“시끄러, 새끼야. 아 진짜 애새끼가 하여간 오늘 별 지랄을 다 해요.”
“아잉, 그래도 내가 있어서 즐겁잖아?”
“아 존나, 하찬은 같애.”
지훈은 옆에서 이런 곳까지 와서 하찬은 같은 놈을 또 한명 만나야 하는 자신의기구한 인생을 저주했다. 그냥 팔자려니 하렴.
지치긴 정말 지쳤는지 시훈형이 가타부타 말이 없이 내 옆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하늘이 보이고 바다내음이 코를 근질근질, 남자의 뼛속을 긁적긁적댄다. 오늘 본 네 웃음처럼 하늘이 한 점의 구름도 없이 맑다. 빌어먹게 맑다.
또 병신같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감자 소리만 들려온다. 쌕쌕대며 숨을 몰아내쉬는 시훈형의 숨소리라거나 저도 이제 포기했는지 아예 내 왼편에 쭈그려앉은 박지훈의 한숨소리라거나. 좌 지훈 우 시훈 이라는 훈라인에 끼인 내 상황이 재미있어 웃었다.
“또 실없이 웃고 지랄이야.”
“그냥.”
입버릇이 될 것 같다. 그냥, 그냥, 그냥. 네가 내 곁에서 사라지고 난 뒤로 내 삶의 이유가 사라져버렸다. 그냥, 그냥. 그래, 그냥 산다. 그냥 그렇게 살다가 그냥 그렇게 죽고싶어.
“햇빛이 뜨겁다.”
“파라솔에 기어들어가던지.”
시훈형이 또 틱틱댄다.
“숙소는 너무 답답해.”
“얼씨구? 언젠 유일한 피난처라매.”
답답해. 답답해서 그 안에 있으면 세상과 차단되어버린 것 같아서 숨도 못 쉬겠어.
“너 6시부터 교대인거 알지?”
지훈이 묻는다.
“아아, 어.”
“그때까지 정신차리라고. 너 얼빠져있으면 사람 한두명은 금방 죽는다. 어이! 거기 더 들어가지 마세요! 나오시라고요!”
호루라기 삑삑거리며 내는 지훈의 성질에 난 그저 웃어버렸다. 내가 얼을 빼놓고 있으면 사람 한두명은 우습게 금방 죽어나간다니. 사실 그 말이 맞긴하다. 바다란 탐욕스러운 녀석은 사람 한두명 정도 삼키는 것은 예의로 알 정도니까. 밤이 되면 위험부담이 더 커진다. 낮엔 사람들이 놀다가 실수로 빠진다 치지만 밤엔 작정하고 저 바다에 뛰어드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두워서 구하려해도 잘 뵈지도 않는다. 물이 차갑기도 하고.
그래서 웬만한 녀석들이 피하려하는게 야간 시간이었다. 그래봤자 10시면 해수욕장이 닫히니까 야맹증이 아닌 이상 웬만한 물체들은 다 볼 수 있으니 나는 덥지 않은, 물론 열대야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저녁 시간때 일하는 것을 자청했다.
사실, 다른 이유보다 그냥 햇빛 아래 오래 서 있는 것이 싫었던 걸지도.
“아, 배고프다.”
밀려드는 공허함이 뱃속까지 침투했다. 아, 배고프다. 뜨여진 내 눈 안에 담긴 것은 무엇일까. 백지? 네가 없는 백사장엔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기만 하는 날 너는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알면서도 넌 행복해하겠지. 그 잔인함에 배가 고파져왔다.
ㅡ꼬르르륵
아, 근데 정말 배고프다.
*
결국 저녁밥으로 매운탕을 얻어먹고 든든함 배로 높다란 의자 위에 올라가 앉았다. 파라솔이 필요없을 정도로 저녁의 햇살은 은은했다. 이제 바닷물들도 점차 차가워지고 있어 사람들은 뿔뿔이 뒷편에 있는 캠프장 텐트 안이라거나 주변 민박으로 발을 돌렸다.
그렇게 한시간 정도가 지나면 해가 지기 시작한다. 내가 구지 저녁에 일을 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이 광경을 언제나 홀로 독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는 해는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 노란빛에서 주황빛으로 주황빛에서 붉은 빛으로 그리고 붉은 빛에서 핏빛으로 물들며 스러지는 태양은 아침에 떠오르는 녀석과는 다른 맛이 있다. 떠오르는 태양이 신선하고 밝은 맛이 있다면 지는 태양은 그 누구를 앞에 세워놔도 상념에 젖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지는 태양이 걸어주는 마지막 주문을 나는 3주만에 중독처럼 매일같이 찾고 있었다.
해가 진다. 내 사랑도 졌다. 하지만 다음날 다시 고개를 빼 꼼이 치켜드는 해와는 다르게 내 사랑은 바닷속 깊숙이 가라앉았다. 다시는 떠오르지 않는다.
여덟시 십삼분. 내가 정신을 차리는 시간이다. 매일같이 이곳에서 노을이 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녀석을 잊어가는 시간. 아무리 생각해도 등신 같은 내 모습이 웃겨 또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 저 사람 왜 갑자기 바다로 뛰어드는건데. 폼새를 보아하니 함께 온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오늘은 맑은 날씨와 다르게 파도가 거세서 아까 여덟시에 분명 해수욕장 닫는다고 말한 것 같은데. 그게 어쨌건 간에 바다에 별 준비운동도 하지 않고 첨벙 첨벙 웃으며 뛰어드는 여자를 향해 난 일단 호루라기를 빽빽 불러댔다.
“거기 아가씨! 해수욕장 닫혔거든요! 그리고 그렇게 물에 확 들어가….”
난 말을 잇지 못하고 굳어버리고 말았다. 허리 정도 까지 오는 깊이에서 발을 헛디뎠는지 갑자기 균형을 잃고 조금 세게 몰아치는 파도에 넘어져버린 것이다. 빌어먹을. 욕 나오는 상황이다. 자동적으로 의자에서 뛰어내려 오는데 그 여자를 뒤따라온 사람의 얼굴 때문에 한 순간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리 깊은 곳도 아니었는데 중심을 한번 잃은 여자는 연이어 몰아쳐대는 파도에 정신없이 휩쓸리고 있었다. 그렇게 물에 빠진 여자는 자신도 당황했던지 온 몸을 허우적거리며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댔다.
내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한 사람의 이름말이다.
“연우야!! 살려…. 살려줘!!!”
그리고 내 눈이 멈춘 그 곳에는 언제나 하얀 웃음을 짓던 이연우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며 바다에 눈길 한번 의자 아래로 내려온 나 한번 번갈아 쳐다보며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너무나도 보고싶었던 얼굴이다. 하마터면 물에 빠져 물을 벌컥 벌컥 마시며 애타게 이연우를 부르짖는 여자를 잊을 뻔 했다.
말간 고동색 눈과 남자답게 잘 뻗은 턱선, 피처럼 붉은 입술이 여전한 이연우는 마음을 굳혔는지 덜덜 떨리는 오른쪽 손을 제 왼손으로 찍어누르며 끊어질 듯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이연우의 작은 습관하나를 본 것 뿐인데도 머릿속은 새하얗게 바래버렸다. 이연우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 이연우가.
여전히 예쁜 그 입술에서 자존심을 꾹꾹 짓누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살려줘. 제발.”
3초가 지난 후에도 난 이연우의 목소리에 감당하지 못할 감정이 터져나와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순간에도 여자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이연우의 예쁜 눈에 핏발이 서며 내게 고래고래 소리쳤다.
“살려달라고!!!! 제발!!! 살려줘!!!”
그 순간에도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덜덜 떨리는 이연우의 오른 손이었다.
*
첫댓글 하빈이ㅠㅠ.. 하빈이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길 바래요ㅠㅠ
그래야겠지요 :-)! 사람은 사랑없인 못사는 동물이라 하지 않던가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설마요 :-)ㅋㅋㅋ새드라면 새드티를 초장부터 팍팍 내는걸요 전~
아앗 재밋다. 시훈형은 하빈이를 좋아하는게 분명해.+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