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은 집현전에서 만들지 않았다.
방송일: 19991009 조회수 : 17266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역사 스페셜 42회-더빙용> 1999년 10월 9일 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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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학교 복도~10 창문으로 15 [5초 가량 흘리고-]
올해로 553번째 해를 맞았다.
우리 민족의 문자, 한글-
[필기]훈민정음의 창제 3 우리는 한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교과서 펼친다 11 현재 대부분의 책이나 교과서에는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공동으로 만든 것이라고
적고있다
교과서 내용(PIN) 11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상식은 정확한
것일까?. [이하 흘리고-]
이기문 INT 한글 창제 당시의 기록으로는 그런
증거가 하나도 없다.
충북대 INT 친제했다고 하는 것을 잘모르는 시절에
그런 말이 나와서 모든 사람들한테 마치
사실인것처럼 유포가 된 것이죠
여증동 INT 실록에 전혀 그런 말이 없다. 잘못된 걸
모든 백성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데 세종
이 알면 무덤속에서 통탄하고 있을거다
실록의 기록 24 [글자 뜨면-]
이달 임금이 직접 언문 스물여덟자를
만들었다.. 이를 훈민정음이라고 이른다
[자막 사라지면-]
한글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443년,
세종 25년의 일이다.
실록에는 이것에 대해, 매우 간략한
기록만이 남겨져 있을 뿐이다.
상소 올리는 신하들 7명 12 그러나 훈민정음의 창제는,
당시 큰 파문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관료들이, 집단으로 상소를 올려
한글 창제를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말하는 1 S / FS 45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를 대표로
신석조, 김문, 정창손 등 모두 일곱명의
학자들이 반대 상소를 올린 것이다.
~13 최만리로 Z.I 이들은 모두 집현전 소속으로
집현전 내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던
원로학자들이었다.
이들이 상소를 올린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26 [성우 더빙] 굳이 언문을 만들어야 한다하더라도
마땅히 재상에서 신하들까지 널리 상의한 후
행해야 할 것인데 갑자가 널리 펴려 하시니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세종 1 S, 상소 읽는다 16 이들은, 상소를 통해
한글 창제가 세종의 독단적 행동이었음을
비난하고 있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박종국 INT 33 최만리도 훈민정음 창제한 것을 그때 안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면 그 전에 그런
기록이 없고 집현전이라면..부제학이라면
실제 실무담당 책임자다....미리 알았으면
그런 게 벌써 나오지 그때 나왔다는 것은
그분이 전혀 모르신게 아닌가?
건물 PAN 12 집현전의 최고 책임자였던 최만리가
한글 창제를 몰랐다면,
창제 과정에 집현전 학자들이 참여했다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
건물 간판 Z.O/FS 27 한글 창제에 간여한 것으로 알려진
학자는 정인지, 최항, 신숙주, 성삼문 등
모두 일곱사람이다.
반대 상소를 낸 학자들이 원로라면,
이들은 대부분 젊은 나이로 소장학자에
속한다.
[쉬고-]
집현전 7학사라고도 불리는
이들의 이름은 조선시대 문헌에서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
용재총화 20 가장 오래된 기록은 성현의 용재총화-
세종이 신숙주, 성삼문에게 명해
언문을 지었다는 것이다.
[잠시 쉬고-]
집현전 7학사 중에서도
한글 창제와 관련해 가장 주목을 받는
학자는 신숙주다.
신숙주 사당 찾아간다 14 세종의 총애를 받았을 뿐 아니라,
한글 관련 사업에 가장 많이 동원된
사람이 바로 신숙주였기 때문이다.
[흘리고-]
할아버지 커텐 걷는다 14 신숙주는
외국어에도 능통했다고 알려져 있다.
중국어, 일본어 등 5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같은 사실도
신숙주 영정 Z.I 12 그가 한글 창제에 참여했을 거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하 흘리고-]
보한제집 13 신숙주의 문집인 보한제집에는,
그의 행적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신숙주가 직접 쓴 글을 비롯해,
당대 학자들이 기록한 그의 일대기가
실려있는 것이다.
내용 PIN 17 그런데 여기서는,
한글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든 것은
세종이라고 적고 있다.
신숙주가 한 일은
세종의 명을 받아 한글 서적을 편찬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PIN(둥근) 15 그러나 그동안 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신숙주가 요동에 다녀왔다는 기록이다.
당시 요동에 귀양와 있던
중국의 언어학자 황찬을 만나기 위해,
성삼문과 함께 여러차례 요동을
방문했다는 것이다.
신숙주 영정 SK 20 [FS 흘리고 다리 나오면-]
신숙주가 황찬을 만난 것은
훈민정음 창제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쉬고-]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충북대 INT 34 질문한 것은 한글을 만드는 문제에 대해서
질문한 것이 아니고 한자를 바로 잡기 위해
서 한자음에 관한 질문을 하러간 것이다.
한자음에 대한 이론인 성운학에 관해 질문하
러 간 것이지, 한글을 만드는데 어떤 직접적
인 조언을 얻기위해 간 것이 아니다. 그 연도
등은 조선실록을 보면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CD-ROM 넣고 16 [잡시 사이-]
그렇다면, 신숙주가 황찬을 만나기
위해 요동으로 간 것은 언제일까?
[여자 뒷모습 보이면-] 조선 왕조실록을 검색해보기로 했다.
컴퓨터 9 [흘리고-]
질의어 -> 신숙주... [흘리고-]
문항 나오면 선택하고- 11 검색결과, 신숙주가 최초로 요동에 간
것은 1447년 1월. 한글이 만들어진 뒤
1년 2개월 후의 일이었다.
이기문 INT 32 실제 일은 성삼문 신숙주 또래들이 했다고
볼 수 있는데 성삼문은 조금전에 집현전에
왔고 신숙주는 세종 25년말에 훈민정음이
창제됐는데 신숙주는 23년엔가 집현전 학자
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일본에 갔다. 그일에
관여할 시간이 없었다.
노장학자 ~9 對 소장학자 26 한글 창제에,
집현전 학자들이 참여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원로 학자들은
한글 창제 자체를 반대했고,
젊은 학자들도 한글 서적을 만드는데
참여했다는 사실만을 밝혀냈을 뿐이다.
결국, 세종 25년에 만들어진
한글 스물 여덟자는 그들의 공로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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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해례본 원본 10 [책보이면-]
훈민정음에 관한 책중,
현재 전해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해례본 (타이트) 25 바로 이것이 세종 28년,
한글 반포를 위해 집현전 학자들이
만든 책으로 추정되고 있다.
[좀 흘리고-]
이 해례본은 한글의 글자 하나하나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는 책이다.
집현전 학자였던 정인지가 쓴
이 책의 서문중에 한글을 만든 사람에
대한 언급이 있다.
전하창제 7 전하 창제-
여기서도 훈민정음 스물 여덞자를
만든 것은 세종이라고 밝힌 것이다.
충북대 INT 58 신하들이 만들었는데 관례에 의해서 임금이
한 것으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사람
들이 많이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다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세종대왕때 한글
만 만든 것이 아니라 다른 사업도 많이했는
데 그런것들은 다 한 사람들의 이름을 밝히
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공을 임금한테 돌리
기 위해 했다고 하더라도 그당시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은 한글을 만든 것은 대단한
공이 아니고 해서는 안될 일을 임금이 하고
있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공을 임금에게
돌리기 위해서 친제라는 표현을 썼다 이건
전혀 근거가 없는 그런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최만리 상소 올린다 17 이것은 최만리의 상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한글을 만든 것은
신기한 재주를 부린것에 불과한 것으로
전혀 유익할 것이 없다고 혹독한
비판이었다.
세종의 반박 11 이에 대한 세종은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설총이 만든 이두는
옳다고 하면서 제 군주가 한 일을
그르다고 하는 까닭이 무엇이냐며
반박하고 있다.
훈민정음 서문 펼치고 25 세종 스스로 한글을 만든 것이
자신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쉬고-]
세종이 직접 쓴 글속에서도
한글 창제를 다른 사람에게 명해서
만들게 했다는 말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쉬고-]
이같은 사실은 훈민정음 서문의
글을 통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내 이랄 위하야(PIN) 9 [좀 보다가-]
~맹가노니 한글 스물 여덟글자는 자신이 직접
만든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기문 INT 34 친제라고 하는 표현은 훈민정음에서만 볼 수
있다. 다른데서는 볼 수 없는 것을 보면 훈민
정음은 역시 친제다. 세종이 이것을 만들 수
있는 그런 여러 가지 학문적인 배경이나
능력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 역시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유력한 증거가 되지 않나
생각한다.
서가의 조선왕조실록들 29 세종은 어린시절부터
학문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고 한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책에 몰두해,
건강이 나빠지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아버지 였던 태종이 글을 읽지
못하도록 책을 모두 빼앗았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세종은 이미, 왕자시절에
학문에서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박종국 INT 26 세종께서 학문의 대왕이다. 어릴때부터 공부
를 좋아했으니, 임금이 되어서는 늦게자고
일찍 일어나 공부한다. 그분 말씀이 나는
경서중에서 안본 책이 없다. 그 당시에 우리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을 다 본 분이시다.
최만리 상소 올리는- 15 세종은 언어학에서도 조예가 깊었다.
[잠시 쉬고-]
한글로 운서를 번역하는 것에 대해
최만리 등의 학자가 그것이 터무니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자 이에 대한 세종의 반박은
단호했다.
반박하는 세종 16 <너희가 운서를 아느냐?
또 너희가 사성 칠음과 자모가 몇인 줄
아느냐>
세종 스스로 언어학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신하들 모습 10 이같은 세종의 반박에 대해
당대 이름난 학자였던 집현전의 학사들은
단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한다.
충북대 INT 26 최만리라고 하는 분이 집현전 책임자로 다른
말로 당대 최고의 학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당대 최고의 학자를 앞에 두고 당신이
이걸 아느냐고 얘기할 수 있는 건 아무리
임금이라도 자신이 학문적 역량이 없으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이렇게 해석하는게...
동국정운 겉표지 5 한글을 만든 직후
세종은 동국정운을 편찬하도록 명한다.
내용 SK 23 이것은 방대한 분량의 중국음을,
모두 한글로 옮겨 적는 일이었다.
그런데 실무자였던 신숙주가 쓴
서문에 따르면 음 하나하나까지 모두
왕에게 직접 재가를 받았다고 한다.
명..해석 10 정인지가 쓴 훈민정음 해례의 서문에서
그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흘리고-]
PIN 12 <상세하게 덧붙이라고 명했다>
즉, 세종의 명을 받아
한글 스물 여덟글자의 원리와 용례를
해석하는 일을 맡았다는 것이다.
집현전 학사도 21 이같은 기록으로 볼 때,
집현전 학자들은 한글 스물 여덟글자의
해석과 동국정운 등 한글 서적의 편찬
사업에 관여했을 뿐이었다.
그것도 세종의 지시를 일일이 받아서
이루어 낸 일들이었다.
충북대 INT 42 세종이 임금이기 때문에 학자라고 하는 사실
이 가려지는데 세종은 왕이면서도 아주 뛰어
난 언어학자였다. 언어학자라는 사실을 강조
하지 않는데 만약 임금이 아니었다면
언어학자라는 부분으로 세계사에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을까? 워낙 많은 일을 하고 또
임금이다 보니까 학자라는 사실이 가려지는
데 여러 가지 업적이나 기록을 보면 세종은
뛰어난 언어학자였다.
세종대왕 어진 13 세종대에 이뤄진
한글 관련 사업의 최고 책임자,
그것은 바로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였던
세종 자신이었던 것이다.
죽산 안씨 찾아간다 7 훈민정음 창제를 둘러싸고
떠도는 이야기는 많지만 그 중 믿을 수
있는 내용은 거의 없다.
족보 넘기고- 4 그런데 한 가문에서 구체적인 기록이
할아버지들과 살펴본다 14 전해지고 있다고 해서 확인해 보기로
했다.
[좀 보다가-]
바로 세종의 둘째딸인 정의공주와
관련된 것이었다.
종손 INT 20 우리 어릴 때 들은 이야긴데 한글 창제후에
민간에 실험시키는데 동원되었다는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다
- 한글 정의공주가 만들었다고?
우리는 그렇게 알았죠
하늘~정의공주 무덤 11 한글을 만들었다고 까지 이야기 되는
세종의 둘째 딸 정의공주는
죽산 안씨 가문으로 출가한다.
돌비석들~무덤 SK 12 그런데 이 가문의 족보에 시집온 그녀가
세종의 명을 받아 한글 창제를 도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종손 INT 53 족보를 보니까 여기에 기록과 같이 유사가
나오잖아.. 한글의 변음과 토착을 세종이
대군들에게 풀어라고 하니 대군들이 못풀어
서 세종이 정의공주에게 하명..정의공주가
변음과 토착을 풀어 올리니 세종이
극찬하시고 상으로 노비 수백구를 하사하셨
다는 기록이 있다
족보 6 정의공주가 해결했다는
변음과 토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공주유사 12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쉬고-]
다만 이것이
민간에서 사용되던 언어나, 사투리 등이
아니었을까 막연히 추정해 볼 뿐이다.
무덤앞의 사람들 SK 6 한글 창제과정에서
정의 공주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무덤 SK 10 그러나 이같은 기록은 한글을 만드는
과정에 세종의 직계 가족들이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집현전 건물 ~ 창호문으로 15 집현전 학자들을 중심으로 추진된
한글 서적 편찬 사업에도
왕자들이 깊숙히 개입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금운회거요 10 한글 창제후 처음 실시한 사업이
바로 운회를 번역하는 것, 이 일에
왕자들이 동원된 것이다.
이기문 INT 1'03 세종이 한글 창제과정에서 문종,수양대군들과
상당히 서로 의견교환을 했지 않았나 생각한
다. 세종 25년말에 훈민정음을 공표하고
그 다음해에.. 두달뒤에 훈민정음으로 사업을
하는데 그 총책임자를 세자와 왕자를 임명했
다는 것은 그들이 내용을 알기 때문에 그러
지 않았나?그때처음 집현전의 젊은 학자들이
참여했고 그후 최만리의 반대상소가 나온다
운회번역에 대군들 동원 15 운회를 번역하는 일에 참여한 왕자는
모두 세사람...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와
수양대군 그리고 안평대군이 그들이다.
대군들 이미지 재연 12 이들이 번역 사업의 책임자가 된 것은
왕의 아들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한글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훈민정음 글자 타이트 14 그렇다면
바로 이들이 세종을 도와 한글 자모
스물여덞자를 만들 때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박종국 INT 49 아들 세분이 세종못지않게 학문, 글씨등에서
능가할 수 있는 분들이다. 심지어 어떤 기록
에는 세종과 문종이 같이 만들었다고 하는
기록도 나오고 또 세종께서 대군들과 식사하
시면서 대화를 한 기록이 나온다. 이런 것으
로 봐서...... 세조가 석보상절을 만들었잖습
니까? 그게 그러한 것이 없으면 안되거든요
직해동자습서문 18 문종과 관련해,
직해동자습이라는 책의 서문에,
재미있는 기록이 남아있다.
[잠시 쉬고-]
이것은 신숙주와 함께 한글을 만든
장본인으로 지목되는
성삼문이 쓴 기록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좀 쉬다가 이어서-]
내용 타이트 14 성삼문은 이 글에서 한글을 만든 것이
세종과 문종이라고 적고 있다. 이것을
뒷받침해줄 다른 기록은 없지만 한글
창제에 왕자들이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또하나의 증거인 셈이다.
글자쓰는 이미지 재연 24 [한참 쉬고-]
그렇다면 세종은
왜 한글을 만들려고 했던 것일까?
[사이-]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사이-]
그러나 세종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단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삼강행실도다.
삼강행실도(세종16년) 24 이 책이 만들어진
~7 책 넘긴다 동기는 세종 10년에 있었던 일 때문이다.
진주사람 김화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세종은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책하며
효자 충신등의 사례를 담은 행실도의
간행을 지시한 것이다.
한문에서 그림으로 PAN 20 이렇게 만들어진 삼강행실도는
내용과 함께 그에 맞는 그림을 그려
넣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도 그림을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위한 배려였다
[흘리고-]
세종실록 내용 13 그러나 세종은, 문자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림만으로는 제대로 된 뜻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며 안타까와 한다.
문자 창제의 필요성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다.
훈민정음 글씨 C/G 12 그리고 10년 뒤,
훈민정음 서문에서 어리석은 백성과
문자라는 단어가 다시 나타난다.
한문 행실도->한글 18 삼강행실도에 백성이 알 수 있는
문자를 붙이고 싶었던 세종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사업은 중단되고
훗날 성종때 이 책은 간행될 수 있었다.
한글 삼강행실도가 빛을 보게 되는 것은
성종대에 이르러서다.
밤 뜰에 선 세종 14 한글 창제는 세종이 신하들 몰래
자식들을 데리고
10여년간을 추진해 온 비밀스런 연구의
결과인 것이다.
궁궐 외경 SK 15 한글이 완성된 직후 세종은
큰 곤경에 처한다.
한글 창제를 찬성하는 이는 없는 반면,
가장 신임하던 집현전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세종 고뇌한다 14 최만리 등의 학자들은
상소를 통해 왕의 행동은 사려깊지 못한
일이라며 강력하게 비난한다.
[쉬고-]
이들의 태도와 어조는 매우 당당한 반면,
이에 대해 세종이 오히려 변명을 하는
형상이다.
혼자 앉은 세종(글씨) 26 [더빙] 어찌 옛날부터 쓰는 폐해없는
글자를 고쳐
낮고 천하고 속된 말인
이익이 없는 글자를 새로 만들어
쓰겠습니까?
궁궐 외경 이미지 SK 20 [잠시 쉬고-]
이들이 감히 세종에게 도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과의 문제때문이였다.
[사이-]
만약 이 사실이 중국에라도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느냐?
최만리는 걱정하고 있었다.
이기문 INT 1'12 상식적인 태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때 학자들로선 그런 소양을 가지고 있었
으니까.. 우리 나라는 중국의 한문으로 문자
생활을 했고 한문으로 이뤄져 있었기 때문에
한글을 만드는 것은 그들에게는 필요치 않았
고 이것은 오히려 오랑캐가 되려는 것이다고
반대하는 것이 당연했다고 볼 수 있다.
훈민정음 서문 SK 15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새 문자를 만든다는
사고는 당시로서는 위험한 생각이었다.
듕귁에 달아- 14 중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대 관계에 있던 조선이 이미 쓰고있는
한문을 두고 따로 국어를 가진다는 것은
중국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여증동 INT 29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령을 하면 하라고 할
사람이 하나도 없어- 가만히 만들 수 밖에
없어... 집현전 학자에게 명령을 내렸을 때
전하 절대로 안됩니다하고 반대할 터인데
될턱어 없이 상상을 해보라고...
내불당도 18 만약 한글이 창제되기 전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다면 한글 창제는
불투명했을 것이다. 이같은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것이 바로 내불당 사건이다.
세종이 궁궐내에
법당을 지으려 하자 신하들이 대대적으로
반대를 하고 나선다.
집단상소하는 신하들 9 나라의 국교가 유교 즉 성리학인데,
왕이 불교를 숭상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해동잡록 겉표지 6 해동잡록에는 당시 신하들의 반대가
어느정도 였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내용 21 집현전 학자들은 자신들 의견이 관철되지 않자,
업무를 중단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13 C/G 이에 세종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황희를 붙잡고 이를 어쩌면 좋을까 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마당 거니는 세종 18 아무리 임금이라고 하더라도
명분을 앞세운 신하들의 주장을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글 모르는 백성을 위한 한글창제는,
양반계층의 이익과는
상반되는 것이었기에...
반대는 더욱 거셀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강창석 INT 56 당시 최만리라든가 이런 사람들은 한문으로
문자생활을 하고 그것이 다른 서민들과 자신
들이 구별되는 어떤 근거이기도 했기 때문에
굳이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는 문자를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 자기 고유의 글을
가지고 있는 일본이라든지 여진, 서하를 오랑
캐라고 무시하는 대목을 보면 한마디로 말해
필요없다..자신들의 입장에서 보면 필요없지
만 세종은 그들입장이 아니라 글 모르는
백성을 입장에서 보면 필요하다고 의견차이
가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끌려가는 학자들 6 내불당 사건때와는 달리,
세종은 반대론자들에 대해 매우
단호하게 대처한다
하옥된 학자들 18 반대 상소를 올린 집현전 학자들을
전원 하옥시키면서까지 한글의 사용을
추진하려 했던 것이다.
[이하 흘리고-]
홀로 앉은 세종 17 한글 창제전에 이 사실이 신하들에게
알려졌다면 한글은 탄생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당시의 명분에는 어긋나는 한글창제 .
강건너의 비문으로 Z.I 14 이곳에 있는
한 작은 마을의 어귀엔,
이상한 글씨의 비석이 있다.
여기에 새겨진 글자가, 한글의
기원과 관련해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비문 (타이트 SK) 12 [잠시보고-]
비석에는...
마치 한글을 풀어쓴 듯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하 흘리고-]
비석SK(1862년 건립) 15 일본에서는 이 글자를 신대문자라고
부른다.
[잠시 쉬고-]
일본에 한문이 들어오기 전인,
신대에 사용하던 문자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여자 말하고 16 이글이 한글에서 유래됐다고 하는데...
- 나는 신대 문자라고 배웠다.
비문 SK 13 북한의 학계에서는 이 글자들이
바로 고조선의 문자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오우이찌 신사 정문 16 이같은 신대 문자는
현재,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다.
주로 조상신을 모시는 신사 등에
많이 남아 있는데 그 분포지역만도
백여군데가 넘는다고 한다.
돌지붕의 한글 7 한글과 꼭 닮아 있는 은 이 글자를,
일본 사람들은 어떻게 발음하고 있을까?
비문읽는 신주 19 ... 정식으로는 가무나가라 입니다
[Z.I 들어가고 나서-]
놀랍게도 이 문자는 한글과 똑같이
발음되고 있었다.
신들이 걷는 길을 인간도 함께 걷는다는
의미입니다
신주와 이야기 5 한글 읽을 수 있나?
- 못 읽는다
지붕에다 절하는 신주 SK 16 [FS 그냥 흘리고-]
일본 사람들은
신대문자를 과거 조상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글자라고 여겨, 매우 신성시
여기며 숭배하고 있다.
제사지내는 신주(방안) 17 일부 신사에서는
이 글자 자체를, 신대신 모시는 경우도
있다. 신대문자에는 그 자체로도
신령한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부적 펼치는 두사람 17 일반 사람들의 생활속에서도
신대문자의 흔적은 쉽게 찾을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부적이다.
[잠시 보고-]
신사에서 만드는 부적에는
지금도 신대문자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부적 설명중 20 신대문자 인장이라고 그러지...
인장을 신사에 신이 도장찍어서 전래되고
있어서 신대문자가 되었다....
초서체/진서체 19 신대문자는 두가지인데 초서체, 이건
진서체, ... 지이, 신이 세가지 존재한다
부적외의 신대문자 흔적 17 이외에도 신대 문자의 흔적은 비석
청동검, 청동거울 등의 물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글자가 언제부터
존재했는가 하는 점이다. 한글 이전에
있었는지가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
신자 일문전(1819년 출간) 5 일반인들에게 신대문자를 최초로
소개한 것은 1800년대 초반에 출판된
책 펼쳐보고- 15 <신자일문전>을 통해서 였다.
매우 여러종류의 신대문자들이 소개돼
있는데, 일부에서는 신대문자는 이 책의
저자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기도 하다.
김문길 INT 52 신대문자를 보고 많은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정통 국어국문학계에서는 한글로 위작한 것
이라고 하고 있고, 신사등에서는 신대에 있었
던 말 신이 주는 말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부적들 SK 11 신대 문자를 둘러싸고 진위논란이
벌어지는 가운데, 우리나라의 부적속에도
고대 문자가 씌여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글자 (타이트) 16 삼국시대 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왔다는
부적의 문양속에서, 한글과 유사한
글꼴들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하 흘리고-]
부적놓고 설명중 9 다른 것은 읽을 수 없지만...
물을 세 번썼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김민기 INT 52 부적속의 글자는 우리 조상들이 쓰던 글자고
...왜 부적에 그런 글자가 남았냐면 하나님을
부르거나 북두칠성을 부르려고 할 때 .......
그 조상신이 알던 문자를 써야 아니까 조상
들이 읽고 알아들을 수 있는 글자로써 만드
는 것이 상식이다.
명가필보 넘기고 17 우리 나라에
고대부터 문자가 있었다는 주장은
옛날부터 있어온 것이다.
~6 고조선 신지글자 연대를 알 수 없는 책속에서는
고조선때 사용되던 글자라며
신지문자라는 것이 소개돼 있기도 하다.
신지글자 6 그런데 이 신지문자의 글꼴도
부적속에서 종종 발견된다는 것이다.
양하리 각석 13 [한숨쉬고-]
또다른 이는, 남해 양하리에 있는
바위그림을 일러 고대 우리 선조들이
쓰던 그림글자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하 흘리고-]
한단고기 12 많은 주장들 가운데, 가장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한단고기라는
책속에 소개된 가림토 글자다.
[보고-]
모두 서른 여덟 개로 이뤄져 있는데,
가림토 글자(타이트) 12 글자 모양이 한글과 거의 유사하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한글은 이 글자로부터
유래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도화 교수방 16 일부에서는 이 가림토 글자가 실재 존재했으며
그 물증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가림토 문자의 증거로 제시되기도 하는 이 탁본.
이 탁본의 글자가 과연 고조선 시대,
우리가 쓰던 글일까?
탁본(타이트) SK 2 [흘리고-]
탁본/현장음 27 이 탁본의 원래 소장자는 이상백교수의
소장품이다. 1930년대 만주에서 탁본했다고
한다. 이상백 교수가 말씀하시기를 우리나라
한글의 어머니 글이라고 말했다고 듣고 있다
글자 살피는 두사람 7 [두사람 보이면-]
탁본을 살펴본 결과,
그 가운데는 한글과 유사해 보이는
글자 타이트 13 글꼴들도 더러 있었다.
정말 이것이 가림토 문자, 혹은 원시
한글의 흔적일까?
송기중 비교중 14 동아시아 고문자를 연구하는
송기중 교수의 도움을 받아
이 문자에 대해 확인해 보았다.
[이하 현장음]
송기중 현장음 9 - 어떤 문자인가 / 이건 돌궐문자다
~3 손에든 종이로...
종이 타이트 SK 7 그 결과, 이것은 가림토가 아니었다.
이미 해석까지 어느 정도 완료된
돌궐문자였던 것이다.
큰 돌궐탁본 펼쳐보고 11 그런데 이 돌궐문자는
동북아시아 지역의 소리문자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만주문자~송교수 22 지금 얘기한 돌궐족들이 쓰던 글을
12세기말에 몽고족들이 받아들여 썼던 걸
16세기 말에 만주족이 써서 만주글로 써서
그러니까 이건 만주글이다.
만주글 18 이처럼 동북 아시아에서는
중국의 뜻글자 외에도 독자적인
소리글자의 전통이 이어져 온 것이다.
우리민족과,
언어학적 계통을 같이하는 이들...
그렇다면 우리 민족에게도 소리글자의
전통이 있었던 것일까?
훈민정음 운해 23 [한숨 돌리고-]
이와 관련해 신경준이 지은
<훈민정음 운해>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10~속용문자 우리 나라에는 예로부터 사용하던
속용문자가 있었는데 그 수가 일정치
않고 그 꼴의 법칙 또한 없다- 고
적고 있다.
이상한 그림 18 이것은 우리나라에도
한문외에 민간에서 사용되던 문자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만약 세종당시 이런 민간 문자가
있었다면, 백성을 위해 한글을 만들었던
세종이 이 문자를 참고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자방고전 (PIN) 24 그러나 자방고전에 대해서는
그 어느 기록에서도 명확히 언급되어
있지 않다.
창호문 17 훈민정음의 제자원리는
오랜 세월동안 미궁속에 잠들어 있었다.
때문에 어떤 이는 세종이
창호문의 문양을 바라보다가 거기서
힌트를 얻어 만든 것이 기역 니은 이라는
이론을 펼치기도 했다.
훈민정음 해례 6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훈민정음 해례가 발견되면서 터무니없는
것이었음이 밝혀진다.
ㄱ은 혀뿌리가... 15 한글의 글자꼴이 무엇을 본따 만든
것인지 이 책에서 명백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ㄱ은 혓뿌리가 목구멍을... [쉬다가-]
기역은 혓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본떴다.
ㄱ,ㄴ,ㅁ,ㅅ,ㅇ 7 이처럼.. 다섯 개의 기본음은
발음기관의 생김새에서 본따 만들었던
것이다.
이현복 INT 45 글자가 왜 ㄱ과같은 모습을 가졌난 말야..
그건 발음을 할 때 혀의 모습이 ㄱ의 모습을
가졌다 .그건 인류공통이다. 흑인동양인 할
것 없이 다 그렇게 발음해야 한단 말이야...
그게 독특한 것이고 유래가 없는 일이다.
실험실 SK 17 한글의 글자꼴이
발음기관의 모습을 얼마나 정확하게
표현한 것인지, 실험해 보기로 했다.
이것이 맞다면, 세종은 이미 500년전에
발음기관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X-레이 타이트 6 [현장음]
C/G 발음기관 9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습을
~5 ㄱ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해례의 설명 그대로 였다.
ㄴ 발음하는 해골 6 [흘리고-]
C/G ~2 ㄴ 11 나머지 글자들도 모두 해례의
설명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ㅁ은 입모양을 본떴다 20 [흘리고-]
해례/소리가 강하면 12 그외의 글자들은 매우 간단한
획을 더한다 원칙에 의해 만들어지도록 했다.
다섯 글자를 기본으로 삼고, 소리가
강해지면 기본자에 획을 더하면 된다.
이현복 설명 36 여기서 기본글자를 만들고 하나를 더해서
ㅋ를 만들고, 여기서 하나를 더해서 ㄲ를
만든다. 보면 기본글자가 다 있잖아, 이걸
보면 누구나 이거 하나를 배우면 세 개를
금방 알게 되는거지.. 하나 배우면 열을
안다는 옛날 속담이 여기서 실현된거지
아설순치후 C/G 11 사람이 낼 수 있는 모든 소리는
다섯가지 기본음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바로 이것이 한글의 기본글자를 이루게
된다.
기본글자~발생 23 이 다섯 글자를 기본으로 삼고,
획을 추가해 글자를 만들게 된다.
[두번째 글자 발생시작하면-]
그런데 이 경우, 동일한 계열의 소리는
동일한 글자꼴을 갖게 됨으로써
한글은 소리와 모양이 일치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문자가 되는 것이다.
권정선 INT 32 세종의 한글시대에 오면 세종이나 학자들이
음운에 대해 상당히 많이 알거든.. 소리낼 때
혀와 입술이 어떻게 난다는 것을 잘 알지..
실제로 우리 한글이 고도로 발달된 문자라는
것은 고도로 발달된 음성지식이 있고 난
뒤에 만들어진 글자란 뜻이다
디스커버 7 한글에 대한 외국인들의 평가는 어떨까?
세계적 과학잡지, 디스커버는
지난 94년 7월호에 문자에 대한
특집 기사를 실었다.
내용 뒤적이고 14 이 글은, 한글을 설명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을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하게 다루었다.
7~자막(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글)
그리고 최상급의 표현을 써서 한글을
극찬하고 있다.
책 다시 뒤적인다 5 다른 문자와 비교해도,
한글의 우수성은 탁월한 것이다.
1446년 한국언어개혁 7 미국인 학자로 한글을 연구하고 있는
레드야드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한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책내용 16 [보다가 자막뜨면-]
~6 문자학적 사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문자학적 사치!
세계 문자사상 가장 진보된 글자,
그것이 바로 한글인 것이다.
세종의 빈자리 13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문자의 사치
그것은 시대를 앞서간 천재 언어학자
세종의 외로운 노력이 가져다 준 고귀한
선물이었다.
[잠시 쉬고 이어서-]
궁궐 이미지 그림 SK 19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비록 오랑캐가
된다 하더라도 백성이 글을 알아야 한다는
그의 의지.
한글창제는 극소수 양반층만 누리던 문자의
특권을 모든 백성에게 나누어준 세종의 거룩한
문자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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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글 창제 때문에 외롭게 고뇌하던 세종대왕의 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