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링크로 들어가 보시면 전옥주가 이런 말을 합니다; "담양쪽에 연ㆍ고대생이 서울에서 내려와 계엄군의 제지를 받고 있다고 해 그쪽으로 가보면
없고, 그 뒤 곧 송정리, 목포쪽에서 온다는 소문이 계속 나돌았습니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010.html
저
역시 무장단체가 연ㆍ고대생 명칭으로 위장하고 광주로 들어오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전옥주는 5월 19일 밤 9시에 광주에 도착했습니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027.html
<전씨와
차씨, 몇몇 남학생들은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 상황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앰프와 마이크를 구하러 나섰다.>에서 "몇몇 남학생들은"
남학생들이 아니라 불순세력이었을 것입니다.
즉, 전옥주를 선동해서 선무방송을 하도록 부추긴 배후가 있었으며, 그 배후는 계속 쪽지를
주면서 무슨 말로 선동할 것인지 부추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전옥주에게 쪽지를 준 바로 그 자들이 북한과 교신하고
있었습니다.
전옥주가 광주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시점으로 보아 가짜 연고대생들이 광주로 내려온다는 쪽지가 전옥주에게 전달된 시점은
5월 20일 이후였습니다.
그리고, 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1300&num=5488
에서 보면 그 당시 북한 주민들도 여성 선동가 소식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옥주가 시체를 처음으로 본 때는 5월 21일 새벽이었을 것입니다. 간첩들이 두명을 광주역에서 죽인 후 전옥주를 그리로 데려가 시체를
보게 하고 "광주시민은 모두 도청으로! 도청으로!" 선무방송을 하게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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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증언은 잘리지 않은 전옥주의 증언 그대로입니다. 전옥주는 19일 밤 늦게 광주에 도착해 20일부터 선무 방송을 하였으며, 21일 새벽
처음으로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아래 발췌 인용된 증언록에서 "제가 맨처음 시신을 발견했던 곳은 신역이었습니다. 그때가 새벽 6시였습니다."부터는
21일 상황입니다.
광주신역에서 처음 시체 발견
그날 저녁 11시경 버스를 타고 시내와 외곽지를 돌면서 있는
그대로 방송했습니다. 제가 맨처음 시신을 발견했던 곳은 신역이었습니다. 그때가 새벽 6시였습니다. 새벽 6시에 신역을 가니까 정말 비참했습니다.
여기에 계신 某위원님도 당시 그 시신을 보셨습니다. 제가 보여드렸으니까요.그 시신들은 전부 눈이 파헤쳐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어떻게 물러설
수 있었겠어요. 아무리 여자지만…. 두려움은 없어져 버리고 어떻게 해서라도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살려야 되겠다는 오직 한 가지 마음으로 그 시신
곁으로 다가가 남자들에게 시신을 거두라고 지시했습니다.그 시신을 리어카에 싣고 태극기를 덮어 남자들은 리어카를 끌고 저는 가두방송을 하면서 도청
앞으로 왔습니다. 그때가 오전 7시였습니다. 당시 40분 가까이 계엄군과 대치하면서 좋은 어조로 대화가 됐습니다.“우리는 당신들에게 아무런
원한이 없다. 우리 위대한 시민들을 왜 당신들은 무참하게 죽이느냐.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까 당시 육군중령이 자신도 표현을
못하겠다. 우리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쪽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던 중에 저는 계엄군 앞의 차위에 올라 서서
지시했습니다.“일단 저분들도 명령을 따랐을 뿐이니 저들에게 돌을 던질 필요가 없다. 협상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섯명씩 어깨동무를 하고
금남로에 쭉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계엄군 앞에 시신들을 모셔놓고 협상에들어갔습니다.
중령이 요구사항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지금
시민들이 불안해 하고 있고 시신들의 눈이 다 파헤쳐져 있으며 심지어는 학생을 태워준 택시기사가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했다. 그러니 계엄사령관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중령은“총사령관을 만나려면 우선 도지사를 뵈어야 하니까 도청으로 가자”고 했습니다.그래서 김범태학생과
남자 한 분, 그리고 제가 시민대표로 중령과 대위 한 사람과 함께 도청으로 들어갔습니다. 도청으로 들어가 당시 張형태도지사의 모친상 관계로 약
30분을 기다렸다가 張지사를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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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아래 링크에서 김영택 기자가 광주청문회에서
증언하는 21일 상황의 증언이 바로 위의 증언입니다. 전옥주 일행이 張지사를 만났을 때 이미 그 일행이 칼빈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는
증언이니까요.
http://study21.tistory.com/entry/518무장시민군의-총기무장-시점에-대한-증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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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자료] 혜성처럼 나타난 여자선동가/전춘심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07-05-29 14:42 조회 : 36
혜성처럼 나타난 여자 선동가
증언자 : 전춘심(여)
생년월일 : 1949. 12.
10(당시 나이31세)
직 업 : 무용학원 강사(현재 행상)
조사일시 : 1989. 11
주로
변두리 지역이나 으슥한 골목, 건물 등에 시신이 많았다. 웬일인지 시신 들마다 눈들이 모두 파헤쳐져 있었다. 총은 총대로 쏘아 죽이면서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내가 항쟁기간 동안 옮긴 시체만 해도 30여 구 되었는데 옷차림으로 보아 양아치들이 가장 많았다. 그때 나는 광주 지리를 잘
몰라서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학동, 화순방면으로 가는 길, 효천 등지에 시체가 많았던 것 같다.
19일쯤 죽은 사람들은 칼로
난자되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나이도 알아볼 수 없었으나 옷차림으로 보아 30-40대 정도 되어 보였다. 한 사람은 티셔 츠
차림이었고, 작업복과 잠바 차림의 사람도 있었다.>>
바로 위에 발췌 인용된 또 하나의 증언에서 "19일쯤 죽은 사람들은"이란 말은 19일 보았다는 뜻도 아니요, 그 사람들이 19일 죽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전옥주는 시신의
부패 혹은 상태 등을 보아 19일쯤 죽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더구나 9년 지난 후의 전옥주의 기억의 정확성 문제도 있고, 전옥주는
죽은 사람이 있었다는 날을 최대한 앞당기고 싶어 했거나, 5.18측 채증자들로부터 그런 기대를 받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19일쯤 죽은 사람들은"이란 말은 객관적 사실이 진술이 아닙니다. 그녀의 분명한 증언은 5월 21일 아침 6시경에 처음으로 시체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학동, 화순방면으로 가는 길, 효천 등지에" 시체가 많았던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신이 목격된 날은 5월
21일 이후입니다.
보세요. "내가 항쟁기간 동안 옮긴 시체만 해도 30여 구 되었는데"라고 증언하쟎아요. 5.18쪽 기록에도 5월
22일부터 도청 상무관으로 시체들을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5.18 영상물에서 5월 27일 도청진압작전 때 죽은 시체들인
것처럼 영상처리하는 그 시신들이 실은 그 전부터 상무관에 있었던 시체들이라는 임수원 당시 3공수여단 11대대장의 증언이 바로 아래 링크에
있습니다. 5월 27일 아침 힌츠페터가 촬영한 상무관의 30여구의 시체들에 대한 진실은 5월 22일부터 안치되기 시작한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옥주가 5월 21일 아침 신역에서 두 구의 시체들을 발견한 후 5월 22일부터 30 여구의 시체들을 발견한
장소는 시민군끼리의 시가전이 있었던 지역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http://study21.tistory.com/entry/광주청문회-임수원-당시-3공수여단-11대대장-증언
첫댓글 민주당 대통령 후보 이인제는 전옥주를 특보로 기용했죠 전옥주의 선동으로 얼마나 많은 광주시민이 희생되었는지 알기나 하는지?
이인제 역시 나라의 지도자가 되어서는 아니되었을 미련한 인물입니다. 5.18사기꾼들에게 그렇게 쉽게 속아넘어간 인물입니다.
광주청문회로 떠오른 스타 이인제 정말 실망스럽네요.
이인제의 어리석은 세치 혀가 광주사태=공수부대 집단 발포 인식을 국민에게 주었습니다. 잘못된 전제를 기정사실로 하고 애매한 분들에게 누명을 씌우며 호되게 까는 사악한 과오를 이인제가 범하였지요. 그리고, 김대중에게 속아 김대중과 손잡았다가 몰락하였습니다.
광주사태는 이렇게 전개되었다. 19일 밤부터 간첩들이 전옥주에게 죽은 사람이 있다고 유언비어 퍼뜨리며 폭동 선동하게 하였다. 그리고 20일 자정 넘어 간첩들이 광주역에서 두 명 죽인 후 21일 새벽 전옥주를 그리로 데리고 가 군인이 죽였다고 말하며 폭동 선동 선무방송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