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재(1): 시습재
<논어>의 첫 구절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는 무슨 뜻인가? 시습(時習)은 “때때로 익힌다”로 번역되지만, 학자들 가운데에는 그 번역을 피상적인 번역이라고 비웃으면서 “때로 익힌다”로 새롭게 번역하는 사람들 (예컨대 김용옥)이 있다. “때때로”는 단지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하여 “때때로 익힌다”는 예컨대 “시간이 날 때마다 공부한다”를 의미한다. 이에 대하여 “때로”는 배운 것을 적용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때로 익힌다”는 “자기 상황(때)에 적용해 본다”를 의미하며 곧 “자기 것으로 만든다”를 의미한다. 학이(學而)가 그냥 주워삼키는 것이라면 시습은 삼킨 것을 소화하는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 일은 분리되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지만 -- 조금이라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주워듣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 위와 같이 구분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위와 같은 구분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해석을 견강부회라고 몰아붙일 수 없다. 이 해석은 시습을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와 긴밀하게 연결지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냥 주워들을 때는 그렇지 않지만, 그것을 소화하여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게 될 때 기쁨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의 해석이 성립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공부한다. 이 해석도 좋지 않은가? 위의 새로운 해석을 도입하여 “공부한다”를, ‘소화’를 의미하는 시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학이와 시습이 분리될 수 없다는 요점을 고려하여 “공부한다”를, 학이와 시습, 즉 주워듣는 것과 소화하는 것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다면 “시간이 날 때”는 무엇인가? 바쁘지 않을 때, 결국 생업에 종사하지 않을 때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때는 이른바 주경야독의 ‘야’(夜)를 가리킬 것이다. 주경(晝耕)이 있고, 따로 야독(夜讀)이 있다. 생업에 종사할 때가 있고, 따로 시습(혹은 학이시습)에 몰두할 때가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생업에 종사하는 장소가 있고, 따로 시습에 몰두하는 장소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 생업에 종사하는 곳을 작업장이라고 부른다면 시습하는 곳은 서재라고 불린다.
생업의 내용은 다 다르지만 -- 소 키우기, 병 고쳐주기, 길 닦기 등등 -- 시습의 내용은 다 같다. 공자는 역(주역)과 시(시경)를 많이 읽었다는데, 공자의 제자들도, 나아가서 공자 문하만이 아니라 다른 학파의 문도들도 공자가 읽은 것과 비슷한 것을 읽었을 것이다. 작업장에서 하는 일은 다 다르지만 서재에서 하는 일은 다 같다. 나는 지금 축산 관련 정보나 질병 관련 정보를 얻기 위해 책을 읽는 일은 시습(즉 야독 혹은 서재에서 하는 일)에 포함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시습은 그보다 사치스러운 일이다. 요컨대 시습의 내용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내용들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교양 과목으로 배웠던 내용들이다. 방문을 열고 서재에 들어가는 것은 학창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다. 생업 같은 것에 시달리지 않았던 그 시절로 말이다. 귀농(歸農)보다 더 좋은 것은 귀교(歸校)다. 그것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가 아니라는 말인가? 인간의 보편적인 관심을 추구하는 것이 어찌 기쁨을 주지 아니하겠는가?
시습재(時習齋)는 안양에 있는 우리 집의 내 방 이름이다. 우리가 이 집에 이사를 온 것은 1997년 경인 듯한데, 그 얼마 전부터 나는 학이재(學而齋)라는 이름의 공부 모임에 나가고 있었다. (학이재는 그 이후 성경재(誠敬齋)로 개명하였다.) 어느 날, 책상 앞에서 졸고 있는 중에, 내가 이 방에서 하는 일이라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학이재에서 배운 것을 복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과 더불어 내 머리 속에는 ‘시습’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나는 머릿 속에 든 것을 A4용지에 프린팅하였다. 한 글자를 추가해서 말이다. -- 시습재. 나는 굵은 글씨체로 인쇄된 시습재에 풀을 발라 달력 윗 쪽에 붙여 놓았다. 그러니까 “이 방에 당호가 하나 필요한데 무엇이 좋을까?” 하고 질문한 후 시습재를 찾아낸 것이 아니다. 마치 좋은 여자를 만난 탓에 계획에 없던 결혼을 한 것처럼, 좋은 글귀를 만난 탓에 계획에 없던 당호가 만들어진 것이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이런 것을 운명적 만남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 방에서 내가 하는 일은 바깥에서 주어들은 것을 소화시키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역경이나 시경류의 책을 읽는 등 교양을 쌓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에게 있어서는 교양 쌓는 게 직업이다. 다시 말해 나에게는 생업이 따로 없다. 그러니까 교수 봉급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교수 봉급은 강의의 댓가가 아니다. 만약 교수들의 봉급이 강사료라면 그것은 엄청나게 후한 것이다. 국립대 교수 평균 연봉이 6천만원대라고 하던데, 대개 주당 10 시간 정도밖에 강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수 봉급은 연구에 대한 댓가인가? 교수 봉급이 연구에 대한 댓가라면 그것은 그렇게까지 후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약간 성실한 교수들은 주당 30시간은 연구실이나 서재에 틀어박혀 있어서, (강의 시간과 합쳐줄 경우) 일반 직장인들의 주당 근무 시간을 거의 채운다. 그렇다면 교수들은 주당 30시간만 서재를 지키면 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교수들은 일주일 내내, 그리고 24시간 내내 서재에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교수 봉급은 그 댓가이다. 내가 여기에서 “서재에 틀어박혀 있다”거나 “서재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할 때 그 말은 따로 생업에 종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내가 “서재 바깥으로 나온다”고 말하면 그 말은 생업에 종사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교수들이 서재 바깥으로 기어나올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따로 생업에 종사하지 않아도 먹고살 만큼 사회가 배려해 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시습재는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은 방이다. 시습재를 붙인지 한 일년 쯤 지났을까? 누렇게 바래져 보기 싫게 되었고 나는 그것을 떼어버렸다. 그리고 그 날 이후 나는 내 방 이름이 시습재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지냈다. 그랬던 것이, 이번에 어쩌다가 회상되어 이렇게 글까지 쓰게 된 것이다. 나는 며칠 전 손바닥 반의 반 만한 크기의 포스트-잇에 다시 시습재라고 써 책상 머리에 붙여 놓았다. 이 방이 다시 시습재가 된 것이다.
시습재가 회상된 데에는, 포탈 싸이트 네이버의 “지식인의 서재” -- 초기 화면 아랫 쪽에 보면 그런 제목의 방이 있다 -- 도 한 몫 하였을 것이다. 나는 여기 저기를 클릭하다가 우연히 그런 기획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좋은 기획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기획에 대해 약간의 불만을 가지고 있다. 우선 제목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지식인의 서재? 이것은 ‘역전앞’이니 ‘처가집’처럼 군더더기말을 포함하고 있다. 서재가 있으면(즉 생업과 별도로 시습을 하면) 곧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내 불만 중에는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는 나를 찾지 않는다는 것도 들어있다. 나도 지식인인데 말이야.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나는 서재 연구가인데 말이야. 아,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는 “유명” 지식인의 서재인가?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는 출연하는 지식인들이 “나에게 있어서 서재는?” 하는 질문에 대답을 하게 되어 있다. 그리하여 누구는 “나에게 있어서 서재는 사교의 공간”이라는 둥 또 누구는 “꿈의 공장”이라는 둥 각자 나름대로 멋진 말을 만들어내곤 한다. 마치 서재가 이런 곳이 될 수도 있고 저런 곳이 될 수도 있다는 듯이 말이야. 내가 나에게 제기하는 질문은 “나에게 있어서 서재는?”이 아니라 그저 “서재는?”이다. 그러니 네이버가 나를 찾을 리가 있는가? 유명인도 아닌데다가, 자기에게 서재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소박하게 말하면 좋을 것을, 주제넘게시리 서재란 어떤 곳인지를 가르치려드니 누가 좋아하겠는가?
첫댓글 나도 2003년경 방이 네개있는 집으로 이사오며 꿈(?)에 그리던 서재방을 갖었건만 때때로도 아니고 때로 익히는...그것조차 못하다보니 이젠 장모님 올라오시면 장모님방으로 옷장 들여놓으며 옷방으로...아이구 나에게 서재란? 행랑채.. ㅎㅎ
영태거사, 귀국하신 후 학수고대하던 좋은 글을 이제야 접하니 그 기쁨이 아주 큽니다. 나도 이게 무슨 직업으로부터 비롯된 병증이라 생각되는데, 이런 글을 보면 우선 기분이 좋아지고 나아가서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거든. 나도 시습의 의미를 그 두가지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거사님의 글을 읽다가 문득 "익힌다는 것이 곧 시간을 두고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시간이 지나 다시 보면 또다른 의미를 찾게 되는 것처럼. 특히 고전 공부는 그런 면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이 되네. 그래서 성현들께서 고전을 평생을 손에서 놓지 못하신 것이 아닌가....
The more I know, the less I understand, all the things I thought I knew, I'm learning again. All the things I thought I'd figured out, I have to learn again.
--- Eagles의 명곡 가운데, Heart of the matter라는 노래 가사 중에서 --
흠..뭐................ 다 이해했어 좋은 얘기네~~ㅎ
이제 좀 한가해졌어. 그런데 이글스, 하 참내. 나는 호텔캘릴포니아나 데스페라도 밖에 모르는데. 양아치처럼 보이는 옛날 록그룹들 -- 미국이나 한국이나 -- 이 심오한 노래 많이 만들어 불렀다는 것 정도는 알았지만. 시습의 의미 중에 승일 논객과 이글스가 가르쳐 준 것 -- 도리어 몰라지고 또 알게 되고 -- 도 추가해서 한번 더 생각해 보겠네.
좋은 시리즈네~ 김시습이 떠올라...ㅎㅎㅎ^^
에필로그는 조영태 교수의 서재가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