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가 작은 할머니
김 창 애
오뉴월을 지나고 추석이 코앞인데도 여름 더위는 쉬 물러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유난히 길었던 칠팔월 여름 내내 쉼 없이 돌아갔던 선풍기가 이제 숨이 차는지 힘에 겨워 쌕쌕거린다.
한적한 이 시골마을에서 구멍가게를 한 지도 어언 20년 세월이다. 소일거리 수준의 가게지만 그것으로 20년이라는 세월을 버텨왔음에 스스로에게 오지고 대견하기까지 하다.
인근 도시에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대형마트들이 성황을 이루고 있고 목 좋은 곳마다 24시간편의점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작은 구멍가게는 명색만 가게일 뿐이다.
오후 무렵, 가게 유리문 여는 소리가 들린다. 밖을 내다보니 허리가 직각으로 굽은 할머니 한 분이 들어오셨다. 할머니가 짚고 계시는 지팡이가 머리 위로 솟아 있었다.
대부분 마을 할머니들의 얼굴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아마도 이웃 마을 분인가 싶었다. 남편이 차에 과일이나 야채 따위를 싣고 이웃마을을 다니며 장사를 하기에 남편의 단골일거라는 짐작을 했다. 그렇게 확신을 하는 건 이 마을에 이 가게 말고도 서너개의 같은 가게가 있으며, 또 찾아가기도 그 곳들이 더 수월한데 굳이 오르막길인 여기까지 찾아온 걸로 보면 내 짐작이 틀림이 없을 터였다.
할머니는 가게에 들어오시자 말자 평상 위에 걸터앉으며 한숨을 길게 내쉰다. 아마 버스에서 내려 50미터를 걸어와야 하는 거리가 벅찼던 모양이었다.
-해우 하나 줘봐.-
이쪽 남해안 마을의 할머니들은 김을 해우라고 부른다.
-어떤 걸로 드릴까요? -
온 장으로 구워진 것과 잘라서 소 포장된 것을 내 보이니 온 장으로 구워진 것이 양이 많다며 그것으로 한다고 한다. 봉지에 김을 넣어 드리니 할머니가 가방에서 검정 비닐봉지 속에 잘 싸놓은 지갑을 꺼낸다. 지갑을 꺼내들고 지퍼를 열고 그 속에서 꼬깃꼬깃 접어진 지폐를 꺼내는 할머니의 행동은 지루하리만큼 느리다.
-이거 한 장 바꿔줄 돈이 있을까?-
할머니는 미안한 듯 십만 원 권 수표 한 장을 내 민다. 시골구멍가게에서의 매상이라야 잔돈푼에 불과해 큰돈이 있을 리 없다.
-농협에 가면 바꿔주는데요.-
이곳의 금융기관은 농협과 우체국이 있다. 우체국은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해 스무 개 쯤의 계단을 올라가야 해 할머니들이 이용하기에 힘겨워 할머니들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농협을 이용한다. 그래서 할머니들에게 은행은 곧 농협으로 통하곤 했다.
수표를 살펴보니 이 지역 농협에서 발행된 수표라 별 문제 없이 바꿔줄 거라 생각하는데 할머니는 그게 아니란다. 할머니는 이미 이 가게에 들어오기 전, 농협에 들러 수표를 바꾸려 했던 것이다.
-도장이랑 통장이랑 주민등록이 있어야 된대. 아무리 사정을 해도 안된대.-
나는 그럴 리가 없다며 바꿔줄 거라 우기지만 이미 농협엘 다녀오신 할머니의 주장이 나보다 강하다. 내가 직접 가보지 않았으니 그런가보다 할 따름이다.
할머니는 일단 수표와 같이 접혀있던 천 원짜리 두 장을 내 손에 건네주고 잠시 숨을 돌린다.
-허리가 아파서 좀 쉬었다가 가야지.-
할머니는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을 더 가야하는 마을에서도 산길을 10여분정도 더 올라가야 하는 산마을에 사신다. 인가라곤 열 채가 채 되지 않는 조그마한 두메 산골마을이다.
-이거 바꿔서 할 것이 많었는디....-
추석을 앞두고 수표를 바꿔 자식들이 내려오면 먹일 음식 장만에 필요한 재료들을 사고 방앗간에서 참기름도 짜야 하고, 고춧가루도 빻아 놓고, 마트에 들러 손자들이 주전부리를 할 수 있는 과자도 사고, 음료수나 맥주도 몇 병 사려는 계획까지 할일이 참으로 많았을 터였다. 마음이 너무 급해 수표를 바꾸려 이 마을까지 왔는데 발행한 곳에서도 바꿔주지 않는다니 할머니의 상심이 얼마나 컸을까 싶으니 마음이 싸해졌다. 나로서도 이해되지 않은 일이었다.
물 한잔으로 목을 축이고 잠시 쉬는 사이 일을 보러 밖에 나갔던 남편이 돌아왔다. 할머니는 남편과 안면이 있어 나보다 더 반갑게 남편을 반긴다.
-어머니 뭐 하러 오셨어요?-
-응, 이것 좀 봐.-
할머니는 다시 수표를 남편앞에 내민다.
남편의 물음에 대한 대답보다 그 수표를 바꿀 계산이 더 앞섰다. 할머니의 장황한 설명에 남편이 할머니를 안심시킨다.
남편이 짐작컨대 할머니가 글을 쓸 수 없어 신분 확인을 위한 이서를 할 수 없으니 주민등록증이 필요했던 모양이라고 했다.
남편이 지갑에서 만 원 권으로 열장을 세어 할머니 지갑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 남편은 그 수표를 들고 농협으로 향했다. 할머니의 얼굴이 환해졌다.
할머니의 아들이 남편과 중학교 동창이라니 할머니는 남편을 보면서 아들을 대하는 것 같은가 보다.
이제 버스를 타고 왔던 마을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할머니는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힘에 부친다. 내가 팔을 부축했지만 얼른 일어나질 못했다. 힘껏 허리를 안다시피 해 세워보지만 역부족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고단하여 허리를 못 세우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할머니의 허리는 더 이상 세워지지 않았다. 할머니의 자세를 내 키에 맞추려 낑낑거렸던 나는 순간 할머니께 미안해졌다. 할머니의 키는 거기까지였던 것이다. 나의 허리께가 할머니가 다 세운 키였다.
원래의 키가 그렇게 작은 게 아니라 살아오면서 허리를 굽히고 일을 하다 보니 그대로 허리가 굽은 채 화석처럼 굳어버린 것이었다. 할머니는 이제 허리를 펴는 것보다 굽혀있는 것이 편하다 하신다. 울컥 서글픔이 몰려왔다.
세워지지 않는 허리를 굽힌 채 산을 내려와 버스를 타고 농협을 들렸다 다시 아들과 동창이었던 남편의 가게를 찾아와 수표를 바꿔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쓸쓸하고 가엽다.
추석날 할머니를 찾아 올 자식들은 그 할머니의 허리가 언제부터 굽어 있었는지 가늠이나 할까? 원래 어머니의 키는 자신들의 허리께가 아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