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채광석 생애 연보
1948년 7월 11일
충남 태안군 안면읍 창기리 양지말에서 아버지 채규태(창기초등학교 교감역임...이후 초등학교 교장 정년퇴임), 어머니 이우덕 슬하 4남 2녀 중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1955년
창기 초등학교에 입학함.
1961년
안면중학교에 입학함.
1964년
충남의 명문 대전고등학교에 입학함. 고3때 늑막염으로 1년 휴학, 이때의 동기생으로 안양로 등이 있으며, 동문 중에는 선배 문학평론가 김병익, 후배 문학평론가 김사인, 이재현, 후배 시인으로 김진경, 윤재철, 김백겸 등이 있다.
1967년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함(46회).
1968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학과에 입학함. 이 무렵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6·8부정선거를 통해 3선개헌 공작을 본격화하던 시기로 이에 반대하는 야당과 재야, 그리고 젊은 고교생과 대학생들의 저항 또한 격렬했다.
학생운동으로 강제징집당했던 벗들과 함께. (좌로부터 이태복, 이상완, 채광석, 임경철)
1971년
4월 18일, 사대 동아리 문제로 동대문 경찰서에 피검돼 이틀간 조사를 받고 풀려남.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투신하였다. 이해 10월 15일, 박정권은 유신 쿠데타의 전초전으로 위수령을 발동하였다. 서울 시내 10개 대학에 완전무장한 공수단 병력 등이 학생들을 마치 전쟁포로처럼 취급하고 연행되 학생들을 제적시키거나 혹은 강제징집하였다. 위수령 발동 다음날 안면도 고향집에서 체포된 채광석은 10월 26일, 강제입영되어 최전방 강원도 원통골에서 만 31개월간 군복무를 하게 된다. 이 무렵 체포되어 입대를 같이 하게 된 동료들 중에는 이태복, 심지연, 유상덕 등이 있다.
1974년
1월 8일, 박정희정권은 긴급조치 1·2호를 발표하였는데 유신에 반대하면 징역 15년을 선고받을 수 있다는 반민주적 악법의 극치였다. 5월 30일, 채광석은 제대 후 가을학기에 복학하였으나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으로 우리사회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공포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 11월 하순 재야 민주지도자들이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하였고, 문학인 101인 선언과 동아, 조선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수호선언 등이 터져나왔다.
박정희정권의 철권통치를 상징하는 긴급조치 제 9호에 대한 언론보도 내용.
1975년
4월 10일, 서울대 농과대학 4학년 김상진이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유서로 작성하고 이어 다음날 수원의 서울농대 교정에서 「양심선언문」을 낭독한 다음 할복자살하는 등 유신반대운동이 고조되자 박정권은 5월 13일 마침내 악명높은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였다. 유신체제에 관한 어떤 형태의 반대의견이나 행동도 1년 이상의 징역에 처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5월 22일, 서울대생 1천여명은 관악캠퍼스에서 '김상진열사 장례식'을 거행한 후 긴급조치 9호의 철폐를 외치는 대규모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른바 '오둘둘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때 채광석은 유상덕 등과 사범대 시위 책임을 맡아 체포, 구속되었으며 또한 박성규, 이호웅, 유영표, 박연호, 천희상, 채만수, 정성현, 연성수, 김도연, 김정환, 장선우 등 약 60여명이 함께 구속되었으며 김근태는 수배되었다. 채광석은 '5·22사건'으로 공주교도소에서 1977년 6월 24일까지 만 2년 1개월간 옥고를 치렀는데 공주교도소 시절 시작활동에 열중, 수많은 옥중시를 썼다. 또한 이 시절, 훗날 결혼하게 되는 강정숙에게 쉴새없이 옥중연서를 보냈는데, 이 편지들은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형성사, 1981)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1978년
7월 14일, 신용협동조합 중앙연합회(이하 신협) 공제부에 입사,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디뎠다. 공주교도소에서 함께 복역한 후배 정해일 등도 이곳에서 근무하였다.
1979년
4월 7일, 그동안 사귀어온 강정숙과 이화여자대학교 중강당에서 결혼했다.
1980년
다시 복학, '서울의 봄' 이후 전두환신군부에 의해 5·17쿠데타 발생시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되어 관악경찰서 → 서울합수사 → 수방사 → 안양계엄사 등을 전전하면서 40여일간 모진 고문을 당한 후 8월 18일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81년
9월 1일, 신협홍보과장으로 임명되어 직장생활을 계속했다.
1982년
홍일선, 박승옥, 정규화, 김용택, 김정환, 황지우, 김도연, 김사인, 선경식 등과 함께 '시와 경졔'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박노해시인을 발굴했다.
1983년
2월, 김정환시인의 장편연작시 『황색예수1』(실천문학사)에 해설「김정환의 예수」를 쓰고, 3월에 창작과비평사에서 발행한 『한국문학의 현단계 2』(백낙청·염무웅 편)에 문학평론 「부끄러움과 힘의 부재」를 신인작품으로 발표하여 본젹적으로 문학평론 활동을 시작하였다. 아울러 5월에 조태일시인이 발행하던 시(詩)전문무크 『시인』제1집 '움직이는 시'에 「빈대가 전한 기쁜 소식」외 4편으로 시작활동을 개시함으로써 한국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하였다. 7월 1일, 신협의 조사통계과장에 임명되었다. 아울러 12월 전두환정권의 학운자율화조치에 의해 네 번째 복학허가를 받았으나 이를 거부, 대학졸업장을 포기했다.
1984년
3월, 민족 문화운동협의회의 창립과 동시에 실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해 가을 신협에서 의원 면직을한 후, 1980년 5월 이후 활동이 중지된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재창립 작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재창립된 이후 초대 총무간사를 맡아 '민중적 민족문학'의 독전관(督戰官)으로 이 단체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1985년 12월 풀빛 출판사에서 출간된 채광석시인의 첫시집.
1985년
이호철, 김규동, 천승세, 박태순, 이문구, 양성우 등과 함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첫 시집『밧줄을 타며』(풀빛), 사회문화론집『물길처럼 불길처럼』(청년사)를 출간했다.
이호철, 백낙청, 송기숙 등 선배 작가와 함께 한잔하다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 채광석.
1986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문화예술분과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이 무렵 풀빛출판사에서 후배 평론가 김명인과 함께 상임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풀빛 시선 등을 기획하여 김지하, 양성우, 김준태, 신경림, 문병란 시집 등을 펴냈고 그 이전 1984년 9월에는 박노해 시인의 첫 시집『노동의 새벽』을 기획, 출간하여 이른바 '민중문학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87년 6월항쟁 직후 채광석시인의 돌연한 죽음은 문단 안팎에서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1987년 7월 12일
여성단체연합 주최 민요한마당 공연관람후 귀가 도중 서울 마포구 아현동 아현초등학교 부근 차도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하였다. 향년 39세. 7월 14일, 재야 및 민주사회단체가 망라된 가운데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영안실에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주관으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족미술인협의회·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민중문화운동연합 등이 참가한 가운데 '민족시인 故채광석 민주문화인葬' 이 엄수돼 고인의 유해가 팔당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1988년
1주기에 맞춰 문학평론집 『민족문학의 흐름』(한마당)이 출간되었고, 아울러 풀빛출판사에서 채광석전집 전5권 중 제1권(시) 『산자여 따르라』, 제2권(산문) 『유형일기』가 간행되었다.
1989년
제2주기에 맞춰 채광석전집 제3권(편지) 『그대에게 못다한 사랑』, 제4권(평론1)『민중적 민족문학론』, 제5권(평론2)『찢김의 문화 만남의 문화』가 완간되었다.
1992년
7월 14일, 제5주기 추모의 밤 '그 사람, 채광석' 행사가 민족문학작가회의 청년문학인위원회·노무연·서노문협주최로 여성백인회관 강당엣 개최되었다.
1995년
9월 23일, 대전 YMCA강당에서 민족문학작가회의 주최, 대전충남민족문학인협의회 주관으로 '시인 채광석추모문학제'가 개최되었다.
1995년 9월 대전에서 개최된 시인 채광석 추모 문학제
1997년
7월 11일, 제10주기 추모문학의 밤 '채광석, 그에게 다시 묻는다' 행사가 민족문학작가회의 청년문학인위원회 주최로 대한출판문화회관 강당에서 개최되었고, 이날 「시인 채광석 시비건립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서울 출판문화회관에서 개최된 제 10주기 추모문학의 밤
2000년 7월 12일
제13주기를 맞아 「시인채광석시비건립위원회」는 광산 구중서 글씨·조각가 김운성의 제작으로 안면도 수목원 휴양림에서 시비 제막식을 갖고, 태안군청 강당에서 '채광석문학의 밤' 행사를 개최함. 이에 앞서 『태안문학』과 『흙빛문학』은 채광석시비건립 특집을 게재하였다. |
첫댓글 그날이 생각나서 숙연해집니다. 귀한 자료에 감사드립니다. 창기리 '틀무시'로 알고 있는데요?
다는 머리 복잡하여 못 읽었습니다만..... 저 보다는 8자 좋는 양반 이셨군요........ 저도 그 양반만큼의 환경이었더면....;; 에그! 말을 말자.... ㅎㅎㅎㅎㅎㅎ 좋은 자료 감사 합니다.
몰랐던 사실들이네요
창기리 양짓말 이고요 부친 성함은 채규승 창기 초등 교감선생님. 막내가 우리 친구에요 부친은 은퇴후 남면에 낙향하여 살고계심../
인터넷에 올려진 자료라 부정확 한가 보군요...정확히 결론내려 주시면 정정 하겠습니다.
정리할 필요가 있네요.. <안면발전협의회>가 발행한 자료(『푸른연대』)에 의하면.. 시인은 1948년 7월 1일 안면읍 창기리(틀무시)에서 18대. 20대 안면면장을 역임한 '고 채규송 면장'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출생.. 39년의 짧은 생을 ...
이번 기회에 정확한 자료를 기다려봅니다.
아아 맞다 제가 착각하고 동생분 이름을 송충이님 이올린 함자가 맞네요 [면장]은잘못된 정보 같네요 [교장 ]역임이 맞을거에요 그리고 양짓말이 맞을거에요...
선배님 중에 거인이 한분계셨었군요. 이게야 알게됏습니다.좋은 정보 감사 드립니다.
교감선생님이셨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