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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ckner, Symphony No. 8 in c minor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은 교향곡 5번과 함께 진입장벽을 느꼈던 작품이다.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을 듣기 전까지의 전적은 대충 이랬다. 한동안 교향곡 4번 이외의 작품을 아는 바 없다가 인발이 연주한 7번을 듣고 브루크너의 다른 작품들도 들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요훔이 지휘한 5, 6번이 커플된 음반을 장만하고 6번은 쉽게 들었는데 5번은 듣다가 좌절한 상태였다. 당시에 인터넷도 아닌 PC 통신을 달구던 작품이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이었는데 대체로 음반값이 비싸 고민하고 있었다. 우연히 레코드 가게에서 저렴하게 낙소스에서 나온 틴트너의 음반을 발견하고 집에서 틀어봤다. 커플된 교향곡 0번은 가벼웠으나 교향곡 8번은 교향곡 5번에 이어 두 번째로 좌절했다. 시간이 지나 브루크너 교향곡 5번의 2악장이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왔고 브루크너 교향곡에 판본이 다양하게 존재함을 간파했고 교향곡 3번을 보았을 때 개정판이 원판에 비해 짧고 간결해서 듣기 편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다시 요훔의 8, 9번 커플 음반을 장만해서 교향곡 8번을 처음부터 끝까지 무리없이 들어볼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이 작품이 연주 효과가 좋은 훌륭한 작품임을 깨닫고 아르농쿠르, 벨저뫼스트의 음반을 구입해서 들으면서 작품을 좋아하는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1884년 2월 바그너 협회에서 피아노 연탄으로 교향곡 7번을 공개하고 1883년부터 니키쉬와 1884년 12월 예정인 교향곡 7번의 라이프치히 초연을 준비하며 브루크너는 교향곡 8번의 작곡에 착수하게 된다. 당시에 브루크너는 빈 대학과 빈 콘서바토리의 교수직을 맡고 있어, 보통 여름방학 기간에 작곡에 몰두했는 데 교향곡 8번은 1884년 여름 방학을 맞아 착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84년 10월 1악장의 스케치를 완성했고 아다지오 악장의 작곡에 들어갔으나 12월 교향곡 7번의 초연 준비로 잠시 미뤄 두었다가 2월 아다지오의 스케치까지 완성하게 된다. 이후에 1885년 8월에 네 악장의 스케치를 완성한다. 이후에 1885년 10월 스케르초의 오케스트레이션을 시작으로 1887년 4월 피날레의 오케스트레이션을 일단 완료한 후 수정을 거쳐 1887년 8월 초고를 완성하게 된다.
브루크너는 1887년 8월에 교향곡 8번을 완성한 후 10월에 교향곡 7번의 뮌헨 전곡 연주를 지휘한 바 있었던 헤르만 레비에게 교향곡 8번의 총보를 보여주었다. 브루크너는 1885년 레비가 공연한 자신의 교향곡 7번 연주를 듣고 크게 감명받아 8번 교향곡이 완성되면 레비에게 초연을 의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작품을 검토한 레비는 초연을 거절하며 많은 개정을 제안하여 작품에 자신감이 넘쳤던 브루크너는 극단적인 생각을 할만큼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정신을 추스르고 브루크너는 8번 교향곡의 개정 작업과 더불어 전작들까지 대대적인 수정에 돌입하게 된다. 이를 2차 브루크너 개정 파동이라고도 부른다. 전작들의 개정작업 때문에 정작 8번 교향곡의 개정작업은 지연되어 실질적으로 1889년에야 이루어졌으며 1890년 최종적으로 완료되었다. 브루크너는 교향곡 7번의 성공으로 작곡가로서의 인지도를 확보하였고 오스트리아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헌정되어 황제가 인쇄 비용을 부담해 주게 된다.
라이프치히에서 교향곡 7번을 초연하여 좋은 결과를 얻었던 브루크너는 빈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교향곡 8번의 초연을 알아보았다. 처음에는 헤르만 레비에게 의뢰하여 뮌헨에서 초연하려 하였으나 레비가 초고의 초연을 거절한 바 있고 젊은 지휘자였던 니키쉬가 교향곡 7번을 성공적으로 초연한 것에서도 영향을 받아 1890년 완성한 수정본은 젊은 지휘자였던 펠릭스 바인가르트너에게 맡겨 보았다. 그러나 바인가르트너는 이 작품의 연주에 어려움을 느껴 초연 일정을 지연시켰고, 브루크너도 바인가르트너의 능력을 의심하게 되었다. 결국 이 작품은 1892년 12월 한스 리히터가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해 초연되었다. 초연에 부담을 느꼈던 빈에서 초연이 되었지만 공연은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작곡 과정에서 이야기했듯이 이 작품은 판본과의 전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완전한 자필 악보으로 출반된 판본은 1887년판과 1890년판 두 가지가 있으며, 두 가지 판본 모두 브루크너 사후 노박이 출판하였다. 이 외에 샬크 등 제자들이 주도하여 수정되어 1892년에 최초로 출판된 1892년판 (샬크판), 로베르트 하스가 1890년판을 바탕으로 제자들의 압력 때문에 삭제되었다고 판단한 부분을 복원한 하스판이 있다. 완성된 판본 이외에도 브루크너의 대개의 작품과 같이 스케치들도 많이 존재한다.
1887년 판본 (초고)
이 판본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브루크너가 완성한 판본이다. 오랜동안 연주되지 않고 묻혀 있었다. 레오폴트 노바크가 1972년 이 판본을 출판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에 개정된 1890년 판본과는 큰 차이가 있다. 1, 3악장은 작품의 전개가 크게 달라졌으며, 2악장의 트리오는 거의 완전히 새로 쓰여졌다. 4악장이 그나마 원래의 형태와 유사한 편이지만 적지 않은 부분들이 삭제되었다. 2관편성으로 되어 있고 1890 판본에서 3관편성으로 확대되었다.
1972년 노박이 출판한 이후에도 이 판본은 상대적으로 자주 연주되지는 않는다. 1890년 판본이 상대적으로 매우 우수하기 때문에 현재도 대부분 1890년 판본이나 이 판본을 기반으로 한 하스판이 연주되고 있다. 음반으로는 틴트너, 인발의 음반이 이 판본으로 연주되었다.
1890년 판본 (제2고)
1887년에 완성된 초고를 본 헤르만 레비가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자 브루크너는 철저한 개정작업에 착수하여 3년이 지난 1890년 개정을 완료하였다. 1887년 판본과는 차이가 크다. 데릭 쿡과 같은 학자들은 1890년판이 브루크너가 샬크와 같은 동료들에게 부담을 받아 개작한 것이라고 본다. 쿡은 이를 심지어 "브루크너-샬크판"이라고 부른다. 하스 또한 개정 과정에서 제자들이 브루크너에게 여러 부분에서 삭제할 것을 요구한 외압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이유로 하스는 이 교향곡의 원전판을 편찬할 때 1890년 판본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1887년 판본에서 삭제된 부분 중 일부를 다시 복원하였다. 반면 노박은, 1890년 판본의 자필 악보에서 브루크너 이외의 필기체가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브루크너의 친구들과 동료 작곡가들의 증언에 따르면 브루크너는 외부인의 간섭을 극도로 꺼려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노박은 1890년에 개정이 완료된 1890년 자필악보를 그대로 편찬하여 1955년에 출판하였다.
1892년 판본 (개정판, 샬크판)
이 판본은 브루크너가 직접 완성한 1890년 판본(제2고)에 제자인 샬크와 오버라이트너가 약간의 수정을 가한 판본이다. 브루크너 생전인 1892년에 출판되었으며, 1944년 하스판이 출판되기 전까지 브루크너 교향곡 제8번의 유일한 악보였다. 이 판본의 편찬을 주도한 인물인 샬크의 이름을 따서 '샬크판'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지휘자들의 선택을 별로 받고 있지는 않고 있다.
1악장 (Allegro moderato)
현악기의 트레몰로로 시작되어, 저음현으로 어두운 분위기의 제1주제가 제시된다. 제1주제의 리듬 및 동기는 전곡을 지배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리듬이 어딘지 교향곡 4번을 연상시키는 것 같다. 제2주제는 상승음형으로 제시되는데 2+3의 브루크너 리듬을 갖고 있어서 교향곡 4번 1악장 1주제를 연상시킨다. 2주제가 여러 조성으로 전조되고 변형되어 제시되다가 오보에의 경과구가 흐르고 현악기의 피치카토를 배경으로 금관의 3주제가 나타난다. 바쁜 움직임 뒤에 강렬한 하강 음형이 등장하여 긴장감을 조성하다가 화려한 합주로 제시부가 마무리된다. 재현부에 1악장의 클라이맥스가 구축되어 있는 데 브루크너 자신은 ‘죽음의 예고’라고 했다고 한다. 클라이맥스를 지나 1주제가 스러지는 형태로 제1악장이 끝났고 브루크너는 이 마무리를 ‘체념/죽음의 시간’이라고 했다고 한다.
2악장 Scherzo (Allegro moderato)
베토벤의 교향곡 9번처럼 브루크너는 교향곡 8번과 9번에서 스케르초를 2악장에 배치했다. 최면적이고 저음현의 중독성있는 멜로디가 교향곡 7번의 스케르초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위로 흐르는 바이올린의 선율은 e단조 미사의 크레도에서 따왔다고 한다. 브루크너는 교향곡 8번의 스케르초를 완성한 후에 독일의 미헬이라고 했다고 한다. 독일의 미헬(Deutscher Michel)은 미국의 엉클 샘이나 영국의 존 불처럼 독일을 대표하는 캐릭터로 보통 고깔 모자를 쓰고 졸고 있는 아저씨 내지는 소년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이네는 러시아는 땅을 가졌고 영국은 바다를 가졌고 독일은 꿈꿀 수 있는 하늘을 가졌다고 했다고 하는 데 브루크너는 미헬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자 했던 것 같다. 세상의 영화는 다른 사람의 몫이지만 본인은 악보 속에 자신의 세계를 마음껏 펼쳐 놓았다고 믿는. 2악장은 판본을 구별할 수 있게 해주는 악장인데 스케르초는 거의 같지만 트리오가 다르다. 1890년 판의 트리오에는 하프가 들어가면서 3악장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변했다. 트리오에서 브루크너는 미하엘이 꿈꾸는 시골을 표현했다고 한다.
3악장 Adagio (Feierlich langsam, doch nicht schleppend)
독일의 미헬이 꿈꾸는 풍경은 3악장에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것일지 모르겠다. 개정판에서 브루크너는 2악장의 트리오를 3악장과 조금 더 비슷한 분위기로 만들기도 했다. 본인은 시골이라고 했지만 그려지는 이미지가 포근하고 전원적이라기 보다는 전설 내지는 환타지 문학이 연상되는 신비로운 분위기에 가까운 것 같다. 하프의 아르페지오 위로 펼쳐지는 선율 때문인지 이 악장을 듣고 있으면 바그너가 로엔그린에서 그려낸 호수 내지는 반지의 제왕 속의 샤이어 같은 그림을 그리게 된다. 물론 이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처음에는 길었고 끝까지 듣기 힘들었다. 전체적으로 론도 풍의 구조를 갖고 있지만 강렬한 클라이맥스를 구축해 놓아서 좋은 연주를 들으면 나무와 숲의 아름다움을 모두 느끼게 해 준다.
4악장 Finale (feierlich, nicht schnell)
3악장이 조용히 끝나면 ‘자, 가자!’라는 말을 속으로 되뇌며 팀파니의 강렬한 비트에 얹혀진 트럼펫의 팡파르를 기대하게 된다. 브루크너는 이 부분을 카자흐 기병 내지는 러시아 군대라고 불렀다고 한다. 팡파르와 함께 금관의 강렬한 1주제가 나오고 슬픈 노래를 하는 듯이 서정적인 2주제가 나온다. 3주제는 살짝 무표정한 바로크적인 느낌의 행진곡 분위기를 갖는다. 전개부에서 금관이 1악장 1주제를 회상하고 쉼표를 거쳐 코다로 들어간다. 혼으로 1주제를 다시 연주하고 2악장의 주제가 등장했다가 1악장의 주제가 다시 등장하며 클라이맥스를 구축하고 모든 악기가 1악장의 하강 동기를 연주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음반 감상)
뵘/빈필/DG (하스)
뵘이 지휘한 브루크너를 들을 때 공통적으로 느끼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바이올린의 트레몰로를 잘 살려서 여러 부분에서 좋은 효과를 내고있는 것 같다. 템포나 리듬에서 특별한 접근을 별로 시도하지 않아서 그런지 유독 트레몰로를 이용하여 조였다 풀었다 하는 느낌을 만드는 것이 돋보이는 듯 하다. 1악장은 트레몰로를 바탕으로 만들어내는 긴장감이 선입견 때문인지 뵘이 지휘했던 브루크너의 교향곡 4번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2악장과 3악장인데 2악장의 스케르초는 꿈꾸는 미하엘보다는 독일의 야인 같았다. 절도있고 깔끔하면서도 트레몰로가 묻히지 않는 밸런스를 잡아 팽팽한 긴장감을 더했다. 3악장은 길어서 나무와 숲을 둘 다 보여주기 어려울 수 있는데 뵘은 누구보다도 잘 해서 보여주는 듯 했다. 하프의 아르페지오가 펼쳐질 때는 바그너의 로엔그린의 한 장면 같았고 부드러운 혼의 멜로디는 반지의 제왕의 엔딩에 어울릴 것 같기도 했는데 전체적으로 흐르는 애절한 분위기 속에서 클라이맥스도 튼튼하게 구축되어 긴 악장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지도 놓치지 않게 해 주었다. 4악장은 전체적으로 매끈했다. 단, 피날레 전에 템포를 살짝 떨어 뜨렸다가 가속시키는 접근을 했는데 그렇게 좋은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
카라얀/빈필/DG (하스)
만년의 카라얀이 빈필과 녹음한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은 쥴리니의 연주와 함께 브루크너 교향곡 8번에서 가장 많이 명연으로 거론되는 연주인 것 같다. 베를린필과의 연주에 비해 브루크너와 조금 더 어울리는 악단과 함께 더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라는 평이 많다. 1악장에서 바이올린의 트레몰로가 살짝 뭉쳐지면서 잘 드러나지 않게 연주되었지만 비슷한 밸런스의 시노폴리와 달리 신기하게 몽환적인 분위기는 느껴졌다. 이런 부분이 카라얀의 매직일지 모르겠다. 카리스마 있으면서도 긴장을 주었다 풀었다 하는 흐름이 훌륭하다. 2악장은 넉넉한 템포로 연주했는데 독일의 미헬 주제를 조금 부드럽게 만든 것 같다. 레코드포럼에서 이명재 님은 정리되지 않아 어색하게 들린다고 하셨는데 내가 느끼기에는 메인 멜로디는 레가토로 연주하고 에코에 분명한 템포를 실은 게 좀 어색하게 들렸다. 반대로 해야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스케르초의 넉넉한 템포는 쥴리니와 템포는 비슷한데 한음 한음 힘을 실어 강렬한 인상을 남긴 쥴리니에게 한 표를 주고 싶다. 3악장은 아름다운 흐름을 뽑아내는 카라얀의 장점이 잘 살았고 중간에 나오는 솔로악기 연주도 인상깊었다. 1, 2 악장은 쥴리니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4악장은 카라얀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복잡한 악장을 잘 정리했고 적절히 잘 터뜨려주고 코다도 멋지게 마무리했다.
슈리히트/빈필/EMI
많은 분들이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의 명연으로 추천하는 음반이다. 좋게 말하면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다고 할 수 있고 나쁘게 말하면 좀 건조한데 1963년도 녹음이라 소리가 조금 아쉬운 부분이 많다. 담백한 해석은 악단의 소리와 녹음이 뒷받침되어야 빛을 발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좀 아쉬웠다. 살짝 빠른 진행을 하는 1악장에서 트럼펫이 피곤한 음색이 나오면서 명연의 빛이 바라는 것 같았다. 2악장 스케르초는 트럼펫 소리를 조금 줄이면서 현이 분주한 움직임을 보여주어서 박진감있게 느껴졌고 트리오의 표정도 풍부했다. 3악장은 주요 멜로디 라인을 부각시키는 진행을 보여 긴 음악을 집중해서 들을 수 있게 해 준다. 예쁘게 들리지만 포장 속에 숨겨진 뭔가를 못 본 것 같은 아쉬움이 느껴졌다. 4악장의 도입부는 스케르초처럼 박진감있게 연출되었다. 이 음반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모든 것을 쏟아붇는 듯한 피날레일 것 같은데 마지막 잔향까지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요훔/드레스덴/EMI
요훔은 복잡한 브루크너를 명료하게 보여줄 때가 많은 데 8번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1악장은 2+3의 브루크너 리듬이 강조된 때문인지 유독 요훔의 연주만 유명한 4번의 1악장의 이미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스케르초는 활기있게 연주했고 진행되면서 음이 증폭되는 효과를 잘 살린 것 같았다. 금관의 소리가 피곤하게 들리는 점은 좀 아쉬웠다. 트리오는 스케르초와의 대비감은 좋았지만 조금 늘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3악장은 전체적으로 담담했는데 초반에 하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부분이 멋졌다. 4악장은 신나게 시작해서 템포를 살짝 떨어뜨리며 장대한 피날레를 만들었는데 템포 설정은 자연스럽고 훌륭했는데 음장감이 깊지 못하고 금관 소리가 피곤하게 들리는 녹음이 아쉬웠다.
아르농쿠르/베를린필/TELDEC (1890 노박)
1악장이 시작되고 서주를 연주하는 베를린필 현의 소리가 날렵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살짝 가벼운 톤이라 브루크너 후기 작품과 안 어울릴 수 있는데 박자를 견고하게 잡고 3주제를 중심으로 금관이 잘 울려 주어서 역시 베를린필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오히려 8번의 무게감을 좀 줄여주었고 대위 구조가 잘 보이면서도 깔끔하고 쉽게 풀어가서 음악에 몰입할 수 있게 해 준다. ‘죽음의 예고’라고 불리우는 클라이맥스도 그로테스크하면서도 고급스럽게 들렸다. 스케르초의 독일의 미헬 주제는 살짝 빠르게 최면적인 느낌이 들었고 쉼표에서 템포를 살짝 잡아서 폭풍전야같은 긴장감이 돌게 했다. 2악장의 트리오와 3악장은 담담한 느낌이다. 3악장은 클라이맥스가 좋은 소리로 잘 구축이 되어 나무에 힘을 쏟지 않았지만 숲은 잘 보이는 느낌이다. 3악장까지는 개성보다는 안정감이 느껴지는 내지는 베를린필의 깔끔하면서도 표현력있는 소리가 좋은 느낌이었다면 4악장은 개성도 좀 느껴지는 해석을 들려주었다. 부분적으로 복잡하게 들리기도 했지만 터뜨려주어야 하는 부분에서 잘 터뜨려주어서 곡을 잘 살려주는 것 같았다.
쥴리니/빈필/DG (1890 노박)
레코드포럼에서 이명재 님도 우선적으로 추천을 하셨고 많은 애호가들로부터 가장 널리 추천되는 음반인데 1악장을 처음 들어본 순간 명불허전이었다. 확 이거다 싶을 정도로 풍성한 사운드로 유장한 흐름을 만들어 내는데 게르만 출신의 브루크너 전문가들을 놔두고 쥴리니를 꼽을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듣고 있으면 너무 감정을 들었다 놓았다 해서 조금 피곤해질 수 있는게 단점이라면 단점일 것 같다. 그냥 틀어놓고 다른 일 할 때는 다른 음반을 고르게 될 것 같은 정도일까? 격정적인데 억지스럽지 않으니 거부하기 힘든 연주가 되는 것 같다. 한음 한음 똑똑하게 연주하는 2악장의 스케르초도 느리다기보다는 당당하고 묵직하다는 쪽으로 판단이 기울게 된다. 트리오도 예쁘다기보다는 어딘지 처연한 느낌으로 가슴을 짓누른다. 3악장은 하프 위로 펼쳐지는 현의 멜로디 등이 반지의 제왕 같은 환타지 영화가 떠오를 것 같이 유장하고 서정적인 흐름을 보여주면서도 클라이맥스에 확실하게 터뜨려주어 나무와 숲을 모두 잘 살리고 있었다. 이명재 님은 3악장에서 템포의 변화가 미묘해서 재미를 주고 있다고 하시는데 그 부분은 잘 모르겠다. 4악장은 터뜨려줄 부분에서 제대로 터뜨려 주기는 하는데 중간중간 늘어지는 느낌을 받기도 했고 코다는 살짝 아쉽기도 했다. 4악장만 아니었으면 주저없이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의 결정반이 될 수 있었는데 4악장이 여지를 남기게 만드는 것 같다.
벨저뫼스트/구스타프 말러 유겐트/EMI
기대 70%, 걱정 30% 정도로 음반을 구입했는데 벨저뫼스트의 역량에 기대가 되었으나 브루크너 교향곡 8번처럼 악단이 중요한 작품에서 혹시나 악단 소리의 매력이 부족하면 듣고나서 아쉬울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예전에 융에도이치심포니의 브루크너 8번을 꽤 좋은 인상으로 들은 적이 있어 그래도 기대가 더 컸다. 결과적으로는 기대 이상이었다. 1악장이 시작되고 붓점을 먹인 1주제가 꽤 신선하게 귀에 들어온다. 2주제의 2+3리듬이 강조되지는 않았는데 대신 셈여림으로 표정을 만들어냈다. 코다 직전의 클라이맥스는 강렬하면서도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2악장은 살짝 빠른 템포였는데 독일의 미헬 주제가 또렷한 게 인상적이었다. 많은 명연들이 1, 2악장이 정말 훌륭한데 3, 4악장으로 가면서 어딘지 아쉬운 경우가 있는데 벨저뫼스트의 연주는 3, 4악장으로 가면서 빛을 발하는 듯 했다. 3악장의 하프 위로 현이 펼쳐지는 부분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잘 살렸고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3악장의 흐름을 흥미롭게 끌고 나갔다. 클라이맥스가 강력했는데 잘못하면 부자연스러울 수 있는데 벨저뫼스트는 강력한 클라이맥스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연출했다. 4악장 도입부는 살짝 빠르고 가볍게 느껴졌으나 전체적으로 복잡하거나 지루하지 않게 만들었고 4악장의 코다를 끝까지 집중력을 흩트리지 않고 잘 이어나가 감동을 전해 주었다. 1악장을 들었을 때의 카리스마는 전통의 명연과 비교하면 아쉽고 금관의 고급스러운 소리가 아쉬울지 몰라도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을 앉은 자리에서 다 들을 수 있는 80분이 주어진다면 이 음반을 뽑게 되지 않을까 싶다.
샤이/콘서트헤보/DECCA
1악장이 시작되면서 나오는 약간 어두운 분위기에 중후하고 웅장한 음색이 개인적으로는 좋은 인상을 주었다. 풍성한 울림을 만들어 내지만 듣는 이에 따라 브루크너 리듬이라고 하는 2+3 리듬이 탄력있게 들리지 않아 맥빠진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브루크너가 죽음의 예고라고 이야기했던 클라이맥스의 팀파니 위에서 울려퍼지는 금관의 소리가 인상적이라 특별히 힘을 준 것 같지 않아도 그로테스크하게 들렸다. 2악장은 스케르초의 리듬감은 아쉬울 수 있으나 악기간 밸런스를 잘 잡아 고음현이 잘 살려진 상태에서 저음현이나 금관이 독일의 미헬 주제를 연주하여 최면적이고 중독성있는 느낌을 잘 잡아낸 것 같다. 다른 연주에서는 잘 들리지 않는 스케르초가 전개되면서 밑으로 깔리는 독일의 미헬 주제의 그림자까지도 잘 들을 수 있었다. 트리오는 살짝 빠르고 무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3악장의 모습과 함께 4악장의 모습도 약간 팝업이 되는 느낌을 받았다. 3악장은 무심한 듯 살짝 빠른 편이어서 심금을 울리지 못하는 면이 있는데 악단의 소리와 녹음이 좋고 웅장한 사운드로 클라이맥스를 잘 구축해서 무마하고 있는 것 같다. 중간에 솔로 악기의 소리가 다른 연주에 비해 도드라지게 잘 들리는데 실내악적인 느낌을 잘 살려서 곡이 입체적으로 들리게 한다고 좋은 평을 해 줄 수 있는 부분도 있었지만 뭔가 조화를 깨뜨리고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받는 대목도 있었다. 4악장은 음장감이 좋은 녹음의 덕을 본 것 같고 현이 묻히지 않는 밸런스를 들려준 클라이맥스에서는 테데움이 살짝 연상되기도 했다. 2주제에서는 콘서트헤보 현악군의 표현력이 좋아 감동을 전해 주었다. 코다에서는 템포를 살짝 떨어뜨리고 음을 부풀리며 마지막 음을 길게 가져갔는데 교향곡 7번에서는 비슷한 접근이 살짝 부자연스러웠지만 교향곡 8번에서는 장대하고 멋지다는 쪽으로 판단이 흐르게 된다.
시노폴리/드레스덴/DG
1악장이 시작되면 바이올린의 트레몰로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트레몰로가 조금 묻히고 뭉쳐서 효과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 2주제는 서정적으로 연주하면서 2+3 리듬이 분명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교향곡 4번 1악장이 살짝 팝업되는 느낌을 받았다. 중후한 음색과 금관의 폭발력이 1악장 클라이맥스에서는 빛을 발했다. 2악장의 독일의 미헬 주제는 다소 빠르게 연주했고 음을 이어서 연주해서 스케르초의 리듬감이 잘 살지는 않는 것 같았다. 1악장과는 다소 다른 밸런스로 금관 위로 흐르는 바이올린이 잘 들리는 밸런스를 잡았는데 독일의 미헬이 꿈꾸는 환상의 세계를 표현한 것 같았다. 트리오는 처음에는 건조하고 딱딱하게 연주하다가 점점 서정적이고 촉촉하게 변해갔고 후반에는 하프의 소리가 잘 들어오는 밸런스가 특이했다. 2악장에서 강조되었던 하프는 오히려 3악장에서는 살짝 묻히게 들렸는데 무언가 의도를 갖고 악장마다 악기 밸런스를 조금 다르게 잡고 있는 듯 했다. 2악장이 조금 빠르게 느껴져서 그런지 3악장은 약간 여유있고 서정적으로 진행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4악장은 나쁘지는 않았으나 강력한 한 방을 기대했던 것에 비하면 좀 아쉬웠다.
인발/프랑크푸르트RSO/TELDEC (1887 초고)
개정판에 익숙해진 다음에 이 음반을 접해서 그런지 판본의 신기함이 느껴졌다. 1악장이 약간 복잡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개정판에 비해 중간에 솔로 악기가 많이 등장하는 것 같았고 결정적으로 코다 부분이 많이 달라서 놀라게 했다. 죽음의 예고라는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초고에서는 덜했던 것 같다. 강렬하기는 하지만 차갑고 어두운 느낌은 조금 덜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2악장의 트리오였는데 개정판에서 들을 수 없었던 플륫의 상큼 발랄한 멜로디가 등장해서 놀라웠다. 판본의 신기함을 잠시 접어두고 인발의 연주에 주목하면 깔끔한 느낌이 들었고 스케르초 부분이 살짝 빠르면서 리드미컬했고 대위법적으로 전개되면서 코다로 향해가는 모습이 매력있게 들렸다. 3악장은 살짝 빨라서 유장한 느낌이 좀 부족한 것 같기는 했다. 이런 흐름에서 바이올린의 부선율이 강조되어 들려서 몽환적 환상에 빠져들고 싶은 데 자꾸 깨우는 것 같았다. 3악장 클라이맥스에서 1악장 코다, 2악장 트리오에 이어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판본의 특이함과 더불어 인발의 연주가 어울려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의 3악장이 내가 알고 있던 그림에 비해서는 대단히 화려했다. 4악장은 조금 가볍게 들렸고 행진 부분은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기까지 했다. 판본의 문제인 것 같은데 4악장 코다가 뭔가 아쉽게 끝난다. 결론적으로 8번 초판의 특이함을 돋보이게 해주는 연주를 들려주고 9번 교향곡의 4악장 버전이 커플되어 있는 걸 감안하면 브루크너 수집가에게는 놓칠 수 없는 아이템인 것 같다.
틴트너/NSOI/Naxos (1887 노박)
틴트너의 브루크너 사이클에서 교향곡 8번은 국립 아일랜드 교향악단과 함께 했다. 처음 들었을 때는 길고 난해해서 끝까지 듣기 힘든 음반이었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다른 브루크너 8번을 많이 접하고 들으니 일단 판본의 특이함이 가장 먼저 귀에 들어온다. 하스판의 열렬한 지지자였다고 하는데 왜 노박 초판을 선택했을까 의문이 들어 그가 쓴 해설을 읽어 봤다. 1887과 1890 버전을 베토벤의 레오노레와 피델리오 관계와 비교하고 있다. 친한 친구 때문에 개작을 했고 좋아진 부분도 있지만 레오노레는 피날레에서 브루크너 교향곡 8번 1887버전은 스케르초의 트리오에서 너무 아름다운 부분이 잘려 나가기도 했다는 것이다. 1악장부터 우리가 듣던 판본과 다르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고 음악이 다른 것과 함께 다른 지휘자에 비해 밸런스가 특이하다고 느낀 부분도 꽤 있었다. 현악 부선율을 강조하거나 다른 녹음에서는 또렷이 들리는 팀파니가 안 들리거나 하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일부분은 신선한 시도라 느껴지기도 했지만 일부분은 금관이 가끔 미스톤에 가까운 소리를 내서 그런지 밸런스가 깨진 것 같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판본이 길기도 하지만 총연주시간 90분 가까이 되는 느린 연주일 수 있는데 스케르초는 중간이거나 중간보다 살짝 빠른 정도의 느낌이었다. 조성이 변화하고 악기가 변화하면서 등장하는 독일의 미헬 주제를 다채롭게 표현했고 트리오는 판본의 특이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다지오 악장은 클라이맥스에서 심벌즈는 화려했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조용하게 지나간다는 인상을 받았다. 4악장 1주제의 포효하는 듯한 연주는 멋졌지만 총주에서 소리가 조금 찢어지는 것 같고 가끔 도드라지는 금관이 소리가 고급스럽지 않아 나쁜 밸런스처럼 들려서 좀 아쉬웠다. 피날레는 에너지를 쏟아 부으며 템포를 살짝 떨어뜨려가며 장대하게 마무리하여 같은 판본으로 연주한 인발처럼 허전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음반이 많지 않은 교향곡 0번과 커플되어 있고 초판을 사용한 점도 특이하여 수집가 입장에서는 갖추어야 하겠지만 연주와 녹음은 두 작품 모두 조금 아쉬운 것 같다.
반베이눔/콘서트헤보/필립스 (하스)
오래된 녹음임에도 불구하고 교항곡 9번 연주를 레코드 포럼에서 베스트 음반으로 선택했었고 5, 7, 8, 9번이 박스로 매우 저렴하게 (내 기억이 맞다면 15유로 정도) 나와 있어서 9번 하나만 결정반이라도 본전은 뽑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집어 들었다. 당시에 콘서트헤보가 드림팀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멤버 구성이 좋았다고 해서 나머지 음반들도 좋을 것이라 기대했다. 군더더기 없이 어떻게 들으면 조금 건조하게 살짝 빠른 템포로 연주해서 슈리히트의 연주와 인상이 좀 비슷했다. 슈리히트의 EMI 반과 비교했을 때 이 음반은 1955년 녹음한 모노 음반 치고는 음질이 좋았다. 1악장이 시작되고 듣다 보면 전체적으로 너무 감정을 빼 버린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클라이맥스와 이후로 이어지는 코다는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스케르초는 어떻게 들으면 러시아 음악처럼 들릴만큼 빠르고 강렬했다. 트리오는 예쁘고 환상적으로 표현해서 모노 녹음임에도 불구하고 빠져들게 만들었다. 3악장은 서정적인 느낌은 조금 약했지만 하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부분은 환상적으로 잘 묘사했고 4악장은 빠른 템포를 바탕으로 극적인 부분을 잘 살렸다. 4악장 2주제에서 너무 늘어뜨리지 않아서 곡이 더 명료하게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오래된 모노 녹음이라 금관이 피곤한 소리를 내는 건 좀 아쉽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만큼 괜찮은 소리가 나오게 한 현대과학의 승리에도 놀라게 된다. 브루크너 교향곡 8번처럼 거대하고 입체적인 작품에서 녹음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아쉬운 게 사실이나 전체적으로 살짝 빠르고 깔끔하지만 포인트를 잘 살려서 곡이 주는 충격을 잘 전달한 연주가 좀처럼 만나기 어려워 누군가 이렇게 연주해 주기를 기대해 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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