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365 황두진] 제인 그레이(Lady Jane Grey)는 1553년 7월10일 보위에 올라 불과 9일만에 왕권을 빼앗긴 영국의 4번째 여왕이었다. 그녀의 재위기간이 너무도 짧기 때문에 군주 목록에 포함시키지 않는 학자도 있지만, 영국 왕실에서는 제인을 정통 군주로 인정하고 있다.
제인 그레이는 1537년 영국 레스터에서 태어났다. 도셋 후작 헨리 그레이(Henry Grey)와 프랜시스 브랜든(Francis Brandon)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외할머니가 영국 왕 헨리 8세의 여동생인 메리 튜더였기 때문에 선왕 헨리 7세(헨리 8세의 아버지)의 외증손녀로서 왕위 계승권을 지니게 된다.
제인의 부모들은 야심가였다. 그레이 후작 부부는 토머스 시무어의 도움을 통해 딸을 에드워드 6세(헨리 8세의 아들로 아버지를 이어 영국 왕이 됨)와 결혼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토머스 시무어가 에드워드 6세를 납치하려 했다는 명목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자 그들은 제인 그레이를 노섬버랜드 공작 존 더들리(John Dudley)의 아들 길포드(Guilford)와 결혼시킨다.
종교개혁을 통해 힘을 얻었던 노섬버랜드 공작은 병약한 에드워드 6세가 죽으면 로마 가톨릭 신자인 왕녀 메리 1세(헨리 8세의 딸, 에드워드6세의 누나)를 누르고 자신의 며느리이자 성공회 신자인 제인 그레이를 왕위에 올릴 심산이었다.
결국 1553년 7월 6일 에드워드 6세가 세상을 떠나고, 7월 10일 노섬버랜드 공작과 그레이 후작 부부는 제인 그레이를 왕위에 올린다. 강력한 왕위계승권자인 메리 1세는 노섬버랜드 공작이 자신을 유폐하려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포크 지방의 프레밍턴 성에 몸을 숨겼다.
하지만 민심은 이미 왕녀 메리에게 기울어 있었다. 제인 그레이가 즉위한지 겨우 9일 후인 7월 19일 메리가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런던에 재 입성하자, 그레이 후작 부부는 딸 제인을 내버려두고 런던에서 도망쳤다. 제인 그레이와 남편 길포드 더들리는 반역죄로 런던탑에 유폐되었고, 노섬버랜드 공작 존 더들리는 8월 21일 처형당했다.
그리고 결코 왕권을 원치 않았지만 권력의 희생물이 되어버린 제인 그레이 역시 1553년 7월 19일 메리 1세가 런던에 입성하자 반역죄로 런던탑에 갇혔다가 이듬해인 1554년 2월 12일 남편인 길버트 더들리와 함께 참수당했다.
제인의 어머니 프랜시스 브랜든 후작부인은 딸의 죽음을 막으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 헨리가 죽은지 겨우 3주만에 자신의 시종 아드리안 스토크와 결혼했고, 여왕의 사면을 받아 왕궁에도 다시 출입하게 되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제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2월12일)은 바로 그 비운의 여왕 제인 그레이가 참수 된 날이다. 그녀의 나이 겨우 열여섯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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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열여섯...ㅠㅠ 그놈의 권력이 뭐길래..
아이구-_ㅠ 갑자기 영창대군이 생각나네 권력암투의 희생자들,,,,불쌍타
얼마전에 블러디 메리 읽으면서 제인 그레이도 참 불쌍하다 생각했어요
님 제목에 오타나셨어요 휘생이 아니라 희생,,그리고 도대체 권력에 눈이 멀면 자식이고 뭐고 안보이는건가 참 알수가없네..
수정했어요~
예전에 과제때문에 조사했었는데 진짜 영국왕실중에서 튜더가가 제일 파란만장한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