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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의 고백
삿 16:10-17
10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보라 당신이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청하건대 무엇으로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이제는 내게 말하
라 하니
11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쓰지 아니한 새 밧줄들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12 들릴라가 새 밧줄들을 가져다가 그것들로 그를 결박하고 그에게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팔 위의 줄 끊기를 실을 끊음 같이 하였고 그 때에도 사람이 방 안에 매복하였더라
13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 때까지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내가 무엇으로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하니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가 만일 나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베틀의 날실에 섞어 짜면 되리라 하는지라
14 들릴라가 바디로 그 머리털을 단단히 짜고 그에게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어 베틀의 바디와 날실을 다 빼내니라
15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 당신이 이로써 세 번이나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지를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17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삿 16:10-17 / 들릴라가 속이 상해서 삼손을 다그쳤다. `당신은 나를 우습게 여기고 있군요. 거짓말을 떡먹듯이 잘도 해대는군요. 그렇게 속이지 마시고 어떻게 해야 당신을 붙잡아 둘 수 있는지 나에게만 살짝 일러주세요. 네?' 11) 삼손이 대답하였다. `한번도 사용한 일이 없는 새 밧줄로 나를 묶으면 힘이 빠져 여느 사람과 똑같아지지' 12) 그래서 들릴라는 다시 새 밧줄을 가서와 삼손을 꽁꽁 묶었다. 먼저와 마찬가지로 들릴라의 집에는 삼손을 붙잡아 가려고 블레셋 사람들이 숨어있었다. 들릴라가 소리쳤다 `삼손,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을 잡으러 왔어요!' 그러자 삼손은 묶여 있던 밧줄을 마치 실오라기 끊어 버리듯 툭툭 끊어 버렸다. 13) `당신은 나를 놀리시는군요. 정말 사실대로 말씀해 주지 않으실래요? 어떻게 해야 당신을 붙잡아 둘 수 있는지 제발 가르쳐 주세요' 하고 들릴라가 간청을 하자 삼손이 대답하였다. `내 머리카락을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 그 일곱타래를 베틀에다 놓고 씨줄로 짜서는 말뚝으로 땅에 박아놓으면 될 거요. 그러면 나도 힘이 빠져 여느 사람과 같아지지' 14) 그래서 들릴라는 잠들어 있는 삼손을 베틀 곁에다 뉘어 놓고 베틀 바디로 삼손의 머리털을 단단히 짰다. 그러고는 `삼손,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을 잡으러 왔어요!' 하고 소리치자 잠자고 있던 삼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베틀 바디뿐만 아니라 땅에 박혀 있던 말뚝까지도 쑥 뽑아버렸다. 15) [비밀을 알려 주는 삼손] 들릴라가 말하였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도 말뿐이군요. 어쩌면 그러실 수가 있어요? 세 번씩이나 거짓말하며 나를 우습게 여기시다니! 당신의 그 무시무시한 힘이 어디서 솟아 나오는지 왜 나에게는 일러주지 않으시죠?' 16) 들릴라가 이렇게 눈만 뜨면 날마다 졸라대자 삼손은 알려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어 어쩔 줄을 몰라하였다. 17) 그러다가 하루는 들릴라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야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나실인으로 가려 뽑으셨소. 그래서 내가 태어난 뒤로는 내 머리에 단 한번도 칼을 대지 않으셨소. 그러니까 내 머리카락이 그 무시무시한 힘을 제공해 주는 셈이오. 내 머리를 밀어버리면 힘이 빠져 나도 여느 사람들처럼 될 것이오.'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삼손이 결국 무너집니다.
새 밧줄(10-12) 힘의 비밀을 캐내려는 들릴라의 첫 번째 시도를 보고 삼손은 그녀의 악한 의도를 벌써 알아챘어야 합니다. 그의 삶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었던 것이 어리석음의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삼손은 새 밧줄들로 자신을 결박하면 힘이 없어질 것이라고 두 번째로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삼손은 새 밧줄로 삼손을 결박되었지만 이 역시 쉽게 끊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여전히 자신에게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목숨이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베틀에서 머리털을 짜는 것(13-14) 삼손은 자신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베틀의 날실에 섞어 짜면 힘이 없어질 것이라고 세 번째로 거짓말을 했고, 이번에도 삼손은 원수들 앞에서 베틀의 바디와 날실을 다 빼내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의 이번 거짓말이 앞서 두 차례 거짓을 말한 때보다 진실에 가까워졌습니다. 들릴라의 온갖 애정표현에 삼손의 마음이 진실의 문을 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삼손은 들릴라의 거짓된 사랑을 순수한 사랑이라고 믿었고, 그녀가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는 사실을 추호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당시 삼손은 하나님의 품속이 아니라 늘 들릴라의 품속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이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타락한 교인의 전형적인 모습일 것입니다(요일 2:15-16).
비밀을 말함(15-17) 들릴라가 삼손을 세 번 결박했고, 그때마다 원수들의 습격으로 삼손이 죽을 위기를 당했지만 그는 여전히 들릴라를 믿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지만, 그만큼 삼손이 들릴라의 성적 매력에 완전히 빠졌습니다. 삼손은 분별력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들릴라는 사랑에 목숨을 거는 삼손의 어리석은 마음을 교묘히 이용합니다.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15) 삼손은 일찍이 이런 농간을 당하고 육체적인 사랑의 공허함을 경험하였지만 아무런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습니다(삿 14:16-17). 들릴라의 이런 말에 삼손은 죽을 만큼 괴로워하였습니다. 더 이상 진실을 말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비밀을 실토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국가의 입장에서 1급 비밀의 누설이며, 삼손 개인의 입장에서도 모든 것을 잃는 결정적인 실수였습니다.
적용: 삼손이 머무른 곳, 즐기는 곳, 잠자는 곳이 어디였습니까? 지금 당신이 즐겨 찾는 곳은 어디인가요?
블레셋에 큰 잔치가 열리고 조롱거리로 잔치에 불려 나온 삼손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감옥 생활에서 겪은 고난과 자신에 대한 회한은 삼손으로 하여금 회복을 갈망하게 했고 자신이 해야 할 일 즉, 블레셋을 멸망시키는 일에 집중하게 합니다. 삼손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삼손이 다시 하나님께 의지할 때 삼손의 잃어버린 힘은 회복됩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우선입니다. 삼손은 힘을 회복하고 자신의 생명을 바쳐 하나님이 삼손을 사사로 부르신 사명을 완수합니다.
< 설 교 >
반드시 이겨야 한다
삿 16장 15~22절 / 옥한흠목사
성경을 한두 번 읽어 보신 분이라면 '삼손'에 대해 익히 아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여 년 동안 블레셋의 속국이 되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삼손을 세워 블레셋 나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고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사역하게 하셨습니다. 삼손은 극적으로 등장해서 비극적이면서도 장엄한 최후를 마침으로, 드라마틱한 생을 살다 간 인물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2절에 보면, 구약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 가운데 삼손을 믿음의 조상으로 특별히 기록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그는 탁월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삼손의 일대기를 사사기서에 기록해 놓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삼손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유혹, 반드시 이겨야 한다. 지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교훈하기 위한 하나의 역사적인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유혹을 주로 '시험'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시험이나 유혹은 똑같은 의미입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도하는 간교한 수단을 일컬어 '시험' 또는 '유혹'이라고 정의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많이 경험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과연 유혹의 늪이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해보셨을 것입니다. 우리 중 마귀의 유혹을 면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번도 유혹을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죄를 짓지 않고 자기를 지켜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아직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오염되지 않은 완전한 상태에 있을 때에도 마귀는 거침없이 찾아가 유혹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아들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유혹할 수 없는 존재인 줄 잘 알면서도 주저하지 않고 찾아가서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이처럼 마귀는 누구 할 것 없이 가리지 않고 오늘도 유혹하는데, 바로 그 현장이 세상입니다. 따라서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이 마귀의 유혹을 받지 않고 하루를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똑똑히 주변을 살피면서 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어윈 루처(Erwin Lutzer)라는 분의 말에 동감합니다. "유혹, 그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일단 나를 유혹한다는 것은 나를 전쟁으로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마귀가 나를 유혹합니까? 그것은 "전쟁하자. 나와 싸우자."고 나를 불러내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영적인 전쟁, 유혹과의 전쟁입니다. 여기에서 지면 다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기면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삼손을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럼 몇 가지로 정리를 하면서 함께 깨닫고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길 바랍니다.
첫째로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는 목적은 우리의 거룩을 공격해서 죄를 범하도록 하는 데 있다 하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삼손이 블레셋 여인 들릴라를 알게 되면서 사랑에 빠졌습니다. 아마도 그가 미인계에 넘어간 것 같습니다. 5절을 보면 블레셋 방백들이 들릴라를 미혹의 미끼로 이용하여 삼손에게 접근한 목적이 나옵니다.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 여인에게로 올라와서 그에게 이르되 삼손을 꾀어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 힘이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를 이겨서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알아보라.' 결국 들릴라를 통해 삼손의 그 힘의 비밀을 알아 내어 그를 꺾으려고 했던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원래 삼손은 나실인이었습니다. 나실인은 거룩한 사람, 드려진 사람, 헌신된 사람을 의미하는 구약적 용어입니다. 그래서 삼손은 민수기 6장에 있는 말씀대로 머리에 칼을 대지도, 술을 마시지도, 죽은 자의 몸에 손을 대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일정 기간 동안 자기를 거룩하게 구별해서 하나님께 특별히 헌신하고 드리기로 약속한 사람을 일컬어서 나실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번 1주간 동안 하나님께 나 자신을 거룩하게 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면, 머리도 안 깎고 술도 안 마시면서 1주일 동안 거룩한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일반 나실인과는 또 다른 데가 있었습니다. 보통 나실인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헌신하겠다고 작심하고 약속하는데 비해, 삼손은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그래서 삼손으로 하여금 그가 태어나면 절대로 머리에 손을 대거나 칼을 대지 말고, 포도주도 마시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일평생을 그렇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삿13:5)
따라서 그가 나실인이라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삼손은 평생 나실인으로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바쳐진 사람입니다. 만약 그 머리에 칼을 대면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거룩을 범하는 것이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초자연적인 힘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거룩을 지킨다는 것은 자기 생명을 지키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은 들릴라를 앞세워 이 비밀을 캐내려고 했습니다. 오늘날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는 목적도 똑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평생 바쳐진 나실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사람으로 구별된 자들입니다.
한번은 어느 목사님이 자기 교회 교인들 중 남자분들을 몇 십 명을 앉혀놓고 "여러분, 자신을 거룩하다고 생각합니까?" 하고 질문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한 사람도 "나는 거룩합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놀라서 "왜 자기를 거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까?"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목사, 선교사, 순교자, 아니면 이름 앞에 '성'(Saint)이 붙은 성자에게나 해당하는 것이지 우리처럼 날마다 회사에 나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에 정신 없이 쫓기는 사람이 무슨 거룩합니까? 다음에 천국 가면 거룩해질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서는 아닙니다."
우리는 거룩한 나실인입니다. 신약적인 표현으로 하면 우리는 거룩한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우리를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장 4절을 보면 창세 전에 우리를 아들로 부르사 거룩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절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가 바로 우리들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령을 마음에 모시고 살고 있는 거룩한 성령의 사람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¼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우리 모두는 거룩한 성전, 하나님의 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합니다. 날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사로 드리는 제사장들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12:1) 우리의 가정생활도, 직장생활도, 심지어 여가를 즐기는 시간도 거룩한 제사입니다. 젊었을 때도 거룩한 제사요, 늙었을 때도 거룩한 제사입니다 우리의 삶을 날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올려드리는 제사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합니다. 세상의 더러운 죄를 멀리하고,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7:1) 바로 이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거룩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나실인이요, 거룩한 성도요, 거룩한 제자요,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입니다.
다음은 이와 관련하여 레오나르드 레이븐 힐이라는 분이 한 말인데 이 속에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가장 큰 기적은 거룩하지 않은 사람을 거룩하지 않은 세상으로 데려와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다시 거룩하지 않은 세상에 남겨 놓고, 그를 그 속에서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고 있는 영광, 행복, 능력은 다 거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세상에서 싫어하는 예수를 생명 걸고 믿고 그를 존귀히 여기며 경배하려고 합니까? 우리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떤 때는 이해할 수 없는 희생과 대가를 치르려고 합니까?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일을 간혹 거부하면서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합니까?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이상하고 신비한 기쁨을 우리 영혼에 간직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우리가 멸시나 천대를 마다하지 않고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합니까?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복, 능력, 영광이 거룩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우리를 미혹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우리의 거룩에 흠집을 내어 우리에게 있는 영광이나 힘을 빼앗아가려고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혹은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유혹을 가리켜 '내 팔꿈치에 있는 마귀'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유혹은 항상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목사가 더 가까이에서 유혹을 많이 받습니다. 조금만 정신을 안 차리면 어디로 끌려갈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마음에 어떤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유혹하는지 정확하게 꿰뚫어봐야 합니다. 곧 우리의 거룩을 더럽혀서 죄를 범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로 유혹은 영적으로 방심하면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삼손이 들릴라의 유혹을 계속 거절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미 들릴라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삼손이 모를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방심하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들릴라는 아주 요염한 자세를 취하며 삼손을 유혹했을 것입니다. "자기...그 신비하고 놀랍고 엄청난 힘, 정말 매력 만점이에요. 당신 같은 사람이 천하에 어디에 있어요. 내가 완전히 홀딱 반했어요. 그런데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지 나한테만 말해줘요. 날 사랑한다고 그랬잖아요." 그러면 벌써 삼손이 정신을 바짝 차렸어야 합니다. '뭔가 나를 노리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들릴라가 요염한 자세로 자기를 추켜세우면서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느냐고 물어오자, 그만 우쭐해져서 자기 거룩을 가지고 장난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힘? 어디서 나오느냐고? 마르지 않은 칡넝쿨 일곱 개를 가지고 와서 날 한번 묶어 봐. 그러면 알 거야." 그리고 몇 일이 지났습니다. "내 힘 말이야? 한번도 써보지 않은 새 줄을 가지고 나를 묶어봐. 그러면 내 힘이 없어져." 그리고 또 몇 일이 지났습니다. "내 머리털 일곱 가닥을 저 베틀에 넣어 같이 직조해봐. 그러면 내 힘이 날라가고 없어." 이런 식으로 장난을 했습니다. 이것은 방심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정신 차린 사람이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머리가 다 밀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떠나고 힘도 떠나 비참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방심한다는 것은 영혼이 졸고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신앙이 미지근해졌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매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세상 맛에, 세상 재미에 마음이 자꾸 끌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도 점점 안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점점 멀리 놓고 삽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의 교제도 점점 뜸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뭔가 지금 하나님과 거리를 두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을 엉뚱한 데로 돌리는 것을 일컬어 방심이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방심해지면 대신 육신의 정욕이 힘을 얻게 됩니다. 거룩의 힘이 약해지면 탐심의 힘이 생깁니다. 삼손이 방심하게 되자 나실인이 된 자기의 거룩을 팔아서라도 여인의 사랑을 얻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유혹이든지 탐욕, 욕망의 단계로 접어들면 헤어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하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날마다 선악과 나무 옆을 지나다녀도 전혀 유혹을 받지 않았었는데, 마음에 탐심이 생기자 선악과 나무를 보는 눈이 벌써 달라졌습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도 해서 저것만 먹으면 굉장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유혹을 느끼게 됩니다. 이처럼 방심하는 자의 마음에는 탐심이 일어납니다. 탐심이 힘을 얻습니다. 만일 기도도 안하고 성경도 가까이 하지 반드시 우리 마음에 어떤 이상한 것이 고개를 들고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나실인 삼손의 삶
삿 16장 15~22절 / 임덕순목사
삼손은 우리가 잘 아는 인물입니다. 그는 대단히 강한 힘의 소유자라는 것과 기생 들릴라 때문에 망한 인물이라는 기억이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들 중에 삼손만큼 경건한 출생을 가진 사사도 없고, 삼손만큼 능력을 가진 사사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부모가 기도하여 얻은 아들이며, 복중에서부터 구별된 나실인이었습니다. 나실인이란 "구별되다. 거룩하게 바치다"라는 뜻으로, 삼손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일을 위해 구별된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가 독주를 마시지 않게 하고,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고, 불결한 것을 만지지 말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란 삼손은 주어진 이 모든 특권과 축복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했었는데, 그는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기보다는, 자신을 위해서 살면서 모든 것을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사사라는 이름을 갖기에 부끄러운 삶을 살았고 나실인 이라는 이름에도 합당하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히브리어로 "나지르" 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카도쉬" 라는 말과 같은 뜻인데, 카도쉬는 성도라는 말입니다. 성도라는 뜻도 세상 사람과는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죄를 씻음 받아 의인이라 칭함을 받은 사람들이고, 사단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특별히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가진 "성도" 라는 이름은 세상 사람과는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성도들은 이 시대의 나실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나실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삼손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신자다운 생활을 하고 있는가, 자신을 돌아보고 바로 설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1. 나실인이면서도 세상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삼손은 블레셋을 타파하기 위해 세워진 사사인데, 불레셋의 여인과 사귀다가 망했습니다.
사사기 13장은 사사 삼손의 출생과 그 배경에 관하여 말씀합니다. 13장 맨 마지막에 보면, "여인이 아들을 낳아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성령의 감동이 어린 아이인 삼손에게 함께 하셨다는 복된 출발입니다. 그리고 나서, 14장에 청년이 된 삼손에 관한 첫 기록이 나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딤나에 내려가서 불레셋 사람의 딸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그녀에게 반해서 부모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결혼을 고집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귀하게 태어났고 귀한 직분을 맡았지만,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붙들고 땀 흘려 감당하기보다는 세상의 쾌락을 즐기는 삶을 택하였고, 그것이 너무 달콤해서 부모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14:4절 이하에 보면, 삼손의 의중에는 구실을 만들고 기회를 보아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려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가 자기백성을 돕겠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가 보여준 모습은 세상과 벗을 삼아 즐기는 모습입니다. 세상을 즐기면서 세상을 이기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모릅니다.
옛날에, 기독교 서클에 대해 불만스러워 하는 한 대학생이 있었는데, 훌륭한 장로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지론에 의하면, 지금 우리끼리 모여서 희희낙낙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친구들의 영적 생명이 죽어가고 있으므로, 저들의 구원을 위하여 저들과 동행해야한다고 그는 저들과 함께 술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지금까지도 세상 사람과 어울리는 일에만 익숙해져있습니다. 그것을 삼손의 삶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손은 점점 더 세상과 타협하는 인물이 되어갑니다. 그는 구별된 사람인 나실인인데, 그의 생활은 날마다 이방 여인들이나 따라다니며 음행을 일삼고, 블레셋 사람들의 물건을 빼앗고 그들과 원수 맺는 일을 했습니다. 그의 마음이 그들에게 점점 가까워져 갔고, 마지막에는 들릴라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자신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그 비밀을 고백하게 됩니다. 삼손은 처음에는 들릴라에게 거짓말로 일러주었습니다. 마르지 아니한 칡 일곱 줄로 묶으면 나는 힘을 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들릴라는 얼른 그렇게 해 보았지만 삼손의 힘이 없어지지 않자 삼손에게 투정을 부리며 조릅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냐, 어떻게 세 번씩이나 나에게 거짓말을 할 수가 있느냐 면서 조르자 결국 자기는 나실인이어서 머리에 가위를 대지 않은 사람이니 만일 내 머리를 자르면 힘이 사라질것이라고 대답을 하고 맙니다. 아무리 여자에게 정신이 빠졌다고 해도, 어떻게 하면 당신을 죽일 수 있느냐는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을 해 주는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나실인의 신분과 능력의 비밀을 이방 기생에게 넘겨주고 망하고 말았습니다.
고린도 후서6:14을 보면,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14-16)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너희는 거룩한 백성이요 구별된 사람들이다. 그러니 세상과 섞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 사람과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적당히 세상과 어울리며 남들이 가진 세상의 즐거움 나도 얻어 보겠다고 세상과 친구가 되며 체면과 양심과 신앙도 팔아먹는 그런 삶에 익숙해져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상관없습니다. 사람들 모두가 돈과 쾌락을 좇아 다니며 사니까 그렇게 산들 어떻겠습니까? 먹고살다 죽으면 그만 이라고 생각하니 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도입니다. 이 시대의 나실인입니다. 세상 사람과는 다르게 살아야 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 우리가 한발 더 앞장서서 돈과 명예와 쾌락에 젖어 그것에 목 매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들의 그런 면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세상과 어울려 살면, 성도는 세상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는 특권을 잃게 됩니다. 성도의 힘은 성결에 있습니다. 바르게 살아야 성도의 힘이 유지되며, 사단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단이 두려워하는 성도의 모습으로 살아가십시다.
2. 머리만 자르지 않으면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17)
삼손의 두 번째의 혼동은, “머리만 자르지 아니하면 나실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라고 착각했습니다. 나실인은, 머리만 자르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지 않아야 했고, 시체도 만지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머리만 기르면서 나는 나실인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는 블레셋으로 가다가 사자를 만나서 강한 힘으로 사자를 쳐 죽였는데, 돌아오다 보니 죽은 사자의 시체에 벌들이 집을 짓고 꿀을 모아놓은 것을 발견하고 꿀을 따먹었습니다. 민수기 6장에 보면, 나실인은 결코 시체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그의 부모는 그에게 당부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나실인으로 멀리해야할 짐승의 시체에 꿀이 있다고 그것을 따 먹었습니다. 또한 그는 나실인인데도 기생과 동거하는 타락한 삶을 즐겼습니다.
그러고도 삼손은 나는 머리를 자르지 않았으니 나는 구별된 나실인이라 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일에 교회 다녀왔다고 성도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십일조 했다고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10절은 우리에게 명확한 대답을 주십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 한자가 되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삼손이 지켜야할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삼손을 나실인으로 삼고 복을 주시고 성령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겼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주신 능력과 특권을 다 잃어버리고 처참해집니다. 20절에,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하였습니다. 참 슬픈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며 사는 성도가, 나는 그래도 하나님의 백성이야, 하나님이 아직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을꺼야 하는 마음으로 살아왔는데, 막상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이미 자기를 버리셨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그를 절망에 빠뜨린 것은 머리털을 자른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서 떠나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성도의 가장 큰 슬픔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고 떠나시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최고의 왕이자, 최고의 정복자였던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후에, 나단 선지자로 부터 심한 책망을 듣고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죄를 슬퍼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며 회개하는 고백이 시편51편에 나와 있습니다. 그 10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라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정말 두려워하였던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쫓아 내실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신 성령을 거두시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두려움을 느껴보셨습니까? 주님이 내 옳지 못한 삶을 보시고 실망하신 나머지 나를 버리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여러분 가운데 있었습니까? 우리는 노후에 어떻게 살까, 아들이 대학에 떨어지면 어떻게 할까 하는 걱정보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했다고 하나님이 나를 쫓아내시고 은혜를 내게서 거두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으로 걱정해야 합니다. 이런 근심은 회개를 이루고, 그런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시킵니다.
혹시 우리 중에 삼손 같은 마음을 가진 분은 없습니까? 삼손처럼 머리하나 깎지 아니한 것만 가지고, 주일날 교회한번 나왔다 간 것만 가지고, 나는 성도로서의 삶을 살고 있고 내 사명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실낱만한 계명 하나 지켰다고 모든 일을 다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습니까? 성도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는, 교회에 나왔다 갔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직분을 가졌다는 것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시는가? 매일 매시, 하나님의 성령과 동행하는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뜻을 받드는 것을 내 삶의 목적으로 삼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대한 질문입니다. 내가 구별된 백성으로서 분명한 신자의 색깔을 지니고 살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의 신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무엇입니까? 성도의 능력은 지식이나 물질이나 경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결함에 있고 성령 충만함에 있습니다. 머리카락 하나 지킨 것 같이 말씀중에 한 가닥만 붙들고 살아가는 신앙생활은 불안하고 피곤할 뿐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충만한, 말씀을 기꺼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면 그 삶 안에는 사랑, 기쁨, 행복과 만족의 열매들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3. 자기만족을 추구했으나 얻지 못했습니다.
그가 받은 남다른 은혜와 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해 사용하고 말았습니다. 14장부터 시작되는 그에 관한 사건의 전부는 "기생과 이방 여인과 놀아나는 것"과 그 가운데서 일어나는 사건들뿐이었습니다. 마지막 16장까지 그는 온통 육체적 향락과 미를 좇아 놀아나고, 자기만족을 채우고자 하는 일로 끝이 납니다. 삼손은 그에게 주신 은혜와 능력을 온통 자기만족을 위해 사용하고 말았습니다.
삼손은 힘이 남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당시는 지식이나 사회적 지위는 오늘같이 다양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적 힘이 강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시대였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그는 재력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가 그것을 가지고 끊임없이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였다면, 만족과 쾌락을 충분히 얻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은 충분한 쾌락과 만족이 아니라 고통과 싸움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삼손의 역사를 가만히 보면 원수 맺고, 원수 갚고, 원수 맺고 원수 갚은 일의 연속입니다. 그는 딤나에서 여인을 보았는데, 그 장인 되는 사람이 그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주었고,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주었다고 그 동네에 찾아가 동네 곡식에 불을 질렀고, 블레셋 사람들은 그의 장인과 그 여인을 잡아 죽였으며, 삼손은 다시 그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고, 블레셋 사람들은 다시 유대인들에게 앙갚음을 하였습니다. 원수 만들고 원수 갚는 것이 전부입니다. 또한, 그는 여인들을 사랑했지만 여인들에게서 버림을 받았고, 사람들에게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본문 16절절에 보면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만족과 쾌락을 위해 헌신한 삶이 죽을 지경의 고통만 가져다주었다는 기록입니다. 삼손이 육체적 만족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다 허비한 결과로 얻은 것은 버림받는 것이었고, 두 눈을 뽑히는 것이었고, 짐승들이나 돌리는 연자 맷돌을 돌리는 수치스러운 일 뿐이었습니다.
삼손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시대의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평안과 만족과 쾌락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서 노력합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행복을 얻고 만족을 얻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고 해가 지나면서 남겨지는 열매들은 무엇입니까? 서로가 원망을 하고 원수를 맺는 일과 싸움과 고통뿐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있는 고민과 고난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온 것들입니다. 즉, 형제나 이웃이나 사업상 친한 사람이나 친척이나 친구 등으로부터 받는 괴로움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나는 잘 해보려고 했는데, 그들을 돕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때로 하나님께 해야할 일도 손해 보면서 그를 도왔는데, 결과는 그들 때문에 고난만 겪었습니다. 이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이웃들과의 수평적인 관계를 위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인 수직적 관계를 뒤로 밀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수직적인 관계이고, 이웃과의 관계는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형제나 이웃 등 모든 수평적인 관계를 회복시키는 비결이 됩니다. 수직적인 관계가 우선이어야지, 수평적인 관계를 우선하게 되면 모든 수평적 관계가 헝클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양심적인 성도는, “목사님! 신앙생활이 게을러지니까 모든 일이 다 흐트러지고, 엉망이 되대요” 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삶에 게으르면, 모든 일이 흐트러지고 엉망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때문에 영광을 받기 위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만 즐거우시고 우리는 아무 재미도 없이 살라고, 독선적으로 자신만 영광을 받으시겠다고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에만 우리에게 영광이 있고 기쁨이 되고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 만물도 다른 것을 도울 때에 자기를 돕는 것이 됩니다. 식물과 동물이 그렇고 만물이 다 그렇습니다. 인생들도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우리의 모든 일이 잘 되어지고 행복을 누립니다. 시편37:4절 이하에,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복을 누리는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복을 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주셨고 건강한 몸과 복된 환경을 주셨으며, 만민중에서 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삼아 주셨습니다. 나실인 처럼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에서 불러내어진, 택한 백성을 삼으셨습니다. 이렇게 받은 모든 것, 이 축복된 환경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오늘 무엇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자기만족을 위하여 살아가면 싸움과 버림받음과 고통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기쁨이 있고 행복의 열매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시다. 그래야 참으로 온전한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이 길로 힘차게 달려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결심만 해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성령님을 보내어 새 힘을 주시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실패한 나실인 삼손을 본받지 말고 이 시대의 성공한 나실인들이 되십시다.
삼손의 힘
삿 16:15~17
'힘'이라는 명사의 사전적 의미는 자신이 스스로 운동력을 일으키거나 속도를 변화시키는 작용이라는 일차적 의미 외에 다양한 뜻이 있습니다.
①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 ② 알거나 깨달을 수 있는 학식 ③ 세력이나 권력 ④ 은혜, 은덕 ⑤ 효력 효능 ⑥ 폭력까지 여러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이 절대적인 힘이라고도 합니다.
시편 127편 5-6절에는 『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자식이 부모에게 즐거움과 복이 되니 재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문화재도 있으니 말입니다. 노후에 자신을 부양하는 소득의 원천이 된다고 할 때 자식에게 투자를 하는 것은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경제사정이 나빠져서 투자한 자식이 실직해서 부모에게 얹혀산다고 하면 이자는 커녕 투자 금액도 날리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은 아예 투자의 재화로 생각하지 않고 아예 자식을 재화의 대상으로부터 포기하는 부모가 많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즐거움이고, 복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부모들은 속으로 자식에 대한 기대는 포기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모두 자식을 포기한다고들 합니다. 이것은 혹시나 자식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이른바 비진의(比眞意)표시입니다.
본문은 삼손을 통해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인간의 힘이 무엇인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소라 땅 단 지파의 가족 중 마노아라 이름하는 부부에게 그 이름이 '태양'이란 뜻을 가진 삼손이라는 아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삼손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삼손은 이스라엘 사사로 20년을 지나는 동안에 그 위대한 힘으로 대적 블레셋을 격퇴시키는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힘을 가리켜 그 큰 힘(삿 l6:6,15), 그 힘(삿 16:9)이라고 했습니다.
삼손의 아내 들릴라는 삼손의 괴력의 출처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날마다 재촉하면서 졸라대니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16:16). 마침내 삼손은 자신의 힘의 출처를 들릴라에게 밝히고 말았습니다.
본문 16장 17절에 『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고 했습니다
1. 삼손의 그 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힘 입니다.
사사기 13장 24-25절에 『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삼손이란 이름이 태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삼손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사기 13장 5절에 『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고 한 말씀과 병행선상에서 보아야 합니다.
중대한 것은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 감동을 받았을 때 위대한 초인적인 힘을 발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었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여기 '감동하다'라는 의미의 파암은 '충돌하다'(impel), '강하게 밀다', '몰아넣다'라는 의미입니다. 성령께서 삼손에게 강하게 임했다는 뜻입니다.
① 여호와의 신에 점령되었다는 말입니다. ② 여호와의 신에 포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③ 여호와의 신에 공격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④ 여호와의 신이 삼손을 사로잡았다는 말입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 가운데 성장했습니다. 사무엘이 성장할 때도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받았다고 했습니다(삼상 2:26). 예수님도 하나님과 사람들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서 성장했습니다(눅 2:52).
Ⅱ. 삼손의 큰 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적 힘입니다.
본문 16장 15절에 『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뇨 당신이 이 세번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라고 했습니다.
1) 사자를 찢어 죽이는 힘입니다.
본문 사사기 14장 6절에 『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 같이 찢었으나 그는 그 행한 일을 부모에게도 고하지 아니하였고 』라고 했습니다.
삼손은 그 부모와 함께 블레셋 땅 딤나로 가던 중 포도원에서 사자를 만났습니다. 그때 삼손은 맨 손으로 사자를 염소새끼 찢음같이 찢었습니다.
2) 아스글론 사람 30명을 쳐 죽이는 힘입니다.
사사기 14장 19절에 『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크게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곳 사람 삼십 명을 쳐 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아비 집으로 올라갔고 』라고 했습니다.
삼손은 딤나의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그 잔치 어간에 블레셋인을 희롱하였습니다. 수수께끼를 내어서 잔치 어간에 알아 맞추면 베 옷 30벌과 겉옷 30벌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때 그 아내는 삼손을 졸라 답을 알아내어 말을 해 버렸습니다.
도리어 삼손이 겉옷과 베옷 30벌씩을 물어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때 삼손은 아스글론 사람 30명을 쳐 죽이고 순식간에 노략한 것으로 수수께끼를 푼 자들에게 주었습니다.
3) 여우 300마리를 잡아 그 꼬리에 횃불을 달아 블레셋 사람 곡식밭으로 보내는 힘입니다.
사사기 15장 4-5절에 『 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을 붙들어서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취하고 그 두 꼬리사이에 한 홰를 달고 홰에 불을 켜고 그것을 블레셋 사람의 곡식밭으로 몰아 들여서 곡식 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감람원을 사른지라 』고 했습니다.
이는 삼손의 장인이 그를 미워하여 자기 딸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린 일에 대한 복수 행위였습니다.
4) 나귀 턱 뼈로 블레셋 사람 1,000명을 죽이는 힘입니다.
사사기 15장 15절에 『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취하고 그것으로 일천 명을 죽이고 』라고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들의 곡식밭을 불 태워버린 삼손의 행위에 대해 복수하려고 할 때 삼손은 도리어 블레셋 사람들을 1,000명씩 쳐 죽였습니다.
5) 가사의 성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빗장을 빼내어 헤브론 산꼭대기로 옮겨버린 힘입니다.
본문 16장 3절에 『 삼손이 밤중까지 누웠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성문짝들과 두 설주와 빗장을 빼어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 』고 했습니다.
삼손이 가사의 한 집에 있던 날 이 소식을 접한 블레셋 인들이 그 집을 포위했을 때 삼손은 아예 그 성과 집을 송두리째 옮겨 버렸습니다.
6) 맨손으로 다곤 신당의 두 기둥을 밀어 그 신전을 무너뜨렸습니다.
본문 16장 30절에 『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엎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고 했습니다.
삼손의 큰 힘은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게 했고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침략하지 못하고 삼손이 이스라엘 사사로 있는 20년 동안 평안하였습니다.
Ⅲ. 삼손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아니 할 때 그의 머리가 밀리 우고 그 힘이 그에게서 떠났습니다.
1) 자기 몸을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사사기 14장 2절에 『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 중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취하여 내 아내를 삼게 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그는 블레셋을 복수하기 위하여 이방 블레셋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가사의 여자와 불륜관계를 맺고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 여자 무릎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는 이러한 여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하나님의 큰 힘을 잃어버리고 죽게 되었습니다.
2) 교만하여 이방여인의 꾀임에 빠졌습니다.
본문 16장 5절에 『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 여인에게로 올라와서 그에게 이르되 삼손을 꾀어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 힘이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를 이기어서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알아보라 그리하면 우리가 각각 은 일천 일백을 네게 주리라 』고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들릴라를 매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삼손은 끈질긴 들릴라의 유혹을 받게 되었습니다.
삼손은 들릴라가 큰 힘의 출처에 대해서 물을 때마다 엉뚱한 말로 응수했습니다. 마르지 아니한 푸른 칡넝쿨 일곱(16:7)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거짓이었습니다. 쓰지 아니한 새 줄로 결박(16:11)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거짓이었습니다.
머리털 일곱 가닥을 위선에 섞어 짜면 된다고 했습니다(16:13). 결국 이것도 거짓이었습니다. 자신을 희롱하였다고 계속해서 조르니 삼손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말하기를 내 머리가 밀리 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16:17)고 해 버렸습니다.
결국 그의 머리털은 블레셋 사람의 손에 의해 잘려 버렸고 그의 큰 힘은 떠나고 말았습니다.
3) 나실인의 규례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본문 16장 17절에 『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고 했습니다.
본문 16장 19절에 『 들릴라가 삼손으로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하고 사람을 불러 그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본즉 그 힘이 없어졌더라 』고 했습니다.
4) 나실인의 규례를 어긴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1) 두 눈이 뽑힘을 당했습니다(16:21).
(2) 놋줄에 매여 맷돌을 돌렸습니다(16:21).
(3) 이방신에게 영광을 빼앗겨 버렸습니다(16:23).
(4) 이방인의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16:24-27).
사랑하는 여러분!
삼손의 힘은 그의 머리카락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긴 머리카락은 힘의 상징에 불과합니다. 삼손의 진정한 힘은 그가 나실인이 되었다는 일차적인 것과 그 힘이 하나님의 영광, 곧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목적의 산물입니다. 이러한 목적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여호와의 신의 감동을 입었습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여호와의 사자로부터 수태 고지를 받고 나실인의 규례를 지켜야 했습니다. 민수기 6장 1-4절에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 』라고 했습니다.
이른바 태교(胎敎)입니다. 나실인은 '바침'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나실인으로서 지킬 것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① 금주 ②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 ③ 그의 몸을 구별하는 날 동안 시체를 가까이 말 것입니다.
금주 명령은 영적으로 깨어 있을 것을 의미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6-8절에 『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3절에 『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라고 했습니다.
머리털을 길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 절대 순종의 표시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0절에 『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고 했습니다.
시체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것은 죽음은 죄의 결과이니 만큼 죄악을 멀리한다는 의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6절에 『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현대판 나실인들입니다. 우리에게 긴 머리카락이 없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삼손의 힘의 상징이 머리카락이라면 우리의 힘의 상징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찬이 우리의 힘입니다. 성찬은 그리스도와의 하나님의 표시입니다. 성찬은 불세례(성령세례) 받은 자만이 참예하는 특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괴력을 발휘합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입니다(고후 6:7; 고후 13:4; 딤후 1:8; 벧전 1:5 계 12:10; 마 22:28; 욥 30:18). 여호와는 나의 힘입니다. 시편 18편 1-2절 『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시 22:19; 29:4; 40:31; 43:2; 46:1 65:6 54:1; 71:18; 합 3:19; 출 15:2,13; 이사야 12:2; 엡 6:10; 행 19:20).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벧후 1:16; 고전 1:24). 그에게서 능력이 나옵니다(고전 5:4; 막 5:30; 눅 8:46). 믿는 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입습니다(롬 1:16).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4장 13절에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능력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 『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에 충실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71편 16-18절에 『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의 곧 주의 의만 진술하겠나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사를 전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체력, 지력, 영력은 인간으로부터 말미암지 아니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받아야 합니다. 부와 명예와 자식과 재물은 궁극적인 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18편 1절에 『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라고 했습니다.
오늘 인간들은 하나님의 힘을 남용하고 있습니다. 체력을 불의의 도구로, 지력을 불의의 도구로, 엄청난 자연계시의 재력을 무신론의 도구로, 하나님의 영역을 마귀가 좋아하는 것으로 오용하고 있습니다.
신자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은 죄를 이기는 힘입니다. 회개의 힘입니다. 마귀를 이기는 힘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입니다. 사망을 이기는 힘입니다. 이러한 힘은 온전한 믿음과 충성스러운 교회 생활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내 힘이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 힘이 되십니다. 교회는 우리의 힘입니다. 성도의 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옵니다. 이 힘을 받아야 합니다. 이 힘을 선용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으로 죄를 이겨라
사사기 16:10-17
드릴라의 재촉
10 그러자 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나를 바보로 여기고 있어요. 당신은 나를 속였어요. 제발 말해 주세요. 어떻게 하면 당신을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죠?”
11 삼손이 말했습니다. “한 번도 쓴 일이 없는 새 밧줄로 나를 묶으면 되오. 그러면 나는 보통 사람처럼 약해질 것이오.”
12 들릴라는 새 밧줄을 구해서 삼손을 묶었습니다. 그 때, 다른 방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했습니다. “삼손, 사람들이 당신을 붙잡으러 왔어요!” 그러자 삼손은 그 밧줄을 마치 실을 끊듯 아주 쉽게 끊었습니다.
13 그러자 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나를 바보로 여기고, 나를 속이는군요. 당신을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삼손이 말했습니다. “내 머리털 일곱 가닥을 옷감 짜듯 짜 놓으면 될 것이오.” 삼손이 잠이 들자, 들릴라는 삼손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옷감 짜듯 짰습니다.
14 그리고 나서 들릴라는 그것을 말뚝으로 박았습니다. 들릴라가 다시 삼손에게 소리쳤습니다. “삼손,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을 붙잡으러 왔어요!” 삼손은 그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나 말뚝과 베틀을 뽑아 버렸습니다.
15 그 후에 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나를 믿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당신은 세 번이나 나를 속였어요. 당신은 당신이 가진 위대한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나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16 들릴라는 매일 그 비밀을 가르쳐 달라고 삼손을 졸라댔습니다. 삼손은 귀찮아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17 결국 삼손은 들릴라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삼손이 말했습니다. “나는 아직까지 내 머리를 깎은 적이 한 번도 없소. 나는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오. 누구든지 내 머리를 밀면, 나는 힘을 잃어 보통 사람처럼 약해지고 마오.”
오늘의 말씀 묵상 (주만나 큐티)
죄의 유혹을 박차고 나오라
들릴라는 삼손에게 계속해서 힘의 근원을 묻습니다. 삼손은 들릴라의 질문에 쓰지 아니한 새 밧줄로 결박하고, 머리털 일곱 가닥을 베틀의 날실에 섞어 짜면 된다고 거짓 대답을 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언약인 나실인의 비밀을 마치 수수께끼처럼 위험한 놀이로 즐기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노리고 매복해 있는 것도 모른 채 달콤한 유혹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삶에도 죄의 공격이 교묘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들릴라의 품 같은 죄의 유혹을 박차고 나와야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들릴라는 사랑을 이용하여 삼손을 압박합니다. 그리고 삼손이 세 번이나 속였음을 강조하며 날마다 그를 재촉합니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표현은 사사기 10장 16절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고통으로 여호와께서 근심하셨다는 표현과 동일한 어휘입니다. 끝내 삼손은 자신의 힘의 근원을 들릴라에게 알려 줍니다. 삼손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이 없었고, 거짓 사랑에 대한 욕망만 존재했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품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배신하는 행위입니다. 거짓 사랑을 끊어 내고,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품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큐티를 보다 영상 강해)
오늘도 주만나 큐티와 함께 하는 성도님들을 축복합니다. 말씀과 함께 하는 여러분의 오늘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를 소망합니다.
미국의 시인 롱펠로우는 “무슨 일을 시작하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그러나 시작한 일을 잘 끝맺는 것은 더욱 위대하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맺음은 더욱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도 적용이 되는데요. 그런데 이 세상을 사는 성도가 끝맺음을 잘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늘 죄의 유혹이 있기 때문인데요.
특별히 오늘 본문은 죄의 유혹에 빠져 인생의 마무리가 좋지 않았던 삼손의 모습을 반면교사로 우리에게 소개하는데요. 바라기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 삶의 끝맺음을 잘하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1. 죄의 유혹은 “한번만” 이 없습니다.
본문은 죄의 유혹을 받고 있는 삼손의 모습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0절을 보세요. 10)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보라 당신이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청하건대 무엇으로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이제는 내게 말하라 하니 지금 들릴라는 삼손을 사랑한다는 핑계로 삼손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말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목할 것은 이 유혹이 한 번이 아니라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것인데요. 본문에서만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죄의 유혹은 한번만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너질 때까지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망각하며 살아갑니다. 죄의 유혹을 한번, 두 번, 세 번 이겨내면 계속 그 유혹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번 한번 만 눈을 감고 죄를 짓고 다음부터 죄를 짓지 않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한번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줍니다.
간음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았던 다윗, 거짓말로 베드로 앞에서 즉사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은 30냥으로 예수님을 팔아 버림받았던 가룟유다의 모습을 통해 한 번의 죄가 얼마나 큰지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는 한번만이 없고 죄의 유혹은 끊임없이 옵니다. 그렇다면 그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6장 41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이처럼 우리는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습니다.
마음은 그 유혹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육신은 연약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인도해 주실 줄로 분명히 믿습니다.
2. 죄의 유혹은 집요합니다.
나실인이었던 삼손이 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것은 죄가 그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기 때문입니다. 16절을 보세요. 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삼손이 넘어진 것은 그에게 힘이나 지혜가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죄의 끊임없는 유혹에 자기의 허점을 찔리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약점을 향한 세상의 유혹은 집요하고 강력합니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면 더 강력하고 교묘하게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렇다면 그 집요한 죄의 유혹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바로 죄의 자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참세기 39장 12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12)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요셉은 집요한 유혹에 죄의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가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쉬웠을까요?
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선택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하는 선택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그 순간은 실패한 것 같으나 하나님은 그의 진실함을 보시고 더 큰 사명을 요셉에게 맡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의 유혹이 있다면 과감히 그 자리를 떠나시기 바랍니다.
지금 당장은 우리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을 믿고 그 자리를 떠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길을 허락해주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죄의 유혹은 ‘한번만’이 없습니다. 죄의 유혹은 집요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 죄의 유혹 앞에서 깨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죄의 자리를 떠나시기 바랍니다.
바라기는 오늘 하루 기도와 거룩으로 내 삶을 지켜 나가셔서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삶을 지켜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돌아볼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특별히 집요한 죄의 유혹이 우리 앞에 날마다 있습니다. 연약한 우리가 죄의 유혹 앞에 무너지지 않도록 붙잡아주시고 기도하며 죄의 자리를 떠나 승리하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은혜 내려주셔서 죄의 유혹을 이기고 승리하는 복된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말씀을 통해 주시는 깨우침)
죄의 유혹을 이기는 최선의 비결은, 유혹받을 때 피하는 것임을 기억하고,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지 않게 하시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게 하시며,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사명을 잊지 않게 하시고, 말씀에 귀를 열어놓고 주신 말씀에 늘 순종하여야 할 것을 깨닫습니다. 죄의 유혹을 처음부터 물리치지 않고 타협하다 보면 모든 것을 내주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하려는 순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음을 기억하고, 죄의 유혹을 경계하고, 처음부터 죄의 유혹을 물리쳐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실행하는 믿음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
삼손이 들릴라의 유혹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결국에는 파멸에 이른 것처럼 저희들도 사탄의 깊은 유혹에 빠져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가 종종 있음을 고백합니다. 들릴라의 끈질긴 미혹을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버리고 파멸에 이르고 만 삼손의 실수를 교훈 삼아,죄의 유혹을 이기는 최선의 비결은 유혹받을 때 피하는 것임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지 않게 하시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게 하시며, 오늘 하루도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인으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할 마지막 남은 머리카락은 무엇인지 깨닫게 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진심과 거짓말
삿 16:13~17 / 이명진목사
거짓은 하나님과 함께 한 진실을 이기지 못합니다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때까지 나를 희롱하여 네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내가 무엇으로 하면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가 만일 나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위선에 섞어 짜면 되리라 (삿 16:13)
말 한마디가 중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방역 당국에서 전염병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코로나19 확진자의 동선을 확인할 때 어떤 사람은 사생활이 노출될 것을 두려워하여 감추고 거짓말을 한 사람이 있던 반면, 어떤 사람은 의심 증상이 있을 때부터 더욱 철저하게 개인 방역수칙을 지키며 자신의 동선을 꼼꼼히 적으며 진실을 말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극명했습니다. 한 사람은 수많은 감염자를 낳으며 나라를 전염병 위험에 빠뜨렸지만, 또 다른 사람은 자신 외에는 어떤 사람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습니다. 정직하게 살기 어려운 세상에서 수고를 감내하며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었습니다.
삼손은 진실하게 살아야 할 사람이 거짓에 사로잡혀 살 때, 그 결과가 어떤지를 보여준 좋은 본보기입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은혜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불임부부 마노아에게 찾아와 임신하여 아들을 낳게 될 것을 알려줍니다. 그는 흥분합니다. 어떻게 해야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하나님의 사자에게 어떻게 길러야 하고,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질문합니다.(삿 13:12)
마노아 부부는 좋은 양육 프로그램이 있으면 훌륭한 자녀로 길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실인 서약만 잘 지키라 합니다. 좋은 양육이란 어떤 규범이나 규칙을 잘 지키는 것보다 그 중심에 하나님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자녀 양육에 큰 관심을 가졌던 부부가 아이 이름을 ‘삼손’이라 짓습니다.(삿 13:24) ‘작은 태양, 태양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태양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을까요? 삼손이 태어날 때는 이미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셋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지 않습니다.(삿 13:1)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왕래하며 가나안의 문화에 동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녀를 잘 양육하기 원하면서 ‘작은 태양’이라 이름을 지어준 부모가 아이를 바른 신앙으로 양육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삼손이 성장하여 블레셋의 딸을 결혼 상대자로 부모에게 소개합니다. 부모가 반대해도 자신이 그 여자를 좋아하니 자신을 위해 데려오라고 떼를 씁니다.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결혼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신부와 그녀의 아버지가 불태워집니다.(삿 15:6) 얼마나 끔찍한 비극입니까. 겉으로 보기에 마노아 가정은 은혜를 힘입어 살아가는 믿음의 가정처럼 보이지만,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하나님과 세상을 줄타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사 삼손의 모습을 보십시오. 사사기 13장에서 16장 말씀을 읽어보면 삼손은 개인적인 이유로 화를 내고 폭력을 행사하며 충동적으로 행동합니다. 심지어 성욕에 중독된 채 여인에게 끌려갑니다. 본문은 삼손에게 세 번 속은 들릴라가 “사랑한다 말하면서 어떻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느냐” 항변합니다.(15절) 정말 사랑한다면 제발 진실을 말해 달라 요청합니다. 날마다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었습니다.(16절) 사랑한다는 사람이 서로를 믿지 못하고, 진실을 감추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거짓 사랑을 사랑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삼손과 들릴라는 불타는 사랑을 하지만 서로의 관심사는 숨기고 이기적인 사랑을 나눕니다. 삼손은 사랑한다(4절)고 말을 하면서도, 결혼은 뒤로하고 잠자리만 같이합니다. 정욕을 채우기 위해 거짓말을 합니다.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가사의 기생을 만났을 때 16장 1절의 동사를 보면 “가서 보고 들어갔다”입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성욕을 채워줄 사람, 보기에 좋은 사람이면 그냥 잠자리를 같이했습니다. 자신의 필요만을 위한 이기적인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들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손의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삼손을 위기에 몰아넣는 방법을 찾습니다. 처음부터 당신의 힘의 근원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결박하여 굴복시킬 수 있는지 묻습니다.(6절)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사랑입니다. 블레셋 방백들이 약속한 돈과 국가의 원수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다는 영웅담, 즉 ‘부와 명예’를 기대한 것입니다. 거짓 사랑입니다.
우리도 거짓 사랑을 참사랑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첫 출발부터 관심사가 다른 데 같은 것처럼 속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정직하면 손해 본다. 진실하면 바보 취급 당한다. 그러니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라”고 합니다. 서로 불편하지 않을 거리를 유지하며 살라고 유혹합니다. 마이클 윌코크는 <사사기 강해>에서 “세상과 교회 사이에 평화로운 공존은 있을 수 없다. 갈등이 없다면 세상이 정복한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과 평화할 수 없고, 믿지 않는 사람과 동일하게 살 수 없습니다. 세상과 벗이 되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일입니다.(약 4:4) 관심사를 속이며 접근하는 세상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사랑을 품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둘째, 거짓말이 위험한 줄 알면서도 끊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삼손의 거짓말은 한 번이 아니었습니다. 세 번씩 반복되었습니다. 실수가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위협하는 여인과 위험한 게임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사랑하는 상대를 죽이기 위해 힘의 근원을 묻고, 결박하여 굴복시킬 방법을 묻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삼손이 거짓말을 하고 사랑을 나눈 후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단잠을 잘 때마다 위기를 만났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앗아갈 블레셋의 중무장한 군인들이 공격해왔습니다.
그런데도 삼손은 위험한 사랑 게임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지나친 자신감 때문입니다. 이전에도 문제없이 지나갔고, 위험의 순간마다 벗어났으니 이번에도 문제없을 것이라는 지나친 자신감이 문제입니다. 또한 삼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욕에 중독되어 있었습니다. 위험한 상황을 반복하여 겪으면서도 끊지 못하고 끌려가는 것은 중독의 문제입니다. 무언가에 사로잡혀서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무언가에 중독되면 그것이 주는 혜택 때문에 끌려갑니다. 누가 보아도 위험한 일인데 끊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를 중독시키는 것이 주는 혜택 때문에 안전하고 평안하다 착각합니다. 거짓말은 위험한 일입니다. 말을 잘하여 그 순간만 넘기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끝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말씀을 따라 정직하게 살고 진심을 표현하며 살기보다 적당히 거짓말을 하고 세상과 줄타기만 잘하면 문제없을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들릴라처럼 포기하지 않고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날마다 끈질기게 우리를 유혹하고 괴롭힙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무언가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중독된 것이 자신을 지켜주고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성공하는 길인 것 같아도 망하는 길입니다. 속지 맙시다. 성도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언가에 중독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지나친 자신감으로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과의 약속의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 드려진 나실인입니다. 한시적이 아니라 부모에 의해 평생이 드려진 나실인입니다. 나실인 서약을 마음에 품고 평생 머리를 깎지 않고, 포도주를 포함한 포도의 산물을 먹지 않으며, 사체와 같은 부정한 것에 접촉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삼손은 계속되는 들릴라의 요청에 자신의 진심을 드러냅니다.(삿 16:17) 거짓 사랑에 눈이 멀어서 진심을 드러냅니다. 말하지 말아야 할 비밀을 누설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도 지켜야 할 것이 있듯이 성도는 성도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삼손은 생활 중에 드문드문 나실인 서약을 어깁니다. 죽은 사자의 몸에 있는 꿀을 떠서 걸어가며 먹고(삿 14:8~9), 죽은 나귀의 싱싱한 턱뼈로 블레셋 사람 1000명을 죽입니다.(삿 15:15) 그래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블레셋을 심판합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습니다. 그러니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흠이 있어도 사용하며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 기회를 오해하고 자기 길을 걸어간 삼손의 결말이 무엇입니까? 두 눈이 뽑히고 옥에 갇혀 맷돌을 돌리는 동물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삿 16:21) 진심은 숨기고 거짓 사랑에 끌려간 결과입니다.
우리도 자격과 조건을 갖추어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흠이 많은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은 은혜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아직 하나님 손에 쓰임 받고 있다고 안심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은혜 안에 있을 때 더 진실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진심을 말하며 살기 원하십니다. 적당한 타협이 성공 같아 보이고 거짓이 진실을 이기는 것 같아도 하나님과 함께한 진실을 이기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