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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19년 7월 28일 주일오후설교
도르트 신조 강해
렉시오나리 : 창18:20-32; 골2:6-15
본문 : 신29:9-13
제목 : “유아 때 죽은 신자의 자녀들”
주일오후찬송
경배찬송 - 시125편 1,2,3
렉시오나리 후의 찬송 - 시117편(고정)
아멘찬송 - 시100편 2,3,4
폐회찬송 - 시91편 1,5
도르트 신조 : 첫째 교리 -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제 17조 : 유아 때에 죽은 신자의 자녀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그분의 말씀을 가지고 판단해야 하는데, 그 말씀은 신자의 자녀가 거룩하되 본성에 의해서가 아니고 부모와 함께 참여하는 은혜 언약에 의하여 거룩하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모는 하나님께서 유아기에 이생에서 데려가시는 자녀의 선택과 구원에 관하여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유아 때 죽은 신자의 자녀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뻔한 위로’를 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저는 성품상 아닌 것을 맞다고 말하는 것을 좀 어려워하는 성격이어서 이런 일에 참 어려움을 겪는 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생활에서는 이런 류의 이야기를 자주 해야만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새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사업성에 대한 전문가입니다. 그런 내가 보기에 이 사람이 새로 사업을 시작한 방식은 너무 무모하고 어리석어서, 곧 실패할 것이 불보듯 뻔한 일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개업식에 축하 인사를 한 마디 해 달라고 요청을 받았을 때 그 자리에 가서, “뭐 새로 시작한 사업은 참 축하합니다만, 이 사업은 반년이 못 가서 망할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는 못합니다. 아마 이 사람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가능한 사람이기만 한다면 그 자리에서 새로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을 위해 크게 축복하는 축하 인사를 할 것이 분명합니다.
조금 더 무거운 문제로 옮겨가 봅시다. 내가 아주 저명한 암 치료의 전문가인 의사라고 생각해 봅시다. 평생을 고생을 하다가, 이제 가세가 좀 펴서 온 가족이 이제 약간 행복해지려고 하는 어떤 가정의 가장이 불현듯 몸이 좋지 않아서 병원을 찾아왔습니다. 지금 내 앞에는 그 사람의 CT 촬영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지금 이 사람은 췌장암 4기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의학지식으로는 이 사람은 3개월 안에 반드시 죽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의사가 이 가족들에게 “당신은 3개월 안에 반드시 죽습니다” 이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굉장히 힘든 상황입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가능성이 낮아도 최선을 다해 치료하면 나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무언가를 분명하게 알아도 아는 그대로 말할 수 없는 상황이 사회생활 속에는 많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사회생활 속에서 많이 만납니다. 우리는 자주 잘 되지 않을 것이 뻔해 보여도 “잘 될거야”라고 말해 주어야 하는 상황을 만나고, 분명 그 사람이 잘못한 것이 분명한데도,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해야 하는 상황도 만납니다. 사회생활이라는 것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위해서 명확하고 분명한 사실도 말을 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고, 반대로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지만 해 주어야 하는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단면 중 하나입니다.
유아 때 아이가 죽은 경건한 부모에게
제가 오늘 설교에서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도르트 신조 1장 17조를 준비하면서 읽었던 책 중에 이런 이야기가 인상 깊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부분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경건한 부모는 자녀가 어린 나이에 죽을 때 ‘내 자녀는 어디로 가나요?’라고 묻습니다. 경건한 부모는 사탄의 공격을 받고 괴로운 질문으로 가득 찹니다. 따라서 그 부모는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때 어릴 때 죽은 아이는 모두 천국에 간다고 믿는 이가 ‘당신 자녀는 분명 천국에 있어요’라고 말한다고 할지라도, 경건한 부모는 이런 답에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죄와 죄책, 그리고 구원의 문제에 신경을 쓰는 부모에게 그런 말이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런 위로에 경건한 부모는 전혀 위로받지 못합니다. 경건한 부모는 성경에서 답을 듣기를 원하며,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답을 듣기만을 원합니다.”
저는 조금 전에 ‘사회생활’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의도가 나쁘거나 상대를 속이려고 해서가 아니라,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고 위로를 주기 위해, 의도치 않은 거짓말로 위로를 줄 때가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분명한 지식에 의하면 그 일은 분명히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더라도, 상대가 진실을 있는 그대로 들으면 실망하고 절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이야기하지 않고 다른 대답을 주는 것 말입니다.
17조의 문제는 이런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제가 방금 읽어드린 부분은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을 때에 경건한 부모들의 마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부모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 소위 ‘좋은 게 좋은 것으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걱정 마! 아이는 분명히 좋은 곳에 갔을 거야!” 또 다른 한편으로, 사실은 이 내용을 읽어보면 이 위로해주는 사람은 자기가 그렇게 믿고 있어서 그렇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사람은 어릴 때 죽은 아이는 ‘모두’ 천국에 간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 신념을 따라서 이 부모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걱정 마! 아이는 분명 천국에 있어!”
하지만 제가 읽어드린 이 책의 내용에서 “경건한 부모는” 이런 대답에 만족할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왜냐하면 “경건한 부모는” 죄에 대해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참 대답’, 곧 ‘진실’을 알기를 원합니다. 그냥 자기 귀에 듣기 좋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가르치는 진짜 대답을 듣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는 자기가 모르는 문제에 대해서 상대방이 듣기 좋으라고 무책임한 대답을 하곤 합니다. 이런 위로는 대부분의 경우에는 듣는 사람을 위한 것이고, 또 듣는 사람도 만족합니다. 거꾸로 진실을 선명하게 말하면 더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경건한 부모는”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이야기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경건한 부모는 귀에 듣기 좋은 이야기 대신 ‘진실’을 알기 원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듣기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어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성경이 가르쳐주는 참된 진리’를 듣기를 원합니다. 어릴 때 죽은 자신의 아이가 진실로 어디에 갔는지를 알아야 그 마음에 참된 평화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건한 부모에게 아무런 성경의 근거도 없이 “아이는 좋은 데 갔을 거야!”라는 말은 입에 발린 말이 될 뿐, 전혀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책의 제가 인용한 부분 마지막은 이렇게 말하면서 마무리가 됩니다.
“경건한 부모는 성경에서 답을 듣기를 원하며,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답을 듣기만을 원합니다. 그 주님의 답을 바로 우리 선조들이 17항에서 줍니다. 선조들은 성경적인 위로, 성경적인 위안을 그 부모에게 줍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책임지지 않고 무절제하게 들려줄 수 있는 대책 없는 위로 대신, 하나님의 말씀, 진리에 입각한 정확한 대답을 들을 때 경건한 부모는 위로를 받게 된다는 것이며, 도르트 신조 제 17조는 바로 이 참 위로를 우리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아이의 문제를 다루는 이유
그러면 먼저 왜 신조가 17조에서 이 ‘일찍 죽은 자녀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지를 잠시 말씀드리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우리는 15조와 16조 두 주간에 걸쳐서 ‘유기’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유기는 기본적으로 선택의 어두운 부분입니다. 비록 유기조차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드러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습니다만, 유기가 ‘유쾌한’ 가르침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주간의 설교를 통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유기를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또 바로 앞 설교에서는 이런 유기의 가르침에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할 사람들을 위해서는 또 어떤 가르침이 제공되어 있는지, 이런 것들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신조는 그 다음에 ‘유아 때에 죽은 신자의 자녀들’을 다룹니다. 이것이 유기 바로 다음에 나오기 때문에 이 가르침은 반드시 유기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는 바로 앞의 조, 즉 16조에서 배운 내용과 맞닿아 있습니다. 16조에서 우리는 유기에 대한 가르침 때문에 첫째, 확신이 없어서, 둘째, 자기가 기대한 만큼의 신앙을 갖고 있지 못한 듯해서 불안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두려워 말고”, “더더욱 두려워 말아야 한다”, 그래서 “방편을 붙들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17조는 이 내용들과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우리는 16조에서 세 종류의 사람으로 나눈 것을 보았는데, 17조는 굳이 말하자면 네 번째 종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 종류의 사람이 누군가 하면, 유기의 가르침을 듣고 배워 알고 있지만 자신의 자녀들이 어렸을 때 죽은 부모들입니다. 즉 이 부모들 역시 16조의 앞의 두 부류의 사람들처럼 ‘유기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습니다.
아르미니안들은 도르트 주의자들을 비난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사람의 자유의지가 궁극적으로 자신의 구원을 결정하기 때문에, 자유의지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유아들은 죽으면 무조건 천국으로 간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도르트 주의자들을 비난하면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를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말하는 도르트 주의자들은 어려서 죽은 아이들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서 어떤 아이들은 지옥에 던져지는 것이라 가르친다고 비난했던 것입니다. 아르미니안들이 볼 때에 도르트의 선배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자유의지가 없는 아이들조차 지옥에 내던지는 가혹한 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죄를 알고 있는 부모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설교의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성경이 가르치는 죄를 알고 있는 부모인 우리들에게 있어서 “자유의지가 없는 아이들은 ‘무조건’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는, 마치 “좋은 게 좋은거야”, “아이는 어쨌거나 좋은 데 갔을 거야”라고 말하는 무책임한 손님들과 같습니다. 우리가 앞서 말했듯이, 성경의 가르침을 아는 부모들에게 이런 무책임한 말들은 전혀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아르미니안들은 이런 무책임한 손님들처럼 “아이들은 무조건 천국에 간다. 그러니 너희 도르트 주의자들은 가혹한 자들이다”라고 말합니다만, 경건한 부모들은 얄팍한 위로보다 진실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진실 말입니다. 그래서 도르트의 선배들은 성경을 다시 살폈습니다. 제가 주중 살펴본 자료에 의하면 17조의 내용은 원래의 도르트 회의 자료에는 들어 있지 않았던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뒤에 보충하여 넣은 것입니다. 이유는 방금 말씀드린 이것 때문입니다. 성경을 살펴, 그 성경이 주는 진정한 위로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우리 선배들은 성경을 살펴 이로부터 진정한 위로에 도달했습니다. 그것이 17조의 내용이고, 이를 신조 안에 내용으로 넣었습니다.
이 가르침은 한편으로는 유기에 관한 내용이면서, 동시에 ‘언약적 자녀’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내용을 통해 언약의 풍성함에 함께 도달하게 됩니다. 이를 이제 함께 살펴보고, 하나님의 말씀이 주시는 참된 위로에 도달하도록 합시다.
우리 자녀들은 은혜 언약에 의해 거룩해진다
신조는 신자의 자녀가 “거룩하다”라고 우선 선언합니다. 그리고 신자의 자녀가 거룩한 이유를 “본성에 의해서가 아니고”, “부모와 함께 참여하는 은혜 언약에 의하여” 거룩하다고 말했습니다. 신조 17조의 시작 부분을 보시면 이렇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이 전체 내용의 핵심입니다. 이어서 나오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모는 하나님께서 유아기에 이생에서 데려가시는 자녀의 선택과 구원에 관하여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이 앞의 내용의 자연스런 결론입니다. 즉 경건한 부모들이 유아기에 죽는 아이의 구원을 의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앞의 내용 곧 신자의 자녀들이 “본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 언약에 의해서” 거룩하기 때문이다......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거룩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말씀은 우리에게 신자에게서 태어나는 자녀들이 “나면서부터 거룩하다”라는 점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7조의 맨 앞에 나오듯이 이 가르침은 우리들의 생각의 유추를 따라서, 즉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내려진 결론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내린 판단입니다. 말하자면 아르미니안들은 논리적 결론에 의해서, 즉 “인간은 자유의지를 통해 거룩해질 수 있는데, 태어난 아기는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없다”라고 하는 논리적 결론에 의거하여, “그렇다면 선하신 하나님이 아이를 모조리 지옥에 던지지는 않으실테니”라고 유추하여 아이들의 거룩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선배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아이들의 거룩을 끌어냈습니다. 아이들이 거룩합니다. 어떻게 아이들이 거룩합니까? 무엇을 보고 우리의 아이들이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쭉 따라가 봄으로써 이에 대한 자연스런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1. 할례 시
하나님은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지시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할례는 구약의 ‘은혜 언약의 표와 인’이었습니다. 할례는 그 자체가 언약이 아니라 언약의 ‘표식’입니다. 즉 하나님과 자기 백성 아브라함의 사이에 언약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즉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는 은혜 언약이라는 관계의 줄이 묶여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표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만약 이 은혜 언약이, 그 언약을 받는 당사자의 믿음이나 태도에만 전적으로 연관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의 직접적 대상자인 ‘아브라함만’ 할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만 할례를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그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부분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창17:11-13)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은혜 언약의 징표인 할례가, 직접 신앙을 고백하는 아브라함 외에도 난 지 팔 일만 되면 모든 아이들이 다 받아야 하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이것을 행치 않는 자는 “내 언약을 배반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명령 이후에 아브라함의 집은 모두 할례를 받는데, 어른들 뿐 아니라 당시 13살이었던 이스마엘도 할례를 받았고, 당연히 나중에 태어난 이삭도 할례를 받았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이 은혜 언약의 표인 할례를 받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 언약이 아브라함이나 신앙을 갖고 고백하고 표시하는 어른들, 그 사람들의 신앙에 절대적으로 달려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언약은 언제나 우리에게 ‘반응’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성인 세례를 베풀 때 누구에게도 ‘믿음의 반응 없이’ 세례를 베풀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믿음의 반응’은 은혜 언약에 대한 ‘반응’ 곧 ‘충분조건’이지, 은혜 언약의 ‘필요조건’이 아닙니다. 은혜 언약을 받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믿음의 반응이 있어야 하지만, 은혜 언약이 믿음의 반응 ‘때문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은혜 언약이 우리의 믿음의 반응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비록 이해할 수 없고, 반응할 수 없고, 대답할 수 없는 팔 일 밖에 되지 않은 아기도 “이 아이도 내 은혜 언약 안에 들어 있다”라고 말하게 하셨습니다.
이 말은 어떤 면에서는 현대의 합리주의를 공격합니다. 우리들 중 어떤 이들은 ‘바르게’ 믿어야 한다는 열심이 너무 강력해서, 오히려 바른 믿음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즉 우리들 중에 바른 모습이 나타나는 것을 강조하다가 어떤 사람들은 ‘행위주의’, 곧 ‘우리가 믿음으로 보인 어떤 태도’ 거기에만 집착하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그 자체가 ‘비밀’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 자체가 ‘선물’입니다. 믿음의 반응을 나타내는 일은 당연히 마땅한 일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믿음의 비밀의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에는 우리가 잘 모르는 영역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은 이것을 긍정하기 때문에, ‘믿음을 고백하지 못하더라도 자기 백성으로 받아주시는 하나님’을 아멘!합니다. 이 아이들이 아무런 ‘바른 신앙고백을’ 안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 없이 이 아이들조차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것으로 받아주셨다는 증거를 성경에서 발견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전적으로 합리적이지는 않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창세기 17장의 할례 제도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자녀들에게도 조건 없이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훌륭한 말씀이며, 또 할례 제도는 유아세례의 근간이 되는 제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신자의 자녀들이 태어나자마자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수긍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왜 사랑해주셔서 그분의 자녀로 삼아주셨는지가 ‘신비’에 속한 것처럼, 우리의 아이들이 아무런 판단 능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동일하게 받아들여주셨다는 사실은 ‘신비’에 속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자녀가 태어났을 때 ‘불신자 한 사람이 태어났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복 안에서 은혜의 선물이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시편 127편은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자녀를 ‘장차 신자가 될지 불신자가 될지 알 수 없는 불확정성의 상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즤 자녀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고 하고, “그분의 상급”이라고 합니다. 이 성경의 가르침을 우리는 그대로 받기 때문에, 경건한 부모라면 아이가 어려서 죽더라도 그 자녀의 선택과 구원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습니다.
2. 출애굽 후 2세대들에게
조금 더 뒤로 나아가서 이제 출애굽 이후 모세가 제 2세대들과 언약을 재확인할 때 그 회중들 안에 누구를 포함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함께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읽었던 신명기 29장 9-13절 말씀을 보도록 합시다.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오늘날 너희 곧 너희 두령과 너희 지파와 너희 장로들과 너희 유사와 이스라엘 모든 남자와 너희 유아들과 너희 아내와 및 네 진중에 있는 객과 무릇 너를 위하여 나무를 패는 자로부터 물 긷는 자까지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선 것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에 참예하며 또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향하여 하시는 맹세에 참여하여 여호와께서 이왕에 네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자기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신29:9-13)
지금 모세가 말씀하고 있는 이 곳은 요단강 건너 저편으로 가나안 땅이 보이는 모압 평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1세대가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하나님을 거역함으로써 광야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두 번째로 2세대의 사람들이 가나안을 향하여 가려는 시점에 놓여 있습니다. 이 때 모세는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상기시키면서 이들을 이 언약 안에 참여시키고 있습니다.
이 때 모세가 언약의 대상자로 이야기하고 있는 중에 “너희 유아들과”가 있다는 것에 유의하도록 합시다(11절). 하나님의 언약 대상 안에는 언제나 “유아들”이 있었습니다. 왜 유아들이 있습니까? 이 아이들이 언약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 아이들이 거기에서 모세의 말씀을 들은들 그 아이들이 1세대의 언약적 잘못이나 배반을 이해할 리도 만무하고, 2세대로서 그들이 지켜 행해야 할 언약적 책무들에 대해 결심을 가질 수 있을리 만무합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똑같습니다. 아마 모세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어떤 아이들은 엄마 품에서 사탕을 빨고 있었을 테고, 조금 큰 아이들은 옆에서 장난감을 갖고 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3-4세가 된 아이들은 모세가 말하고 있는 이 순간에 엄마 품에서 버둥거리다가 옆 라인을 타고 아장거리며 저쪽으로 걸어가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이 아이들조차 모두 “언약의 대상자”로 삼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압 평지에서 이 말씀 이후에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너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고, 거기에서 ‘길갈’이라는 지역에서 할례를 행했습니다. 당연히 이 할례의 대상에는 아주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 포함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앞서 말씀드린 창세기 17장과의 연결이 다시 생깁니다. 이 아이들이 할례를 이해했습니까? 이 아이들이 은혜 언약을 이해했습니까? 이 아이들이 가나안 땅에서 진군해야 하는 언약적 의무를 이해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언약의 대상자로서 ‘언약 공동체 안의 한 일원’으로 취급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시는 일이 ‘그분의 은혜로’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금요스터디 때 이 주제를 다루었습니다만, 성인 세례에 치중하고 유아세례를 부인하는 이들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자신들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들의 신앙고백 때문에’ 주어진 것 같은 오해를 하기 쉽습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우리는 성인 세례 조차도 ‘은혜로’ 받았습니다. 내 믿음은 내 것이 아니고 선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는 믿음이 선물이라는 사실을 가장 잘 드러내는 대상들은 바로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받아들여진’ 아이들입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행위로 우리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갚아드릴 수 없음을 여러 곳에서 강조했는데, 아이들보다 이것을 더 잘 드러내는 이들은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반응에 애쓰고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강조한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반응이 우리 믿음이 존재하는 이유는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선물로 받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 역시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녀들을 역시 이 선물의 영역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말씀하실 때, 거기에 대해 “우리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니 제외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은혜에 대해 잘 모르는 태도인 것입니다.
3. 기타 구약의 몇 구절
그리고 아이들이 언약 안에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주는 구약의 성경 구절들이 여럿 있습니다. 몇 군데를 읽어드리고 넘어가겠습니다.
1) 여호수아 8장에서 에발 산과 그리심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으고 언약을 반포할 때의 말씀입니다. “......그 후에 여호수아가 무릇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모세의 명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인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거하는 객들 앞에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여기 언약 반포의 현장에 “아이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역대하 20장에는 모압과 암몬이 공격해 왔을 때 여호사밧 왕이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였다”(대하20:3)고 하면서 기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기도의 내용은 이 땅을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셨고 성전을 건축하였을 때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는 언약적 내용을 말한 것입니다. 여호사밧의 마지막 기도의 말은 “우리 하나님이여 ......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20:12)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의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청중의 내용이 곁들여져 있습니다. “유다 모든 사람은 그 아내와 자녀와 어린 자로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 하나님 앞에서 언약에 근거한 기도를 드리는 왕 여호사밧 앞에 모든 백성이 섰는데, 그 중에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여호사밧의 이 멋진 기도, 언약에 기초한 이 놀라운 기도를 이해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 기도에 아이들이 함께 참여하였다고 쓰고 있습니다. 여기 “자녀”라는 말이 나오는데도 다시 “어린 자”를 쓴 것은 아주 어린 아이들 역시 여기에 포함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언약 안에 포함되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3) 요엘서 2장에는 앞의 내용들과는 약간 뉘앙스는 다르지만 조금 놀라운 사실들이 나옵니다. 요엘서는 임박한 여호와의 날에 대해 말하면서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요청합니다. 12절에는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라고 했고, 이어지는 13절에서는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렇게 회개를 요청하는 자리에 어린 아이들도 요청했다는 것입니다. 15절부터를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고하고, 백성을 모아 그 회를 거룩케 하고 장로를 모으며, 소아와 젖 먹는 자를 모으며,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골방에서 나오게 하고,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들은 낭실과 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이렇게 대상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반응이 나옵니다)......그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욜2:15-18)
마음을 찢고 회개하기는커녕, 당시의 사태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소아와 젖 먹는 자를” 왜 여기에 나오게 하였을까요? 여기 “소아”라는 말은 “젖을 준다”라는 말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아주 어린 아기를 말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어 나오는 “젖 먹는 자” 역시 “젖을 빤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즉 둘 다 아주 어린 갓난아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아기들이 뭘 알아서 회개에 참여할까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젖먹이들조차 하나님의 언약 집회에 나아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에 실용적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 아이들이 울며, 회개하며, 옷을 찢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면 여기에 ‘마음의 이유’조차 있을 수가 있습니까? 젖먹이들이 어떻게 애통의 마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까?
이런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언약 백성들을 어떻게 대우하시는지를 아주 강력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비록 천지분간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조차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범주 안에 넣으시고, 그들에게조차 언약적 의무(비록 자기는 이해하지 못하더라도)인 회개에 나아오도록 요구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아기들에게 무언가를 기대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아이들이 ‘어른들과 함께 언약 백성임을’ 표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에게서 태어나는 아이가, 철이 없고 젖먹이일 때부터 특별하게 성별된 그분의 자녀들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경건한 부모들이 무엇을 통해 위로를 얻게 될까요? 이성적인 추론에 의한 아르미니안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냥 근거 없이 마음에 위로가 될 만한 아무 말이나 해 주는 여러 타인들로부터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요? 그럴 리 만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란 경건한 부모들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을 통해서만 위로를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선언합니다. 신자의 자녀들이 나면서부터 그분의 언약 안에 동참하였다고 말입니다. 그 아이들이 비록 아무런 판단 능력이 없다 하더라도, 그분의 언약 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신조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담대하게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모는 하나님께서 유아기에 이생에서 데려가시는 자녀의 선택과 구원에 관하여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4. 끝으로 주님께서
끝으로 우리 주님께서 구약의 이 가르침들에 덧대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살핌으로써 오늘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익숙한 누가복음 18장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15절과 16절입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아멘!
이 말씀의 참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많은 교회들이 이 말씀을 어린이 주일에 사용하곤 하지만, 이 말씀은 사실은 이해력이 없는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는 어른들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이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은 다가오는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을 용납하시는 주님을 보고 언약의 내용을 배워야 할 어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의 실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여기에서 그저 ‘아이들이 이뻐서 좋아하는’ 할아버지같은 심정으로 아이들을 용납하고 오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그런 내용을 성경이 왜 적어 두었겠습니까?
이 말씀은 우리가 앞서 배운 내용들을 포괄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약의 성취자이시므로, 구약의 모든 내용들을 이루시고 다 담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말씀은 언약의 최종적 성취자이시며, 모든 언약의 실체이신 그분께서, “이 어린아이들조차 나에게로 가까이 와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즉 아이들도 하나님의 언약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불신자를 낳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언약 안에서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언약 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우리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아이가 얼마나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고, 얼마나 바른 신앙고백을 갖고 있는지 일정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묻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십니까? 왜 하나님은 비합리적으로 행동하십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다시 물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이 건질 만해서 건지셨나요? 그러면 나는 아이들보다 굉장히 낫기 때문에 구원하셨나요? 아이들을 언약의 테두리 안으로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안에서 자기 백성들의 자녀들도 모두 자기의 품 안에 두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는 주의 백성들이라면, 결코 이 아이들이 자신과 동일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정 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첫째 교리의 제 17조는 자녀들이 어린 시기에 많이 죽었던, 과거의 우울한 시기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때는 전쟁이나 전염병 등으로 아이들이 많이 죽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자녀들이 천국에 갈 것인지의 문제는 ‘공상의 영역’이 아니라 ‘현실의 영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아이들이 어려서 쉽게 죽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언약 백성들 안에 이런 질문들을 하는 일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게다가 이 땅의 교회들은 옛적부터 개혁신앙을 잘 받아 간수한 교회들은 아닙니다. 따라서 아이들을 대할 때 많은 교회들이 언약의 입장에서 개혁신앙을 따라 생각하기보다는, 합리적 이성을 따라 침례교적 사고방식으로 자기 입으로 신앙고백하지 않은 아이는 중립지역에 둡니다. 아직 신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불신자도 아닌 모호한 영역에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약 백성들을 받으실 때, 그들의 자녀들도 함께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대대로 계승되는 것이며, 부모가 받은 언약은 자녀들에게 여전히 효력 있게 작동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꼭 어려서 죽지 않더라도, 마치 시한폭탄인 것처럼 “언제 하나님으로부터 이탈할지 몰라!” 이런 생각을 갖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어려서 죽더라도 하나님의 품 안에서 천국으로 불려가듯이, 우리가 언약에 신실하다면 우리가 기르는 이 아이들이 언제나 주님의 울타리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견고하고 굳세게 하나님을 붙들고, 그렇게 매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가 언약 안에서 자녀들을 잘 가르쳐야 한다는 언약적 의무의 단서가 붙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안감을 갖고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기를 정리하면서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넷째의 부류, 즉 자녀들에 대해 유기를 걱정하는 부모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안심하라’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고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께 맡겨드리고, 또 최선을 다하여 언약의 말씀 안에서 길러가는 우리들이 되도록 합시다. 내가 아니라 주께서 우리 자녀들을 돌보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