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밤나무>
<정리 / 권오신>
어릴 때, 어른들로부터 ‘껍질을 세 번 벗겨야 먹을 수 있는 열매는 아주 좋은 과일’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세 겹이나 싸고 있으니, 그리 흔하지 않으니, 그래서 ‘좋은[혹은 귀한] 과일’이라 하는 것이겠지 생각도 했었다.
9월 말경부터 시작되어 이제 막바지 수확기에 접어든 밤[栗], 가로수로 환영받기도 하지만 고약한 냄새로 홀대를 받는 열매 은행(銀杏), 사람의 뇌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겨서 두뇌 건강에 좋을 것이라 여기는 호두[추자楸子] 등을 우선 들 수 있다. 고급 음식 재료로 쓰이는 잣[실백實柏]도 있다. 다른 것도 더 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 중에 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밤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2000년 전 낙랑(樂浪) 시대의 무덤에서 밤 몇 톨이 발견되고, 중국 진(晉)나라 때 편집된 [삼국지(三國志)]의 마한(馬韓) 대목에 밤이 언급되는 등 중국의 여러 역사서에 마한과 백제의 밤에 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과거 밤[栗] 산지였던 경기도 시흥군 북면, 과천면, 남면 등을 고구려시대에는 율목군(栗木郡)이라 불렀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율진군(栗津郡)으로, 고려시대에는 과주(果州)로 불리다가 조선시대에 와서는 과천현(果川縣)으로 고쳐 불렀다. 현재의 과천시다.
현재 우리나라의 밤 주산지로는 광양, 보성, 순천, 하동, 함양, 산천, 진주, 구례, 전주, 남원, 장수, 공주, 부여 청양 등 주로 남부지방에 많은데 이는 현재 재배되는 밤 품종의 대부분이 일본에서 도입된 냉해에 약한 품종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밤꽃은 암수한그루, 암수한꽃이다. 꽃자루의 밑동 가까이에 암꽃이 피고 조금 떨어져 수꽃이 길게 핀다. 수정이 끝나면 암꽃에는 씨방이 자라기 시작하고 겉으로는 가시를 만들게 된다. 역할이 끝난 수꽃은 시들어 떨어진다.
밤송이는 새나 다람쥐 등으로부터 연약한 씨방을 보호하기 위하여 가시를 만든다. 씨방이 충분히 여물어서 웬만한 새들이 쉽게 먹을 수 없으면 딱딱해진 가시껍질 부분이 벌어지면서 밤은 땅에 떨어지는데 이때부터는 기다리던 다람쥐 등의 먹이가 된다.
그런데 사람들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이 가시도 벌레들로부터는 속에 든 밤을 보호하지 못한다고 한다. 벌레들은 종류에 따라 꽃의 수정이 끝나는 시기에 맞추어 또는 가시가 굳어 딱딱해지기 전에 연한 부분을 뚫고 씨방에 알을 낳아두기 때문이다. 그런 밤들은 가을이 되어 수확해보면 겉보기에는 멀쩡한 것 같지만 갈라보면 안에서는 이미 부화한 알이 과육을 파먹으면서 성장하고 있다. 이렇게 벌레 먹은 밤은 물에 담그면 얼마 뒤 위로 뜬다.
어린 시절, 남의 집 밤나무에 올라 몰래 딴 밤을 이빨로 아무렇게나 대충 까서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깨끗하게 까면 좋겠지만 주인에게 들킬까 겁도 나고 또 먹는 양이 줄어드는 것이 아깝기도 해서다. 벌레 먹은 것이라도 대충 깨물어 버리고 그냥 먹는 건 물론이다. 좀 떫기는 하지만 그저 먹는다는 것으로 만족했다. 지금처럼 밤이 흔하지 않았고 다른 간식도 없었거니와 그땐 언제나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밤은 영양학적으로 매우 우수한 먹을거리라고 한다.
주로 삶거나 구워서 먹는다. 겨울철의 군밤은 맛도 좋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먹으면 맛과 함께 친밀감도 생기는 것을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깎아서 날로 먹기도 하는데 껍질을 까는 것이 여간 성가시지 않다.
밤을 익혀 먹을 때 껍질을 쉽게 깔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먼저 적당한 양의 밤을 물에 1시간 정도 불린 다음 건져서 채에 담아 센 불에 20-30분 정도 찌는 것이 좋다. 삶는 것도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하면 영양 손실이 많다고 한다. 또 찌거나 삶을 때는 흔히 열전도율이 높은 알루미늄 그릇을 쓰는데 알루미늄은 고열에 노출되면 납성분이 추출되므로 피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찐 뒤에는 바로 뚜껑을 열지 말고 10분 정도 뜸을 들이는 것이 맛도 좋을뿐더러 껍질을 벗기는 데도 도움이 된다. 찐 밤을 물(얼음을 넣으면 더 좋음)에 담그는데 이렇게 하면 속 알맹이가 수축이 되어 겉껍질만 벗기도 속껍질까지 깨끗하게 따라 벗겨진다.
밤은 주로 굽거나 삶아서 먹고 오곡밥을 지을 때도 넣었다. 요즘은 밤으로 밤스프, 밤스프레드, 밤탕을 만드는 등 다양하게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든다고 한다. 밤을 꿀이나 설탕에 조리거나, 가루를 내어 죽이나 이유식을 만들고, 통조림, 술, 차 등으로 가공해서 먹기도 한다.
서양에서는 빵과 케이크에 밤을 많이 사용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프랑스의 과자 마롱글라세(marrons glaces)다. 무려 열흘에 걸쳐서 밤을 설탕시럽에 졸여 만드는데, 세계 3대 명과에 속할 만큼 명성이 높다고 한다.
옛말에 ‘밤 세 톨만 먹으면 보약이 따로 없다’고 했듯이, 밤은 모든 영양소를 골고루 함유한 '천연 영양제'라고 할 수 있다. 9월 초순부터 10월께에 수확하는 햇밤은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비타민, 미네랄 등 5대 영양소를 고루 갖춘 완전식품이라고 한다. 밤 100g에 들어 있는 비타민 B1의 함량은 쌀의 4배나 되며, 인체의 성장발육을 촉진하는 비타민 D의 함유량도 많기 때문이다. 비타민 C의 함유량은 토마토와 맞먹을 만큼 풍부한데, 대보름날 생밤을 오도독 씹어 먹고 부스럼이 나지 않기를 기원했던 ‘부럼깨물기’ 풍습은 겨우내 부족했던 영양분과 비타민 C를 보충하는 의미도 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밤은 가장 유익한 과일로 기(氣)를 도와주고 장과 위를 든든하게 하며, 신기(腎氣)를 보(補)하고 배고프지 않게 한다’고 적고 있다.
밤은 껍질이 두껍고 전분(澱粉)이 다른 영양분을 둘러싸고 있어서 가열해도 영양 손실이 적으므로 겨울철 영양 간식으로 적합하다. 배탈이 나거나 설사가 심할 때는 군밤을 천천히 씹어 먹으면 좋다.
생밤은 또 피부 미용, 피로 회복, 감기 예방 등에 효능이 있고 신장(腎臟)이 약한 사람이 장기 복용하면 효과가 있다. 술안주로도 좋은데 비타민 C가 알코올의 산화를 도와 숙취를 예방해주기 때문이다.
다만 밤에는 전분이 많아서 열량이 생밤 100g당 162kcal에 이를 정도로 높으므로 군살이 찌는 원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밤을 대량으로 보관할 때는 온도와 습도가 자동 조정되는 저온 창고를 이용하지만 가정에서 적은 양의 생밤을 오래 보관하는 방법이 있다. 간단하다.
알밤을 바람이 잘 통하는 응달에서 충분히 말린 다음 신문지로 여러 겹 싸고 마지막으로 비닐로 싼 다음 김치냉장고에 넣어둔다. 이렇게 하면 다음 해 추석에도 쓸 수 있다고 한다. 이때 김치냉장고의 밑바닥 보다는 중간쯤이 좋다고 한다. 냉장고의 온도가 영하로 내려가면 밤이 얼게 되는데 이를 해동하면 변질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밤은 제사상에는 빠지면 안 된다고 여기는 과일이다.
이때 밤은 익히지 않은 생밤을 올리는데 단순히 껍질을 까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일정한 모양으로 다듬는데 이것을 ‘밤 친다’고 한다. 큰 제사에는 평접시에 보기좋게 높다랗게 괴어서 올리기도 한다.
밤톨을 심어 싹을 내 키우면 성장하여 열매가 달리게 되는데 땅속에서 썩지 않고 달려 있던 씨밤이 이때 비로소 썩는다고 한다. 이를 두고 조상과 후손의 연결을 상징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으나 예전에는 조상의 위패(位牌)를 만들 때도 밤나무를 썼다고 한다.
밤나무 중에는 ‘너도밤나무’와 ‘나도밤나무’도 있다.
우리나라 식물 이름에는‘너도’ ‘나도’라는 접두사가 흔하다. 어떤 식물과 비교적 가까우면 옆에서 슬쩍 ‘너도’를 붙여주고,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식물이면서 억지로 ‘나도’라고 스스로 우겨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조상들의 재치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울릉도에 자생하는 ‘너도밤나무’는 밤나무와 다르기는 하지만 열매의 맛이 밤 비슷하고 잎 모양도 밤나무에 가까워 ‘그래, 너 정도면 밤나무라고 할 수 있지’라고 인정해 준다. 분류학상으로도 너도밤나무는 밤나무와 같이 참나무目 참나무科에 속해 친척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학명상으로 분류된 너도밤나무는 원산지가 한국이다. 즉 한국특산식물로 현재 너도밤나무는 거의 울릉도에서만 볼 수 있다. 열매는 먹을 수는 있지만 떫은 맛이 있다.
한편, ‘나도밤나무’는 열매가 밤 비슷한 것 빼고는 밤나무와 닮은 데라고는 없다. 좀처럼 남들이 밤나무로 봐주지 않는데 자신만 ‘나도 밤나무야!’라고 억지를 부리는 꼴이다.
실제로 나도밤나무는 무환자(無患子)目 나도밤나무科여서 참나무目 참나무科인 밤나무와는 전혀 친척 관계가 없다. 가로수로 종종 볼 수 있는 잎이 넓은 마로니에(marronnier, 서양칠엽수)가 나도밤나무科의 대표 식물이다. 나도밤나무와 마로니에의 열매와 잎은 먹을 수 없다. 특히 마로니에 열매는 밤과 흡사하여 밤으로 잘못 알고 먹어 해를 입는 예가 많다고 한다. 사포닌과 글루코사이드 등 독성 물질이 들어 있어 섭취했을 때 설사나 구토 등 위장장애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밤나무에 대한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신사임당이 율곡을 임신했을 때, 꿈속에서 현무(玄武, 북쪽 방위를 지킨다는 신령을 상징하는 짐승)가 나와 말하기를 ‘뱃속의 아이[율곡]는 태어나면 호환(虎患, 호랑이에게 당하는 화)으로 죽을 운명이지만 밤나무 100그루를 심으면 호환을 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신사임당은 율곡을 낳은 후 밤나무 100그루를 심어 열심히 길렀지만 그 중 한 그루가 말라 죽는 바람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어느 날 호랑이가 나타나 '밤나무 100 그루를 다 심지 못했다'며 율곡을 잡아가려고 했는데, 바로 옆에 있는 어떤 나무가 ‘나도 밤나무야!’라고 말해서 간신히 100 그루를 채워 호환을 면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밤나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뱀의 다리>>
1. ‘꿀밤’은 도토리의 경북 지방 사투리이다. ‘굴밤’에서 온 말이며 상수리나무 혹은 졸참나무의 열매을 말한다(국어사전). 도토리는 참나무 종류에 열리는 열매를 말하며 떫은 맛 때문에 그냥 먹기에는 거부감이 있다.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떡깔나무, 갈참나무 등의 열매가 모두 도토리다. 그러고 보면 도토리도 ‘껍질을 세 번 벗겨’ 먹을 수 있는 열매인 셈이다.
2. 요즘 각광을 받는 가로수 중에 '대왕참나무'도 있다. 잎이 임금 왕(王) 글자 모양으로 갈라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가을이 되면 다른 참나무와는 달리 주황색으로 단풍이 들며 작은 도토리도 열린다.
3. 동아시아에만 분포한다는 은행나무는 거의 인간에 의해 심어졌다고 한다. 악취 때문에 동물에 의해 이동되지 못한 탓이라 한다. 따라서 분포 지역이 한정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고 한다.은행나무도 겉씨식물인 소나무, 낙엽송 잣나무, 향나무처럼 침엽수(針葉樹)로 분류한다고 한다. 잎의 모양으로 보아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분류라는 생각이다.
심은 지 30년이 지나야 열매를 맺는다고 하여 공손수(公孫樹)라는 별명도 있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