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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 목회와 실제(1)
하나님 나라와 교회
말씀 : 엡 1:3-6; 2:20-22; 고전 12:12-27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성격이 무엇인가? 곧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가? 이 문제에 대한 성경신학적인 분명한 이해가 주어질 때 바른 구원관, 바른 교회관이 형성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아적인 바른 신앙관을 가져나가게 될 것이다. 이 시간에 우리는 조직신학적인 관점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성격과 교회와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영원한 작정과 계획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존재한다(참조 : 엡 1:3-6).1) 하나님께서는 이 영원한 작정과 계획 가운데 있는 하나님 나라를 이 역사 속에서 펼쳐나가시는 것이다. 이것이 이 세상 역사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 교회이다. 물론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공동체로 나타나고, 신약에서는 교회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계시하신다. 물론 에덴동산은 모형적이다. 그 실체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질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예루살렘이다(참조 : 계 21-22장).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범죄함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후 생명나무 가운데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지키게 하셨다(창 3:22-24). 이로써 범죄한 인간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나 생명에서 완전히 단절되게 되었다. 이것이 죽음이요, 영원한 멸망이다. 이것이 범죄한 우리 인간의 실존이다. 인간 스스로는 영원한 생명 가운데로 나아갈 수 없다. 이로써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경륜은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경륜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경륜 가운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의 경륜을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우리 인생들을 언약을 도구삼아 당신의 구속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 언약-창조 언약-아담 언약-여자의 후손 언약-노아 언약-아브라함 언약-다윗 언약-선지자들의 새 언약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을 통해서 당신의 구속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새 언약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곧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의 구속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약에서는 교회가 탄생하게 된다. 곧 구약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공동체로 나타나지만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로 나타나는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의 모형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날 하나님 나라의 실체 곧 교회를 나타내는 모형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교회가 이 땅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이다.
그런데 이 역사 속에 나타난 교회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 관계를 가지고 있다. 곧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 나라지만 아직 아닌 것이다.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그 나라가 극치에 이를 때까지는 자라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에베소서 2:20-22절에 보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땅에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 곧 교회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 관계에 있지만 주님의 재림 때에는 완전한 새 예루살렘으로 나타날 것이다. 요한계시록 21:1-2절을 보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새 예루살렘은 완성된 교회를 말한다. 이 완성된 교회 곧 새 예루살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성된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리스도와 혼인하여 영원토록 극치에 이른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성격을 볼 수 있다. 완성된 교회 곧 새 예루살렘이 그리스도의 신부로 비유되고 있다. 예수님이 신랑이 되시고 새 예루살렘 곧 완성된 교회가 신부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성격은 교회적인 것이다. 신랑이 하나인데 신부가 여럿이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완성된 교회 곧 새 예루살렘을 주님의 신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공동체적인 것이다.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구원이 없다는 말이 이런 의미이다. 이처럼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성격은 교회론적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이 없는 것이다. 특히 개혁교회에서는 ‘교회밖에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2)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교회가 참된 교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교회가 참된 교회인가 아닌가에 따라 우리의 구원 문제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회가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아니면 우리의 구원은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이 땅의 교회들이 참된 교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개개인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은 개인적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거기서만 머물러 버리면 안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교회적으로, 곧 새 예루살렘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한 성도의 구원의 확신은 그 개인을 통해 교회를 공동체적으로 이루게 되는 다른 성도들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구원의 본의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게 된다. 다시 말해 구원의 본질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상 가운데서 개인적으로 불러내셔서 함께 더불어 천상적 신분의 소유자로 삼아주시는 가운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연합적으로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의 성격에는 ‘더불어 교회를 이루는 구원’이라는 신학적 명제가 성립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구원은 개인적으로 받지만 이후 구원을 누리는 삶으로서의 신앙생활은 신앙고백자들과 함께 하나의 지역교회를 이루는 가운데 공동체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온 교회가 주님의 거룩한 신부로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모여진 회중으로서 교회공동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천상적 보편의 교회를 적극적으로 지향하게 될 뿐 아니라, 세상 가운데 침노해 들어온 현재적 하나님 나라로서의 정체성을 구체적으로 현시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각각의 지역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본질에서 하나님 나라로서 우주적 보편의 교회를 총체적으로 이루는 일에 함께 상합하고 연락하는 것으로 존재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구원의 성격을 개인적인 것에 머물러 버린다면 우리의 신앙에 많은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곧 바른 교회관이나 바른 구원관, 바른 신앙관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 교회와 신앙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오늘날 이 땅의 교회들을 볼 때 성경적인 구원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 못함을 많이 본다. 곧 한국 교회가 너무 개인구원을 강조하다 보니 신앙이 이기적이고 반 교회적으로 흘러가는 것을 본다. 참으로 안타깝고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는 멀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2:27절에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했다. 또 에베소서 4:16에 보면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서 2:20-22절에 보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했다. 이상의 말씀에서 볼 때 우리의 구원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교회라 함은 단순히 십자가를 세워 놓은 일정한 건물 안에 모여 있는 소위 일단의 교인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의 말씀으로 거듭난 이후 하나님의 말씀을 총체적 계시관에 입각해 지속적으로 배우는 것을 일상화시키는 가운데, 배운 바의 내용을 생명으로 붙들고 살아감으로 실제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아 누리는 이 시대의 남은 자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교회를 이룬다는 성경적 의미가 이렇다. 그저 종교적 열심이 있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기독교회란 이름하에 교회로서의 외적 요건을 갖추고 여러 가지 기독교적 행사들을 추구해 나가는 데서 교회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란 말씀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교회란 기독교의 외양을 갖춘 외부적 필요충분조건의 충족으로부터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내적이고 본질적인 요소의 충족이 자연스럽게 외부적 형식을 띠고 나타나는 것으로 세워져야 한다. 이렇게 볼 때, 과연 작금의 우리 교회가 이런 성경적 본질과 원리에 따라 세워져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 주변에서 이런 식으로 성경적 본질과 원리에 근거해서 세워지고 자라가는 진정한 의미의 교회가 얼마나 될 것인가에 대해 심각히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완전하고 온전한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죄성이 현실적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주장하고 있는 한 지상에 완전한 교회란 본질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다만 부족하고 결핍이 있고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에 전 성도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성경적인 답변으로 원칙을 깨닫고 이를 실질로 추구해 나간다는 의미에서 ‘이상적인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소개된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향해 말씀하신 주님의 종말론적 선언에서도 보면 교회적 본질의 추구를 강조하시고 요구하심으로 신앙적 일탈을 책망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셨지 결코 완전을 강요하지 않으셨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우리의 연약한 성정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결같이 각 지역교회를 향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고 반복해서 말함으로 교회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계신다. 여기서 교회를 향한 성령 하나님의 말씀이란 다름 아닌 주님의 말씀과 동의어로서 곧 교회란 무엇이며,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정당하게 답하는 것으로서 ‘청종’ 곧 듣고 순종하는 것을 가리킨다.
신자가 어느 한 교회에 출석하는가 하는 문제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교회를 이루는 구원’이라는 신학적 명제 하에서 볼 때 가히 구원론적인 근거로 작용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자들은 한결같이 교회를 ‘신앙의 어머니’란 관점에서 이해했다. 다시 말해 한 신자가 구원을 받고 계속해서 말씀 안에서 자라가는 일은 일종의 영적 양육의 의미를 지니는 바, 이는 다름 아닌 ‘바른 교회’의 보살핌을 적극적으로 받는 사실이 전제되는 데에서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의 본질을 깨닫는 일은 원리상 교회를 이루는 일보다도 우선하게 된다. 이 시대에 교회의 보편적인 의미가 단순히 예수 동호회의 성격과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볼 때 안타까운 심정을 넘어 고통스럽기조차 하다. 인생이 보기에 이럴 진 대 하나님의 심정은 오죽 하겠는가? 바른 교회관의 정립이 어느 때보다 심각히 요청된다. 이는 바른 복음관, 바른 신앙관, 바른 구원관의 정립과 결코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교회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져 감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그럴 때 바른 복음관, 바른 구원관, 바른 교회관, 바른 신앙관이 형성될 것이다. 특히 교회아로서의 바른 신분인식을 통해서 교회답게 생각하고, 교회답게 행동하며, 교회답게 결정해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서 교회다움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구원의 본질이 잘 나타나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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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묵시의 세계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있다. 이 묵시의 세계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주기도문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의미가 이런 의미이다. “묵시의 세계와 역사의 세계”는 창원한결교회 홈페이지에 있는 손재호 목사의 글을 참조하라.
2) 다음 강의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심도 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강의자 : 손재호 교수
*본글은 2024년 8월 16-17일에 부천개혁성경신학교 2024년 봄학기 집중강의 겸 부천개혁교회 제직교육을 '개혁교회의 목회와 실제'란 주제로 실시한 것입니다.