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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이비의 플래닛 원문보기 글쓴이: 아이비
임진왜란시 조선 육군의 패전 원인에 대한 의견
* 삼도수군통제사
남해안 봉쇄를 통해 일본 상륙군의 보급망을 완전히 차단하여 그들을 굶주림 속에 몰아넣고, 급기야는 그들이 그렇게도 점령을 소원했던 서울마저도 스스로 포기하고 떠나게 만든 이순신의 활약은 실로 영웅적인 것이었다. 저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쳐 버린 비겁한 왕 이연의 눈에도 이순신은 확실히 구국의 영웅이었다. 이제 이순신을 빼놓고는 조선 수군을 생각할 수 없게 되자 이순신은 특명을 받아 조선 3도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3도 수군통제사의 본영으로는 한산도가 선정되었고, 경상 좌.우 수군, 전라 좌.우 수군, 충청 수군을 총망라하는 자리였다.
대제독 이순신은 즉각 군함의 증강 계획에 착수하였다. 전투함 250척을 보유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만약 그의 계획이 성공리에 달성된다면, 비로소 부산과 대마도 간의 해상로마저 완전 봉쇄하여 조선에 이미 상륙해 있는 왜병들을 독 안에 든 쥐로 만든 뒤 일망타진할 수가 있게 될 것이다. 250척의 군함에 따르는 각종 군기와 식량 확보 및 신병 모집 등 모두를 통제사 스스로가 해결해야만 하였다. 당시의 이연 정부는 이순신의 수군을 도와주기는커녕 군량미로 지어놓은 농산물을 공출해 갈 정도로 부패하였고, 벼슬만 올려놓고는 엄청난 책임과 의무만 지우고 있었다.
한편 부산으로 철수한 왜군들은 이순신이 있는 한 남해안을 통과한다는 것은 꿈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육군의 작전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이순신이 3도 수군통제사가 되었으니 더 이상 조선 정복은 생각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부산에 집결해 있던 왜군들은 서서히 본국으로 철수해 갔고, 그 자리엔 정치꾼들이 들어서서 쓸데없는 말장난으로 세월만 낚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정치꾼들의 작태마저도 이순신에게는 도움이 되고 있었다. 우선 수적으로 절대 열세에 있는 조선 해군을 다시 증강시킬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은 것이다.
전쟁 발발 4년째로 접어든 1597년 1월 초, 왜국의 대추장 히데요시는 더 이상 정치꾼들의 말장난에 휘말리기를 거부하고, 실패했던 조선 정벌을 기어코 성공시키기 위해, 제 2차 조.일 전쟁을 일으켰다. 이번에도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하여 14만 7500명이 투입되었다. 지난 1차 때에는 조선의 군함이 거함이어서 해전에서 이길 수 없었다는 왜장들의 변명을 받아들여, 이번에는 모든 함대를 조선 군함보다 훨씬 크고 튼튼하게 만들어 우선 해군부터 공략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일단 철병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재차 침입해 오고 무려 15만의 왜병들이 새로 투입되자, 제 2차 대전이 발발했음을 감지한 이순신 제독은 즉각 일본군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 새로운 작전을 구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1월 27일, 돌연 도원수(조선군 총사령관) 권율로부터 왕명이 전달되어 왔다.
그런데 그 명령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1월 15일 적장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로 쳐들어올 것이니 적장을 바다에서 잡으라는 것이다. 이 정보는 적장 유키나가가 그의 부장 요시라를 통해 권율에게 전해온 것을 조정에 보고해 명령이 하달되었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이 명령에 대해 첫째로 정보의 제공자가 적장이므로 신뢰할 수 없고 적의 책략일 수 있다는 것과 둘째, 그 정보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적장 하나를 잡기 위해 조선 수군을 움직일 수는 없으며, 나라의 모든 국력을 기울여야 하는 총력전에서 적장 하나를 잡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며 거부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순신 제독의 선진적인 작전 구상이나 전쟁관을 당시의 우둔한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순신의 뜻을 전해들은 이연 왕은 자신의 명을 어겼으므로 ‘왕을 업신여긴 죄’, 그리고 출동을 거부했으므로 ‘적을 놓아 주어 이적 행위를 한 죄’를 씌워 1월 27일, 이순신을 전격 해임하고 서울로 압송하였다. 물론 이 사건의 배경에는 이순신을 질투한 원균 이하 그의 추종배들의 사주가 있었다.
구국의 영웅을 어리석은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해서 해임하고 옥사에 가둔 선조는 후임 통제사로 원균을 임명하였다. 원균은 1597년 2월 6일 한산도에 부임하였다. 그때, 전임의 이순신으로부터 인수받은 품목은 전함 200척, 군량미 9914석, 화약 4천 근, 대포 300문 등이었다.
원균은 전임 이순신 제독의 참모들을 무자비하게 파면 또는 강등시키고, 자신의 측근들을 주요 요직에 앉혔다. 군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고, 원균의 압제에 견디지 못한 많은 수군들이 군복을 벗어 던지고 탈영하기에 이르렀다. 또 15만의 왜군과 대치하고 비상 전시 상황을 망각한 듯, 원균은 매일 술과 계집을 작전 본부로 불러들였다. 자연히 군의 기강은 엉망이 되었다. 이런 원균의 작태는 그를 철저히 옹호하며 지원했던 왕 이연을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 동안 천재적인 이순신의 용병술에 힘입어 연전연승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조정 대신들은 막연히 조선 해군이 일본 해군을 일방적으로 물리칠 수 있으리라 과신하고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를 조장한 것은 바로 원균 자신이었다. 그는 수군의 병권을 쥐게 되면 일거에 적의 임시 소굴인 부산으로 쳐들어가 왜군을 일망타진하겠다고 호언장담하였고, 왕 이연을 비롯한 일부 대신들은 원균의 이런 어린애 같은 헛소리를 그대로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적이 흘려주는 정보를 그대로 믿고, 바다에 나가 적장을 잡아오라는 유치한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원균은 일단 그의 소원대로 삼군 통제사에 임명되자, 적을 소탕하러 출동하기는커녕 한산도 본영에 처박혀 태평성세라도 맞은 듯 매일같이 질탕하게 놀면서 주색잡기에만 정신을 팔고 있었다.
*원균의 출전
왜병들이 매일같이 부산과 대마도를 분주히 오가며 병참 수송을 하여 조선 상륙군을 증강시키고 있었으므로, 도원수 권율은 원균에게 즉시 출동하여 왜군의 수송로를 바다에서 차단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원균은 갖은 핑계를 대면서 결코 출전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그만큼 적은 증강되어 갈 뿐이었다.
도원수의 명령이 무시되자 권율은 이 사실을 선조에게 보고하였고, 이에 따라 왕은 선전관 김식(金軾)을 파견하였다. 7월 1일, 마침내 수군 사령관 원균은 도원수 권율 앞으로 소환되었고, 이 자리에서 왕의 선전관 김식은 출전하라는 어명을 전했다.
7월 5일, 마침내 원균은 출전을 하였다. 군함과 협선을 합쳐서 무려 268척이나 되는 대함대였다. 오전 내내 준비를 마치고 정오가 되어서야 비로소 한산도의 두을포를 출항하였고, 오후 2시경에 3도 수군의 최대 요충지인 견내량을 통과하였다. 대낮에 조선 수군의 대함대가 움직이자 이를 숨어서 감시하던 왜의 척후병들은 놀라 상부에 보고하였다.
7월 5일 저녁 7시, 조선의 함대는 철천도의 외즐포에 도착하여 밤을 지샜다. 다음날 정오에 외즐포를 출발하였고, 2시쯤 영등포를 통과하여 옥포로 향하였다. 한편, 조선의 대함대가 출동했다는 보고를 받고 급히 달려온 일본 해군의 참모들은 멀리 안골포 남단에 있는 육망산(陸望山:해발 187m)에 올라가 조선의 기동 함대가 서서히 옥포로 향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였다.
이들은 이전의 이순신이 쥐도 새로 모르게 이동하던 것에 비해, 대낮에 당당히 함대가 움직이는 것에 의아해 하면서도 부산을 공략하려 하는 것을 간파하였다. 따라서 안골포. 웅포. 가덕. 김해. 죽도 등지에 분산된 함선들을 모두 부산으로 집결시키도록 하고 결전을 준비하였다. 그 동안 이순신의 조선 함대 공포증에 시달려 온 일본 수군으로서는 원균의 비상식적인 작전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만반의 대비를 하기로 한 것이다.
7월 7일 새벽 4시, 원균의 삼도 수군 연합 함대는 옥포를 떠나 부산으로 향하였고, 약 3시간 후에는 가덕도 남방을 통과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함대의 움직임은 봉수대 및 응봉(해발 358m)과 연대봉(해발 459m)에 설치되어 있는 왜병의 감시 초소에 의해 낱낱이 포착되고 있었다. 조선 해군 함대의 가덕도 남방 통과를 알리는 봉화가 하늘 높이 올랐고, 이를 발견한 부산의 왜장들은 무려 1천여 선의 대함대를 부산 방어를 위하여 절영도(영도)의 후면에 대기시켜 놓았다.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절영도 앞바다에 도착한 것은 이미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저녁 7시경이었다. 이때의 상황을 유성룡의 기록으로 살펴보자.
“균이 절영도에 이르자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었으며,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정박할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돌연 왜선들이 출현하자 원균은 곧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하루 종일 노를 저어 피곤에 지쳐있어 앞으로 전진할 수가 없었다. 왜선은 우리가 피곤해지도록 유인했으며, 우리 함대는 통제를 잃고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밤이 깊어지자 바람이 더욱 거세어졌고, 우리 배는 표류하여 서로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왜선과는 교전도 못해 본 채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조선 함대는 제각기 그 곳을 빠져나와 본영이 있는 한산도를 향하여 막연하게 달아났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단 한 척의 왜선도 조선 함대를 추격해 오지 않았다. 이순신 함대의 유인 작전에 걸려 전멸당한 경험이 있는 왜장들은 신임 제독 원균을 만나 또 무슨 예상 못한 함정이라도 있지 않을까 지극히 신중을 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항해에 무지했던 한심한 원균은 날씨 변화와 사람의 한계를 무시한 멍청한 항해를 강행함으로써, 왜적들과는 싸워 보지도 못하고 극도로 지쳐서 마치 패전한 것처럼 무려 20여 척의 함선을 일시에 잃고 말았던 것이다. 왜선의 추격을 예상하고 공포의 탈출극을 연출한 원균 함대가 겨우 가덕도에 도착하자, 극도로 목이 말랐던 병사들은 저마다 앞을 다투어 상륙하여 정신없이 물을 찾았다.
그러나 가덕도에는 왜장 도진의홍이 이끄는 살마군(薩摩軍)이 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뛰어든 비무장의 조선 수병들을 발견하고 무자비하게 도륙해 버렸다. 상륙하기 전에 정찰병 하나 파견할 줄 몰랐던 원균의 무지로 인해 무려 400여 명의 부하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7월 9일 새벽 4시경, 원균이 이끄는 연합 함대는 간신히 칠천량의 외즐포에 도착하였다. 왕의 명령을 받고 부산의 일본 함대를 격멸하겠다고 떠났던 원균 함대는 왜선과는 교전 한 번 못해 본 채 무려 20척의 함선과 400여 명의 부하들만 잃고 말았다. 마치 패잔병처럼 전의를 상실한 원균에겐 한산도 본영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나 원균의 승첩 보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도원수 권율은 원균이 부산 문턱에서 되돌아왔다는 보고를 받고 격노하였다. 권율은 원균을 급히 불러들여 명색이 삼군 통제사인 그를 묶어놓고 곤장을 때려 그의 비겁함을 꾸짖은 다음, 다시 부산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이로써 한산도 본영으로 돌아가려던 원균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그렇다고 다시 부산으로 쳐들어갈 용기도 없어 매일 술만 퍼마시면서 자포자기에 빠졌다.
한편, 원균 함대의 부산 공격으로 일시 당황했던 왜장들은 공격이 있던 날 원균이 보여준 수상한 행동이 작전과는 무관한 원균의 무지였음을 알고 조선 수군을 전멸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전의를 불태우게 된다.
이리하여 부산을 결사 수호하려던 왜장들은 작전을 바꾸어 원균 함대를 전멸시키기 위하여 1천여 척의 대연합 함대를 조선 함대가 정박해 있는 외즐포로부터 불과 60리 거리에 있는 웅포와 안골포 등지로 총집결시켰다.
7월 15일 밤 10시, 왜군은 6척의 특공 함대를 파견하여 원균 함대의 방어 태세를 시험해 보았다. 그런데 원균은 함대가 정박해 있는 외즐포의 외항에 경비선 하나 세우지 않고 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왜선들의 대담한 야습으로 원균 함대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일본 특공 함대가 돌아가자, 눈치 빠른 경상 우수사 배설은 원균 밑에 있다가는 목숨도 부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직속 함대 12척을 이끌고 일본 특공함대를 추격하는 척하면서 외즐포를 벗어나 한산도 방면으로 도망쳐 버렸다.
불과 6척의 특공 선단 출현에 조선 수군의 본진이 허둥지둥 했다는 소식에도 왜장들은 섣불리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 동안 이순신 함대의 유익.매복.기습 작전에 걸려 참패를 했던 경험 때문이었다.
결국 원균의 무지함에 대해 확인하고도 전 일본 해군을 비롯하여 무려 10만의 육군까지 동원하여 조선 수군 전멸전을 준비하였다. 이 작전에는 도도 다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루시마 미치후사, 가토 요시아키, 시마즈 요시히로 등과 고니시 유키나가 등까지 참전하여 무려 30여 왜장들이 연합하였다.
16일 새벽 4시경, 일본 최대의 연합 함대가 외즐포로 통하는 상.하 양쪽의 항구 입구를 겹겹이 포위한 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일시에 돌진해 들어갔다. 원균의 조선 함대는 제대로 저항 한번 못하고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도 술기운에서 깨어나지도 못한 원균은 갑옷도 걸치지 못한 채 기함에 올라 외즐포를 탈출하기 위하여 좌충우돌하였다. 겨우 겹겹이 쳐진 왜군의 포위망을 뚫고 한산도로 달아났다. 거의 모든 조선 군함들은 불타고 있었고 기함을 따르는 배는 2, 3척에 지나지 않았다. 간신히 한산도로 통하는 견내량 입구에 도착하니 그곳에도 수백 척의 왜선들이 수로를 철통같이 봉쇄하고 있었다. 이 때, 조선의 기함을 발견한 왜선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집중 공격을 퍼부으니 기함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여 버렸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원균은 배를 버리고 물에 뛰어들어 간신히 섬으로 기어올랐다. 그러자 이를 본 왜병들이 공을 다투며 추격하여 결국 원균은 그들에게 잡혀 참혹하게 살해되고 말았다.
원균의 기함이 전장을 이탈하여 달아나자 이억기와 최호(충청 수사) 함대도 적의 포위망을 뚫고 기함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원균이 배를 버리자 방향을 바꿔 춘원포로 향했는데 그곳에도 왜선들이 대기하고 있어 최후의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결국 패전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 이억기는 목에 칼을 꽂아 영웅답게 자결하였다. 이로서 전설적인 이순신 함대는 원균에 의해 완전히 전멸하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조선 해군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기고만장한 우키다 히데이에는 7월 17일, 작전 회의를 통해 이미 북진중인 우군(右軍)을 제외하고 좌군(左軍)과 중군(中軍)의 10만 대병을 군선을 이용하여 곧장 한강으로 상륙시켜 한성을 점령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7월 29일, 일본의 좌군과 중군은 일제히 서해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총사령과 우키다 히데이에는 부산에서 출발하였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웅천에서, 시마즈 요시히로는 거제도에서, 모리 요시나리와 이토 우헤이는 안골포에서 출발하였다. 이외에도 하치스가 이에마사와 나마고마 히토마사 등도 타군과 보조를 맞추어 가며 모두 사천 근처로 집결하였다.
사천에 집결한 왜군은 섬진강을 따라 올라가서 구례를 삼키고, 8월 16일엔 벌써 남원성을 함락시켰으며, 다시 바다로 내려와 전라 우수영을 목표로 진군하였다. 이때의 좌중군 연합군은 대형 수송선 130여 척에 70여 척의 호위 전함을 거느린 10만의 대병이었다.
*명량대첩(鳴梁大捷)
우리는 지금부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 제독 이순신이 이전의 신화를 뛰어넘어 더욱 위대한 신화를 이루는 과정을 보게 된다. 불과 12척의 패잔선으로 일본의 정예 함대 200여 척과 10만 대군을 격멸시키는 믿겨지지 않는 신화인 것이다.
이 명량해전이야말로 그 동안 사가(史家)들이 손꼽아 온 임진왜란 3대 대첩(大捷)을 수백 배 뛰어넘는 진정 위대한 대첩으로, 이순신 제독의 절묘한 용병술을 확연히 살펴볼 수 있는 해전이다.
이순신은 선조의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서울에 압송된 후 죄인으로서 혹심한 고문을 받았다. 판부사 정탁의 목숨을 건 구명 운동으로 간신히 사형만은 면하고, 1597년 4월 1일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7월 18일, 그러니까 원균의 함대가 전멸당하고 이틀이 지난 뒤 새벽에 원수부의 군관 이덕필과 변홍달이 찾아와 조선 수군의 전멸 소식을 이순신에게 전하였다. 곧이어 도원수 권율이 원수부의 참모들을 대동하고 사병 신세인 이순신을 찾아왔다. 해군의 전멸 소식을 듣고, 말단 부하로 백의종군하는 이순신 앞에 나타난 권율은 마치 그 자신이 죄인이라도 된 듯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대영웅을 죄인으로 몰아 백의종군시키고 있음을 사과하고 있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이 난국을 타개해 줄 사람은 이순신 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리하여 우국충정에 불타는 이순신은 과거 통제사 시절 그의 밑에서 종사했으면서, 지금은 원수부에 속해 있는 9명의 군관을 차출하여 대책반을 편성한 후, 남은 전선이 정박해 있는 하동(河東)의 노량진(鷺梁津)을 향하여 달려갔다.
전선으로 달려가는 이순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맨손으로 조선 해군을 다시 재건하여 10만 왜병들의 서해 진출을 막아야 했다. 그는 길거리에서 지푸라기 하나라도 건져 해군 재건에 활용해야 할 만큼의 악조건에서 전장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마비를 맞으며 말을 달려 진주에 도착, 진주 부사와 논의를 한 후 4일 만에 다시 142km를 달려 7월 21일, 목적지인 노량진에 도착했다.
경상 우수사 배설은 원균 함대가 전멸하던 날 밤, 미리 겁을 먹고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함대를 이탈하여 이 곳 하동 노량진으로 도망쳐 왔었다. 이 12척의 패잔선을 점검해 보니 신속한 수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아무런 실권이 없었던 이순신은 그저 보고 들은 상황을 정리하여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원수부에 올렸다.
1.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 공포증에 걸려 있음.
2. 군함 1척당 190명이 필요한데 현재 겨우 90명 이하로 격감되어 있음.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
한편, 선조의 명령으로 이번 해전에 처음부터 끝까지 종군한 선전관 김식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서울로 돌아갔다. 그는 원균 함대의 괴멸 과정을 소상히 선조에게 보고하였다. 이때가 7월 22일이었으니, 원균이 패전한 날로부터 6일째 되는 날이었다. 왕은 급히 대신들을 소집하여 사후 대책을 의논해 보았으나, 이미 조선 수군이 전멸한 상태에서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구국의 영웅을 죄인으로 몰았던 선조는 뻔뻔하게도 다시 이순신을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요술이라도 부려 자신의 왕조를 구해 주기를 기대하였다. 이로서 1597년 7월 23일자로 된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이 8월 3일 이른 아침 이순신에게 도착하였다.
이때부터 이순신의 움직임은 대단히 기민해졌다. 상대는 수백 척의 대형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 제독에게는 12척의 함선이 있을 뿐이었다. 제독은 이 12척의 전함(판옥선)의 전투력을 증강시키기 위하여 전 함선을 거북선과의 절충형으로 개조하였다.
즉 갑판의 벽을 높여 병사들이 적의 조총탄에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도록 하였다. 왜인들은 이 배도 거북선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우선 배를 움직일 병사와 전투병들이 필요했다. 이 때는 이미 배에 딸린 병사들의 태반이 종적을 감춘 뒤였다. 또 군량미도 구해야 했고, 탄약과 피사체도 모두 부족하였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의무만 지워줬을 뿐 쌀 한 톨 지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순신은 9명의 군관을 이끌고 이 모든 보급품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녀야 했다.
이렇게 출발한 이순신 일행은 8월 5일, 곡성읍에 도착하여 고산 현감 최진강으로부터 신병들을 인수받았다. 8월 6일, 옥과에 접어들어서니 구례가 왜병들에게 점령당했다는 소문에 피난민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이순신은 여기서 옛 부하 이기남(거북선 돌격대장), 정사준 형제, 군관 조응복, 양동립 등을 만나 일행에 가담시켰다.
8월 7일, 아침 일찍 옥과를 출발하여 순천으로 향하던 중 부대가 해산되어 할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던 전라 병사 이복남의 부하들을 만나 이들을 모두 수군으로 편입시켰고, 또 이들로부터 많은 군마와 병기들도 확보할 수 있었다.
8월 8일, 광양 현감 구덕령,나주 판관 원종의, 옥구 군수 김희온 등을 얻고 해질 무렵 순천에 도착했다. 순천에 도착하니 모두 피난을 가버리고 성 안은 텅 비어 있었는데, 무능한 관리들이 도망가기에 바빠 적군에게 큰 도움이 될 군기 창고를 파괴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한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리들의 실책으로 이순신은 많은 병장기와 장편전 등의 피사체를 얻을 수 있었다.
8월 9일, 순천을 떠나 낙안으로 가니, 그곳에 먼저 와 있던 순천 부사 우치적과 김제 군수 고봉상등이 가담하여 왔다. 그들은 곧 국창(國倉)이 있는 보성 조양창으로 향하였다. 초저녁에 도착하여보니 그곳에도 지키는 사람 하나 없이 창고가 봉인된 채 있었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조선 군관들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많은 보급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로써 빈손으로 시작한 이순신의 조선 해군 재건은 최소한의 군병과 병기 그리고 군량미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궁색한 모습이었지만 적의 공격을 앉아서 당하지만은 않게 된 것이다.
이 때 이순신은 구례.곡성.옥과.순천.낙안.보성 등 330km를 돌며 신병 1천 명과 군량미 1개월 분, 그리고 많은 전투용 병기들을 거두어들여 최소한 한차례의 해전을 치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 두어야 할 점은, 이 많은 병참품들을 왜군보다 불과 하루 정도 앞질러 이순신이 먼저 거두었다는 것이다. 만약 이순신이 아니었더라면 이 모든 것들이 모조리 왜병들 손에 넘어가 버릴 뻔했던 것이다. 이 점만 보아도 선비의 나라 조선이 얼마나 병법에 무지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8월 20일, 드디어 이순신은 갑판 개조를 끝낸 12척의 군함으로 함대를 구성하고 직접 지휘하여 이진(梨津)으로 이동하였다. 8월 26일, 기다리고 있던 일본 해군의 척후선 8척이 이진의 60리 거리까지 접근하여 왔다. 원균의 패전 이후 이리저리 도망만 친 12척의 함대였다. 따라서 이순신의 지휘하에 거두는 첫 승리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왜선의 추격을 발견한 이순신은 슬그머니 함대를 어란진(於蘭津)으로 옮겨갔다.
한편, 조선 수군의 패잔선 무리가 이진에 있다는 정보에 따라 일본의 척후선단이 추격해 와 보니, 조선의 패잔선단은 겁에 질려 어란진으로 도망쳐 버렸다. 3도 연합 함대를 격파한 일본의 용맹한 군함들을 보고 도망치는 꼴이 가엾을 정도였다. 이 때까지 일본군들은 도망치는 12척의 선단을 이순신이 지휘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8월 28일 오전 6시, 왜선들은 조선의 패잔선들을 잡기 위해 기세 좋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이순신 제독이 파놓은 함정이었다. 조선 해군의 승선원 태반이 해전 경험이 전혀 없는 육군들이었고, 그 중에는 물을 무서워하는 자들도 많이 있었다. 따라서 초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장병들의 사기도 올려줘야 했고, 또 실전을 통하여 전투 경험도 쌓게 해주어야 했는데, 마침 일본 척후선들이 불과 8척만으로 공격해 온 것이다.
적선들의 출현에 조선의 병사들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 이순신이 기함을 앞세워 적선들을 가로막고 일제히 함포를 발사하였다. 이에 의기양양하게 달려들던 왜선들이 갑자기 허둥지둥거리며 혼란에 빠졌다. 이순신의 기함에서 깃발이 올라 전함대에 총공격을 명하자, 왜선들은 급히 방향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은 전 함대를 몰아 추격전을 펼쳤다. 왜선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자 이를 쫓는 조선 수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역시 이순신 장군 밑에서 싸우면 백전백승할 수밖에 없다.’ 모든 장병들은 그 동안의 신화가 현실로 나타나자 자신감으로 재무장하게 되었다. 이순신 함대는 갈두(葛頭)까지 추격하다가 회군하였고, 장도(獐島)에 옮겨갔다가 야음을 틈타 벽파진으로 옮겨 진을 쳤다. 척후선단이 혜성같이 나타난 조선 함대의 역습을 받고 쫓겨오자, 일본 수뇌부에서는 동요가 일어났다. 이는 일본군의 수륙 병진책에 최대 걸림돌이 될 것으로 그냥 지나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조선의 12척 함대를 잡기 위해 55척의 대함대를 구성하여 조선의 유령 함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왜의 함대는 조선의 함대가 정박하고 있다는 어란진으로 달려갔으나 조선 함대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왜의 함대는 척후함대가 무언가 착각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12척의 별동 함대를 구성해 그 주변의 섬들을 샅샅이 수색해 보도록 하였다.
일본의 별동 함대는 유령 함대를 찾아 벽파진으로 다가갔고 이들의 움직임은 거미줄같이 쳐 놓은 이순신의 감시망에 낱낱이 탐지되고 있었다. 이때까지도 일본의 함대는 이순신이 다시 돌아와 유령 함대를 지휘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오후 4시경 이순신은 드디어 일본의 별동 함대를 격멸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 자신이 선두에 서서 일본 함대를 향해 돌진하였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유령 함대가 함포를 일제히 발사하며 달려들자, 크게 놀란 일본의 별동 선단 12척은 황급히 배를 돌려 도망가 버렸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조선의 유령 함대를 이끄는 장수는 확실히 뛰어난 인물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일본 함대는 적어도 조선 함대의 두 배인 25척의 함대로 일시에 몰아쳐 조선 해군을 제압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날 밤 이순신 제독은 일본군의 야습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군작전 회의를 엄중하게 진행하였다. 적의 야습에 대비하여 일사불란하게 행동하고 제독의 명령에 절대 복종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적은 군세로 큰 군세를 공략하려면 사소한 실수라도 있어선 안되겠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12척의 군함들은 강력한 지자총통으로 무장하고 바위 곁의 어두운 곳에 함선을 감추고 포진하였다. 한편, 적의 눈에 잘 띄는 곳에 작은 협선들을 묶어 놓고 그 위에 불을 밝혀 적의 표적이 되게 하였다.
9월 7일 오후 10시, 과연 20여 척의 일본 특공 함대가 소리도 없이 벽파진 안으로 미끄러지듯 접근하여 왔다. 제독의 예측대로 일본군의 야습이 시작되고 있었다. 일본 함대는 유인을 위한 협선들을 발견하고 야습에 성공하였다고 기세 좋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미리 바위 뒤에 숨어 있던 조선 함대가 불시에 튀어나오며 함포를 발사하자 순간 당황하기 시작했다. 일본 함대는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이순신 제독의 포위망은 여간해서는 잘 뚫리지 않았다. 이로서 선봉에 섰던 일본 함대는 모조리 격침되었고, 일부 탈출한 함선들도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를 통해 신참 병사들은 역전의 용사들로 거듭 태어나고 있었다.
벽파진 야습에 실패하고 돌아온 함대를 보고 일본 해군의 수뇌부는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괴멸된 줄 알았던 조선 수군이 아직 건재해 있었던 것이다. 비록 12척 뿐인 것으로 파악되었지만 그 위세는 일본군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12척 조선 함대의 지휘관이 이순신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일본군 내에 퍼지기 시작했다. 일본군에 있어서 이순신은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수적 차이는 아랑곳없이 단 한번도 이겨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순신을 만나는 것만으로 죽음에 이른 병사의 수가 헤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왜의 수뇌부는 크게 당황하였다. 만약 정말 이순신이라면 일본군의 사기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왜군은 아무리 이순신이라 하더라도 단 12척의 패잔선으로 수백 척에 달하는 일본 해군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최신의 대형 전투함들을 대거 투입해 조선 유령 함대를 일거에 격멸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일본 해군의 신형 전투함들을 모두 벽파진에서 70리 떨어진 어란진에 집결하도록 명령을 하달했다.
* 결전(決戰)
일본 해군의 조선 함대 격멸전은 일본의 최신예 전함 200여 척과 한강 마포에 상륙을 준비하던 일본군 10만이 어란진으로 모여드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일본 해군의 움직임은 이순신 제독에게 낱낱이 파악되고 있었다.
9월 9일, 기다리던 일본군 척후선 2척이 나타나 벽파진에 있는 이순신 함대의 동태를 면밀히 정탐하고 돌아갔다. 조선군의 함대가 작은 협선을 제외하면 실제로 전함이라곤 12척 뿐임을 최종 확인한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 해군은 벽파진을 목표로 하여 작전을 전개할 것이다.
일본의 정탐선들이 벽파진의 지형과 수로 그리고 이순신 함대의 동태 등을 관측하고 돌아갔다는 보고를 받고서도 이순신 제독은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그저 무방비 상태로 관망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군의 공격 목표를 벽파진으로 유도하려는 속임수였다.
9월 14일, 드디어 삼호원 나루터에서 봉화가 올랐다. 어란진을 감시하던 척후 군관 임준영이 정탐 임무를 끝내고 돌아온 것이다. 이순신은 제장들을 모아놓고 앞으로 있을 전투에 대해 엄중하고도 비장한 지시를 내리게 된다. 왜군의 수는 전함 200여 척에 거함만 55척인 초대형의 함대이다. 또 그 병사의 수효는 10만에 이른다. 그러나 조선의 함대는 단 12척 뿐이다. 그러나 조선의 함대에게는 자연의 조화와 천험(天險)의 지형이라는 동맹군이 있음을 갈파하고 일본 해군 섬멸 작전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 작전은 우수영에 있는 명량 해협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명량 해협은 평균 1500(약 500m)자의 폭으로 진도와 화원반도 사이의 수로이다. 이 해협의 좁은 곳은 900(약 300m)자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그 양쪽으로 암초가 널려 있어 배가 이용할 수 있는 곳은 그나마 400자(약 130m) 정도뿐이다. 또 수로의 물살이 빨라 물살의 방향만 잘 이용하면 적을 능히 격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작전을 상세히 설명하며 불안에 떠는 부하들을 진정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원균 함대의 전멸을 경험했던 장교들은 불안한 마음을 쉽사리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 다음날인 9월 15일, 일본군의 공격이 있을 것으로 예상한 이순신 제독은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순류를 타고 전 함대를 몰아 명량 해협을 통과하여 우수영으로 이동했다.
9월 16일, 일본군 연합 함대는 어란진을 발진하여 벽란진으로 총출격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의 유령함대는 또 사라지고 없었다. 벽란진에서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수로는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는 남쪽과 조선의 수군 사령부가 있는 북쪽의 우수영 방면뿐이었다. 따라서 일본군은 대함대의 출격에 겁을 먹고 우수영으로 달아났다고 판단, 즉각 추격하기 시작했다.
일본 해군의 연합함대는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선봉으로 하여 도도 다카토라와 가토 요시아키 등이 합세하고 있었다. 특히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1592년 6월 5일 벌어진 당항포 해전에서 전사한 형님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선봉을 자원하고 나선 자였다. 그는 무려 133척의 정예 함대를 이끌고 명량 해협으로 접근하였고, 70여 척의 제 2 함대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일본 함대가 명량 해협의 남쪽 입구에 도착한 것은 12시경이었다. 마침 바다의 물결이 잔잔하여 하늘이 일본 함대를 돕는 듯 하였고 항해는 순조로웠다. 그런데 미치후사 함대가 명량 해협 중 가장 폭이 좁은 울돌목에 접근하니, 도망갔다고 판단했던 유령 함대가 기함을 선봉으로 하여 미리 포진해 있었다.
미치후사가 눈여겨 살펴보니 유령 함대의 기함에 오른 장기(將旗)는 분명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으로 되어 있었다. 비로소 그 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이순신이 실제로 유령 함대를 지휘하고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 기함이 선봉에 서서 일본 함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뒤로 11척의 전함들이 포진하여 결사 항전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 뒤에도 멀리 한 무리의 선박이 있었으나 큰 전선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미치후사는 당대의 영웅이라 불릴만한 이순신과 한판 붙어보는 것에 야릇한 흥분을 느끼면서 단 12척의 적선을 133척의 최신예 전함으로 이기지 못한다면 배를 갈라 죽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을 하며 공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해협의 폭이 좁아 함대는 종대로 전진해야 했다. 이 당시의 해전은 전세계 어디에서나 적선에 접근하여 병사들이 배를 기어올라 선상에서의 난전(亂戰)을 통해 승부를 결정짓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수척의 일본 돌격선들은 조선의 기함을 사방에서 포위하고자 양쪽으로 날개를 벌리며 우회하려 하였다. 그런데 바깥쪽으로 돌던 왜선들이 돌연 물 속에 숨어 있던 암초에 걸리면서 기동 불능에 빠지고 말았다.
이때서야 왜 함대는 기함을 포위하려던 작전을 바꾸어 중앙으로 재집결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왜선들을 보고 있으면서도 기함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으로 집결된 왜선들이 앞으로 전진하여 해협을 빠져나오는 순간, 좁은 물길을 가로막고 우뚝 서 있던 조선 함대의 기함이 서서히 옆으로 돌더니, 종대로 덤벼드는 일본 함대를 향해 지자포와 현자포 등, 함재포들을 일제히 발사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갑판 위에 있던 병사들도 일제히 활과 총을 쏘아 대기 시작하니, 선봉에서 달려들던 일본 전함이 단번에 불길에 휩싸여 버렸다.
조선 함대는 우선 현자총통과 지자총통 등을 발사하여 일본 군함의 기동력을 마비시킨 후, 곧이어 조란환이라 불리는 새알 크기만한 쇳덩어리를 한 번에 100-200개씩 산탄으로 발사하였다. 이순신의 기함 한쪽에서 한 번에 발사되는 조란환은 모두 약 2척 개나 되어 갑판 위에 노출된 왜병들은 순식간에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 전법을 이순신 제독은 합력사살(合力射殺)이라 하였다.
앞장선 전함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여 처참한 지경이 되자, 후열의 전함들은 조선 군함의 가공할 함포 사격에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그들은 뒤를 따르는 동료 함선들 때문에 뒤로 물러서고 싶어도 물러설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물살이 그들을 조선 함대 쪽으로 밀어주고 있어서 후퇴하기가 물리적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진해도 죽고 물러서도 죽게 되었으니 선발 돌격선들은 결사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선의 함선들은 기함의 위기를 쳐다보고만 있을 뿐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선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 제독의 기함이 홀로 적을 맞아 약 1시간 동안 결사전을 전개하며 왜 선단을 차례로 격침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일본 수군이 육박전을 겨냥하여 조총을 주로 사용한 데 비하여 조선 해군은 대포를 주무기로 한 현대적인 함포전으로 일관하여 처음부터 상이한 전투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불과 1시간여의 싸움으로 일본 군함 20여 척이 깨어졌으며 승선 인원 대부분이 몰살당했다.
그러나 뒤로 돌아설 수도 없는 일본 수병들은 악귀같이 달려들었고, 조선 함포를 피한 몇몇 돌격선들이 접근에 성공하여 배 위로 왜병들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때서야 비로소 이순신 제독은 중군기(中軍旗)와 초요기(招搖旗)를 세워 중군장 김응함에게 자신의 기함을 엄호하도록 지시하였다. 기함의 명령을 받은 중군장과 거제 현령 안위가 즉각 그들의 함선을 몰아 일본 함대 속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그 동안 일본군의 공격에 수비로만 일관하던 조선 수군이 마침내 공세를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소극적인 전법으로 공방전을 벌이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나머지 9척의 전함들은 여전히 기함의 명령을 주시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전면에 나섰던 20여 척의 선봉 전함들이 모조리 격파되자 드디어 적의 대장선이 노출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배에는 깃대 꼭대기에 새의 날개가 꽂혀 있었고 붉은 기가 매달려 있었으며, 누각 주위는 푸른 장막으로 둘러쳐져 있었다고 한다. 적장은 다락방 위에서 선봉 돌격 함대를 지휘하였던 것이다.
이순신 제독이 그의 기함을 빠르게 몰아 접근한 후 집중 함포 사격을 퍼부으니 일본의 대장선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고 적의 대장은 바다에 떨어지고 말았다. 기함의 병사 김을손이 적장을 끌어올려 보니, 그는 붉은 문양이 그려져 있는 화려한 비단 옷을 입고 있던 구루시마 미치후사였다.
미치후사의 목은 즉각 기함의 돛대 꼭대기에 매달렸고, 멀리서 이를 본 일본 병사들은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상대적으로 조선 수군의 사기는 하늘을 지를 듯 충천하였다. 12시경에 시작된 해전은 어느새 3시간 정도 계속되었고, 북쪽으로 흐르던 물살도 서서히 바뀌어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더니 차츰 빨라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전진하려는 일본 군함들이 배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써 노 젓는데 노력을 집중하는 반면, 조선 함대는 물길을 따라 흐르면서 마음껏 적선을 공략하는데만 열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로 이순신이 기다리던 공격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마침내 이순신 제독의 기함에 전 함대의 총공격을 알리는 깃발이 올랐다. 기함을 주시하며 휴식을 취하던 9척의 전함들은 일제히 함포를 발사하며 달려들었다. 이순신의 기함 한 척에 진땀을 흘리며 3시간을 소모한 일본 함대는 혼비백산하여 뱃머리를 돌려 도망가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큰 실수였다. 전투 지원을 위해 후방에서 좁은 해협을 따라 올라오던 함선들과 탈출하려는 함선들이 서로 충돌하게 되었고, 이를 피하려다 양 옆의 암초에 걸려 침몰하는 등 일본 함대는 막심한 피해를 입게 되었던 것이다.
적을 단번에 격멸시키기 위하여 물의 흐름이 가장 빠른 신시(申時)까지 전투를 질질 끌며 기다려 왔던 것이다. 또 전투경험이 적은 조선 수군에게 단 1~2척의 함선으로 수백척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신감과 결전의 의지를 갖게 하는 것과, 그 반대의 효과를 왜군에게 주는 고도의 심리전 전술이었던 것이다.
이순신 제독의 절묘한 전술이 극치를 이루며 세계 해전 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이 이어지고 있었다. 일본 함대는 서로 먼저 빠져나가려는 다툼으로 인하여 연쇄적으로 좌충우돌하였고 또 해협의 양측 암초에 부딪쳐 처절하게 파선되어 갔다. 무사히 빠져나간 듯 싶었던 함선들도 시속 11노트라는 가공할 속도로 흐르는 물살을 타고 마치 나는 듯 추격해 온 조선 함대의 함포에 맞아 침몰되어 갔다. 이 수라장 속에서 무려 100여 척 이상의 일본 군함들이 격침되었고 멀리서 대기하던 90여 척만이 도망갈 수 있었으나 그들도 거의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전투는 끝났다. 200여 척으로 구성된 최정예 함대에 10만 대병을 싣고 서울로 상륙하려던 일본군의 작전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일본은 불과 12척의 이순신 함대에 의하여 200여 척의 대함대 중 무려 133척을 잃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본은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호랑이가 버티고 있는 한 서해를 돌아 진격하려던 작전에 근본적인 수정을 가해야만 하였다.
명량 해협은 일본군의 패잔선과 시체들로 뒤덮였고 이를 바라보는 대제독의 눈에서는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로써 이순신은 그에게 주어진 구국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 내었다. 조국을 침략한 왜적들은 이제 곧 물러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병참의 지원 없는 북진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이미 평양 철수를 통해 고니시 유키나가가 경험했던 일이다.
명량대첩! 이것은 확실히 인류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대첩 중의 대첩이었다. 이 대첩을 통해 조선군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할 수 있었고, 반면에 그 동안 승승장구하던 왜군들은 스스로 남쪽으로 철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혹자는 조.일 7년 전쟁의 3대 대첩으로 여러 전투를 꼽고 있지만, 그 어떤 대첩도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은 이 명량대첩과 비교될 수가 없다.
나는 조선 해군의 역사를 그리면서 명량 해전을 끝으로 장식하였다.
사실 조.일 7년 전쟁 중 명량 해전 이후 진정한 해전은 없었다. 명량 해전에서의 패전으로 인하여 일본군의 수륙 병진책은 무너졌고, 서울 침공을 눈앞에 두고 있던 일본군은 명량 해전 4-5일 후, 서울에서 불과 200리 떨어진 직산과 보은 지방에서 남해안으로 총퇴각하였다(1597년 9월 20일경).
더욱이 불가사의한 것은 이 대해전에서 이순신 함대의 손실이 단 한 척도 없었다는 점이다. 일본측이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낸 데 비하여 우리측 희생자는 불과 34명이었다. 물론 이 해전 이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지만, 그것은 모두 명량 해전에서의 참패 쇼크로 인하여 일본의 대추장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이미 조선에 들어와 있던 왜군들이 다시 제 나라로 되돌아가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므로 결국 독안에 든 쥐를 잡기 위한 소탕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때때로 왜군의 발악적인 저항이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있었고, 또 비열한 왕 이연이 구걸하여 끌어들인 무능한 명군(明軍)들이 거드름 피우며 건방지게 전쟁의 초점을 흐리게 만들었으나, 그 모든 것도 역시 명량 해전 이후 조선 정복의 야욕을 포기하고 퇴각하려는 일본군의 탈출 기도와 그들을 일망타진하려는 조선군의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혹자는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 제독이 전사했다고도 하고 전사를 가장한 자살이라고도 하며, 또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고도 하여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이순신 제독의 생사 여부는 그의 신비스러운 제독으로서의 역량을 살피는 데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명량 해전을 통해 이순신은 제독으로서의 역량을 훌륭히 발휘하였고, 또 조국을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구해 내었다. 그 이후에 일어났던 사건들은 모두 명량 해전의 영향일 뿐이다. 나는 노량 해전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의 해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노량 해전 역시 조선을 탈출하려는 왜군들에 대한 소탕전이었지, 결코 적을 격파하고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해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트라팔가 해전의 영웅 넬슨을 이순신에 비교하기도 하나, 이 따위 망발은 진정한 제독 이순신을 모욕하는 행위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제독도 스스로 배와 무기를 제조하고, 군병들을 모아 훈련시키고, 나아가 손수 농사를 지어 군량미까지 조달하면서 싸워 한 나라 국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대함대를 전멸시킨 예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순신!
그는 진정한 조선 해군의 대제독이었다.
출처 : [기타] 블로그 집필 - mychihiro님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