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결혼을 하기 전에는 네 식구가 여행을 심심치 않게 다녔었다. 딸아이가 결혼을 한 지가 3년이 지나갔건만, 셋이서 여행을 가자는 말이 여러 번 나왔지만, 실행에 옮긴 것은 두번 정도였다. 결정을 잘 하는 딸아이가 없어지니, 결정을 자꾸 미루거나 바꾸는 습성을 지닌 남편과 나와 아들은 이럴까 저럴까 하다가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무더운 여름이 길어지고 가을이 주춤거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하루가 다르게 가을빛이 짙어지던 날, 남편이 좋은 일이 있는 듯한 얼굴로 말하였다. 내일 포천에 산정호수 다녀오자 이동갈비도 먹고 가을이 절정인데. 정말? 그래? 좋아좋아! 나는 박수를 쳤다. 누군가 서두르지 않으면 본인 스스로는 웬만해서 먼저 움직이지 않던 남편이었다. 마누라를 위해서라나 뭐라나. 시간까지 정하였다. 9시 30분 출발.
아들이 운전을 하겠다는데, 남편은 본인이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뭐야. 아직 살아있다 이건가? 아니면 늙은이처럼 뒷자리에 앉아있는게 싫다는 뜻인가. 아들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편하게 희희락락 하면 좋으련만. 무엇이든 본인이 나서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을 어찌 버릴까. 무슨 일이든 남편이 앞장을 서니 아들이 아들 노릇을 할 기회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남편 그늘에서 살다 보니 나도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다. 죽을때까지 내가 모시고 다닐테니까 운전은 배우지 마. 남편의 그 말 덕분에 나는 운전도 못한다.
포천과 세종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포천으로 가는 길이 빨라졌다. 위례에서는 외곽순환도로를 십여분 달리면 바로 포천 고속도로로 연결이 된다. 대부분 터널로 연결되는 길이었다. 우리나라는 좋은 나라다. 도로망이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어 네비게이션만 놓치지 않으면 어디든 쉽게 갈 수 있으니 말이다. 포천까지는 40여분 걸린다. 오히려 포천에서 산정호수까지가 지루하고 멀었다.
산정호수는 포천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국민관광지'다. 아름다운 산정호수뿐 아니라 가을철 억새로 장관을 이루는 명성산과 망봉산, 망무봉 등 주변의 산봉우리들이 호수와 어울려 절경을 이루기 때문이다. 호수를 한 바퀴 감싸고 있는 산정호수 둘레길은 걷는 내내 호수가 시선에서 사라지지 않아 산정호수의 진면목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 세대는 산정호수를 다녀왔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좋은 구경하고 한바탕 잘 놀고 왔다는 얼굴이셨다.
1925년 영북영농조합의 관개용 저수지로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축조된 것이 바로 산정호수다. '산 속에 있는 우물'이란 뜻으로 산정호수라는 이름이 붙었고, 산 안에 있다 하여 '산안저수지'로 불리기도 했다. 첩첩산중에 둘러싸인 우물 같은 저수지였으니 그 풍광은 지금보다 훨씬 아름답지 않았을까 싶다. 산정호수는 1977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면서 끊임없이 변화했다 궁예에 관한 전시물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 일대가 궁예의 전설이 많은 곳이다. 일명 울음산이라고 불리는 명성산(鳴聲山)은 궁예가 망국의 한을 품고 울어서 생겼다는 전설이 있다.
둘레길을 걸었다. 날씨가 쌀쌀하던 차인데 마침 오뎅과 번데기를 파는 곳이 있어 반가웠다. 서서 먹는 따뜻하고 짭쪼롬한 국물, 안성맞춤이었다. 둘레길을 걷는 동안 망부봉과 망봉산이 보이고 명성산이 보였다.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아늑하면서 운치가 돋보였다. 강쪽으로 휘어진 노송들은 세월을 이야기하고 홍단풍나무들은 둘레길 여기저기 심어져 있어 가을빛깔을 과시했다.
이동갈비로 유명하다는 김미자 원조이동갈비라나 뭐라나에 갔다. 산정호수에서 고개를 넘어 갈비집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길을 따라 가고 갔다. 잘못 온거 아니야 라는 말을 열 번 정도 뱉어냈을 무렵에서야 커다란 간판이 눈에 들어오고 주차 안내원이 나타났다. 평일이라서 사람이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어림도 없는 생각이었다. 운동장만한 넓이에 테이블이 꽤 많은데 꽉 찼다. 고기를 구워먹는 사람들 표정이 행복해 보였다. 여기까지 어찌 오셨을까 싶을만큼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았다. 맛은? 짭짤하고 달달했다. 모여들어서 모여들어서 먹는 맛이어서 맛있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오십대 초반 주말마다 산을 올랐고 명성산과 운악산을 오른 날 이동갈비를 먹었었다. 그때는 산을 올라갔다가 내려와서인가.꿀맛이었다.
포천에는 국립수목원, 아트벨리, 서운동산. 지질생태공원등 구경할 곳이 많다. 우리는 애초에 산정호수를 구경하고 둘레길을 산책하는 것으로 하루 일정을 잡았다. 산정호수 둘레길을 걷는 일은 낭만적이고 여유로웠다. 호수 둘레에 우뚝 솟아있는 산들은 장엄했다. 남편과 아들과 나는 여기저기에서 사진을 찍었다. 남편과 아들 사이에 서 있는 나는 너무도 작았다. 사실은 살짝 뒷꿈치를 들었는데도 말이다. 난쟁이 같아! 남편이 웃고 아들이 웃고 내가 웃었다. 여행은 웃음이다. 일상사 다 내려놓은 가벼운 웃음이다. 그 웃음 덕분으로 내일이 모레가 글피가 환할 것이다. 삼식이 남편의 밥상에 잔소리는 올리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