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포되는 삼손
삿 16:18-22
18 들릴라가 삼손이 진심을 다 알려 주므로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을 불러 이르되 삼손이 내게 진심을 알려 주었으니 이제 한 번만 올라오라 하니 블레셋 방백들이 손에 은을 가지고 그 여인에게로 올라오니라
19 들릴라가 삼손에게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 본즉 그의 힘이 없어졌더라
20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21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 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22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삿 16:18-22 / 들릴라는 삼손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그가 진실을 말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블레셋 왕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제 한번만 더 올라오세요! 삼손이 내게 그 비밀을 일러주었어요' 하고 말을 전하였다. 그러자 블레셋 왕들이 전에 약속하였던 은을 가지고 들릴라가 있는 곳으로 올라왔다. 19) 들릴라는 자기 무릎에 삼손을 뉘이고 잠들게 한 뒤 블레셋 사람들을 불러 삼손이 땋아 내린 머리카락 일곱 가닥을 잘라 내게 하였다. 그러자 삼손의 억센 힘이 빠져 나갔다. 20) 들릴라가 소리쳤다. `삼손,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을 잡으러 왔어요!' 삼손은 전처럼 벌떡 일어나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하더라도 물리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하나님이 이미 자기에게서 떠나가신 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21)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놋쇠줄로 꽁꽁 묶어 두 눈을 빼내고는 가사로 끌고 가 감옥에 처넣은 뒤 맷돌을 돌리게 하였다. 22) 그러나 삼손의 머리카락은 점점 자라났다.
힘의 비밀을 말한 삼손은 모든 것을 잃습니다.
힘이 없어진 삼손(18-19) 마침내 삼손의 힘의 비밀을 밝혀낸 들릴라가 블레셋 방백들을 불렀습니다. 들릴라는 삼손을 넘기기 전에 막대한 현상금부터 챙겼습니다. 처음부터 들릴라는 삼손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삼손은 은혜의 하나님보다 거짓된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어리석음의 극치입니다(잠 7:21-27). 그 날도 삼손은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잤습니다. 그 순간부터 삼손은 정말로 소중한 가치들을 하나씩 모두 잃게 됩니다. 얻는 것 하나 없이 잃기만 합니다. 먼저 나실인의 상징인 머리털 일곱 가닥을 잃었습니다. 자르지 않은 머리털은 나실인의 헌신의 상징(민 6:5)이었으나 실제로 헌신하지 않았으니 잘려나가는 것은 예고된 일이었습니다.
깨닫지 못한 삼손(20) 삼손은 초자연적인 힘을 잃었으나 깨닫지 못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들이닥쳤을 때 삼손은 이전처럼 힘으로 물리칠 줄 알았습니다. 무력함을 느낀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떠나신 사실을 깨닫는다는데 우리의 비극이 있습니다(민 14:43; 삼상 16:14).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다 잃은 상태입니다. 삼손의 힘의 근원은 머리털에 있지 않고 함께 하신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자르지 않은 머리털은 헌신의 표시일 뿐이며, 머리털이 아니라 그 헌신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들릴라에 의해 머리털이 잘려진 것은 삼손이 하나님을 떠난 확실한 증거이며, 이에 하나님도 그를 떠나셨습니다. 삼손이 소중한 모든 것을 잃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이것이 사사기의 부정적인 주제입니다.
사로잡힌 삼손(21-22)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소중한 눈을 잃었습니다. 대적에 의해 눈이 빠지는 것은 가장 큰 수치입니다. 사사 삼손이 눈을 잃었으니 원수들 앞에서 최악의 굴욕을 당하였습니다. 그동안 그 소중한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여인들만을 바라보았으니 어쩌면 예고된 일이었습니다. 성도가 무엇을 보느냐는 너무나 중요합니다(마 6:22, 23; 창 3:6; 13:10). 삼손은 자유를 잃고 원수들의 옥에서 맷돌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의 사사가 원수들 앞에서 조롱거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힘을 주신 하나님의 영광도 가리었습니다. 그러나 소중한 것들을 잃는 가운데 “그의 머리털이...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는 말씀에서 반전의 단서를 봅니다. 이후 삼손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며 나실인의 본분을 점차 회복합니다.
적용 : 지금 당신이 주로 바라보는 대상이 누구 또는 무엇입니까?
많은 크리스천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은 악한 곳, 교회는 좋은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나가 일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일터는 괴로운 곳이고, 믿는 사람들과 만나고 마음껏 교제할 수 있는 교회가 천국을 미리 경험하는 곳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천국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천국으로 비유된 ‘보화’가 숨겨진 곳이 ‘밭’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대부분의 경우 농부에게 ‘밭’은 수고해야 하고 땀 흘려야 하고 들짐승들과 싸워야 하는 괴로운 곳입니다. 피곤하기만 하고 별로 기쁠 일이 없는 곳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천국을 숨겨 놓았다고 비유로 말씀하신 곳은 ‘교회’가 아니라 ‘밭’입니다.
< 설 교 >
세 번째 약속의 성취
삿 16장 18~31절 / 서명성목사
사사기는 전부 21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6장을 끝으로 사사들의 이야기는 끝나고, 17장부터 21장까지는 보통 사사기의 부록으로 취급합니다. 본문은 삼손 이야기의 마무리를 지으면서 삼손의 죽음을 다룹니다. 그동안 살펴보았듯이 13장은 삼손이 태어나리라는 하나님의 첫 번째 약속의 성취를 다루고 있고, 14-15장은 삼손이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하기 시작하리라는 두 번째 약속의 성취를 다루고 있습니다. 16장은 삼손이 죽는 날까지 나실인이 되리라는 세 번째 약속의 성취를 다루고 있습니다.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이었지만 나실인과 너무나 동떨어진 삶을 살았습니다. 복습해 볼까요? 나실인에게 세 가지 해서는 안 될 규례가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시체를 만져서는 안 됩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면 안 됩니다. 머리에 삭도를 대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삼손은 나실인의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규정을 어겼을 때도 그에 해당하는 의식을 통해 하나님께 헌신하는 예를 갖추지 않았습니다. 삼손은 들릴라와 사랑놀이를 하다가 그가 가진 힘의 비밀에 대해 알려 주고 들릴라에 의해 머리가 밀리게 되었습니다. 삼손에 대한 수치와 모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삼손을 그냥 내버려 주시지 않습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이는 하나님께서 흠 많은 종을 다시 나실인으로 세우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여호와께서 택하신 삼손이 수치스러운 마무리를 짓게 하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힘을 달라는 삼손의 요구를 들어주십니다. 이에 삼손은 다곤 신전을 무너뜨리고 그 신전에 안에 있던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습니다. 삼손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삼손의 삶을 자신에게 비추어 보며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며 처음보다 끝이 더 아름다운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나실인의 규례를 깨뜨린 삼손(18-22절)
삼손이 들릴라에게 힘의 비밀을 알려 주자 들릴라는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방백들을 부르며 말했습니다. ‘이번만 올라오라. 왜냐하면 그가 내게 진심을 말했기 때문이다’그러자 블레셋 방백들이 약속한 은을 가지고 올라왔습니다. 들릴라는 삼손을 자기 무릎에 뉘여 재웠습니다. ‘무릎’을 뜻하는 ‘베레크’는 ‘복을 주다’는 ‘바라크’와 어근이 같습니다. 또 하나의 언어유희입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며’(바라크) 시작되었던 삼손의 생애가 들릴라의 ‘무릎’(베레크)에서 큰 위기를 맞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불러 그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삼손을 괴롭혀 보았습니다. ‘머리털 일곱 가닥’은 일곱 가닥으로 땋은 머리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 삼손이 가진 초인적 힘은 그를 떠난 상태였습니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삼손의 머리털 자체가 어떤 마법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머리털은 힘의 상징에 불과합니다. 나실인으로 구별되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부름 받은 삼손에게 하나님이 힘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나실인으로서의 정체성의 표시였던 머리털이 잘린 후,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마지막 구별조차 사라졌기에 일반인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들릴라가 말합니다.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이에 삼손이 전처럼 힘을 써보려고 하지만 소용없습니다. ‘삭도를 머리에 대지 말라’는 마지막 규례까지 어긴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삼손은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떠나신 시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들릴라가 그의 머리털을 민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상관없이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살았던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 눈이 뽑히는 치욕을 당했습니다. 가사 성읍의 성문, 문기둥, 문빗장을 어깨에 메고 헤브론까지 올라갔던 삼손이 이제는 모든 능력을 잃고 맹인이 되어 가사로 끌려왔습니다. 영화에서는 눈을 뽑힌 삼손이 놋줄에 매여 연자 맷돌을 돌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짐승의 힘으로 돌리는 커다란 회전식 맷돌은 그 당시에 아직 발명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본문은 문자적으로 ‘그가 옥에서 맷돌질 하는 자가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당시의 맷돌은 크고 넓적한 아래짝에 밀대 비슷한 방망이 모양의 위짝을 굴려 곡식을 빻는 형태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맷돌로 곡식을 가는 사람은 쭈그리고 앉거나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선택받은 삼손이 하루아침에 감옥에서 놋줄에 매여 맷돌질을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합니다. ‘시작하다’라는 동사는 삼손 이야기에서 특별한 역할을 합니다. 13:5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삼손의 어머니에게 삼손이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구원하기 시작하리라고 선언했습니다. 13:25에서는 여호와의 영이 삼손을 움직이기 시작하셨습니다. 19절에서 들릴라가 삼손을 괴롭히는 것은 삼손이 겪을 고난의 시작일 뿐임을 보여 줍니다. ‘시작하다’는 동사가 22절에서 다시 나타난 것은 지금 삼손의 상황이 끝이 아니라 무엇인가 새로운 일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머리털이 아니라 하나님이 힘의 근원입니다. 머리털이 다시 자란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주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삼손은 나실인의 삶을 살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가 ‘태에서부터 죽는 날까지’나실인임을 이미 예고하셨습니다(13:7). 삼손이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대적들을 손쉽게 무찌른 용사였지만 그의 약점을 다스리지 못하였기에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성도가 성도로서의 정체성과 사명을 잊어버리면 삼손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은혜를 소중히 여기고 주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거룩함을 추구하며 그분의 영광에 동참하는 삶이 복된 인생입니다.
조롱당하는 삼손(23-27절)
블레셋 지도자들은 삼손을 생포한 것을 기념하여 그들이 섬기는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축하하기 위해 다곤 신전에 모였습니다. 다곤은 주로 곡식이나 수확과 관련된 신이지만, 여기서는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대적을 넘겨주는 군사적 역할을 맡은 것으로 묘사합니다.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주었다”이 노래에는 ‘우리’라는 표현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24절에는 ‘우리’라는 표현이 더 많이 나옵니다. “우리의 땅을 망쳐 놓고 우리의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넘겨주었다”히브리어 본문에는 ‘원수’앞에도 ‘우리’라는 소유격이 붙어 있습니다. ‘우리’를 강조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이 승전가에는 자신들의 신 다곤이 삼손의 신 여호와보다 뛰어나다는 인식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이 삼손의 신을 이겼기 때문에, 그동안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의 땅을 망쳐 놓은 삼손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고 여겼습니다. 승전가의 내용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 ‘우리 땅을 파괴하는 자’, ‘우리 중 많은 사람을 죽인 학살자.’사실은 이스라엘이 대적인 블레셋을 물리친 후에 이런 승전가를 불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축하는 그들의 신 다곤을 향한 찬양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즐겁다’라는 표현이 축제와 관련해서 사용될 때는 일반적으로 ‘술기운이 올랐다’라는 뜻이 됩니다. 흥에 겨운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이 그들의 손에 넘겨준 승리의 전리품인 삼손을 끌어내 재주를 부리게 했습니다. 삼손이 부린 재주는 아마 눈이 먼 삼손 앞에 장애물을 놓고 때리거나 넘어지게 하면서 그를 조롱하고 웃음거리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조롱당하는 삼손의 모습이 바로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불러 재주를 부리게 하면서 그를 두 기둥 사이에 세웠습니다. 삼손은 앞을 볼 수 없었기에 자신의 손을 붙잡고 이끄는 소년에게 한 가지를 부탁합니다. “나에게 이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직역하면 ‘나를 홀로 있게 하라 그리고 나로 그 집에 세워진 그 기둥들을 느끼게 하라. 그래서 내가 그것들을 의지하게 하라’입니다. 나귀 턱뼈로 천 명을 죽였던 영웅이 두 눈이 뽑힌 채 소년의 손을 붙잡아야 겨우 몸을 가누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당시 신전들은 일반적으로 중앙 복도에 지붕을 받치는 기둥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둥을 쓰러뜨린다면 지붕이 무너져 내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신전에는 블레셋 방백을 비롯해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으며, 지붕에는 삼천 명 가량이 있었습니다. ‘지붕’이라고 번역된 ‘가그’는 옥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곤 산전에 모인 블레셋 사람들은 이제 곧 벌어질 일을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삼손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삼손(28-31절)
자신의 인생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먹칠했던 삼손은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이 구절에서 ‘부르짖다’로 번역된 동사는 ‘부르다’는 뜻의‘카라’입니다. 25절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조롱하기 위해 불렀으나, 삼손은 자신을 생각해 달라고 여호와를 부릅니다. 이전에 목말라 죽게 되었을 때 물을 달라고 기도한 후 마지막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주 여호와여’로 시작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는 간절한 기도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옵니다. 삼손이 두 가지를 요청합니다. 첫째, 자신을 생각하라는 것은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의를 기울여 달라는 것입니다. 둘째, 이번만 자신을 강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삼손은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자신이 누구에게로 향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라는 번역에 의하면 ‘나의 두 눈을 뺀’이라는 구문은 삼손이 원수를 갚으려는 대상인 ‘블레셋 사람’을 단순히 꾸며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그 구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내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내 두 눈의 원수를 단번의 복수를 통해 갚게 하소서’가 됩니다. 이렇게 번역하면 삼손이 단번에 갚고자 하는 원수는 자신의 눈을 뺀 것에 대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나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에 대한 의식이 있음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저 개인적 복수를 열망할 뿐입니다.
삼손은 신전 지붕을 떠받친 두 기둥 사이에 서서 양손으로 기둥 하나씩을 붙잡습니다. 삼손의 마지막 외침은 문자적으로 ‘내 영이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게 하소서’입니다. ‘내 영’이라는 표현은 몸을 제외한 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 전체를 의미합니다.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 구별된 나실인 삼손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고자 합니다. 비록 그가 드리는 제물은 두 눈이 빠진 흠이 있는 제물이지만 하나님은 그 제물을 받으십니다. 삼손이 기둥 둘에 양팔을 껴 의지하고 힘을 다해 몸을 굽히자 그 신전이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 위에 무너져 내립니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라는 표현은 삼손의 죽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아닙니다. 이처럼 삼손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납니다. 불임의 집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예고한 대로 나실인으로 태어나 한 몸에 기대를 받고 자랐던 삼손이지만,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저버리고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았던 그의 삶은 다곤 신전이 무너짐과 함께 무너져 버렸습니다. 삼손은 자신의 두 눈을 뽑은 원수를 갚으며 죽고자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이스라엘을 압제해 온 블레셋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삼손의 부적절한 동기와 행동이 정당화된 것은 아닙니다.
삼손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친인척들이 찾아와 그의 주검을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에 있는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묻어 줍니다. 그곳은 그가 어려서 자란 고향이며 처음으로 여호와의 영을 경험한 장소입니다(13:24~25). 그의 이야기는 처음 시작된 곳으로 돌아와 막을 내립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삼손은 죽어서야 아버지의 장지에 장사되는 평온함을 누립니다. 비록 삼손이 사사로 20년을 지냈지만, 그 기간에 이스라엘은 여전히 블레셋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살아 있을 때보다 죽을 때 더 많은 블레셋 사람을 죽였던 삼손은 어떤 의미에서 유명무실한 사사였습니다. 삼손의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당신의 백성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 이어집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등장하고 다윗이 등장합니다.
* 우리의 자세
하나님은 한번 삼손을 떠나셨지만 그를 온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여전히 붙잡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결코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많은 것들이 무너져 있습니까? 어디서부터 회복할지 막막합니까?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나를 생각하소서”삼손이 하나님께 마지막으로 드린 기도의 첫 번째 간구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생각해 달라는 것은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삼손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자기의 개인 능력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의 힘을 믿고 하나님께 엎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닥으로 떨어지고 보니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겸손한 자는 자기의 부족, 자기의 한계, 자기의 죄악됨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신앙은 그분이 나를 위해 하신 것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시고, 예수님이 나를 당신의 보혈로 구속하시고, 성령님은 구원받은 백성으로 인 치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은 후로 우리의 신앙이 약해지지는 않았습니까? 우리의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신앙이 회복될 때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디에 서있는지 알게 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 신앙생활을 회복해야 합니다
삼손에게 아쉬운 점은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은 했지만 완성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낭비하였습니다. “나를 강하게 하소서.”삼손이 드린 두 번째 간구입니다. 정체성을 깨달은 삼손이 하나님의 능력을 구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그분을 위해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맏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고, 성령의 능력으로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특히 팬데믹을 겪으면서 흐트러진 신앙생활을 회복해야 합니다. 타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영육 간에 강건해지는 것은 우리의 의지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야 합니다.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자를 늘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신앙여정 가운데 고난은 있습니다. 고난은 삶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고난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믿음의 사람, 인내의 사람, 성숙한 사람으로 빚으십니다. 앞뒤 좌우가 막힌 것 같아도 위로 주님께 길이 열려 있기에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사도 바울도 로마 감옥에서 삼손과 비슷한 내용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딤후 4:17)
- 하나님의 평가를 의식해야 합니다
삼손은 사사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사명을 따르기보다 자기가 보기에 좋은 대로 살았습니다. 삼손은 인식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그를 주목하시고 그의 삶을 항상 이끌어 오셨습니다. 삼손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삼손이 살았을 때 죽인 블레셋 사람보다 죽을 때 죽인 블레셋 사람의 수가 훨씬 많았다는 겁니다. 누가 삼손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주었습니까?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신 다곤이 삼손을 그들에게 넘겨주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삼손을 넘겨준 존재는 다곤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다곤은 아무 능력이 없는 우상에 불과합니다. 그 평가의 진의가 무엇입니까? 죽을 때 죽인 사람의 수가 더 많았다고 하였으니 삼손은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다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것은 아주 두려운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심각하게 던지는 경고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삼손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사람으로 삼손을 언급하며 그가 믿음으로 이기며 의를 행했다고 평가합니다(히 11:32-33). 삼손이 비록 정욕에 사로잡혀 계속 실수를 반복하기는 했지만 죽음을 통해 실추된 그의 명예를 하나님이 다시 회복시켰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평가는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20년간 다스렸다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긍정적 평가가 아닙니다. 삼손이 다스리는 동안 그 땅이 평온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삼손의 삶이 모범적이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통해 계획하신 일을 이루셨습니다. 어쩌다 보니 혹은 엉망으로 살았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선한 목적에 쓰임 받았다는 것보다 이왕이면 에녹처럼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주님의 뜻대로 쓰임 받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이것이 삼손의 스토리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일 것입니다.
나가면서
삼손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어떻게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시며 함께하시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의 꿀로 인해 나실인의 언약을 잊어버린 삼손을 통해 어떻게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며 삼손을 다시 진정한 나실인으로 부르시는지 보여주었습니다. 사자보다 강한 삼손을 무너뜨린 무기는 블레셋의 철제무기가 아니라 이방 여인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단지 성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방 풍습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열망 등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우리의 삶이 낭비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삼손은 언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까? 모든 힘을 잃고 눈이 뽑힌 채 블레셋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해 재주 부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연약함을 느낄 그때가 바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때입니다. 나를 생각하소서. 나를 강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삼손과 같이 때로 당신의 백성에게 고난을 허락하셔서 당신이 맡기신 사명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것을 이루게 해 주십니다. 삼손을 평가하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안타까워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기뻐하시겠습니까? 이제는 불꽃같은 눈으로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철저히 회개하며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정체성과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께 붙들려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임마누엘의 은혜를 인해 회복된 신앙을 가지고 회복된 신앙생활을 하며 주님으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긍정적인 평가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능력이다
삿 16장 18~21절(엡 1:19-23) / 김중석목사
Faith is Power. 5월 들어 매 주일 특별한 주일이었다. 3일은 어린이주일, 10일은 어버이주일, 17일은 스승의 교사주일, 다음주일은 성령강림절, 오늘만 특별한 이름이 붙지 않았으니 특별하다. 어느 나라에서는 일년 52주가 다 특별한 ‘무슨 성인의 날’이 되었고, 그것을 관광상품으로 활용하기도 한다는데, 그러다 보면 ‘주님의 날’이 ‘사람의 날’이 되지 않을까!
[믿음은 능력이다] 오늘의 설교제목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주일을 ‘주님의 날’로 지키는 것은 공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꼭 필요하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능력이기 때문이다. 믿음도 여러 가지인데 예수를 믿는 믿음이야말로 능력이요 중요하고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수 믿는 믿음에 어떤 능력이 따르는가?
1. 인생이 잘되게 하는 능력이 따른다. 엡1: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라 했다. 어떠한 능력인가? 곧 하나님의 능력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베풀어 진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17:20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하셨다.
또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하셨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주시는 것이다. 단, 내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 떨어져 있지 아니하고 붙어 있을 경우이다. 실낱 같은 믿음, 겨자씨 한 알 같은 믿음이라도 있어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만 하면, 하나님과 떨어져 있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베풀어져서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마치 전기와 같다고 할까! 전기는 연결되기만 하면 어둡던 방이 환히 밝아진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면 우리의 마음이 환하게 밝아진다 할렐루야! 1977년 여름 청계산 꼭대기에서 밤에 홀로 기도할 때 두려웠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사위가 환하게, 봄날 아지랑이 날고 꽃 나비 춤추는 아름다운 장면으로 바뀌었다. 여러분도 하나님과 연결되면 어떠한 어둡고 힘든 상태에서도 환하게 밝아지고 힘이 나고 살게 된다. 체험하기를 바란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요3서: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것은 사도 요한이 고린도교회의 장로요 식주인 가이오에게 쓴 편지에서 인사말로서 한 말이다. ‘간구한다’ ‘기도한다’ ‘원한다’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가 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건강하기를 원하신다. 또 그렇게 복을 주신다. 힘을 주신다. 그 힘은 지극히 강력한 힘이다. 그래서 그렇게 된다!
영혼-일-육체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일을 망치면 육체도 망가지기 쉽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왜 그렇게 되었나? 일이 잘못되니까. 그런데 일이 잘못된다고 죽어야 하나? 영혼에 힘이 없어서 그렇다. 영혼이 잘못되면 일도 육체도 없다. 이것은 모두의 문제이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자살을 보는 한국사람들은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찬522) 웬일인가 내 형제여 주 아니 믿다가 죄값으로 지옥형벌 너도 받겠구나.
2. 사람을 얻는 능력이 따른다. 엡1:21 모든 통치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였고 그를 ‘모든 통치와 능력과 주권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시키셨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곧 예수를 믿으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것을 얻게 하는 능력이 따른다는 말씀이 된다. 마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큰 것을 얻게 하시는데 곧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얻는 것이다 할렐루야!/ 하늘과 땅에 만물을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도 이 세상에서 다소 제한적이기는 하지만(아직 부활하지 못한 육체가운데 거하기 때문에) 그런 능력이 따르게 하신다.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에서 알 수 있다. 그 능력은 만물을 다스리는 능력이다. 특히 ‘사람을 얻는 능력’이 따른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사람을 얻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람을 얻으면 돈도 오고 명예도 오고 권력도 온다. 예수를 믿으면 어떻게 사람을 얻는 능력이 따를까? 당연하다. 사람을 사랑하니까. 사람을 섬기니까. 그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니까.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주려고 하니까. 그 사람을 기쁘게 하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몸소 본을 보이신 대로 사람을 사랑하면 사람이 내게 오게 마련이다. 그 이치는 아주 간단하다. 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해수욕장이 서둘러 개장을 한다. 물을 두려워하면 물이 사람을 삼킨다. 그러나 물을 사랑하면 물은 사람을 두둥실 떠받들어 모시고 다닌다. 사람을 적대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다투면 사람은 당신을 무찌르려고 누르려고 삼키려고 달려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면 사람은 당신을 두둥실 떠받들게 될 것이다. 사람은 자기를 알아주는 자를 위하여 목숨도 바친다고 하지 않던가! 예수를 믿는 믿음은 능력이다. 사람을 얻는 능력이다.
3. 영원한 생명을 얻는 능력이 따른다. 엡1: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이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여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였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그 능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신다는 말씀이다. 영생을 주신다! 하늘의 나라에 주인공이 되게 하신다! 는 말씀이다. 하늘나라는 이 땅의 나라에 비할 수 없이 좋고 비할 수 없이 영원한 나라이다. 우리가 집착할 것은 이 나라가 아니다. 하늘의 나라에 집착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늘나라가 땅의 나라에 비할 수없이 좋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귀한 것은 생명이다. 육체의 생명은 짧다. 정치적 생명이란 더 짧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찍이 영생을 원했다. 영생은 과연 있는가? 저 우주를 보라. 우주가 언제부터 있었나? 꽤 오래 전부터. 그 전에는? 우주를 만드신 분이 계셨다. 누군데? 하나님이다. 그는 시간 밖에 계시다. 그는 영원하시다. 우리도 영원할 수 있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한한 우리가 그 영원하신 분과 연결이 되면, 붙어있으면 가능할 것이다. 이 연결을 위하여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하나님이셨으나 사람이 되셨다. 바로 우리 인간을 하나님과 연결되어 붙어있게 하시려고./ 본래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과 연결되고 붙어있어 영생하도록 지으셨다. 그런데 죄가 그 사이에 끼어들어서 하나님과의 연결을 끊었고 하나님과 분리되게 했고 사망이 왔으며 영생도 사라지고 육체의 생명도 짧아지고 생이 저주를 받아 고통이 되었고 마침내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왔다. 육체적 사망뿐 아니라 영원한 사망까지 왔다./ 이제 다시 회복한다. 이를 구원이라 한다. 예수님이, 예수님의 피가 죄를 씻는다. 예수를 믿는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한다. 다시 생명이 우리에게 흐른다. 당장 현실의 삶이 살아난다. 천국생활을 연습한다. 영혼이 강화된다. 육체적 생명이 끝나는 날에 영혼은 완전히 깨끗해져서 주님과 함께 거하게 된다. 육체는 흙으로 되돌아 간다. 그랬다가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에 영원히 살수 있는 육체 부활체로 일어난다. 그래서 완전해진 우리의 영혼과 부활체가 만나서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산다. 영원히 영생!
예수를 믿는 믿음은 능력이다. 다시 죽음이 없다. 오직 영원한 생명이 있을 따름이다!
믿음은 능력이다. 그런데 사람이 이 능력을 잘못 사용하기도 한다. 삼손이다. 삼손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그걸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사용해야 했다. 그럴 때는 그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 믿음의 능력을 자기를 위하여 사용할 때,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자기의 즐거움을 위하여 사용했을 때, 그는 능력을 잃게 되었다(삿16:19). 사람들의 붙잡힘을 당했고 눈이 빠지고 치욕적인 삶이 주어졌다(21). 정욕적인 사랑으로부터 배신을 당했다. 믿음은 능력이지만 잘 사용해야 한다.
삼손과 들릴라
삿 16장 20~31절 / 류영모목사
I. 내가 나실인이다
앞선 15장에서 삼손은 나귀턱뼈로 블레셋 군인 1천명을 도륙합니다. 삼손은 통쾌한 웃음과 함께 시 한 토막을 남기고 나귀턱뼈를 집어던집니다. Ramath-Lehi
그리고 그곳 이름을 “라맛레히”라 부릅니다. 난외주는 “턱뼈의 산”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 “레히”란 말은 턱뼈 혹은 뺨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블레셋의 뺨을 때린 곳이란 뜻입니다. 즉 블레셋에서 수치를 안긴 산이란 말입니다. 그것도 나귀턱뼈로.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을 멸시하는 욕을 할때 ‘개’가 등장합니다. 당시 이 나라에서는 ‘나귀’를 등장시켜 나귀같이 미련하고 바보같은 놈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귀뺨으로 블레셋의 뺨을 쳐죽인 이 사건을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통쾌한 사건으로 기억이 되었습니다.
가나안 정착이후 이스라엘을 가장 많이 괴롭힌 족속이 블레셋입니다. 블레셋은 강하고 거칠었던 해양민족입니다. 세계 문명을 두루 접하다 보니 일찍이 철기 문명을 받아들여 전쟁에 능한 족속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올 무렵 블레셋도 함께 가나안에 들어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지금 가나안 지역을 팔레스틴이라 부르는 것도 바로 이 블레셋 족속의 영향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블레셋이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때 이스라엘은 가장 어둡고 비참한 모습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할 사사가 나타난다면 그 어느때 보다 강력한 사사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역사상 가장 힘쎈 사나이 삼손을 이스라엘 사사로 보냅니다.
힘쎈 사사 삼손은 번번히 실수하고 실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삼손을 실패의 늪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삼손의 위장 결혼작전은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블레셋 사람들의 연발실수를 통해 삼손에게 블레셋을 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합니다. 300마리 여우특공대로 딤나 곡창지대를 불살라 버립니다. 나귀턱뼈로 1천명을 무찌릅니다.
그러나 사사로서, 나실인으로서 하나씩 언약을 파괴하던 삼손은 오늘 본문 17장에 와서 몰락의 길에 들어 섭니다. 성경은 삼손이 나실인의 언약을 파괴하다가 결국 몰락하는 얘기들을 대단히 구체적으로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실인이란 거룩한 사람 - 하나님이 쓰시기로 구별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바로 오늘 사사기를 읽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나실인입니다. 구별된 사람 거룩한 사람입니다.
우리 교인들에게 “당신은 성자입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 성자는 아닌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약성경에서만 63회에 걸쳐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성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도입니까? 라고 물으면 성도라고 자신있게 대답합니다. Saint 성자가 곧 성도(saints)입니다. 흰말이나 백말이나 궁뎅이나 엉뎅이나 성자나 성도나 같은 말입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를 “거룩하다”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1930년도에 미국에 대경제공항이 있었습니다. 텍사스에 “예인츠”라는 농부가 있었습니다. 정부와 은행으로부터 막대한 돈을 빌려서 거대한 농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은행 이자가 갑자기 높아져서 빚을 갚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자를 갚을 수가 없어 부도 위기에 내몰렸습니다. 그런데 마침 석유탐사대가 예인츠의 농장을 지나가다 그 농장 밑에 어마어마한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석유가 펑펑 쏟아지는 그날 8만 드럼의 석유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백만장자 예인츠는 언제 백만장자였습니까? 석유를 개발하여 시장에 내다 팔고 돈을 손에 쥐었을 때 백만장자였습니까? 석유를 개발하여 석유를 보는 순간 백만장자였습니까? 그러면 석유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백만장자였습니까? 아닙니다. 이미 땅을 소유했을 때 그는 백만장자였습니다. 단지 그가 모르고 힘겹게 살았을 뿐입니다.
부자는 거지처럼 살아도 부자입니다. 임금의 아들은 거지처럼 살아도 왕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때 못마땅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보더라도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본래 내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광스런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내 능력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 안에서, 예수의 공로로, 우리는 승리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선포합시다. 죄를 짓고 절망 가운데 빠져있는 분들을 조롱하는 사단을 향하여 선포하십시오. 우리를 비웃는 세상의 모든 느낌들을 향하여 선포하십시오. “나는 영광스런 하나님의 작품이다. 나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다. 하나님의 모든 부요로움이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함이 내 것이 되었다. 나는 성자다. 나는 의인이다. 나는 거룩하다. 나는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라고.
II. 깊은 밤으로 빠져드는 삼손(팜므파탈)
오늘 본문 사사기 16장 바로 앞절 즉 15절 마지막절에 삼손이 드디어 이스라엘 사사가 되었고 20년을 지내게 된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16장에서 자연스런 흐름이라면 삼손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참담한 상황을 보고 아파했다든지 군사를 모아 블레셋을 칠 계획을 하리라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16장 1절은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다”라는 말씀으로 시작되고 있다.
삼손을 기록한 사사기의 각장 각 사건은 언제나 삼손이 이방땅 여자를 만나러 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14:1 삼손이 딤나를 내려가 블레셋 여자를 보고
15:1 삼손이 염소새끼를 안고 그 여자를 찾아갑니다.
16:1 삼손이 가사로 내려가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16:4 드디어 삼손을 파멸시키는 들릴라를 만나게 됩니다.
삼손이 하나님이 주신 나실인의 사명도 엄청난 능력도 가볍게 생각한 철부지가 아닌가 하는 아쉬운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삼손을 보고 비난을 하고 심지어 분노를 터뜨리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런데 사사기 저자는 삼손에 대한 윤리적 평가를 보류하고 그 엉터리 사사가 어떻게 블레셋을 괴롭히고 무찌르는가 하는 것만 보고하고 있습니다. 삼손이 잘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삼손이 가사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성에 전해지자 군인들이 성에 매복하고 삼손이 들어간 집을 에워쌉니다. 블레셋의 원수, 지명수배자 삼손을 새벽까지 기다렸다 잠든 후 체포하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미 이 사실을 다 알고 있는 삼손은 한밤중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가사의 성문짝들을 모조리 뽑아들고 헤브론으로 사라집니다. 가사의 방백과 군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나홀로 무력시위였습니다.
이 이야기가 16:1-3의 기록인데 아무리 읽어봐도 뭔가 이상합니다. 싸웠다는 말도 없고 왜 그렇게 했다는 해석도 없고 결과가 어떻게 되었다는 평가도 없어서 뜬금없는 기록처럼 보여집니다. 본문을 한 두번 읽어보면 “밤”이란 단어가 눈에 걸립니다. 3절 가운데 4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밤중으로 빠져들고 있는 삼손 그리고 흑암 중에 빠진 이스라엘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얼마 후 삼손은 밤의 여인을 만나게 되고 그 여인 때문에 두 눈이 빠져 삼손은 깊은 암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삼손은 “작은 태양, 한줄기 햇빛”(little sun) 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삼손이 곧 만나게 될 들릴라 라는 말은 밤을 생각하게 만드는 말입니다. 원래 히브리어로 밤이란 “라옐라”와 들릴라는 그 발음이 비슷합니다. 밤의 여인 들릴라가 작은 태양 삼손을 어둡게 만들어 깊은 밤을 몰고 올 것이란 암시를 사사기 16장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저희들 학창시절 조영남씨가 미국의 탐 존스(Tom Jones)의 노래를 번역해 불렀던 딜라일라(Delilah)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밤 깊은 골목길 그대 창문앞 지날 때...
my my my Delilah, Why why why Delilah” 하는 노래입니다.
여기 Delilah는 바로 성경의 들릴라입니다.
들릴라는 언제나 “배신한 여자의 대명사”입니다.
팜므파탈(femme fatale)이란 말이 있습니다.
팜므파탈이라는 영화도 있고 책의 제목들도 많이 있습니다. 팜므는 프랑스어로 ‘여성’, 파탈은 ‘숙명적인’, ‘운명적인’을 뜻합니다. 19세기 낭만주의 작가들에 의해 문학작품에 나타나기 시작한 이후 미술, 연극, 영화 등 다양한 장르로 확산되어 남성을 죽음이나 고통 등 치명적 상황으로 몰고 가는 ‘악녀’, ‘요부’를 뜻하는 말로까지 확대, 변용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운명적’이라는 말은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굴레를 뜻한다. 즉 팜므파탈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런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될 숙명을 타고난 여성이다. 따라서 팜므파탈과 관계를 맺고 있는 남성 역시 팜므파탈의 손아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남성을 압도하는 섬뜩한 매력과 강인한 흡인력 앞에서 남성은 끝내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는 것이 팜므파탈의 속성이다. 사사 삼손을 죽음으로 끌고 가는 팜므파탈의 여인이 바로 드릴라이다. 삼손은 드릴라와 함께 하는 한 파멸의 길로 빠져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III. 위험한 장난
16장 4절 드디어 그 유명한 들릴라가 등장합니다. “이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들릴라가 어떤 여자인지 성경상 설명이 없습니다. 다만 삼손이 정식 결혼관계 없이 계속 사랑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여자였습니다. 그리고 삼손의 여인들 중 유일하게 이름이 언급되는 여인입니다. 삼손의 어머니의 이름조차도 언급하지 않던 사사기 저자는 이 여인의 이름에 들릴라라고 밝힙니다. 그만큼 사사기는 삼손과 이 여인의 관계를 소중히 다루고 있습니다.
들릴라는 여러 여인들 가운데 삼손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인으로 보입니다. 딤나의 여자는 위장결혼을 위해 만난 여자였습니다. 블레셋을 치기 위한 전략상 만난 여인이었습니다. 16장 앞에서 만난 가사의 여인도 삼손이 사랑했다는 기록이 전혀없습니다. 14:1에서 한 여자를 그냥 보았다고 말하고, 16:1에서도 한 기생을 보았다고만 합니다. 그러나 16:4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했다고 밝힙니다. 여기 “사랑하다”란 말 “아하브”는 앞선 5:31에서 “주를 사랑하는 자가 해가 힘있게 돋음같게 하시옵소서” 할때 바로 “사랑”이라는 단어입니다. 진심어린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나 들릴라는 삼손이 사랑해선 안될 사람 팜므파탈이었습니다.
바로 이 사랑 때문에 삼손은 이용당하고 암흑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16:5에 보면 블레셋 방백들이 들릴라를 꾀어 삼손의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삼손을 결박할 수 있는지 알아오게 합니다. 그리고 상금을 내립니다. 각각 은 1100개씩을 거둬주겠다는 것입니다. 블레셋 방백이 다섯이었으니 5500개를 주겠다는 것이지요. 노예 한 사람 값이 당시 은 20-30개 정도였으니 삼손의 몸값이 천문학적 숫자가 되는 겁니다.
언제나 사탄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쓰러뜨리려는 자기 목표를 위해 확실한 투자를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이처럼 확실한 투자를 한다면 세상이 뒤집어질 것입니다.
16:6 드디어 삼손과 들릴라 사이의 위험한 게임이 시작됩니다. 이 게임의 이름은 삼손 결박하기 게임입니다. “장난이 아니네”하는 말이 있습니다. 분명 장난이 아닌데 삼손은 장난으로 이 게임을 즐기고 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이스라엘이 망하느냐 일어나느냐 하는 중차대한 문제를 가지고 삼손은 지금 장난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고 나라를 구하느냐 그 언약을 파괴하고 자신도 이스라엘도 망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장난을 하고 있습니다. 왜요? 이미 삼손은 지금 어둠에 빠지고 눈이 멀어 이 영적 세계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삼손에게 들릴라가 첫 번째 도전을 해옵니다.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굴복시킬 수 있는지 말해 주세요.”(6절)
삼손이 이 죽음 게임을 장난으로 받아 줍니다. 7절입니다.
“마르지 아니한 새 활줄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 된다구요.”
마르지 않은 새 활줄 일곱으로 삼손을 결박하고 블레셋 군인을 매복시켜 놓고 여인은 시험을 해 봅니다. “삼손! 블레셋 사람이 들이 닥쳤어요.” 삼손은 불탄 삼실을 끊듯 활줄 일곱 가닥을 끊어버렸습니다.
삼손에게 들릴라는 앙탈을 부립니다. “당신은 나를 희롱했어요. 무엇으로 당신을 결박할 수 있는지 이번엔 정말로 가르쳐 주세요.” “삼손은 쓰지 않은 새 밧줄로 자신을 묶으면 힘을 못쓰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실오라기를 끊듯 밧줄을 끊어버립니다.
세 번째 여인의 도전 앞에 삼손은 상당히 위험한 대답을 합니다. 자신의 머리카락 일곱가닥을 묶을 끈에 섞어 짜고 자신을 묶어 말뚝에 끈을 묶어 두어 보라는 것입니다. 14절에 “바디로 단단히 짜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씨줄로 엮어 말뚝에 매고”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 “바디”란 말뚝, 핀, 못을 의미합니다.
사사기 4장에 야엘이 적장 시스라를 죽일 때 “말뚝을 관자놀이에 박아 죽입니다” 여기 “말뚝을 박다”라는 말과 “바디를 단단히 짜다”란 말은 원문상 같은 말입니다. 이 같은 단어를 등장시켜 야엘의 시스라를 죽였듯이 들릴라가 삼손을 죽음으로 몰아갈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세 번씩이나 희롱을 당한 들릴라는 날마다 삼손을 재촉하여 졸라 재낍니다. 여기 재촉하여 조르다란 말 역시 14:17 딤나 여인이 수수께끼 정답을 물을 때 울며 “강요했다”는 말과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므로 이번에도 삼손의 입에서 정답이 나올 것이라는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아니다 다를까 17절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이것은 절대 비밀이라고, 당신만 알아야 한다고 몇 번이고 다짐을 했겠지요. 이건 장난이 아니니 장난을 해서는 안된다고 손가락도 걸었겠지요.
그러나 삼손은 사탄에게 이 위험한 게임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사탄이라고 하면 머리를 풀고 머리에 뿔이나고 긴 덧니에 피 흐르는 칼을 물고 삼지창을 손에 들고 낄낄대며 나타나는 줄로 압니다. 지금 삼손에게처럼 가장 달콤한 목소리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모양으로, 나의 약점의 통로 아킬레스건을 통해 찾아 옵니다.
당신의 힘의 근원이 무엇이냐고 물어오면 당당히 “게임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고 대답해야지요. 이건 위험한 장난이다 싶으면 요셉처럼 옷을 벗어던지고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와야지요.
이번엔 들릴라가 얼마나 확신에 찬 대답을 블레셋 방백들에게 주었던지 손에 상금 은 5500개를 준비하여 옵니다. 들릴라는 삼손을 만취시켰는지 아니면 수면제를 사용했는지 모르지만 삼손이 잠든 사이 사람을 불러 삼손의 머리를 밀어버립니다. 그 순간 힘이 다 빠져 달아나버렸습니다. 들릴라가 게임 종료를 알리는 소리를 지릅니다. “삼손, 블레셋 사람들이 닥쳤어요.” 그때 삼손이 내가 죽여주지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봅니다. 이때 상황의 비극적인 기록이 성경에 남아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20절)
이 위험한 장난에서 진 삼손의 모습을 21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 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구원자 사사가 광대가 되었습니다. 여우 특공대를 부리고 나귀뺨으로 블레셋의 뺨을 때리던 전사가 놀이개 감이 되었습니다. 블레셋을 두려움에 떨게 하던 그가 블레셋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만 예배해야 할 그가 다른 신당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이게 삼손입니다. 이게 이스라엘입니다. 이게 너 그리스도인이라는 겁니다. 밤의 여인 들릴라에 의해 작은 태양 삼손은 역사의 무대에서 지는 듯 보였습니다.
IV.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다른 희망이 있다는 것을. 삼손만 보고 있으면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삼손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다시 희망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이번에 삼손의 실패가 너무나 비참하기 때문에 이번에 하나님이 일으킬 역사는 엄청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됩니다. 다음편을 기대하게 하는 오늘 본문 마지막절 22절을 보십시요.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커텐 한 장을 살짝 열어 희망의 빛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기대하시라 고대하시라 삼손 그 마지막편 “죽음으로 다시 일어선 삼손” 하나님 나라의 연출가 하나님의 멋진 계획을 기대하시라!
삼손은 이 여자 저 여자와 얽히고 도덕적 감각이 부족한 무절제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성경은 이런 삼손의 약점을 은폐하지 아니하고 모조리 기록합니다. 삼손의 실수를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사기는 삼손의 행태를 도덕 주의적 시각으로 평가하여 윤리교과서로 삼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대한 해설자의 평가가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삼손 사건을 통하여 말씀하고자 하는 바가 다른데 있다는 것입니다.
삼손이 여인들과 얽히는 사건을 통하여 언제나 거기서 갈등이 일어나게 되고 결국은 블레셋이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심지어 삼손이 여색을 밝히며 블레셋 땅으로 들어가는데 삼손은 자신도 모르게 블레셋 중심 도시로 진격하듯 들어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이는 결국 블레셋 다섯 부족 통치자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하고 그 중심을 강타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짓밟고 괴롭히는 자를 두고만 보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들어내고 싶어하십니다.
한순간 한면만 보면 마귀가 이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불의가 승리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패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돌리는 역사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가지만 정확하게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깁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