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도비산 오르는 이정표는 해돋이와 해넘이를 가리키고 있다.
저 해넘이 붉게 물든 낙조가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듯이 이 한해가 가고 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소회는 착찹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묵은 해에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해도 다가오는 새해에 대한 또 다른 소망을 품고 사는 법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나라가 처한 작금의 현실은 난제가 산적해 있다.
이 나라에 존경할 원로가 없다는 소리가 들린다.
나라가 어지러운 때에 준엄한 꾸짖음을 할만한 나라의 어른이 없음을 한탄한다.
다는 아니라지만 사회의 목탁, 언론이 스스로 흑백논리와 좌우 편가르기 싸움을 부추긴다.
나라가 혼란스럽다.
남북의 첨예한 대치와 주변 4강의 헤게모니 싸움 속에서 과연 우리의 좌표는
어디며 이 나라가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혼란스럽다.
청년들은 안녕치 못하다 하고 노동자들은 기업과 나라 이전에 그들의
몫만을 키워달라는 아우성으로 온통 난장판과 다름이 없다.
이 나라에는 통치만 있지 정치와 정치력은 온데 간데 없는 지경은 아닌지.
이런 때 난 피이체의 '독일 국민에게 고함'을 생각한다.
지금의 독일의 발전과 안정은 일찍이 피이체같은 훌륭한 어른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대한민국 국민 너나 할 것 없이 일대 각성을 이끌어 낼 '혼불'이 절실하다.
송호근 교수의 '불길한 망국 예감'을 읽었다.
일대 국민적 각성을 촉구하는 눈물 어린 호소문이자 신문에 쓴 대자보다.
개탄만 있고 거시적 대안의 부재라는 비판은 말자.
"아무에게도 악의를 갖지 말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이 나라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온 나라들과의 정의롭고도 영원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간절한 호소는
남북전쟁으로 국론이 갈갈이 찢긴 미국의 봉합을 위한 링컨의 2기 취임사였다.
함석헌 선생은 1958년 8월 사상계에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외쳤다.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깨우침이다.
그 글의 마지막은 이렇게 되어 있다.
"하나님 이 나라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어령 교수의 소원 시는 오늘의 나라 걱정을 웅변으로 갈파한
한국국민에게 고하는 외침이자 호소가 아닌가 한다.
벼랑 끝에서 새해를 맞습니다.
덕담 대신 날개를 주소서.
어떻게 여기까지 온 사람들입니까.
험난한 기아의 고개에서도
부모의 손을 뿌리친 적 없고
아무리 위험한 전란의 들판이라도
등에 업은 자식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앉아 있을 때 걷고
그들이 걸으면 우리는 뛰었습니다.
숨 가쁘게 달려와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눈앞인데 그냥 추락할 수는 없습니다.
벼랑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어쩌다가 '북한이 핵을 만들어도 놀라지 않고
수출액이 3000억 달러를 넘어서도
웃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거짓 선지자들을 믿은 죄입니까
남의 눈치 보다 길을 잘못 든 탓입니까.
정치의 기둥이 조금만 더 기울어도,
시장경제의 지붕에 구멍 하나만 더 나도,
법과 안보의 울타리보다
겁 없는 자들의 키가 한 치만 더 높아져도
그때는 천인단애(千人斷崖)의 나락입니다.
비상(非常)은 비상(飛翔)이기도 합니다.
싸움밖에 모르는 정치인들에게는 비둘기의 날개를 주시고,
살기에 지친 서민에게는 독수리의 날개를 주십시오.
주눅 들린 기업인들에게는 갈매기의 비행을 가르쳐 주시고,
진흙 바닥의 지식인들에게는 구름보다 높이 나는
종달새의 날개를 보여 주소서.
날게 하소서.
뒤처진 자에게는 제비의 날개를,
설빔을 입지 못한 사람에게는 공작의 날개를,
홀로 사는 노인에게는 학과 같은 날개를 주소서.
그리고 남남처럼 되어 가는 가족에는
원앙새의 깃털을 내려 주소서.
이 사회가 갈등으로 더 이상 찢기기 전에
기러기처럼 나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소리를 내어 서로 격려하고 선두의 자리를 바꾸어 가며
대열을 이끌어 간다는 저 신비한 기러기처럼
우리 모두를 날게 하소서.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어느 소설의 마지막 대목처럼
지금 우리가 외치는 이 소원을 들어 주소서,
은빛 날개를 펴고 새해의 눈부신 하늘로
일제히 날아오르는 경쾌한 비상의 시작!
벼랑 끝에서 날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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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한 망국 예감
"오늘날 한국의 상황은 구한말 망국 때와 정확히 일치한다"
필자가 『인민의 탄생』(2011) 후속작인 『시민의 탄생』을 출간하면서 가진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과장이 아니다. 오히려 덧붙이고 싶다.
‘그때보다 더 열악하다’고. 한국을 두고 벌어지는 극동정세가 그렇고, 그와는 아랑곳없이
터지는 내부 분열이 그렇다.
누군가는 항변할 것이다.
그래도 백 년 동안 힘을 길렀는데 오늘의 한국은 구한말 조선이 아니라고.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4강은 한국이 커진 것보다 더 커졌고, 북한 변수가 돌출한
이 시대 역학구도에서 한국의 입지는 한없이 쭈그러졌다고.
내부 분열?
당시에는 분열상이 조정에 한정되었지만 지금은 시민사회 전반을 갈라 놓고 있다고 말이다.
그래도 믿기지 않는다면 중국·일본이 겹겹이 쳐놓은 방공식별구역으로 바짝 좁혀진 바다와 거기에 갇힌 한국을 보라!!, 4강 역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방공식별구역 경쟁은
용암처럼 꿈틀대는 극동정세에 잠재된 하나의 상징적 사건일 뿐이다.
한국은 두 개의 분절선이 엇갈리는 위치에 몰려 있다.
한·중과 일본을 가르는 ‘역사 대치선’, 한·미·일과 중국·북한을 가르는 ‘군사대치선이 한국의 지정학적 주소를 모순적으로 만들었다.
정세 변화에 따라 눈치를 살펴야 할 판이다. 일본의 우경화는 모순의 딜레마를 증폭한다.
아베 정권은 역사대치선의 중추신경인 영토분쟁을 일으키고 곧장 미국 뒤에 숨었는데,
한국은 중국과 위로주를 나누다가 얼떨결에 군사대치선으로 복귀해야 할 형편이다.
제주도 남쪽 상공에 신예 전투기들이 난무해도 한국은 구경할 뿐 뾰족한 방법이 없다.
구중궁궐에 갇혀 ‘정의의 대국’이 오기를 고대했던 고종(高宗)과, 틈새전략도 구사하지 못하는 오늘날 한국이 무엇이 다른가?.
‘난폭한 북한’이 불거지고, 여기에 영토분쟁이 겹치면 한국의 운명은 강대국 역학에 좌우된다. 구한말이나 지금이나 한국은 4강 역학에서 종속변수다.
두 개의 대치선에 끼어 쩔쩔매는 판에 내부 분열은 고종 때보다 더 심하다.
일 년간 정치권은 집요한 싸움밖에 한 일이 없고, 분쟁에 시달리던 시민사회는 끝내 쪼개졌다. 종교계 일부가 듣기에도 거북한 대통령 하야 선언을 하고 나설 정도니, 부지불식간 정권의 거버넌스는 금이 갔다.
회복해도 영(令)이 설지 의문이다.
국민의 건강한 판단력도 마비상태다.
명박산성보다 더 견고한 ‘요새정치’ 앞에서 지쳤고, 야당과 비난세력의 ‘돌격정치’에도
넌더리가 났다.
대통령 하야 요구가 정말 민주적인지, 120만 개 부정 댓글에 더해 뭐를 더 폭로할지 모를
판국에 법률 판단에 맡기자는 ‘회피정치’가 과연 민주적 리더십인지 헷갈린다.
정치권 분열, 약한 국력, 쪼개진 사회, 비전의 소멸, 그리고 열강의 충돌, 이것의 결말은
민족의 파멸이었다. 110년 전 대한제국을 멸망에 이르게 한 파국드라마, 그 악몽은 오늘날
한국과 정확히 닮은꼴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의 초라한 자화상을 냉철히 인정하자.
정치·경제적으로 한국을 이만큼 키운 20세기 패러다임은 끝났음을, 우리는 막힌 골목에
와 있음을 말이다. 산업화 세력이 그토록 자랑하는 성장엔진은 구닥다리가 됐고, 민주화
첨병이던 재야세력은 기득권집단이, 강성노조는 이익집단이 됐다.
‘사람투자’에 치중한 성장패턴의 유효성은 오래 전 끝났음에도 보수와 진보 모두 새로운
모델 만들기를 저버렸다.
‘사람투자’에서 ‘사회투자’로 전환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팽개쳤다.
연대와 신뢰를 창출하는 사회로의 전환이 사회투자의 요체이거늘, 원자화된 개인주의와 무한
경쟁으로 치닫는 현실을 부추기고 방치했다.
양극화와 격차사회의 행진을 막지 못했으며, 사회조직은 승자독식을 허용했다.
미래가 막막한데 시민윤리와 공동체정신? 글쎄, 분쟁이 만연된 한국 사회에서 누가,
어떤 평범한 시민이 어렵고 못사는 사람들을 걱정할까?
진영논리로 쪼개진 이기적 시민들의 어설픈 국가 운명을 극동의 강국들이 자국 이익에 맞춰
이리저리 재단하는 중이다.
너무 비관적 진단이라고? 아니다. 구한말에는 그래도 민지(民智)를 모을 생각은 했다.
지금은 민지를 쪼개는 데에 정신이 팔렸다. 유길준이 강조한 ‘시세(時勢)와 처지(處地)’는
이 시대에 더 절실한 교훈이다.
망국의 아픔이 있는 민족은 이보다 더 비관적 진단을 안고 살아야 한다.
대한제국의 패망이 식민지, 전쟁, 독재를 치르게 했듯이 ‘침몰하는 한국’의 유산은
당대의 것이 아니다. 우리 자녀들과 미래 세대가 감당해야 할 고난의 짐이다.
망국을 부르는 전면전에 나서기 전에 한번 자녀들의 얼굴을 보라!. 그 맑고 순진한 표정이
그것을 허락한다면 다 같이 싸워 끝장을 봐도 좋겠다.
글쓴이 :2013.12.03.(화)
송호근 서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