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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은 정벌(征伐)하고, 서쪽은 토벌(討伐)【東 征 西 討】
○ 재야사학(在野史學)! 사실(事實) 재야사학(在野史學)이란 말은 우리나라에만 존재(存在)하는 특이(特異)한 현상(現狀)일 것이다.
이 재야사학(在野史學)이란 곳에도 여러 갈래의 주장(主張)이 난무(亂舞)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조선(朝鮮)”의 비극(悲劇)적 종말(終末)의 결과(結果)이리라!
삼국(三國)은 대륙(大陸)에 있었으나, 고려(高麗)는 반도(半島)에 있었다, 아니다 대륙(大陸)에 실존(實存)했다 등, 여러 주장(主張)등을 내 놓고 설전(舌戰)을 벌이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본인(本人)의 일괄(一括)된 주장(主張)은
『본시(本是) “조선(朝鮮)”은 대륙(大陸)에 있었던 왕조(王朝)를 말하는 것이며, 환웅(桓雄)천황(天皇)으로부터 단군(檀君)으로 이어지고, 기자(箕子), 삼한(三韓), 삼국(三國), 고려(高麗)로 이어진 왕조(王朝)로 근대(近代)의 “조선왕조(朝鮮王朝)”까지를 말하는 것이며, “혈통(血統)으로 이어진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왕조(王朝)”였다.』고 하는 것이다.
그 중간(中間)의 많은 나라들은『천자 국(天子國) 조선(朝鮮) 조정(朝廷)의 통치(統治)를 받은 제후국(諸侯國)이었다.』는 것이 핵심(核心)적 논리(論理)다. 이러한 논리(論理)의 전개(展開)는 오직 “원전(原典)”에 의한 것이며, 『그것은 지형지리【地形地理 : 지세(地勢). 특이지형(特異地形). 기후(氣候)등과 같은 지구(地球)의 환경(環境)을 총칭(總稱)한다.】, 방향【方向 : 동서남북(東西南北)등】과 깊은 연관(聯關)관계(關係)를 갖고 있으며, 인간(人間)은 환경(環境)을 무시한 삶이란 존재(存在)할 수 없다.【인간(人間)은 환경(環境)에 적응(適應)하며, 변화(變化)되어 왔다.】』는 것과 맥(脈)을 같이 한다.
막무가내【莫無可奈 :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로 말하는, 『하늘에서 떨어진 인간(人間)이라든가, 깊은 바다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人間)이라든가, 늑대나 이리를 조상(祖上)으로 두었다, 곰의 자식(子息)이라는 등의 스스로를 모멸(侮蔑)하는 비참(悲慘)한 짓은 스스로를 학대(虐待)하는 것이다.』이런 일은 이제 당연(當然)히 중단(中斷)되어야 하는 것이다.
특정(特定) 종교(宗敎)단체(團體)에서 ‘우상(偶像)’이라는 미명하(美名下)에 ‘단군(檀君) 상’을 없애려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기 한이 없는 사상(思想)이나 행동(行動)은 스스로를 학대(虐待)는 것이다.” 이 점을 간과(看過)해서는 안 된다.
종교(宗敎)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며, 인간(人間)보다 종교(宗敎)가 우선(優先)일 순 없는 것이다.
○ “조선(朝鮮)”은 『대륙(大陸)의 주인(主人)이었다.』고 주장하는 본인(本人)의 논리(論理) 고증(考證)은 계속될 것이며, 그 때마다 “한 개의 증거(證據) 또는 고증(考證)”이 늘어나는 것이다. 아래를 보면서, 옛 조선(朝鮮)을 잠시나마 회상(回想)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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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정서토【東征西討 : 동쪽은 정벌(征伐)하고, 서쪽은 토벌(討伐)한다】란 무엇인가? 이러한 말은, 반도(半島)와 같은 좁은 땅 안에서, 인용(引用)한다거나, 사용(使用)하기에 불가능(不可能)한 말이다. 이러한 말이 가능(可能)한 지리적(地理的) 형편(形便)은, 동(東)쪽과 서(西)쪽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사용(使用) 또는 인용(引用)할 수 있는 말이다.
고려(高麗) 말기(末期)의 대신(大臣)이었던, 『益 齋 亂 稿 (익 재 난 고)이 제현(李齊賢) 1287년(고려 충렬왕 13) - 1367년(공민왕 16) 』의 문집(文集)속에 『修築京城. 訪 大 臣 時 上 書. : 서울 성을 고쳐 쌓으려고 대신들 중에 나이 많은 이들을 찾아 가서 물으니, 글을 올려 아뢰기를, 【시중(侍中)으로 치사한 이 제현(李齊賢)이 말했다는 것임】
《我太祖東征西討.統三爲一之後.七年而薨.用瘡痍之民.起土木之役.所不忍也.故不城松京.非不爲也.勢不可也.至顯王初.契丹躪躒京邑.燒毀宮室.當時若有城郭之固.契丹未必躪躒燒毀若此其甚且易也.顯王二十年.始命李可道.築開京城郭.厥後金山王子引兵而來.西海,忠淸道,沙平津北.無處不至.不得入京都.余古車羅大屯兵黃橋.又不能入京都.以有城郭也.城郭之當修.無智愚皆知之矣.旣定此議.雖有陰陽忌諱.確然不改.然後可就也. : 우리 태조【太祖 :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말한다.】가, 동(東)쪽을 정벌(征伐)하고 서(西)쪽을 토벌(討伐)하여, 삼한(三韓)을 통일한 이후, 7년 만에 흉하였다. 그때 전쟁(戰爭)으로 상처 입은 백성(百姓)들을 시켜, 토목(土木)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할 일이라, 송경(松京)에 성을 쌓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형편 때문에 불가능하였다. 현종(顯宗) 초에 이르러, 거란(契丹)이 서울(京邑)을 짓밟고, 궁실에 불 지르며 파괴하였는데, 당시에 성곽이 견고하였던들, 거란(契丹)이 이토록 쉽게 짓밟고 불 지르고 유린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현종(顯宗) 20년, 비로소 이가도(李 可 道)에게 명해서 서울에 성곽을 쌓게 하였다. 그 이후 금산왕자(金山王子)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서해도(西海 道)와 충청도(忠淸道)와 사평 진(沙平津) 북쪽 등을 침략하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서울에는 들어오지 못하였고, 또 ‘여 고 차라대(余 古 車 羅 大)’가 황교(黃 橋)에 둔병(屯兵)하였지만, 서울에는 들어오지 못하였는데, 이는 성곽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즉 성곽을 고쳐 쌓아야 한다는 것은, 지혜 있는 자와 어리석은 자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알고 있는 일이다. 이 논의가 이미 정해졌으니, 음양가의 의논에 꺼리는 것이 있더라도, 확고하게 논의를 변경하지 않아야,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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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我 太 祖 東 征 西 討. 統 三 爲 一 之 後. 七 年 而 薨 : 우리나라의 태조【太祖 : 고려(高麗)를 건국(建國)한 왕건(王建)을 말함】가 동쪽은 정벌하고, 서쪽은 토벌하여 삼한을 통일하였는데, 7년 후에 죽었다.》
반도(半島)의 지형지리(地形地理)를 보면, 동쪽과 서쪽간은 짧고, 남북(南北)은 길다. 따라서 동서(東西)간에 어떤 별도(別途)의 나라가 존재(存在)할 수 있는 여건(與件)이 되지 못하며, 반란(叛亂)을 일으킨 조그만 집단(集團)은 존재(存在)할 수 있다. 따라서 동쪽의 어떤 무리들을 정벌(征伐)했다는 것은 그런대로 이해(理解)할 수 있다. 그러나 서쪽을 토벌(討伐)했다는 말은, 바다를 토벌(討伐)했다는 말과 같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은 반도(半島)의 지세(地勢)를 말하기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지세(地勢)를 가진 곳은, 대륙(大陸)의 일만(一萬)리 땅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기록(記錄)이다. 동쪽의 나라를 정복(征服)하고, 서쪽 나라를 토벌(討伐)하여, 삼한(三韓)을 통일(統一)했다는 말이며, 고려사(高麗史) 또는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등에서 말하는 “천하통일(天下統一)을 했다”는 그 기록과 같은 것이다.
㉡ 《厥後金山王子引兵而來.西海,忠淸道,沙平津北.無處不至.不得入京都 : 그 이후 금산왕자(金山王子)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서해도(西海 道)와 충청도(忠淸道)와 사평 진(沙平津) 북쪽 등을 침략하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서울에는 들어오지 못하였다.》
위의 글 중에서 『사평 진(沙平津)』에 대한 반도(半島)/식민사학(植民史學)은 『현 반도(半島) 한강(漢江)의 ‘한남대교’ 남단(南端)에 있었던 옛 나루터』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사평 진(沙平津)의 북쪽이라 하였으니, 곧 한강(漢江)이북을 말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충청도(忠淸道)는 한강(漢江)이북(以北)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도대체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이냐?
반도(半島)의 학계(學界)나 일반 국민(國民)들은 도대체 무엇을 진실(眞實)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아래의 글을 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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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 서 군 막 유 감 (征西軍幕有感) 김 부 식 (金 富 軾)
《산서(山西)에 체류하니 마음이 시름인데 : 山 西 留 滯 思 愔 (愔) / 어느덧 봄바람이 지는 꽃을 흩는구나. : 不 覺 東 風 散 老 陰 / 지친 나그네가 옷 털며 고요한 강기슭으로 : 倦 客 拂 衣 江 岸 静 / 행인은 바삐 깊은 벌판 물을 건 너누나 : 行 人 催 渡 野 洲 深 / 삼경에 꿈은 앵 계의 마을인데 : 鶯 溪 里 巷 三 更 夢 / 한 조각 붉은 마음은 봉궐의 누대로다 : 鳳 闕 樓 臺 一 片 心 / 고갯마루의 풍류야 내 감히 바라랴만 : 峴 首 風 流 吾 敢 望 / 이따금 시를 읊어서 회포를 푸노라 : 閑 吟 時 復 遣 幽 襟 》하였다.
이것은 당시 『평양(平壤)인 서경(西京)에서 반란(叛亂)을 일으킨 묘청(妙淸)일당을 토벌키 위해 왕사(王師)가 되어, 산서(山西)에 주둔(駐屯)하고 있던 군막(軍幕)에서 시름을 달랜 시(詩)』라고 볼 수 있는데,
『산서(山西)』란 어느 지방을 말하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때의 상황을 보면, 평양(平壤)의 서쪽은 바로 바다이기 때문에, 왕사(王師)인 “김부식(金富軾)” 군대(軍隊)는 평양(平壤)인 서경(西京)의 동쪽지방에 주둔(駐屯)하고 있었을 것이다. 반도(半島) 땅에서 “산서(山西)”는 어디며, “관서(關西)”는 어디냐?
『정서(征西)』의 뜻이 무엇이냐? 『서(西)쪽을 토벌(討伐)함』을 말하는 것이다. 평양(平壤)이 개경(開京)인 황도(皇都)의 서쪽지방에 있는 것이 맞느냐?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무엇이 진실(眞實)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조차 분별(分別)할 수 없는 사회(社會)가 되어버린 것을 시대(時代)풍조(風潮)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분명(分明) 잘못된 교육(敎育)의 탓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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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도 요 곡(渡 遼 曲) / 동문선(東文選) 이숭인(李 崇 仁)
《요양(遼陽)성 중에 가을바람 일어나고 : 遼 陽 城 中 秋 風 起 / 요양(遼陽)성 아래 누런 모래 날리는데 : 遼 陽 城 下 黃 沙 飛 / 바다 건넌 정부(征夫)들 무공을 세우려 : 征 夫 渡 海 事 驃 姚 / 몇 해째 고향을 바라보며 아직 못 돌아가네. : 幾 年 望 鄕 猶 未 歸 / 빈 규중의 아내는 두 눈썹 찡그리고 : 空 閨 思 婦 顰 雙 蛾 / 등불 아래 찰깍찰깍 북을 울리리. : 挑 燈 札 扎 鳴 寒 梭 / 비단 글자 짜내어 뉘 편에 부칠까. : 織 成 錦 字 憑 誰 寄 / 청조도 영 아니 오니 이 일을 어이할까 : 靑 鳥 不 來 知 奈 何 》
무엇 때문에 “요(遼)” 땅엔 황사(黃沙)가 많았으며, 사막(沙漠)지대라는 표현(表現)이 주를 이룰까?
『요(遼)』 땅이 어디냐?
㉠ 반도(半島)/식민사관(植民史觀)의 말을 빌리면, 현 요 녕 성(遼寧省) 심양(瀋陽) 서쪽을 흐르는 요하(遼河)를 말함이나, 이곳의 지리적(地理的) 특색(特色)으로 보면, 황사(黃沙)나 사막(沙漠)지대(地帶)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일 뿐이며,
㉡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에서는 “하(河) 상류(上流)”를 말함이다. 이곳의 북쪽은 사막(沙漠)지대(地帶)요, 요하(遼河)가 남(南)쪽으로 진행(進行)하는 사막(沙漠)을 가로막고 있다. 어느 곳이 “사막(沙漠)”지대와 근접(近接)해 있는지는 글을 읽는 분은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도요(度遼)곡』이란 시(詩)는 대부분 대륙(大陸)에서 말하는 시(詩) 구절(句節)이며, 반도 사(半島史)는 관계(關係)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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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진실(眞實)이며,
무엇이 거짓인가?
진실(眞實)과 거짓을 판별(判別)할 수 없는 사회(社會)! 사상(思想)의 발전(發展)은 기대(期待)할 수 없으며, 더더욱 조선사(朝鮮史) 복원(復元)하는 일에는 장애(障碍)가 될 뿐이다.
2012년 08월 10 <글쓴이 : 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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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 좋은 내용입니다. 고려의 만리지국을 알리는 또다른 실예이군요.. ㅎㅎ
평양인 서경은 큰 바다를 접한 대륙의 서쪽이며 인근에 바다를 접한 비옥한(壤)땅이라고 봐야 합니다. 평양(平壤)이므로
지세가 대평원에 접한 비옥한 옥토를 연상케 하며,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주변에서 대단한 위세를 지니고 있었다고 보여지며,고려 황도로 부터 거리는 너무도 멀어 전권을 위임받은 최대권력을 지닌 짱을 먹는 느낌의
제후 같습니다.
그 평양인 서경의 위치를 찾는다면 첫째는 특별시인 그루지아의 트빌리시일 것이고, 둘째는 신강의 투르판이 아닌가 합니다. 전성기 고려였다면 당연히 카스피,흑해 연안의 트빌리시일테고, 쇠약시엔 타클라마칸의 바다인 신강
東 征 西 討 란 말에서 동과 서를 차별했음을 알 수 있네요. 동쪽으로는 물샐틈 없이 싸발라 끝까지 추적하여 섬멸(征)한데 반해, 서로는 말로써 담판(討)는 수법을 썼네요.마치 거란이 침공했을때 서희가 싸울 생각은 안하고 거란을 달래서 그들이 얻은 땅을 뒤로 물리는 데에 성공했듯이요. 담판이 통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동쪽의 적들과는 달리 말이 상대적으로 잘 통하고, 무력이 훨씬 강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좋게 말하면 동정서토가 될수도 있지만, 사실적으로 말하면 좌고우면(左顧右面)일 수도 있는 것이죠. 비비계통이 상대적으로 강하고, 우랑우탄 계통이 너무 허약체인 인종과 집단일 수 있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